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7장 1-10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이방인이며 로마 군대의 장교도 아닌 선임하사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직무에 정통하여 군대내에서 명령이 무엇이고 복종이 어떤 것인지 전투를 하면서 직접 체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군대의 생명은 명령과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매우 가치있게 여기는 종이 중풍병에 걸려 심히 괴로워 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중에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갔고 오직 주님이 원하시면 사랑하는 종의 중풍병은 금방 고치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믿음은 결국 주님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 근거는 군대에서의 상식을 영적인 세계에 적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메시야이면 중풍병에도 주인이시므로 당연히 말씀만 하면 종 처럼 병이 말을 듣고 물러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의 일터에서 터득한 인생의 상식을 영적인 세계에 적용하십시요. 기도 제목을 정할 때도 상식을 발휘하십시요.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야 될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인내하면서 선하신 주님을 기다리십시요. 그는 신실한 주님이십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이 될 것입니다.

1.    백부장은 예수께서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     백부장은 생각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3.    백부장에게는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큐티

2016. 8.22 – 2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일이 죄와 죽음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실까요? 그분은 제일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타락한 일을 구속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죄로 인한 결과를 가리켜 즐겨 사용하였던 말은 “멀어지다 alienated”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서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골1:21-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일을 타락시킨 원인, 곧 죄악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결과로 우리가 일과 씨름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실 것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원래의 하나님의 의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쉴까에 대해, 즉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 고 하신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삶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는 말씀은 “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먹이고 입힐 책임을 질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책임을 지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오직 한 가지 책임만을 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벤 패터슨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우리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염려해 본 적이 없으며, 집세나 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은 더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직 어린아이다운 것,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치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할을 부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일이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일이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채워 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길보아 산에서 왕 사울이 죽다

(삼상31:8-10)

다윗이 블레셋 다섯 방백 중 하나인 가드로 망명하자 더 이상 왕 사울이 쫒기를 그쳤으나 이제는 블레셋과의 마지막이자 아주 중요한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블레셋은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아벡으로 군사력을 집결하여 수넴(길보아산 북서쪽 15킬로미터)에 진쳤고 사울은 길보아산(갈리리바다 남서쪽45킬로에 위치)에 진 쳤다(삼상28:4). 결국 이들은 이스르엘 평원에서 접전을 하여 사울은 패배하고 길보아산으로 퇴각하다가 이 산에서 아들 셋이 죽고 본인은 자살하고 만다(삼상31:1-6). 사울이 패배한 이스르엘 계곡은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는 가나안인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진을 쳤다가 훈련받지도 못하였고 무장도 불충분한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한 곳이었다(삿4). 또한, 기드온은 길보아산 기슭에 있는 하롯샘에,  상대방  미디안은 북편의 모레산 앞 이스르엘 계곡(길보아산에서 약10킬로) 에 진을 쳤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불과 300명의 군사로 수 많은 미디안 군대를 이겼던 곳이다. 이스르엘 계곡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물론 국가 안보의 면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비옥하고 충분한 습기로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평야였고, 넓은 평원내에 높낮이가 심하지를 않아 여행하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하였기에 고대 상인들이 동서 남북에서 와 집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제간선도로가 이지역을 통과하였고  이 계곡을 지배하는 자가 이 주변의 국가들의 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과 무역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방의 문제였다. 만약 이 지역을 상실한다면 사울 왕국의 북쪽 삼분의 일은 차단될 것이고 블레셋은 계속하여 이 계곡을 타고 남진하여 사울 왕의 다른 지역도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사울왕은 엔돌의 무당에게 묻는 등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한 불신앙과 반역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결국 그는 죽고 그 시체는 길보아 산에서 동쪽으로 약 10킬로 떨어진 벧산이라는 이스라엘 경내 블레셋 점령지 성벽에 못박혔던 것이다(삼상31:8-10). 이런 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끌 능력있는 왕을 원했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원하였다. 사울은 이 두 요구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8-89 참조).

tumblr_lrk8v8GykH1qcg3zwo1_r1_1280Pieter Bruegel the Elder, The Suicide of Saul, 1562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6

성경본문: 누가복음 6장 43-45

좋은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을 통해 주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고자 가르치는 우리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여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된 다음에야 그런 행동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을 비유하고, 열매는 행위 특히 우리의 언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무슨 종류냐의 여부는 그 맺는 열매로 알 수가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됨됨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나무나 찔레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을 비판하면 덕을 세워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여 일관되게 선한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여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좋은 모범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도 사랑하여 찔레와 가시나무 같은 비판을 삼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맺고 있는 삶의 열매를 주의하여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SBC매일큐티 8/8-12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 대가로 보수나 수익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보수나 수익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잘못되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와 수익은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며 일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

미국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어느 회계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고용하는 미국인 직원들은 근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전화 한 번 받거나 걸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업무만을 한 뒤 대신 오후 5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종이 울리면 글자를 쓰다가도 볼펜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일과 여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는 일을 여가를 위해 서둘러서 끝내 버려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이와 휴식은 지친 삶을 재충전해 주는 생활의 속도나 리듬의 변화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이러한 자세, 즉 여가의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태도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오랫동안 일해 온 대가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롭게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또 그것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퇴를 그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잠시 여유를 주는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은퇴는 총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벤 패터슨의 장인과 장모님은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의 양과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돈이 여유가 있어 일찍 일에서 은퇴하여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내와 함께 전 미국을 침대차를 끌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면 80대의 두 할머니는 간호사와 의사로서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로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값진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이 문제는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일의 본질이 원래 의도에서 타락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살도록 하셨지, 살기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은 살기 위해 즉, 생계를 잇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고용주 혹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되어 말합니다. 이를테면 낮은 봉급, 열악한 작업환경, 한심한 상관들 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대답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일의 본질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한계 내에서 만족

(빌립보서 4:11-14)

여러분 무엇을 위해 일하십니까? 돈을 위해 일하면 돈이 왔을 때 그만 삶의 목적도 잃어버리고 돈을 우선시하게 되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기도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다가 40억원 로또에 당첨된 경남 양산의 B씨(60)는 세금을 제외하고 27억 3천만원을 수령하였습니다.  B씨는 이미 이혼을 한 상태이고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로또를 수령한 지 며칠 지나 여동생등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여 어머니 A씨(79)를 비씨가 모시라고 성화였지만 이미 혼자된 몸으로 남자 혼자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우니 양로원으로 모시자고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간에 표면적으로는 노모 봉양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변에서는 B씨가 이혼한 뒤 A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돌봐주었는데도 아들이 당첨금을 제대로 나눠주지 않은 게 갈등의 원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봉양과 로또 등이 얽혀 심한 갈등을 빚자 B씨는 형제들ㅇ게 행방을 알리지 않은채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아파크 두 채를 사서 이사를 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A할머니는 딸 사위 5명과 함께 수소문 끝에 지난 5일 오전 10시 40분쯤 B씨의 아파트를 찾아내 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 당하였습니다. 화가 난 할머니와 사위는 열쇠수리공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B씨 측이 112로 신고를 하여 경찰이 출동하였습니다.아들의 집안에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 A 할머니는 결국 5일 양산시청을 찾아가 공개적으로 아들을 패륜아라고 비난하는 피켓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할머니와 두 딸, 사위등은 지난 7일(2016년 8월 7일) 오후 2시쯤에도 아들 아파트를 다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들 측은 이번에도 소란을 피운다며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출동하여 할머니 등을 설득하여 겨우 해산시켰습니다. 이웃들은 이에 대해서 “결국은 당첨금 배분 문제 때문에 생긴 갈등 아니겠느냐” 추정했습니다. 또 다른 이웃은 “큰 돈이 생기지 않았으면 이런 극한적 갈등은 없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대조적으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 대학교 총장이었고 1990년대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1977년 총장으로 부임하여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중 벤치에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집에 가서 커피도 끓여 마시고 잔디로 깎아 주는 등 친구로 2년 동안 지냈습니다. 어느날 출근 길에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노인의 집을 방문하니 노인이 전 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하자 유족은 유서 한통을 주었으며 그 유서를 받고 레이니 총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노인은 코카콜라 회사의 회장인 우드러프씨였는데 자기에게 1.5억 달라를 유산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다가 갔다는 사실, 전혀 회장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은 사실, 자그마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거액을 희사한 사실에 또한 놀랐습니다. 그는 이 돈을 전부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1990년 총장을 마치자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하여 한국과 미국의 관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낮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높은 지위나 형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것을 주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숙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생축과 같이 십자가에서 버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우리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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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http://mpactpr.com/getpaidfaster/99u-money-illustration/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4

본문 : 누가복음 6: 39-4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에 관하여, 우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맹인으로서 오직 맹인들의 인도만을 받을 뿐이었고 그 결과는 구덩이에 빠졌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과 진화론적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는 자들을 주님은 제자라고 부르시는데 제자는 결코 선생보다 높지 못하지만 충분히 훈련을 받으면 선생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선생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가지 장치를 우리 삶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한편,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얼마만큼 도달하였는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섬김의 자세인지 아니면 우리를 높이려는 비판과 정죄의 자세인지 우리 스스로 살펴서 삼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를 닮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형제의 허물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누가복음 12:28-32

영국의 정치학자인 액튼 경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진경준 검사장의 여러가지 권력형 부조리의 형태를 접한 우리는 왜소하게 느껴집니다. 게임으로 유명한 넥슨이라는 회사의 주식을 무상으로 취득하여2015년 처분 120억원이라는 시세차익을 얻고 계속해서 검사장의 자리를 지키다가 이런 물의가 나타났습니다. 신문에 보면 진검사장은 주식 취득과 관련하여 여러 번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돈으로 주식을 샀다고 했다가, 그 후에는 말을 돌려 처가집 돈으로 구입했다고 하였으나 처가가 그런 돈이 없고 처가에서 흘러나온 정황조차 없자, 나중에는 서울대 86학번 동기인 김정주씨가 대표로 있는 넥슨 회사로부터 빌렸다고 말을 돌렸다.  이 둘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아무리 동창생이라 하더라도 넥슨 사장 김정주씨가 대가없이 그런 돈을 주고 특혜를 주었겠냐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권력의 비호를 받기 위해 계속 “관시”를 맺어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진 검사장이 인정한 주식추득 자금에 대한 뇌물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상태라고 합니다. 어떤 블로그에서는 “배움의 목적이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수단”인 것 같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런 문제가 요사이 특히 심합니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여러가지 사건은 제쳐두고 이번에는 일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요한 동경교회, 즉, 요도바시교회로 잘알려진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놓인 분은 김규동 선교사님입니다. 신앙간증이 담긴 책 “하나님은 불모지에서 일하신다”를 읽어 보면 미원에 입사하여 4년차 되던 해 일본으로 2년간 연구생으로 파견을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 기회를 틈타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부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일본 센다이 교회 목사님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 일본선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김규동 선교사님은 3가지를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중 가장 어려운 제목이 일본에 평신도 선교사 비자를 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것까지 일본교회의 도움을 받아 나오게 되자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규동 선교사님은 일본 요도바시교회의 한국부를 맡아 16명의 멤버들과 함께 열심히 신학공부하면서 전도하고 가르치니 그 교회는 일신우일신하여 드디어 일본의 최대 교회로 성장 2014년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천명이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교회문화를 가지게 되었고 김규동목사님은 우상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존경과 권위를 배경으로 성추문이 일어났습니다. 그 원인에는 1998년 일어난 극좌파에 의한 테러로 몸이 많이 상하였기에 맛사지를 여성 사역자로부터 받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것도 미혼의 젊은 여성에게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한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그만 실족을 하고 말았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결국 진경준 검사장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진검사장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자 애를 쓴 결과 국가에서 부여한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 것이며. 김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 애를 쓴 결과 하나님이 주신 교회 성장과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태도와 주님이 가지고 계신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니까 사기의 문제나 권력 남용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믿음을 본받아야합니다. 주님은 창세전과 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육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본받아 종말의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가치가 뒤바뀝니다. 여기서 권력을 잡고 웃는 자들은 거기서는 슬피 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것 때문에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여기서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은 죽는 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슬피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인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3

누가복음 6:37-40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본문의 전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정죄하지 않고 대신 용서를 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비를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와 적대적인 사람들, 우리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할때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되 진리는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면 친구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도 관대하게 우리의 것들을 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칭찬과 보상은 이 세상에서 돌보심으로 나타나다가 마지막 날 부활시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엄청난 하늘의 유업을 받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으며, 심판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진리를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용서를 받은 자들이므로 용서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3.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므로 관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