믿음의 씨앗을 심자!

(요 12:23 – 33)

한국의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20년 남짓 되었던 1903년 5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4백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부인 글짓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공개적 여성 글짓기대회라 사회적인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때까지 글을 읽거나 시를 짓는 것은 양반 남성선비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공개적인 자리 그것도 남성들을 방청객으로 놓고 글을 짓고 발표한 것이다. 이날 시제는 ‘화덕’이었고 운은 ‘게 네 세’였다. 그날 지은 많은 시 중에 네 작품이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회중 앞에서 낭송되었다(신학월보 1903.11). 그 중 전씨 삼덕의 시이다

찬화덕에 불씨두게
석탄불노 덥게하네
우리마암 차고차나
성신불노 덥게하세

김씨 또라의 시 역시 다음과 같다

맘이찬자 이리오게
천국화덕 여기잇네
예수천하 화덕되니
온화하고 더움일세

교회 여성들은 조선시대 민중가사의 전형인 4.4조로 시를 지었으며 시제로 주어진 화덕은 단지 방안의 공기를 데우는 기구로 끝나지 않고 마음과 영혼을 덮혀주는 ‘성신 불’을 담은 ‘천국화덕’ ‘예수 화덕’이 되었다. 교회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며 얻은 은총을 노래하였다. 이런 은총을 노래하는 것은 초기 교회 여성들의 신앙고백이 되어 전도의 가장 큰 동기가 되었었다. 상기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여 ‘찬 화덕에 불씨’를 노래함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 봉건사회의 여성 한계를 깨친 데 성공한 인물이 ‘전삼덕(1843-1932)’이다. 그는 평안도에서 여자로서는 제일 처음 예수를 믿은 분이다. 평양에 들어온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남편의 외도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때 ‘한 번 믿어 볼까’ 하며 팔십리 길을 교자를 타고 교회(제임스 홀이 개척한 남산현교회)에 간 것이 신앙여정의 첫 걸음이었다. 그 뒤 매 주일 마다 빠지지 않고 그 먼거리를 교자를 타고 혹은 때로는 걸어서 교회를 나갔다. 드디어 스크랜턴 선교사의 권유로 한국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휘장 세례로 선교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남자에게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방 안에 휘장을 치고 구멍을 뚫어 머리만 내밀고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남편이 승지 벼슬까지 하였던 부유한 양반집 부인 출신으로 예수를 영접한 후, 남편을 비롯한 전 가족을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하였고 환갑의 나이에도 교회의 부름을 받아 전도부인으로 함종에 파견, 심한 핍박 중에도 많은 열매를 맺었다. 세월이 지나 몸이 더 늙자 본 집에 돌아왔으나 역시 본동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힘쓴 결과 이백여명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다. 일생 그를 통하여 믿은 전도의 열매가 6백여명이나 되었다. 전삼덕의 회고록 “내 생활의 약력”은 노블 부인이 편집한 “승리의 생활”(1927년)에 실려 있다.(이덕주, 한국영성새로보기)

매일말씀나눔

2018. 6. 4 – 6. 8

1662년 성공회 기도서 개정판의 중심 원리를 설명하는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공예배서가 최초로 편집된 이래로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극단과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영국 성공회의 지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지헤를 주시며 이를 교회의 사역뿐 아니라 사회, 윤리, 정치 영역에도 적용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들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들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가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우리는 과거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만큼 현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됨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건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뗐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행2:46).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복음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집회로 성전의 형식적인 예배를 보완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와 가정에서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교제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이 둘의 결합은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좋아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교인들은 가정 예배의 자유스러움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활기차고 자발적인 참여를 좋아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을 중시하는 예배의 장엄함과 경외감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 후에 기독교의 순회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한번은 힌두교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는 어느 불가지론자 교수가 그에게 시크교에서 얻지 못한 것 중 기독교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다 싱이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는 “그거야 나도 압니다. 이전에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찾았느냐 말입니다.” 라고 답답하듯이 말했습니다. 이에 선다 싱은 “내가 찾은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초점이 예수 당신께 맞추어져야만 비로서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은 어떤 것이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가꾸어갈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틀에 놀라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께 바쳐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보편화된 기도 공식은 우리를 ‘중보’라는 개념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활동들을 직접 취하시지 않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하시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활동하셔야만 하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온 한 가지 근본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 구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나님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는 다리들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무한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차이보다는 유사성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을 통해 그분의 합리성을,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모습도 없으시고 처음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분의 상상력의 발현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그분을 담기는 고사하고 그분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

매일말씀나눔

2018. 7. 2 –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구속의 일을 하나님은 ‘단번에hapax’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해 히브리서 저자가 즐겨 쓴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유다서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를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도 단번에 된 일이고,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단번에 된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도나 그분과의 관계 수준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해나 관계를 가능케 하고자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와 구속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하신 것 이외에 더 계시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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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의로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잠3:5-10)

‘일터 행전’을 쓴 방선오 형제의 간증입니다. “내가 교육팀장을 맡고 있을 때 모시던 부사장님은 회사 내에서 실세로 통하던 분이었다. 그 분에게 잘 보인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모두들 실세 부사장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같이 점심식사 하는 자리에 부름 받아 가는 것조차 뿌듯하게 생각했다. 나 역시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여서 그분에게 잘 보이긴 해야겠는데, 별로 친하지 않아 걱정이었다. 원래 손을 비비거나 아부하는 데 달란트가 없어 겉으로는 안달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뭘 해서라도 잘 보여 연말 인사 발령에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그 부사장님께 의지하려는 이런 방선오 형제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큐티 시간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데 부사장님께 복음을 전하라는 생각이 난데없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부사장님께 뜬 구름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사장님은 청년시절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지금은 교회와 담을 쌓고 살면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이기에 신앙 이야기를 잘못 꺼내면 그나마 갖고 있던 그 분과의 얄팍한 관계마저 흔들릴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이러 저러한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했습니다. 자신이 쓴 책을 포함해 몇 권의 기독교 서적을 사 들고 부사장님 방에 들어갔습니다. 업무 보고를 할 일도 별로 없었기에 그냥 책 선물 좀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다시 교회 다니시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다행히 부사장님은 좋다 싫다 내색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방선오 형제는 복음은 전해 후련하였으나 괜한(?) 짓으로 연말 승진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찜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말, 방선오 형제는 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 얼마 후 실세였던 부사장님은 어떤 문제로 갑작스레 회사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든 인사 발령의 권한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몇 년 후 그 부사장님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더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으면 하는 자책감과 동시에, 유한한 사람의 빽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빽을 믿고 살아야 함을 다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일터 행전, 119-120)

매일말씀나눔

2018.6.18 – 22

히브리서 1장 1절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자신을 알려주신 그 계시는 형태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부분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인 계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단계별로 조금씩 자신을 계시해 오셨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들을 기초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런 드라마의 대단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은 이런 완성을 가져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들과 수식이 그분께 주어지는데, 우주와 관련해서는 ‘만유의 상속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2절) 지금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3절) 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가 처음부터 대행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어느 날 정당한 유업으로 그분께 귀속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분은 우선 ‘아들’로 불리웁니다. 그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높은 이름이요 그들 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입니다(히1:4).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3절)이십니다. 둘 다 강력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한편으로는 햇빛이라는 외부 세상에서 또 한편으로는 문서와 밀랍과 도장이라는 내부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단어와 이미지로 표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두 가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태양에서 계속 비추는 햇빛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니케아 신경에는 이것이 ‘빛에서 난 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밀랍에 찍힌 도장처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이 두가지 표현은 서로 합해져 의미를 보완해줍니다. 즉 햇빛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강조하는 반면, 밀랍에 찍힌 도장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1장 3절에서는 아들이 그 존재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동시에 그 인격에서는 아버지와 구별된 자(‘그 본체의 형상’)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고(히2:14) 우리처럼 고난과 유혹을 경험하시고(2:10,18)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히2:9,14) 분이시지만, 바로 이분이 영광스럽고 유일무이하신 분, 곧 아들, 광채, 아버지의 형상, 창조주, 만물을 붙드시는 분,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친숙한 인간의 정황 안에서 그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도 되시기에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인성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본체와 목적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권한을 주시며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직접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최고 목표로 ‘구하고’ 그 나라의 성장을 최고선으로 삼아 거기에 우리의 삶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봅니다. 구약의 권위에 겸손히 복종하시고, 구약의 근본 원리들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시며 구약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혼잡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또 우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존중하시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우리는 죽음의 실체 앞에 분개하여 ‘호령’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여 쫓아내시고, 위선자들에게 분노와 경고를 발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자신에 대해 기록된 고난의 길을 비껴가지 않으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를 맛보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천하의 권세를 주장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명하시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분이 행하신 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알아보게 되는데, 이는 그분의 태도와 행동 가르침 그리고 표적들이 하늘 아버지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은 가르치기 위해서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죄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두 가지 일에서 모두 대행자이며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히1:3)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빌려왔습니다. 사실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신 그분은 아론보다 크십니다. 그 제물은 황소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어린 양도 아니고 바로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올 실체,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리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희생양이라는 상징을 담대하게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9:28)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히10:4),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3:14-21

에드워드 톰슨은 뉴욕치안판사였지만 법보다 믿음이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만난 메리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당시 메리는 55살의 술주정뱅이 여자였다. 톰슨 판사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몽롱한 눈으로 법정에 선 메리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온갖 범법행위를 하는 통에 무려 53번이나 재판을 받았고 6번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54번째 선고를 받기 위해 톰슨 판사 앞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리가 전과 달리 선처를 부탁했다. 메리는 한 노신사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절히 호소하는 메리의 모습에 톰슨 판사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보고 관찰을 선고했다. 단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께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메리는 변화되었을까요? 아니면 더 풀어진 모습으로 다시 톰슨 판사 앞에 나타날 것인가? 톰슨 판사는 재판에 임할 때마다 혹시 메리가 다시 잡혀오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봤다. 그러는 한편 매주 메리의 보호관찰관과 상담했으며, 메리가 다행히 교회 예배에 계속 출석하고 있으며, 교회 식구들과도 잘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톰슨 판사가 외부 업무를 다녀왔을 때, 법원 직원으로부터 그의 부재 중 업무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메리가 왔었다는 말을 듣자 톰슨 판사는 매우 실망했었지만 메리가 잡혀 온 것이 아니라 뉴욕을 떠나가게 되어 톰슨 판사에게 고맙다며 인사하고 싶어 왔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는 그 노신사와 결혼했고, 메리의 보호관찰관은 메리의 바뀐 모습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법원 직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메리는 이제 이전의 메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 보면 대개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지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리처럼 통제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든지 간에 그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 보면, 대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삶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메리는 이전 메리가 아니에요, 결단의 순간 116-118).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거룩한 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어 모든 사람은 범죄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에 빠진 인류를 불쌍히 여겨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신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들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요3: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