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8/16-20)

2021/08/16
시편40편 – 내용과 구조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4절, 새번역)
다윗은 38,39편에서 죄와 질병과 원수들의 준동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 이르면 주님을 기다린 다윗의 승리의 외침이 울려퍼집니다. 이제 그 기다림은 끝이 났고(1-3), 그의 신뢰는 올바른 행동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4-5).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다짐하며(6-8) 많은 회중 앞에서 체험한 구원을 증언하기로 약속합니다(9-10).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의 도우심(11-13), 원수들에 대한 심판(14-15), 주님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기도합니다(16). 왜냐하면 다윗 자신은 산적한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연약하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또 한 번 기다리게 됩니다(17). 이런 다윗의 삶의 패턴은 그대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본질은 기다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님을 의지하며  충성되게 사는 신자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A1 열매 맺은 기다림(1-3)
                       B1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행동(4-5)
                              C 지극히 중요한 마음의 모습들(6-13) – 순종,선포,겸손
.B2 미래에 행하실 주님의 행동(14-16)
. A2 또 기다림(17)

한편, 히브리서는 6-9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내일 묵상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편40:7; 히10:7).


2021/08/17
시편 40: 6-8절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혜를 체험한 다윗의 귀에(5)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도 않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6)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제사 즉, 계시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러-‘내가 왔나이다’-, 자기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씀드립니다. ‘두루마리 책’은 모세 율법을 뜻하며, 모세율법은 하나님을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조차 그분의 뜻을 행하는 신하에 불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분이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 외친 것입니다. 이는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헌신을 위한 맹세는 할 수 있지만,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실 분은 메시야이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5-10절에서 시편40:6-8절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희생 제사 의식이나 율법이 규정한 의 자체가 성취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인간 구원을 위한 새 언약과 새 제도를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히10:9)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2021/08/18
잠언14:17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잠언은 계속해서 어리석음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 두 종류의 바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성을 내어 타인을 해롭게 하거나(술 취해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그런 분노를 참고 은밀히 계획을 세워 타인을 해치는 사람입니다(암살자). 먼저,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주전자가 끓으면 옆으로 넘치게 되는 것과 같이, 훈련이 안된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머리가 분노로 뜨거워 졌을 때 그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고, 그 가운데 내린 결정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도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지혜 있는 말로 진정시켜야만 합니다(15:1, 29:8). 실상 지혜의 이상적인 모습은 분노 가운데서도 실수하지 않는 침착한 사람입니다. (잠16:32). 대조적으로 냉철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는 훈련되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합니다. 그 결과 그는 통찰력 있게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혜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지만, 악인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비밀리에 우회적으로 범죄를 행합니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자신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나 공동체에 의하여 버림받게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2021/08/19
잠언14: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이 잠언은 두 종류의 사람을 묘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히브리어 ‘페티’로서 15절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믿는 ‘어수룩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반응하는 사람(simple-minded)입니다. 이런 사람은 속기 쉽기 때문에,  ‘어리석다(folly)’라는 불명예를 지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의 히브리어는 ‘이벨렛’으로  17절에서 화를 잘내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도덕적으로 오만하여 다루기 힘든 사람이 행한 결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삼다’란 통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에서는 풍자적으로 쓰여서, 어리석은 사람의 행위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에 속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혜자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지식들로 면류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계시된 도덕적 진리들을 마음에 새겨 참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과 위험을 뚫고 나아가서 드디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존경을 받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에서 있던 일입니다. 선교사 출신의 한 사람이 검은 모래를 채취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서를 가지고 투자를 받았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런 외형에 속아 투자를 하였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신중하여 직접 검은 모래를 채취한다는 장소를 가서 보고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새번역).


2021/08/20
잠언14:19
“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새번역)

18절에서 지식으로 면류관을 쓴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개념은 본 구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선한 사람을 마치 왕에게 비유하고, 악인을 그 밑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의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 때문에 선한 사람(의인)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의 가르침에 주목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인과 불의한 사람들과 맺어집니다. 잠언 2:20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와 같이, 악인은 불의한 사람과 같고, 선한 사람은 의인과 같습니다. 본 잠언은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높아져 다스리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종처럼 낮아져 그들 앞에 엎드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침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는 말은 의인이 심판석에 앉아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죄인을 벌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요셉을 노예로서 애굽에 팔아 넘긴 열 명의 형제가 20년 뒤 높아져 심판석에 앉은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린 사건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잠언의 이 교훈을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는 그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2:10,11절은 잠언의 이 가르침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새번역).  


매일묵상(2021/08/9-13)

2021/08/02
시편39편 – 총괄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절,새번역)

이 시는 하나님은 연약하고 덧없는 피조물인 사람을 부지런히 징계하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시편38편과 비슷합니다: (1)방관자들 앞에 침묵을 지키는 모습(38:12, 13; 39:2), (2) 죄를 징계하시는 주님의 행동(38:1–3; 39:9–11), (3)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소망(38:15, 21, 22; 39:7)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릅니다. 시편38편에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드러냈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면 시편39편에서 질병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절실히 알게하는 동시에, 현생에서의 행복한 삶 또한 소중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불멸의 세계가 완전히 계시된 후라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은 귀중한 것이며, 인생에서 누리는 기쁨과 사랑들은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근심하였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켰을 때 “근심에 근심을 면했다”할 정도로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빌2:27). 다윗 또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을 때, 결국 만나게 될 것을 알지만 아기가 죽지 않도록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삼하12:22-23). 지금은 자신의 남은 생애가 질병으로 단축될 수 있음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12, 13).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잠언3:21, 새번역).


2021/08/03
시편39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절)

이 시는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항의 / 4-6절 이 덧없는 인생 / 7-11절 엄중한 징계/ 12,13절 작은 간구. 오늘은 4-11절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복잡하였지만, 그의 첫 기도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도록 요청합니다(4). 그는 자신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주님이 주시는 징벌로 받아 들이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도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드립니다(4-6). 특히 ‘헛되다’다로 번역된 ‘헤벨 hebel’은 ‘입김’ 내지 ‘수증기’로서, 3번이나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이 배운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허사뿐이다’(5), ‘헛된 일로 소란하며’(6),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11절)(전도서의 주제임). 그런데 세 번째 단락(7-11)에 이르면 다윗은 욥을 괴롭힌 역설을 겪게 됩니다. 이들은 지상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들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너무나도 심한 처우를 하시는 것 같아 탄식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설들과 같이 이것도 발굴되지 않은 보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롬8:11-24). 좀이 아름다운 옷을 먹는 것과 같이 인간이 잘못하여 교만할 때 그 영화를 치심으로,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하여 영원을 함께 살아가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뜻입니다(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함). 이 주제는 우리가 씨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7절,새번역).


2021/08/04
잠언14:1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새번역)

이 잠언은 ‘레브 – 마음’라는 단어를 통해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현재 보이는 겉모습들은 기만적이고, 참된 실체는 결론에 가서 드러남을 말하지만, 본 구절은 그 결론을 따른 마지막 보응을 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따르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결국에는 주님께서 선을 행한 자를 상주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겉모습이 어떻든, 행위와 운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way’이라는 비유로 예증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 잠언은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하는 비뚤어진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 길을 선택한 후에, 신자는 인내하며 무조건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처음에는 사회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고 살지만, 나중에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전에 무슨 선한 행위를 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완전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가 행한 선한 행위들 역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예레18:7-10). 이렇게 본 잠언은 비뚤어진(혹은 반역적인/왜곡된) 사람을 선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실로 악인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 완전한 벌을, 의인 역시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고백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롬다 하심을 받습니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6).


2021/08/05
잠언14:15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새번역)

본 잠언은 두 개의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걷고(1-7) 보이는 대로 걷지말라(8-15)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또 하나는 지적-영적 성품을 대조하면서 교훈을 주는 단락(16-32)을 도입합니다. 이를 위해 ‘길’이라는 비유에 ‘걸음’이라는 비유를 더함으로 본 잠언은 제자를 잘못 이끌게 되는 어수룩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바보들의 일종으로 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가지만, 신중한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을 믿지 않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자신의 걸음마다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가는 길이 참된 경건과 윤리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삶을 테스트 합니다. 물론 ‘걸음(step)’은 ‘길(way)’의 동의어로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청년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듣도록 권면하는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부주의한 ‘어수룩한 사람’에 속하는지 혹은 주의깊게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 에게 속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 왜냐하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기울지 않지만, 인간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 슬기로운 사람은 혹시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거짓된 걸음은 아닐까 하면서 경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신뢰합니다(요나3:4;출4:1-3). 슬기로운 사람은 늘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로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3:21, 새번역).


2021/08/06
잠언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언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설득 합니다. 그 방법은 전자를 ‘지혜로운 자’,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야르’로서 ‘경외, 염려, 사망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잠언 도처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경외) 한다’ 혹은 ‘계명을 두려워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7). 그러므로 여기 지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방자하여 악을 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믿고 조심할 줄을 모릅니다. ‘방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르’이며, 그 뜻은 ‘분노하다’입니다. 즉 바보가 주님이나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여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보의 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이는 하늘의 CCTV를 못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잠언이 드러내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만만해 하지 않고 늘 조심하지만, 자만심에 찬 바보는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싫어 한다(잠13:19)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늘 주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감으로써 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2:12, 새번역)

표적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31-36절
장막절 중간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신 예수님을 보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유대 당국자들과 달리 분류되는 군중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과 믿음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져 예수를 따르는 부류, 표적을 보고 믿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부류, 표적을 보고 오히려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는 부류, 표적이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류 등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통한 믿음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 자체 보다는 표적이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참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표적들마다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신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건전하게 하신 표적을 생각해 보자면, 이 사건은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던 치유를 행하사 안식을 주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요 안식일의 주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들과 이에 따른 강화를 듣고도 적대시 하는 마음을 오히려 굳히자, 이들을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떠나심은 바로 오늘 설교를 들은 바로 그 유대인들에 잡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불과 6개월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떠나신다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자문자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영적인 상태는 사람이 다녀서 반질반질하고 굳은 길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싹 틀 수 없었습니다.

매일묵상(2021/8/2 – 6)

2021/8/2
시편 38편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1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세 번째 참회시로서 죄 때문에 발생한 영육 간의 고통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시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 내리막길/ 13-22절 오르막길. 시에서 언급된 고통은 다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죄짐, 고약한 질병으로 인한 부서질 것 같은 육체적인 아픔, 친구들로부터의 소외, 그를 파멸시키려는 원수의 움직임 등이 더해짐으로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본 시의 주제와 놀라움을 요약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과 구원해 주실 분이 같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의 범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였고 진노하셨으며(1), 그분이 심판의 화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2).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가서 도움과 구원을 호소할 대상 역시 같은 주님이셨습니다(22). 왜냐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주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져올 결과들을 여실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할 시가 지어진다면, 바로 이 시가 그렇습니다. 죄는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죄인에게 부담을 주어 무겁게 하며, 행복을 상처 투성이로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빼앗아 갑니다(1-8). 더 나아가 죄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가며, 우리는 고독하고 슬퍼질 뿐만 아니라 원수는 기회를 잡아 준동하기 시작합니다(9-12). 죄를 지은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13,14). 그러나 죄는 기도의 문을 닫지도 못하고, 우리가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38:22)


2021/8/3
시편38:1-12절 내리막길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4절, 새번역)

다윗은 죄의 짐을 지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주님은 죄 때문에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1-3).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2)라는 표현대로 질병, 고통, 버림받음, 적대와 주님의 질책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결과 다윗의 육신은 심한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고, 몸도 마음도 힘이 없고(5-10) 친구도 없습니다(11).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2). 특히 5-8절은 고통스러운 육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C.S, 루이스) 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시간은 곧 성찰의 시간입니다. 본 시편의 경우,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번갈아 . 그런데 주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 때문에,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원수들의 위협이 다가왔습니다. 11절은 이에 대한 생생한 필치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새번역).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긴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손으로 꽉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잔칫집에는 가지 않아도 초상집에는 꼭 가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2021/8/4
시편 38:13-22절- 오르막길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앞 부분(1-12)은 개인적인 육체적 고통과 죄의 짐에 눌린 심적 고통에서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원수들에 의한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 다윗은 절망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다지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합니다(13-14). 이를 위해 적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마음을 오로지 구원하실 주님을 향해 돌립니다(15-16).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신뢰성 있는 자세(15),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허한 마음(18), 그리고 신속한 구원을 부르짖는 외침(22)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모든 고난 및 죄에 대한 용서를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명시적인 기도는 16절에 드디어 나타납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절박하여 주님을 붙잡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죄짐에 눌려 곧 멸망당할 것과 같이 연약한 자신을 원수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17-20).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그 주님은 430년 전 애굽인들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죄는 물론 질병이나 원수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2021/8/5
잠언 14:12절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새번역).

본 구절은 “보이는 대로 살지말라”는 교훈을 말하는 단락(8-15절)의 중심 부분에 놓여져 있고,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앞 부분의 ‘바른-야살’은 ‘길’과 결합하여 올바른 행위로 판단되어 성공으로 가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윤리적인 행동은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이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의 길은 많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판단하고 취한 그 행동들은 사실상 왜곡되었으며 죄된 것들이었습니다(2:13).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의 대단원이 죽음이라면, 자신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운명이 어떤지는 항상 보여지는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마7:13,14). 우리는 ‘기만적인 길’은 명백히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길만큼이나 확실히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투명한 인식과 주님이 창조하신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집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인간 인식론, 즉 인간의 시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라는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진리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바른 길을 계시하셔야만 하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3:7). 이 잠언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2021/8/6
잠언14:13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새번역)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마음의 아픔을 위장하는 행태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감추고 있던 슬픔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임을 말하여 12절과 같이 피상적인 판단을 유보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웃음은 마음의 고통으로 엷어지고(14:13a), 결국 슬픔이 기쁨을 뒤따라옵니다(13b절). 인간은 죽기 때문에 기쁨은 반드시 슬픔으로 귀결됩니다. 파티는 늘 끝나고, 사랑의 행동들은 그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27:1,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색조는 잠언의 주된 주제 즉, “의인을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쁨, 생명 그리고 소망’이지만, 악인은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10:28)/ 24:19. 20).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 계속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구원과 참된 가정(true home)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3:1-12).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로 현재 경험하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성숙해져가면서, 지금 권면하는 잠언의 지혜가 완전히 빛을 내게되는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새번역).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2)


요한복음 7:18-24절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안식일 계명의 준수 여부였습니다. 주님은 여러 경우에 안식일이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불치의 질병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 200페이지나 되는 책이 만들어져 있으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포함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문자적으로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더 중한 바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림으로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는 모세율법 자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을 해설하여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한 미쉬나에는 저촉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로 미쉬나에 따른 규정을 예수님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여 왔는바,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미쉬나에서 금지하는 여러 규정들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례가 안식일 규정 위에 있다고 해석하여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한편,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경건하여도 그런 안식을 못 누린다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 돌보아 주셔야 한다는 언약의 취지는 무색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이 사람의 병을 치유하여 안식을 누리게 함으로, 할례의 언약은 물론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영생에 대한 좋은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1)


요한복음 19-24절
지금 초막절 성전에 모여 있는 유대 지도층과 수 많은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된 이유가 그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없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모세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한다고 예수께서 질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논지는 첫째, 그들은 서로 간에 모세율법을 잘 수행하였다는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꽉 들어찼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는 참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 둘째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을 죽이려는 증오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귀의 증오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마귀의 자식들임이 뒤에 밝혀질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병자의 육신을 건전하게 하심으로 일하지 말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불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5:17). 그런 발단이 된 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에서 성전 북쪽성 바깥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누워 있던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자, 자신을 둘러싼 같은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벌써 일년도 더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이나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산짐승, 들소 등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참새가 안식일에 먹을 것을 찾아 다닌들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 역시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 안식일 규정은 적용되기도 하고 적용되지 않기도 하는 것은 그분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는 안식일이 와도 안식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시는 일을 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십계명의 구성이 이렇게 깊습니다.

매일묵상(2021/07/19 – 23)

2021/07/19
시편36편 – “한 분 하나님 그리고 두 가지 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10절, 새번역)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1절) 악인과 그의 철학
          B(2-4절) 악인의 특성
              C(5-8절) 주님의 성품
          B’(9-11절)주님을 아는 자들
      A’(12절) 악인의 운명

이 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운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쪽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다른 쪽은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갈래길에서 각자의 선택을 함으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갈래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한 뜻을 거부하면 우리는 마음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무가치한 인생으로 귀착됩니다. 이 반면, 계시를 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 광명, 공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리스도인이자 리투아니아 총영사인 스기하라 치우네(40살)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미 게슈타포에게서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비자발급을 중단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고민 끝에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28일 동안 쉬지않고 비자를 발급하여 6천명의 생명을 구하고, 토교로 소환된 직후 사직 당합니다. 그는 일생 전구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021/07/20
시편 37편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절)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시로서, 신자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며, 어조나 문체는 잠언에 유사하고,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주님의 보호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고뇌에 찬 긴장과 함께 시작하는데,  그 긴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의인’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앙의 삶에서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작성되었고, 네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절  악인의 번영 – 온유해라
   12-20절 악인의 적대감 – 주님의 돌보심을 믿어라
   21-31절 악인의 거짓된 행동 – 주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32-40절 악인의 운명 –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
이 시에 맞는 악인과 의인은 단연 왕 사울과 신하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종의 갈래길에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하고(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과의 전투 사건),  골리앗을 죽인 능력있는 신하 다윗을 까닭없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 반면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순종의 갈래길에서 의를 행합니다. 결국 사울과 그 가문은 멸망 당하고, 주님은 의로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사 왕으로 삼습니다. 온유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다윗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복 중 3번 째 말씀(마5:5)을 체험하고, 본 시로 아주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새번역).


2021/07/21
잠언14:8-15절 : 구조와 메시지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8절, 새번역)

잠언14장 8-15절은 ‘속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핵심된 교훈은 “보이는대로 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이 경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11절을 중심에 두고 교차대구의 구조를 사용합니다. 즉, 8절과 15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9절과 14절은 “죄에 대한 보상”, 10절과 13절은 “마음의 비밀”, 그리고 중심에 놓인 11절,12절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말하며 “죽음에 이르는 속이는 길”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쌍을 이루는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은 ‘미련한 사람이 자기를 속인다’라고 하나,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미련한 자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순진성을 지적함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3절은 어떤 사람도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행복의 외양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9절은 악인은 속건제가 요구하는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지만, 14절에서는 주님의 응보가 확실함을 선언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즉각적으로 벌이 내리지 않기에 악인은 속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회초리는 확실하기에, 악인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11절, 12절은 악인의 눈에 확 뜨이는 성공은 짧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번영은 항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주는 교훈’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잠언14: 15절, 새번역)


2021/07/22
잠언14: 9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9절, 새번역)

이 구절은 ‘어리석음/바보”라는 주제어를 통해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보들은 속고 속이면서 이득을 취하기에(8절),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속죄제사를 경멸합니다(9절). “속죄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으로 ‘속건제사’를 의미합니다. “속죄제사”와 달리 “속건제사”는 거짓맹세, 도둑질, 그리고 속여 재산상 이득을 보는 경우를 포함하며, 이 경우 원물에 20%를 더하여 배상하고, 제물을 드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함 받습니다. 본 잠언은 손해를 가하고도 배상하기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물론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이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실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 사이에서 샬롬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킬 상황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행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우습게 여김으로, 하나님과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사랑 가운데 화합을 이루려고 하기에 그 태도는 어리석은 자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회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이 지향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2021/07/23
잠언14: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새번역)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란 인간의 감정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타인은 모르고 오직 당해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외적 환경이 있지만, 만약 그런 외양만 감안한다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서적, 지성적, 종교적 그리고 도적적 움직임은 너무나 복합적이고도 내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두 명의 부인을 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괴로웠으며, 또 한 명의 부인은 이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남편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잠언은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심정도 헤아릴 것입니다. 이 반면 만약 우리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한나와 같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우리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히4:15-16). 이와 동시에 우리는 타인 특히 배우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도를 만들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하나님 중심의 마음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7장16-18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 중간이 되어 돌연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시는 30 초반의 갈릴리의 청년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율법사 등을 포함한 유대 전 지식층 사이에 관전자인 대중을 앞에 두고 흥미진진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싸움은개인이죽느냐사느냐정도가아니라, 민족의운명이달려있는토론이고, 더나아가각개인의영원한운명이달려있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매일 암송하는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면서, 엄청난 구원의 표적들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멸망받았는데, 하물며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어도, 창조주에 대한 순종을 거부한다면 그 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예수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표적이외에도, 하나님 중심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가르친 교훈을 행하면 알 수 있다고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분의 교훈을 순종하면 분별력이 얻어집니다. 그것은 좋은 요리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고 사랑하는 자만이 그분의 교훈을 실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자아중심적인 인간본성과는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어서, 주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 모든 자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매일묵상(2021/07/12 – 16)

2021/07/12
시편34편 – 다윗의 교훈(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22절, 새번역).

이 시의 두 번째 단락(11-22절)은 3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1) 선한 삶의 비결(11-14절)은 주님을 경외하는데 있으며, 그 방법은 우리의 혀를 지키고(13), ‘악을 버리겠다’는 자기 부정의 도덕적 목표와 ‘선을 행하겠다’는 긍정적인 도덕적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14). (2) 문제에 직면하는 비결(15-18절)은, 문제의 시작과 함께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의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얻기 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15). (3)구원의 비결(19-22절)은 신자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인)은 하나님과 친족 구속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산다고 고통 없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19), 보호하시고(20), 우리 편에 서시고(21), 우리에게 대가가 요구되는 것은 전부 지불하시고(22), 자신을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하십니다(22). 이런 관계와 경험은 다윗의 주님되신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신약에 와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신자의 친족구속자(고엘)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021/07/13
시편35편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분발하여 일어나셔서, 재판을 여시고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23절, 새번역)

본 시는 체계적인 시라기 보다, 적의와 고난이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감정이 끓어 올라 지은 시입니다. 배경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편집광적으로 증오하던 그 오랜 기간이 적당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에게 알랑거리며, 부당하게 다윗의 고난을 악화시켰습니다. 34편처럼, 이런 상황의 유일한 해법은 기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응답을 주신 34편에서의 고백과 달리(34:6), 현재 당하는 고난은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필요를 주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 시는 3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뜻 밖의 위험에 처하여 드리는 기도(1-10절) (2) 부당하게 당하는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1-18절) (3) 악의가 가득한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9-28절). 각 단락은 반복하여 시편기자 자신을 위해 행동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상황을 당할 경우, 본 시편은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 주님 역시 “까닭 없이 나를 미워 하는 자들”에 관한 내용을(19절)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밤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요15:25) 명백한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자들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경건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에 힘쓰면 우리 신앙에 큰 유익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마치 여자가 해산하여 자녀를 얻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 새번역).


2021/0714
잠언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지혜는 거만한 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만한 자도 지혜를 추구하지만, 발견하여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들이 찾지 못하는 지혜는 경건과 도덕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말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섬기려는 도덕적 미덕이 결여 됨으로써, 정작 자신이 지혜롭다고 소리를 쳐도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명철(明哲-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 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습니다. 심지어 한 마디의 말을 들어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명철”로 번역된 원어는 ‘빈(discerning)’ 으로 단지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민첩하게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명철한 자의 대명사는 솔로몬입니다.  약관의 나이가 안되어 왕 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국을 견고히 세웠으나, 통치자로서 부족함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소원이 있음을 아신 주님은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왕이 되었으나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고백한 솔로몬은 백성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듣는 마음”을 구하였고,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17:6).


2021/07/15
잠언14:7
“미련한 사람의 앞을 떠나라. 네가 그의 말에서 지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바보들의 교훈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는 이미 언급한 13:27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는 교훈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바보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는 매우 지혜롭다는 의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그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의 미련함을 스스로 표현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련한 자임을 보고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14장은 바보의 특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적절한 행동과 말로 가정이나 관계를 파괴하며(1절), 상황파악을 못해 파멸을 자초하고(3절), 스스로 어리석음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고(6, 18, 24절),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현하고(7절), 스스로를 속이고(8절), 거만하여 경건함을 조롱하고(9절), 모든 말을 쉽사리 믿고(15절), 경솔하며(16절), 음모를 꾸미거나 툭 하면 화를 내어 일을 그릇치고(17, 29절), 결국에는 자승자박하게 됩니다(33절). 특히 바보 중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거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거나(시14:1), 혹은 자신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바보들을 만나게 된다면 신속히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도덕적 영적지식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2021/07/16
잠언14:8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새번역)

이 구절은 자기 행위의 결과를 주목하는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대조함으로써, ‘속임’에 관한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행위와 운명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문제들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지금 잠언은 잘 배우고(6절) 좋은 교사를 선택하라는(7절) 훈계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통제하라는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의 주어는 댓구를 이루는데 반해 –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와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  술어들 – ‘자기의 길을 주의한다’와 ‘속인다’ – 사이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숨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댓구가 이루어지도록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의 길에 주의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속임수를 피한다.” 즉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도덕적 지혜를 따라 발걸음을 선택함으로 자신과 타인의 확실한 삶을 보장하지만, 바보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하여 타인의 희생을 꾀하다가, 뜻하지 않게 자신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양적인 필요와 결과만 생각하지 않고, 그 이면을 통찰하고는 그 길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심사숙고합니다. 경건과 도덕의 비법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진심으로 구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요7:18,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