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9. 3 – 7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하신 뜻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여기서 ‘멍에’란 소의 목에 수평으로 메우는 나무틀입니다. 지금은 쉽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에 가면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이나 논을 갈아엎는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권위, 특히 압제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자연히 멍에를 활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은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었고(렘 27:1-15), 도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딤전6:1) 것은 곧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58:6). 그러나 멍에로 상징되는 권위가 언제나 폭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복종하여야 할 권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하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이 주님의 확언입니다. 왜 그렇까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농부에 우리를 그분을 섬기는 소에 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 자신의 멍에를 두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분의 멍에를 메도록 다시 말해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짐이 가벼우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덕법을 자력으로 지켜내려고 하거나 순종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배려하도록 규정한 도덕법을 지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죄책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뒤로는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의 완전한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인도하시고 힘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를 즐거워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즉 그분의 쉬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우리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의지입니다. 먼저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는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랍비들은 늘 ‘토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말하였으며, 그것은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가 압제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롬7:12),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5:3). 그러나 자력으로 지키려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라고 주신 것(시119:105)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소소한 규칙들과 계율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압제적인 “장로들의 전통”(쇠 멍에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이 가르치는 쉬운 멍에를 내놓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분부하심으로 주님은 은유를 바꾸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소를 거느린 농부가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으로 바뀐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학교를 세우신 셈입니다. 이 초청은 더 유명한 다른 초청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데, 다른 초청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고 죄책을 제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멍에를 쉽게 하고 짐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다른 역할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짐을 벗기는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짐을 지우는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그 둘의 차이는 우리의 짐은 무겁고 우리의 멍에는 불편한 반면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이 점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 혹은 종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당연히 유대교 랍비들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아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사고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성경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7-8).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와 가르침하에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즈음까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 교육을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4:25; 16:12-14).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영원, 죄와 구원, 창조와 구속, 믿음, 사랑, 의와 소망, 성경과 성령, 삶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 및 영광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과 함께 여러 교리와 관련하여 당대의 유대교나 세상적인 견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비전입니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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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7 – 31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remain in’ 우리가 그분께 그것을 허용해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책임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날마다 새롭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봄날 나무에 진액이 차오르듯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몇 가지 조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라일 주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 내게 꼭 달라 붙어 있으라. 나와 가깝고 친밀하게 연합된 삶을 살라. 내게 점점 더 가까이 오라. 모든 짐을 내게 내려놓으라. 네 모든 무게를 내게 실으라.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붙든 손을 놓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혹은 ‘거하라’는 명령은 지칠 줄 모르고 집요하게 그분을 좇는 추구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씨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소리친 야곱의 정신입니다. 특히 우리는 ‘은혜의 통로들’을 사용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의 훈련에 숙달되어 있을수록 나머지 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과 능력에 의존하여 살기가 더욱 쉬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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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0 -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참고 갈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 치심’이란 가축이나 노예들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인두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 구별하시는 표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잎이 흔들림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성령님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Cor. 12:3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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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신령한(영적인, spiritual)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친밀한 인격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실 복을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 주된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새로운 신분의 복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대부분 우리 자아상은 사회적 신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함과 감투와 큰 집과 좋은 차와 배지 그리고 정복을 좋아합니다.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좋아하여 대화 중에 은근히 그들의 이름을 ‘흘리곤’ 합니다. 그것들이 다 신분의 상징물이며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신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영적인 신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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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예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의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연합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연합 자체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의 파장과 책임을 두고 논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한다는 것은 기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천주교와 그리스정교회의 전통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개신교는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교파는 성령의 권능을 중시하며, 자유주의 전통은 예수님을 본질상 “남을 위한 인간”으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구제 사역과 사회 정의의 추구를 참 제자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신약성경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며, 세례와 신조와 행동은 그 결과로 자연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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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30 – 8. 3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집을 짓는 자로되 다만 각자 현장에 이를 때 건축의 단계가 다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기초)를 닦아 두는”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닦아 둔 기초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 이후에 아볼로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가 닦은 기초 위에 집을 세웠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재료를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 즉 온갖 거짓된 가르침은 타버릴 것이요, 오직 “금이나 은이나 보석” 즉 그리스도의 바른 가르침만이 심판 날에 마지막 불의 연단을 견딜 것입니다.(참고 고전3:10-15). 바울은 “다른 터는 없다”고 했고, 베드로는 “다른 이름은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우리는 그 이름 위에서 쉬고 그 기초 위에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도 유다의 말씀을 가지고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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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23-27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48년 믿음 때문에 루마니아의 어느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심한 고문과 심문, 어쩌면 수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죽음까지도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견딜 만큼 자신의 믿음이 강한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성경에 하루 하루를 위해서 366번이나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365번이 아니고 윤년까지 생각해서 366번이나!’ 그리고 바로 그 날이 2월29일이었는데, 이 사실이 더 위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목사님은 14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출감하였고 2001년 92세의 일기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이 언약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보장됩니다. 이런 믿음의 기초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믿지 않을 핑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488장)라는 찬양은 19세기 중엽에 26년간 영국 서섹스 호셤에서 사역한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시로 이런 진리를 명확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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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16-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이사야가 믿음을 촉구한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언급한 이사야의 다른 구절들과 연결하여 믿음의 도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래서 이사야 28장과 8장의 말씀을 함께 놓고 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기촛돌이거나 아니면 걸림돌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반석이시며, 우리는 그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거나 아니면 그분한테 부딪쳐 정강이가 깨지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는 구원 사이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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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9  13

존 스토트 목사님은 신약 성경에서 위에 upon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왜냐하면 그 단어가 쓰일 때마다 그분은 터와 기둥과 기초로 그려지고우리는 그 위에 서고 그 위에 기대고 그 위에 짓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주님은 우리 믿음의 삶의 견고한 기초가 되심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도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으며위에 라는 단어는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셨고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 위에서 안식을 누리며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고우리는 그 독특한 계시 위에 우리의 삶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7-8세기경 불린 라틴어 찬송을 하나 보겠습니다그리스도는 견고한 기초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로운 머리이자 또한 모퉁잇돌온 교회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시온의 영원한 도움오직 하나뿐인 의지할 분.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5).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온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한 풍족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제물을 드리신 뒤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속죄의 사역은 완수되었고 그분은 이미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일을 다 이루시고 쉬신다면 우리도 그 완성된 일 안에서 혹은 그 위에서 쉬어야 합니다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히브리서는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안식할 것을 또한 강조합니다(3-4). 여기서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는데 하나는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이며다른 하나는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5:11)는 엄중한 경고입니다이 둘을 근거로 저자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 백성에게 약속하시는 안식이 있으며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정확히 추론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4:3 사역). 여기서의 안식은 구원받음을 의미하며구원받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오래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그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2:10 사역)

 히브리서 저자는 안실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라고 말한 뒤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4:10)고 덧붙입니다이것은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일과 쉼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입니다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우리는 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 안에서 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려고 애쓰던 일들을 그치고 쉬고 있는 것입니다구원의 믿음은 곧 안식의 믿음이며 전적으로 구주를 의지하는 신뢰입니다선교사 존 페이턴(John Paton 1824-1907)은 남태평양의 아니와 섬에서 그들의 언어로 요한복음 1장 12절을 번역하다가 이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그 섬 주민들은 식인종이었고 사람을 믿지 않았으며그들의 언어에는믿는다는 말이 없었습니다마침 원주민 일꾼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에 발을 바닥에서 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일꾼은 몸의 무게를 몽땅 기대라라는 동사를 써서 대답했습니다그래서 페이턴은 요한복음 전체에 나오는 믿는다는 말을 바로 그 단어를 써서 번역했습니다아주 적합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믿는 것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가 믿는다에 관한 원어를 가지고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은 신봉하다 believe into라는 의미의pisteuo eis를 사용한 반면사도행전은 의지하다 believe on 라는 의미의 pisteuo epi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는 빌립보 간수의 불안한 질문에 바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의지하라), 그리하면.구원을 받으리라(16:31; 참고9:42; 11:17)). 현대 교회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영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이 품는 그런 확신을 무리한 억측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참된 확신은 억측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입니다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고요하고 겸손한 확신입니다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믿음의 능력의 참 비밀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마르틴 루터는 그의 탁월한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믿음은……고귀한 보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위협으로 유다가 흔들릴 때 유다는 누군가를 의뢰해야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이들은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뢰하면 안되었습니다그러면 누구를 의지하여야 할까요여기 이사야의 답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하나님의 백성은 이 기촛돌을 의지해야 합니다이사야가 말한 기초돌은 다윗 왕조를 가리키는데그 왕조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는 선한 왕 히스기야로 대변되지만 미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도록 되어 있습니다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매일말씀나눔

2018. 6. 4 – 6. 8

1662년 성공회 기도서 개정판의 중심 원리를 설명하는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공예배서가 최초로 편집된 이래로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극단과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영국 성공회의 지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지헤를 주시며 이를 교회의 사역뿐 아니라 사회, 윤리, 정치 영역에도 적용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들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들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가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우리는 과거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만큼 현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됨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건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뗐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행2:46).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복음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집회로 성전의 형식적인 예배를 보완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와 가정에서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교제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이 둘의 결합은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좋아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교인들은 가정 예배의 자유스러움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활기차고 자발적인 참여를 좋아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을 중시하는 예배의 장엄함과 경외감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 후에 기독교의 순회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한번은 힌두교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는 어느 불가지론자 교수가 그에게 시크교에서 얻지 못한 것 중 기독교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다 싱이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는 “그거야 나도 압니다. 이전에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찾았느냐 말입니다.” 라고 답답하듯이 말했습니다. 이에 선다 싱은 “내가 찾은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초점이 예수 당신께 맞추어져야만 비로서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은 어떤 것이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가꾸어갈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틀에 놀라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께 바쳐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보편화된 기도 공식은 우리를 ‘중보’라는 개념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활동들을 직접 취하시지 않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하시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활동하셔야만 하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온 한 가지 근본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 구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나님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는 다리들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무한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차이보다는 유사성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을 통해 그분의 합리성을,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모습도 없으시고 처음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분의 상상력의 발현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그분을 담기는 고사하고 그분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