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4/1 – 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5)- 결혼 생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1700년 전 북아프리카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고백록의 한 대목입니다: “어머니의 경우보다 더 온유하고 점잖은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남편에게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 다니는 부인들도 많았는데…” 모니카는 그런 부인들과 사적으로 대화 시, 남편들의 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경우, “혼인 서약을 하고 성혼이 선포된 후에는, 부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종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면서 농담을 섞어 진지하게 훈계한 뒤, 그들의 혀를 꾸짖고,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의 처지를 명심하여, 교만해져서 주인에게 대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충동적으로 충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부인들은 모니카의 남편이 성질 사납고 화를 잘 내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 파트리키우스가 자기 아내를 때렸다거나, 가정불화가 단 하루라도 있었다는 소문이 나돈 적도 없었고, 그런 일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도 자신들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놀라워 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지 넌지시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니카의 비결을 따라 살아간 부인들은 그녀의 말이 맞았음을 확인하고서 감사하였고, 그 비결을 따라 살지 않았던 부인들은 계속해서 남편에게 눌려서 고생하며 괴로운 삶을 살았다고 어거스틴은 기록합니다. 모니카의 비결은 사도들의 가르침(엡5:22-24;벧전3:1-6)을 그대로 실천한 열매로서, 인간 관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주님의 가르침이 해결의 비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6)- 결혼 생활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고백록에서 새삼 느낀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남에 대한 호기심과 수군거림이 존재하며, 특히 여자가 시집 가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하다고 보여집니다. 인간의 타락을 웅변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시고 이윽고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3:18). 모니카의 시어머니 역시 악의적인 하녀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듣자, 처음에는 며느리를 좋지 않게 보시고 화를 내었지만, 그녀가 인내와 온유함으로 잘 참아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자 화가 누그러지셔서, 자기 아들을 불러, 하녀들이 자기와 며느리를 이간질시켜, 가정의 화평을 어지럽혔으니 벌을 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남편 파트리키우스는, 모친의 당부도 있고, 이후 집안 사람들끼지 화목하게 지내게 하려면 적절한 징계를 통해서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뒤, 모친이 지목하였던 하녀들에게 매질을 하였고, 또한 시어머니는 앞으로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며느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험담을 하면, 이 같은 벌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험담이 사라지고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져서, 서로를 위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니, 모니카의 지혜로운 행실은 우리의 가정 생활, 결혼 생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귀감이 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29:10절
“남을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새번역)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라도 해치는 자를, ‘흠 없는 사람’이란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흠 없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려고 매우 노력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전형이 욥입니다.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상대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증오심을 갖는 감정상태로, 실제 공격하여 해를 끼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벨을 질투하여 살해한 가인의 모습입니다(창4:1-8). 이들이 왜 의인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의인의 책망과 비판은 가시 같아 불의한 이익이 침해받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잡아 죽인 이유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슨 짓이든지 행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고난은 불가피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살핌과, 자신의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믿고,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고난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의 도망자 생활에서 오히려 원수 사울을 두 번 살려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고,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신 뒤, 그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냥 거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주님의 의’를 빛 같이 드러내셨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1절
“어리석은 사람은 쌓인 분노를 다 터뜨려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 분노를 억제한다.”(새번역)

‘분노’의 원어는 ‘루아’입니다. ‘루아’는 ‘호흡, 바람, 영, 생각’을 뜻하며, ‘분노’는 통상 ’아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스리며 때와 상황에 맞추어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분노의 때가 가장 마음을 통제하기 어려워 바보와 현자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구약학자 롱맨 3세의 말입니다: “바보들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도 하지만, 확실히 말이 많다. 그들의 말은 문제를 일으키고 듣는 자들은 동요한다. 그들의 감정은 지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들의 감정은 종종 부적절하게 표현됨으로,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혜자는 냉철하기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만 입을 연다. 그들은 또한 바보들의 말로 야기된 어지러운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어리석은 자는 환경이 조금만 어렵고 위험해져도 안절부절못합니다. 가나안 접경에 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민14:1).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깊은 호수나 바다 같아, 쉽게 동요되지 않고, 매사에 신중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과 대적하는 고라의 무리에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후 행동하는 모세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지혜롭다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준비하신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인정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29:12절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2-14절의 주제는 공의에 근거한 통치 질서의 필요성입니다. 12절은 통치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14절은 긍정적 이미지를 각 다루며, 13절은 중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관원’으로 묘사된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를 기울일 경우 나타날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고, 선악을 분별할 지도자의 통치 능력을 요청합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는 의미를 내포하여 ‘통치자’로 번역 가능하고, ‘들으면’은 ‘듣고 따르다’는 의미입니다. ‘하인들’은 ‘섬기다’를 뜻하는 분사 형태를 번역한 것이나, 노예가 아니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관직에 있는 자들, 즉 ‘신하’를 지칭합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국가의 통치자가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며 오직 악인들만 남게 된다는 경고를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적합합니다. 잘못된 통치의 출발점은 통치자의 느슨한 윤리적 사고와 행동임이 새삼 강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통치자 다윗은 자신의 왕국에서 속임과 사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을 결단하고, 신실한 자를 살펴 함께 통치하려는 의사를 시로 피력합니다: “흠 없이 정직한 자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속이는 자는 내 집에 살지 못할 것이며 거짓말하는 자도 내 앞에 서지 못하리라. 내가 이 땅에서 매일 악인들을 제거할 것이니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여호와의 성에서 추방될 것이다.”(시편101:6b-8 현대인의성경). 책임 있는 자리에 앉게 되면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의 성취를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매일묵상(2024/3/25-29)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4년 부활절은 3/31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21)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1일 후  첫 만월은 3/24일(음력2/15)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3/31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3/24-3/30).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3/23),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3/24,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서쪽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앞 뒤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이윽고 성에 가까이 가신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기하시고, 오히려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3/25) 아침 성전을 향하던 중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셨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을 향하여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질문하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다가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그들에게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답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침묵케 하셨습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신 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막12:13-27).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의미하기에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묻지 못하였고, 오히려 주님이 질문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35-37). 이어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7장).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사,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며 통곡과 함께 피땀 흘리시며 기도(1시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7-68).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은 700년 전 이사야에 의해(사53: 7-8)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고 묻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이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것과, 당신이 세상 죄를 담당하실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고,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기록되었으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4/3/18-2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3)- 어린 시절

사려깊은 하녀로부터 엄한 교훈을 배우고 자랐지만, 모니카는 오히려 술마시는 악습에 빠졌습니다.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모니카 부모님은 어린 모니카에게 술통에서 술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때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주 조금 술을 맛보다가, 점점 더 빠져 결국 습관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는 자는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는 격언이 맞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 준비하신 약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우리의 이 은밀한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주님은 다른 사람의 비수 같이 날카롭고 통렬한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머니의 저 썩은 부분을 한 방에 도려내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모니카는 곳간으로 술을 가지러 갈 때에는 한 하녀와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종종 다투었고 그날도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가 남몰래 술을 마시는 악행을 들추고는, “술주정뱅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지독한 모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모니카는 그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악습을 끊었습니다. “친구들의 아부하는 말들이 우리를 망쳐 놓는 것처럼, 원수들의 모욕하는 말들은 흔히 우리를 바로잡아 놓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격동시키고 괴롭히기 위함이었지만, 주님은 “광분한 하녀의 말”을 통해 모니카를 고치시는 약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의 어떤 권면과 훈계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더라도,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겸손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4)- 결혼생활

어머니 모니카가 조신하고 분별력 있게 성장 한 것은, 인간적인 교육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말한 점은 새겨두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은 부모님을 넘어, 주님께 대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사려깊은 늙은 하녀, 모욕을 준 하녀 등을 통해 배우고 결단한 것이지만, 실상은 모니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녀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혼기가 찬 모니카는 비그리스도인 파트리키우스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자신의 행실로써 남편에게 주님을 전하였고, 주님은 모니카의 그러한 행실을 사용하셔서, 남편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인내로써 감당하였고, 그 일로 남편을 미워하여 불화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자비가 남편에게 임하여 주님을 믿고서 그 삶이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기도가 모니카의 ‘절대 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화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고 말도 행동도 조심하였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고 진정되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자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서 오해를 풀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니카의 결혼 생활에 남편의 폭행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와 인품입니다. “여러분은….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벧전3:3,4)

잠언29: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지식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학력이나 배움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학력이 높고 교육을 많이 받아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면, 은혜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빨리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6). 즉, 그들 모두는, 주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고, 더나아가 당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까지 드리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시 죌레(1929-2003)는 뉴욕 성당의 한 집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우아한 차림의 한 여성이 나와, 자기가 본 남미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모두 미국 백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과 심각한 인권유린, 극심한 빈부격차, 개발과 성장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가 자행되어 온 곳이었지만, 그녀는 화사한 차림으로 고급호텔과 관광명소만 드나들며 남미의 겉모습만 보고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마치 문 앞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아간 부자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받아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19:17)

잠언29:8절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시끄럽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 절은 의인과 악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합니다. 6,7절에 등장하는 ‘악인’을 ‘거만한 자’로 표현하는데, ‘거만한 자’는 히브리어 ‘라촌’의 번역입니다. ‘라촌’은 ‘입을 삐죽이다’, ‘비웃다’는 뜻이며, 권위의 멸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함을 내포합니다. ‘시끄럽게 하다’의 원어는 ‘야피후’이며, ‘불다’ ‘내뿜다’란 뜻으로, ‘불’이나 ‘거짓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전단은 거짓된 입술로 선동하여, 불을 일으킴과 같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를 알게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합니다. ‘분노’는 악인에 의해 야기된 성난 감정으로, 의인은 그런 사회적 동요를 진정시켜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지혜자입니다. 사회질서의 안정이야말로 평화스러운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BC 990년 경 일어난 둘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 왕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 선동에 직면하였습니다. 세바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얻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벨 성에 들어갔고, 그들을 뒤쫓은 군대장관 요압은 토성을 쌓고 성을 쳐서 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아벨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나 요압을 진정시키고, 성읍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던짐으로 성을 보전하였습니다(삼하20:14-22). 다툼이 있을 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새번역)

잠언29: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악인은 여기서 미련한 자로 등장합니다. 지혜자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과 탐욕을 버리지 않아서 그 분쟁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사이의 다툼은, 차분하게 결론으로 향하지 못하고 오직 혼란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미련한 자는 목을 곧게 하고 어떤 지혜도 무시하려는 특질을 염두에 두면서, 치밀어 오르는 노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언이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아라.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26:4,새번역)라는 권고는 많은 경우 타당하므로, 그런 자와는 아예 논쟁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불가피한 다툼이 전개될 시, 본 잠언은 해결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26:5,새번역)는 잠언이 참고가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창기 두 사람이 산 아기와 죽은 아기를 두고 서로 다투다가 왕 앞에 왔습니다. 악한 여인이 벌린 이 다툼이 그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어미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 앞에 온 것은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무시한 미련한 여인은, 증거 없음을 확신하고 거짓으로 일관하였으나 탄로 났고,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상징입니다. 마지막 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므로, 미해결의 문제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매일묵상(2024/3/11-1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1)

어거스틴(AD354-453)의 「고백록」은 전 세계와 모든 세대에서 널리 읽힌 고전으로 어거스틴은 당대 제일의 수사학자요 신학자였기에, 뛰어난 문체와 신앙에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백록」은 어거스틴이 북아프리카 히포 교구의 주교로서 교구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쓰여졌으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AD332-387)성도는 훌륭한 어머니요 아내요 이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사의 직을 던지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여,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죽습니다. 이때 모니카는 자신의 기도를 너무나도 풍부하게 응답하신 주님의 선하심을 가슴에 품고 기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삶을 고백록에 적어 후세에 남기기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니카는 육신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를 낳은 어머니여서, 그에게 육신의 빛과 영원한 빛을 모두 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훌륭한 어머니이지만 초점은 주님께 두어져서,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았고 경건함도 잃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지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양육한 것도 아니었으며, 조부모도 자기들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오직 주님께서 어머니를 지으시고, 주님의 교회의 신실한 지체였던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주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교훈의 회초리로 양육 받게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p284). 이 대목은 우리 모두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2)

「고백록」에 따르면, 모니카의 신실한 삶은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집안의 나이든 하녀 덕분입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부친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워낙 오랫동안 일해 온 데다가 나이도 아주 많고 성품도 훌륭해서, 그 그리스도 가정의 어른들도 그녀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딸들(어린 모니카 자매들)을 돌보는 일도 그 하녀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성심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필요시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딸들을 엄하게 통제하면서도, 지혜롭고 사려 깊게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지금부터 17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도, 여자들이 술에 빠져 사는 문제가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하녀는 술을 먹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이 아예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은 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너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 마시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결혼하여 부엌살림을 맡고 곳간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면, 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맨 날 술을 마셔서, 술 마시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런 교훈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위로 명함으로써 아직 어려 자신의 욕구들을 자제하기 힘든 그녀들을, 갈증나서 목이 타들어가도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훈련을 통해 절제와 인내심을 갖도록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안의 딸들은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녀들의 몸에 배게 하였답니다”(p284). 그러나, 모니카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은밀히 술 마시는 습관을 갖게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어린 모니카의 악습을 고치셨을까요? 모욕과 충격을 통한 금주의 결단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언3:15).

잠언29:4절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의(창기와 방탕)가 개인의 재산을 잃게 함을, 4절은 공적인 불의(뇌물과 중세 등)로 인한 국가의 파멸을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생기는 지혜를 갖고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후단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뇌물을 받는 자,’ ‘중세를 부과하는 자’ 혹은 ‘탐욕스러운 자’등으로 번역되나, 앞의 ‘정의’와 함께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불의를 지칭합니다. ‘멸망시킨다’ 말은, ‘넘어뜨리다’, ‘파괴하다’란 뜻의 원어 ‘하라쓰’의 번역으로 성벽이나 건물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사회와 국가를 공격해 무너뜨리는 ‘용맹한 적국의 장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왕은 전력을 다해 그런 자를 발본색원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확립해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교훈은 언제나 옳지만, 지혜로운 왕은 현실을 수용하는 통치기술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태종때부터 무려 40년 간 공직에 있을 정도로 유능하고 처신에 밝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 처남들의 위법 행위에 대한 구차한 변명,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죄를 은폐하려고 상주문을 조작한 행위 등을 알고도 세종대왕은 황희를 계속 중용하였습니다. 유능한 신하의 약점을 잡고 충성을 다하도록 한 세종의 통치기술로 생각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기술을 가져야 합니다(눅6:27).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잠언20:26).

잠언29: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5,6절은 ‘그물’과 ‘올무’라는 표현을 각 사용하여 악인은 타인과 자신을 멸망하게 하나, 의인은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영원한 심판과 생명까지 함축되어 있음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할라크’는 ‘매끄럽다’,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진실을 외면하고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거짓된 칭찬의 말, 즉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 놓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물’에 해당하는 ‘레쉐트’는 새와 같은 사냥감을 잡는 도구로서,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파멸의 대상인 ‘그’가 아첨하는 자 본인인지, 아첨을 받는 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입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남을 해하려는 악인의 아첨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멸망케 한다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아첨을 받은 이웃이 올바른 상황 판단을 못하여 파멸한다는 뜻입니다. 6절이 전자의 사례를 다루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좀 더 타당합니다. 좋은 예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 전투 중 죽은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악한 왕 아합의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부추켜서 아합은 확신을 갖고 전쟁터로 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사하였습니다. 악행을 보고도 책망치 않는다면, 파멸을 방조하는 행위입니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친구 동수를 죽인 죄를 자백한 준석은 법정에서, “어릴 때 ‘너 그런 짓 하면 안돼!’ 라는 말 한 마디만 들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는 최후의 진술은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13:14).

잠언29:6절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는 것이지만,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한다”(새번역)

전단을 직역하면, “악인의 범죄에는 올무가 있다”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두기에, 숨겨져 있는 파멸의 덫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바로 그 올무에 잡혀 파멸하는 악인입니다. 이른바 반전의 반전입니다만, 역사는 어느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사례들을 수 없이 증언해 왔습니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수십억원의 교회 돈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노후와 신혼집을 위해 ‘평화의 궁전’(가평)을 짓고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서둘러 신천지 교회의 명의로 바꾸는 등 여러 경제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노인입니다. 대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확정하였습니다(2022.8.12). 현재 이만희 씨는 조심하지 않으면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90 고령에 수감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하는데, 자신을 잡으려고 악인이 설치한 ‘올무’를 하나님의 은혜로 피하게 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만들어 놓고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대궐로 들어 가고 있을 때,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왕국에 도착한 악한 하만에게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혀 수산 성 전체를 다니며 높여주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로 악인의 올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이며, 의인은 밤에도 발뻗고 잠을 잘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

매일묵상(2024/03/4-8)

누가복움6:29b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원수되는 둘째 예는 옷을 빼앗는 경우입니다. 누가복음은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적어, 옷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겉옷의 전당을 금지하는 모세율법과 미쉬나를 가진 유대인 독자를, 누가복음은 그런 규정이 없는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 역시 관대함에 관한 주님의 거룩한 명령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누가는 겉옷을 강탈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겉옷을 빼앗길 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속옷까지 주라고 변형시켰습니다.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던 레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듯이, 기꺼이 자신의 것을 주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경 해석 방법입니다. 작고하신 송기식 목사님은 어느날 교회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칼을 대면서 돈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목사인데 무슨 돈이 있겠냐?’ 하시면서 칼을 내려놓고 사정을 말해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도둑은 칼을 내려놓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사정을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현자는 남의 경험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전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감된 지혜로 넘쳐납니다. 읽고, 묵상하고, 행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119:99).

마태복음6: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하셨는데, ‘중생’의 여부는 단순히 우리의 고백이나 느낌보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째 시금석이,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보물의 소재입니다. 하나님도 내세도 없는 이방인의 삶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차를 살까’ ‘어떻게 해야 재물을 더 많이 모을까’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들의 보화는 ‘의식주’로 대변되는 생존, 부귀영화, 혹은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논어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은 인생의 전부나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지나갈 세상에 속한 것이라,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칭찬과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에 있습니다. 이 같이 참된 재산, 명예요 만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지, 세상의 소유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 혹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합니다. 만약 필요 이상의 소유가 주어졌다면, 재단법인을 세우든지, 선한 사업을 위해 기부하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문제를 쉽게 해결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만이 채워지기 때문에, ‘자기실현’이라는 인본주의적 목표의 도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잠언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이 잠언은 건설적인 비판을 무시하는 자에게 갑자기 닥쳐올 파멸을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에 해당하는 ‘토카호트’는 명사 ‘토케하=책망’의 복수형이며, ‘이쉬=사람’와 연계되어 ‘책망들의 사람’으로 직역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충분히 깨달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견책과 책망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목이 곧은’이란 대목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약하고 못된 짐승이 멍에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책망과 경고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완악함과 교만함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인의 자세를 연상케 합니다.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출32:9)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후단은 이처럼 책망을 귀담아듣지 않는 패역한 악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루는데, 그들에 대한 멸망은 ‘갑자기’ 닥쳐오나 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솔로몬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을 나타내는 ‘페타으= 눈을 뜨다’라는 부사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잇솨베르’를 함께 사용하여. 악인이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심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릇이 한번 깨어져 산산조각 나면 다시 복구할 수 없듯이 악인도 홀연히 닥치는 심판을 받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죽자마자 들이닥치는 영원한 심판은 본 잠언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잠언29: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본 구절은 28:12, 28과 동일한 내용이며, 의인과 악인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대조합니다. 전단의 ‘의인이 많아지면’은 후단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숫자의 증가 보다는 ‘의인이 권세를 잡거나 뜻이 관철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의인 자신의 삶도 모범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의로 공동체를 이끌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내릴 어리석은 결정이나, 착취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의와 지혜, 악과 미련함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에서도 드러나듯이 완전한 의인과 지혜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

잠언29: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2절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의인과 악인의 영향력을 관찰하였다면, 이 구절은 개인적 차원에서 양자를 묘사합니다. 전단에서 ‘지혜를 사모한다’는 말은 주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1:7). 그는 지혜자로서, 잠언은 부귀와 장수가 있다고 하니(3:16),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는다’ 하였는데, 재물은 물론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귀한 생명조차 빼앗깁니다. 방종한 삶에는 늘 병이 따라 다니고 그 결과 단명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6:26)고 엄히 경고합니다. 한편, 좀 더 넓게 보면 창기는 사단의 지배 하의 음란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5:11-32).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멀리 타국으로 가서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지자 아버지 집이 생각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그리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하며 즐거워 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를 깨달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아름다운 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품으면, 사이가 소원한 사람들을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매일묵상(2024/02/26-29)

누가복움6:29a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누가복음6장27-36절은 원수 사랑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악에 대하여 사랑, 선행, 축복, 기도로 갚으라는 말씀은 언뜻 이해 되지 않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심판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욕적인 상황을 주님 심판에 맡기고 오히려 선을 베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원수가 되는 4가지 예 중 하나이며, 특히 박해 받을 때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빰을 치는 자입니다. 이것은 모욕의 의미를 갖습니다만, 이때 ‘저 빰도 돌려대라’고 명령하시는 취지는 모욕 당하는 상황에서 맞서 싸우지 말고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취지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침내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입니다(시37:11;마5:5). 그러나 온유는 겁먹은 태도와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체포된 주님에게 침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조롱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보복하지는 않았지만, 태도가 건방지다고 손바닥으로 친 자에게는 때린 정당한 이유를 당당히 되물었습니다(요18:23). 위압적인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그를 위해 선한 증거를 주셨고, 로마 군인들의 조롱과 채칙에는 인내하셨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주님을 그대로 본받아 저항하지 않고 온유하게 수용하였으며, 그 모습을 본 많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250년이 흐르자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였습니다(AD325). 이 반면 로마에 무력으로 저항한 유대인들은 AD 70년, AD117년, AD 136년 세번에 걸쳐 철저히 진압됨으로, 유대 땅을 잃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는 역사 또한, 위 말씀을 뒷받침합니다.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b)

잠언28: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26절은 25절의 ‘신뢰’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까지 확대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안전을 확보하려고 이기적인 지혜에 기대지 않습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본 구절은 ‘자기의 마음(or 의견, 생각)을 믿는 자’와 ‘지혜롭게 행하는 자’를 대조하였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주님 혹은 현자의 교훈에 의해 인도 받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바보들만 모인 낙원에 살고 있어서, 다른 생각을 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대조적으로, ‘지혜롭게 사는 자’는 자신의 총명을 신뢰하지 않고(3:5,7), 하늘의 계시인 성경을 의지합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성’의 한계로 매사에 공정하고 균형 있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항상 재검토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잠언은 자신의 꾀를 믿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의지하도록 늘 깨우칩니다(22:29). 만약 그런 가르침과 믿음이 결여 되면, 아무리 유능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좋은 예입니다. 솔로몬이 자기 지혜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자, 미련하게 되어 우상숭배로 나아갔습니다. (8:5;19:8).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혜롭게 행하는 자’로서 구원을 얻기 때문에, 벌 받을 일 없습니다(1:32-33). 따라서, 반드시 배워 마음에 담아 놓아야만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8:27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모자라는 것이 없지만, 그를 못 본 체하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의 주제는 ‘자비와 풍부한 삶’ vs ‘인색과 부족한 삶’의 상호성으로, ‘탐욕을 품은 삶과 경건한 신뢰의 삶’의 결과를 다룬 28:25절을 이어 교훈합니다. 27절에서 ‘자비한 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표현되었고, 그들의 부족함 없는 삶의 비결은 25절에서 밝힌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물론, 주님의 뜻을 행하였다고 당장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갚아주심을 믿고(마6:4,6), ‘지금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해 합니다. ‘경건에 기초한 자족’은 탐욕스러운 인간에게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부호 록펠로도, 조금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탐욕은 늘 모자르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혜(마음,생각)을 의지하는 인색한 자(26절)가 가난한 자들을 못 본 체하고 창고문을 닫아버림은 당연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가르십니다. 한 쪽은 형제 중 가장 어렵고 미천한 자를 도와 주고, 다른 쪽은 그런 자들을 못 본 체한 신자입니다. 전자는 축복받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후자는 저주를 받아 영벌에 처해집니다. 모두 놀라니,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25:40,45)고 대답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눅16:19-31)의 가르침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언28:26)

잠언28:28절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28:12-28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으로, 28절은 결론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준행 여부입니다. 창조와 섭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으뜸 가는 지혜이며, 그분의 뜻이 율법(십계명)으로 계시되었기에, 잠언은 율법을 행하는 자를 의인과 지혜자로 규정짓습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율법을 버리고 자신의 뜻(생각)대로 살아 갑니다. 이같이 ‘의로움’과 ‘악함’은 각각 지혜와 미련함의 윤리적 측면입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아 학정을 하는 시대를 말하며,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선지자 이사야를 포함하여 무죄한 자를 또한 많이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숨게 되는데, 수탈과 권력의 남용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그 반면 그들이 멸망하면 숨어 있던 의인들이 나타나고,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인들을 통해 사회는 발전되고 평화는 정착되며 공공의 이익은 크게 증진될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악인의 패망을 보고 기뻐 외치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의로운 통치자의 개혁을 생각하고 즐거워하기 마련입니다(잠11:10). 지혜는 지혜자 개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큰 혜택을 끼칩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와 정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매일묵상(2024/02/19-23)

아브라함의 시험과 믿음

‘땅, 민족, 복의 근원’의 약속(창12:1-4)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테스트 당했습니다.(1)’땅’에 관한 시험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척박한 남방 땅만 남았고, 곧이어 백년만의 대 기근이 찾아 왔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수모를 당한 뒤 올라와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방인의 땅에서 100년을 살 동안 감사로 단들을 쌓았습니다. 왜일까요? (2)’민족’에 관한 시험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99세에 늙은 사라가 낳을 이삭과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웃었지만 순종하였습니다. 왜일까요? (3) ‘복의 근원’에 관한 시험입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내렸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령 받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친구로 불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약속의 영적 성격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약속의 본질은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지으실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요8:56-58). 이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200년 동안 가나안 땅에서 땅 한 평 사지 않고, 장막을 치면서 살아갔습니다(히11:9,10). 가나안 땅, 이스라엘 민족 이 모든 것은 그 영원한 기업의 모형임을 안 것이죠! 그러므로, 척박한 땅, 위협적인 원주민들, 기근 등에도 불구하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이 지으실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살아갔습니다 (히11:16).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

잠언28:23절
“아첨하는 사람보다는 바르게 꾸짖는 사람이, 나중에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새번역)

23절은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는 부모나, 잘못가는 친구에게 충언하는 경우를 말하지만, 그 문맥은 재물을 다루는 내용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당한 과정을 생략하고 성급하게 재물을 벌려고 하면 잘못되어, 형벌을 받는다는 교훈인 20절과 함께 생각해 보면, 두 종류의 친구가 떠오릅니다: 그릇 행동하는 친구에게 미움을 받을 각오로 충고하는 사람과 아첨하여 그 행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인색하고 재물 얻기에 급급한 부자에게 빈궁이 찾아온다는 경고인 22절과 함께 생각해 보면, 그런 부자를 바르게 꾸짖어 행동을 고치게 하는 경우나, 혹은 듣기 좋은 말만 하여 미움받지 않으려는 경우입니다. 비록 삭개오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인색한 부자가 쓴 소리를 듣고,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기대할 수 없습니다(마19:22-26). 이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눅16:19-31)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그 부자는 문 앞의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고 죽었습니다.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 당해 보니 형제들이 생각났고, 나사로를 보내 이들을 깨우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권함을 받지 못한다고 거절당합니다(16:19-31). 실로, 상대방이 싫어하지만, 그를 위해 충고하는 사람은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친구는 희귀합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고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만들어 놓으신 이유 중 하나이며, 성경 만큼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1:7) 

잠언28:24절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출20장). 그 5번째가 부모 공경 계명으로, 지키는 자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렇면, 부모 공경 계명의 함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잠언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19:26; 20:20; 28:24; 30:11, 17), 그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 8계명이며, 이로써 보호하려는 대상은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입니다. 문제는, 타인도 아니고, 부모의 것을 도둑질할 경우입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먼저, 부모의 재물에 피해를 입히고, 다음으로, 부모자식 관계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가 파괴됩니다. 더구나, 본문은 도둑질한 자가 ‘죄가 아니라’는 말을 적었는데, 그런 자녀들은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조차 없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들에게 속한 것을 단순히 가져간 것뿐임을 강변하여도, 그들이 타인-비록 부모라 하더라도-에게 속한 것을 훔쳐간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자녀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물론, 부모공경의 계명도 어긴 것이며, 또한, 탐욕을 내서 부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므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도 어긴 것이 됩니다. ‘탐하는 자는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입니다. 형법은 자식이 부모의 재물을 절취할 경우 형을 면제시키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잠언28:25절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부와 관련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관대한 자’와 ‘자기를 의지하는 인색한 자’의 차이를 다루는 25-27절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주제로 되돌아가서, 경건 대 불경건” 즉, 주님과의 관계가 행위의 원천임을 교훈합니다. 25절은 ‘욕심이 많은 자’와 ‘주님(야훼)을 의지하는 자’를 대조합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불경건하며, 타인과 늘 다투는데, 탐욕으로 사회적 경계선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는 선을 지켜 다툼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이란 정직한 노동, 만족, 섬김, 베품 등을 포함하며, 그는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이 정하신 도덕적 경계를 견고히 하고, 자신과 타인을 정직하게 평가하여 도착된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일생이 좋은 예이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알려면 이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았는데, 주님을 의지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 모두는 풍족한 삶을 누렸고, 성경은 그 원천이 언약의 주님임을 밝힙니다(창24:1;26:29;39:5). 그러나 ‘경건과 복’의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사탄은 재앙을 염려하는 욥의 불완전한 믿음을 보고 주님과 욥을 싸잡아 비판하였습니다. 욥이 극한 시험을 이겨내자, 주님은 욥의 노년에 배나 축복하셨고, 욥은 장수하고 부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만, 욥은 친지들이 ‘케쉬타와 금고리 하나씩’을 각각 준 것을 미천 삼아, 갑절의 부를 일구어내는 근면과 기술의 소유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사무엘 마펫 선교사
로마서12:17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사무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1864-1936)는 26세에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았습니다(1890). 1893년 복음의 불모지 평양을 선교지로 삼고, 평양에 도착하자 곧 “여러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라는, 서투른 한국말로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유교 전통과 미신에 젖은 조선인들은 거부하고 대신 박해를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후에 목사가 된 건달 청년 이기풍이 벌인 폭행 및 상해사건 이었습니다. 그는 마펫 선교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발로 옆구리를 차서 고꾸라지게 한 것은 물론, 짓고 있던 예배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펫 선교사의 턱에 돌을 던져 피투성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자 원산으로 도주하였으나, 마펫 선교사는 참고 이기풍을 관가에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이기풍이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용서를 빌자, 마펫 선교사는 용서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마펫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세우자 이기풍을 1기생으로 입학시켜. 한국인 최초 일곱 명의 목사 중 한 분이 되는 명예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1934년 70세에 은퇴 후에도 조선에 남아 일본의 통치에 항거하다가 미국으로 추방되었지만(1936년),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때, 지인의 배려로 남가주 몰로비아 시에 있는 집차고를 개조한 방을 얻어 조선을 기리며 선교사의 삶을 마쳤습니다(1939년). 주님과 조선민족을 사랑하여 일생을 드린 분으로 본이 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6:32)

매일묵상(2024/2/13-16)

세상의 길과 믿음의 길(1)
어느 인류학자가 뉴기니의 여자들에게 남편의 이름을 묻자, 비명횡사한 남편들을 읋었습니다: “첫 남편은 엘로피족 침략자들에게 죽었고, 두 번째 남편은 나를 탐내던 남자에게 죽었고, 그 남자가 세 번째 남편이 되었는데, 두 번째 남편의 동생이 죽여서 복수하였어요.” 아담 이후 노아의 대홍수까지 인간의 역사도 그러했습니다. 그 때는 엄청난 혼란과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그 원인의 하나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마음대로 아내 삼은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천사의 영역과 인간 영역이 결합되었고, 네피림 즉,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었으나, 동시에 타락한 자들로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위해 살아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부패와 폭력이 가득찬 세상에 대홍수를 보내사 심판하심으로 멸망시켰습니다. 바벨탑 사건도 같습니다. 홍수 후 노아의 자손들이 번성하자, 모여서 높은 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사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곳이지, 하나님은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모여 만든 도시와 국가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인간 사회에는 권력투쟁만이 존재하고, 살아남은 권력은 항상 부패하였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길을 가르칩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어간 그 길입니다. 한편, 창세기는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이 세상에 동화된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이야기도 적고 있음을 유념하여 바른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2:1).

세상의 길과 믿음의 길(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12:2, 새번역)

아브라함 등 족장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 분을 경외하는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이들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혼탁하고 위험하며 이기적인 세상에서, 그러나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그분의 계명을 간직하여 그 계명의 길로 갔습니다. 세상이 보면 경건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분들을 먼저 만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2인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과 함께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약속에는 땅으로 상징되는 물질의 축복, 이름으로 대표되는 명예의 축복, 민족이란 말로 표현된 자손의 축복, ‘복의 근원’으로 언급된 생명나무의 축복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도 몰랐지만 묻지도 않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물론, 지금 가고 있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그런 사실은 아브라함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땅에서 자신과 후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였습니다. 많은 조사를 한 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가나안이라고 해석한 것뿐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도착한 그 곳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확증하였습니다(창12:7).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아브라함의 방식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도 그러해야만 합니다.“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잠언28:21절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빵 한 조각 때문에 그런 죄를 지을 수도 있다.”(새번역)

21절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합니다. 전반부는 공정한 결정과 판결을 촉구하고, 후반부는 재판 과정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뇌물을 콕집어 경계합니다. ‘빵 한 조각’이란 작은 이익을 말하며, 한 끼의 식사대접으로도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우칩니다. 많은 사람이 뇌물에 약합니다.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이 늙자 그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였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몰락하고, 사울의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형법은 뇌물죄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129조)라고 규정하여, 뇌물죄의 성립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 ‘직무와 관련성 그리고 ‘대가 관계’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규정의 구체적 적용은 해석에 달려 있어, 재판관의 양심과 독립성은 보장이 중요합니다. 한국은 헌법에 이를 보장하는 규정(103조)을 두었으나, 실제의 재판과정에 존재하는 압력과 유혹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힘은 법관 자신의 신념에서 나옵니다. 만약, 그 법관이 주님을 경외한다면 그 이상의 자격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요사이 연일 보도 되었던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의 경우 형법상 뇌물죄와는 관련성이 없으나,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냉정하게 거절해야만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우리를 들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려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정직하게 맡겨진 직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계1:6). 마지막 심판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일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눅12:2, 현대인의성경)

잠언28: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선한 눈을 가진 자(22:9)에 비추어, ‘악한 눈이 있는 자’란 인색과 탐욕으로 재물 쌓기에 급급한 자입니다. 통상 재물을 쌓으면 부자가 되지만, 후반절은 ‘빈궁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염두에 둔 교훈입니다. 잠언은 “재물은 사라지는 법, 독수리처럼 날개가 돋쳐 날아가 버린다”(23:5, 현대인의성경)는 사실을 익히 알고,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라”(23:4)고 합니다. 더 나아가, 전도서는 죄인들에게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냅니다(전2:26). 신약에서의 진정한 재산은 하나님 나라를, ‘빈궁’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함을 뜻합니다. 여기 두 종류의 쌓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지상에 재산을 쌓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되는데, 탐욕 때문에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할 우려가 심히 큽니다(눅12:13-21).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선행을 뜻하며, 재물은 손해를 보지만, 현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내세에서 영생을 상속받는 자들입니다(막10:28,29). 주님을 영접한 세리장 삭개오가 대표적이나, 이런 은총은 부자일수록 받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근심하며 떠난 부자 청년처럼(막10:17), 모든 소유를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주고 홀가분하게 당신을 쫓으라는 권유를 들으면, 심히 근심하면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눅18:24,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4/2/5-8)

고린도후서11:3절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사탄은 에덴동산의 관리자 하와를 유혹합니다. “왜 선악과를 따서 먹지 않냐? 그것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 네가 만약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하와는 속아넘어 갔습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동산 관리인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삶에 만족하는지를 시험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2인자였고, 가정을 이루어 즐겁게 살아갔으나, 사탄과 대화 후 불만족 하게 되었습니다. 풍부한 과일과 좋은 기후가 보장되었기에 먹고 사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귀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떠나게 함으로 인간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는 자는 이기는 자의 종입니다. 가인은 질투에 져서 살인죄의 종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탐욕에 져서 배신자가 되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져서 주님을 버렸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여도, 고백과는 다르게 세상을 따라간다면 역시 치명적인 패배입니다.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시119:11). 주일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결심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잠언28:18절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이 잠언은 의인(의로운 통치자)과 악인(악한 통치자)의 특징적 삶을 대조합니다. ‘성실하게’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밈’은 ‘완전한, 온전한’을 뜻하며, ‘주님을 모신 신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후단의 ‘굽은 길’은 ‘비틀어진 길들’이란 의미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태도를 총칭합니다. 세상이란 하나님의 길이 자신의 이익과 맞으면 걸어가고 틀리면 여지 없이 불순종의 길을 택하기에 구불구불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계명의 한계를 넘어 이웃을 해치지 않도록 일관성 있게 걸어가기에, 그 길은 곧고 바릅니다. 따라서 의인의 길과 세상의 길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문제는, 자기 부정이라는 좁은 길을 택하는 사람은 그 수가 적어, 불순종하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박해를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누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본 잠언은 구원자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불의를 당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을 듣는 사람은 반드시 도움을 줄 의무를 규정합니다(신22:27). 오늘날 말하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요! 하물며,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주님께서 압제 당하는 의인의 외침을 듣는다면, 어떻게 그리고 신속히 도와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이런 원리를 쉽게 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 악인은 넘어져 패망하기 마련인데, 굽은 길로 가다보면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이나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18:10).

잠언28:19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28장의 3번 째 단락(28:19-24)은 교훈의 방향을 수직축(주님과 통치자)에서 수평축으로 이동하여, 부를 성급하게 이루려는자와 열심히 일하는 자 사이를 비교합니다. 18절의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19절에서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로,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방탕을 따르는 자’로 구체화되어집니다. 본 절에서 솔로몬은 고대 농업 사회를 전제하여 개미와 같은 근면과 지성을 갖고 삶의 근본되는 토지를 경작하라고 충고합니다. ‘토지’란 자신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기름진 땅을 말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얻는 수단을 뜻합니다(창3:17-19). 이 반면 ‘방탕을 따르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가치없는 것들을(fantasies) 추구하는 자’를 말하고, 이는 성급하게 재물을 벌려는 태도나 도박처럼 정당한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습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삶에 필요한 식량을 얻지 못하여 찌들게 가난하게 될 것인데,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생활양상에 대한 통계도 이 교훈을 뒷받침합니다. 본 잠언과 거의 유사한 12:11절은 ‘궁핍함이 많다’ 대신 ‘지혜가 없다’로 기술하여, 이들은 분별력이 결여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타락 이후에는 물론, 에덴 동산에서조차 주님은 정직한 노동을 요구하는 창조 질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뜻을 알기에 뜻밖의 횡재를 얻어 큰 부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산업이 뿌리를 내리고 맺어지는 열매로 부요한 삶을 이루려고 합니다. 분별력 있고 지혜로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지각이 없다.”(잠언12:11, 새번역).

잠언28:20절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20절은 경제 생활과 관련한 지혜를 계속 제시합니다. ‘충성된’에 해당하는 원어 ‘에무노트’는 ‘견고함, 확실함’을 뜻하는 ‘에무나’에서 파생되었으며, 주님 앞에서 성실 근면하게 사업 혹은 일에 임하는 자세를, ‘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뻬라코트’는 ‘행복’ 또는 ‘번영’을 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직한 자의 삶은 고지식하여 성공과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솔로몬은 ‘복’ 즉 번영을 겸한 행복으로 충만한 삶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후단의 ‘속히 부(富)하고자 하는’이란 ‘부(富)하기를 서두른다’는 말입니다. 잠언은 ‘부’나 ‘재물’을 주님의 축복으로 보아 긍정하지만,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뒤, 정당한 과정을 무시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추구하는 행위는 잘못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추구하면 자연히 법률을 어기게 마련입니다. 범죄자가 얻는 수익에 대하여 모든 국가는 벌금이나 몰수형을 가지고 있어 이득을 가졌다 하더라도 원하는 바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단은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좋은 예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 전투에서 페르시아산 외투와 금덩어리 하나를 숨긴 아간입니다. 아간과 그 가족은 탄로가 나자 모두 돌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잠언의 다른 구절도 그렇지만, 여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암시도 담겨 있습니다. 모든 부요의 원천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에게는 노력한 만큼 얻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매일묵상(2024/1/29-2/2)

시편23편, 관계의 축복(2) – 목자되신 주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서, 복음서의 이해를 위하여 중요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는주님의 말씀은, 단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친숙하기에 사용하신 은유가 아닙니다. 시편 23편과 다른 시편들에서 왕 다윗과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로 은유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목자의 은유를 통해 자신이 왕 다윗과 이스라엘의 목자되심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쫓겨나야만 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간음과 살인죄). 구속의 복음에 비추어 시편 23편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벧전 2:25 및 5:4). 시편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한 출애굽 사건이 여기저기 메아리칩니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다윗의 목자가 쟁취한 구속의 메아리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집니다(요10:11). 암으로 죽어가는 어린 소년의 어머니는 그에게 시편 23편을 가르쳐 주면서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하여 손가락으로 다섯 단어를 세면서 “The Lord is my shepherd”를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의 약지는 “my”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그와 맺은 관계를 상징하는 손가락을 주먹에 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소년은 약지를 잡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목자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와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8: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악한 통치자의 등장으로 우리 민족도 많은 수탈을 당하였으며, 우리가 겪은 그들의 학정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과 같이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13:1;출22:28)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매, 통치 권력 역시 선한 것이나(딤전4:4; 롬13:1), 악한 통치자는 그 ’선한 제도’를 타락시켜 사익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따라서, 모두 힘을 합쳐 이 짐승들을 몰아내듯이, ‘악한 통치자(관원)’를 쫓아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프랑스 대혁명; 저항권). 한편, 국가와 교회(성도)의 관계에 관해 4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1)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 만능론’, (2)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 (3)국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그 호의를 계속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하는 타협안인 ‘콘스탄틴주의’, (4)교회와 국가가 건설적 협력 정신으로 하나님 주신 각자의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 관계'(타당, 존 스토트). 로마서 13장은 로마나 유대 당국은 대체로 교회에 비호의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순종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는 날 선말로 비판하였으나, 4천억 비자금을 가진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는 ‘어떤 돌이라도 맞겠다’고 하였으니 품어 주자 한 말은 참고가 됩니다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이전 총독들은…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5:15).

잠언28: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6절은 15절의 악한 통치자의 출현의 이유와 공의로운 통치자가 되는 비결을 진술합니다. 전단은 악한 통치자의 학정의 이유는 ‘무지함’ 때문이며, 후단은 장수하는 공의로운 통치자의 비결이 ‘탐욕을 미워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무지한’의 원어는 ‘하싸르 테부노트’이며, ‘이해력이 없는’ ‘지식이 부족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어리석은’, 새번역은 ‘슬기가 모자라는’으로 번역하였으나, 단순히 통치 기술이나 능력의 부족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근원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입니다. 그 통치자는 참된 통치의 길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에, ‘잘못된 행위’로 요약되는 탐욕, 착취, 수탈 등의 ‘포학’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포학을 크게 많게 행한다’고 묘사되어,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15)의 모습을 또 한 번 생각나게 합니다. 1989. 12. 25에 총살 당한 독재자 차우체스코 루마니아 대통령 부부가 떠오릅니다.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체스코의 학정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자, 이들은 헬기를 타고 도망가다 잡혔습니다(12/23 체포). 그리고 전격적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결정되었고, 2시간 만에 집행되었습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이를 알고 매우 두려워 하였습니다. 후단의 ‘탐욕을 미워하는’이란 ‘폭력에 의한 취득’ 혹은 ‘불의한 이득’을 뜻하며, 전단의 포학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공의로운 통치자는 당연히 이런 불의한 짓을 거부하고 바르게 백성들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장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잠언28: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에게 번성의 축복과 생명 존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6:6). 17절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인간 생명의 고귀성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사람의’에 해당하는 원어는 ‘나페쉬’이며, 이는 ‘숨쉬는 존재’를 지칭하나, 여기서는 살아 숨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창9:4), ‘흘리다’의 원어는 ‘아슈크’로서 ‘학대 받는 자’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전단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것 때문에 몹씨 괴로워 하는 자’를 의미하여, 살인자가 받는 무서운 죄책감을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다’는 ‘죽을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한다’ 혹은 ‘무덤(구덩이)으로 달려갈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함정’을 말하는 원어 ‘뽀르’가 ‘숨는 장소’나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정개역은 ‘함정’으로 번역하여 심판과 멸망의 뉘앙스를 줍니다. 한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정죄를 당하자, 자신이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을 알고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후단은, 살인의 죄책을 진 후, 도망다니는 자(가인)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자(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다만, 다윗과 같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경우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시편51장). 15,16절과 연관하여 보면 회개하지 않는 악한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하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5:17)

시편23편, 인도의 축복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본 시편 1-3절에서 다윗은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4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전하게 인도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 인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계명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요, 왕 사울의 사위와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의 질투를 받아 광야로 도주하여 숨어지냈습니다. 그 와중에 사울이 군대와 함께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로 왔다가 용변을 보러 들어간 동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미 원수를 넘겨준다는 주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압력에도 다윗은 몰래 옷자락만 자르고 살려보냈습니다. 또 다윗을 쫓던 사울의 전 군대가 하길라 산에서 진을 치고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내려 간 아비새의 요청을 거절하고 오직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왕이 되려는 야망, 부하들과 가족이 받는 고생, 주님의 신탁 등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세우신 왕을 치면 안된다는 계명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 간의 광야와 망명을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도 없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그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십시요! 삶이 어두울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기도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요. 조용히 주님 손에 맡기고 삶을 계획하십시요(딤후2:7). 어려움에 닥치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피할 길을 만들어내시고(고전10:13) 반드시 지혜를 주십니다(약1:5). 고생은 되지만 후에 되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