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란…

중생이란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성경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분별할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최영의 (배달)씨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분은 맨 손으로 소의 뿔을 짜르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손 날을 세워 따닥하고 치면 소의 뿔 두개가 전부 잘라진다고 합니다. 대단한 기술과 힘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친구 중에 당수를 배운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오다가 소에게 일격을 가했는데 그만 소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 소임자가 친구 아버님에게 가서 소 값을 물어내라고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너 왜 가만히 있는 소를 죽였냐?” 하고 물으니 “소가 나를 째려 보아서 기분이 나빠 죽였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소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안 친구는 아버지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저를 사랑하셨으니 이제는 제가 올바르게 살겠습니다” 후에 그 친구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행동을 고치는데는 은혜를 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감사함이 나오면 저절로 행동은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알코올중독과 같은 것은 다른 조치를 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백년간 애굽 땅에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 노예살이가 얼마나 심했으면 쇠풀무라고 이야기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 전혀 없이 오직 모세를 보내사 이들을 당신의 기적으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물과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생존하게 하신 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후에 가나안 땅을 그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구속하시고 또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연한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노예살이를 벗어나게 하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너희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길에 행할 때에든지 자리에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앉았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결국 국가가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수로 끌려갔고 돌아와서 다시 번성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를 저질러 온 세계에 흩어지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과 하나님의 말씀의 암기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만큼 악하고 우리 주변에는 마귀가 진을 치고 밤낮 우리를 유혹할 방법을 연구하고 실행하고, 세상은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당신 사이에 놓여있는 율법의 정죄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외치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질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느니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다 청산하셔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모든 자에게 보여주셨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죽으셨다는 소식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두시고, 우리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들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빌트인 (built in)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성경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분별할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들어오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 것으로 그 가르침에 굳게 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삽화: 신예현, putting the good work into practice (2016) lifeisyea.com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3장 15 – 22절

자신은 고작 물로 침례를 주고 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침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심중에 의논할 때 요한은 밝히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가장 큰 일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침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스라엘에 알렸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서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요한은 겸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고작 물로 침례를 주고 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행하실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죄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태도를 본받아만 하겠습니다.

 

1.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은 침례 요한의 겸손함의 원천이었습니다.
3. 그러나 진정한 겸손을 위해서는 죄인들과 함께 침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매일 큐티

2016. 1. 11-15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2016.1.11
제 7계명은 각 사회의 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일컫는 야곱의 경우 4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제 7계명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을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 역시 일부 다처제였습니다. 이후 제정된 모세 율법만 보더라도 명백히 동거 목적으로 계집 종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출21:7-11). 이런 상황에서 7계명은 남편이 있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질 때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간음의 문제를 다룬 산상수훈에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 28)고 하심으로 행위에서 마음의 문제로 이전을 하셨고, 이혼에 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단수)와 여자(단수)로 지으시고”(마19: 4) 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일부일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의 임명 조건으로 “한 아내의 남편” (딤후3: 2, 12)을 두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부일처에 근거하여 제 7계명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2016.1.12
그리스도인은 성(性)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로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창1:27) 하셨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성(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사실과 이는 자녀 출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두 배우자가 서로 만족을 느끼도록 결혼을 제정하신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2:24). 예수님도 앞에 언급하신 두 구절을 친히 소개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막10:6-9)고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바울 역시 남편과 아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엡 5:21-33). 제7계명은 이런 진리를 배경으로 의의를 갖습니다.

 
2016.1.13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은 결혼이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을 통해서만 우리가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의 성적인 쾌락은 금하시는 것입니다. 제 7계명에서는 오직 간음만을 구체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혼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대개는 속임으로), 배우자와 원래 약속했던 정절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녀들의 성장에도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결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성적 부도덕 행위들도 결혼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제7계명 속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16.1.14
제7계명 속에 함축된 여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혼외정사와 혼전동거를 먼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성관계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랑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한쪽 배우자는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간절한 반면에 다른 쪽 배우자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이런 관계는 상대방에게 잔인한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성 간의 결혼이 이성 간의 결혼 관계에 대한 합법적인 대안이라는 ‘동성애’ 단체의 주장을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인하신 ‘한 몸’의 체험은 오로지 이성 간의 일부일처 관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2016.1.15
7계명과 관련하여 일생 독신으로 사시다가 90살에 소천하신 존 스타트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인 충동이 너무 강력해 제어할 수 없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동물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아도, 또 그 유혹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는 간증입니다 (고전10:13). 따라서 우리는 성적인 자기제어가 가능하며, “음행을 피해야” 하고, 또한 그분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고전 6:18-20).’

 

소렉 골짜기와 삼손

소렉 골짜기와 삼손 (사사기 13-16)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있을 때 블레셋민족이 가나안 땅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이 대략 비시1,200년경이었다. 이들은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 이렇게 다섯 성읍을 일으켰고 각자 왕이 있어 다스렸다. 이런 강력한 요새와 우월한 병기를 가지고 동쪽 산지에 자리를 잡은 이스라엘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가나안 중부지역에 위치한 쉐펠라(Shephelah- 히브리어: “낮은(low)”) 지역을 통과하여 이스라엘과 접촉하거나 칩입할 수 있었다. 쉐펠라 지역은 통상 “낮은 땅”으로 번역되며, 해변 평야와 유다 산지 사이에 있는 평야지대로서 동서의 길이 약 20킬로미터정도 되고 여러 낮은 구릉들을 가지고 있었다. 쉐펠라 지역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아얄론 골짜기, 소렉골짜기, 엘라골짜기, 구브린골짜기, 라기스골짜기까지 중요한 5개의 계곡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풍부한 비와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곡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완충작용을 하는 지역이어서,이스라엘 특히 유다와 벤야민 족속의 안전은 이 지역을 침입하는 블레셋 군대를 얼마나 잘 방어하는가에 딸려 있었다.

이 쉐펠라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삼손이 태어나고 자란 소렉골짜기이며, 그의 첫번째 블레셋과의 접촉도 바로 이 소렉골짜기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 딤나였다(사14-15). 딤나에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잔치를 여는 중 내기에 진 삼손은 여기서 약 38킬로 떨어진 블레셋 성읍 중 하나인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30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의복을 가져다 주었다. 또 한편 자신의 아내를 타인에게 준 것을 빌미 삼아 블레셋을 쳐서 1천명을 죽인 곳도 소렉골짜기 북쪽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레히라는 지역이었다. 이 후 20년간을 이스라엘 사사로 있으면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렉 골짜기에 사는 여인 들릴라의 배신으로 가사(삼손의 고향 소라에서 약60킬로 떨어진 남서쪽 해안지대에 위치한 성읍) 로 끌려가 두 눈이 뽑히어 맷돌을 돌렸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로 힘이 회복되었고, 자신이 죽으면서 다곤신당을 무너뜨려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 그 결과 삼손이 죽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아있을 때 죽인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사16:30).

삼손은 모든 그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가장 큰 적인 마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앞으로 주어질 영원한 구원의 토대를 놓으신 것처럼(히2:14-15; 벧전1:3-5), 그도 죽음으로써 다곤 신당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인 블레셋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72-7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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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Yea Hyun Shin  

회개의 열매와 그리스도

회개의 열매와 그리스도 (눅 3:7-14)

침례 요한이 온 유대에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요단 강으로 나와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침례라는 의식을 통해서도, 입술의 고백만으로서도, 아브라함과 혈통적인 관계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써 맺어지는 것이지 유벽한 산이나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홀로 수양하면서 맺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서로 나눠주는 삶을 영위하고, 세리와 군인들에게는 정당한 세금과 봉급만을 받고 살아갈 것을 가르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 회개의 뿌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속죄와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진리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1/4~2016/1/8)

이웃을 향한 사랑: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롬13:10). 이 말씀과 같이 소극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말이나 행동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황금률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그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남은 다섯 가지 계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역행하는 다섯 가지 범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이 계명을 인간 생명을 취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 조항으로 여기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형제도의 폐지론자와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6계명에 대한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율법이 극단적인 경우에 형벌로써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족속과의 거룩한 전쟁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6 계명이 금하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불법적인 살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거듭 정죄를 받았던 최악의 범죄 가운데 하나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과 같은 제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동물을 포함한 일반적인 생명의 신성함보다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계명의 범위를 살인을 행하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말과 심지어 생각으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셨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임)라 하는 자는 공회 (유대인 최고재판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을 의미)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5:22). 이 말씀의 의미는 부당하게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 고 가르쳐 주심으로 형제를 부당히 분노하게 만드는 행위 역시 살인 죄에 해당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인 규범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야말로 구약에서 사형이라는 형벌이 제정된 근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9:6). 성경에 따르면, 사형이란 (살인자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유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사형으로부터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창4:13-15). 사견으로는 국가는 생명을 취할 권위, 즉 칼을 가질 권세 (롬13:4)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들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존재함으로 이에 따른 형량의 감경을 고려해야만 하고 대다수의 국가에서 형법의 규정에 그런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동일한 원리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문제로 대두됩니다. 태아는 적어도 곧 인간으로 만들어질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낙태의 선택권을 지지 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낙태에 의한 태아의 파괴를 극히 조심스럽게 제한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살인으로 간주하며, 태아에 대한 실험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입장이 타당합니다.

수요일터예배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길 아래에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6-7)

미디안에서 정착한 모세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평범하나 행복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 모세는 늘상 괴로와 하였을 것입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로 분장한 찰슨 헤스톤의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구원은 언제 올 것입니까? 이해하고도 남지요. 모세가 애굽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였을 때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400년이 거의 찼을 때입니다. 그러나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서 사는 사이에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400년은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는 마음에 회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족의 괴로움때문에 가슴아파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안중근 의사나 백범선생 만큼 이나 애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될 때까지 모세가 필요한 마지막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는 은총적인 준비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르심과 향후의 소명을 보시려면 이런 은총적인 준비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고 당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헛되이 살게 하시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일하게 하시는 일에 연결되어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십시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종으로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 생활을 하게 하셨지만 그의 타고난 성실성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통하여 가정총무에 이르고 여기서 항상 2인자의 길을 닦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2인자의 길을 닦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바로앞에 서게 되며 바로의 아비가 되게 하여 전 애굽사람과 가나안사람들을 흉년에서 구출하시는 소명을 맡기십니다.. 천사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미리 요셉을 준비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 이유를 그 때는 몰랐던 것 뿐입니다.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어서야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혈기를 누루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앞에 겸손한 자세로 서는 태도를 배웠어야 합니다. 이 훈련을 40년간 광야에서 아무런 지위나 명예도 없이 목자로서 살아가면서 체득하였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온유한 사람이 되어서 신명기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불리워졌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양떼를 이끌면서 양떼의 성향과 특성 그리고 어떻게 목양을 하면 좋은지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꼴을 찾아 다니면서 맹수들로부터 이들을 지켜야만 하는 여러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그로하여금 양들대신 하나님의 백성을 맡았을 때에 진가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목표를 향하여 백성들을 이끄는 강함과 부드러움 의 지도자의 철학을 터득하였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미디안 광야를 40년간 돌아다니면서 광야의 지형과 위험 그리고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이는 향후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면서 돌아다닐 지역을 미리40년간 답사한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끌 지도자의 여러 자질들과 조건을 갖추게 하시고는 이제 때가 차매 부르시고 권능을 부여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만 할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말없이 충성하라. 그러면 향후 우리의 미래를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갈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십시요.

 

다시 시작하는 꿈을 가집시다

다시 시작하는 꿈을 가집시다 (출애굽기  2장 11-15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히브리 사람 모세는 애굽사람을 죽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 한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물가에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모세는 선행을 하였고 그 결과 미디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40년 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고는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과 믿음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2016년 첫 주일을 맞이한 우리에게도 상황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당연히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가정과 교회와 직장을 섬기려고 노력할 때 닥치는 여러가지 어려움, 손해들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광야의 우물가에 앉게 될 것이지만 모세와 같이 선행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물가가 어디인지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여 인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우물가에 앉아 있기 전 모세는 결단의 삶을 살았습니다

2.     우물가에 앉아 있게 된 모세는 선행을 하였습니다

3.    우물가의 사건 후 모세는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SBC 매일 큐티

2015. 12. 28 ~ 3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고르반 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뜻은 드렸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 혹은 바쳤다 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 법률은 개개인이 자신의 재산에 하나님께 드린 것임 이란 표시를 하여 일상적인 용도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친 헌물의 성격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행하는 것은 심각한 결정이었고 거의 번복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 맹세를 위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중대한 결과를 맞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는데 이는 아들이 자신의 재물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그의 부모님이 그 재산에서 혜택을 보지 못하도록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은 실질상 제 5계명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에게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도다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해석이나 전통을 이용하여 실질상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계명은 오직 자녀가 부모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도 자녀들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녀들이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골3:21). 이러한 의무의 상호적인 속성은 부모의 행동에 확실한 점검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5계명의 범위는 부모의 차원을 넘어서 선생님, 목회자, 고용주와 우리 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소위 우리의 손윗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사랑하시며, 따라서 분명한 위계질서를 세우시고(특히 가족과 국가에),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기 바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와 인간의 제도에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실 때, 그들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자유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나 제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것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들의 표현한 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극적인 교육방법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일 뿐만 아니라 대조를 통해 양자를 비교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의 좋은 예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한 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한 분이 어떻게 다음에는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의 열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 10:3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로 2015년도가  끝났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2016년도에 주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르엘 평야에서 시스라 군대의 패배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동안 학대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와 바락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납달리와 스불론의 백성 일만명을 이끌고 이스르엘 평야 북동쪽 끝에 있는 다볼산(588미터)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바락이 군대를 이끌고 다볼산으로 간 것은 보병만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대가 철병거 900대를 가진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대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볼산의 비탈길과 나무들로 인하여 철병거를 운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스라는 그 철병거들을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았다(삿4:7,13). 병거들은 압도적인 속도와 이동발사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고대세계에서는 전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스르엘 평야에서 이 철병거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염려스러운 대상이었다. 이스르엘 평야는 북으로는 나사렛 산지로부터 남으로는 갈멜산지에 이르는 넓은 평야이다. 그러므로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군대들이 싸우기에 아주 좋은 지형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락에게 다볼산을 내려가서 평야에 있는 적군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주셨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매우 우수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고지의 유리함을 버리고 평야의 약점을 취하라고 요청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의 마음 속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는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을 박차고 내려왔을 때 시스라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배하였다. 어찌된 것일까? 가나안 철병거들이 힘차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르엘 평지를 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폭우를 내리셔서(사5:4, 21) 기손강을 넘쳐흐르게 하시고 이스르엘 평지를 물로 범람하게 하신 것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시스라와 그 군대들은 신속히 철병거를 버리고 걸어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사4:15). 왜냐하면 그들의 철병거는 갑자기 내린 폭우와 이로 인한 진흙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락의 군사들은 시스라의 본거지인 하로셋에 이르러 시스라의 군대를 전부 몰살시켰다(사4:17).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인 바락과 드보라를 사용하시어 승리를 도저히 예견하기 어려운 때 인간이 예기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8-6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