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2023/08/28-9/1)

잠언25:18절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열왕기하21장은 왕비 이세벨의 지시를 받아 성읍 장로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고용하여 나봇을 처형하고 그 포도원을 빼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집안의 멸망을 선포하셨고, 아합이 죽은 뒤 심판을 집행하였습니다. 18-20절은 이웃에 대한 3가지 악의 유형이 등장하고, ‘거짓증거’는 그 첫 번째입니다. 배경은 법정이며, 사건의 증인으로 잠언의 제자가 섰을 때, 만약 그가 위증을 한다면, 피고는 엄청난 재판상 불이익을 얻게 되고 심지어 사형을 당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유로 제시된 3 가지 전쟁무기는 용사들의 필수적 무기로서 전쟁터에서 용사의 부하가 휴대하면서 골프장의 캐디와 같이, 전투의 각 단계 마다 적합한 무기를 제공합니다. ‘방망이= 해머’는 가장 근접전을 위해, ‘칼’은 약간 떨어진 근접전을 위해, 그리고 ‘화살’은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할 때 사용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오펜하이머 청문회’(1954)가 나옵니다. 에드워드 텔러(수소폭탄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와 그의 사상적 전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증언을 하여 큰 타격을 줍니다. 후에 텔러는 페르미 상을 받고(1962년), 이어 오펜하이머를 수상자로 추천하면서(1963년) 화해의 제스처를 보냅니다. 만찬석상에서 둘은 화해의 악수를 하나, 그의 부인은 악수를 거절하는데,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복을 자제하고 주님 손에 맡기면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마지막날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39)

잠언25:19절
“환난을 당할 때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믿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새번역)

18절은 적극적인 위증자를 다루었다면, 19절은 평소에는 친구이나 위기 시에는 진실하지 못하여 파괴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갖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 ‘썩은 이’와 ‘부러진 다리’가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생생한 비유로 등장합니다. ‘이’와 ‘다리’는 먹을 때와 걸을 때 꼭 필요하지만, 썩었거나 부러졌다면 도움은커녕 고통만 줄 뿐입니다. 환난이 덮칠 때 진실하지 못한 친구는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우리와 교제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따질수록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은 분별력을 뛰어넘어,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제자들 모두 주님이 걸어가고 계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몰라 결정적인 순간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찾아가셔서 사도로 다시 부르시고 파송하셨습니다(요21장). 바울의 마지막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고, 그 중 특히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언급됩니다. 아마 열심으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 같습니다(딤후1:15).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딤후4:16,17). 잠언의 이상이 여기에 있으며, 주님이 먼저 성취하셨고, 이어 사도들이 갔으며, 지금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잠언25:20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

잠언은 치명적인 거짓말쟁이(18)와 침묵의 배반자(19)로부터 상황판단을 못하고 부적절하게 말하는 자(20)로 대상을 옮겨 교훈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엘가나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식들은 가졌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브닌나는 질투하였고 드디어 실로의 매년 제사 때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엘가나는 “내가 그대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위로하였으나, 한나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런 한나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면 더욱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솔로몬은 두 가지 비유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 같다”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에는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율법이 있습니다(신24:17). 의도 여부에 불구하고 그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금지된 행위입니다. 두번째 비유는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입니다. 부드러운 기름으로 고통을 완화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초를 부어 더 아프게 하는 모습이야말로 미련의 극치이지만, 위로에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주님에게는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그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고, 한나는 서원한대로 젖을 떼자 수소 세 마리를 데리고 실로의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와 주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의 행위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잠언25:21절(1)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21-22절은 16-22절에 언급된 인간관계의 갈등을 풀어주는 잠언의 해법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의 한 적용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롬12:7-21에서 본구절을 인용하나,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이미 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잠언은 “보복을 버리고 주님 손에 맡기라”(20:22),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24:17-18), “노하기를 천천히 하고 허물을 용서하라”(19:11) 등, 이 교훈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21-22절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곤경에 빠진 원수를 동정하여 먹이라”고 명령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19:18)는 계명의 범주에 원수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선행이란 의미를 넘어,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익의 침해가 있을 때, 사적인 강제나 보복은 마땅히 공동체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모세율법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이 종료될 때까지 무시되어, 사사시대에는 개인의 소견대로, 왕정시대에는 왕의 자의적 통치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고 모세율법의 언약대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온 이래 모세율법이 중시되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모세율법이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끔직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모세율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지지 않아 헌법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절의 구체적 내용을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5:21절(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보복의 본능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어, 모세율법에도 친족구속자(고엘)제도를 두었으며 친족구속자의 책무 중 하나가 ‘피의 보복’입니다. 그러나 고대 부족 사회에서는 보복이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경향 때문에, 모세율법에는 ‘도피성’(수20장)제도나, ‘눈은 눈으로’라는 동해보복의 원리(출21:23-24)를 규정하여 과도한 보복을 제한시켰습니다. 본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원수가 곤경에 있을 때 해악 대신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은 실질적으로 보복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음으로 화가 잔뜩 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 잠언을 인용한 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박해 받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합니다. D. 제레마이어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햄버거를 사러 갔을 때 뒤에서 기다리는 차를 못보고 껴들게 되었습니다. 뒷차의 운전자는 화가 나서 여러 번 크락션을 울려댔으나, 목사님은 오히려 그녀의 햄버거와 음료수 값을 치루고 나갔습니다. 백밀러에는 그 운전자의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는 등 사울에게 베풀었던 여러 선행은 베냐민 지파의 충성을 이끌어 내었고 다윗은 피 없이 통일합니다. 이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근거로 섭리를 진행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잠언은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내일 이에 관해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26:17)

매일묵상(2023/8/21-25)

잠언25:13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새번역)

‘무더운 추수 때’란 팔레스틴 지역에서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4월 중순부터 밀 추수가 시작되는 6월 초 이후의 기간을 가리키며 매우 더운 계절입니다. ‘시원한 냉수’란 북쪽 헐몬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눈이 녹은 물을 가르킵니다. 무더운 계절에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한 후에 숨이 차고 목이 마른 그 때, 눈이 녹은 차가운 물을 마신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자가 어려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는 보고를 들은 왕이나 주인의 기쁨은 어떻하겠습니까? 본절은 그것을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에 비유하고 있는데, 저자인 솔로몬이 왕으로서 수 많은 사자들을 파견해 본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그는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오라고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란으로 보냄을 받았을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여 리브가라는 훌륭한 신부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렇게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과업을 이루시고 부활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역시 성부께 그런 기쁨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믿음직한 심부름꾼’의 역할을 다하여, 주님께 ‘얼음 냉수’를 드려 속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면,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약1:12).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10)

잠언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3절은 ‘충성스러운 사자’를 묘사하고,  14절은 ‘책임감 없는 사람’을 언급함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극대화 합니다. 강우량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름과 바람이 일면 사람들은 비가 내릴 것으로 기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름 가운데 간혹 비를 머금지 않는 구름도 있어서, 비를 내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실망감을 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자를 ‘비 없는 구름과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물’이란 대목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물건 등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물한다’고 큰 소리로 자랑하는 모습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사기꾼은 선물을 주는 대신 오히려 귀한 재물이나 생명을 빼앗기에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은 은연 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더구나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것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잠언25: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5절은 1-14절의 결론적 구절로서, 궁중 관리에게 ‘온유함’이란 미덕을 교훈합니다. ‘관원’은 재판관이나 왕궁에 있는 고위 관료를 의미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권력자들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의도한 대로의 선한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온유한 모습으로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많은 갈등이 내재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솔로몬  왕의 잠언임을 감안 하건데, 본절은 단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 우러나온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잠언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 사례가 성경에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차갑고 모욕적인 말을 듣자, 오히려 인내와 겸손, 온유함을 잃지 않아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마15:21-28).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5)고 하신 뒤, 검을 들고 싸우지 않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우주를 상속받으셨습니다. 한편, 온유함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롬5:5).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 노력하고, 그 결과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품성 중 하나로 자리잡습니다(갈5:21,22).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온유할 있는 능력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15:1)

잠언25:16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한 단락을 이룹니다 봉투의 윗면과 밑면을 접고 편지를 그 안에 집어 넣는 것 같이,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그 중 16-17절은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는 교훈으로, 16절은 꿀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17절은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꿀’은 신이 내린 완전식품이라 할 정도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므로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토하는 이유는 꿀의 짙은 단맛과 함께 고도로 농축된 영양성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꿀’과 같이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면 해가 되기에 절제의 미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며 명예 또한 그러합니다.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말처럼, 인격만큼 소유하고, 권력과 명예를 갖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는 묘책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한계를 넘어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 탐욕이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힘으로 이 탐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갈5:16). 그러면, 성령께서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마지막이 절제라는 열매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람을 살리는 과즙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잠언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7절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나, 교훈의 의도는 16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꿀’이 몸에 좋아 적당히 먹는 것은 좋지만, 과식하면 해가 되듯이, 이웃집을 왕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치면 나타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주의해야 합니다. 본절의 ‘이웃’에 해당하는 원어 ‘레에카’는 ‘친구’ ‘형제’라는 뜻도 들어 있어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포괄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얼마나 지혜롭고 합당하게 처신하느냐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때, 우정은 그 한 요소로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두는 분별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우정은 소원해지고 더 나아가 미움의 관계로 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잠언은 ‘지나치지 말아라’는 절제를 가르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우정, 사랑, 우애 등은 지속되고, 갈등과 반목은 제거되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익숙함은 경멸을 키우고, 사흘이 지나면 썩는 생선같이 손님도 그렇다”는 말이 알려주듯이, 경험을 통해 ‘이웃의 허용 한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단순히 이웃의 감정만을 살피며 수동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주님께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 합당한 말과 처신을 하면서, 이웃을 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는 충성스러운 섬김이 필요합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매일묵상(2023/8/14-18)

잠언25:9
이웃과 다툴 일이 있으면 그와 직접 변론만 하고, 그의 비밀을 퍼뜨리지 말아라.”(새번역).

8절의 ‘철저한 준비’에 대한 권면에 이어 9-10절은 ‘비밀유지’의 품격을 교훈합니다. 고귀한 인격은 승소보다 중요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이웃과 어떤 문제가 있어 다투거나 소송 사건 등으로 변론할 때 문제가 되는 사안을 벗어나,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 비밀 등을 들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사사건을 넘어 형사사건으로 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가까울 때는 좋게 행동하다가, 무엇인가 뒤틀려 버리면 해를 끼려는 완악한 마음을 갖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며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격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툼이 있을 시 먼저 주님 손에 그 사건을 맡기고, 비밀을 누설하면서까지 보복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면 절제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 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16:32).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영께서 계십니다. 얼마 전 억울하게 기독교 계통 조직의 대표의 직위에서 해제된 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고, 이사진들을 검찰에 고발하여 형사사건화 하자고 권고받았습니다. 물론 이사진들은 여러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심히 갈등하고 있을 때 전화를 통해 함께 대화를 나눈 뒤, 형사적 고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잠11:9)

잠언25: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0절은 9절에서 준 경계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반부는 소송의 내용을 듣고 비밀을 누설한 자를 신실하지 못하며, 험담을 퍼뜨린다고 정죄하는 자로 재판관이 대표적이며, 후반부는 누설한 순간부터 누설자에게 돌아오는 수치스러운 평가(악평)에 관해 말합니다. 소송 중에,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사건의 논증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이해될 수 있지만, 인신 공격과 같이 소송과 상관 없는 상대방의 비밀을 폭로한다면 그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법정의 공의를 흐리려는 부당한 행동으로 비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듣는 자 중의 하나인 재판관과 배심원은 물론, 공의로운 판결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비열한 행태에 대해 격분하고 비난할 것은 자명합니다. 그 결과 재판까지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 나오는 이유는, 그의 언행이 지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재판 결과도 공의로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판상 소송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리 긴박한 경우에도 논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삼가고, 쟁점되는 문제의 핵심만을 짚어감으로써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또한, 일상의 경우에도 이웃의 허물에 대해서는 입을 무겁게 가져가면서, 오히려 듣고 보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덕스럽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바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쟁반에 사과니라

11,12절은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에 관한 잠언이며, ‘은 쟁반과 금 사과’라는 비유를 갖고 효과적으로 교훈합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이를 “멋지게 말하면, 멋지게 받아들인다”고 요약하였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상황에 알맞게 잘 표현된 말”을 의미합니다.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의 원문은 ‘은쟁반에 금사과를 새겨 놓았다”는 말인지, “은쟁반에 금사과가 담겨 있다”는 말인지 불분명합니다. 더구나 ‘사과’에 해당하는 원어 ‘탐푸헤’는 오렌지, 석류, 모과, 살구 등으로 해석되기도 하여 문장 자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뉘지만, 합당한 말은 이처럼 아름답고 귀하다란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쉽지 않아서, 분별력과 인격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성경의 예는 사사 기드온입니다. 그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통해 다툼을 종식시켰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족속으로 300명의 용사만을 이끌고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뒤, 도망가는 미디안 족속을 섬멸하기 위해 에브라임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 에브라임지파는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기드온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은 너희만 못하다”(삿8:103)고 말하여 그들의 화를 가라앉혔습니다.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온유하며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 (잠15:1,새번역)

잠언25:12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은, 들을 아는 사람의 귀에는, 금귀고리요, 순금 목걸이이다”(새번역)

본절은 11절과 함께, 바른 행동을 위한 지혜자의 책망을 ‘금귀고리와 순금 목걸이’에, 듣고 행동을 고치는 자를 금으로 장식한 귀에 비유합니다. 슬기로운 책망을 선하게 듣고 순종할 수만 있다면, 미인이 보석으로 꾸민 것처럼 아름다고 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금고리와 금사슬’처럼 희귀합니다. 양약고구 충언역이 (良藥苦口 忠言逆耳)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로써 이런 진리를 웅변합니다. 유대 선지자의 책망과 기적을 보고도 황금송아지 예배를 그만두지 못한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그가 죽자 그 가문 전체가 죽임을 당하였고,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에 불순종하였던 아합의 가문도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치려고 선지자 엘리야에게 온 아람 장군 나아만은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는 선지자의 말에 분노하였으나, 그 종들의 충고를 듣고, 마음을 고쳐잡은 뒤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씻고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한편, 도피 중인 다윗이 갈멜의 부자 나발의 교만하고 무지한 행동으로 격분하여 나발의 가문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맞아 적절한 말로 진정시킴으로 가족도 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살인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의 교훈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의 단비’(신32:2)가 됩니다. 성경은 이 보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책망과 교훈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전7:5,새번역)

매일묵상(2023/8/7-11)

잠언25:3절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늘…땅’이란 표현은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암시합니다. 어떤 왕이나 현자도 하늘에 올라가거나 땅 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우주의 가장 미묘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궤뚫어 본 적이 없고, 우주의 신비 중 오직 일부분만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마음을 신하들과 백성이 헤아릴 수 없어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비유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의 원어 ‘엔 헤케르’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었지만, 본구절은 그 단어를 ‘왕의 마음’에 적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잠언은 왕의 통치를 묘사하고 있기 보다, 통치의 방법을 처방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담겨 있습니다. 왕은 마땅히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 왕(지도자)의 마음이 쉽게 읽혀 예측가능하다거나, 상상력의 부족이 드러난다면 그의 통치와 권력에는 치명적입니다. 신하와 백성들은 더 이상 그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지도자)은 각 분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탁월한 통찰력을 갖추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의 통치에 구현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뛰어난 왕(지도자)의 마음이지만, 그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영적인 사람들 보다는 못합니다.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고전2:15-16).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통찰하고, 왕에게조차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11:2)

잠언25:4,5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4,5절은 왕이 신하들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이  두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모두 ‘제하라’를 뜻하는 ‘하고’로 시작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4절은 은에서 찌기를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은이 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은에서 찌끼를 제거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5절을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왕의 통치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왕의 앞에 있는 악한 자들(간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왕의 위는 의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의는 국가 번영의 필수적인 길로서, 의로운 왕은 백성의 신뢰를 받게 되고, 그 왕위는 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간신이 자신의 유익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왕을 이용한다면, 그 나라는 멸망으로 직행하고 오히려 왕이 권좌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본잠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먼저, 우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들로서(행9:15)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찌끼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할 ‘짜끼와 불순물’은 옛사람에 속한 성품 즉, 탐심, 교만, 질투, 음란한 마음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갈5:19-21). 또한,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행하신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할 책무가 있습니다(벧전2:9). 신실하게 살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 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잠언25:6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25:6-15절은 궁중관리(신하)를 위한 잠언의 10계명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경계(6-10)와 교훈(11-15). 이를 통해 솔로몬은 겸손(6-7), 철저한 준비(8), 비밀유자(9-10),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11-12), 책임성(13-14) 그리고 온유함의 지혜(15)를 가르칩니다. 신하가 왕 앞에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으로, 6절은 두 가지 명령을 내리고, 7절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왕을 알현하는 신하들의 모임(조회, 잔치)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의 뜻에 합당한 질서를 유지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과시의 욕망을 어리석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왕 앞에서 드러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는 왕궁에서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이 서야할 자리에 섰다가 뒤로 물러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마땅히 능력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나, 이를 갖추었다고 교만하게 행동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행할 때 특히 하나님이 인사권이나 기타의 권한을 부여한 지도자의 앞에서 겸손하면,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아도 왕과 다른 신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7절은 6절의 명령을 간직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부끄러운 결과의 하나를 보여줌으로써, 궁중관리들이 올바른 신하의 태도를 갖추도록 교훈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한 주님을 섬기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만유의 왕과 주님의 신하입니다. 여기에 본잠언의 영적 측면이 담겨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잠언25: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본절은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고 경계한 6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솔로몬은 ‘..보다 낫다’는 비교구문을 사용하면서, 두 가지 경우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경우이며, 둘째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켜 낮은 데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당연히 전자가 낫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왕이 그 능력과 자질을 파악하고 그를 직접 높은 위치로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벧전5:6,7). 본절의 교훈은 예수께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자, 혼인잔치를 상정하여 가르치신 유사한 형태의 교훈에서 반복됩니다(눅14:7-11).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고 한 마디로 요약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 다시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자 성부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분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상관 없이 권세와 재물을 쌓아 스스로 높아지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려는 욕망을 미워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후자의 길이 지혜요 영생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잠언25:8
너는 급하게 소송하지 말아라. 훗날에 너의 이웃이 너를 이겨 부끄럽게 만들 때에, 네가 어떻게 할지가 염려된다”(새번역).

본절은 송사에서 피해야 할 태도를 교훈합니다. 여기서 ‘다투다’는 말다툼 보다도 ‘변론하다’ (사3:13)와 같이 법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에 새번역은 ‘소송’으로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남을 성급하게 고발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충분한 준비를 거쳐 신중하게 소송하지 않으면 패배할 뿐 아니라 명예까지 실추되기에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로우며(17:14), 설혹 법정에 가더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신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판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법관은 오직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공정한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의 재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재판규범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며, 재판장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증거에 입각하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신중히 살펴보고 심판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 사함 받고 심판을 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주어 행동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완악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까지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5:25,26)

매일묵상(2023/7/31-8/4)

잠언24:28
너는 까닭 없이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8절은 위증과 거짓말에 대해 경계하는데 재판정이 그 배경입니다. ‘까닭없이’의 원어 ‘힌남’은 ‘무고히, 정당성 없이’란 의미로 아무 근거없이 무죄한 자를 해치는 그릇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짓된 증언, 정당성 없는 증언을 금지하는 말로써, 26절(적당한 말로 대답하라)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긍정문으로 권면하였다면, 본절은 부정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위증과 관련하여 모세율법은 분명히 규정합니다: 정직한 증언 의무는 레위기5:1절, 위증 금지는 출애굽기20:16(십계명 중 9번째 계명)에서 규정하고,  신명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으로 모함’할 경우 모해목적을 따라  처벌하도록 규 정합니다 (신19:18,19). 본 잠언은 단순 위증이 아니라 상대방을 해할 목적으로 사적인 이해 관계나 원한 때문에 재판석상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을 말하기에 신명기의 규정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해위증죄). 대한민국의 형법 역시 위증죄를 단순위증죄, 모해위증죄, 허위감정·통역·번역죄 등 범죄로 규정 하여 처벌합니다(형법152-154조). 다만, 형법상 위증죄는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에 한하여 성립하는 일종의 신분범이므로, 수사단계에서 선서하지 않은 증인이나 참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편, “네 입술로 속이지 말라”는 후단의 규정은 비단 우리가 공적인 증언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웃에 대한 무고한 험담이나 풍설을 퍼뜨리지 말고(출23:1) 사랑 가운데 참된 것들만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은)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13:5).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이솝 우화의 하나입니다. 학에게 초대받은 여우는 자신의 음식이 길다란 유리병에 담겨 있어 먹지 못하고 그만 굶고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여우는 학을 초대하고, 맛 있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학에게 주었습니다. 학은 먹지 못하고 여우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하였습니다. 손해나 모욕을 당한 경우 되갚아주려는 인간의 욕망을 잘 묘사하는 우화입니다. 본 잠언은 이 같은  분노 본능을 참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뿌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평생 법원을 출입하며 수많은 소송 사건을 지켜 본 변호사는 “인간의 내부에는 뿌리깊은 증오심이 숨어  있어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피해나 상처를 입을 경우 거의 무의식적으로 분노와 함께 복수의 마음을 품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와 복수의 심리는 자기가 당한 몇 배를 갚아주어야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레24:20)라는 재판상 동해보복법을 규정하여 국가 형벌권을 제한하면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레19:18)고 규정하였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라” (롬12:19;신32:35) “네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는 가르침은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우주의 통치자요 재판장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금생과 내생에 천부께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내일은 본 잠언의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통상 사람들은 노력이나 지혜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남방 땅으로 내려갔을 때, 큰 기근이 닥쳐왔고, 이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나 이삭의 때에 또 다시 대 기근이 덮쳤습니다. 이삭은 필사적으로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자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원주민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였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이삭에게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을 파서 얻었습니다. 건조하여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우물은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그랄 목자들은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우물을 팔 때마다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고 또 다시 물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이삭의 삶을 본 것은 주님만이 아닙니다. 블레셋 족속 역시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뒤,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잠언24:30-34
게으른 사람의 밭과 지각이 없는 사람의 포도원을 내가 지나가면서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널려 있고, 엉겅퀴가 지면을 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얻었다.”조금만 자야지,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새번역)

이 구절은 게으론 자에 대한 풍자로서, 6:10-11절의 반복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 중 하나가 게으른 사람입니다. 밭 일은 고되기에, 게으른 자는 일하지 않으려고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등 많은 핑계거리를 댑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방치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모두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 잠언이 상징하는 게으른 자는 농부입니다. 현자가 지나가다 보니 그 농부는 게을러 밭을 돌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혀  농작물은 자라나지 못하였고, 둘러싼 돌담 역시 무너졌습니다. 교훈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신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수확할 것이 없어 가난해질 것입니다.현자는 이를 예기치 않게  쳐들어 오는 강도나 군대에 수탈당한 것에 비유하여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본잠언의 농부는 나태로 인해 열매맺지 못한 모든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우리 역시 역시 물려 받은 유산이나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 일하지 않을 여러 핑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여 감사와 겸손의 태도를 갖추고  자기 일과 위치에 충실하면 이삭처럼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25:1,2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25:1절은 잠언의 5번째 표제(1:1;10:1;22:17-21;24:23)로서, 이하 29:27절까지  솔로몬의 잠언을 유다 왕 히스기야(BC 715-687) 시대에 편집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약 250년의 차이가 있고, 히스기야는 경건한 왕으로서 후손들을 위해 편집한 것 같습니다.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왕과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시고(섭리), 왕들은 그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리기 힘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수수께끼를 내주시고,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마침내 답을 찾았는데 그것은 감옥에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란 수수께끼의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애굽은 기근으로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왕(지도자)은 하나님의 섭리를 연구해서 알아내야만 할 책무가 있습니다. 성경학자 클립포드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넘는 수수께끼와 퍼즐로 가득차 있지만, 왕은 그것들을 풀고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야 한다.” 왕이 그 섭리를 깨닫게 되면- 오늘날로 말하면 바른 정책을 수립하면 –  백성들이 잘 살고 하나님과 왕(지도자)은 높이 존경받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지도자들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2:2,새번역)

매일묵상(2023/7/24-29)

잠언24:19,20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현자는 서른 가지 가르침 가운데 ‘악인을 부러워 하지 말라’고 벌 써 두 번이나 교훈하였고(23:17-18;24:1-2), 본 구절은 세 번째입니다. 그 이유는 경건치 못한 악인들의 번영을 목격할 때 심한 갈등을 지혜자/의인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불공평 하다’는 감정으로 가득찹니다. 더구나, 의롭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던 자신은 병들고 여러 고난을 받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욥이며, 욥기는 의인의 고난의 문제를  잘 논합니다. 한편, 잠언 23:17-18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너에게 장래가 있다”, 24:1-2에서는 악인의 악한 성품을 생각할 때 그의 번영은 악취가 나는 쓰레기와 같다는 취지를, 본 구절에서는 ‘악인은 장래가 없다’고 선언하여 잠언의 제자로 하여금 질투와 불평을 버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로 가도록 격려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장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잠언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와 디모데전서4:8절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를 함께 생각할 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축복된 미래입니다. 그 반면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등불이란 ‘생명’ ‘복된 삶’ ‘번영’을 뜻하는데, 등불이 꺼진다는 말은 생명이 다하거나 몰락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명한 인생투자자인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없는 길로 가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잠언24:21,22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우주와 사회에 형성된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해야 성공적인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여호와)’과 ‘왕’은 이의 전형적인 권력입니다. 인간의 모든 권력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입니다(롬13:1). 그러므로 잠언의 제자들은 인간의 통치 권력들을 존경해야 하며, 특히 그 권력들이 인사권이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잠언이 전제하는 왕은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이 반영된 경건한 왕을 말합니다만, 악한 통치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왕기가 이 주제를 다루며 그들의 운명을 알려줍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좋은 포도원을 탐내는 중, 왕비 이세벨은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거짓 증언을 근거로 처형하라고 명합니다. 나봇이 죽자 아합은 그 포도원을 접수하였습니다. 이들은 악한 통치자들입니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신 주님은 당신의 종 엘리야를 보내사 아합과 이세벨의 멸망을 선언하셨습니다. 두려움에 아합 왕은 풀이 죽어 다녔으며, 주님은 그의 겸비함을 보시고 그가 죽은 다음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은 아합을 전쟁터로 이끌어내사 죽이시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을부어 왕으로 세우고 아합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아합의 손자 때). 성경의 탁월한 점은 인간 세상 배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분명하게 기술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더 준다 하겠습니다.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

잠언24:23-25
“23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24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좋은 복을 받으리라

잠언은 현자의 30개의 교훈에 이어 재판과 경제생활에 관한 실제적 권면을 주는 6개의 추가적 교훈 (24:23-34)을 기록합니다. 23절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일반적 교훈입니다. ‘낯을 보아 주다’의 원어는 ‘학케르’로서 ‘관심을 가지다’의 뜻입니다. 이는 호감의 어감을 전달하며, 재판 시 편파적 태도와 관련되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절은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구체적 장면을 직접 인용의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모세율법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에 위반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고(잠17:15), 사회적으로도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24). 그러나, 인간은 ‘공정하라’는 이 말씀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연약하고 부정직한 존재입니다. 정직을 외치는 자들일수록 더욱 불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참담합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사람을 믿지 않고 시스템을 만들어 제도적으로 공정이 실현되도록 장치합니다. 삼권분립이 그 좋은 예로서, 효율성과 이상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권위주의 정권이 도저히 갖지 못한 탁월한 제도입니다. 25절은 정의로운 판결은 보편적인 인정을 받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시비를 분별함에 있어 본 잠언을 우리 마음에 꼭 담아두어야 합니다.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신다.” (잠언17:15,새번역)

잠언24: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본 구절은 잠언에서 통상 가르치는 교훈을 반복합니다: “진리는 옳을 뿐아니라 유익하다”(12:17, 19; 14:25). ‘적당한’의 원어는 ‘곧다, 바르다, 옳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말로 대답한다’는 것은 친분이나 이해 관계에 치우침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판결함을 가리킵니다. ‘입맞춤’이란 근동지역에서 신뢰, 애정, 두려움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당한 재판을 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 받음을 의미하나, 지혜를 갖고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한다면 모두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기에 본 잠언을 단순히 재판의 경우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 절의 ‘적당한 말’은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함’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분별력이 부족한 우리들이 친분과 이해관계에 완전히 벗어나서 참된 것을 말하기는 쉬운 일 아니며, 더구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지혜롭게 풀어 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때 사람들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거짓된 방법까지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랑과 존경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약1:5), 재물이나 권세 등 이 세상의 것들 중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27:24),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엡4:15). 만약 중요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반드시  느헤미야와 같이 먼저 하나님께 묵도하신 후 대답하거나 일을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왕상3:28).

잠언24:27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후에 집을 세울지니라

본절은 우리의 ‘상식’을 확인해 주는 교훈으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강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으신 주님을 떠나, 자신의 욕망을 신으로 삼았기에 분별력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상식’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헛된 꿈을 쫓게 되면, 불행한 삶을 갖게 마련입니디. ‘밖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일터나 인간 관계 등 사회 활동을 의미합니다. ‘밭에서 준비한다’는 것은 농사일에 충실하여 경제적인 준비를 갖추어, 소득의 원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교훈은 당시 결혼 풍습에 따라 신랑이 신부의 가족에게 줄 지참금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집을 세운다’는 것은 결혼하여 가정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여건을 갖춘 후에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라는 교훈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결혼을 미루어야 하는데, 준비 없는 결혼은 어렵고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절의 말씀은 단지 결혼뿐만 아니라 사업이나 정치 등 인생의 모든 중요한 활동을 위해서는, 먼저 충실히 준비한 후에 시작하라는 메시지로 확장되어 읽혀야  합니다. ‘욕속부달(欲速不達)’ 이란 말이 있듯이, 준비 없이 욕심만 내면 결코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오히려 수치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끝으로 와이브레이의 말을 인용합니다. 적절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어떤 일도 시작하지 말아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8).

매일묵상(2023/7/17-21)

잠언24:14
지혜가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3-14절은 ‘꿀’의 단 맛과 유익에 비유하여 그 보다 훨씬 더 유익한 지혜를 얻으라는 교훈입니다. 현자가 생각하는 지혜의 유익은 ‘확실한 장래’와 ‘끊어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옳습니다. 먼저, 부모는 확실한 장래를 위해  자녀들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도 있지만, 조선 명종 때의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외아들 석봉의 장래를 위해 홀로 떡장수를 하며 10년 동안 공부시켰고,  명필의 반열에 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또 하나의 유익은 사망에서 지켜준다는 점입니다(전7:12). 그러므로 지혜는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시며(고전1:30),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골2:3)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복음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가는 지혜가 되고, 내세에서는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갖게 합니다. 참된 지혜를 얻은 자는  두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고, 둘째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은 정말 복잡하여,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소크라테스). 그렇다고,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명을 끌어들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서,   우리의 삶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본 뒤의 일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16:24).

잠언24:15,16절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5절은 의인에게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라는 악인에 대한 경고이지만, 듣는 자는 실제로 현자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악인의 공격이 있을지라도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로도, 혹은 악인처럼 행하지 말라는 경고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쉬운성경). 16절은 15절의 근거로써, 경건한 자의 믿음과 확신을 선언합니다. ‘대저-for’는 15절의 ‘훈계’와 16절의 ‘확증’ 사이의 관련을 말하는데, ‘의인’과 ‘악인’이라는 단어가 이런 관계의 존재를 뚜렷하게 합니다. 한편, 15절에 나오는 이중의 금지 – ‘엿보지 말며, 헐지 말라’ -는  들판에서 이루어지는 목축업이 그 배경이며, 16절의 – ‘넘어진다, 일어난다’-는 여행 중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악인의 실패와 의인의 승리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고, ‘일곱 번’이란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으로, 본 잠언에서 선포하는 승리의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15-16절은 악한 자가 의인을 멸망시키고 약탈하려 할지라도, 결국 성공하지 못하며, 의인은 실패를 딛고 종국적으로 승리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최후의 승리야말로 의인의 ‘끊어지지 않는 소망’(14절)의 근거이며,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의 참됨을 증언하는 바입니다(히11장). 그들의 승리의 비결은 이 세상의 도덕적 질서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용기 있게 살아간 것이며, 우리의 귀감입니다. 내일은 성서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욥5:19).

잠언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본 잠언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로 요셉이 있는 바,  그는  7 중 시련을 겪습니다. (시련1- 배신) 요셉은 질투하는 형제들에 의해  미디안 사람들(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의 아들)을 거쳐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립니다. (시련2- 노예) 혹독한 노예 생활 중 요셉은 주인을 신실하게 섬겼고, 가정총무로 승격됩니다. (시련3-유혹) 주인의 아내는 요셉을 계속 유혹하나 경건한 요셉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시련4-모함) 결국 요셉은 주인의 아내에 의해 모함받고 죄인으로 감옥에 갇힙니다. (시련5-감옥) 요셉은 신실하게 간수장을 섬겼고, 감옥 사무 전반을 돌보는 권한을 받습니다. (시련6-망각) 이때 파라오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와 각각 꿈을 꾸게 됩니다. 그들의 꿈을 요셉은 정확하게 해몽하면서, 술 관원장에게 전직을 회복하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출감한  술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시련7-절망) 그러나 요셉의 신실한 삶은 여전하였습니다. 2년이 지나자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고 일약 총리로 발탁되어 애굽 백성들과 자신을 판 형제들의 삶을 기근에서 보존해 줍니다. 요셉은 7중의 시련을 모두 승리하였으며, 그 비결은 두 가지입니다: 신실함과 주님의 축복. 요셉의 신실함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것에 기인합니다(시105:17-22). 또한, 요셉의 신실한 믿음을 보신 주님은 형통과 지혜라는 상을 주셨습니다. 요셉의 삶은 정말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4:17-18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6절 후단은 ‘악인은 재앙을 당하면 엎드러진다’고 선언하는데, 17절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18절은 주님의 거룩한 정서를 이유로 제시합니다. 즉,  현자는 의인이 원수의 벌을 보고 즐거워 하면,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며, 그 결과 심판은 중지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본 잠언이 원수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원수에 대한 심판을 즐거워 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을 경외하라’는 심오한 계명이 그 배후에  있어 이 같이 교훈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는 마음과 악의적인 마음을 동시에 갖지 못하지만, 주님을 두려워하여 원수에 대한 심판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아브라함의 태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 의인 10명을 전제로 심판 보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소돔과 고모라 전체 지역이 심판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하였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32:25)는 말씀과 같이 복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을 주님 손에 맡겨놓고 그분을 경외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반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서 멸망당할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겠습니까? 내일은 이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언25:21).

잠언24:17-18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본 잠언은 원수의 멸망을 즐거워하지 말 것을 교훈하며, 심판의 중단 가능성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잠언은 또한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언25:21)고 가르쳐, 원수의 불행을 틈타 멸망시키지 말고, 그들의 회개를 촉진하도록 행동하라 권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적이 넘어질 때 ‘관용과 선의’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는 가장 높은 경지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듣지 못한 자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다만,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멸망할 때와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히 기뻐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확립되고 그분의 뜻이 성취됨을 공동체 차원에서기뻐한 것이지 애굽 병사 개개인의 멸망을 즐거워 한 것은 아닙니다. 실로, 파라오는 어리석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고도 육체의 힘을 믿고 홍해까지 따라온 분별력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본 잠언을 적용할 경우 지혜롭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그토록 추적한 사울을 두 번이나 놓아주고, 결국 블레셋의 손이 죽었을 때 애가를 지어 불렀으나(삼하1:17-27), 갈멜의 부자 나발의 모욕을 받자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를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올라갔습니다. 그 차이는 사울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이지만, 나발은 일개 평민으로 차기 왕 다윗 자신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매일묵상(2023/7/10-14)

잠언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본절은 11-12절과 연관 때문에 여러 해석이 제기되지만, 본질적 메시지는 ‘역경 중에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의미입니다. 시련은 믿음과 인격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용지로서, 이를 통과해야 믿음과 인격, 지혜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람이 ‘역경’이란 시험을 치뤘고, 이를 근거로 그의 삶을 평가한 성경 기자의 기록은 흥미롭습니다. 실패한 대표적인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연 여로보암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 만일 내 종 다윗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하셨지만, 왕이 되어 보니 백성들이 예배하러  남유대 왕국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이 앞서 황금송아지 종교를 창안합니다. 그 반면,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라기스 성을 함락하고 랍사게를 보내는 등 큰 위협에도, 낙심하지 않고 이사야와 함께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그 밤에 앗시리아의 군대 18만 5천 명이 주의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왕하19:35). 이렇게 역경을 믿음으로 이긴 히스기야도, 바벨론에서 사신이 오자, 왕궁의 모든 것을 내보이며 부와 힘을 자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이사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역경’ 보다 ‘교만’이 더 무서운 시험 같습니다. 한편, 신약에는 ‘환난’이 오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역경이 주는 유익성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경은 ‘시험’과 ‘유익’ 양면이 있음을 숙지하고, 역경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4: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 잠언은 제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건져줄 책임을 강조합니다. 11절은 ‘건져 주라’와 ‘인색하지 말아라’는 긍정과 부정 명령문을 함께 사용하여 구명의무를 강조하며, 12절은 재판장이신 주님을 상기시킴으로 제자들이 망설임 없이 책임을 다하도록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에스더서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에스더를 황후로 세운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업무를 보는 직책에 임명됩니다. 그때 함무다다의 아들 하만이 높은 지위에 올랐고,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서 대궐을 출입하는 하만의 행차에 절하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모르드개의 행태가 하만에게 보고되자, 분노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 전체를 죽이고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모르드개는 황후 에스더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에스더는 왕의 규정을 내세우며 머뭇거립니다. 그때, 모르드개는 “네가 왕궁에 있다고 모른 채 하면 유대민족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겠지만,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당할 것이다”라고 한뒤,“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 그러자  에스더는  금식한 뒤 목숨 걸고 유대인들과 모르드개를 구명하는 일에 착수하고, 주님은 모르드개의 숨겨진 선행을 발판으로 하만의 음모를 뒤집어 엎습니다. 내일은 ‘백인이유아이사’ 라는 고사와 함께 본잠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잠언24: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그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동진 원제 사마예 때의 승상은 왕도였습니다. 그런데 왕도의 사촌형인 진동대 장군 왕돈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향해 진격해 오자, 황제는 왕도를 의심하였습니다. 왕도는 크게 놀라 친족과 함께 적과 통정한 바 없음을 읍소합니다. 당시 상서 벼슬이었던 주백인은 왕도의 구명요청을 무시하고 그냥 입궐하나, 입궐 후 황제에게 왕도의 무죄함을 진언하였습니다. 퇴궐 시 왕도는 백인을 불렀지만, 그는 오히려 무지막지한 말을 내뱉고는 떠납니다. 그러나 집에 가서 또 상소문을 올려 왕도를 구하나, 왕도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황제는 왕돈과 화해를 하고 왕돈은 자신의 적들을 죽인 다음 철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돈은 백인을 처리하기 위해 왕도에게 묻습니다: “그는 우리의 친구인가, 적인가?”  왕도가 답변을 머뭇거리자 왕돈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 후 왕도는 우연히 백인의 상소문을 읽고,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왕도는 통곡하며: “ 비록 내가 직접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나 때문에 죽었도다” (백인유아이사(伯仁由我而死)). 왕도의 인간성을 보게 됩니다. 실학자 홍대용은  “왕도는 자신이 백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돈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것은 간사한 사람처럼 남의 손을 빌려 죽이는 방법이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지 삶과 죽음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선교사 하퍼의 마지막 순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12:14)

잠언24:11,12절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절의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 속에는 세상적 측면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영적인 측면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니면 구원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전도자 하퍼는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 설교 청빙을 받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그가 탄 배가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승객 중 얼마는 구명정에 옮겨 탈 수 있었지만 하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물 위에 떠 있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동안 하퍼는 주위를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퍼는 부서진 나무 조각 하나에 매달려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절히 전도하였습니다. 이윽고 하퍼 역시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그 바로 직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으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4년이 지나 그 여객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한 남자는 자기가 그 날 밤 두 번의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하퍼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혹한의 바다에서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빠져 모두 죽어가는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퍼는 그것을 알고 전도하여 영혼을 구하였는 바, 마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잠언24:13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꿀’과 ‘지혜’는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꿀’을  먹으면 몸에 양분이 되지만, 지혜를 얻어 ‘깨닫게 되면’ 영혼과 마음에 큰 양분이 됩니다. 또한, ‘꿀’이 육체의 활력을 돕는 것 같이, ‘지혜’는 쇠약한 마음과 육체를 살아나도록 하는 명약으로 단 맛이 그만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특히 ‘꿀’이 갖는 ‘단 맛’의 특질을 강조합니다. 한편, 맛을 아는 중심은 ‘미각’으로, 꿀이 갖는 단 맛도 미각이 없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생명력의 근원인 ‘네페쉬—생명, 영혼’의 기능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지혜는 그 ‘네페쉬’로 알 수 있는 것이지, 미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흡수된 꿀과 지혜는 즐거움과 함께 삶을 역동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는 꿀이 갖는 달콤한 맛뿐만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이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빔의 언급 같이,  ‘지혜’는 ‘꿀’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13절에 먼저 ‘꿀’이 몸에 유익함을 적어놓고, 이어 ‘꿀’ 보다 훨씬 유익한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14).  잠언의 제자는 반드시 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바다를 벌 주고 때려서 순종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게 되고, 마음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벧전5:7). 다음 주에 14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4:14)

매일묵상(2023/7/3-7)

잠언24:4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본절의 ‘보배’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황금과 진주’ 같은 물질적인 보배를 지칭하는 경우입니다. 솔로몬은 주님께 받은 지혜로 엄청난 부와 재물을 쌓았다는 것은 이 해석의 좋은 예입니다. 둘째, 훌륭한 인격이나, 인간관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옳바른 관계가 구현된 삶과 같은 영적,  도덕적 의미라고 보는 경우입니다. 본절은 둘 다 의미합니다. 문제는, 두 번째 의미의 보화에 의하여 수반되지 않는 첫 번째 의미의 보화만으로는 본절의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악한 자가 남을 속이거나 약탈하여 황금이나 진주 등을 가진다 하여, 그것을 칭찬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인간은 속기 쉽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 서두부터 긴급히 금지명령을 내립니다(1:10-19). 그 길의 종착지는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자의 면류관은 재물이다”(14:24)는 말처럼,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기도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주어집니다(잠2:6, 약1:5). 그 지식을 따라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집을 세우고, 그 집에 합당한 보배들 – 존중받는 남편, 예의 바른 자녀, 품위 있는 삶, 넉넉한 재물, 양식과 옷, 곤궁한 자를 위한 자비 등 -로 채워야 합니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 능력 있는 아내”(31:10-31)은 본절을 구현하였으며, 비결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31:30)
    
잠언24:5,6절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5,6절은 ‘힘’(5)과 ‘전략’(6)을 갖추려면 ‘지혜’가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3-4절은 성공의 3요소로 ‘지혜,지식,명철’을 밝히고, 5-6절은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덕목인 ‘힘과 지략’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힘’과 ‘전략’은 어떤 일에도 요청되지만, 특히 전쟁 시에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배후에는 주님 자신이 서 계십니다. 따라서, 잠언이 말하는 지혜와 지식의 전제는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한편, 전쟁에 관한 본 잠언은 적의와 배신이 판을 치는 현실 세계에서 승리을 위한 패러다임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21:22)와 같은 취지로, 단순한 물리적 힘보다, 지혜와 지식의 힘이 더 강함을 교훈하며, 그들 사이의 관계는“지혜 없는 힘은 눈 빠진 거인과 같다”는 속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BC 3세기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 지렛대, 도르래 혹은 나선펌프의 원리를 발견한 분입니다. 그리스의 병사들이 탄 전함이 모래톱에 걸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지렛대 원리를 활용한 기중기로 쉽게 바다로 끌어낸 일과, 그의 조국 시랴큐스가 1차 포에니 전쟁에 휘말려 로마와 전쟁할 때 투석기 등으로 로마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더구나 그때 아르키메데스는 70 중반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운 시라큐스라 할지라도 결국 로마에게 함락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경외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잠언21:30,새번역)

잠언24:7절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라는 단어로 3-6절과, ‘미련’이란 용어로 8-9절과 연결되어 ‘지혜는 능력의 원천’(3-6)이라는 교훈을 돋보이게 하고, ‘도덕성의 결여는 바보의 특징’이라는 교훈( 8-9)의 근거가 됩니다. 주제는 미련하여 능력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경고로써, 전단은 원인을 후단은 결과를 제시합니다.전단은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미련한 자는 ‘경건과 겸손’이라는 날개가 없어서, 공동선을 위해 필요한 ‘하늘의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유합니다. 미련한 자의 결핍되고 미성숙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무릇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이는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 이기 때문입니다.’(약3:17,18).  그 결과 “그는 성문에서 입조차 열지 못한다’는 진술이 이어집니다. 미련한 자는 상식으로 보아 합당한 것들도 고칠 수 없는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자들로서, 공동체의 화평과 발전을 위한 토론 장소인 성문에서 지도자로 인정 받지 못합니다.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의 의견은 치우쳤으며, 그는 타인을 배려하고 공공의 이익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잘 말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발언조자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사려분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입을 닫고 잠잠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조용하면 지혜로워 보이고, 입술을 다물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인다.” (잠언17:28,새번역)

잠언24:8절
“늘 악한 일만 꾀하는 사람은, 이간질꾼이라고 불린다.”(새번역)

8, 9절은 7절의 ‘미련한 자’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그들은  부도덕한 행실의 소유자입니다. ‘악한 일을 꾀하는 사람’이란 ‘의도적으로 남을 해치려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악인’을 말합니다. 참된 지혜의 목적은 효율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목적은 이기적인 욕망 달성이고 그것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것이 거짓된 지혜입니다. 그에게  사람이란 짐승이나 물건과 같이 목적 달성의 수단입니다. 또 그의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타인에 대한 배려나,  부모공경, 살인·간음·절도·거짓증언 등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간질꾼으로 불린다’고 표현된 것입니다. 한편, 이 표현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사악한 생각들의 주인이라고 부른다’는 의미이며,  ‘비방거리,’ ‘속담과 이야기거리’ (신28:7;왕상9:7)로 바꾸어 말할 수 있어서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짐작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숭배로 향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적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여로보암은 남유대 왕국과 대결할 종교를 창안한 뒤, 황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웁니다. 이 죄는 선지자들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200년 동안 계속되다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의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브라데스 강 북쪽에 흩으셨고, 본토의 사람들은 타 민족과 혼합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가를 단 하나의 잣대라면, 만유의 통치자이신 주님을 두려워하는가 여부이며, 이는 ‘경건’이란 말로 요약됩니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잠언24:9
어리석은 사람은 죄짓는 것만 계획한다. 오만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는다.”(새번역)

어리석은 사람의 뿌리깊은 문제는 자신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과 현실적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대신, 어리석게도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타인을 과소평가합니다.  이 때문에, 지혜에서 힘과 전략(5-6)이 나오지만, 어리석음에서는 ‘죄와 사회적 경멸’(9)이 맺어집니다. 전단은 반사회적 행동과 그 원인을 밝히며, 후단은 전단의 ‘어리석은 사람’이 ‘오만한 사람’이며, 그 사회적 결과는 ‘미움’임을 알려줍니다. ‘오만한 사람’은  그 행동이나 태도가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거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타인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확립된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대신 비방하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계획하는 모든 것은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잠언은 이를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 결국은 사회적 ‘미움’이요 ‘경멸’로써, ‘어리석음은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단절시키게 합니다’(클리포드). 역사상 예는 16세기 금은보화를 위한 탐욕 때문에 신대륙으로 떠난 4명의 피사로 형제들입니다. 불과 200명을 이끌고 잉카제국을 정복하였지만, 무자비하고 악랄한 수탈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첫째와 셋째는 살해당하고, 둘째는 원주민 수탈을 금지하려는 스페인 총독의 지시를 거부하다 처형당하였으며, 막내는 잡혀 스페인 감옥에서 20년을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이들은 ‘정직성과 정서성’이 매우 낮아, 거만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유형이라고 분석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악명이 남아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매일묵상(2023/6/26-30)

히브리서 11: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기습작전을 벌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지만,  일본은 테러범으로 처형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족을 구출하려고 애굽인을 죽였으나, 바로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건은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성서적 세계관에서 보면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의 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그 또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느헤미야가 중요합니다. 그는 페르샤 궁중의 술관원이란 고위 직책에  있었을 때, 머나먼 페르샤 변방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참화를 듣고, 즉각적인 소명을 가졌습니다. 그는 먼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이는 1천년 전 모세의 설교를 모은  신명기의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 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벌은 추방이나,  돌이켜 계명을 지키면 회복해 주신다는 신명기의 약속 대로, 주님은 전 세계로 흩으신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예루살렘과 유대민족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한편, 유대총독의 직은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예정된 길이었으며, 자신의 출세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느헤미야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마음에 모든 계획을 세웠지만 느헤미야는 성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응답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다가, 때가 왔을 때 주저 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16:3,새번역).

잠언23:29
재난을 맞을 사람이 누구냐? 근심하게 사람이 누구냐? 다투게 사람이 누구냐? 속상해 사람이 누구냐? 애매하게 상처입을 사람이 누구냐? 눈이 충혈된 사람이 누구냐?”(공동번역)

플로리다의 브래든턴에 살던 한 알코올 중독자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 자전거를 탄 소년을 치어 죽이고는 도망쳤습니다. 사고 현장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그 차와 주인을 발견하고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가 치어 죽인 소년이 그의 12살된 아들이었습니다. 한편,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 포도주와 같은 술은 식사와 잔치 때 필수품이었고(요2:1-11), 상처를 치료하는 약품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눅10:34;딤전5:23) 술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음주 문화는 자연히 남용되었고, 그로 인한 해악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29-35절에서 다채로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지나친 음주를 경계합니다.  예를 들어, 29절은 6번이나 불행한 자를 질문하고, 30절은 주인공을 밝힙니다: “술에 잠긴 자’ 혹은 ‘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이다’. 술에 중독된 이들은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와 고통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술과 관련하여 많은 불행이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술과 도박을 아예 금지하였고, 이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로 술 취함과 믿음 생활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이 전통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잠언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4:1-2절은 악인의 형통을 선망하고 그들과 교제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23:17절에 같은 경고가 등장합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다만, 본절과 23:17절의 차이는 동기유인을 제공하는 방법입니다. 본절에서는 악인과 교제조차 나누지 말것을 권고하고,  그 근거로 악인의 못된 마음과 언어를 제시합니다(2). 여기에는 파멸이라는 악인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는데, 만약 잠언의 제자가 그들과 교제를 나누다가는 악인처럼 되어 심판 받을 수 있다는 현자의 우려가 깔려 있습니다.  23:17절은 18절과 함께  주님을 경외하면 오히려 네가 형통할 것이므로 악인의 일시적, 외형적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잠언이 같은 취지의 경고를 이처럼 반복하는 까닭은 세상이 도덕적으로 혼란하기 때문입니다(3:1-12참고). 그러나 만일 악인이 악한 방법으로도 쉽게 부를 쌓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도 그를 부러워 하거나 그와 교제를 나누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와 권력에 그토록 집착을 합니다만, 이 세상을 떠나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습니다. 24:19-20절은 그 점을 지적하여, 악인들의 번영에 안달하지 말고 주님을 기다리라고 교훈합니다. 주님은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것은 물론(2:6),  생명,부, 재산, 명예, 기타 모든 것을 주시기도 가져가시도 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이를 잊지 않는 것이 잠언의 요체이며, 욥은 고난을 통해 주님의 주권과 자비를 배웠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24:2
그들의 마음은 폭력을 꾀하고, 그들의 입술은 남을 해칠 말만 하기 때문이다”(새번역)

악인과의 교제조차 금지하는 1절의 이유로, 2절은  악인의 인격과 언어 생활을 지적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파멸도 개의치 않으며, 그 마음의 욕망은 언어로 구체화되어 모함,음모,거짓증언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알면 모든 사람이 그들을 혐오하여 함께 있기조차 싫어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운명은 확실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또 일부는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악인이 불법을 행하고 속이면서 잠시 형통할 수 있지만 마침내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에게 가장 가혹한 시련은, 자신은 고난을 당하지만,  악인은 형통하는 현실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때 의인에게는 분노와 시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오나, 자신의 천박한 명철로는 도저히 주님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 형통을 깨닫는다면, 시기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지은 아삽의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남을 해치려는 악인의 삶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의 형통도 부러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 잠언의 현자입니다. 오래 전 어느 금융회사의 한 팀장(비그리스도인)이 큰 재산을 상속받은 젊은 분을 만나 예금할 것을 권유한 뒤, 돌아와서  “나는 그런 사람 부럽지 않아요”라며 제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그분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겠습니까? 따라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고후5:7;히11:1).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4:3
집은 지혜로 지어지고명철로 튼튼해진다.”(새번역) 24:3-12절은 현자의 30가지 교훈의 네 번째 단락이며, ‘지혜는 역경 중의 힘이다’는 교훈이 주제입니다. 3-4절은 도입구절로서, 부는 약탈(1-2)이 아니라, 지혜로 축적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잠언은 주님께서 세상의 창조 시 ‘지혜, 명철 그리고 지식’을 사용하셨음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3:19,20). 본절에서 같은 ‘지혜,명철 그리고 지식’이 등장하여 집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는 집(가정)과 우주가 유사한 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 생명체, 그리고 이들을 다스릴 인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우주의 관리자이지만, 인간들 사이에도 아름다운 관계를 세워갈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부모공경, 결혼, 자녀의 양육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집’은 단순히 물질적인 구조만을 뜻하지 않고 우리의 인간관계의 구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능숙한 건축자가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멋진 집을 건축하듯이, 지혜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아름답고 건전한 가족, 친족, 그리고 친구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그의 핵심 기술은 ‘정직’과 ‘사랑’입니다. 따라서, 지혜는 사랑 가운데 바른 것을 말하고 바르게 행하여 공동체를 튼튼히 세워 갈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핵심 능력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한편, 천지창조와 애굽으로부터 구속한 사건이 구약 성도의 경건생활의 근거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은 천지창조와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선포한 복음에 근거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