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모세의 증거(2)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2020/12/11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주일학교 헌금으로 일 파운드짜리 동전과 십 펜스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참고로 1파운드는 100펜스로서 약 1,500원정도함).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면 그에 적당한 이자를 지급합니다.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의 회사채를 사면 금융기관보다는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기관보다는 위험합니다. 또한 KB 금융 등의 주식에 투자하면 시가의 약 5% 배당을 받을 수 있으나, 주가의 등락 때문에 원금 보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투자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안전합니다. 물론 그 이익은 금전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것 역시 성도의 본분 중 하나이기에, 이분들은 믿음의 큰 담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2020/12/10
어린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네 사람의 머리가 비행기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을 그렸구나.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것은 비행사인 폰티어스예요(Pontius, the pilot)!” 그 어린 학생이 ‘폰티어스’라고 한 것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영어로 Pontius Pilate 라 표기하고 ‘폰티어스 파일러트’로 읽습니다. 이 발음은 비행기 조종사인 ‘pilot 파일러트’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여 아이는 빌라도 총독을 비행기 조종사로 오인하고 그린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을 배운 한 아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젤리 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어 번역이 ‘daily bread’이나 그것을 ‘jelly bread’로 듣고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29:4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묻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되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네가 왜 나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느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7).


2020/12/09
일곱 살난 아멜리가 어느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개에게 세례를 주길 부탁하였습니다.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신 고 김준엽 총장(1920-2011)이 그분의 책 ‘장정’에서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부친은 사냥을 돕는 개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매우 개를 사랑하셔서 개가 부친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를 안 개 역시 먹기를 거절하여 끝내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나 주인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한편 개의 충직성과 영물성을 체험한 김총장님은 일생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부활할리는 없지만, 아멜리의 개는 부활을 하여도 주인인 아멜리가 없다면 부활한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없는 나라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가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휘황찬란하여도 살 곳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움도 행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시84:10-11, 새번역).


2020/12/08

어느 날 손녀 아멜리가 비난조로 할아버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진 창문들(windows)에게 절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적혀 있던?”

아멜리는 재빨리 “과부들(widows)을 공경하라”는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어로 창문과 과부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영어는 매우 흡사한 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는 ‘창문’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단지 ‘n’ 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과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와 경험 때문에 실수로 ‘n’이 빠져서 인쇄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 철자를 보충하여 과부를 창문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아멜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명령이 전혀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멜리가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복종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하고 적용한 성경은 전혀 성경의 취지와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어른이면 다 알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는 교리는 물론 의식의 해석 적용에 관하여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교회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상관관계를 망각하고 안식일 규정을 해석적용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은 성령께서 후일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만, 지혜에는 어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25, 새번역)


2020/12/11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2:1-3


위 3개의 절은 잠언 12장의 도입부분으로, 서로 대비되는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도덕적, 신학적 교훈을 주고자 의도되었습니다. 1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성품, 2절은 도덕적 질서를 수호하시는 행위자로서의 주님, 3절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영원한 운명을 말합니다. 결국 2절의 주님(여호와)은 모든 삶과 심판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보전은 주님의 긍정을 받기 때문에, 악인의 소멸은 주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가 악한 제사장들이었기에 아버지 엘리가 훈계하였지만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그 증거로 두 아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20년이 지난 뒤 집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블레셋과 치룬 아벡의 전투에서 두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솔로몬의 등극시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에서 파직을 당함으로 심판은 끝났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보전되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모세의 증거(1)

AD 29년 어느 명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고 구약성경(모세율법)을 해석하면서 1400동안 살아온 유대인들과 변론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성경이 주어진 참 목적을 오해하고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고자 잘못 믿고 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구약성경(모세율법)을 보는 전제는 그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로마제국을 쳐부술 왕과 장군으로서의 능력 때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죄를 대속함과 같은 개념은 불필요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성경(모세율법)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전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전제와 해석 때문에 이단에 빠지고, 주님 앞에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 보다도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하나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깨우치사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020/12/04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그 당시 헬라어는 구두점이나 쉽표 등의 문장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죽 나열되었으며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분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루마니아어를 포함하여 어떤 나라의 언어도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9: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루마니아 아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방문하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난 아파요. 하지만 거의 아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자기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잘못된 이해가 이 아이의 믿음에 결정적인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에서 참됨과 사랑이 싹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3:16-17).


2020/12/03
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11-2004)의 부모님은 깊은 신앙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조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어린 로널드의 부모님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에 성경을 한 절씩 암송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너도 꼭 하나를 외워야 한다.” 로널드는 불과 네 살이어서, 어머니는 쉬운 구절을 하나 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이제 로널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위해 열 명의 아이들이 앉았습니다. 암송할 차례가 오자 첫번째 아이가 “예수께서 우셨다”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자 할아버지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된 로널드는 “예수께서 우신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웃었고, 할아버지는 성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로널드는 “그분은 지금 울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린이들이 그분이 오래 전에 우셨다는 것밖엔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아주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슬퍼하셨습니다(창6:6-7). 결국 그들은 홍수로 전멸 당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죄악, 연약한 믿음, 완악함 등의 사유로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020/12/02
네 살된 어린아이가 미국 백화점에 갔다가 받은 비스킷에는 미국 지도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걸 보니 무엇이 생각나니?”

“날씨요”

그 비스킷은 아이에게 저녁 뉴스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미국의 모양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벨은 하나님 앞에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질투를 받아 결국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의인이요 억울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을 받지 못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을 받은 것을 보자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동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바 뿌린 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과연 지인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아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2020/12/0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양복이 딱 한 벌 있었습니다.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 너덜거리게 되어,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하나 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정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3:11)

이 말씀은 AD28년 경 유대 광야에서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하고 자복한 뒤,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에 대하여 대답한 말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구절을 듣자 당시 네 살이던 미하이가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 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 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의 말을 따랐습니다. 미하이가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 그런 해석과 적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브란트 목사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늘 돌보아주셔서 헐벗지 않았다는 간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2020/11/30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聖人)들이시란다.”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소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게 하는 소녀가 된다는 뜻이예요”

이 어린 소녀의 영적 통찰력은 놀랍습니다. 특히 성인들 중 슬픈 전기나 그들의 생애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내린 성인에 대한 정의가 진실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나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분이 사도 마태입니다. 이분은 당시 민족반역자이자 탐욕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직업을 가져서, 매우 경멸당하였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감하게 과거를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린 슬픈 기록이 있기는 하나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그분의 증인으로 일생을 사도로서 헌신한 뒤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하셨다고 로마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이 어둡고 슬픈 과거가 있는 죄인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신앙의 목적(2)

요한복음 5장 41-44
구약 성경이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학도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한 이유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 상호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지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모습은 결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였고,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동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그리스도로서 영접하기를 거절한 이들에게 그들의 욕망 즉, 로마로부터의 독립 등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랍비 아키바가 바르코흐바를 다윗의 별로 지칭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제3차 유대 로마 간의 전쟁입니다(AD132).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추방되어 2천년 동안 유대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참된 메시야 예수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미혹하게 하는 힘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그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2020/11/27
누군가가 어린 아멜리에게 수수께끼를 물었습니다. “강가에 서 있는 어떤 남자에게 늑대와 양과 양배추가 있는데, 그는 그것들을 배에 실어 강 건너편으로 가져가야만 한다. 단, 그의 배에는 한 번에 한 가지만 싣고 갈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셋을 다 강 건너편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뽀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늑대를 먼저 싣고 가면 양이 양배추를 먹어버릴 것이고, 양배추를 먼저 싣고 가면 늑대가 양을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을 먼저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건너갈 때 그는 양배추나 늑대를 가져가야 할 텐데, 어떤 것을 먼저 가져가든 둘 중 하나는 강 건너편에서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중 몇 명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아멜라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전도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늑대와 양이 친구가 될 것이고, 양배추도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니까요”(롬14:17 참조).

아멜라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소녀는 그런 전제하에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어른들은 좀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난제 중의 난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주님 손에 맡기고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2020/11/26
60대 초반의 어느 분은 부인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습니다. 결혼 생활 3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사업에 충실하다가 가정과 부인을 소홀히 한 때문입니다. 이러면 비록 직장과 사업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일생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중 하나는 각 인생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발달 심리학자 에릭슨은 생애주기를 7단계(또는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발달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영아기의 발달 과업은 돌보아주는 사람에 대힌 신뢰와 애정의 형성입니다.
  • 유아기는 식사 수면 배변 등의 기본 생활 습관 형성하기
  • 아동기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기본적 기능을 익히고, 도덕성의 기초를 형성하기
  •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 신체적, 지적, 도덕적 발달을 이루어 성인 준비하기
  • 초기성년기(21-34)는 인생모습이 결정되는 때로서,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아정체성이 사회에까지 뻗어 나가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여 본격적인 사회생활 시작하기
  • 성년기(35-60)는 정립된 자아정체성을 기초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
  • 노년기(60-)는 건강관리와 은퇴에 적응하기- 신체적 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 죽음을 준비

부활하신 주님 없는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 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아니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초월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금생과 내생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훌륭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2020/11/25
러시아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친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다 무신론을 가르치는 기숙 학교에 넣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인형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되는 때에 ‘기도회 놀이’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형의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인형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선생님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게 다른 인형을 주실 수 없어요? 이 인형은 너무 바보같아요.”

“왜 그런말을 하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사람은 바보임에 틀림없으니까요”

그 아이의 말은 공산주의자인 선생에게 믿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 일화에서도 그 어려운 구 소련의 환경에서 주님을 가르치는 부모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신앙유산을 물려주려는 결단을 내리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삶은 신실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가정에서 아이들을 강제로 차출하는 소련 당국의 처사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입니다만, 하나님은 이 시련을 통하여 오히려 아이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시고 당신의 존재를 전하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특히 주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17살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렇게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단 1:8-17).


2020/11/24
열여섯 살의 나이에 딸을 가진 어떤 아랍인은 그 딸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 고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어머니는 열네 살의 나이였고, 그만 그 딸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가족이 키웠겠지만, 그들에게 딸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어린 아버지는 딸 무나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방문을 고대하며, “바바(아빠의 뜻), 와”라고 중얼거리며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올 때마다 아이는 그에게 매달려서 가지 말든지, 아니면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얼마후 아버지는 재혼하였고, 더 이상 딸을 찾아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새 아내는 아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바바, 와”를 되풀이하며 문간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나는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한 선교사는 아이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아버지로, 그분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무나는 다시 행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와 사귀게 하시고 친히 죄를 담당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부활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그분을 통해 우리가 공동 상속인이 되도록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2020/11/23
어느 공산 선교회에서 신앙때문에 감옥에 간 형제의 어머니에게 소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옥에 간 그 그리스도인에게서 선교회로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의 편지입니다.

“나는 우라늄 광산에 끌려 가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큰 바위에 맞았습니다. 그 결과 나는 평생 꼽추가 되었습니다. 나는 굉장히 우울해졌습니다.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구가 된 나를 그녀가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줄 것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내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나를 놀렸습니다. 어느 날 어떤 어린 소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혹이란다’ 또 놀림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는 대답하였으나, 그 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보면서,

‘아저씨, 난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혹 따윈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건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그걸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스런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울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여러 가지 상황에 부대끼고 걱정 근심에 쌓일 때 주시는 위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돌보시고 마지막 날는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창 15:1, 새번역).

2020/11/20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우상을 전부 부수어 버린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나와,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달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자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아하,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태양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흰 모시 옷감들이 정원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같은 길로 돌아오다보니 아까 본 옷감들이 흰색이 아니고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추측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집 안에 누군가가 있을 거다. 아마 물감들이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흰 옷감에 물을 들였겠지.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에서 어떤 분도 보지 못하지만 하늘의 색깔이 매일 변하는 것은 볼 수 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그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뉴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연구하여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만유인력이라는 힘의 작용을 알아내고 그 힘의 크기를 계산하는 방정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법칙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엄청난 법칙들을 만들어 내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논리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0/11/19
아멜리가 아홉 살 때 굉장히 진지한 문제를 가지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왔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틀렸다는 것을 알 때, 무슨 말을 해도 되나요, 아니면 의심을 꿀꺽 삼키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이에 대하여 목사님은 반문하였습니다.

 “다윗이나 욥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솔직하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니?”

“두 가지 때문이에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말고 충고를 하셨어야만 해요. 아빠도 명령을 내리거든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별로 잘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 이웃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우리 이웃들은 정말 불행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사랑해야 해요.”

아멜리의 첫 번째 말은 인간의 타락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릴 때,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모님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동등한 인간 사이를 떠나, 하나님께까지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조업자가 물건을 팔 때 넣어두는 설명서에는 반드시 조작법을 기술합니다. 그것은 충고가 아닌 명령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에 만물이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법칙을 설정하여 놓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할 때 두 번째 말은 일면 수긍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다음 명령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020/11/18
복종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금방 들은 설교의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 부모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목사님 설교의 다른 한 쪽은 못들으신 모양이네요.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복종하세요?”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여과 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설교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취하는 성향으로,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는 신경을 쓰지 않거나 외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자기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유모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하였다. 어느 때부터 신문에서 매일 담배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사가 계속되자 그는 신문을 끊었다.” 확증편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나, 낙인효과, 각종 왜곡된 보도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없는 독재국가나 카리스마적 종교에서는 인권이 유린되고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잘 간직하는 동시에 그 믿음이 사랑 가운데 일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확증편향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를 위해 쉬지말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훈계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지만,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같이 우둔하다.”(잠12:1).


2020/11/17
뉴욕에 사는 한 소년이 하나님께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하시려면 참 바쁘시겠어요. 그래서 여쭈어 보는 건데요, 제가 하나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언제가 제일 좋은 시간이겠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듣고 계신단 건 알지만, 하나님께서 뉴욕 쪽으로 귀를 기울이시는 건 언제예요?”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특히 주목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좋은 예는 에서입니다. 사냥을 갔다 온 에서는 매우 시장하여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한 그릇의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겨우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이런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망령된 에서와 같이 값싼 세상의 것들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흐른 지금 소돔, 고모라, 가버나움과 벳새다 역시 회개하기에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연히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자기부인할 것은 부인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2020/11/16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 왕복선 중 디스커버리호가 있습니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시작하여,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와 허블우주망원경을 궤도에 전개하고는 2011년 퇴역, 현재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이 디스커버리호가 불을 내뿜고 발사되는 것을 일단의 아이들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새 별을 하나 더 띄우시는구나!”

여러분은 미소를 지으며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겨우 며칠밖에 못 가는 별이란다.”

그러나 실은 하늘의 모든 별들도 시작이 있었고 또 수명 역시 유한합니다. 그것을 증명한 학자가

허블(1889-1953)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입니다. 그가 발표한 법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의 속도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하여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허블의 법칙이외에도 우주 배경복사를 측정한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기(WMAP)에 의해 우주의 나이는 현재 137.72±0.59억년으로 계산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 내에 있는 별들은 모두 소멸시기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태양도 같습니다. 태양의 수명은 약 123억 6500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 창조물들이 변화되도록 창조하셨지만,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 역시 죄의 삯으로 죽지만, 신자들은 구속을 이루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3:15, 새번역).

추수감사 주일예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쓴 첫 번째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인 오늘 본문(살전 5:11-18) 역시 제목과는 동떨어지게 들립니다. 그래도 노심초사 끝에 이렇게 제목을 정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전체의 집필 동기가 예수님 재림의 지연이었음은 잘 아시겠죠? 신약성경 전체의 집필 동기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던 각 지역의 사람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재림은 교회와 성경을 있게 한 근거입니다. 물론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이 주님의 마지막 약속인 재림도 성취될 것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자 교회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어는 ‘하나님의 뜻’(18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11절)에 열심이었던 교인들이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살전 5:1)는 전적인 하나님의 뜻[prothesis: purpose, plan](롬 8:28)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will]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랍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의 경주에 본을 보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독려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주마가편이라고 하듯.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우리도 이 추수 감사 주일에 다짐합니다.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구약의 증거 (21)

요한복음 5:39-40
요한복음 5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이셨고, 그분은 자신의 신분과 임무를 주장하시고 그 증거로 5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네 번째 증거는 구약성경입니다. 39권의 구약성경 중 선지자 이사야는 비시 700년 경 하나님의 계획을 적은 책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자손과 주의 종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실 속건제물로 드려져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노래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 오늘 볼 증거는 이사야 53장 10절- 12절입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서 선지자가 미리 노래한대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장10절-11절에서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속건제물로 당신의 몸을 드려 우리의 모든 불의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