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5/3 – 7)

2021/5/3
시편 18편 –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2절,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주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뒤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 시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실질상 동일한 내용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표제를 읽고 시를 감상해 보면 다윗은 상징법을 써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일생에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강림하셔서 도와 주신 경우도 없고(10), 여호수아처럼 우박을 보내어 적들을 죽인 경우도 없으며(12), 홍해를 가르신 경험도 다윗은 하지 못하였습니다(15). 다윗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수단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블레셋 족속의 침입(삼상23:26이하), 엔게디 광야의 험준한 지형(삼상24:1-3), 쉽게 흔들리는 사울의 양심(삼상24, 26장), 그리고 도주하는 것입니다(삼상27:1).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돌이켜 보니,  그런 구원은 오직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7-8; 출19:18), 이집트를 심판하시고(9-12; 출9:13)), 홍해를 가르신(15) 바로 그 주님이 배후에서 일하셨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이나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이나 염소바위에 몸을 숨기나 실제로 그의 반석이나 피난처가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그의 영광을 숨기시고 하늘 보좌에서 당신의 종을 위해 통치하셨던 것입니다(10-11절). 우리의 일생도 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2021/5/4
시편18편 – 부르짖음과 응답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3절).

시편 18편은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나 다른 교훈들이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절실한 필요와 주님의 구원의 권능 사이에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폭풍 가운데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황량한 광야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은 10년의 도피 기간 동안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고, 왕이 될 자질을 검증받았습니다. 다윗의 시는 많은 경우 탄원시입니다. 다윗은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절박한 삶의 경험은 주님의 고난을 노래하기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왕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잘 예표하는 삶이었습니다. 1-19절의 내용을 보면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를 기다리는 주님의 주권적 권능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사망의 줄이 다윗을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미쳤을 때였습니다(4-5). 다윗은 부르짖었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어 20-45절은 다윗이 이런 과거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받은 교훈들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성경의 교훈들을 배우고, 그 교훈들에 담겨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 성령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 새번역).


2021/5/5
시편18편 –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23절, 새번역)

본 시편이 노래하는 주제 중 또 하나는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입니다. 이 시가 노래하는 방법은 공의로우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그런 공의가 어떻게 다윗에게 적용되어 그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의로운 자를 보답하신다(20-24)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원칙을 삶에서 절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비록 그가 어두움 가운데 있더라도 빛을 빛추어 주셨고, 적군 속을 달려도 주님은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25-29).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 원칙을 경험한 다윗은주님은 완전하시고, 그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에게 오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신다(30절)고 노래합니다. 한편, 이런 체험이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자신 스스로를 지키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나, 다윗은 이렇게 살도록 힘주시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분 역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32). 이 고백은 바울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롬8:28-29). 이런 삶이 현재 신자들의 삶이며, 영생의 본질입니다. 결국 주님이 피로 사셔서 이 세상에서 훈련하여 의롭게 변화된 백성들만이 남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시18:1, 새번역). 시편 18편 –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 메시야)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


2021/5/6
다윗은 자신의 나라와 왕위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확신 가운데 시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확신은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견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보낸 신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다윗은 이 말씀을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400년 정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여(비시586),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단의 신탁과 이를 근거한 본 시편의 확신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 왕은 단지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50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번역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윗 보다 훨씬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왕 다윗에 대한 소망은 다윗의 씨(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의 부활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사망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막10:48, 새번역)- 맹인 거지 바디매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6) –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71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만 영생을 가진다고 선포하시자 이를 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불쾌하였기 때문입니다.우리도 오늘날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복음이 우리 감정을 건드리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임하셨다”는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입니다. 회개하여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마음에 “내가 비록 의인은 아니나 그렇다고 큰 죄인도 아닌데…. 복음이 왜 필요하지?” 이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 산을 넘지 못하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잘 살고, 민족이 독립을 하고, 가정에 평화를 얻으며, 병이 고침을 받으며, 마음에 평화를 얻으려고, 삶에 지침이 되는 좋은 말씀을 들고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등등으로 복음이 재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평화를 얻고, 가정에 화평이 있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부자들, 지식인들은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여기 제자들 역시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제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인생의 지침이 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삶 가운데 열매를 맺도록 힘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살아 있는 생명의 종교로서 불교와 타 종교, 그리고 철학과의 차이입니다.

매일묵상(2021/04/26 – 30)

2021/04/26
시편17편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절, 새번역)

이 다윗의 시는 ‘들으소서’(1절), ‘기울이소서’(6절), ‘일어나소서’(13절)의 세개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호소(1-5절)는 다윗의 의로움을 변론하며, 두 번째 호소(6-12절)는 무자비한 원수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필요를 알리며, 세 번째 호소(13-14절)는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합니다. 결론(15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사무엘상 23:25절 이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면 산 저쪽으로 피신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포위되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기치 않은 블레셋 군대의 침입으로 사울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해 북쪽 오아시스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계속 피신한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자신의 말처럼 의롭게 주님을 뵐 수 있는지 여부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 시험은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일을 보러 동굴에 들어온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시험에서 합격하였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17:15, 새번역)


2021/04/27
잠언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 절은15절부터 시작되는 12장 후반부를 결론 내리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생명과 사망은 영원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류를 가지게 됩니다. 의학적인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합니다. 잠언14: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이 오면 악인은 쓰러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희망이 있다.”(현대인의성경). 잠언 14:32절과 본 구절을 비교한다면, 잠언의 ‘지혜’는 금생의 삶을 돌파하여 죽음을 넘는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In the path of righteousness”라는 말은 인간 실존이 걸어가야만 하는 윤리적인 영역 즉,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친절하게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과들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을 산출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도덕질서를 유지하여서 우리들이 행하는 ‘의’가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의의 댓가(wages)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를 행한다 하여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나오는 어떠한 ‘의’ 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셔서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그 맛만을 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10:16).


2021/04/28
잠언13:1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새번역)

잠언13장은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6절) 언어와 윤리, (7-11절) 재물과 윤리, (12-19절) 지혜와 어리석음이 낳는 삶의 결과, (20-25절)영원한 삶의 조망. 13장 1절은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도입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혜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버지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지혜로운 아들과 거만한(mocker) 사람을 대조하여 그 특징을 묘사함으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후자는 도덕적 꾸지람과 교육 과정을 경멸합니다. ‘꾸지람 rebuke’의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분개하여 항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고 가르치는 대행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거만한 자들은 범죄하지만 도덕적 훈계를 받기 거절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실상 지혜로운 사람이 받은 한 마디의 도덕적 책망은 미련한 자가 받는 매 100대 보다 더욱 효과적입니다(잠17:10). 주님께서 거만하며 남을 조롱하는 자들을 통조림(?)으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면 순진하여 속기 쉬운 자들 역시 정신차릴 것입니다(잠19:25). 우리 주님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지혜로운 아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 사는 고통스러운 징계의 학교인 세상에 내려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2021/04/29
잠언13:2
“선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로 복을 누리고 살지만 악한 사람은 폭력을 일삼는다.”(현대인성경)
From the fruit of his mouth a man eats what is good, but the desire of the treacherous is for violence. (ESV)

2절은 ‘먹는다 eat’는 단어를 사용하여. 1절의 ‘듣는다’에서 3절의 ‘말하다’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충성스럽게 말하는 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산출하나, 불충한 자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들을 먹는다”는 문장은 믿음성 있게 말하는 자가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혜택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일종의 환유법(미국 대통령 대신 ‘백악관’을 사용함)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고 신뢰있는 말을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바르게 양육됩니다. 따라서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등장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나는 아들딸들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녀가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좋은 것(복록)을 넉넉하게 얻을 것입니다. 이 반면, 반역자는 거짓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녀들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약탈합니다. 이 같은 자들(거만한 자가 포함)은 엄히 꾸지람을 들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나 이들이 행한 강포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데, 결국 그들에게 “멸망이 찾아옵니다”(3절). 이렇게 불충한 자는 친절이나 좋은 교훈과 관련하여 어떤 욕망도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강포를 행할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진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 (잠3:31,새번역).


2021/04/30
잠언13: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새번역)

3절의 표제어는 ‘입mouth’입니다. 2절에서 ‘입’은 좋은 말을 내어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지만, 여기서는 나쁜 말을 억제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생명’의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그 어근은 ‘목 neck’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욕망’에서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만약 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좋은 것들을 먹습니다(2절). 만약 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보전합니다(3절). 이제 언어가 먹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사의 문제로 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언은 결국 ‘공포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3절). 물론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에는 성급하고 수다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 경고하는 것은 폭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입을…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열다 open”의 원어는 “파사크’인데 에스겔서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는 모습을 거리에서 음행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욕 때문에 음행을 하여 파멸하듯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격랑과 같이 몰려와 절제하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분수를 모르고 폭언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이 와서 부역 경감을 청원하자, 불순종하는 자는 “전갈로 징치하겠다”는 포학한 말을 하여 나라의 2/3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약3:5,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5)- 신자의 정체성

요한복음 6장 52 – 59절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의 빵과 생선을 먹은 제자들은 가버나움 회당에 앉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인데, 그 떡은 바로 자신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고 하시자 서로 다투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당신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피가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하신 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산다고 하심으로, 이른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정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가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서 이 부분을 좀 더 명쾌하게 설명하시지만, 기본적으로 이 말씀은 부활 승천 후 보내주실 성령님이 신자들 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심으로 성취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만 성령께서 함께 계실 수가 있습니다. 신자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셔서, 우리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다 훨씬 더 나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오는 열매가 이른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요,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은 아들을 생명의 떡으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묵상(2021/04/19 – 23)

2021/04/19
시편 16편 – 영원한 안전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5절, 새번역)


16편은 다윗이 지켜주실 것을 탄원하는 시로서 무엇 때문에 다윗이 부르짖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홀( 음부 – 죽은 뒤 가는 장소)로 대표되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이나 위험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안심합니다. 다윗이 열거하는 증거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우리가 직면할 때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1)주님만이 그의 산업이요 소득이며 그의 몫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2)그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성도의 교제), (3)주님이 주시는 유산은 찬란하다. (4)주님은 늘 좋은 생각과 교훈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9-11절에 이르면 다윗은 영원한 안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신의 삶을 늘 기뻐합니다(11). 다윗의 이 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 시편(특히 10-11절)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행2:24-32). 당연히,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양자될 때 즉 우리 몸이 부활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23-2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편16:7).


2021/04/20
신체 일부가 마비된 한 소녀를 모두가 피하였는데, 드디어 소녀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평을 그치고, 재미있는 우스개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전문적인 개그우먼이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국부론에서 분업이야말로 기술진보의 첨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여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길,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기계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여 능숙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 가르침을 받고 다각도로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 뛰어난 외교가요 정치가로서 미국의 역사에 존경받는 분으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계 최고의 인쇄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인쇄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쇄업으로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이신론(理神論)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상기 3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노력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지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1/04/21
잠언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개정개역)


“좋은 말(word)”은 한 마디라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실상 그런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사람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잠언은 자신이 신뢰할 친구를 선택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생명의 길을 벗어나 사망의 길로 이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인도자가 된다”는 구절에서 “인도자가 된다”는 표현은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하여 주의깊고,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웃(친밀한 친구)을 위함입니다. 의인의 눈은 넓게 열려져 있어 자신의 친구들이 가지는 고집셈, 속임, 어리석은 수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친구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하며, 그 결과 자신의 친구를 교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는 좋은 친구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위를 지혜로운 행위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됩니다. 한편 이웃의 좋은 인도자로 나오미(룻의 시어머니)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세 율법에 규정된 고엘(친족구속)제도를 활용하여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그 인도를 따라 간 룻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국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멀리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지만, 악을 꾀하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잠12:2, 새번역).


2021/04/22
잠언10:22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고 선언한 잠언은 그렇게 되는 원인을 본문에서 밝힙니다. 즉 부지런히 일한다고 저절로 부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재물을 주시는 장본인은 바로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자명한 진리를 적은 것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라는 법칙을 온 우주의 형성 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참된 부(wealth)라는 주님의 축복은 부지런하게 일하여야만 작동합니다. 어리석은 자 보다 게으른 자는 더욱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일해 줄 것을 기대하나 게으르게 일에 임하여 예상하지 못한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의로움이야말로 부를 영속시키는 직접적 근원이 됩니다. 대표적인 분이 400년 동안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만유의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며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점은 힘을 들여서 그리고, 격렬하게 노동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노동은 야망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 사람에게 일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를 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심판 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을 경외하여 한 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딤전6:9, 새번역)


2021/04/23
잠언12:27
“게으른 사람은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귀한 재물을 얻는다”(새번역)


이 잠언은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서로 대조하여 지혜의 길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이 본 절에서 불확실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냥한 것”이란 먹기 위해 사냥한 들짐승(노루, 산양 등)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일과 같이, 사냥을 위해서도 치밀한 계획, 인내, 기술 그리고 끈질긴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이 들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를 전제로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가지고 두 종류의 번역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스스로 사냥하지 않는다”(개정개역), 다른 하나는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는다”(새번역)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식량을 위해 사냥하러 나가지 않던, 사냥은 성공적으로 하였으나 굽지를 않았다면 결국 먹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게으름으로 인하여 자신의 기회를 던져버린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징계를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영적으로 굶주리는 것과 같이, 게으른 자도 풍부한 음식을 굽지 않아 육체적으로 굶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핑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도 성경 구절을 핑계로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거나, 수혈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고 있습니다. 이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반은총을 잘 이용하여 야생의 들에 풍성하게 존재하는 귀한 재물인 들짐승들을 잡아 구워먹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반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잠언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13:1, 새번역). 

매일큐티(2021/04/12 – 16)

2021/04/12
시편 15편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절, 새번역)

본 시편은 시인(다윗)이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열거된 대답은 예배자들이 성소에 들어갈 조건을 물어보면, 제사장은 이에 응답하는 형태를 따서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손님의 위치에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주인의 조건은 깨끗한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진실된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고리대를 받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조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스파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여부입니다. 신자는 모두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 그리스도를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실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추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롭다 선언하신 하나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어찌 결심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조사하여 철저히 살피셨으나 나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입으로 범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시편17:3, 현대인의성경)


2021/04/13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소년(9살)이 범브란트 목사님이 소속 선교회로 보낸 편지입니다.
“ 범브란트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목사님이 쓰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책을 읽어 주셨어요. 저는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전해 듣고 울었습니다…….우리는 로디지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데, 왜 우리나라엔 오시지 않습니까? 많은 로디지아인들이 목사님의 일을 도와 드릴 거예요. 전 목사님의 선교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한 번에 장군도 되고, 총무도 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목사님네 장군들(선교회의 일꾼을 지칭함)도 구세군의 장군들처럼 제복을 입나요? 꼭 알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의 천사들이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총책임자의 책임을 설명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선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아홉 살 그 소년은 어머니의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시,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사람이 총 사령관과 장관이 될 것이다”라고 공포하니, 그의 조카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서 총사령관이 됨은 물론 천하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이 너무 강해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면 이종사촌(아마사)을 암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수고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애를 쓰는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금생과 내생에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마11:12, 현대인의성경).


2021/04/14
5살 어린 아들의 말하였습니다: “엄마, 내가 성탄절 선물로 제일 원하는 게 무언지 아세요?” 어머니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엄마에요. 나는 엄마를 굉장히 사랑해서, 엄마가 오래오래 살길 원해요.”
그렇게 말한 후 아이는 통통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야만 하였고, 그후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담배 중독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준 것이었습니다. 1945년 나찌로부터 해방된 루마니아는 소련이 통치하였습니다. 당연히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은 모조리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브란트 목사님 부부는 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도 잡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습니다. 먼저 1948년 목사님은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석방되지만, 석방 후에도 담대하게 지하교회를 다니며 간증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감옥의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체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되어 1959년 밀고를 받아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 6년을 복역합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선택하신 것은 고통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랑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2021/04/15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네 동생과 나누어 먹어라.”
“무슨 뜻이예요?”
“네 동생에게 큰 쪽을 주란 말이다.”
그러자 그 아들은 사과를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줘서 그 아이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나와 사과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어요.”
이 아이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사과가 아니라 큰 재산 혹은 권력을 나누는 문제라면 어른들 사이에서 역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 방지를 위해 합리적 기준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는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원하는 주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여러 번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용한 일꾼은 오후 4시에 고용되었으나,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보내어 맨 나중에 온 일꾼부터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시켰습니다. 당연히 아침에 들어와 더 많은 고생을 한 일꾼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친구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모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것이 아니냐? 네 것을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내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열심히 일하였으나 남이 먼저 승진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가질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허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나눌 때는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33).


2021/04/16
잠언12:25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민이 일지만, 좋은 말 한 마디로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새번역)
이 잠언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언어 사용을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근심 때문에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말 한 마디나, 좋은 소식 하나가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란 삶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심한 정서적 고통입니다. 근심이 마음에 들어 오면 그런 사람은 불안정한 바다와 같이 요동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을 가지게 되면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만큼 근심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반하여 좋은 말(a good word)이란 그런 근심을 만들어 내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근심이 사람을 쫓아내는 반면, 인격적이며 친절하고, 즐거우며 부드럽고, 적절하며 사려깊은 말은 사람을 회복시켜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요셉이 아직 이집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게 된 야곱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말(메시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왕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러분의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올려 놓으셔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4:6-7,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4)-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41-51절
하나님의 참된 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권한이자 의무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아들에게 가는 자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세상과 사망이 최종 권세를 잡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실 일은, 먼저 십자가에 높이 들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들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죄를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라는 말씀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심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살을 먹은 우리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한편,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로 지금 사망을 포함한 모든 불순종하는 것을 복종시키고 계십니다. 죄 문제는 이미 해결하셨고 사망이라는 최후의 원수를 철폐하셨을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35 – 40절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날 가버나움으로 당신을 찾아온 무리들에 게 썪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치신 후,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당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심으로 듣는 자들이 자신을 통한 구원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도 깨닫지 못하였고, 그 표적을 강해하는 주님의 말씀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선지자 엘리사에게 와서 나병을 고침 받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증표이었습니다. 그후 나아만 장군은 오직 주님만 섬겼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표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질 구속을 의미합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아버지께 배운 자마다 내게 오고 있으며,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빵과 밥을 먹어 육체를 살리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점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죽으나 마지막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다시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매일묵상(2021/4/5 – 4/9)

2021/4/5
시편14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바보)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6)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7절)에 가면 시편 기자의 관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1:18절 이하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조물 중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뱀, 물고기, 곤충 등-의 본을 따 만든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가 제정한 남과 여의 법칙을 무시하여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행하도록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은 온갖 죄를 범하도록 유도해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한 마디로 지적, 도덕적 자살자들입니다. 또한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은 그런 무모한 도덕적 타락까지 내려가지는 않으나 남의 행동이 그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2021/4/6
어떤 무신론자의 아들(소년)이 그 부모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를 일단 천국으로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이 창조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빛, 시간, 공간, 물, 공중의 새, 꽃, 나무와 돌 등을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살다가 예외 없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낯설고 무서운 장소에 살게 된 인간은 고민합니다. 여기서 수 많은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무신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 주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을 전제 하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 한계는 최선을 다하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이체와 그의 초인사상입니다. 불행히도 니이체는 10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의지에 반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네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메시지를 전개하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여러 사건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이 증거를 가진 사도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근거 없이 떠들지 말고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31, 새번역).


2021/4/7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이 함께 지낸적 있는 인디언 가족은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전 처음 아주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리가 아파 구두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더니 묻기를 “목사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구두 한 짝을 벗어 주게 된 과정은, 식사 도중 “누구든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으나 상식에 어긋나서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9세기말 조선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신자 몇명이 등 뒤에 X 자로 나무를 만들어 지고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결국 주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27:14, 새번역) 혹은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다.”(26:9)고 경계하여 분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분별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이 분별력을 기초로, 그리고 그 분별력을 따라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새번역).


2021/4/8
어느 여성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청바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청바지는 유명 패션 모델 지지하디드가 입은 청바지로서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있었습니다. : “너무 예쁘다! 이거 어느 회사의 것이야? 어디서 살 수 있지? 얼마야? …..” 그러나 너무 비쌌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유사한 청바지를 저렴하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년여 시장 조사 끝에 확신을 얻어 시티은행원 자리를 나와 3명이 패션 스타트업 추시(Choosy)를 만들었습니다(2018년). 그리고 60억원의 투자자금을 모집하자, 알고리즘부터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제작할 옷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옷은 고객의 실시간 피드백이 반영된 제품으로서 100달러 이하의 값으로 소량만을 주문받아 제작됩니다. 2018년 7월 서비스가 시작되자 옷마다 금방 완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정신, 창의성,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사업에 뛰어든 추시 CEO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앉아서 영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치밀하게 계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면 세상적으로 잃어버릴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10:29-31, 새번역).


2021/4/9
잠언12:2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은 다스리게 되나, 게으른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하게 되는 운명을 대조함으로서 부지런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들로서 독립성과 힘을 갖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들로서 결국 강제로 노동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손은 결국 가장 힘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독립성을 잃고 고된 일을 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맡아 부지런히 완수하여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 잠언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여로보암을 주목하여 감독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능력 있고, 부지런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떼어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이 강제노동을 경감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동조하는 10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반면 통치에 어리석고 게을렀던 르호보암은 두 지파만 거느린 약소국 유대 왕국의 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쓴 잠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잠6:6-8, 새번역). 

부활하신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10
“기독교의 역사”를 지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시기부터 약 400년까지를 초기 교회로 규정짓고, 초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며 부흥발전한 이유를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발전의 중심 축에는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그들 모두의 죄를 위해 죽고 영원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사건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복음은 듣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여자와 노예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 갖는 부활신앙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순교에 직면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소식이며, 신자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1500년 전 레위기(23:9-14)에 규정한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이라는 절기를 통해 예표하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 번째 도래하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그해에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 이삭 한 단을 제단에 드리는 제도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제 추수를 할 것임을 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초실절 보리 이삭 한 단을 드리는 바로 그 시간에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지만,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