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이웃인가?

오늘부터는 존 스타트 목사님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으며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가 역사상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종교적 사기꾼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등 형편없는 말을 하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좌절한 슈퍼스타나 서커스의 어릿광대 등으로 묘사하는 풍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거침없이 네 주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심판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위로의 그리스도이지만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부인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화에 대한 명령에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사역을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조화가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섬김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등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봉사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이런 물질적인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에만 집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복음 전파에 큰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하신 선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동기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합니다.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딸로 하여금 어머니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데는 눈을 감기우고 오직 어머니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라는 계책을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주는 대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이 처한 육체적, 환경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치신 개인과 무리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자 그 문둥병자는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인 성 근처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인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깊이 위로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3-14) 하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실 때도 그 동기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신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수요예배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공부를 더 하려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민되는 것은 유학을 갔다가 오면 한국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거나 연구원에 종사할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미리 자리를 준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을 붙들어 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자매가 유학을 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유학을 갔다 와서 과연 주님께서 자리를 준비하셨는지는 더더구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고, 심지어는 점집에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확실성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고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의 손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공자도 하늘과 천명을 믿고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송나라 대부인 환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시점에도 태연하셨는데 제자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물으니 “하늘이 내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어찌하겠는가?” 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전부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로 살되 지혜를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2)

성경본문: 누가복음 7장 24 – 28

주님은 침례 요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으나 곧 이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는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명과 특권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끝인 침례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 분의 길을 예비할 특권과 사명을 가졌으며 이 이상의 큰 특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하자 가장 작은 자라도 종의 형체로 오셔서 섬기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내주 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침례 요한보다 훨씬 큰 특권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평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주셔서 당신이 시작한 하늘 나라를 세워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그를 전파하여야 합니다.

매일큐티

2016. 9.12-13

그리스도인의 종으로서 부름받은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직업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4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로 그의 말을 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직업(직업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적 위치일 수도 있음) 속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의 틀 속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상전을 섬김으로써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 여기에는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정신입니다.

 

베토벤은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옆집 문을 연이어서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사람은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또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그리고 다시 네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네 번의 두드림이 그의 풍부한 음악적 재능 속에서 네 박자의 멜로디로 변해서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유명한 5번 교향곡 운명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곡에는 네 박자 멜로디들이, 같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다양성을 띠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매순간 강한 두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우리 삶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과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기꺼이 자족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1)

성경구절: 누가복음 7장 18-23

 

내용

침례 요한은 옥에 갇혀서 그리스도의 일들을 보고 받고는 제자 둘을 보내어 주님의 정체성을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이 질문은 예수께서 과연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야인가 여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기적으로 고치고 계셨기에 그들에게 보고 들은 바를 요한에게 보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것은 오시리라는 하나님이 오시면 이런 일이 발생된다는 이사야 35장의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침례 요한의 경우처럼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하심에 접하는 길 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다 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심판시 주님께 그 믿음을 부인당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하여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의 질문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의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하심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본받되 그리스도께 실족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2016. 9. 5 9

 벤 페터슨은 어느 여름 포틀랜드에서 온 내과 의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의사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랐으며 시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 페터슨은 그에게 왜 하필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틀랜드를 근무지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서북부 태평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든지, 그곳의 생활 수준 때문이라든지 또는 그곳이 자기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가 시카고에 있을 때 어떤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는데 그 신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포틀랜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애기를 들은 후 그 의사는 자기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고 포틀랜드를 의사로서의 첫 근무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소명이 틀리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또 우리의 경우에 소명이 직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업이 소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통상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느로서는 실패했지만 소명을 수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속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위해 결코 가족을 희생하지 않으며,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업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소명을 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 삶 가운데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직업들의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즈는 소명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곻하도록 허락도 하시는데 그 성공은 복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허락하심으로 무엇을 시험하신다는 말일까요? 바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순수성입니다. 소명보다는 직업을 추구하면서 자기 둥지에 더 많은 깃털을 모아들이려는 새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는가?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면 우리의 소명 의식을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 속에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때 많은 번영과 이익, 명예등이 우리에게 주어지곤 합니다. 물론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모든 번영과 이익 그리고 명예등이 다 쓸모없는 것이므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일을 잘한 대가로서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이나 보상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소명을 성공에 대한 모든 세상적인 척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소명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자족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현재 가진 직업 안에서 자족할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쓰셨는데 이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사도는 언제나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생과 계명

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의미로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의미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정화 시키고 많은 표적들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오시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으셨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니고데모라 하는 산헤드린 멤버 중 하나가 비밀리에 주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 니고데모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구성분자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영생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가지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율법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매년 드리는 황소와 양들의 피로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히10:3-4).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일을 행하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방법이 구약이 아니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이 바뀔려면 자신이 죄인 것에 대한 회개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새겨주십니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10:16-18). 그것은 마치 법들을 서판에 새겨 공포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치관 내지 생각들은 육신의 일들이 아니라 영의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오직 먹고 마시고 본능대로 살고, 사람들 사이에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되자 우리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 특색은 영원한 소망을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죽여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중생이자 거듭남의 뜻이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굳은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는 이렇게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8-15).고 하심으로 중생의 문제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사랑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없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사실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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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그리스도

성경본문 :누가복음 7장 11-17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인 성에 들어가시던 주님은 죽은 아들 때문에 매우 슬피 우는 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관 앞에 서서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살아난 청년을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이른바 기적이라고 일컫는 일들의 한계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마지막 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할 것의 예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인데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씻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감사한 우리는 과거의 죄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라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매일큐티 | 2016.8.29 – 9.2

‘소명’은 일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속에서 만족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만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들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클레시스(klesis)’가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백성이며, 소명을 가진 백성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로서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가진 단체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의미에서 여러 거지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석공, 건축사, 심리학자, 자동차 세일즈맨, 관리인, 가정주부등에 종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사용하라”(고전7:21). 이 말은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주차장에서 밤 근무하는 일을 하다가 부름받았느냐? 지금 너의 일이 싫으냐? 염려하지 말라! 만약 네게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꾸도록 하라. 그러나 직업을 바꾸는 데 몰두한 나머지 네게 있는 소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수행할 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나 이사회의 이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모두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고전7:22).

 

소명은 하나이지만 직업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들은 소명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적 위치나 환경들이 소명 때문에 손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도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소명에 비해 아주 미약합니다. 사실, 각각의 직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직업을 이끄는 주된 원리이지만 우리가 현재 담당하는 직업은 그런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달성하려는 목적은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출석하던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받기를 “체신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비결이라니요? 주일학교야 말로 저의 비즈니스인걸요!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지요.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그는 진정으로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불확실성과 우리의 믿음의 삶

사무엘상 16:1, 8

사무엘 상 16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을 치고 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와 양과 나귀를 진멸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계속 슬퍼하니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르셔서,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다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군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는 양 라마에서 베들레헴으로 약 15킬로미터를 가서 베들레헴의 장로들을 만나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청하였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인상이 깊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어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이렇게 초대한 7명을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초대받지 아니한 말째 아들인 어린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취하시는데 어떻게 언제를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능력과 선하심을 굳게 붙잡도록 하십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사무엘이 어렸을 때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다윗입니다. 우리는 이 어린 다윗이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될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계속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큰 일이 당장 일어난 것은 아니고 다윗은 계속 양을 쳤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25킬로 떨어진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어떤 누구도 당하지 못하였던 골리앗 장수를 물매돌로 이긴 다윗은 사울의 총애를 받아 부마도 되고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으면 이제 곧 다윗이 왕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를 뒤엎고 다윗은  사울의 적이 되어 먼저 죽인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도망을 가고, 이어 다시 유대로 들어와 부모님은 모압 왕에게 부탁을 하고 자신은 유대 광야에서 약 10년을 도망다니면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사울이 계속 다윗을 수색하고 군대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두 번 시험합니다. 만약 사울만 없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부하들의 기대를 뒤로 한 채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두 번을 만나 사울을 살려주고 회개하는 사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시 도망을 다니다가 최후로 불레셋의 진영으로 도망을 갑니다. 거기서 약 1년 3개월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위험을 무릎쓰고 유다를 위하여 전쟁을 합니다. 만약 블레셋 군주가 알았다면 다윗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하여 길보아 산에 죽으니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이어 수년이 지나자 나머지 지파도 복속되어 드디어 다윗은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이야기사 사무엘 상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이루시는 방법과 때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시기와 상황을 분별하는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가져다 주며, 삶을 신중하게 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며, 우리의 믿음의 순도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성공하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야 자아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우리와 깊은 신뢰와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고자 하시며,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을 만날 때 그때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주실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아시고 그 중심을 굳게 하나님에게 두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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