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복음과 그리스도

누가 복음  4장 38 – 44절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버나움 회당을 떠나 바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 중한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셨습니다. 구약 어디를 보아도 중한 열병으로 누워 있던 사람을 모세율법을 통하여 고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과 모세율법의 차이입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는 하나님의 나라도 함께 도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포되며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진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는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우리의 필요 또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는 단순한 말의 선포나 전도지의 배부가 아니라 삶에 영향력을 미치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만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포되는 것이므로 모세 율법과는 다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단순한 말의 전파가 아니라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2016. 3.7 – 11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4가지를 제언하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라, 생각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입니다. 이를 각자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하라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간 신문을 대하듯 되는 대로 무관심하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눅24:27).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데려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라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성령님을 통하여 하시는 작업을 로체스터의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바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복음서는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은 거룩한 주인공을 부각시켜 주고, 초상화를 가리키는 전체적인 배치에 꼭 필요한 배경입니다. 서신서는 주인공의 의상과 액세서리 역할을 하면서 그 인물을 설명해 주고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를 통하여 그 초상화를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엠마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문자로 기록된 화폭으로부터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친히 우리의 성경교사가 되셔서 성경 전체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라 : 우리는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생각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연구를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약간의 비용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작은 주석을 덧붙인 각종 스터디바이블(오픈, 굿뉴스등)을 구입하여 읽으면 성경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구 사전도 구체적인 본문이나 구절을 찾는 데 편리합니다. NBC (New Bible Commentary  IVP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와 같은 신뢰할 만한 단권 주석과 성경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절 단위로 수록한 IVP 성경 배경 주석 역시 매우 유용하여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하라 : 여러 성경관련 주석이나 성구사전들은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초가 상실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 구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두 가지 질문이 유용하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1)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의 본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2)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그 말씀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답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운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들(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라)이 제대로 적용되야만 합니다. 

 

*기억하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몰락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교훈들을 계속해서 잊어버렸습니다. 기억을 위한 한 가지 자극제는 바로 기록입니다. 날마다 혹은 주제별로 혹은 성경의 권별로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체적인 진리들을 노트에 기록하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수시로 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고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특별히 감동을 준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요절 노트를 만들어서 계속 복습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한 구절씩 암송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점점 쌓일 것입니다.

제자도를 위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그는 각각 그 능력을 따라, 하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측면에서 볼 때 다섯탈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정치가로서는 징기스칸, 시이저, 나폴레옹등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기업가로서는 록펠로나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학자로서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등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전에 SKT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사장이 신문에 인터뷰하기를 “나는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다. 다섯 탈란트라면 빌게이츠와 같이 세상을 바꾸고 주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나는 이 사람들에 의하여 창출된 것을 따라가는 정도의 사람이다”라고 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의 경우 다섯탈란트라면 어느 정도의 일을 하여야 그렇다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신학적으로는 마틴 루터나, 칼빈 정도는 되어야 하고, 목회적으로는 존 웨슬레나, 조지 화이트필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지 화이트필드는 한 번 즉석 설교에 수천명이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며, 존 웨슬레는 감리교를 시작하신 분으로 그럴만 하다고 생각되고 루터나 칼빈은 그 영향력이 말할 것도 없이 다섯탈란트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영향력을 평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달란트를 재면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외적인 것이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 목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냈는가?” 의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평생 소아마비를 앓게 된 휴유증으로 한 쪽 다리를 절면서 살고, 맡겨진 일이라고는 가정을 돌보고 자기가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를 돌보는 정도라고 하여도 이 분에게 주신 탈란트는 다섯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 분은 다섯 탈란트를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뜻을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욥입니다. 욥이야 말로 다섯탈란트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욥은 매우 정직하게 살았으나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과 사탄과의 내기로 인하여 전재산이 없어졌고,, 10명의 아들 딸들은 전부 하루 아침에 집이 무너져 죽었고, 갑자기 전신에 악창이 났습니다. 아내 역시 욥을 버렸습니다. 이에 집에서 쫒겨났고 재에 앉아 몸을 긁을 수 밖에 없는 철저히 패망한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런 자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과 대화를 나누시고  곤경을 돌이키게 하셨고 나중에는 갑절이나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할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흔한 부자 중의 하나로 생각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삶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서 숨죽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핍박자들에게 잡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리스도의 길을 충성스럽게 견디어 갔던 것입니다. 전도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세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알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에서는 주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CBS의 새롭게 하소서의 간증 프로그램에서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신이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여러 병원에 가도 안되고 절망하던 중에 전도관 박태선 장로가 기적을 행한다고 하여 거기에 참석하고 여러 사람이 병을 고친 것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영 비 성경적이라 이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다리를 낫게 하여준다고 해도 싫다라고 생각하고는 거기서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사회자는 “허 대단한 영분별력이십니다”라고 감탄을 한 것이 생각납니다.그 후 이 자매님은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다리 대신 그리스도를 선택한 분이죠! 그리스도의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란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실패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 중 하나였다면 주인은 예수님을 부르셔서 야단을 치셨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네게 기적을 행할 달란트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묻어두고 너 자신이 죽도록 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오래 살았어야지?”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조롱과 천대를 받으실 때도 무한히 참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류의 대속과 새로운 생명인 부활을 소망하시면서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 아담의 후손들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길을 거쳐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정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이런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을 낳고 기르는일, 즉, 제자도가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먼저 제자가 되고 다음으로 제자를 만드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일이며 그 나머지는(부자, 돈, 지위, 지식등) 이를 위한 재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던 어떤 일을 성취하였던간에 제자도를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시작도 안된 것이며 따라서 달란트를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과 그리스도

 누가 복음  4장 31 – 37절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권위로 가르치시며, 회당 내의 어떤 사람에게 붙어있던 귀신을 쫒으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렇게 자신의 권위로서 가르치시며 쫒겨나간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부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우주의 주인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처럼 인간이 되사 희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에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그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행하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나타내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만인들이 알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2016/2/29 ~ 3/4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들의 신빙성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의 저자들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글 속에서 자신의 성실함과 공평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들 스스로가 복음서 이야기를 본 목격자들이었거나(요한복음 21:24), 목격자들에게 직접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 누가복음 1:1-4). 더욱이 복음서는 모두 1세기 문서이며, 요한복음만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에 모두 출간되어졌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기록 사이의 격차가 짧아진 이유는 교회가 복음 전도와 회심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 수 많은 사본과 역본 그리고 원본의 인용문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원문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소한 내용만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좀 더 말씀드리자면, 신구약 성경은 1,500여 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66개의 낱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볼 때 , 성경 저변에 흐르는 주제의 통일성은 더더욱 인상적입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교리는 심오하고 그 윤리는 고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 거의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성경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성경은 죄인에게는 죄 용서를, 압제당하는 자에게는 자유를, 방황하는 자에게는 인도를, 죽어 가는 자에게는 위로를, 그리고 유족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열린 마음, 겸손한 심령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흔들어 놓고 위로해 주는 성경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증거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실천할 때 가지게 되는 우리 영혼에 메아리쳐 울리는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첫째, 평이하고 명백한 의미가 때때로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락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 단락의 중심적인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원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21세기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 저자들의 생각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말하려고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되었을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 본문을 해석할 때 본문이 속해 있는 장이나 책의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좀 더 광범위한 문맥, 둘 다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주의할 점에 대하여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공회 39개 신조의 제20항에서 성경의 한 곳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다른 곳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규정한 성공회 교회의 예를 들면서 이런 처사는 합당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함으로써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직접적인 물음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본문만을 계속해서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나비처럼 이 구절, 저 구절을 무책임하게 왔다 갔다 해서도 안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읽어도 좋고, 아니면 한 권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연구하여도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IVP에서 출간한 BST (Bible Speak Today) 시리즈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은 한국어로 완간이 되었으나 구약은 몇 권만 번역되었고 계속 번역중에 있습니다). 

 

매일 큐티에 관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서유니온에서 발간하는 매일성경 방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에서는 매일 읽을 본문에 해설을 첨가한 책자를 수많은 언어로 출판하고 있는데 (한국 성서유니온에서는 한국어 번역을 담당), 독자의 연령과 경험에 따라 분류되어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은 독자들이 5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일독할 수 있도록 내용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은 흔히 혼자 큐티를 할 때 잘못된 해석이나, 편협한 생각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때때로 매우 좋은 깨달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구 운동하여 체중감량에 들어가는 것보다 전문적인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체중감량과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부터 성경을 읽는 4가지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나오미

룻기는 사사시대에 살았던 나오미와 룻이라는 평범한 백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기근이라는 어려움은 나오미로 하여금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가 10년 만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떡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의 주 산업은 농업으로 이 농업은 적시에 내리는 적당한 양의 비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거나 시기에 맞게 내리지 않는다면 농작물은 수확할 수 없고 기근이 발생하게 되어있었다. 한편 나오미의 가족이 10년간 거주한 모압지역은 사해건너편에 위치하며 유다산지보다 높이 솟아오른 고원이어서 그 지역을 지나가는 공기로부터 보다 많은 습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가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때 베들레헴이 주지못하였던 밀밭과 정기적인 물의 공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근없는 삶에 대한 만족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보리 추수기에 접하여 돌아왔다. 그녀는 문안하는 동족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를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런 불행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오미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룻1:20-2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나오미에게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룻과 보아스 그리고 다른 이웃들을 통하여 온유하면서도 강력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여주셨다

이런 은혜로우신 행동들을 통하여 나오미의 비통한 심정이 위로받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큰 회복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 당시의 모세 율법, 관습, 지역들 그리고 이 백성들의 배경을 서로 엮으셔서 인류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다윗왕이 나왔고 이후 천년이 지나 더 큰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드디어 베들레헴은 단순한 떡집과 목자들의 고향이 아니라 생명의 떡과 선한 목자의 고향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러 오실 그 메시야께서는 상한심령을 가진 할머니, 이방여인, 그리고 친절한 농부를 통하여 오신 것이다. 선하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비, 땅, 굶주림, 사망, 비통한 마음, 사랑 그리고 아기를 서로 묶으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신 것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74-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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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 – ruth and boaz (1960)

나사렛 주민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 복음  4장 23 – 30절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주민의 배척을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들을 고향 나사렛에서도 행하여 고향 사람들을 존중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데 너무나 비중을 둔 나머지 그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모세 율법만 지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만약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별다른바 없고 오직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표징을 보고 싶다는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존중하지 않는 나사렛 주민들을 주님 역시 존중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구원을 받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복음이 가지고 있는 거치는 돌에 걸려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상황에서도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존중하지 못한 나사렛 주민들은 주님을 배척하게되고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복음의 돌에 걸려넘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말씀나눔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 (2016/2/22~2/26)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에 대한 사랑은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이 필요한 모든 증거는 성경 속에서 충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참고 히브리서 1:1-2). 즉, 하나님께서는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복음의 말씀이며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므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그분의 언약 백성에게 자신을 알려 주셨으며, 특히 자신의 사자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또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와 같은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그분의 신탁을 정기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취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에 대한 증거는 가히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경우들

먼저, 예수님은 삶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셨으며, 사탄의 모든 유혹을 적절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1-11; 누가 4:1-13). 둘째,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것과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셨으며,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사명을 조명하여 해석하셨습니다(눅 4:16-21; 요 5:39). 셋째,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고 인용하셨습니다(막 12:35-37).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인 신약의 저자들 역시 구약 성경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무엇이 있을까요?

 

디모데 후서 3장 1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원어는 God-breathed란 의미로써 이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의 뜻임)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저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말에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중 저작설에 대한 극적인 비유로,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저자들의 말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믿으셨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저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선택하고, 부르고, 준비하고, 파송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맡겨졌던 것과 유사한 사역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나오는 이른바 다락방 강화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은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사도들에게 생각나게 하여 주실 것과 사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4:16; 16:12-13). 이처럼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보완적인 약속들은 복음서와 서신서에 두드러지게 성취되었습니다.

부자청년과 그리스도

오늘 본문은 한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한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에 적힌 계명들과 이 계명들을 요약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행하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영생이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까? 이에 따라 여러가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생명 나무 과실이나 이른바 진시황이 찾고자 한 불로초만 있으면 됩니다. 굳이 하나님이 필요없고 주님의 죽으심도 필요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생명나무과실이나 불로초조차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부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자신들이 살았을 때 저지른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다면 아무도 생명 나무 과실이나 불로초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모두 다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부자청년이 묻고 주님이 대답한 것처럼 선한 일을 하여 심판받을 여지를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 하에 있습니다. 율법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에 규정된 온갖일을 항상 하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은 전형적인 모습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율법의 저주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율법의 잣대를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을 통해서는 죄에 대한 지식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이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보물을 찾듯 혹은 영생으로 가는 마법적인 문구나 논리나 예언의 성취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영생의 방법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젖혀놓고 성경이 규정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정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법 아래 살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생입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말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나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신 자마다 영생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사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이를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소유한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인 삼는 대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계명을 굳게 지키며, 지금도 그렇지만 부활하여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삶의 중핵입니다.

Hoffman-ChristAndTheRichYoungRulerHeinrich Hofmann – Christ and the Young Rich Ruler (1889)

나사렛 회당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4장 16-22절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고 설교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명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천국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 포로 잡힌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시기 위해,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죽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한편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알았기에 배척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런 잘못된 인식은 없지만 입술의 고백만 있고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