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7/18 – 22)

잠언18: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이 잠언은 형제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친밀했던 사이가 갈등 관계로 바뀌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 관계 보다 풀기 어렵습니다. ‘형제’란 피를 나눈 친형제나 혹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서 만약 서로 간에 이해상충, 배신 등으로 신뢰관계에 금이 갈 때 당연히 감정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이 감정과 분노의 문제는 제일 다루기 힘듭니다. 마치 통행을 막기 위해 견고한 성의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이 마음의 문을 닫아 관계를 끝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적의까지 생겨나기 쉽습니다. 시편55편이 이런 감정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할 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133:1-3).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져 형제를 섬기고자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이기적인 우리 자아를 우리 힘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받는 삶이며, 그 끝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잠언18:20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가 사람의 배를 채워 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로 만족하게 된다.”(새번역)

20절과 21절은, 갈등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과 언어를 다룬 단락(18:13-21절)의 결론입니다. 언어는 좋고 나쁨을 떠나 상대방에게 확실하고도 충분한 효과를 미치는 것은 물론, 부메랑이 되어 말한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솔로몬은 열매, 먹는다, 추수와 같은 농업 시대에 익숙한 비유를 사용하여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배’란 ‘그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내는 제유법입니다. 후단에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의 원어는 ‘소득 income’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비유의 원천을 과수원에서 밀밭 농사로 바꾼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만족하게 된다’라고 끝맺음 하여, 전단의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이는 언어 사용의 결과가 필연적임을 강조합니다. 과수원이나 밀밭에서 과일이나 곡식을 재배하여 그 열매를 따서 먹는 것처럼, 이 잠언은 자기의 입과 입술이 마치 과수원이나 밀밭과 같으며 언어는 씨요, 말하는 것은 파종하며 거름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절망에 빠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갔습니다. 주님은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주님은 섭리 가운데 우리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8).

잠언18: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는 위험한 지체이기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고 경고하여 신중할 것을 권고합니다. 먼저 우리는 언어의 힘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식축구의 전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훈련 중 여러 번 실수를 한 어떤 선수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자 빈스 감독은 락커룸으로 가서 머리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는 그 선수(제리 크래머)를 격려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는 NFL에서 가장 뛰어난 가드가 될 것이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제리 크래머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언어사용은 자신과 남 모두를 파멸시키고야 맙니다. 율리우스 시저는 뛰어난 로마의 장군이자 문필가였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망과 자신의 재주에 대하여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대화시 자주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주위에 있던 공화파들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언어 사용에 주의하면서 모욕을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최후의 심판)에는 그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고(마12:36), 야고보는 혀를 ‘불fire’이라고 정의하고 그 불이 지옥에서 나온다고 하여(약3:6), ‘죽고 사는 것’에 영원의 의미를 가미하였습니다. ‘혀’의 조종자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선한 말을 하고 그 열매로서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마5:5).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시편106:7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이 시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권능과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않고 오히려 반역의 길로 걸어간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구세주와 심판자로 바라보는 신학적 맥락 내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찬양으로 초대(1–2)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3–5)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구원(6–12) 
D         이스라엘의 불신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13–43)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절제(44–46)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47) 
A′         찬양으로 초대(48)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기뻐 노래하였으나, 곧 어려움을 만나고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이같이 그들의 믿음은 냄비입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기 바빴습니다. 레파토리는 늘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나았다. 왜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건 사건이 닥쳐왔을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유를 깨닫고 순종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요, 중생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시편106:15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작고하신 조용기목사님은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 건강의 복”(요한삼서 2절)이라는 이른바 3박자 구원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본성 때문에 안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이 함께 오면 교만하여져서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복을 받아 겸손해지는 것은 좋으나, 물질이나 건강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인격만큼’ 가지면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십니다. 그분은 환경 가운데서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신 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죠!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실패하였습니다 (시편106:13-14).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 역시 인간 본성과 어긋나기에, 성령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으로 욕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복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건강의 복 추구에 몰입하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 즉 영적인 복을 먼저 얻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중생의 결과). 각기 원하는대로 주십니다. 건강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얻고 그 물질을 우상으로 삼도록 허락하시나(마6:2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축복을 주시되, 물질은 거기에 소용되는 만큼만 주십니다. 험한 세상 주님을 신뢰하며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여야 합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히13:5-6).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2/07/11 – 15)

잠언18:16절
“선물은 사람이 가는 길을 넓게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이끌어 준다”(새번역)


잠언에서 ‘선물’ 혹은 ‘뇌물’과 관련하여 ‘맛탄’과 ‘쇼하드’가 사용됩니다. 후자는 늘 ‘뇌물’의 의미로 쓰이지만, 전자는 문맥에 따라 ‘선물’ 혹은 ‘뇌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잠15:27). 16절에 나온 ‘선물’의 원어는 ‘맛탄’입니다만, 좋은 뜻 보다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잠언은 공의가 뇌물에 의해 뒤틀릴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17:8, 23- ‘쇼하드’), 성경에는 감사 또는 호의를 받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골리앗의 블레셋과 전쟁에 나선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다윗을 통해 열 덩이의 치즈를 천부장에게 보낸 이새입니다. 또 다윗은 사울 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기 직전, 아말렉을 치고 얻은 전리품을 유대 장로들에게 보내어 환심을 샀습니다(삼상30:26). 그러나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선물이어도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세무 공무원은 납세자로부터 촌지를 받았을 때 그 얼굴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L 씨가 판사로 재직 시(1960-70년대), 누군가 케이크를 그분의 가정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L 판사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 케이크를 화장실(변소)에 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었지만, 조그만 선물 하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안됩니다. L 판사의 행동은 올바른 것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세상은 영악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기로 굳게  마음 먹고 기도하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잠언 18:17절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새번역)

본 구절은 송사를 다루는 재판의 경우 경솔하게 한 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해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듣고 그에 따라 객관적이고 적합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입니다. 사건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재판관은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의 말만 일방적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도 보는 자의 관점과 이해관계 기타의 사정으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해관계가 얽힌 재판의 경우는 불리한 사실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골라 주장하기 때문에 한 쪽의 말만 들으면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본 잠언의 취지는 일상사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말을 반드시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란 모두의 주장을 듣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살핀 뒤에 공정하게 판단하고, 적합한 조치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창기의 송사를 해결함으로 지혜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어머니의 일반적 심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날 그렇게 해결하는 재판부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유전자 분석)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사에서의 다툼은 당사자들 사이에 잘하고 잘못한 것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은 싸우는 두 여종이 와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너도 옳고, 너도 옳고, 아내도 옳다’는 대답을 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모범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 18: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17절이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전부 들은 후에 진위를 가리고, 분쟁을 해결하라고 하였지만, 본절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분쟁에 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여 제비를 뽑은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1)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삿1:3), (2)성전의 직무를 배분할 때 (대상24:1-5), (3)아이 성 전투의 패배 원인자를 가려낼 때(수7:14-26), (4)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선출할 때(삼상10:17-24) 각각 제비뽑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2)는 공정성을 위해, (3),(4)는 이적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즉 제비로 뽑힌 아간의 범죄 물증을 찾아냈고, 사무엘은 전 날 사울이 왕으로 뽑힐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의 제비를 뽑는 사건에는 배후에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가슴에 찬 판결흉배 속 우림과 둠밈도 비슷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선출할 때(행1:26)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제비뽑기 기록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더 이상 이런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평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비를 뽑는 것은 지금도 합리적이고, 승복한다면 때로는 강한 자 사이의 분쟁해결을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 해결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

시편105: 1절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새번역)

105편과 106편은 시편 제4권을 끝맺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두 개의 흐름 속에서, 105편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부터 정복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송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만민에게 선포합니다(1,2). 시의 구조입니다.

A    찬양으로 초대 (1–6)
B    언약을 세우심 (7–11)
C    주님의 보호 (12–15)
D    주님의 섭리 (16–23)
C′   주님의 보호 (24–36)
B′   언약의 성취 (37–45b)
A′   찬양으로 마침 (45c)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신 역사를 세 단계로 일괄합니다. 첫째는, 족장시대로서(창12-50장) 언약의 제정, 가나안 땅에서 유목민의 생활, 애굽에서의 요셉 이야기를 포함합니다(7-23). 둘째는, 출애굽의 시기로서 (출1-12장)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고난, 모세와 재앙들, 출애굽하는 백성을 보여줍니다(24-36). 셋째로 광야의 여정을 거쳐 가나안 입성을 언급함으로 언약의 성취를 노래합니다(37-44, 여호수아서). 언약을 이루신 이유는 당신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 위함입니다(45). 약 750년의 역사를 45절로 요약한 본 시편은 때로는 신비롭게 행하시지만 언제나 백성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미리 계획하시며, 필요를 언제나 충족시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이런 형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편105:45).  

시편105 : 17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이를 이루시는 섭리의 신비함을 노래합니다(16-23절).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야 절망하였겠지만, 그 사건은 야곱의 집 사람 70 명을 애굽으로 보내 민족을 만드실 계획의 출발이었습니다. 1,000년 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앞서 보내신 신비로운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의 인격을 도야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큰 의문과 고뇌가 야곱과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노예와 죄수로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너는 이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합격한 요셉은 총리가 되어 다스렸습니다. 8년 후 큰 흉년이 닥쳤습니다. 형제들은 그 흉년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도착한 그곳은 총리 요셉이 있는 곳입니다. 신비롭습니다. 고난이 곧 축복이라는 그 신비말입니다. 우리 역시 고난의 한 가운데서는 요셉이나 야곱, 그리고 그 형제들과 같이 같이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전혀 무관합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총리로, 궁핍에서 풍요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기근이라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시편105:23절).   

매일묵상(2022/07/04 – 08)

2022/7/4-8
잠언18:13절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새번역)

18:13-21절은 새 단락을 형성하면서, 미련한 자 보다도 갈등과 언어에 초점을 맞춥니다. 잠언의 제자는 정의를 세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언어를 힘있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단락의 구조입니다: 13-15절(서론), 16-19절(법정에서 분쟁해결), 20-21절(언어의 힘). 바보가 보여주는 교만한 태도(12a)는 무례하고 성급하게 말하도록 만들어(13a), 수모를 받게 마련입니다(13b). 이는 명예와 존귀가 겸손한 자를 찾아온다는 교훈(12b)과 대조됩니다. 본 잠언은 현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천박하게도 말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어리석은 자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18:2참조). 바보의 그런 경솔함을 보는 모든 사람이 ‘어리석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좋은 예가, 시험을 보는 학생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함정이 들어 있는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고 성급하게 답을 적는 자는 ‘0’점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급히 결론을 내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교만한 바보 앞에 놓인 특별한 유혹이자, 미성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길에서도 같습니다. 지금은 작고 하신  K 목사님은 독일에서 귀국 비행기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습니다. 너무나도 당황하여 공항에서 서성일 때, 우연히 아는 집사님을 만났고, 이어 그 지역의 부흥회를 인도하여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중간 결산 하지 말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인생은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성급하게 속단하는 신자는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18:14절
“사람이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새번역)

즐거움과 근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 잠언15:13및 17:22과 같이, 이 잠언도 심리적 상태와 신체의 건강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육체-영혼이란 이원론은 없습니다. 다만, 긍정적인 태도가 개인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상한 마음(우울증이나 불안 등)은 건강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문제는 열등감이나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역경이 없더라도 패배로 향하는데, 하물며 역경 속에서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견인불발) 힘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최고의 답변은 좋은 소식이나 지혜를 듣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지혜(좋은 소식)는 병을 이길 수 있는 정신적(영적) 생명을 낳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절망하는 포로들이, 은밀히 숨겨둔 단파방송 수신기로 연합군의 소식을 들었을 경우 절망은 대번에 소망으로 바뀝니다. 사도들이 전한 좋은 소식(복음)은 ‘지혜’의 정수입니다. 복음에는 환란, 역경, 궁핍, 죽음, 죄의 수용소에 있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기적,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들이 의미하는 바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만유의 주님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교제 방법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기대감 때문에 모든 우울증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롬8:37,새번역)

잠언18:15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지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베이컨의 말이 있지만, ‘지식’은 영적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잠언은 지식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론(13-15절)을 매듭짓습니다. 전단의 ‘마음’ 후단의 ‘귀’는 ‘분별하는 힘’과 관련된 기관으로, 지혜자를 특징지우는 양도불가능한 자산입니다. ‘분별력’은 지식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지혜자가 되고자 하면 지식을 갖추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통상 착한 사람은 지식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물을 얻듯이 지식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10 호의 마을에도 자신 정도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자신 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반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인품을 갖추지 못하고 교만하기 쉬운데, 이는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8:1). 본 잠언의 ‘명철한 자’’는  양자를 다 갖추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잠언의 제자들은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욥12:13;잠8:14). 즉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주신 목적은 사랑의 수고를 위함입니다. 이런 진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지식도 갖추어야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계시한 성경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7,새번역)

시편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본 시편의 각 구절마다 놀라운 감사의 탄성이 퍼져나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104편도 같아, 두 시편은 하나님을 구세주와 창조자, 아버지와 보존자, 자비로우시며 권능을 가진 분으로 찬양드립니다. 시편의 은하계 중 이 두 개는 마치 쌍둥이 별과 같은데,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지신 우리 주님을 전제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다윗입니다. 이 시편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1)로 시작해서 주의 천사들(20)과 천군들(21) 그리고 온 우주에 창조된 모든 것들에게 주님을 찬송하라는 외치고, 다시 한 번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22)는 말로 끝맺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개인적인 찬양 (1–2절)
B    각 인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찬양 (3–5절)
B′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의로운 통치를 찬양 ( 6–18절)
A′   우주적이며 개인적인 찬양(19–22절)

다윗은 인생의 영고성쇠를 모두 경험하였습니다. 20살에 군대장관이 되었고, 위대한 왕이자,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심리를 통찰한 심리학자요, 하나님을 아는 신학자요, 하나님의 계시기관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충신의 가정을 파탄시켰기에, 다윗의 가정은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인생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강자인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눅11:28). 마지막 날 평가 기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는가?”입니다.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

시편104:24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새번역)

104편의 주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103편이 ‘구속자-왕’의 측면을 노래한다면, 이 시편은 ‘창조주-왕’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시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따라, 그분의 지혜, 능력, 인자하심을 묵상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창세기 1장의 서사시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1–4)
B    피조물의 다양한 존재형식(5–26)
B′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27–30)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31–35)

어떤 목사님은 한려수도를 관광할 때 맑은 바다 속으로 수 많은 물고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수 없이 많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왔을 터인데, 넉넉하게 어부의 요구에 응해 준 바다는 풍요롭구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바다를 늘 채워 놓으시는 하나님의 광대함과 너그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구를,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는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예로 들면서 삶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장소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정, 직장, 기타 삶의 현장은 물론 여행도 영적 생활에 필수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시편103:33,새번역).

매일묵상(2022/06/27-07/01)

잠언 18: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10절과 11절 모두 보호와 안전에 관한 내용이나, 10절은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의인의 안전을, 11절은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을 다룹니다. 9절은 ‘패망하는 자’란 단어로 끝나고, 10절의 첫 단어는 ‘견고한 망대’입니다. 이로써 잠언은 어떤 경우에도 패망하지 않고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망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자들이 묵상하도록 합니다. 게으르지 않는 정도 갖고는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확실한 안전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의지하는 미국 달러, 국가(재정파탄 가능), 은행(5천만원만 보호), 부동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기 때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안전 자산, 피난처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여호와)의 이름’은 솔로몬의 잠언이나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3:5), 출애굽 사건, 십자가와 부활 등을 통해 본질과 속성을 보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의인(그리스도인)은 바로 주님께 달려가서 참된 안전을 누립니다. 10절이 위치한 문맥이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지금 신실하게 살아가는 의인이 불의와 험담 그리고 풍문으로 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는 약속과 노아, 아브라함, 욥, 다윗 등의 구원 사건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견고한 망루 안에 들어가게 되고, 만유의 주님을 믿고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잠4:2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잠언 18:11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11절은 의인의 참된 안전보장책에 대비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보장책(재물)을 말합니다. 부자는 어리석게도 속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이아말로 ‘견고한 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많은 재물을 쌓아둡니다. 고대에는 적이 공격할 때를 대비하여 성벽을 높이 쌓습니다. 헬라의 도시국가들도 모두 아크로폴리스라는 산 위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지면 모두 아크로 폴리스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합니다. 실제로 아테네에 가서 본 아크로폴리스는 점령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포의 발명은  그런 방비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부자가 쌓아논 재물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10:15). 그러나 재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크게 당황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지혜보다 못합니다. 재물로는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나, 지혜는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의사의 권고를 따르는 환자가 아무래도 더 빨리 회복하여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없지만,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주님의 돌보심을 받다가,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의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이는 재물을 안전책으로 삼는 부자의 생각은 망상입니다만(말기 암 환자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는 의인의 안전은 확실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잠언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요사이 전세계는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전혀 물가가 오르지 않던 일본에서도 바나나 한 상자가 1,800엔에서 올해 2,700엔으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언제 물가가 잡힐까요? 한 경제 전문가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을 멈춘 시점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1.75%이나, 연말에는 3.5%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물가가 잡히더라도 내년에는 경기침체가 우려됩니다. 우리는 이를 대비하면서 경기 연착륙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여 할 것입니다. 이같이 경기는 금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의 교만 여부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나 국가는 반드시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고 교훈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눈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좋은 예로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바벨론 제국과 도시 건설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마자 정신병자가 되어 7년이나 밖에서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그 후 겸손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보자, 주님은 다시 이성을 주셔서 그는 인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와 반대로 존귀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겸손이 먼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요셉입니다. 바로가 해몽을 요청하였을 때, 요셉의 첫 마디는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하면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만백성의 생명을 구함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1:2).

시편102:3절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있을 때만큼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습니다.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님의 완전한 지혜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 없는 ‘대답’은 ‘NO’이며, 이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응답입니다. 물론 ‘아직 아니다’라는 결론도 주시는데, 이는 우리와 주님의 시간표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고(24), 병들고 쇠약한 상태에서 적들로부터 계속된 비방을 받아 너무나도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3-9). 그는 이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한 ‘주님의 분노와 진노”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10). 자신의 날은 이미 기울어졌습니다(11). 그래서 시인은 서두부터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귀를 기울여 속히 응답하여 달라고 말입니다(1-2). 그러나 시인은 영원하시며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는 주님의 위대함과 그분의 목적하신 영광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본 시의 중심축입니다(12-22). 우리가 고난에 처하나 낙담하지 않는 근본적인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에 대한 신뢰가 우리 믿음의 중핵을 이루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편, 본 시편 25-27절에 나오는 영원하신 주님을 히브리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히1:10-12).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시편102:26절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새번역)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큰 채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가가 법으로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만 행사가능합니다. 이에 위반시 국가의 벌이 두렵기 때문에 채권자는 행동을 삼가합니다. 지혜자란 자신의 한계를 잘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이 나오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만유의 주님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온 우주 만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고, 새롭게 변화될 대상일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한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영존하시는 주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살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에 등장하시는 영원하신 주님의 정체를 히브리서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0-12절은 본 시편을 인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온 우주의 옷을 바꾸시는 주님”으로 선포하십니다. 마치 물리학자가 소립자 세계의 놀라운 존재와 법칙을 발견하고 실험하여 확신을 얻은 뒤 학회에 보고하듯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3년 6개월 동안 주목하여 자세히 관찰하고 그분이 죽고 부활 승천하신 것과 그 의미를 확인한 후(요2:22), 목숨 걸고 증언한 내용이 복음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시고, 각 사람의 마음에 당신과 복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요15:2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매일큐티(2022/06/20-24)

시편 100: 1절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새번역)

이 감사의 시 짧지만(5절),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 그리고 다시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을 되풀이 함으로써, 멋진 내재율을 담아 저절로 찬양과 감사가 터져나오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2절) 3중의 초청; ‘환호하라, 섬겨라, 나아가라’
         B1 (3절) 3중의 확언: ‘하나님….우리를 지으신 분….그의 것’
A2 (4절) 3중의 초청: ‘들어가며…감사하며…송축하라’
          B2 (5절) 3중의 확언(하나님의 성품): ‘선하고…인자하고…성실하시다’

(1-2절)은 주님(야훼)을 찬양으로 환호하게 한 후에, 그분의 경내로 들어가 예배드리고, 끝으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하도록 이끕니다. 3절은 왜 우리 모두의 찬양과 예배가 합당한지를 말하는데,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주님(야훼)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4절은 터져 나오는 감사의 마음과 환호를 표시하기 위해, 다시 한번 3중의 초청을 발합니다. 5절은 3절을 더욱 발전시켜, 주님의 영원하신 성품을 열거하고 시인의 찬양의 근거를 뚜렷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는 주님은 창조주요, 출애굽을 이루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야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신 바로 그 하나님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새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찬양의 깊이와 강도는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100:5, 새번역)

시편101: 6절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이 시는 왕 다윗의 결단을 노래합니다. 특히 1절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전체 시(8절)를 지배합니다. ‘인자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다윗 자신의 통치 이념입니다. 시는 3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4) 왕 자신의 사적인 삶의 표준-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 (5-7) 신하들을 등용하는 기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배제하고, 충성된 신하는 등용한다/(8) 재판장으로서 정의를 확립하겠다. 유교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나, 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그 나라는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한 민국은 공무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여 아무나 공무원이 되지못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자신의 시처럼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출발선은 눈이었습니다(삼하11:2). 다윗은 눈을 통해 들어온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집은 가장 비극적으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외친 정의로운 통치 또한 좌절되었고 누적된 백성의 불만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온상이 되었습니다(삼하15장). 더우가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모든 왕위 계승자가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의 모든 왕들이 부적합한 인물임을 폭로하며, 장차 오실 완벽한 다윗(예수 그리스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사9:6).


잠언18: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인권을 강조하는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회원국 중 하나인 터어키의 쿠르드족 인권 탄압을 강력히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서 나토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터어키의 반대로 가입이 보류된 상황입니다. 두 나라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의외였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도 같습니다.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이 매를 자청한다고 가르칩니다만, 7절은 이를 보다 심화하여 미련한 자의 언어 생활이 그의 멸망의 원인과 영혼의 그물이 된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바보에게는 전혀 의외일 것입니다. ‘멸망이 된다’의 원어는 ‘메힛타’로서, 본래 소멸, 폐허 혹은 경악스러운 파괴 등을 의미합니다. ‘그물이 된다’의 원어는 ‘모케쉬’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포획하기 위해 매설한 올가미 덫, 갈고리 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자는 입 때문에  숨통을 끊어놓을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 문장은 동사가 없이 명사로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본문의 진리가 영구불변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은 도덕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6:6). 이를 생각해 보면 입으로 인한 ‘멸망’과 ‘그물’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란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무익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2: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18:8절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새번역)

잠언은 언어의 남용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넘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킨다고 경계합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험담이나 풍문을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퍼뜨리는 사람은 잠언이 말하는 또 하나의 바보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26:22).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8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험담을 회피하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고 흘려보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예레미야15:16).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18:9절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패망하는 자의 형제이다.”(현대인의성경)

본 구절은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8)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서두에 ‘역시(also)’ 혹은 ‘심지어(even)’를 의미하는 ‘깜’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양자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부사 ‘깜’은 앞의 상황을 전제하고 그 상황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보를 덧붙이고자 할 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 남의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 온갖 이유를 들고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대 농경 사회에서는 거리나 밭에 사자가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의 일은 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패망 하는 자의 형제”일 뿐입니다.” ‘패망(패가)’이란 재기 불능의 엄청난 파멸을 가리킵니다. ‘일’은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느 치과 의사 한 분은 경기도 수원시 남문에서 오랫 동안 개업을 하시면서 빌딩도 구입하는 등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7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환자를 맞아 진료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분은(집사님)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전3:22). 하나님은 그가 즐기는 일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일을 발견하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전9:10). 그래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26:13).

매일묵상(2022/06/13-17)

시편98:1절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공동번역)

“칸타테 도니노”(오, 주님을 찬양하라!)로 알려진 이 시편은 ‘공동기도서’(성공회)에 삽입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저녁 구약성서 읽기와 그것의 성취를 증언하는 신약성서 사이입니다. 시는 하나님의 승리(구원)(1-3)에 대하여 인간(4-6)과 피조물(7-9)의 찬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연(1-3)을 지배하는 ‘승리’의 주된 의미는 ‘구원’입니다. ‘예수(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헬라어 발음이고,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어디로부터 구원입니까? 죄로부터 구원입니다(마1:21). 시의 첫째 연에서 노래하는 이 구원/승리는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오직 주님의 팔로만 이루신 업적(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한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있을  ‘주(야훼)의 팔’(사53:1)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을 노래하는데, 그 ‘주(야훼)의 팔’은 다름 아닌 ‘주의 종’입니다(사53장). 신약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1:12-14), 예언된 주의 종임을 밝혀줍니다(행2:29-36; 4:30).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고 부활하셨고(히10:14),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사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히9:28). 본 시편에서 부르는 ‘새노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3).

시편99:4절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새번역)

시편 99편은 찬양과 예배를 명령하며, 100편은 이에 화답하여 ‘온 땅’이 찬양합니다. 99편의 주제는 ‘예배로의 초청’이고, 3번의 ‘거룩’이라는 후렴구가 등장합니다: (1-3) 거룩하신 분의 은혜, (4-5)거룩하신 분의 율법, (6-9) 거룩하신 분과의 교제. 첫 단락은 거룩하신 왕의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만민이 떨고, 땅이 흔들릴 것’이지만, 그분은 ‘시온에’ 그리고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십니다. 이 장소들은 백성에게 말씀하시고(출29:42-46), 죄를 속하시는 곳(출25:17-22)으로,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정의와 동시에 은혜도 잊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이어 시인은 ‘야곱’을 등장시켜 공의를 행하라는 율법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야곱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우리를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시는 완전한 ‘율법’에 직면하면, 늘 은혜를 갈구하게 되는데, 이는 비틀거리며 걷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 언약궤 위의 ‘시은좌’에 앉아 계시는 분의 발등상에 경배하도록 만듭니다(5). 마지막으로 시인은 ‘모세’ ‘아론’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증거와 율례’를 지키면서 주님과 동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명령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결함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 주님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잠언18:4절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 (새번역)

현자의 말은 심오하며 때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 심사숙고를 해야만 합니다(깊은 물). 잠언은 지혜자의 이 특성을. ‘물’이라는 소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건조하여 생수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땅속 깊이 흐르고 있어 건져올리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기(겨울철)에는 비가 내리고, 말라 있던 강(와디)에 격류가 흐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스라의 철병거 900승이 말라 있던 ‘와디’인 기손 강을 통해 진격하고 있을 때, 상류인 다볼산에 비가 내렸고 이는 순식간에 기손 강을 격류로 변화시켰습니다. 철병거 900승은 물 속에서 전멸당하였습니다(사사기). 한편, 현자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아나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지혜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줍니다. 잠언 3천 개를 말한 솔로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샘”에 비유될 수 있는 지혜자로서,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전 인류에게 주신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 모두의 깊은 갈증과 절망을 한 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 속에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요3:13-21). 아들을 보내주신 이 사랑을 깨달아야 비로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잠언18:5절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권력 남용을 경계합니다. 특히 정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재판에서 사악한 것들, 즉 뇌물 수수, 위증, 차별적 대우, 편견, 압력, 연줄 등으로 인하여 그릇된 판결이 날 경우 개인의 삶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주가 정하신 “의의 열매”를 산출해 내야 인간들 사이에 화평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재판정에서 이 문제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하고, 재판관의 재량이 많이 작용하던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경우에도 약자 편에 서서 올바르게 내려지는 재판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으로 의역된 원문은 “악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 즉 외모, 재산, 권세, 가문 등 재판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을 보고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는 행위(24:23; 신10:17)를 보여줍니다. 후단에 “억울하게 하는 것”의 원어는 ‘기울이다, 치우치다’입니다. 이 또한 뇌물과 위증, 권모 술수, 사회적 신분 등 외적인 것 때문에 정의가 굽어져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재판을 묘사합니다(출23:2).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인데(고전6:3), 하물며 세상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주님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판단할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약1:5).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지혜, 건강)을 공급받는 삶,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9).


잠언18: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바보는 언어를 남용하기 때문에 다툼(소송)을 일으키지만, 해를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교훈입니다. 전단을 보면, 그 바보는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열어 마구쏘아 대고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듣는 자는 그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말투나 인격모독적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다툼이 시작됩니다. 다툼의 결과는 미련한 자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후단은,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한다”, 고 말하여 역설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이 타인을 배려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샬롬이 만들어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보가 열변(?)을 토한다면,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동정심 대신 적개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매를 자청하다”는 표현은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 불법을 행한(명예 훼손, 모욕 등) 벌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19:29). 타락한 관리를 부추켜 죄 없는 자를 매질하려고 시도하다가 자신이 매질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10:11, 18). 이에 반하여, 현명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거나(17:1, 14),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15:18). 그러므로 잠언은 다툼을 멀리하면 영광이 된다(가정과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의미)고 합니다(20:3). 우리로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먼저 사건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시37:5-7). 그 후에야, 악한 자를 감정으로 대적하지 않고, 정의의 길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양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마5:40,새번역)   

매일묵상(2022/06/06 – 10)

잠언 18: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잠언 18:1-21절의 구성입니다.
(1)미련한 자의 반사회적 언어습관(18:1-11)
   (가)어리석은 자의 반사회적 성격, 행동과 결과(1-9)
          서론(1-3) 어리석은 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본론(4-8) 미련한 자의 왜곡된 언어습관
          결론(9) 바보는 사회를 약탈한다.
   (나)주님 안에서 의인이 가지는 방패(10-11)
(2)지혜자의 화목하게 하는 언어습관(18:12-21)

바보는 ‘사람을 싫어하며 고집불통’의 특성이 있습니다(1,2). 그래서 공동번역은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은 외톨이가 된다”로 의역하였습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란 비사교적인 사람을 묘사하는데, 문맥 상 그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바보입니다 . 그 바보는 자신의 갈망- 돈, 명예, 권력 등 -을 성취하려고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다면 다툼(소송)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에게 냉담하고, 경건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합리성까지 결여되었습니다. 창세기(13장)에서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요단 동편을 선택하여 모든 소유를 이끌고 소돔 성을 향해 갔습니다. 소돔 땅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돌라오멜 왕에게 다른 소돔 사람들과 함께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이 구출해 주었고, 소돔 성이 멸망할 때 역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 (잠언18:2,공동번역).

잠언 18:2절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공동번역)

2절은 닫힌 마음과 열린 입을 가진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려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1절)와 동일시 됩니다. 그 바보는 ‘깨우쳐주는 말(명철)’은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하기는 좋아합니다. ‘깨우쳐주는 말’ 혹은 ‘명철’의 원어는 ‘테부나’이며 ‘분별’을 의미하는 ‘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호크마)와 심히 많은 총명(테부나)’(열상5:9), 히람이 놋을 다루는 ‘총명(테부나)’이 이것을 말합니다 (왕상7:14). ‘기술’로도 번역되기에, 미련한 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총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제의 기술은 어설프기만 한데 도제가 도공의 지혜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굽는다면 좋은 도자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만약 미련한 자가 현자의 깨우치는 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마구 말을 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입니다(10:8; 14:3). 그러나 그 바보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낼 경우 자신의 미련함이 알려져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12:23; 13:16).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깨우치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행위를 논하다가 심판 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물론 욥의 중보기도로 벌을 면하였지만, 그들의 말을 읽어 보면 욥과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도 단순하게 판단한 잘못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벌과 모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잠언18:3,새번역)    

잠언 18:3절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새번역)

본 잠언의 ‘악한 사람’은 1절의 반사회적인 분리주의자, 2절의 미련한 자가 발전된 형태입니다. 그에 대한 벌로서, ‘멸시’와 ‘모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보는 스스로를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깨우쳐 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결과 그 악인은 주님 앞에 죄를 범하여 벌 받고 공동체에 의해 멸시당합니다. 전단에서 ‘….이 오면…뒤따르고’란 원인(악인)과 결과(멸시)의 필연적 관계를 말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 시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페르샤 산 외투 한 벌과, 금 한 덩이를 숨겼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아이 성 주민에게 패배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드러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였습니다.  그의 수치는 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할 경우 ‘모욕, 망신’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후단은 악인의 부끄러운 일이 심판을 받고. 사회의 치욕거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예24:9). 그러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교만, 탐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시 600년 경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 왕과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예29:18-21).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지혜와 생명이었지만, 어리석게도 왕 시드기야와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얼마 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감과 동시에, 다윗 왕국은 영원히 막을 내렸습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언18:4).

시편96: 2절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이 시는 야훼께서 왕이 되심을 노래하는 시편들(93-100)에 속하고, 배경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장막에 안치시킬 때(다윗 시대)로 보입니다(역상16장). 주제는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주님(야훼)입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선포(1–3)
B    주님의 위엄(4–6)
A′   찬양의 선포 (7–9)
B′   주님의 통치 (10–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매일 ‘찬양’하는데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위엄과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그분을 또 찬송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구원(2), 기이한 행적(2), 의로운 통치(10), 만물의 창조주(5), 만유의 회복(11,12),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13)을 묵상한 뒤, 경외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같이 노래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거나, 성취될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 사건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만 이전하였지 여전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주인은 바로에서 야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되신 야훼(하나님의 아들)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구원하고 있는 과정이 신약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 동인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요3:16).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순종과 희생이 새노래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확실한 심판이 전제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시편97: 1절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새번역)

이 시의 초점은 의롭게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님(야훼)입니다. 그분은 두렵고 엄위하시며(3-5), 공의롭게 다스리십니다(2). 주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자유함 받아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1).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나(6-9), 주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와 헛된 것을 추구한 모든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7). 시인의 이 같은 선포는 하나님 아들에 의한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요5:27-30).  멸망당한 다윗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왕 다윗은 그 나라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윗 왕은 죽었지만, 그분의 후손인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재림하셔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행17:3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으로 부릅니다(8,12).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10). 왜냐하면 그분이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 주님의 통치는 먼저 신자의 삶 속에서 ‘의의 통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본 시편은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는” 주님(야훼)이라는 신학적 대답을 줍니다(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주님을 기뻐하여라…감사를 드려라”고 말합니다(10-12). 세상은 험악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약속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1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매일묵상(2022/5/30 – 6/3)

시편 95: 1절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새번역)

본 시편의 주제는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 사건들을 돌이켜 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후 2개월 즈음에 시내 산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의 길을 걸은 백성과 짐승 떼는 목이 말랐습니다. 모세는 위급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니 호렙 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곳을 ‘맛사(시험)와 므리바(다툼)’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는 백성이 자신은 물론 주님과 다투고, 주님의 임재 여부를 시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출17장). 같은 사건이 38년 후 신광야에서 또 한 번 일어났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자, 물을 줄 능력이 없는 모세와 아론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회중을 모아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물이 나왔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신 광야 지역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지팡이로 때리면 간혹 고여 있던 물이 나오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순종해야만 하였습니다(민20장 므리바 사건). 이 사건의 핵심은 위기가 닥치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고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순종’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회고하여 경고하고,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본 시편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을 격려합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95:11;히4:5).

시편95: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까지  2개월 동안, 주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자 물이 없어 다투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출17:1-7), 시내 산에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을 불신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9-11). 그들의 후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1), 목자(6-7), 율법의 수여자(7-11)로 규정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경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적들을 의심하고 믿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내 안식’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과 관련하여는 가나안 땅이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3:7-4:13절은 이를 상론합니다. 히브리서는95편의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오늘’(95:7)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며, 거기에서 명령한 ‘너희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며, 약속된 ‘안식’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임을 말합니다.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되돌아 가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본 시편과 히브리서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히4:14새번역)

잠언17: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본 잠언은 17:23절(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보다 한층 안 좋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법제도 자체를 뒤집어 엎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하다’의 원어는 ‘아나쉬’로 ‘벌금을 매기다’를, ‘의인’은 문맥 상 ‘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넘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귀족을 매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자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 잠언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설립된 이래 1987년 민주화를 위한 평화시위가 성공할 때까지, 본 잠언이 글자 그대로 실현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비시850년 경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시대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나봇이 그렇습니다. 이세벨의 지시에 의하여 나봇과 그 가족은 불의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침묵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린’ 전형적인 사건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하자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넘겨졌고, 총독 빌라도에게 쇠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사 그분의 주장이 맞다고 옹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시 때때로 주님을 의지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17:27)

잠언17:27절
“배운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언제나 침착하다.”(현대인의 성경)

27절에서 ‘지혜자’란 말을 가려서 하고 감정표현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이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식입니다. ‘배운 자’는 참되게 지식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지식(다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공기역학법칙을 먼저 숙달하였기 때문에 최초로 비행기를 날렸습니다. 자동차 기술자는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때문에 능숙하게 차를 수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삶의 태도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요, 목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피할 길을 주님이 마련해 놓으셨다는 믿음이 있으며(고전10:13), 경험을 통해 증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침착합니다. ‘침착, 냉철함’ 이것이 두 번째 요소입니다. 성품이 냉철하지 못한 자는 지혜자(명철한 자 혹은 분별력 있는 사람)가 아닙니다. ‘침착’과 ‘지식’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침착할 수 있고(숙달된 군인), 침착하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으나  침묵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고난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셨고, 침착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속죄권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 이 진리를 묵상하고 잠잠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8)

잠언17: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입을 열어 모든 의심을 제거시키는 것보다 입을 다물어 너를 바보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28절에서 솔로몬은 어리석음을 감추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발을 받았을 때 입을 다물고 마음을 다스리도록 교훈합니다. 지혜로운 자라도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을 면키 어렵기에, 잠언은 입을 다물고 잠잠한 사람을 슬기롭다고 칭찬합니다(10:19). 하물며 어리석은 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26:12). 전문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을 조심합니다. 약 1년 전 네이버와 카카오 라는 회사의 주식이 올랐을 때, 어느 유명 애널리스트는 무조건 두 회사의 주식을 사서 5년 보유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투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얼마 후 시장은 두 회사의 세계시장에서의 성장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주식은 반토막 났고, 그는 유투브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보가 현자로 여겨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28절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분노를 즉시 드러내고 매를 자청하는 바보도 한 번 참으면 이렇게 지혜로워 보이는데, 슬기로운 사람의 경우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자는 분노할 때 자신을 방어하려고 경솔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조절한 후, 신중히 처신함으로써 상대방의 실수를 우정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런 잠언의 문맥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매일묵상(2022/5/16 – 20)

시편93:1절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새번역)


93-100편까지, 7개 시편은 주님(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93,94편은 모든 땅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5,96편은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7,98편은 주의 백성의 마음속에 계시는 왕을, 99,100편은 성품 속에서 보여지는 왕을 각각 노래합니다. 본 시편은 짧고( 5구절), 한 장면만(물과 바다의 일렁거림) 묘사하지만,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적 실재를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1-2절에서 능력의 옷과 띠, 즉 왕복을 입으신 주님과 그분의 왕위(보좌)를 확언한 시인은 3-4절에서 혼란스러운 이 세상의 세력들의 요동침을 물과 바다의 일렁거림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많은 통치의 증거들을 묵상하면서, 시인은 영원한 평온을 갖습니다.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이유는 바로 통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1절). 세상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역사적 사실(롬1:3-4)을 믿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학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와 그를 신뢰하는 환자의 관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왕 같은 제사장 지위에 있습니다(벧전2:9). 당연히 시편 기자처럼 본 시편의 메시지를 경험하여 확실한 증거들을 가져야 합니다(마14:23-34). 그런 증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온을 주는 것은 물론,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시편93:5,새번역).

잠언17:19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
”(현대인의성경)

17절이 선한 이웃(친구와 혈육)을, 18절이 어리석은 이웃(보증을 서는 친구)을, 그리고 19절은 싸움을 좋아하는 이웃을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의 구조입니다.
     a1 “죄를 사랑하는 자(원인)
         b1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결과)
         b2“대문을 높이는 사람”(원인)
     a2“패망을 불러들이는 자”(결과)
주부는 ‘다툼’이라는 결과로부터 ‘교만’이라는 원인으로, 술부는 “죄(죄과)’의 원인에서 ‘패망’이라는 결과로 이전합니다. 말싸움을 포함하여 다툼의 원인은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잠언은 ‘대문을 높인다’는 말로 교만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교만한 자는 사람(친척이 장관이다)이나 물건(많은 재물)을 근거로 자신을 높입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와 같이, 위험은 접근이 불가능하니 이제 자기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오바댜4절). 당연히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그 소유자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잠언은 거만한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자신의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국고를 맡은 대신 셉나(사22:15-19),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왕 여호야김(예13-19장) 그리고 페르샤의 대신 하만(에스더)이 그런 자들로서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멸망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죄인의 마음은 먼저 하나님께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잠언17:20)

잠언17:20절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말은 성품을 반영합니다. 악인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졌다(굽은)는 것과 거짓말(패역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혀”를 비교하는 것은 통상적인 잠언의 방법입니다. ‘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재앙을 경험한다는 말로서, 후단은 ‘재앙에 빠진다”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악인은 확실히 멸망합니다. 한편, ‘얻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므차’는 ‘마차(발견하다)’의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행위가 진행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거기에 ‘로’라는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를 붙여, 잠언 기자는 마음이 왜곡되고 심술궂은 사람은 복이라고 부르는 좋은 것을 찾아 헤메지만 얻는 것은 고사하고, 절대로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고 교훈합니다. ‘패역(히브리어 ‘하파크’)’은, ‘어떤 것을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말로서 어떤 일의 진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 자, 즉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빠지느니라’는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팔’의 미완료형으로, 악인에게는 재앙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시고 당신의 뜻에 거슬려 살아가는 악인의 집에 계속하여 재앙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언어 생활과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보십시요. 결국 마음의 상태와 언어의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잠언17: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1-25절까지는  미련한 자와 관련된 잠언입니다. 특히 21절과  25절은 어리석은 자녀 때문에 겪게 되는 부모의 불행을 말합니다. 전단의 ‘미련한 자’의 원어는 ‘케실’이며, 영적, 지적, 혹은 도덕적 일들을 어리석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후단의 ‘미련한 자’란 ‘나발’이며, 무엇보다 신앙적인 일과 관련하여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로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좋은 예가 갈멜사람 나발입니다. 그는 사업수완이 있는 대단한 부자였지만 교만하여 다윗을 조롱하다가 공포에 질려 죽었습니다. 한편, 전단의 ‘미련한 자(케실)’는 기초적인 가족적 유대조차 무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를 근심시킵니다(10:1). 후단의 미련한 자(나발)는  불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좋은 예입니다.  실로 미련한 자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낙이 없고 근심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가산을 탕진하여 아버지에게 커다란 부끄러움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맏아들 암논의 비도덕적인 행동, 둘째 아들 압살롬의 복수와 반역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미련한 아들을 두지 않는 좋은 방법은 늘 기도하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을 두려워 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교육을 자녀들에게 한 적이 없어 이스라엘 국가를 통일하고도, 말년에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17:22).

잠언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본문에서 ‘양약’의 원어는, ‘예티브- 좋게 만들다’와 ‘께하- 약, 치유’로 된 복합어 ‘예티브 께하”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기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후단은 ‘마음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뼈는  피를 생성해 내는 기관이기에, 잠언은 사람이 근심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영적  생명이 마비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이 위치한 단락(21-25절)의 주제(미련한 자들의 삶)에 비추어 잠언은 전단은 지혜로운 자, 후단은 미련한 자의 삶를 지칭합니다. 21절이 말하듯이, 미련한 자(‘케실’과 ‘나발’)는 영적, 지적, 혹은 도적적으로 어리석게 처리하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실질적 무신론자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얻어지는 마음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며,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물질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주권 안에서 안식하나, 미련한 자는 자기가 안고 온갖 근심 걱정 분노에 시달립니다. 이른바 뼈가 마르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 마음을 굳게 하고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리십시요. 이는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5:7,사역).

매일묵상(2022/05/09 – 13)

시편92: 5절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새번역)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적절합니다.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힘껏 일한 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권자이신 주님께 예배드리며 안식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라는 제4계명이 주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의할 점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7).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안에서 안식할 줄 아는 신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I.      지존자를 찬양 (1–3)
    II.     감사의 노래 ( 4–14)
      A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 4–5)
         B      심판과 존귀 (주님)(6–8)
         B′      심판과 존귀(시인) ( 9–11)
      A′      의인의 번영 (12–14)
    III.      주님을 찬양 (15)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보다 크고, 깊으시며(5), 심판은 아주 공의로우시기에 악인은 멸망당하고, 의인은 높이들릴 것입니다(7-11). 따라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신자야말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편92:12).

시편92: 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목격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새번역). 그리고 의인의 삶을 생각하자(12), 시편1편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92편과 1편 모두, 의인의 삶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만, 1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늘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심긴 종려나무와 백향목,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른 거목입니다. 1편은 의인의 일상을, 92편은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면서,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차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노후가 영광스러운 진정한 이유는 그가 보다 뜻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노년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의 말씀에 정직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바위가 되시는지 그의 삶 자체가 선포합니다(15). 실로 의인의 삶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생의 최종평가는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낸 주님의 영광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1:21, 새번역).

잠언 17:16절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새번역)

16절 이하 20절까지 5개의 구절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친구)과 분쟁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바보를 대비시키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관점에서 교훈을 줍니다. 16절은 ‘왜’ 혹은 ‘어째서’의 뜻을 갖는 히브리어 ‘람마’로 시작되는 수사의문문의 형태입니다. 솔로몬은 기괴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손에 돈을 들고 현자에게로 가서, 지혜를 사고자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은 불필요합니다. 현자는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바보란 자신을 위해서라면, 도덕적 질서를 무시하고, 현자의 바른 질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바보가 돈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고 온다면, 현자가 질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명기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주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신23:18). 지혜나 참된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실로, 지혜는 돈을 지불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음, 신중함, 겸손 등 바른 인격의 축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은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는 법 배우기입니다(1:8). 자기중심적인 바보는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물론 친구나 혈육의 가치, 그리고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바보는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습니까?(15:32).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잠언17:17, 새번역).

잠언 17:17절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인 친구와 형제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친구와 형제는 늘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악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친구나 혈육을 돌보지 않습니다. 친구는 좋은 시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사랑하며 위해주는 관계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참된 친구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역경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  역관 이상적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고,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1844년). 한편, 본 잠언은 형제는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합니다. 친구와 형제의 차이를 구분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고난의 시기에는 친구들은 떠나고(19:4), 혈육을 나눈 형제만이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구가 역경에 처할 때나,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힘든데, 어느 정도까지 도와 주어야 할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3년 정도의 적금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접근하였습니다. 20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변화를 확인할 팰요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테스트 후 변화를 확인한 요셉은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나 형제가 곤궁해도 남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처할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17:18).  

잠언17: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현대인의성경)

40년 전만 하여도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여야 입사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역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수 년이 흘렀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분은 신원보증을 한 친지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보증’이 사업의 한 부문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보증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보증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17절이 선한 이웃(친구/형제)을 다룬다면, 18절은 어리석은 이웃(친구)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빚 때문에 매우 곤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리석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정에 못이겨 선뜻 보증이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쉽게 타인의 빚에 보증을 서는 사람은 지혜 없는 자라는 잠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한편, 17절에는 역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라고 하고, 18절에는 보증 서지 말라고 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경에 처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아무런 계산 없이 채무, 특히 고리로 차입한 빚의 보증을 서지는 말라는 훈계입니다. 타인의 빚에 대한 보증을 섰다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 잠언6:1-5은 특히 청년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기를 좋아 하는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잠언17:19, 현대인의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