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3절

어떤 사람을 회사의 대표이사로 선출하였습니다. 대표이사는 회사를 대신하여 지출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당연히 회사의 발전을 위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수표발행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신의 부인의 자동차로 폭스바겐을 사주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겠습니까? 상법이나 민법은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대표권 남용에  관한 규정을 두어 폭스바겐 회사와의 거래를 무효로 할 것이나 아니면 유효한 상태로 두고 주주가 대표이사에게 손해배상과 책임을 묻게 할 것인가의 여부에 초점이 두어져 다루고 있습니다. 정답은 거래 상대방이 악의 즉, 대표권 남용의 사실을 알고도 거래를 하였다면 폭스바겐을 판매한 것을 회사가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선의 즉, 그런 사실을 모르고 거래를 하였다면 판매사실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여 당사자와 거래의 안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반면 형법에서 초점을 두는 것은 그 행위가 업무상 배임죄를 형성하느냐의 여부이며 그 요건은 형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업무상 배임죄를 형성하면 감옥에 가서 그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태와 사건을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오는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건을 보내시고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계시는지 파악을 해야 우리가 그런 테스트를 통과해 나갈 수 있은 것입니다.

20년 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장립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화원을 운영하던  이집사님은 장로에 떨어지고 자신이 어릴 때 교회로 인도하였던 권집사님이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이집사님은 여러 번 교회를 위하여 애를 썼고 예배를 위해 화분도 갔다가 놓는등 노력을 하였지만 교회에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집사님은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소문에 들으면 장로로 자신이 피택되지 못하고 자신이 인도하였던 권집사님이 피택된 것을 승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반면 김제 금산교회는 자기 집안의 하인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교회가 분열되기는 커녕 더욱 아름다운 선례를 남겼습니다.  김제 금산교회와 조덕삼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데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 놓고 자신 부부와 가족 및 일꾼 전부 교회로 나가 주님을 믿었습니다.그 중에는 마부 이자익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1906년 마부 이자익과 함께 침례를 받고 집사로 임명이됩니다. 더 부흥하자 마침내 교회에서 장로를 뽑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인들의 투표 결과 부자이고 교회 터를 제공하고 아주 헌신적이며 나이가 15살 많은 조덕삼 집사가 아니라 그 하인인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뽑혔습니다. 교회가 갈라질 지경에 놓였을 때 조덕삼 집사는 발언권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당시 장로는 설교 및 교회 모든 일을 관장하였기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고 이제 조덕삼 집사는 이자익 장로의 밑에서 교회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주님의 길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뒷바라지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자 담임 목사로 초빙을 하여 금산교회를 시무하게 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한국 장로교에 최초로 총회장을 3번 역임하는 등 아주 훌륭한 목회자였지만 조덕삼 장로님의 일화는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거기서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심령이 가난하게 살고 자신을 낮추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2

본문 :누가복음 6:32-36

주님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때 이를 행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 혹은 칭찬이나 명예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칭찬과 보상을 열망하고 행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런 칭찬과 보상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나타나지만 그 완전한 모습은 부활시에 받을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만을 받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으로 충만합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받을 생각없이 빌려주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행동은 창조의 세계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성품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된 우리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에게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칭찬만을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뜻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행복 기준선을 높이기

행복 기준선을 높여 영원의 삶에 맞추어야 합니다 (전5:10-12) 

어떤 부부가 같이 이민가기 직전인데 이재철 목사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부부를 함께 만났다고 합니다. 그 중 부인은 외국으로 도망을 가 행복하게 살려고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상태이며 어떻게 행동하였으면 좋은지를 상담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살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니 자수하기를 권유하였고 자매는 수사기관에 자수하여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 책에서 자신은 그 자매가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살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자매는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돈을 절대시 하였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획득하고는 그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 것이며 목사님의 상담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불법으로 부자가 되기보다는 정직하게 사는 가난한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우리가 생활에 만족하여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국어 사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뜻에는 행복은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달성되지 못하는 우연이 개재되어 만족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도 같은 의미로 행복이 쓰여 있고 독일어도 같다고 합니다. 영어에서 행복은 hapiness 인데 여기서 hap이라는 어원은 happen에서 왔고 다 알다시피 happen 이라면 우연히 발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정의하는 행복의 의미와 같이 행복은 우리의 능력 이외의 요소에 의존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만 달성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은 무엇인가?의 강의에서 샤하르 교수는 행복의 기준선을 높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행복기준선을 높이는 학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며 욕구를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5단계로 분류한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의 이론이다.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 욕구는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요인이며, 인간의 욕구는 낮은 단계에서부터 그 충족도에 따라 높은 단계로 성장해 간다. 이것이 욕구 5단계설이다.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자는 등 최하위 단계의 욕구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로 추위·질병·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욕구이다. 3단계 욕구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로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애정을 주고받는 욕구이다. 4단계 욕구는 자기존중의 욕구로 소속단체의 구성원으로 명예나 권력을 누리려는 욕구이다.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최고수준의 욕구이다”(사회복지학사전, 2009. 8. 15.,).

그러나 이렇게 행복기준선을 높여가다가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도달하였다고 하여 인생에게 참된 만족이 있을까요? 솔로몬에 따르면 거기서도 허무한 상태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 기준선을 높여가되 영원의 차원에 맞추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발견될 수도 접근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행복 기준선을 하나님께 두고 그 말씀에 맞추어 사신 분이 있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17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거기서 귀족자제로 뽑혀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좋으나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뒤 배급된다는 사실에 신앙적인 갈등이 온 것입니다. 다니엘은 먹고 자는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음식을 거절하면 왕명을 거절하게 되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고 쫓겨나서 공부를 하지 못함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매슬로가 말하는 욕구 5단계를 전부 박탈당하여 일생을 비참하게 살 수도 있는 위험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길을 갔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담당하는 감독관에게 열흘 동안 채식만 먹은 뒤 다른 소년들과 얼굴을 비교하여 좋은대로 조치를 취하라는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채소만 먹은 이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윤택한 것을 보고 채식을 주어 먹게 하였으며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이 지혜를 통하여 다니엘은 사자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6:27-31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은 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런 심판의 전제하에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만 합니다. 핍박의 상황에서는 물론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신체, 생명, 자유, 명예 그리고 물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은 참고 사적으로는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야 엄정한 법집행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 너희들 스스로 보복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하나님의 법집행의 대리인들이고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완전한 보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복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선대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 사랑하여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관대하여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매일큐티

2016. 7.4 – 8

‘깨어짐’ 이라는 말은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고백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항복’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은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한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무리를 먹이도록 하셨습니다(마 14:19). 신앙부흥회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케파 셈팡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깨뜨리시기 전까지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의 떡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이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은, 훗날 자신을 깨뜨려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건을 예시 하신 것입니다(고전11:24 –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 모임에 가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깨어진 몸입니다. 저의 모든 기술과 능력과 재정을 여러분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해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때 비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따르고 있다면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시는 와중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우리의 장래가 있는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에 교회까지 그 지경을 넓힐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과 사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릴 것은 아이가 가진 몇 조각의 떡, 과부가 가진 소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평범한 목자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지만, 모세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하고 늙은 모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함께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요

 

케파 셈팡기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이로비에 피신해 있던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피난민 가족을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취하여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많은 피난민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

베드로전서 3:1-7

이스라엘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분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사랑을 고취할 약속들과 두려움을 일으킬 위협들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율법으로 구분하시기 위하여(거룩하게 하심) 좋은 땅에서 위대한 나라로 세우셨습니다(8:30-35). 만약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의 임무를 실패한다면, 그는 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막12:1-12). 그래서 임무를 실패하고 메시야를 죽인 그들을 멸망시켜 전 세계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최후의 심판의 한 예표입니다. 그 심판 후에는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삶이 나뉘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셨다는 사실은 성도들로 하여금 충성하도록 격려하고, 역경에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며 유혹에 있는 그들을 억제합니다 (여호수아 23:14-16). (1) 요셉은 하나님께서 종으로 팔려간 애굽 땅에서도 함께 하고 계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행하는 일에서 범사에 형통한 것을 체험하였으며, 그 주인 보디발 조차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고,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게 되었고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하니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급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청년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종으로 일하고 있는 애굽 땅에 조차 자기와 함께 한 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실이야 말로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요셉은 소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제사 문제가 터부시되던 시절 어느 믿음을 가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청년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교회가는 것을 반대하거나 핍밥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 청년의 집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깊은 집안이었고 그 청년은 장손으로서 조상의 제사를 받을어 모셔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되실 분은 제사드리는 것을 자손의 도리로 여기며 긍지를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처녀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반대하고 주례도 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축복하는 것도 거절 하였습니다. 시집을 간 이 처녀는 1년간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드리고 찬송할 것을 결심하였고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시아버지는 제사만 드리면 찬성이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며느리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였습니다. 1년이 지나 교회에 나갈 것을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제사만 드리면 문제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시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자 그 가정 전체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었고 이윽고 그 마을 전체가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김형석, 어떻게 믿을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넷째 복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22-23절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인자로 말미암아”  핍박받으면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적 관점에서는 세상에서 평안하고, 부유하고, 명예와 지위가 있으며, 건강한 사람이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는 축복은 이 세상이라는 한계가 있으며,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는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만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시작합니다.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큰 축복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만 합니다.

 

1.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세상적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핍박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3.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SBC매일 큐티

2016.6.20-24

깨어진 관계는 독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입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한 게 맞는다면 그를 견책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그가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해 줄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필요시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케라 셈팡기씨는 몬도씨를 만날 때마다 세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빛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까?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이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이디 아민이 집권하던 당시 우간다의 어떤 자매는 케파 셈팡기씨에게 비밀리에 모이고 있는 우간다 신앙부흥회에 대해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집회를 하던 중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직한 죄들을 깨닫고 서로 그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는 독재자 아민의 한 정보요원도 잠입해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보원이며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한 후 그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공부하면서 형제들과 올바른 교제하고 있지 않다면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모임은 또 다른 형태의 소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성경공부나 교회 출석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단편소설 마지막 손님에서 친절을 베푼 주인공 게이꼬의 상사의 입을 통하여 상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라고 외친 작가 구리 로혜리는 상인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단체에서 듣는 명령은 가라는데 있고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은 약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즉,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13: 34-35)고 하셨습니다. 케파 셈팡기는 이 계명을 잘 알지 못하여 자신의 설교의 대상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사명을 수행하려는 열심과 열정 때문에 가장 먼저 주어진 계명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면 안될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의 말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숨겨진 부분들까지도 형제자매와 나눈다는 뜻임을 나는 몬도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춰 놓은 것들을 나눌 때 우리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상호 결속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두 빛 가운데 행하기 시작할 때, 험담과 뒷말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미 빛 가운데 드러난 것을 수군거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뒷말은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바뀝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을 끄집어내는 대신,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싸 주고 강한 부분은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사용하던 램프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램프의 불빛이 비치기 위해서는 램프의 유리가 투명해야 하고 잘 다듬어진 심지와 깨끗한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유리가 더러우면 불빛은 희미하게 비치게 됩니다. 심지가 잘 다듬어져 있지 않으면 불빛은 깜빡거리게 됩니다. 기름이 더러우면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리를 깨끗이 닦지도 않고 심지도 다듬지 않은 채 빛을 비추려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기름을 더럽히는 원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음욕을 품는 것, 말다툼하는 것, 원수에게 증오를 품는 것 등입니다. 깨끗한 기름이 없으면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형제 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