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1 – 15절
오병이어의 표적이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돌보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만 한다 교훈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주님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명령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 – 직장, 건강, 성공, 명예, 음식 등 –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 너희 천부께서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 부엌에 채워주신다” 이 약속을 오늘 본문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즉 바쁜 삶의 일상을 잠시 버려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 멀리까지 따라와서 오랜시간 들은 2만명의 청중들에게 도시락을 공급하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동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왕으로 옹립하려는 군중들을 흩으시고 산으로 홀로 떠나가신 모습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그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일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여야만 그 속에 불의가 없습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와 환경이 되었다고 판단하시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어 시장한 2만명의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자신의 세상적인 입지를 굳히려는 유혹은 버리셨습니다. 우리 삶에 간직해야 할 모범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기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때, 보내신 분의 영광만을 구하려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매일묵상(2021/02/15 – 19)
2021/02/15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2021/02/16
6살 된 도로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형 ‘엘리자벳’을 그냥 인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란 말예요. 그녀가 만약 그냥 인형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벳은 그냥 인형이 아니예요”
물론 도로시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로시의 생각이 현실화 되는 메타버스(가상 우주)게임에서는 그 인형이 소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 우주 공간은 인간이 만든 그야말로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가 숨쉬고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규정에 합당하여야 비로서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정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시각(철학, 관점, 세계관)에서 만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토대로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나가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들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아니면 모르겠다 등의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생각과 틀리게 되면 어린 도로시의 생각과 같게 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이성은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형은 인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성숙한 이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22, 새번역).
2021/02/17
여섯 살 된 소년이 부모와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식사 도중에 아이가 여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사님, 요리가 맛이 없어요 정말 요리할 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잘못 이해한다면 위의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게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지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발명한 문자와 문학 그리고 상식 역사 철학 등이 도구가 되어 기록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학작품이요 역사책이고 철학(신학)책입니다. 시편이 그렇고 잠언이 그러하며, 욥기, 에스더, 신명기, 요한복음, 로마서, 사도행전 등이 그러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런 성경들을 쓰거나 이해할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주님은 하나님 사랑괴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사는 그런 삶이 번제와 제물보다 더 낫다고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고백과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면 나는 빠른 시일 안에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19-20).
2021/02/18
미하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관이 허름한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가자, 식당을 본 알렉스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누추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렉스는 자기가 식사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당신께서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바깥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흉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언제나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안을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극작가 도로시 세이어즈(1893-1957)는, “… 지적이고 호소력을 지닌 배우가 대사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극작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배우가 난해한 해석을 적절하게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다.”(창조자의 정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소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온갖 모험, 스릴, 고난, 기쁨, 슬픔, 고통, 두려움, 삶과 죽음 등이 존재합니다. 자유의지가 등장 인물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각자는 반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러 난관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지만,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욥의 모든 역경을 돌이켜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삶의 여러 부분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2:20, 새번역).
2021/02/19
잠언12장 18절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새번역)
잠언은 사려깊은 언어 사용을 격려합니다. 그 방법은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이 주는 정신적 상처를 비수에 찔린 치명적인 육체의 상처와 대비시키거나, 혹은 사려깊은 말이 미치는 좋은 영향을 육신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이나 혹은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잠언에서 바보들이나 하는 반응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한편, ‘비수(검)’는 죽이기 위하여 고안된 전투 무기로서 의도적이고 무정한 살인자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말(혀)은 치료제입니다. 이 비유는 해로운 갈등들을 풀어서 화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존 빌립 목사님은 차를 몰고 2틀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친구 부인이 암으로 임종 직전에 있었고,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죽음이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친구를 만나 고린도전서3:21-23을 펴서 “메리가 죽어가고 있으나 그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말하여주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인 동시에 선물의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메리에게 죽음은 고통을 잠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좋은 ‘약’이 있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너무나 좋은 위치에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4:29, 새번역).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1-15절
80억 명의 지혜를 다 모아도 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벼는 땅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만 있으면 놀랍게도 맛있는 쌀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아무리 땅에 서 있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쐬도 쌀은 커녕 오히려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을 뿐이니 아무 의식도 없는 벼는 이미 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란 늘 하나님께서 식물이나 물고기들이나 포도나무 등을 통해 공급해주시던 밀, 보리, 물고기, 포도, 무화과 등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나 당신의 아들을 통해 직접 만들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이 늘 베플어졌다면, 사람들은 의례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희소성 그것이 기적의 요체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의례 내려오는 만나 무엇이 그렇게 신기해! 그래서 만나에 질렸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며 오이도 호박도 부추 마늘도 없이 만나만 있는 우리는 너무나 불쌍하다고 울었습니다. 주님 역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오직 두 번만 행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죽고 부활하신 뒤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섭리 가운데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들 역시 신자들만 알도록 암암리에 베풀고 계십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 오병이어를 통해 갈비나 불고기로 만들어 주지 않으신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노동을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힘든 노동이야말로 교만한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삶의 본질적인 요소인 ‘불안’을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고 함께 노동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서 온전한 제사장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것을 주님께 드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실천되도록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6장 1-15절
사도 요한은 유월절을 다시 언급하면서 요한복음 전체가 나아가는 구성 즉 플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왕으로 좌정하시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당신을 믿는 백성들을 하나 하나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구원하시는 구속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구속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에 모인 이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저녁 그리고 빈들에 가진 것은 보리 떡 5개와 생선 두 마리!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를 아시고도 주님은 제자들이 먼저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소망은 우리가 만들어 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으로 만약 우리의 힘이 다하면 그때 주님은 그 능력의 손을 펼치사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시기 위해 천지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창조하신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2/08 – 10)
2021/02/08
시편 7편
“주님께서는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8절, 새번역)
이 시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시입니다. 시편 기자의 적들은 사자 같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피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법정에 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악행을 한 피고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놓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재판장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사상은 시편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가슴이 철렁하는 경악감 대신 신뢰와 위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가볍게 그리고 경솔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판관 포청천 앞에 선 원고나 피고 모두 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34, 현대인의 성경).
2021/02/09
미하이가 어렸을 때 늘 중간에 자면서도 철야기도회에 따라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종종 한 말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가서 사는 게 어때요? 교회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야 해요.”
미하이는 정말 교회가 놀이터인 양 행동했으며, 어느 주일 예배 때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 오자 미하이를 징계하기로 한 뒤 엄히 물었습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이라서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빠는 내가 설교를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어요.”
“좋다. 그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아빠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열심히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해요.” 목사님은 더 이상 야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하여 5천만원을 받았다고 수사를 받던 한 정치인은 당과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아파트 17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여비서가 성추행 당하였다고 고소하려고 하자 그 날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서울시장도 생각납니다. 이분들에게 세상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가 탄로나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올 심판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용서의 근거를 만드시고 또 한편으로는 심판할 준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눅 24:45, 현대인의 성경).
2021/02/10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1)
요한복음 6장 1-15절
주님이 주 대상으로 한 갈릴리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땅을 갈거나, 아니면 생존비를 받고 남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로서 음식과 생계수단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들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이것은 남쪽 유대 지역에서 주님이 만난 청중들과 대조되는 면으로, 유대의 청중들은 좀 더 신학적인면, 즉 성경의 예언의 성취, 율법과 주님의 가르침에 포함된 신학적인 내포점들과 싸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모여든 갈릴리 청중들의 수준은 아무래도 유대청중들에 비해 현실적이었고 비신학적이었기 때문에, 표적들을 보고 몰려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서, 사도요한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여 불쌍히 여기사, 먼저 그들을 영접하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며 (마태, 마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눅),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 막, 눅). 그리고 저녁이 되자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들이 주리지 않도록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사 남자만 오천명을 먹여주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시다가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사랑합니다.
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모세의 증거(5)
요한복음 5:45-47
AD 29년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유대인들과 변론하셨습니다. 이미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율법에서 금지한 치료 행위를 하였다고 고소하였고, 이에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인 자신도 일한다고 변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모든 죽은 자를 부활하게 하셔서 심판하실 권세도 주셨으며, 그 증거로 다섯 가지를 드셨습니다. 침례요한의 증거, 표적을 행하시는 증거, 아버지의 증거, 성경의 증거, 모세의 글을 통한 증거입니다. 오늘은 모세의 글 중 출애굽기 3장과 4장에 걸쳐 나오는 ‘천사 야훼’-야훼의 사자 -가 애굽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가라는 소명을 모세엑 주면서, 당신 자신이 야훼요, 하나님임을 밝힌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천사 야훼’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천사가 하나님일 수는 없기 때문에 이미 그분은 선재하사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와는 구분되나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에서 ‘천사야훼’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서 계셨습니다. 이분이 때가 차매 인간이 되어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신 뒤 부활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 장막절에 성전 앞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처음부터 너희들에게 말하여 온 자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이 영생의 본질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죽지만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1/25-29)
2021/01/29
잠언12: 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새번역)
12장의 두 번째 단락은 말(16-23)과 행위(24-27)가 맺는 열매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면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5절은 서론입니다. 본절은 ‘지혜로운 사람”와 “어리석은 사람”을 권위가 있는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정의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의 대표가 잘 고치는 의사입니다. 이분들이 건강에 관한 준 충고와 처방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이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도 같습니다. 사랑과 진실함을 늘 베풀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잠언의 거듭된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면 건강을 잃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영혼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어리석은 자의 경우 거만하여 충고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바보들, 특히 거만한 바보는 자신의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합니다만 실상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 자신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사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이 반면 지혜자는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사람의 충고를 귀 담아 듣고 자신의 길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근력이 다져지며, 인자와 진리는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은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를 받으려고 전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4:21, 새번역)
2021/01/28
어떤 소년이 “하나님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8살쯤 된 그리스도인 소년이 말하였습니다.
“아냐, 할 수 있어. 하나님도 한때는 너와 나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년이었어. 그분들이 그에게 매일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쳤어, 만일 예수님이 어떤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악한 부모들이 그에게 욕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술마시는 걸 가르쳤을거야.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어.”
이 아이는 자신도 모르면서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을 선한 길로 가르쳤을 것이고, 어린 소년이었을 때 우리 주님 역시 겸손하게 배우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강보에 싸여 무력하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시간과 공간과 만유를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고’(히1:3)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이것이 우리 지식과 논리의 한계입니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여름에 피서하는 열하에 가서 생전보지도 듣지도 못한 짐승들 – 코끼리(?). -을 보고 “어떻게 이런 동물들이 있었을까?”는 감탄을 발하였습니다. 세상 일도 이런대 하물며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서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새번역)
2021/01/27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일곱 살의 알렉스가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설명입니다.
“경기를 하는 동안엔 우리편이 지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몇 초 동안에 경기가 반전되어 우리편이 이길 수도 있어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예요. 성 금요일엔 하나님이 완전히 진 것 같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태를 반전시켜, 부활 주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마귀의 골 문에 공을 던져 넣은 거예요. 결국 경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이 승자였어요.”
어린 알렉스의 훌륭한 비유입니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모든 인간사의 마지막 말이요, 절망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진실로 사망은 끝판왕입니다. 죽은 자를 누가 기억합니까? 전도서 기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2:16)라고 쓰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사실과, 죽은 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우리 몸이 죽는 원인은 아담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받는 심판은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범한 죄들입니다. 아담을 핑계로 둘러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함이요,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 선고된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문제로 너무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021/01/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는 요나가 어떻게 해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왔나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 손녀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제법 자신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어. 그 말은 그가 상당히 똑똑했다는 뜻이야. 그는 배에 탔을 때, 배들이 종종 가라앉는다는 것과, 그러니까 자기도 어쩌면 고기에게 잡혀 먹힐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안전을 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머니에 빨간 고추를 넣고 탔지. 그가 고기의 코에다 고추를 밀어넣으니까, 고기가 기침을 하게 되는 바람에 그가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어린이의 말이지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나의 구출 사건은 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실 예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만을 바라고 실생활에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아멜리의 빨간 고추만큼이나 우스꽝스럽습니다. 실로 이런 태도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면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순종하고 완악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선지자적인 선포를 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그만 폭풍우를 만나 결국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죄인 요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물고기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 풍랑이 몰아치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늘 돕는 분이시다”는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가 체험한 기적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지말고, 요나 사건의 가르침을 섭리 가운데 배우려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시다.”(시46:1, 현대인의 성경).”
2021/01/25
시편 5편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5:12, 새번역)
이 시는 구원을 위하여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3절을 보면 이 시는 아침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다윗의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5장은 구원에 대한 간구로 시작하여(1-3),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선포합니다 (4절). 그리고 그 성품을 기준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5-6, 9-10)과 의인들이 가지는 소망 (7-8, 11-12)을 노래합니다. 결론으로 주님께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을 복주시고 방패와 같이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확신합니다(12). 이와 같이 시편 5편은 하나님의 왕되심과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3천년 전 다윗 왕의 시대나 첨단기술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통치하십니다. 구글의 초창기 야후에게 기업 인수를 요청하였지만, 야후는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구글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야후는 몰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후 영원한 나라로 대체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로 악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두려움을 주지만, 또한 정직한 삶에서 만나는 큰 문제에 산성과 같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늘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명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시46:1, 새번역).
매일묵상(2021/01/18-22)
2021/01/22
잠언12: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개역개정)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새번역).
14절은 1-12절의 결론적으로 말과 행위의 결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님의 섭리 하에 놓여 있습니다. 나무가 생산하는 품질좋은 농산물과 같이, 선한 가르침, 화평으로 이끄는 지도력, 경건한 권고, 위로를 주는 격려 등은 사람의 기본적인 인격을 드러내며, 자연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고,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람’은 의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배(belly,위장)는 좋은 것들로 넉넉하게 채워지게 되고 삶은 윤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품성은 좋은 열매를 생산해내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때 그런 선함은 돌아와 그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손이 행하는’이란 말은 윤리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나타내며, “복록=복되고 영화로운 삶”이란 호의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14절은 언행일치, 즉 의인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어긋남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죠! 책임을 지려고 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는다”는 표현은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는 분리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합을 만들어 내는 분은 다름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가장 초라한 행위도 마지막 날에 풍성하고도 영원히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12:14절의 진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새번역)
2021/01/21
기독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반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들 중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느냐?” 몇 학생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 교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너희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죄인들로 태어난 거야”
이 문제에 대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우리는 죄를 지으며 태어나진 않지만 죄인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들을 통해 이 은혜가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전해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 독특한 기독교의 인간관이 담겨 있으며, 기독교에 반발하는 인문학조차 현실 세계에서 소설과 역사 그리고 철학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모태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지으셨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어진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한 번이라도 범하면, 그는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2021/01/20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부님이 개비라는 네 살된 어린 한 소녀와 마주쳤습니다. 신부님이 입맞추고 축복받으라는 의미로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오히려 “내가 왜 십자가에 입을 맞춰야 하죠? 십자가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신부님이예요?” 하면서 신부님의 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탄식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에는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울부짖는 소리에는 귀가 먼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선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녀의 행위는 옳은 것이다.”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 맹손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진서파는 어미 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 오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생각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이를 안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하였다가 3개월 후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아들을 맡겼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부의 질문에 맹손은 “새끼 사슴을 불쌍히 여길 정도라면 사람의 자식은 얼마나 귀히 다루겠는가? 내 아들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한비자). 사람의 됨됨이는 사랑의 열매로 파악하나, 됨됨이는 생각에 의해, 생각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복음은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5-6).
2021/01/21
무신론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논리를 고수하자니 도대체 삼라만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러시아에서 한 선생님이 진화론을 가르치자, 한 아이의 대답입니다. “선생님, 이런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악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악한 건 고릴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그건 사실일 리가 없어요. 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즐겁게 놀고 있었고 땅콩을 던져주면 고맙다는 표시를 해요. 나는 잔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원숭이들처럼 행복한 동물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공통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잔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만, 공산주의 이념을 떠나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히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독일민족이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복음전도의 한계도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과 법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음에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간직한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할 준비를 하고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선한 일을 헐뜯고 욕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벧전3:15-16, 현대인의성경).
2021/01/22
시편 3장 4절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새번역)
시편 3장은 표제가 달린 첫 번째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유대 지파를 제외하고는 전 이스라엘 지파가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대적자들은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고,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2절). 문제는 다윗이나 대적자들이나 모두 여호와에 대한 같은 신앙과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구의 판단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원리는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축복을”이라는 도식입니다. 이를 근거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재앙은 그의 불의와 죄악을 증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예외도 있음을 믿고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주장의 대립 및 전개가 욥기의 주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다윗도 같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수 많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이번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이 오기까지 자신의 믿음이 옳바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구원을 부르짖고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8절). 사무엘상의 기록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구원은 언제나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입니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3:5, 새번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