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그리스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3장 1-6절)

오늘 본문은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활동하신 시기가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로마황제가 된 때,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이 각각 갈릴리, 베레아와 이두래, 드라고닛을 다스리고,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된 시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역시 많은 어려움이 세상에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와 문제가 많은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례 요한을 보내어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것과 같이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외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의 외침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위한 준비로써, 구원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 사함을 위한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죄와 문제로 가득찬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2.     사함을 얻는 회개의 침례를 통해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3.    주 예수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SBC 매일큐티

2015.12.21 25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1)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허락된 일과 금지된 일을 소소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상술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한 법을 사소한 규정들로 덮어씌우는 바람에 오히려 그 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규정들을 고의로 깨뜨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규정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이 허기져서 곡식의 이삭들을 잘라 먹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것이 추수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반면, 주님은 오히려 그들 격려하셨습니다.이를 통하여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 원칙을 천명하셨습니다(막2:23-28). 그러나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근본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못하고 에어컨도 켜거나 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2)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것을 강요하는 안식일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안식과 경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 성경의 원리를 확실히 받아들이셨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한 안식일에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컨데 종교적인 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 마태복음 12:5)이라든가, 자선행위 (병자를 치유하는 일, 마태복음 12:9-10) 그리고 필수 불가결한 일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일, 마태복음 12:11)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성직자, 의사, 농부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3)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중 어떤 날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하겠습니까?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지금도 제7일 안식교인들은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4계명의 신학적인 근거가 천지창조의 안식에서 출애굽의 안식으로 의미가 발전되었다는 것을 먼저 유념해야 합니다. 즉, 안식의 근거인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쉬신7번째 날(토요일)은 애굽을 탈출한 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4계명의 핵심은 날짜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일 리듬에 있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출애굽한 날입니다. 사망의 포로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주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로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의미있는 날을 선택하여 계속해서 예배의 날로 지켜졌다는 증거는 명백합니다(행20:7; 고전16:1-2).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

5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 것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의무의 규정에 포함되느냐에 대하여 다툼이 있습니다. 그것은 5계명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할 때 양쪽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공경하라 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셔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원어는 카베드 כַּבֵּד 로서 존경하다, 중히 여기다, 명예롭게 하다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모님께 합당한 존경과 명예를 드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5 계명은 부모님께 그 분들이 받을 합당한 권위를 드려라고 의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은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돌보심을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만 합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 

그런데 5계명은 십계명 중 유일하게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면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5계명의 전반부는 우리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후반부의 약속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엡 6:2-3)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5계명을 이방인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단순히 이라고 해석함으로서 5계명을 모든 민족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축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탄절과 십자가

성탄절과 십자가의 사건이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죄된 마음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어디에서 설교하건 초월적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이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죄와 반역을 하고 있다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 갑자기 천둥이 치면 혹시 내 죄값으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은 죄의식을 억누르거나 부인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이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때 이를 받아들여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한 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이틀이 남은 오늘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한 사실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로 사망과 사탄의 종이 되도록 이끈 죄의 권세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고 예언한 구절들이 구약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주신 이사야 9장 6-7의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모사라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실 것임이라. 그의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에게 선언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그는(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 단수) 너의(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사탄)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조그만 유대 고을 베들레헴에 오시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죄가 초래한 우주적인 벌과 결과들, 즉 영원한 죽음을 처리하시고 당신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이며, 모든 것을 충족하는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주실 작정이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요람도 없습니다. 빈 무덤에 남은 포개진 옷들이 없이는 배내옷도 없는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 그리고 테러로 얼룩진 세상을 위해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의심과 낙담으로 꽉 들어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전략가이십니다. 사망에 직면하여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자들을 위하여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세상은 점점 곤란해지고 무질서해져 갈 것이지만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는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통치하고 계시며 신자들은 기뻐할 것이고 불신자들은 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첫 강림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그는 이번에는 유다의 사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거절하는 모든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땐 크리스마스의 이야기가 완성될 것입니다. 모든 종족, 언어, 민족 가운데서 나온 백성들이 그의 발 밑에서 경배할 것입니다(2015 BGEA 프랭크 빌리그래엄).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2장 40 – 52절

오늘 본문에서 12살 되던 해에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유월절 축제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비시 1446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죽이실 때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만 사망을 면할 수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실상 이 유월절 어린양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들어오사 죄의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년을 어린 시절과 가족의 부양을 위한 평범한 삶을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요한 순간들이며 이런 일상의 삶을 영위할 때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삼 면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SBC 카톡말씀 나눔

2015/12/7-11

제2계명

둘째, 우상 숭배자는 영으로(즉, 하나님은 영이시며 따라서 영적인 경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며 만져 볼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조차 형식주의에 치우치는 경향과 심지어 노골적인 외식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주전 7 -8 세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공허한 종교성을 가차 없이 비난했으며, 예수님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6). 그러므로 예식, 순례 행진, 드라마, 각종 의식, 무릎을 꿇거나 두 팔을 올리는 등,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외형적인 형식을 사용하든지 간에, 영과 진리로라는 이중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우상 숭배라는 죄목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십니다. 이 말에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질투는 라이벌에 대한 분노이며,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라이벌이 상대편 자리에 있을 권리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만을 섬기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고 하신 말씀은 물질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우리에게는 세상살이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돌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돈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6:25-34). 

또한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 각자에게 지우신다는 사실은 성경 후반부에 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예, 에스겔1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계명은 영구적이고 중대한 한 가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악의 사회적인 속성 때문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종종 부모가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결과는 신체적으로(유전된 질병등), 사회적으로 (술과 도박으로 인한 가난), 정신적으로(불행한 가정에서의 긴장과 분쟁), 그리고 도적적으로 (자녀가 배우는 부모등의 악습) 자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게의 국어사전의 뜻은 정신이 흐려 정상을 벗어나서의 뜻이나 원어의 의미는 헛되이 in vain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경우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세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명백한 경우는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이 친히 알려주신 칭호들(, 하나님, 전능자, 그리스도, 예수등)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 칭호들을 덧붙이는 말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 같은 데 사용하는 것은 그분을 경시하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분을 경배하려는 열망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영어에서 사용하는 gosh, gee 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단축해서 표현하는 변조된 용어들을 사용하지도 기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3계명에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약속이나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서 그 약속을 깨뜨린다면, 그것은 곧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일부 사람들은 맹세할 때 올바른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 두고’ 나 그 밖에 땅에 두고 혹은 그 밖의 것을 두고 맹세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5:33-37). 주님은 이에 대하여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그저 간단하게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의해야할 대목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바알 숭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뒤, 광야에서 기적으로 돌보시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을 경우 받는 위험들이 무엇이며,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국가로 삼으신 목적과 이유를 알려주셨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바로 이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가나안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는가?이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바로 가나안 땅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과 기후 때문이었다. 고대 가나안 땅에는 곡식 즉, 밀과 보리의 추수만큼 중요한 식량원은 없는 것이었다. 풍성한 추수를 하기 위해 충분한 물의 공급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늘상 비가 내리거나 이집트와 같은 거대한 나일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이 익을 때 즈음에 알맞은 비가 내려야만 그 해의 곡물을 거둘 수가 있었다. 적당한 비가 없다면 목초지도 시들어가고, 우물이나 저수지도 바짝 마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밀과 보리는 추수하기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졌지만 최근에 정복자로서 이민하여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비로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가나안식 농업을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가나안식 농업을 배우는 동안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을 경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가나안 신학에 따르면 사람들의 일상은 신들의 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천둥, 사망, 가뭄 그리고 전쟁조차 신들 행동때문에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신학에 등장하는 신들은 비도덕하고 능력은 있지만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 욕망을 인간들이 조작할 수 있다면 신들의 능력을 빌어 가뭄이나 전쟁등 인간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조작의 방법으로 각종 음란한 행위등이 포함되어 가나안 백성 전체를 타락시킨 것이었다.

가나안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업에서 성공하려면 단순히 때를 따라 씨를 뿌리고 가꾸는 행동뿐만 아니라 바알 숭배와 관련된 가증스러운 행동들을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매우 증오스러운 문화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이런 문화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명령하셨고(신11:10-15), 더 나아가 가나안 땅은 농업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풍성한 추수를 위하여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할 것을 경고하셨다(신11:10-1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성한 추수를 담보한다는 명목하에 바알 숭배를 음란하듯이 시행하였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예측할 수 없는 기후에 직면하여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하였다면 주변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충분히 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내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비라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신뢰하는 쪽을 택하였던 것이다. 시편 4편은 이런 가나안 땅의 특색을 전제로 역경에 처한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시인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6-67 참조).

신예현 – 약속의 밭 lifeisyea.com

구원과 그리스도

구원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22-39절)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들어가서 모세 율법을 따라 3가지를 준행했습니다.이때 성령님의 인도로 시므온이 와서 이 아기는 “만민 앞에서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으로서 언급하여 예수님 구원 사역을 예언하고 나아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흥하게 하기 위한 표적으로 세움받았으며,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들을 드러나게 하실 것으로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시므온의 말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돌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심판의 돌이되고, 각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는 시험하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이미 믿은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돌이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의 돌이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험하는 돌이 됩니다.

SBC 카톡 말씀 나눔

(11/30/15) 십계명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그리고 자연스럽게 첫 번째 계명이 이어집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요구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구해 주시고 시내 산에서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라 그들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셨습니다(출19:3-6).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인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그리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우리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골1:13-14).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12/01/15)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선포하신 것은 그분이 구원과 언약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유알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6), 나는 낸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고 말씀하심으로 제1계명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만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할 근거는 바로 그분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2/02/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배는 단순히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한 시간 동안 말로 표현하는 경배가 평소에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드려 온 우리 마음의 표현일 때에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제1순위에 두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살짝 엿볼 수 있는데, 천국에 대한 환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계 4-7장). 우리는 이런한 하나님 중심의 천국 생활을 지상에서 미리 실천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godliness)의 참뜻입니다.

(12/0315) 첫 번째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예배를 요구한다면, 둘째 계명은 그 예배가 참되고 영적이어야 하며 우상 숭배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계명 자체를 적어보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2/04/15) 요한복음4장23-24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되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2계명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을 진리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예배하지 아니하고 그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를 그분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의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행17:24-31;롬1:21-25). 우상의 형상들은 외적인 형태를 띠기 전에 이미 정신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거짓되고 무익한 모든 개념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 (잠언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명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5-6)

마이크 홈 그렌은 고교시절 미국 대표 풋볼팀의 쿼터백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UCLA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학창 시절 그의 꿈은 단 하나 미국프로 풋볼리그인 NFL에 진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 구단에서 그를 영입했을 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팀에서 방출되었고 다른 팀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훗날 마이크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일로 저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풋볼 선수로 활약하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왔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정말이지 완전히 패배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마이크는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의 눈에 문득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성경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11세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를 풋볼에만 두고 사느라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성경을 한번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여기저기 흝어보았는데 잠언 3장5-6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마이크는 자기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마이크는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로부터 풋볼 코치를 맡아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이일을 계기로 게속 코치로 일하게 되어 나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눈부신 성공 신화를 이룬 NFL 코치 가운데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건 슈퍼볼 반지가 아니라 영생의 면류관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그 영광스러운 면류관 말입니다.(강준민, 기다림은 길을 엽니다, 293-29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말씀으로 마이크를 찾아가셨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받은 것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런 삶을 통해 신앙이 자라갔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셔야만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편집권을 갖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고 이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영혼에 닻과 같아서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선물을 주신 분이 아까우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있다고 마이크가 당장 NFL프로 선수로 영입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마이크는 모교의 코치로 요청받았고 이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이 길이 마이크를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겸손해진 마이크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고 드디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코치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움직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에 두어야 하며 나머지 삶은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믿고 한 걸음씩 지혜를 다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nfl_walsh_02Mike Holmgren –  http://espn.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