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1/11 – 15)

2021/1/15
잠언12장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개역개정)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새번역)

13절은 14절(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과 함께 언어와 행위의 결과를 나타내면서 12장 첫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의 언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13절), 의인의 언어는 좋은 것들로 그를 채우게 됩니다(14절).
13절은 무죄한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죄악된 말 때문에 악인 자신이 덫에 걸리게 됨으로, 언어 사용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즉, 모함이라는 ‘그물’은 악인 자신이 설치한 것이지만, 결국 말하고 있는 자신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의로운 다니엘을 모함한 페르샤 제국 신하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에스더서입니다. 하만에게 모함 당한 의로운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죽을 운명에 놓여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결국 섭리 가운데 거꾸로 하만과 그 일족은 멸망하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구출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을 경우 입술로 죄를 범하기 쉬우니, 기도하고 심중에 말하며 잠잠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6-17, 새번역).


2021/1/14
어떤 가족이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가족의 어린 아들은 새 집에 감탄하여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집 너무 멋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상속을 받을 때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가 드디어는 이 아이와 같은 탄성을 질러댈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세상을 우리는 약속받았고, 그 보증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엡1:1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약속의 충분한 성취를 기다리기 때문에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진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있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법적인 신분은 죄인으로부터 약속의 자녀들이요 도래할 유업의 상속자들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새집에 부모님을 따라 들어간 아이처럼, 우리가 이 사실에 너무나 감격하여 상속자처럼 살아가는가의 여부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 – 돈, 명예, 권력, 지식, 지위 등 -은 이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것들은 순리대로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청지기의 지위에서 생각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부요하게 만들 줄 알아야만 합니다. 청지기의 직분을 잘하면 주님의 축복을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모두 받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1/13
과거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 침례교인 피터즈는 비밀리에 인쇄된 성경을 옳기다가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슬피 울자 그의 네 살된 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천국은 아주 더럽고 나쁜 곳이에요?”

“너는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니?”

“엄마 아빠는 늘 나에게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아빠가 천국에 갔는데 왜 엄마가 자꾸 우시는지 모르겠어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어는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옳겨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는 더 좋은 나라가 올 때까지 평안히 주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 손녀 아멜리는 여덟 살 때 많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뒤 사도 바울의 안녕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멜리 왈.

“바울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내곤 했는데, ‘우리’란 말 속엔 다른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게 아니예요? 성경에는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어린아이다운 생각이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도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사는데는 남 못지 않지만 과연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와 가족을 위해, 곤란에 빠진 친지와 성도들을 위해,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심판 때 주님은 우리의 변명에 “왜 기도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으실 것이 뻔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2021/1/12
최근 경기도 7급 공무원 채용시험 한 합격생이 인터넷에 올린 저속한 글과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철저히 조사해서 필요할 경우 합격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 대전광역시 9급 공무원 합격생 중 한 명은 품행문제로 직접 고발까지 당하여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실은 있으나 그 내용대로 행한 적은 없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KBS 열린토론에 나온 한 토론자는 자신이 낸 세금이 그런 분들에게 사용될 수는 없다고 하고, 어떤 청취자는 사기업에서조차 채용될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문제되는 두 분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자신들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였습니다. 그저 안정되고 보수도 괜찮고, 연금이 보장된 직장으로만 접근하였지, ‘봉사’라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오직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권리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인격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사랑의 열매’가 있는지 반추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마7:24, 새번역).


2021/1/11
시편4장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4장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다윗의 심정을 토로 한 것입니다. 오늘은 ‘실용적 신앙의 유혹’을 다루는 6절을 묵상하겠습니다.

신앙의 실용주의라 함은 믿음을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누릴 혜택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실용적인 믿음이 불러오는 교묘한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신앙의 핵심에는 “개인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나 예배의 목적은 현실의 이익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내게 그 점을 보여주어라!” 실용주의 신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종교나 설교 등을 찾아 쇼핑하게 됩니다. 다윗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의 종식과 풍부한 소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만 해결되면 거짓 신들에게라도 달려가 안도감을 가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봉자들은 바알이 이 가뭄에 비를 내려 풍부한 농업의 산출물들을 줄 권능이 있으니, 바알에게 제물을 드려 어려움을 빠져나가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과 여러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순전한 믿음‘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있습니다. 욥이 그 대표로서, 극한 절망 중에서도조차 주님을 굳게 붙잡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것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인생성공방정식(지혜)


잠언 3: 18 – 20절
재물과 지혜 중 지혜는 더 탁월한데, 이는 지혜는 그 가진 자에게 생명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지혜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상징합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영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도구는 바로 이 지혜입니다. 땅, 하늘, 그리고 바다는 이 지혜의 산물로서 모든 생물이 깃들어 살 수 있게 지어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사랑이 달성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질서를 천지창조에 빌트인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은 물론,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살아계심과 만민의 심판자로 세우신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에 누구든지 당신의 아들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성공방정식입니다

인생성공방정식(지혜)


잠언 3:13-26절
재물과 지혜 중 어느 것이 나은가 하는 문제에서 오늘 본문은 단연코 지혜가 우월하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재물을 얻을지라도 지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은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나 재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장수와 고귀한 삶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같으며, 평안도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재물만 가지고는 목숨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가지면, 사람들 사이에 화평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따라서 교제와 평안이 있으며, 슬기로운 분이라는 명성이 확립됩니다. 이에 따라 재물이 따라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이익은 정금 보다 낫다고 잠언은 밝히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혜는 그 가진 자에게 생명나무입니다. 이는 지혜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상징합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영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도구는 바로 이 지혜입니다. 땅, 하늘, 그리고 바다는 이 지혜의 산물로서 모든 생물이 깃들어 살 수 있게 지어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사랑이 달성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질서를 천지창조에 빌트인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은 이런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원 뜻이 실현되도록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기려 주님 오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해가야만 합니다.

매일묵상(2021/1/4-8)

2021/1/8

잠언12: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개역개정)
“악당들의 견고한 망대는 무너져도 착한 사람은 뿌리를 내린다.”(공동번역)

10절과 11절에서 재물이나 경제적 번영은 현실적인 노동과 일(10-11a)을 통해 얻어져야 하지, 허망한 꿈을 쫓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적은 잠언 기자는 12절에 이르러 경제적 이득에 관한 분별력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다른 악인들이 사람들을 착취하여 획득한 망대나 불의한 이득을 가지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것을 탐을 내지만 사실상 그 망대는 신뢰할 수 없는 방어막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부자는 재산이 요새가 되고, 높은 성벽이 되려니 생각한다.”(18:11, 공동번역)라고 설파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악인의 삶은 덧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인들은 자신들의 인격에 뿌리내려져 결실한 정당하고도 신뢰할 만한 망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망루의 결정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18:10, 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대기근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물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안전하게 구출된 것은 물론 많은 은금을 얻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부지런히 가축을 길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일을 망치는 자와 형제간이다”(잠18:9, 새번역).


2021/1/7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을 때 어머니들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처럼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고함 지르진 않으실 거예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힘 없는 아이들이 경히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특히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양에서 농노의 지위가 향상되고 급기야 해방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던 것입니다. 지금 계속하여 인구가 감소하여 50만명에 턱걸이 하고 있는 포항시는 51만명 회복에 전 행정력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위상추락은 물론 50만을 기점으로 엄청난 행정상의 지원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구감소는 많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충북 제천시에서는 3 번째 자녀를 낳은 순간 4천5백만원에 해당하는 은행 빚을 시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한 명의 아이가 절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장 귀한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면서 양육하여 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은 교정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 현대인의 성경).


2021/1/6
범브란트 목사님의 부부는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친척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고, 그분들의 가족과 친척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죄로 나치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때,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는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기도하자 미하이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죽일까요?” 이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습니다.“어쩌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나요?” “경찰이 와서 우리를 차에 태워 데려갈 것이다.” 목사님이 설명하였습니다. 미하이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좋아했습니다.“그럼 그들이 우리를 차에 오래 태워 줄까요?” “그래 주겠지,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선 총으로 우리를 쏘아 죽이겠지.”미하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조금 죽이고 나면, 우리는 후에 많이 부활할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 가겠죠. 경찰은 하늘까지 올라 오는 사다리를 모르니까 그곳까지 우리를 따라오진 못할 거예요.”

어린 미하이의 말 속에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일부를 그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모여든 수만명의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시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분”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과 심판에 대한 믿음은 나찌의 공포 속에서 사는 어린 아이에게조차 위안과 담대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점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2021/1/5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대지도층의 시기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17-18). 이 대목을 배운 열두 살된 어떤 남자아이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의사들이 예수님을 시기했어요. 예수님이 공짜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 아버지는 파산하고 말거예요.”

이 아이는 어리지만 선악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악판단 능력이 올바른 판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 전에 복잡한 세상사를 이해할 능력 즉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분야에서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어도, 마구잡이로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믿고 오는 사람들만을 고쳐주셨고,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불치병들을 많이 고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죽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칭 기적의 한계입니다. 기적은 죄 때문에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뒤 이은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는 아이들과 같이 지혜에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히5:13-14).


2021/1/4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36:6-8).

야곱은 밧단아람으로부터 수 십년만에 아버지 이삭이 계신 헤브론으로 돌아가서는 에서와 함께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는 가나안 땅 남서쪽 세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애증의 관계를 맺고 수 천년 동안 이웃에서 살아갔으며 로마에 함께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에돔의 도시 데만 사람들은 지혜로 유명하였습니다(예레미야 49:7). 그러므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에서는 야곱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의 존부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에서의 후손은 믿음에서 떠나 ‘코스’로 추정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언약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창37:1).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습니다. 외형적인 삶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는 생명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삶, 즉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마음에는 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시63:3, 새번역)


인생성공방정식- 신뢰


잠언 3:1-12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누구나 성공하고 존경받으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고 많은 괴로움을 겪고 살다가 생명이 끝나는 시점에 심한 후회를 하고 떠나고 맙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성공이고,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바구니에는 가정, 건강, 일, 재물, 부모형제들 및 친구들과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가정은 한 번 깨지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일과 재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곧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나 친구들과의 관계도 깨지면 회복이 매우 어려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인생은 물론 영혼까지 잃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성공방정식을 다루고 있는 잠언 3장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최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핵심 키워드는 “신뢰하라, 경외하라, 공경하라”의 세 명령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건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불가피함을 우리는 인정하고 주님께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징계는 다 우리를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요, 이후에야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3장 1-12절

1. 서론 (1-4) –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라

2. 본론 (5-10) – 주님에 대한 관계

  (1) 신뢰하라(Trust)

  (2) 경외하라(Fear)

  (3) 공경하라(Honor)

3. 결론 (11-12)

     주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 지혜를 얻어라

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모세의 증거(4)


요한복음 5장 45-47절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모세의 증거(3)

요한복음 5장 45-47절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묵상

2020/12/14
침례교 가정의 여섯 살 된 아이가 특별히 추운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그 아이는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  ‘성삼위 일체’ 대신 ‘성사위 일체 우리 주로다’라고 노래 하였습니다. 당연히 지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받을 때 네 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어요. 목사님이 나를 물 속에서 넣으시고 ‘성부,,,브루루…성자….브루루….성신…브루루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셨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에는 침례당이 없어서 겨울에 침례를 받게 되면 얼음을 뚫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날 역시 추웠기 때문에 목사님이 떠는 소리인 ‘브루루’가 아이에게는 삼 위 중 네 번째 분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침례는 구약에는 없으며, 신구약 중간기(비시400 – AD30)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와 함께 사용된 의식입니다. 즉 할례받은 이방인들이 물속에서 올라오면 완전한 유대교인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AD28 년에 이르러 침례요한은 이 의식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 가운에 오신 메시야를 준비하는 의식로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교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침례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고(롬6:3-5), 이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벧전3: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2020/12/15
다섯 살 적에 아들 미하이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살구나무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살구씨를 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을 주면 때가 되면 살구나무가 자라 나온단다.” 이를 들은 미하이는 흥분해서 자기 동생을 부른 다음, 둘이서 목사님이 가르쳐준대로 하였습니다. 먼저 땅에 보물을 묻은 다음 그 보물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했나 알아보려고 즉시 땅을 파고는 굉장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 핵심은 “절대로 너희들이 생각나는대로 하면 안 되고 꼭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여야만 된단다.” 는 말입니다. 그때 “왜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할 말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단다!” 이것이 고도로 지식이 발달하였다고 자랑하는 인류가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의 3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피조된 인간은 인간 마음대로 하면 절대로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다름 없습니다. 인간은 대상을 연구하여 그 속에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과학과 같이 신앙 역시 비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 맺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2020/12/16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쟁을 명령하셨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미하이는 “이건 아마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일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없이 구약성경을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미하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2세기 초엽 말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흑해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선박 건조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AD 140년 경 로마의 공동체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제공하였지만,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전파한 교리는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구분한 뒤,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신약의 신이 예수로 나타나셨다 등등의 내용입니다. 서머나 감독 순교자 폴리캅은 그를 만나 대화한 뒤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하였을 정도로 복음은 물론 사도바울을 심각하게 오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이단들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지금 있는 이단들 역시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어떤 이단의 반복일 뿐입니다. 말시온의 파문 사건 이후 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2020/12/17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알렉스에게 욥기 33장 26절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 드리죠. 그러면 그분이 내게 기도하고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분은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기도를 더 잘하십니다.” 라고 자기나름대로 풀어서 말하였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祈禱)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으로 정의하며, 대체로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어린 알렉스의 말은 옳지 않지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라면 틀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상급으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020/12/18
잠언 12장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Better to be lowly and have a servant
than to play the great man and lack bread.

Proverbs 12:9

일반적인 가르침인 8절(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을 특정한 상황에 적용한 것이 9절입니다. 내용은 비록 사회적인 명성이나 평가는 보잘 것이 없지만, 자신의 사정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는 부요하고 명성을 가진 것처럼 행세를 하나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의 가난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이 잠언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18:12)” 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할 잠언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상 인간은 재물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이런 극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벧전5:6-7, 쉬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