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6/7 – 11)

2021/6/7
시편 26편 – 선한 양심의 호소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1절)과 끝(11-12절)을 맺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감찰(2절)과 행동(9,10)을 요청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게 배경은 다윗에게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경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선한 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야말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선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순결하게 살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문자를 가지고 죽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 바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10절) ‘죄인’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결백함을 단언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면, 적들은 다윗의 생활양식(3절), 사귀는 동료(4,5절), 종교의 현실(6-8절)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개인적으로나(3절), 사회적으로나(4,5절), 영적으로(6-8절)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이 주님 앞에 드렸던 이 기도와 고백을 우리 역시 끊임없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2021/6/8
시편 27편 – 기도로 일하는 믿음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절)

시편 26-28편을 읽으면, 먼저 성전(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26편은 예배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때 신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묵상면서 양심을 살피다가 마지막 구절(12절)에서 허락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27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성전을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소요, 비젼의 장소로 여깁니다. 28편에서는 성소에 들어간 시편기자가 공평한 정의를 위해 지성소를 향해 탄원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27편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지지하심
                   ( 4-6절)  안전을 위한 첫번째 기도
                   (7-12절) 안전을 위한 두 번째 기도
(13-14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응답하심

어떤 분은 중학생 때 어둑해 지는 저녁 시간 동네 길을 걷다가 불량배 셋을 만나 주머니 돈을 전부 털렸다고 합니다. 셋만 둘러싸도 겁이 나는데 시편기자는 군대가 둘러싸도 무섭지 않다고 외칩니다. 뭘 믿고 큰 소리 치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 늘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한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엿보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시며, 이런 주님의 구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2021/6/9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2021/6/10
잠언13:17
“못된 전령은 사람을 재앙에 빠지게 하지만, 충직한 사신은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악한 전령(사신)의 성품과 그가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를 양심적인 전령(사신)과 그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치료효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15절(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을 함께 고려한다면, ‘못된 전령 bad messenger’은 ‘사악한 자’와 상응하여 반역적이고 신뢰성이 없어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전령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쓰고, 말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서, 외교사절, 군인, 왕실의 대변인, 총독, 정보요원, 물건운송, 후견인, 그리고 왕실의 첩자와 같은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라는 전문적인 수행원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춘 자여야만 하고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한 공부까지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과 또 그들의 수행하는 임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가는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특권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진 문헌에 나타난 매우 희귀한 관료들의 이름 가운데 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의 침략야욕을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 황윤길(서인)과 정반대로 왜군의 침입은 절대로 없을 것으로 보고 하여 조선을 재앙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짓 보고를 한 이유는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돌이켜 진주성을 수비하다가 병사하였지만 역사는 그의 죄책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2021/6/11
잠언 13:18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따르고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현대인의성경).

본 잠언은 13절과 매치를 이루면서, 13절에서 18절에 이르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은 보상과 벌은 행위의 교정여부에 의존함을 알려줍니다. 특히 본 잠언은 책망을 듣고도 행위를 교정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가난에 이르지만, 행위를 교정하는 자는 박수를 받고, 존경과 재물을 넘치도록 받는다고 말하면서(3:16; 8:18)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난과 수치’ 즉, ‘수치스러운 가난’을 갖게 됩니다. 대조적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여기서 존경은 사회적 명예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반함으로 사회에서 중요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22:4). 한편, 빈곤을 가져오는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 게으름(10:4), 쾌락과 사치를 사랑함(21:17; 28:19), 일하는 대신 수다를 떠는 경향(14:23), 통상의 악함(13:25), 그리고 줄 것을 안 주는 비열함(11:24). 그러나 본 잠언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 즉, 그것은 말과 노새와 같이(시32:9), 잘못된 요소들을 교정하라고 타이를 때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로 인한 가난은 불명예를 가져옵니다만, 불의를 거절함으로 찾아오는 가난 – 미덕을 가진 가난(17:1; 19:1) – 은 불명예롭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훈계를 백안시 하는 자들은 가난과 수치로 징계를 받지만, 타인으로부터 오는 그런 징계에 순종하는 자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잠언3:13,14, 새번역).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1-13
요한복음 7장부터 10장 21절까지는 초막절에 일어나 예수님의 강화와 표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 율법은 1 년에 3 번은 이스라엘 모든 남자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규정하고 있으며(출34:23), 그 3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살해 의사 때문에 칠칠절이 있었지만, 주님은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6장 사건이 일어난 후, 7개월이 흘러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때는 AD 29년 10월 경으로 6개월 지나면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 승천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전제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기에 자신의 큰 형님이 갈릴리에서만 돌아다니고 유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에 좋지 않게 생각하여 유대에 가서 큰 이적들을 행하여 떨어진 추종자들을 모으라는 권고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7개월 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그 다음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적의 의미를 강화하자 불쾌하게 여긴 제자들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이지, 추종자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적이 틀리기 때문에 육신의 형제들의 권고를 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태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8)-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61-71
오늘 본문에서 잠시만 존재하는 육신을 만족하게 하는 일시적, 썩을 양식을 떠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양식을 먹으라고 가르치시며 어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당신의 진정한 뜻을 밝히시자, 군중들은 육신을 충족시키지 못한 예수 필요 없다고 떠나고, 끝까지 듣던 제자들은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등,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등의 가르침에 그만 불쾌하여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빵을 생산하는 빵 공장을 차리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차리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녀들을 생산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다만, 그 대상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온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여 피로 그 죄를 씻으시고, 그들에게 당신과의 교제가 그 핵심인 영생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5/31 – 6/4)

2021/5/31
시편24편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3절, 새번역)

시의 배경으로 100년 간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안치시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삼하6장). 시는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으며(3-5절), 주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가?(7-10절)” 그리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오직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4절), 그분은 주권과 영광과 권능과 구속의 권리를 가지고 오신다(7-9절)” 이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로서 시를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창조 –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야훼)으로서(1-2절), 3절 이하 질문의 전제를 이룹니다. (2) 거룩 – ‘거룩’이란 특징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의 장막에 들어갈 자격을 논한 시편15편을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 참된 신앙, 진실된 말 4가지로 압축합니다(4절). (3) 승리 – ‘고대의 문들’에 대한 도전은 왕과 용사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벌이는 전투의 외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쟁들과 애굽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묘사하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인간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권력과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싸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절)


2021/6/1
시편 25편 – 곤고한 날을 위한 ABC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9절, 새번역)

25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벹 22개의 순서대로(두 군데서 불규칙함)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첫 음절에는 히브리어 자음의 순서인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연속  등장합니다. 내용은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눌림, 주님의 인도에 대한 간청, 그리고 죄의식 때문에 발생되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어조는 차분하고, 시인이 가지는 주님에 대한 신뢰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감안한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개인적인 간구(1-21절)
      (1-5절) 신뢰, 소망, 기도
             (6-10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죄인들)
             (11-14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경건한 자들)   
      (15-21절) 신뢰, 소망, 기도

2.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22절)

한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중 하나(b-베트)는 모호하게, 또 하나(q-코프)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알파벹 시 형태는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신뢰, 소망, 기도가 드려지다 22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와 같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패턴이 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등장하여 흐름을 깬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함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7:14, 새번역)


2021/6/2
잠언13:14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가르침(토라)’과 ‘계명(미스바)’는 유사 개념으로 함께 등장하나(3:1), 여기서는 14절과 13절에 각각 등장하여 두 구절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지혜자의 가르침’이라는 어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자의 가르침’과 ‘계명을 두려워 하는 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함께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가 치뤄야 할 그 빚은 죽음(14절)이고, 그분의 말씀을 늘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보상은 생명(14절)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하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지혜자의 가르침’은 무서운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길 옆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속기 쉬운 자들은 현명해 질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여 악으로부터 돌아 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잠언이 주는 영감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가지는 풍성한 삶(생명)을 의미하며, ‘죽음의 그물’은 남을 잘 믿는 자들이나 둔한 바보들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많은 악의 대행자들 -못된 언어, 못된 행위, 악한 남자들과 여자들 -을 의미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문체와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사람들을 이끌어 생명의 진리를 마시게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생의 여정에 생명의 샘은 오직 하나이지만, 죽음의 덫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잠언14:16, 새번역)


2021/6/3
잠언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판단력, 통찰력을 뜻하는 ‘세켈’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지혜 good sense’는 ‘좋은 판단력’을 뜻하기에,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른바 ‘양식(良識)’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16:22절(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에서는 지혜(명철)를 생명의 샘에 비유하면서 13:15절에 나오는 ‘지혜-세켈’와 14절의 ‘생명의 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며 그 가르침에 주의하여 그 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도덕적 인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호의를 받게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반역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고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대표는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은 본 잠언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줄 수 있는 은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받을 수 있다는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받는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 주님의 응답과 돌보심 그리고 항해 경험으로 체득된 지혜로 폭풍 속에 난파될 배로부터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해 기도하십시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랴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2021/6/4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7-1)-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절 – 71절
계시와 약속이 아무리 크더라도, 몇몇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메시지를 믿음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면 믿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히4: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결부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가르침까지 들은 가버나움 회당의 제자들은 더욱 불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세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충분하고 메시야는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한 부분들(예, 식량의 공급, 병의 치유, 로마 제국을 정복)만 채워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들로,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아들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분에게 가서 죄 사함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모두는 영원토록 함께 교제를 나누며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도한 자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신 증거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부께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시겠습니까? – 요한복음 12:24 – 26절

매일묵상(2021/5/24-28)

2021/5/24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이 기도를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드리셨습니다. 그 만큼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습니다. 1-21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22-31절은 구원받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시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구원의 체험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하였습니다. 1-21절은 버림받은 고통(1절), 무력하게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유대 지도층과 군중들의 비웃는 소리(6-8절). 십자가 상의 목마름의 고통(15절),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장면(16절),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18절)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2-31절은 부활의 승리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요20:17).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다윗과 주님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난으로 탄식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고난이 놀라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축복이며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시22:27, 새번역).


2021/5/25
시편23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6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이라는 대목은 사무엘하17:27-29절을 회상시킵니다. 압살롬에 쫓겨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왕 다윗은 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과 원수들이 포진한 비상 사태에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한 다윗은 이를 회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2021/5/26
잠언13: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새번역)
8절은 재물과 책망의 주제를 다루고 9절은 이를 발전시켜 의인의 흥왕과 악인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재물 여부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도덕적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여 행복한 운명을 갖게 되는 반면, 이를 거부하는 악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의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10절은 책망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물론 매우 슬기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충고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만한 바보는 자기 자신이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지혜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여 전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릅니다. 당연히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들을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도리어 격한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면 충고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판을 들을 때 한 번 더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교정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은 훨씬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밝은 유능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입니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고객의 평점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블랙컨슈머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가게들은 이들의 의견 또한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여 가게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 새번역).


2021/5/27
잠언 13:11절
“공으로 얻은 재산은 날아가지만 애써 모은 재산은 불어난다.”(공동번역).

7절에서 11절 총 다섯 구절은 부(재산)과 윤리에 관한 소 단락으로, 11절은 그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절이 8절에 암묵적으로 나오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같이, 11절은 9절에서 논한 결론, 즉 의인의 영구한 부와 악인의 일시적인 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잠언은 근면 성실하게 모든 재물을 긍정하나 악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정죄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데, 영어는 이를 “easy money”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든 경우를 말하며, 폭정, 불의, 갈취, 거짓말 그리고 횡재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반면, 인내, 근면, 사려 깊은 행동, 관대함 그리고 믿음이라는 덕들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등장하는 ‘애써 모은’(by hand의 의역)이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천천히, 적게, 꾸준히 손으로 일하여 재물을 축척한다는 의미이지 횡재는 생각도 없습니다. 실상 불의로 얻은 재물이 단명하고 올바르게 획득한 재물이 오래 간다는 말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성품과 가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예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요구하여 쉽게 재물을 획득한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이주하여 허랑방탕하다가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 역시 재물을 어이없게 탕진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재물의 가치와 관리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5/28
잠언 13:12절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새번역)

12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 19절은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여 8개의 구절(12-19)이 단락을 이루면서,  ‘지혜와 성취, 어리석음과 좌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실을 먹으려면 지혜자의 교훈에 목말라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모은 잠언은 생명샘입니다. 한편, 12절과 11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은 착실하게 모은 의인의 재물은 불어나지만, 힘안들이고 얻은 재산은 없어진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12절은 더 나아가 악인의 소망은 결국 이루지지 않아 마음이 병들지만,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어 그의 삶의 생명나무가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망없는 외부적 상황은 심신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가 몸 전체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인이 가지는 소원성취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너지를 갱신시키고, 용기를 새롭게 하여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합니다. 비록 윤리적인 단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요소를 반드시 전제하고 이 잠언을 읽어야만 하며,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실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저주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13:14,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7)-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 – 71절

당신이 참된 양식으로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가진다는 예수님의 강화에 불쾌한 생각을 가지고 웅성거리는 제자들에게 추가 설명을 하신 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 제자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기에, 주님은 당신의 승천을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당신이 이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는 것을 목격한다면, 속죄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당신이 죽을 몸을 가지시고 행하는 이적들은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죄 용서를 받고 영원한 부활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죄에 대한 대가를 당신이 치루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로 강력한 상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죄의 대가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사 승천하셔야 하는 것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을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의 철폐입니다. 당신이 승천하셔야 성령께서 오셔서 당신의 말씀들- 믿는 자에 대한 사면의 선언 -을 가지고 각 사람에게 증언하심으로 제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글자그대로 그들이 씹어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지 않고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습니다.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인간에게 능력으로 도달하게 되는 통로는 “예수의 말씀들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묵상(2021/5/17 – 21)

2021/5/17
시편20편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7절, 새번역)

전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이 침공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큰 천둥을 보내어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히자 결국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다윗은 전쟁 전날 밤 기도와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본 시편을 지었습니다. 이 시는 여러 목소리가 들립니다. (1) 제사장과 백성의 기도 : 욍이 조용히 기도할 때 제사장과 백성은 왕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구합니다(1-2절). 이어 왕이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은 그것이 열납되기를 기도하며(3절), 그 결과 왕의 계획이 성공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를 간구합니다(4-5절). (2) 왕의 확신: 이에 대하여 왕은 기도(6절)와 믿음(7,8절)이 승리로 가는 두 가지 길이라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3) 마지막으로 제사장과 백성은 왕이 승리하도록 주님의 응답을 간구하면서 예배를 마칩니다(9절).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9:11,새번역).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을 배경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준비한 사람은 결전의 날 반드시 주님의 간섭과 은혜를 간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은 이때 좋은 기도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 (잠21:31, 새번역).


2021/5/18
시편21편 – 전쟁 후 : 승리의 노래
“온갖 좋은 복을 왕에게 내려 주시고, 왕의 머리에 순금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3절)

환희에 찬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기념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20편은 전쟁 전 승리를 위한 기도와 믿음을, 21편은 그 간구와 신뢰가 전쟁에서 응답되었음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언급은 각각 2-7절과 8-12절에 반영되었기에, 본 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1) 왕과 주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경험(1-7절) (2) 왕이 누릴 미래의 승리 (8-12) (3) 주님에게만 찬송을 (13절). 한편, 시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구약 역사의 중심에 놓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며 대륙을 잇는 무역로가 통과하는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많은 이방민족들이 함께 살면서 세력확장의 각축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늘 약소국이었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이런 전쟁의 의미를 영적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즉 예수께서 왕이자 용사로서 오셨지만, 로마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죄의 본질)과 사망, 그리고 마귀를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죄인들의 손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고,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사 지금 이 세상을 배후에서 장악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계십니다.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2021/5/19
잠언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본 잠언은 그 뜻이 매우 모호하여 다양하게 해석됩니만, 겉모습 때문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이런 면을 알기에 겉모습을 보고서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잠언은 물질적 부와 영적인 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하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잠언은 세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1) 탐욕에 대한 책망: 탐욕은 타인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참고: 마16:26). 이 경우 본 잠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바울에 의해 예증(마19:29; 고후6:10)된 ‘부유한 빈곤 rich poverty’의 역설을 권면합니다. (2)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 이 경우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나 .….”라고 읽혀집니다. 너무나도 눈이 멀어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은 종이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3) 위선에 대한 정죄: 이 경우 본 잠언은 위선자를 정죄합니다. 가난한 바보가 스스로 부한 체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지혜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 사회적 존경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며, 부유한 바보가 가난한 체하는 것은 인색함을 숨기려는 몸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두 거짓말쟁이는 악한 자들로서, 전자는 합당치 못한 명예를 받고, 후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거절하여, 주님과 사회 모두에 수치가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4:15,현대인의성경).


2021/5/20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본 잠언은 해석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 원인은 히브리어 단어 ‘게아라’가 ‘협박’과 ‘책망’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은 둘로 나누어 졌지만, 한글 번역 성경들은 모두 ‘협박’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게아라’를 ‘협박, 위협’의 의미로 본다면, 납치된 상황이 떠오르게 됩니다. 만약 부자가 납치되었거나 협박을 받고 있다면, 부자 자신이나 그 가족이 납치범이 요구하는 금액(속전)을 지불해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은 부의 힘을 보여주는 반면, 그런 재물도 협박을 당하지 않도록 할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난하게 된다면, 납치될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납치하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은 힘이 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반면 ‘게아라’를 ‘책망’으로 이해한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어떤 죄책을 지고 있는 상황이 전제됩니다. 그런 죄책을 아는 부자는 위협적인 도덕적 책망을 들으면 반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여 대가를 지불함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가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NICOT). 여기서 ‘책망’이란 ‘도덕적 비난을 내용으로 하는 분노에 찬 항의’를 표시하며, ‘속(贖)하다ransom’는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요구되거나 지불될 가격을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이 책망에 반응한 사람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2021/5/21
잠언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기자는 유사한 히브리어 발음을 가진 두 단어 – ‘가난한- 라쉬’(8절)과 ‘사악한-레솨임’(9절) -를 사용하여 두 구절을 서로 연관시키는 동시에,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8절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인 질책을 받아들여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죄책을 진 그를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의 의가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구한 부는 오직 의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올바른 책망에 대하여 기꺼이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도덕적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그는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논하고 있는 9절은 확실히 의미가 진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의 빛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성공과 행복 그리고 장수 등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위 잠언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삽과 같은 시편 기자가 고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시편73편). 왜냐하면 악인이 죽을 때에도 그 힘이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잠언은 단 한 경우도 예외가 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1-43).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6)-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2)

요한복음 6장 60 – 71절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푸신 다음 날 가버나움에 제자들과 함께 가셨더니, 기적의 떡과 생선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께 먹으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영생할 수 있는 그 떡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당신이 쏟을 피와 찢길 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냉소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불쾌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친히 선포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우지 못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더욱 불쾌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고, 누구는 받지 못한 자들이겠습니까? 받은 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받은 자들은 자신의 현실을 냉철하게 계산하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삶의 지침 역시 주 예수의 가르침,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거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매일묵상(2021/5/10 – 14)

2021/5/10
시편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절)

본 시편은 3 종류의 목소리(voice)가 차례로 전면에 등장하여 3가지 주제를 연주함으로써 멋진 대위법( 對位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목소리는 창조물의 것(1-6절)으로, 주제는 ‘역설 Paradox’입니다. 온 우주는 아무런 음성도 내지 않지만 피조물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목소리(7-10)로서, 주제는 ‘완전perfection’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완전함을 노래합니다. 세 번째는 죄인의 목소리(11-14)로서, 주제는 ‘기도praying’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도합니다. 먼저 창조물의 웅변(1-6절)을 들어보겠습니다. 온 우주는 공간과 시간과 땅을 통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선포합니다. 특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4절)에서 사용된 ‘소리’는 ‘줄Lin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할당된 지배권 혹은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지배권은 날마다 새로이 떠오르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든 곳을 비추는 ‘해’를 통해(5-6절) 행사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늘은 언어를 쏟아내지만, ‘언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 공간의 모든 별들이 서로 연결하는 줄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기이함입니다. 다만, 창조물의 그런 메시지는 제한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말씀의 목소리’(7-10절)를 노래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2021/5/11
시편19편 (완전: 7-10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모든 창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은 자연 종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7-10절). 그분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야훼)로서 본 단락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그 이름이 들려집니다. 계시된 그분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 법’으로 표현되는 6개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뜻(의지)을 알려주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토라)’은 계시된 그분의 뜻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며, ‘증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된 진리를 나타내고, ‘교훈’은 인생의 세부적 사항에 적용되는 측면을, ‘계명’은 순종의 측면을, ‘경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측면을, 마지막 ‘법’은 권위 있는 결정이라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오염이 없이 순결하며,’ ‘변함없이 영원하고,’ ‘참되고 의로우며,’ ‘귀중하고,’ ‘참된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달콤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참된 생명이 회복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 기쁘게 되고,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바라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11-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편19:14).


2021/5/12
시편 19편 (기도: 11-14절)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새번역)

세 번째 목소리로 죄인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번 단락(11-14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권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주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풍성한 상을 받는 진리를 발견합니다(11).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죄를 확신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를 합니다(12). 중생한 그에게는 새로운 열망이 쏟아오르게 되는데, ‘온전한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완전함과 같습니다. 특히 생각과 언어 사용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4). 주님도 자신이 한 말씀으로 그분 자신이 알려지는데(7-10),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창조물은 조용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순종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신자의 절망과 열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14절이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의 반석이시며, 구속자(고엘)이신 주님께 호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구속자(고엘)는 룻이 살아갈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한 보아스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사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 새번역).


2021/5/13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하기를 싫어하지만, 악인은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한다.”(새번역)

본 절은 말과 일을 의와 악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여 그 결과를 먹는 사람(2절), 사려깊은 언어사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3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여 바라는 모든 것을 넉넉히 얻는 사람(4절)을 5절에서는 의인(義人)이라고 정의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삶에서 발견합니다(시42:1-2). 왜냐하면 의인은 거짓 입술을 미워하시나 진실됨을 기뻐하시고,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진리로 가장 훌륭하게 섬김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거짓말도 아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악인은 썪은 생선처럼 악취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영과 이기심이 사람들의 관계에 독을 풀어 넣고, 사회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결국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공공연히 수치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왕비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둘을 세운 뒤 의로운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자 세상은 두려워 덮었지만,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후 왕비 이세벨은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18-20), 새번역).


2021/5/14
잠언13: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본 구절은 ‘공의’와 ‘악’을 인격화시켜서 참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악’을 전복시켜 패망하게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1-4절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화자(speakers)와 행위자들(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사람 등)의 운명과 대칭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자기 입을 ‘지키는’ 자”와 6절의 ‘보호하고’는 같은 동사(나차르)라는 것만 보아도 이런 연결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6절은 그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높이고 있을 뿐입니다.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 즉 비난받을 것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이들이 내어딛는 발걸음 하나 마다 모두 주님과 그분의 우주적 왕국의 안녕과 복지를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져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죄인의 길(way)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여기서 ‘패망하게 한다’는 동사는 ‘살랍’으로 “비틀고 왜곡시켜 윤리에 속한 무언가를 파멸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길(way)이라는 은유는 의와 악이 자신들에 합당한 운명을 구축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신실한 삶만이 그 행하는 자를 보호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거짓말들은 죄인들을 전복시켜 그 결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의인과 악이들 사이에 계셔 지켜보시며 듣고 그 행한 대로 심판하고 계시고, 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전제가 니이체의 철학이나 논어와 맹자의 사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야말로 모든 도덕질서의 궁극적 보호자이십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잠22:12,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