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중풍병자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5장 17-2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 동네로 돌아오시니 중풍병자가 사람들에 의하여 지붕 위에서 침상채 내려져 주님 앞에 놓여졌습니다. 이는 중보기도의 좋은 예입니다. 왜냐하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주님 앞에 데려가는 사랑의 수고 자체가 중보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붕이 파손되었지만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넉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시 주저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죄의 문제라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를 사하시고 능력을 행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시기를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한편, 어려운 문제가 발생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을 준비를 하십시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거룩하신 뜻을 알게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기도를 통해 한 청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는 죄를 용서하시고 중풍병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깨달아야만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SBC 매일 큐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중보 기도(intercession)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과 자신이 회심시킨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예, 롬1:8-10; 골2:1).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 속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엡6:18). 오늘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드린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멸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기도 목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기도할 때 질서있게 하도록 도와줍니다. 아마도 그 목록에는 가족과 친구, 친척 또 주 안에서 한 식구가 된 사람, 직장동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정부와 국회, 국민 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 지도자와 공무원 그리고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 평화와 정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반드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기도 목록이 너무나 길어지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집니다. 이를 질서 있게 모두 포괄하여 기도하는 방법은 매일 기도해 줄 사람과, 매 주 혹은 매 달 혹은 이따금 기도해 줄 사람의 목록을 각각 작성하여 탄력있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지 목록을 탄력있고 융통성 있게 계속 수정해 가면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우스 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젊을 때 친구의 권유로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어느 여 성도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젊은 페터슨을 보았을 때 기도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에 응하여 기도를 받았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는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으며 마음에 햇살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그녀의 기도에 은혜를 받자 매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No”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로 그녀 앞에 있는 큰 달력을 들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매 30분 단위로 일년간 중보기도할 제목과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탁하기를 자신의 생일에 한 번 자기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더니 그 날이 비어있었기에 기쁘게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받고 거기에 기입하였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이런 중보기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의 기도생활은 도전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특별한 필요로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 이를테면 시험이나 수술을 앞둔 사람이라든가, 천국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 이제 막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거나 특별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 등을 위한 특별한 메모를 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즐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위기들이 닥치거나 지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련된 사람들을 목록에 추가하기도 하고 그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기도는 상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좀 더 나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기도를 노트에 기록할 경우 응답된 것까지 체계적으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은혜의 확실한 증거자료를 갖고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활용하거나 기도 노트를 작성하시기를 권유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이것은 감사 기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예배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은혜, 광야에서 돌보아 주신 그 사랑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너무나도 빨리 잊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렸습니다” (시106:13).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노래한 것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모든 축복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 이 두가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되새기게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동하는 여호와의 언약궤

삼상4장-7장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실로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실로에서 아벡으로 이동하는데 그 이유는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에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중에 놓게 하였던 것이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함께 갔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패를 하였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7개월동안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갔다. 블레셋은 먼저 에벤에셀에서 남서쪽 약 46킬로 떨어진 해변가에 위치한 아스돗의 다곤 신당으로 이 언약궤를 가져갔으나, 다곤신상의 파괴와 독종 재앙의 발생으로 언약궤를 다시 아스돗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 떨어진  가드로 가져갔으나 독종의 재앙은 여기에도 발생하였고 그 궤를 다시 가드에서 북쪽으로 약 9킬로 떨어진  에그론에 보냈지만 에그론에 이르러서는 불레셋 백성들은 더 이상 독종의 재앙을 견디다 못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도 돌려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은 에그론에서 동쪽으로 약7킬로떨어진 이스라엘 영지인 벧세메스로 보내게 된다(삼상6:12-13). 벧세메스 지역은 여호수아가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할당한 제사장 도시였다(수21:16).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궤를 적절히 다루지를 못하여 벧세메스의 백성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본 순간 70명이 죽임을 당하였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다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 떨어진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 여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을 지내게 되었다(삼상7:1-2). 

하나님은 이런 언약궤의 이동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 백성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는데, 그 첫째가 아벡의 전투에서 가르쳐주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궤로도 하나님을 조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다곤신보다 강하시고 이방 블레셋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셋째, 블레셋의 영토에서 언약궤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영지에 들어오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떤 도우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넷째, 벳세메스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0-81 참조).

어떤 문둥병자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5:12-16

오늘 주님께서는 갈릴리 여기저기를 다니시다가 한 동네에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이때 문둥병자는 담대하게 주님 앞에 와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탄원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주님 손에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더 소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기도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가 이루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러면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께서 성경을 명예롭게 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통하여 그 은혜를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삶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은 우리의 불가능을 주님께 드리는 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작).

2.     믿음은 긍휼이 풍성한 주님께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

3.     믿음은 성경을 명예롭게 하신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믿음의 한계)

매일큐티

예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2016.3.28~4.1

예배란 하나님께 그분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에 따르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시편105:3)는 말씀을 예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성경적 정의로 보고 계십니다. 즉, 그분이 누구시며, 또 그분이 자신을 누구라고 계시하셨는지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야말로 우리의 자기 중심주의를 치료해 주는 모든 해독제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는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를 치료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문제와 통상적으로 방해가 되는 우리 자아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하며 복잡한지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인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증거하시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성령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처음 3 문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즉,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 그분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우리가 대부분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올바른 일이 없기에 끈기 있게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찬송가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9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28장), 전능왕 오셔서 (34장) 등과 같이 목적이 분명한 찬송들을 부르거나 신앙 고백을 하는 가사를 음미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찬송들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신 창조사역과 구원등에 우리의 관심을 쏟게 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찬송하는 영광송의 가사(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를 적어보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1절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2절 주 예수 당한 고난을 못 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찬양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찬양 

4절 주 믿는 성도 다 함께 주 앞에 엎드려

     무궁한 노래 불러서 만유의 주 찬양

     무궁한 노래 불러서 만유의 주 찬양 아멘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이것은 고백(confession)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지나친 자기반성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 읽기는 보통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우리의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와 이기심 그리고 허영과 탐욕을 가차없이 폭로하며, 그 뒤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고백하도록 도전합니다. 이것을 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시편에 있는 회개의 시, 특히 시편 51편이나 130편 같은 시를 반복해서 따라 읽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시경을 한 마디로 사무사 즉, 사특함이 없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시편은 경건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 130편을 적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130:1-8)

하나님을 믿지 않는 증자도 하루에 3가지를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경건 생활에서도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루를 간단히 돌아보고 잘못한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바람직한 훈련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하도록 부추키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습관을 기르면, 겸허해져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더 큰 거룩을 점점 갈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사함에 대하여 계속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는 것이 즉시 외적인 행동을 살피고 나아가 다시 위를 바라보게 한다면, 우리의 내면을 살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제자도를 실천시 경계해야 할 점

제자도를 실천시 무엇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5:24-30)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가 작아서 불평하다가 숨겨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여 원금도 못건지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늘 나라의 일에 대한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늘나라의 일은 절대로 재물을 늘리고, 권력을 쟁취하며,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부흥전략은 재 검토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부, 권력, 안락한 생활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졌습니다. 비행기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단이 아주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우 걱정을 하고는 여기 저기 섬을 둘러보면서 살아갈 궁리를 하는데 크리스찬인 다른 한 사람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걱정을 하지 않는가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일주일에 100,000불을 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버는 것과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였더니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번다고 강조하면서 그중 십일조를 만불이나 교회에 한다는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동료에게 설명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그 많은 돈을 십일조하므로 반드시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가 수색을 하여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교인들을 양산하면 그야말로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자도를 실천시 두가지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첫째, 주님을 따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일은 바로 제자도를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패란 없습니다. 여기1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도의 관점에서 악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있습니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빚을 통하여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다가 그만 전 그룹이 붕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본인은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도피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붕괴되기 약 1년 전에 한 그 분의 안 사람되시는 분이 TV에 나와서 한 이야기는 참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자기를 본 어느 점쟁이가 자신와 같은 관상은 처음본다고 굉장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상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이분은 남편과 함께 해외를 10년 정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게 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도를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주님께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전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이를 주시고 원하지 않으시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의 핵심은 이런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의 근본적인 이유 역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 돈, 명예, 권력, 건강, 재능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달란트로 묘사된 것들은 이런 재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둘째,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제자도를 실패하게 만듭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명을 받아 왕 사울에게 아말렉을 가서 진멸하라고 전달합니다. 사울은 순종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품질이 좋은 우양을 끌고 와서 소유로 삼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수지 맞는 일이 어디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불순종한 것입니다. 엄청난 손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모아도, 명예와 권력을 잡아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천이 안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남긴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도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가 사는 일상의  삶에서 천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달란트를 남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의 그리스도

성경봉독: 요한복음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사 약 30세쯤 되셨을 때 비로서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되심을 전파를 하셨고,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사 다시는 썩지 않을 몸을 가지시고 사도들이 보는데서 대낮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11사도이외에 오백여형제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부활의 증인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확고한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의 삯을 모두 청산하셨다는 사실, 사망을 이기셨다는 사실,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다는 사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셨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1.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삯을 모두 청산하셨다는 증거입니다 .

2.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겼다는 인류 최초의 기쁜 소식입니다.

3.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4.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매일큐티 (고난주간)

고난주간 (2016.3.21~25)

일요일(3.20)부터 금요일(3.25)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월절 엿새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칫상을 받은 주님께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 아침에 감람산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베다니를 떠나 주님은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으니 이는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에 나와서 주님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요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오므로 그 무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19:41-44).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막11:12-19). 

 

이튿날 화요일에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물었고 주님은 침례 요한의 일로 역공을 하시고는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여부를 가지고 헤롯당원과 바리새인들이 와서 묻는 것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어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주님은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는 답변을 주셨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막12:1-27). 

 

화요일에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감히 주님께 와서 묻는 사람들이 없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7 화를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저녁에 성전에 나가사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대하여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시의 징조를 물었고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신 것이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요일: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사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시고는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며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이 저녁에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는 남은 제자들과 세상에서 당신을 믿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고 체포하러 온 로마와 유대관리들에게 잡혀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차례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혔으며 그 때문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도하는 산헤드린 공회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밤에 이루어진 불법 재판이었으며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이 밤새 심문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1 시간 이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 7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금요일: 아침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주님을 예루살렘에 와 있는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고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6-12). 심문하는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악하여 하나님께 멀리 떠났으며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과 이런 심판에서 세상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요청하여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부르시는 그리스도

누가 복음  5장 1 – 11절

예수께서는 게넷사레 호수가로 가셔서 몰려드는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열심으로 가르치신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열정을 우리는 배워야만 합니다. 교훈을 마친 후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시니 비록 자신의 고기잡이 전문지식과는 틀리지만 이미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여러 번 이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뒤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베드로를 포함한 4명의 어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후에 주님을 따른 4제자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전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우리의 가정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그리스도의 열정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능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순종하라 : 우리가 읽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성경 읽기도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거부한다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지어서 어떤 사나운 폭풍도 그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마7:24). 야고보 사도 역시 예수님이 강조하신 바를 반복하면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약 1:22). 그는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독자들은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얼굴을 씻거나 머리를 빗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서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항시 잊지말아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남자든 여자든 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은혜의 방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기도에 힘쓰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타당한 지적입니다. 연약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 역시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 그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J.C. 라일 감독은 왜 어떤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훨씬 더 밝고 훨씬 더 거룩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 차이는 개인적인 기도 습관의 차이로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별로 거룩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대단히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죄짓는 것은 결코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죄를 소멸하거나, 죄가 기도를 막아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자면,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가(기도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주제에 대하여(찬송이나 고백이나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여쭙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 대화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성경을 펼쳐 둔 채 읽고 계속 묵상한 후에 한 절 한 절 그 본문을 다시 살펴보고 그 내용과 어울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은 올바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읽은 말씀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는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가능한 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중년의 요리사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종의 비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과 그분만 아는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녀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감이 그분께 불손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형식을 갖추지 않고 구어체로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좋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진 잘 쓰인 기도문을 가지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하나님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 성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기도 순서를 맡은 어느 목사님은 마음에 생각나는대로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그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들떠서 기도하셨을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록있는 다른 목사님은 쪽지에 적은 기도문을 들고 간단 명료하게 기도하고 나니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적인 기도를 할 때 특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