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안식일 논쟁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안식일 논쟁 (요한복음 5장 15-18)

유대인의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장로들의 구전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물건 이동도 금하였고,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병을 고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당국자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중으로 안식일을 범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이를 따지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선포하시면서 안식일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도 하나님만은 안식일에도 우주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하고 있다”라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고 있는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는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라 바로 성전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론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야만 합니다. 한편, 주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이적의 의미들은 전부 인간을 구원하는 표적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을 정복하지 못하고 이적만 행한다면 인간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죽어 심판의 자리로 나가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는 주님도 아니고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후 2년이 지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지신 만유의 주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저자이며,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을 신뢰하고 한 주간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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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종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을 위한 것이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7장 6절에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는 메시지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메시지를 고린도 후서 3:6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사이의 철저한 대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공동번역). 옛 언약은 문자, 곧 우리 밖에 있는 돌판에 새긴 외적인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 즉 새 언약은 복음, 곧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방법이요, 현재 우리의 새로운 종의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충족시키심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반면, 우리의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지위에서 나오는 감사가 율법에 대한 복종의 원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복음은 “살아났으니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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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로마서4:25)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2천년 전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다가, 은 30량에 유대지도층에 팔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증거하는 것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고, 신약성경은 그 일을 예수께서 행하심으로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라는 대명제는 바로 신구약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사망을 철폐하시고 썩지 아니하실 것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한 속죄사역이 완성되었음과 이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심으로 온 세상의 심판자가 누구이심을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여 점점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할 때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사망이 영원히 철폐될 때입니다. 그때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에 있느냐,”하고 노래할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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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20년의 부활절은 4월12일입니다. 부활절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이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2020년 3월 21일이 지나고 첫 만월은 4월 7일경(음력3월15일)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월12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0년의 경우 4월 5일(일요일)부터 4월 11일(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으로 부릅니다. 금년의 고난주간도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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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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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6:15). 이 구절은 정확히 1절의 질문(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반박하기 위해 도입한 수사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6장은 전반부(1-14)와 후반부(15-23)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믿음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우리 자신을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23). 이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종이 대조되는데, 사도는 계속하여 그 두 종의 발단(17-18절), 전개(19절) 그리고 결말(20-22절)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며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띠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하에 들어가게 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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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모든 욕심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앞의 죽음은 법적인 죽음 즉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이 반면 후자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으로 비윤리적인 삶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속한 것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한 사건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으며, 후자는 현재에 속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회심할 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이 두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전의 자아(옛 사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어떻게 죄 된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7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NIV).” 개역개정이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들은 헬라어 단어 “데디카이오타이 δεδικαίωται”에 없는 “자유롭게 되었다” 의미를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그 단어 는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진 사람이 사회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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