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0/04 – 08)

시편50편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23절)

본 시의 배경은 온 ‘세상(1)’이 하나님 앞에 소환되는 심판의 날입니다. 특히 언약 백성 (4, 5)이  하나님의 심판 (6) 앞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종류입니다: 종교 의식을 사랑하지만 감사와 순종과 기도를 를 무시하는 사람들 (8)과 율법을 암송하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들 (17-21). 이 시는 이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돌이켜 감사와 바른 행동을 요구하며 끝을 맺습니다(22,23). 중심 단락(7~21)은 희생과 피의 의식(4~6)이 율법 낭독(vs 7, 8)을 수반하는 출애굽기 24장 3~8절의 언약식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개개인의 자기성찰을 위한 틀을 제공함으로써 언약을 갱신하는 축제에 매우 적합합니다. 한편, 본 시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합니다(마25:31-46). 주님이 다시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앞으로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이른바 양과 염소로 상징되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정통 교리를 고백하는 신자들입니다. 양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의인’으로 기록됨)에게는 영생을 염소로 상징되는 사람들에게는 영벌을 선언하며 그 이유로 당신에게 선행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놀라나 주님은 ‘여기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명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 모두 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시편51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17절,새번역).

이 시는 유명한 다윗의 참회시로서 사무엘하11, 12장이 배경입니다. 의로운 왕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간음죄를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남편 우리야(헷 족속임)를 죽이도록 사령관 요압에게 지시합니다.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일년 이나 다윗은 위선 속에서 살아갔으나 어느날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다윗은 즉시 자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삼하12:13) 이때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를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히4:12-13).  우리가 특히 생각할 점은 모세 율법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용서할 규정을 두지 않고 있기에, 제사와 번제는 오직 용서를 받은 후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죄의 용서는 용서의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만 가능하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날 억울하게 가정을 빼앗기고 살해당한 이방인 우리야는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공의롭게 답변하셔야만 합니다. 다윗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사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마1:21). 한편, 16-19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회개하여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의 근거로 삼고 예배를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7).

잠언14:35절
“슬기로운 신하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신하는 왕의 분노를 산다”(새번역)

통찰력은 현명한 자의 자질이며 수치는 어리석은 자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왕(의로운 왕임)이 슬기로운 신하를 총애한다는 말은 그 신하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통찰력 있는 사람은 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어리석게 행동하여 수치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신하는 그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왕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왕을 한 조직체의 리더로, 신하를 구성원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이 잠언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사독과 아비아달 두 명이 통일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시, 두 사람은 일치하게 다윗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차기 왕을 보는 안목에서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독은 솔로몬을,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독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후손은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까지 천 년 간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한 번의 판단이 천 년 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잠언을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가장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자이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그 결과는 천 년이 아니라, 영원까지 미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 15:1절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전절(14:35)의 의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관리들이 부드러운 대답을 함으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히도록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 왕은 무능한 관리에 대하여 분노하더라도, 거친 말을 삼가서 파괴적인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 잠언은 이렇게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독자들이 감정을 통제하여 부드럽고 온유한 반응을 보여야지 거칠거나 면박을 주는 독한 말을 사용하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절제라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절제는 폭발할 경우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는 어리석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서 부드러운 언어가 나올 수 있고, 부드러운 말은 상처입고 멍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올리브 기름과도 같습니다. 이 반면 톡 쏘는 말, 거친 말은 불에 쏟는 기름도 같으며, 대개 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쉽사리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600명의 군사들과 피신생활을 할 때 부자 나발에게 필요한 식량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거칠고 교만한 말로 거절하여 다윗의 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안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급히 포도주와 식량을 준비하고 다윗을 마중나가 엎드려 절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운 말로 보복적 학살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녀의 지혜있는 말에 다윗은 설득당하여 돌아갔습니다. 한편 나발은 아무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 즐거워하였으나, 이튿날 보고를 듣자 낙담하여 돌처럼 굳어졌고 결국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삼상25장).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잠언15:2, 새번역).

잠언 15:2절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
.”(새번역)

본 절은 1절의 주제인 좋은 ‘대답’ 대 나쁜 ‘말’의 도구가 ‘혀’와 ‘입’이며, 원천은 인격임을 언급합니다. 인격은 ‘지혜롭다’ 혹은 ‘미련하다’고 분류되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지혜자는 ‘지식’을 아름답게 치장(혹은 매력적으로 만들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탈쿰역은 ‘지식을 즐겁게 하다’로 번역합니다. 그들은 사랑과 건전한 생각 안에서 혀를 사용하기에, 그들의 마음에 이미 내면화된 도덕질서에 대한 ‘지식’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질서에 내재된 원인과 결과를 깊이 통찰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구원하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친절하고, 민감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말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련한 자는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열정적으로 쏟아내어, 인격의 거만함을 드러내고 결국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말게 됩니다. ‘갑’과 ‘을’은 한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갑’이 사이비 교리를 듣고 혹하여 ‘병’을 열심히 따라 다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단하겠다는 마음을 ‘을’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을’은 “그만 둘 때, 분명 ‘병’이 당신에게 포학한 말을 할 것이나 겁먹지 말아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갑’이 그만두겠다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병’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미 ‘을’의 말을 들은 그는 ‘아,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은 다 이렇구나’ 하고 냉큼 그만두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주님을 경외하여 경건한 언어사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잠언15:3,새번역)

매일묵상 (2021/09/27-10/1)

시편48편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시편46편, 47편, 48편은 모두 구원받은 후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46편은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것에, 47편은 복종된 이방민족들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48편은 심히 위태로웠던 시온 성(=예루살렘 성)의 안전한 보존에 각각 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12, 13). 본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왕 (1–3)
        B      그 위대한 왕의 능력과 구원( 4–11)
    A′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12–14)
이 시의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유대 왕 히스기야 시대(BC 700)의 앗시리아 침공과 하룻 밤 사이에 전멸된 앗시리아 군대를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수십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으나,  화살 하나 쏘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단 한 명의 천사에게  전멸 당하여 퇴각하였습니다. 그때 시온 성은 돌 하나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었고(11-13), 주님의 명성은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10). 그러나 이 시온 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표상일 뿐입니다(히12:22). 왜냐하면 시온 성은 유대 백성의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지 2천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과거 시온 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는 진정한 시온 성에 이미 들어 간 우리들을 ‘죽을 때까지”는 물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시편49편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사망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신뢰할 수 있는가의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본 시편 15절은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 성도들은 죽음 이후의 소망이 없었다고 주장되나(근거: 시편6:5 등),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특별한 경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죽어간다고 – 올바른 생각이건 아니건 간에 – 생각한 사람의 말입니다. 본 시편은 분명하게 사망의 두 측면을 말합니다: 소망 없는 죽음(13,14)과 소망으로 가득찬 죽음(15). 존귀에 처하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죽거나(12,20), 아니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아 소망 가운데 죽거나(15,20) 양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음(스올)은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 시편 1-4절에서 시편 기자가 풀어보라고 던진 우주의 수수께끼의 답이며, 요한복음5장28-29절에서 상론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중해서 그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6-8). 더구나 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에 취하여 속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9-11). 성도 여러분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신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시편49:12,13, 새번역).

잠언14:32절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새번역)

본구절은 15절에서 시작된 단락의 결론입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반 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 간에는 전혀 다른 운명이 찾아오며, 이는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거나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웃을 모해하거나, 까닭 없이 다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29-31). 만약 이를 위배하여 악을 행하면 이웃을 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결국 그 사람은 넘어져 파멸됩니다. 왜냐하면 유리그릇이 단단히 고정된 선반 위에 놓여졌을 때는 안전하였지만,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진다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평강도 피난처도 없습니다. 이 반면, 의인은 죽음에 이르러도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 피난처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주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그는 죽으면 에덴 동산(낙원의 상징)에 간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범죄자와 같이 처형을 받는 수모와 고난을 겪었지만, 당신의 영혼을 피난처이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는 것은 물론, 함께 못박힌 한 강도에게 그가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악이나 선에 대한 보상 모두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를 심판하실 분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행17:31). “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잠14:2,새번역).

잠언14:33절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마음에는 간직되지만, 심지어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알려진다”(쉬운성경)

33절 후단의 번역은 여러 가지이나 쉬운성경이 문맥과 잘 어울려서 그것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질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상황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보고 통찰한 바를 수행합니다. 지혜는 내적 자질로서 마음에 머무릅니다. ‘머물고 – 누아’는 최종적 승리, 구원의 색조를 띠면서 특정 장소에 평화롭게 정착한 삶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마음으로 결말을 보고 시작하기에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성문광장에 있는 수 많은 바보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지만,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추구하기에 아름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종종 지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간직된다”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 정착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보들은 거만하며 고집스럽기 때문에 지혜를 듣고 보지만 그것을 간직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지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교훈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지혜의 정수인 복음에서도 참되어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한 자들로 정의되는 것입니다.“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         
잠언14:34절
“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새번역)

이 잠언은 지혜(33절)를 윤리와 동일시 하고 개인에서 국가차원으로 높여 적용합니다. 또한 교차대구(chiastic)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지혜를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국가라도 하나님의 도덕 기준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함으로 이웃 국가나, 공동체 자체를 해롭게 하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요사이 중국이 행하는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인당 소득 1만달러와 국가 GDP가 미국의 70%에 이르게 되자, 교만하여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중국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잠언의 말대로입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중국 민족 자체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길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참된 것입니다. 실로 국가 흥망성쇠의 궁극적 요인은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힘이 아니라 그 민족의 경건과 윤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잘 보면 죄된 민족은 조약을 깨뜨리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속임수를 베풀고, 약자를 억압하는 깡패와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사법적 정의를 파괴하여 범죄자와 게으름뱅이들이 보답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을 지고 두려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교육에 있지만, 그 이전에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나 주가 선고한다. 가사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암1:6)

매일묵상(2021/09/13-09/17)

시편46편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4)

이 시의 주제는 피난처와 힘이 되신 주님입니다, 루터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여성 합창단(알라못)을 위한 곡으로, 배경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공과 같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연 재해라는 환난에서  도움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1-3). 이어 전쟁의 환난에서 강한 성(城)과 같은 피난처요 능력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4-7). 끝으로,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앞으로 도래할 완전한 평화의 맛보기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완전한 평화가 올 것을 믿으나, 그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8-11).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제국 때문에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 밤에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킵니다(왕하19:35). 그러므로  4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절은 파도가 얼마나 크게 일렁이며, 물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시내’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강한 민족들이 으르렁거려 왕국이 흔들리는 엄청난 전쟁의 위협도 주님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되며(6), 그런 재앙 역시 목적이 있습니다(7). 그 목적은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우리로 깨닫고 기쁨으로 그분 안에서 내적인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심판을 통해 오는데, 그 시기는 ‘새벽, 동틀녘’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5). 그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46:5)

시편47편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바라보고 벅찬 감격과 환호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노래를 넘어 예언입니다. 실로 본 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성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1) 찬양의 촉구 : 온 땅의 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1-2절) (2) 찬양의 내용 : 열국을 복종시키사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심(3-4절). (3) 찬양의 촉구 :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5-7절). (4) 찬양의 내용 : 보좌에 앉으사 뭇 나라를 다스리실 것임(8-9절). 유대인들은 본 시를 나팔절에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곤 하였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에 낭송하여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왕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불순종이라는 이 영적 문제 때문에 모든 불행, 사망, 썪음, 자연재해, 전쟁, 미움 등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순종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5절은 바로 이것을 노래합니다. 보좌에 오르신 주님은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불순종의 인간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날 재림하여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물리적으로도 온 우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잠언14:29절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새번역)

본 잠언은 매사에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도덕질서를 긍정하며, 후자는 어리석게도 도덕적 무례함(오만)을 드러내놓고 범하기 때문입니다. 원어에 ‘참을성 있다’는 단어는 ‘얼굴의 긴장을 풀다’는 의미로 ‘인내의 표정’을 말합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얼굴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는 잠잠히 주님을 신뢰하지, 충동적 반작용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의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반역을 행하였지만, 인내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고, 범죄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요나4:2). 이 반면 ‘성미가 급하다’는 말은 사회적 불의를 보고 너무나도 빠르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죄를 짓게된다는 의미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의 원어는 ‘들어 올린다’로 ‘가장 커다랗게 어리석음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도덕적 오만에서 나옵니다(5:23). 그는 어리석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먹이가 됩니다(14:17). 그 이유는 주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급하게 그리고 불경건하게 복수를 꾀하며 그 결과 자신도 해를 받습니다. 주님은 공정한 재판장이십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문제를 듣자 충동적으로 보복에 나섰고, 어리석게도 모든 세겜 사람을 학살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6; 39:5-7).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14:30절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29절은 참을성 있는 사람과 조급해 하는 사람의 성품을 대조하여 누가 명철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지만, 30절에서 이런 성품은 단지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판단을 넘어 생명과 죽음의 문제까지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다만 29절은 외적인 신체를 –‘긴장이 없는 얼굴 (= 인내)’과 ‘가쁜 숨’(=조급함)’, 30절은 속사람의 모습 – ‘평안한 마음’과 ‘뼈의 썩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평온함은 제자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조급해 하는 것은 그를 죽음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특히 질투는 뼈까지 썩게 만들어 결국 파멸과 사망으로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본 잠언의 가르침대로 질투나 분개심은 몸으로 치면 뼈암과 같아서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모든 염려, 적개심과 원수 갚는 것을 심판자이신 주님 손에 맡기고 선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롬12:19-20). 그리고 다윗 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시편39편). 이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최초의 살인은 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투는 동생 아벨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 자신의 제물은 거절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회개하면 되었지만, 질투는 그를 삼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녀를 양육시 실력양성 뿐만 아니라, 조용히 빈 곳을 찾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균형잡힌 지혜가 필요합니다.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잠언14:29, 새번역)

잠언14:31절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새번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사회 윤리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질투로 뜨거워진 자(30절)가, 이제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궁핍한 사람을 억압하거나 비방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고대의 일용 근로자로서 밭이나 기타 생계 수단이 없어 타인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궁핍한 자들을 억압하고 제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들을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명예롭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존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물론 그 이웃들은 감동하고, 은연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인애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그런 사람을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목격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사회적 명성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가 벌받지 않을 수 없고, 역으로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가 상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늦어도 마지막 날 모든 정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궁핍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가난한 자가 다른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비방하는 경우가 있음을 언급합니다(28:3) “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잠14:33,새번역).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8:12-20절
AD29년 10월 초 유대인의 명절인 장막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그 빛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장막절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장막절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로서 여인의 뜰에서 7일 동안 매일 저녁 큰 횃불 4개를 켜놓고 유대 남녀는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뻐한들 이들은 범죄 때문에 이방민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구원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물리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즉 인류의 불순종의 벌을 담당하고 하나님께 순종의 길을 걷도록 빛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심으로 땅끝까지 구원하실 것을 이사야는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사49:6). 그것은 단순히 유대민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장막절 후 6개월이 지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이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 10흘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님은 불순종하는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역사하시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창조된 인류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실이었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오고 있으며, 마지막 날 이들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해 포도와 올리브의 열매를 거두는 장막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일묵상(2021/09/6-10)

2021/9/6
시편44편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롬8:33절에서 인용)

이 시는 고라 자손의 교훈시이며, 지휘자의 지도로 연주된 민족적 탄원시입니다. 주제는 급박한 위기에서 국가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의 배경으로 앗시리아 산헤립의 재차 침입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인 유대 히스기야 왕 때로 추정됩니다(BC 701년).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A1 (1–3) 과거의 하나님
                 B1 (4–8) 증거- 진실한 믿음
                         C (9–16) 탄식- 비탄스러운 현재
                 B2 (17–22) 증거- 올바른 행동
           A2 (23–26) 미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먼저 과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확인한 뒤(1-3), 이를 근거로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내립니다(4-8).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민족은 멸망 직전에 있음을 탄식합니다(9-16). 그렇다고 유대민족이 불신앙 가운데 행하지는 않았습니다(17-22). 시인은 신속한 구원을 탄원합니다(23-26). 하나님의 길은 신비스럽습니다. 인생에 닥치는 고난은 종종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과거에 하나님 자신이 확립한 방법과 모순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응답으로 주의 천사가 내려와 산헤립의 군사는 밤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당연히 퇴각하였고 유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2021/9/7
시편 45편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

이 시는 제왕시로서 왕의 결혼식 축가이지만,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신자)의 언약적 삶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삶의 질서는 하나님만이 왕이며, 지상에 있는 다윗 왕과 그 후손은 단지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나님이 임명한 지상의 통치자에게 바라는 그분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이 대표적). 먼저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A 도입부(1)
             B 왕에게 드리는 헌사(2-5)
                   C 신랑의 영광(6-9)
             B1 신부에게 드리는 헌사(10-15)
 A1 결론(16-17)

히브리서(1:8)는 이 시(특히 6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표상하는 진정한 실체로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크리스마스는 위대한 용사요 위대한 왕과 진정한 신랑의 도착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그분의 피로 씻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고 계십니다(시45:16; 요1:12,13). 그러므로 신약은 결혼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결합임을 가르쳐줍니다(엡5:31-32). 이렇게 시편은 역사상 이스라엘 왕의 결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나,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귀착하는 다층적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


2021/9/8
잠언 14:26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안전한 요새가 있으니 이것이 그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은택을 보도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존경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신 만유의 주님으로서 화와 복의 궁극적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주님의 보호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단은 더 나아가, 주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자녀들에게까지 미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떤 것도 혹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물론 그의 자녀들에게도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그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란 단어는 ‘자연, 제도, 혹은 사회에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피난처에 대한 언급은 시편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특히 시편25편). 또한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와 ‘그의 자녀’들을 ‘안전한 요새’ 및 ‘피난처’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의 자녀가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살 때 그들에게 안전한 요새가 있으며, 그들의 부모는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본 잠언의 취지는 그대로 신약의 구원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지진과 기적을 경험하고 두려워 하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할 때 사도 바울께서 그 구원이 가족까지 미침을 말한 것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2021/9/9
잠언14:27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라’는 주제는 26절에 이어 계속됩니다. 특히 이 잠언은 13:14절,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과 비교하면,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결국 ‘지혜자의 가르침’이나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나 ‘주님의 계명’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샘….. 죽음의 그물’이라는 비유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계명과 지혜자의 가르침을 숙고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권면을 듣고 행하면 풍성한 삶(27a)을 누리고, 그들과 다른 이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길(27b)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삼촌 부부를 따라 런던에 있는 햄프톤 법원의 유명한 미로에 구경을 갔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삼촌은 근처의 벨을 눌러 안내원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곧 안내원이 나타나서 “길을 잃었습니까? 나를 따라오십시요!”하고는, 앞장 서서 나갔습니다. 그를 따른 일행은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 미로보다도 너무나 복잡하고 곳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 가면, 다시 말하면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모든 죽음의 함정을 피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생명의 샘을 마실 것입니다.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2021/9/10
잠언14: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새번역)

모든 사람 위에서 통치하는 왕은 특히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는 왕국의 제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의 판단은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어 신하나 백성의 지지는 줄어들고, 결국 사회적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백성은 몰래 그 나라를 떠나 좀 더 나은 국가를 찾아 갔고, 그 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여 몰락하였습니다. 여기서 ‘왕’이란 리더의 한 모형입니다. 사실 이 잠언은 제자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신뢰받는 지도자로 우뚝서야지, 백성이 떠나는 종류의 리더가 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왕은 믿음직하면서도 인자하며(20:28), 정의롭고(16:10), 공정하고(16:12), 참되고(16:13), 마음이 청결하고 은혜로우며(22:11), 분별력이 있고(25:2),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지혜(25:3), 악인들을 심판하고(20:8), 술에 취하지 않는 건전한 마음(31:4) 같은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왕은 당당하게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지만(30:31), 르호보암이 배운 것 같이 백성의 지지를 잃어버리면 좌초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셀 수 없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은 분명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계7:9,10). 그러나 본 잠언은 주님의 면전에서는 사람의 숫자는 가치가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균형을 이뤄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 12-20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기 6개월 전 가을에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인 장막절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축제는 약 1480년 전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머무를 때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이 축제의 행사 중 하나로 여인의 뜰에 큰 횃불을 4개를 켜놓고 매일 저녁 남녀가 춤과 노래로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횃불이 켜진 어느 저녁으로 판단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오는 13개의 나팔모양 헌금함 앞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은 인도하셨던 사실을 회상시키면서, 당신이 바로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출애굽 당시 애굽 지역에서 시내 광야로 지역만 이동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두움의 근본인 마귀들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와 사망로부터 구원하여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본받아 살면서 섬기는 삶으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요12:24-26). 그럼으로써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8/30 – 9/3)

2021/8/30
시편42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절)

시편 제2권은 총 31편(42-72편)의 시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성전 찬양대인 고라 자손들(42-49), 성가대장 아삽, 다윗, 솔로몬, 기타 무명의 시인들입니다. 먼저 42편과 43편을 보면, 이 두 시는 사실상 잘 짜여진 하나의 시입니다. 시인은 팔레스틴 북단으로 사로잡혀 갔으며(42:6), 포로에서 풀려 하나님의 전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성가대원입니다. 그는 이런 열망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소망 속에 탄원의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의 구성입니다:
           42:1-5 잃어버린 과거/ 6-11 고난 많은 현재/ 43:1-5 기대되는 미래
시인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과 같이 큰 시련을 당해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42:1-2), 응답은 신속히 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며 조롱하였고, 시인은 매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격려하면서,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11). 신자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을 위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늘 주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고난 속에 있으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본 시편기자는 이런 두 측면을 깊이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신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과부와 재판장 비유에서 주님은 신속한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에 처할 때 우리 마음은 이 약속에 닻을 내려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2021/8/31
시편43편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비록 고난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점점 커지고 있는 모습이 42편 내내 나타났습니다. 43편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정도까지 시편기자는 낙담하였습니다(2,5).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기도로 대체됩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1)라고 호소함으로 좀더 현실적인 간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밀어닥친 어두움과 불안정한 삶은 긍정적인 요청, 즉 빛과 진리(예, 하나님의 신실하심)를 간구함으로 쫓겨나간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3). 하나님의 빛과 진리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곳으로부터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십사 하는 간접적인 호소가 3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비록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팔레스틴 북쪽 극단에 포로로 있지만, 주님의 거룩한 산과 제단의 그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3,4). 그리고 이미 42:5, 11에 등장하고 세 번째 43:5에서 나타나는 후렴은 시편기자가 가지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국에 있건 포로로 잡혔건 간에, 그는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그의 ‘구원자’라는 믿음 때문에 외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편기자는 승리를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드리는 밤의 노래는 이런 소망에서 나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3:5,새번역).


2021/9/1
잠언14:23절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열심히 일한 경우와 수다스럽기만 하는 경우의 결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선을 계획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흘린 땀 때문에 비용을 제하고도 이득이 남는 자들입니다. 이어 대조적으로 말만 많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놀랍게도 삶이 피폐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득’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몰타르’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입술의 말들’로서, 입술만 수고하여 나오는 ‘말(word)’이란 의미입니다. 확실히 몇몇 잠언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수다스러움을 책망하고 있으나,  이 반면 많은 구절에서 ‘말(word)’은 힘이 있다고 교훈하고 있기 때문에(예, 14:25), 어느 잠언을 적용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잠언의 가르침을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며, 선택의 기준은 주님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수고는 입술만 움직여서 나오는 빈 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썩어질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유복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난해질 것이며, 마지막 날 주님과 결산시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다루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믿음의 삶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2021/9/2
잠언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18절에서 언급된 면류관은 본절에서 다시 등장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행위가 반영된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를 배웁니다. 본절은 20절에서 시작된 부와 빈곤의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23절에서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얻은 이익(재물)을 면류관이라고까지 높여줍니다. 이렇게 양 구절을 함께 보면, 게으른 수다장이는 미련한 자들을, 근면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 함은 하나님이 보여주는 호의의 표지입니다(4:9;12:4). 지혜로운 자에게 하나님은 재물을 주심으로 그들이 중요한 사회적 신분, 품위, 권한을 갖게 하는 한편,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은 부를 신뢰하지 말아야 하고(10:15; 11:28), 악한 행동에 의해서도 재물은 획득될 수 있지만,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물을 주심으로 보답하심 역시 사실입니다(3:16; 22:4).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친 해석으로 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이란 도덕적 진리에 둔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도덕적 오만함으로 이것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그들이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타인의 마음과 삶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부메랑과 같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불명예를 소유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여 10지파를 잃어버리고 겨우 유다지파 하나만을 소유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언14:18)


2021/9/3
잠언 14:25절
“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새번역)

14:25-32절은 마지막 단락으로, 생명 혹은 사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25절은 그 첫번 째로 법정에 선 정직한 증인과 거짓 증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절과 5절은 비슷하지만, 본절은 증인의 성품 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실한 증인은 용감하게 양심을 따라 말하여 속이지 않지만, 위증자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죄한 자가 벌받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율법은 두 명 혹은 세 명의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비로서 유죄를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5).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위증 사례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넘기기를 거부하자 왕 아합은 몸져 누웠습니다. 이를 본 왕비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왕명으로 거짓 증인을 둘을 세워 나봇을 처지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로들은 그대로 행하여 나봇의 일가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왕상21장). 그 심판은 약 20년 뒤 군대장관 예후의 반란으로 아합의 손자 때에 집행되었습니다(왕하9-10장). 거짓이 증인과 결부되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데, 하물며 거짓 예언과 가르침은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현재 대한민국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 거짓 선생들이 나와 있습니다. 마땅히 분별이라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4:1,새번역)

다양한 반응들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40 – 52절
장막절 중간에 성전에 오르셔서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리스도로서, 당신을 믿는 자는 구약에 약속된 생명의 강물을 먹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져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는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50년 전을 회고하면서 오늘 본문의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될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삼고 살아가면 삶은 매우 의미가 있을 것은 틀림없다고 하여도, 지금도 살아계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고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간증도 하고, 능력도 선보이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분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고 삶이 거룩하게 변하여야만 합니다. 이를 담당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죄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예수님을 믿어 의를 덧입으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마귀는 이미 심판을 받아 쫓겨났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변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며, 그렇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8/23-27)

2021/08/23
시편41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1절, 새번역)

이 시는 죄, 질병, 적의, 소외, 은혜의 주제를 담고 있어, 시편38-40편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큰 질병 중에 당한 악의와 배반은 왕 다윗에게 고뇌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은, 죄를 고백하는 다윗을 고쳐주셨고 원수들에게 왕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은혜 내려주셨습니다(10). 이는 다윗이 어느 상황에 처해서나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12). 본시의 구조입니다.
 1–3 (A1)원리적인 주님의 은총/ 4 (B1) 범죄시 추구되야 할 은혜 / 5–9 (C)미움, 거짓, 수군거림, 배반 / 10 (B2)원수와 관련된 은혜/ 11–12 (A2) 경험된 주님의 은총

한편, 1절의 단어 ‘복-에쉐르’은  시편1:1절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반면 41: 1절에서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돌보는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완성됩니다. 이렇게 시편의 첫번째 책 총 41편의 시들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2021/08/24
시편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 구절에서 ‘가까운 친구’의 히브리어 원어는 “샬롬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배신자는 친구는 물론 심지어 형제나,  자녀나, 부모일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나, 자신이 조그만한 지위와 권력 그리고 돈이 생기자 그만 목이 뻣뻣하게 나오는 사람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외가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내심 몹씨 섭섭하고 불쾌하였지만, 만약의 경우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생각에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기에,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를 천사장 중 하나로 창조하셨지만, 그는 반역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믿었던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년에 심한 내란을 겪었고, 헷 사람 우리아는 믿었던 왕 다윗으로 인하여 가정이 빼앗겼고, 믿었던 상관 요압은 왕 다윗의 지시를 우선시 하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모든 것 중 백미는 가룟 유다가 은 30량에 주님을 팔아넘긴 사건으로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심으로 경고하셨습니다(요13:18). 그러나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가룟 유다를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요6:70,71). 즉, 배신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철회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2021/08/25
잠언 14:20절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악인이 선인(의인) 앞에 엎드린다’는 19절의 가르침에 악인이라도 잠시 동안은 부자가 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의 본지는 가난한 자가 당하는 사회적 관계의 빈곤을, 부자가 누리는 사회적 이득과 대조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빈곤한 부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나 도덕적으로는 결코 결핍된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가난’과 ‘부’ 말들은 극단적인 물질적 결핍과 유족함얼 뜻하지만, 전자는 역시 사회적 관계, 예를 들면 친구들 -에서도 빈약함을, 이 반면 후자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더 슬픈 것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의 어두운면을 드러 내면서, 이 잠언은 ‘가난과 부’ 모두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후자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서 보다는 인간들을 의지해서 삶과 존재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20절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독특하고, 좀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여야 올바른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새번역)


2021/08/26
잠언 14:21절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새번역)

20절을 뒤이어 기록된 21절은 20절의 본지를 잘못 이해하여, 가난한 이웃과 거리를 두려는 부패한 마음을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실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죄는 거만의 죄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입니다. 이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따뜻하게 영접하여 친절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호의에는 불쌍함, 자비심 그리고 관대함 등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지 강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의를 가지고 혹은 은혜롭게 대하다’ 는 말은 가난한 자를 돕고, 배고푼 자를 먹이고, 패배와 죽음 등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언이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현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에 대한 기대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무척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이런 행복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잠언은 제자들에게 몰인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삼가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웃을 따뜻하고 품위 있게 대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겸손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2021/08/27
잠언 14:22절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새번역)

본절의  표제어 ‘선’ 과 ‘악’은19-22절의 단락을 끝맺음 하면서,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성품(21)에는 인자(kindness)와 진리(faithfulness)가 있음을 교훈합니다(출34:6). 더구나, 22절은 이웃을 경멸하는 자는 그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자로, 호의를 베푸는 자는 선을 계획하는 자로 변화되어감을 지적합니다. 그런 죄인은 구원의 소망 없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선인은 도움을 요할 때 사람들, 특히 주님으로부터 인자(친절)하심을 경험합니다. 한편, ‘악을 계획하는 사람’이란 마치 능숙한 장인들과 같이 해악이라는 재료를 외견상 도덕행위와 결부하여 “경멸”이라는 악의 작품을 만드는 자들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길을 잘못 간다’는 의미는 악을 계획하는 자들이 길을 잃어 버려 방황하다가 죽음을 만나는 운명을,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만나는 축복을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악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kindness)를 경험해도 오히려 죽음의 길로 가지만,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의 많은 친절과 인자를 경험 하였지만 돌이키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보디발, 간수, 관리 및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위해 선을 계획함으로, 그들로부터 인자와 진실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1:11,새번역).

성령님에 대한 약속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37-39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이 끝날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당신이 생수의 강의 공급자라는 사실을 외치셨습니다. 그 생수의 강은 다름 아닌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의 수단을 마련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예수님의 백성들에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강림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과 계획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속죄를 이루셔서 구원을 받을 방법을 마련하시고, 성령께서는 확보된 구원을 죄인들에게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최고 목적은 각 사람이 돌이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장막절 외침 후 약 8개월이 지나 AD30년 5월 경 돌아오는 칠칠절 즉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사 교회를 창설하시고 세상의 죄악됨과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악됨에 대하여 깨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만 예수 앞에 와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충만과 권능의 느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주님의 뜻을 행하여 여러 선한 일을 많이 이루지만 정작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