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SBC 매일큐티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 성경읽기 (2016.2.15~2.19)

2.15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우리의 신앙이 발전하기 바란다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Quit Time)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은 은혜의 방편 중 최소한 두 가지를 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하나님과 거룩한 교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이자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이것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이러한 습관을 기르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1943년 윌리엄 템풀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도께 제일 먼저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 다른 어떤 것도 매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위한 시간을 만들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굳건히 지키라 는 말로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2.16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경건의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통상 찬송하고, 성경읽고, 설교가 있고, 그리고 통성 기도를 한 뒤 집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는 여러가지의 은혜의 방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과 시간을 갖던 경건의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50년 이상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방법으로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직접 증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프랭크 개벨라인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학교에서 41년 동안 교장을 역임하신 분인데 그의 80번 째 생신을 맞아서 다음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유지하십시오 내 삶을 돌아보니, 내 인생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60여년 동안 매일 지속했던 성경과의 만남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2.17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어떻게 균형있게 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경읽기와 기도, 이 두가지가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우리도 그분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던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눅10:39). 다음으로, 우리는 그분께 하고 싶은 말을 아룁니다. 특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쌍방 간의 대화로, 이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심지어 우정)는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이런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깊어져 가는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게 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8 – 성경읽기
은혜의 방편의 첫 번째는 아무래도 성경입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믿어야 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먼저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통상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개념입니다. 그 말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목적은 그분이 베일을 벗기고 친히 보여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고 유한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성을 어떻게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를 초월해 계셔서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19 – 성경읽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 표현하신 대목이 이사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의 길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높다면, 우리는 그분이 솔선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지 않는 이상 결코 그분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신 첫 번째 사건은 천지창조입니다. 즉, 창조된 우주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 대한 분에 넘치는 사랑은 창조 세계에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롭고 자비하신 성품들을 계시하였을까요?

수요일터예배

수요일터예배 – 중생의 과정과 모습 (마태복음 5ㅣ17-20)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당신 사이에 놓여있는 율법의 정죄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외치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질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느니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예전에 바티칸에서 성서를 간행하였는데 “Do not commit adultery 간음하지 말라” 라고 써야 할 것을 그만 “not”를 빼먹고 인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연히 급히 전량을 회수하여 소각하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면 율법의 명령이 바뀌므로 간행하였던 성경 전부를 회수하여 소각한 것과 같이 창조된 천지를 바꾸시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다 청산하셔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모든 자에게 보여주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죽으셨다는 소식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을 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물론 후에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만, 그러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중생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두시고, 우리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들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빌트인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오늘 우리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IMG_8873 일러스트: 신예현 – 아침 Q.T. (2016)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4장 14-15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오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과 아울러 그의 권위있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 마귀의 세력에 갇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해방하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권능을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는 성령님의 권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만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권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마태복음 24 15-24절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평가하여 각기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오랜 후에 돌아와서 회계를 하니 두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여 갑절을 남겼으나 한 사람은 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고는 게으르게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하였으나 1달란트를 땅 속에 파 묻어둔 사람은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데 내쫒겼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그 핵심이 그리스도를 쫒는 제자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가되는 재능은 세상의 기준과 틀립니다. 하늘 나라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 표준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자기부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일인 제자도를 실천하다가 실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유일한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소간 어려워도 주님께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1.      제자도를 위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2.     제자도를 통하여 어떻게 달란트를 남길 수 있을까요?.

3.     제자도를 실천시 무엇을 경계하여야 할까요?

SBC매일큐티

2016.2.1~2.5

10계명 & 주님께 순종하는 삶

2016.2.1 – 10계명
탐욕의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삶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찾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만족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바로 여기에 제10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욕이라 불리는, 사납게 날뛰고 파괴적인 욕망에 대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소함과 관용과 자족의 조화입니다. 

 

2016.2.2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히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절대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이고 규칙적이며 순종의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이웃의 삶과 가정, 재산, 그리고 명예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이들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겠습니까?

 

2016.2.3 – 주님께 순종하는 삶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를 통하여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함으로써,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나타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 번제 그리고 대속죄일 등과 같은 제도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는 것이지 죄를 없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방법등을 통하여 율법은 우리를 유일한 구원자이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율법이 칭의를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보내고 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를 위하여 다시 우리를 십계명이 중심이된 율법에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때 오직 성령님만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히8:10). 

 

2016.2.4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은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분께 성품을 다시 열어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특별한 통로를 직접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통로를 일컬어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성경 읽기, 기도, 예배, 교제 및 성만찬이 포함됩니다. 청교도들이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스토트 목사님이 라일 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고통없이는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2016.2.5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을 빗대어 은혜의 방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행병이 돌고 세균에 감염되었을 때 부랴부랴 의약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식사와 수면 및 운동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에 맞서 싸우고 경건을 더욱 개발하는 진짜 비결은, 유혹이 닥치는 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유혹에 빠졌을 경우에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 안에서 훈련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영적인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4장 1-13절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죄는 불신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무려 40일 동안 굶주리면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여러가지로 시험하다가 드디어 40일이 되는 날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목적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타락시킨 것처럼 주님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불신이었습니다. 3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네 마음대로 살라는 마귀의 주문을 거절하고 순종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순종의 길이냐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으므로써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황을 이용할 뿐 만 아니라 성경까지 왜곡하여 그 근거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우리가 방심한 때를 타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서 늘 상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SBC 매일큐티

제 9 계명 & 제 10 계명 (2016.1.25~1.29)

2016.1.25
거짓 증언을 금하는 9계명은 진실한 증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셨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6.1.26
거짓 증언과 진실한 증언은 모두 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이 계명은 선이나 악을 초래 할 수 있는, 인간의 혀가 지닌 엄청난 위력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1-6). 비록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약3:8)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혀를 제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했던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울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16.1.27
마지막 계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심지어 범죄 행위로 발전할 성향이 다분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2016.1.28
이 계명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 이와 같습니다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탐내지 말라” 고 한 율법의 10번째 계명을 접했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환히 보여 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7:7-12).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서 7장을 읽기를 권합니다.

 

2016.1.2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참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엡5:5).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보다 신약 성경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
 

믿음의 ABC

믿음의 ABC (다윗과 골리앗)사무엘 상 17장

굳센 믿음을 가지고 싶다 –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꾸 들으면 됩니다. 믿음을 실제의 삶에 적용하고 싶다 – 믿음의 ABC를 가지고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은 사무엘상 17장31-54절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소재로 믿음의 ABC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A –Accentuate positive aspects: 난관을 돌파할 지혜가 나올 때까지, 적의 강점&약점, 나의 강점&약점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십시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이 무엇인가 헤아리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찾아나서기를 바랍니다.

엘라 골짜기에 골리앗이 등장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중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키는 3미터 정도되고 갑옷만 57킬로 그램의 무게에 머리에는 놋투구를 쓰고 전신을 무장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한 숨만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어떻게?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책의 저자인 Malcolm Cladwell 은 그 이유를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신체적인 힘을 기준으로 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힘이라는 것이 다른 형태로 – 규칙을 깨뜨린다든지, 힘을 대체할 스피드나 기습과 같은 – 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전체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같은 실수는 오늘날도 많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점이 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골리앗이 누구라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의 신장과 여러 체격조건을 보고는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는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골리앗의 약점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서에 기록된 골리앗의 행동을 보면 여러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는 방패를 든 소년과 함께 평지로 내려왔습니다. 방패를 든 사람들은 고대에 궁사를 동반하여 전투에 참가하곤 했는데 이는 궁사는 자신을 보호할 방패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대일 칼싸움에서 골리앗은 왜 방패를 든 소년이 필요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왜 다윗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하였을까요? 성경은 골리앗이 천천히 움직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다윗에게 신속하게 다가가지를 못하였습니다. 막대기 한 개만을 가지고 간 다윗을 보고 “막대기들 sticks”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현재 많은 의학 전문가들이 믿고 있는 바는 골리앗이 소위 acromegaly(거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키가 큰 사람은 Robert Wadlow 였는데 이 사람이 거인증으로 고통을 당하였고(2미터 70센티) 죽을 때도 계속 자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인증에는 공통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신경을 압박하여 심각하게 시력이 제한되거나, 이중으로 보이는 시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인도할 소년이 필요하였습니다.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에게 올 때까지 다윗을 잘 볼 수 없었고 무슨 전략으로 자기를 칠지 잘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오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두 개로 보였습니다. 산등성이에서 멀리 이스라엘이 보았던 것은 엄청나게 무서운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거인의 거대함 자체가 그 거인에게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종류의 거인들과 싸우는데 있어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강력하고 힘있어 보이는 자는 그들이 보이는 것처럼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점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물매를 던지는 기술에는 달인이 되어 사자와 곰에게 던져 이들을 물리치는 경험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은 중장보병, 기병, 궁사나 물매와 같은 무기로 무장한 발사체 군사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장 보병은 기병에 강하나, 움직임이 둔하여 발사체 군사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병은 발사체 군사들이 맞추기 어려운 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에게는 강하였습니다. 다윗은 움직임이 둔한 골리앗에게 가서 물매를 던지면 정확히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매는 초당 34미터를 날라가기에 35미터에 접근하였을 때 순식간에 골리앗의 유일한 약점인 이마에 던져 기절 시키거나 두개골을 쪼개고도 남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5구경 권총을 들고 칼을 찬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군복과 칼을 버린 것입니다.

Believe in the promise of the Lord: 주님의 약속을 믿어라 약속을 믿어야 용기가 오고 용기가 와야 지혜를 실현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1Sa 17:45-47 KOR)

약속을 믿고 나갈 때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예로 다윗의 예를 든다- 사울 왕을 엔게디 동굴에서 살려보낸 것. 심지어 예언이 성취된 사례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돌에서 떡을 만들어내라고 주문하단든지, 하나님의 기적 아니면 헤어날길이 없도록 자신의 환경을 만든다든지 하는 태도는 죄악된 태도입니다.

Commit yourself to the Lord: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다윗은 용기와 믿음에 의해 능력을 받고 골리앗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재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잘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크고 느리고 흐릿한 시력을 가져 다윗이 생각하는 전략을 알아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은 능동과 수동이 잘 어우러져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힘을 벗어난 것은 수동이 어울리는 지점입니다.

 

 Gino D’Achille – David and Goliath from the Bible Stories (1968)

육신의 혈통과 그리스도

말씀봉독: 누가복음 3:23-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나시기까지 77명의 족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 이래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강한 자가 집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세간살이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오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 강한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나셔서 강한 자인 마귀를 결박하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족보에 열거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살아갔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이고 덧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이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산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큐티

제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18~1.22)

2016.1.18
8계명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그것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는 우리의 소유와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구별을 흐리는 것은 언제나 반사회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산을 맡았을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런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8계명은 적용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온갖 종류의 부정직과 속임수, 음모, 부당한 과잉 요구, 암거래, 정해진 시간보다 적게 일하는 것, 탈세 및 관세를 피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실이 정직하다고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2016.1.19
한편 만약 우리가 8계명을 범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취했던 것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규례에 따르면, 손해 배상은 단순한 상환이상이었습니다. 예컨데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을지니라”(출22:1) 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세리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였을 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요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제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냈습니다. 어느 일본인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그 집 주인의 구두가 너무나 탐이나서 가지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도둑질 한 것이 생각이 나서 할 수 없이 그 일본인에게 울면서 돌려주었더니 그 일본인이 놀라 그 이유를 묻고는 너무나 감격을 하여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간증을 들은 바 있습니다. 회개하는 능력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016.1.20
도둑질을 금하는 8계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장려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며,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부정직한 삶을 살다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둑에서 일꾼으로 그리고 구제하는 자로 변화하는 것, 오직 복음만이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21
6,7,8 계명은 각각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고,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제9계명은 거짓 증거로부터 사람의 명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좋은 평판이야말로 최상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명예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강도짓이나 마찬가지며,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9계명이 적용되는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6.1.22
제9계명이 적용되는 첫 번째 상황은 바로 법정입니다. 재판장과 배심원이 고소인과 변호인의 심리를 각가가 청취할 때, 대개 피고인의 운명은 서약하고 증언하기 위해 소환된 증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불려 나온 증인은 심문과 그에 대한 반대 심문을 받게 됩니다. 위증은 극악한 범죄 행위로 결코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거짓 증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한 죄수가 어디 예수님뿐이겠습니까? 거짓 증언은 비단 법정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혹은 더 큰 공동체에서 중상모략 내지는 악의적인 험담 형태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망론된 폄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고 2천년전 사도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들은 별식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내려갑니다. 우리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때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