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12.16 – 20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신속한 행동가이기를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벳세다에서 베푸신 예수님은 저녁이 이르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서움에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며 구원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들은 신속하고 분별력 있고 단호하였습니다. 그분은 경적을 울릴 찰나도 낭비하지 않스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기다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 안에 있었던 것은 전날 해지기 전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 오래 지체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폭풍과 동시에 나타나시거나 그보다 조금 전에 나타나시는 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 롤린슨은 핍박의 폭풍을 겪고 있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한 마음들은 주님이 그들을 버렸는지 의심하거나,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며….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밤 사경’에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했다.” 우리도 같습니다. 삶에서 여러가지 소원과 간구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신속하게 해결해주시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인내를 온전하게 이루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믿음의 핵심은 인내이고 인내의 중요한 요소는 기다림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대표적인 예언이 이사야 11장 1-4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그리고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또 다음 세기로 계속해서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성경에 집중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시므온 같은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묘사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다림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0년간 나사렛에 은둔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3년 반이 지난 후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을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기다려야 하였고, 오신 뒤에도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왜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4)

잘 기다리는 능력은 성숙의 척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만족의 연기(延期)를 감내하는 능력” 이라고 부릅니다. 스코트 펙은 “만족의 연기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니얼 골먼이라는 학자는 삶의 성과는 인지 지능보다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서 지능의 핵심에는 만족을 연기할 수 있고 충동에 휘둘려 살지 않는 능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의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바로 ‘마시멜론 테스트’입니다. 마시멜론이라는 과자를 둔 방 안에 네 살짜리 아이가 있고 실험자는 그 아이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실험자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과자 두 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당장 먹기 원한다면 하나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충동과 억제, 이드와 에고, 욕망과 통제, 만족과 연기 사이의 영원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우주”인 그 어린 아이의 영혼에는 큰 시험이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실험자가 나가자마자 금방 먹었고, 어떤 아이는 한 개를 더 먹으려고 노래 부르기, 혼자 애기하기, 손가락 가지고 놀기 등 온갖 전략을 개발해 내면서 참고 실험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불과 네 살이 표현한 이 성격들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향은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팀이 이 아이들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함으로 밝혀냈습니다. 그 성격들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팀은 마시멜론을 가지고 네 살짜리 어린아이들을 테스트한 후 그들을 오랜 기간 추적 조사를 하였습니다. 네 살일 때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은 기다릴 수 없었던 아이들보다 더 사교적이고,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고, 압력을 받을 때 덜 포기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참지 못하고 즉시 과자를 집은 아이들은 더 고집이 세고 우유부단하며, 좌절에 더 쉽게 격분하고,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SAT 라는 미국대학학력고사의 성적에서도 과자를 기다린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210점이 높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자를 먼저 집은 아이들은 여전히 욕구 충족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충동 통제 능력의 부족이 비행, 과소비, 이혼과 연관성이 높다는 것 또한 연구 결과 드러났습니다. 골먼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잘 기다리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적성’이라고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과자에 대한 테스트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하물며 어릴 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충동에 대한 통제 불능과 인내하며 신뢰하기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의 핵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은 이후로 삶은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와 반대되는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서 그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만드시고, 그 결과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1-5절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담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가르친 뒤, 우리의 남은 삶은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큰 기쁨에 차서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의 기대가 결코 현재 겪는 환난 때문에 감소되지 않는다고 그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의미)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병이나,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나,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나,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되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즉 죄인이며 원수였을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아들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찌 사랑하시며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의 길을 걷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 그것이 바로 ‘경건’이며, 애초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매일말씀나눔

2019.12. 9 – 13

두 번째는 노출의 법칙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은 가장 많이 노출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이 곧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결국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사람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노출의 법칙은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아니, 이 값비싼 골동품 크리스털 꽃병을 시멘트 바닥 위에 떨어뜨렸더니 깨져 버렸어. 이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사람들은 노출의 법칙에 대해서는 크게 놀랍니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수백 번 나오는 폭력과 살인에 노출됩니다. 비디오 게임에서도, 대중 문화 속에서 조직 폭력의 상징들과 이미지들이 미화되는 것을 계속 보면서 성장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은 축구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일어나는 패싸움이나, 심각한 학교 폭력을 보고 경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자료를 읽고, 이 장면을 보고, 이런 왜곡된 말들을 들을 수 있어요. 그래도 나는 정말로 영향을 받지 않아요. 나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든요.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 버려요.” 그러나 현대 사회 과학자들은 이제 성경이 말하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참석하는 행사, 읽는 자료, 듣는 음악, 보는 이미지, 남과 하는 대화, 즐기는 공상들이 모두 우리 마음을 형성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소망, 인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노출의 법칙을 숙지하고 각별히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런 인격을 어떻게 하면 형성할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직접 말하는 성경, 자료, 책, 사람, 예배, 기도 등에 여러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 성장의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

시편 기자는 경건한 자들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은 음식을 씹듯이 마음 속에서 성경말씀을 찬찬히 소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암송은 마음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맞추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성경 암송의 핵심은 우리가 많은 구절을 암기할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경 구절을 반복하여 마음에서 되새길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의 문제 등에 대하여 성서의 생각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어떤 분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고 적힌 카드를 받았습니다. 이 구절을 계속해서 생각하자 그분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소망의 원천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내 몸을 단순한 기쁨과 평강이 아닌,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단순히 소망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망이 넘치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 과정은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원천입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에, 혹은 스포츠 신문을 읽고 났을 때 가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영적인 존재들은 생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무장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무슨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깊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 자라나도록 힘을 기우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잡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침례식이나 성찬식 혹은 결혼식과 같은 ‘의식rituals’입니다. 의식은 건강한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의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결혼 생활에서 의식이 적다는 것은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중히 여기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역시 부모님의 생신을 항상 마음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이런 일들을 가족과 함께 기념하는 것이 소중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돕는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 놓는 것 역시 중요한 영적 성장의 방법입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교회에 가서 주님을 예배하는 날로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일주일을 살아가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안정되며, 문제가 있더라도 7일 내에 해소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설교와 찬양 그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동시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에 십자가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크기의 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면서 때로 그것을 붙잡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당하신 고통을 기억하고 마음을 다진다고 합니다. 또 절친한 친구가 어떤 단어가 씌어진 돌을 주면서 그 단어와 같은 특징을 목사님의 삶 속에서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이 보기에는 그런 특징이 자신 안에 별로 없기에 그런 특징이 나타나기를 매우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준 돌에 쓰인 그 단어가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지고, 때때로 목사님은 그 단어를 가지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가톨릭에 특히 이런 유의 상징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 개신교 특히 침례교는 상징들을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에게 주님과 동행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들 – 성경책, 기도문 등 – 을 주변에 두고 주님을 묵상하는 것도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4-25).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5세기 초엽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였던 성 패트릭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기도문을 받아 액자에 걸었는데, 이것은 로마의 갑옷을 의미하는 ‘로리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로리카는 착용하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나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나를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내 앞을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내 말을 들이시는 하나님의 귀를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신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내 밑에 계신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오른쪽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왼쪽에 계신 그리스도, 내가 누울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앉을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일어날 때 계신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사람의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의 귀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오늘 나는 능하신 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기도문을 읽으며 자신도 그 안에 보호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기도문이나, 성경 구절 등을 걸어놓고 혹은 비치하여 두면서 그 기도문 등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도 영성생활에 여러모로 유익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소망에 초점을 둔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암 진단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미국의 한 여성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례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길 원하는지 상의하였습니다. 자리를 뜨기 전에 그녀는 “하나 더 있어요”라는 말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오른손에 포크를 든 채로 묻히고 싶어요.”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식사가 포함된 교회 행사에 갈 때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주 요리의 그릇을 치우는 사람이 ‘포크를 들고 계세요’ 라고 속삭여 줄 때였어요. 그 말은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에요. 젤리 같은 게 아니라 케이크나 파이처럼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제가 손에 포크를 들고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 포크는 뭐예요?’ 라고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목사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포크를 들고 계세요’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 의도는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생전에 그녀가 입은 옷, 읽은 성경 등을 둘러 보고는 모두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포크는 뭐예요?’ 목사님은 이 여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누구에게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날은 축하의 날입니다. 진짜 파티가 이제 막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낙심했거나 시험에 빠진 모든 이에게, 꿈을 상실하고 마음이 하찮은 일들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밑을 내려다보지 말아라. 포크를 들고 있거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매일말씀나눔

2019. 12. 2 – 6

소망은 우리 마음의 원동력입니다. 교통사고나 다이빙 사고가 나면 신체가 마비 되지만 소망이 다치면 마음이 마비됩니다. 소망 때문에 인류는 타락한 이 세상에 자녀를 내 보냅니다. 자녀 때문에 힘들어도 자녀가 자신보다 더 낫고 더 고귀하고 더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거장 화가 헨리 마티스는 늙어서 관절염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손가락을 구부려 붓을 잡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자 마티스는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파블로 카잘스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난 후에도, 연로한 육신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하루에 5시간씩 연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연습하는지 질문하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연습을 하면 기량이 향상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을 땅거미가 완전히 덮으면 미켈란젤로는 지치고 쑤신 몸을 이끌고 회의에 차서 사다리를 밟고 발판에서 내려왔습니다. 쓸쓸히 저녁을 먹은 후 고달픈 몸으로 시를지었습니다. 마지막 행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화가도 아니다.” 그러나 해가 다시 떠오르면 미켈란젤로는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발판으로 올라가서 창조주에 대한 장엄한 환상에 하루 종일 또 다시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다시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는 곧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소망이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고 모세를 파라오와 맞서게 하였으며, 선지자들을 권력과 대결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2-4).

사람은 무수히 많은 것을 잃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소망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은 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 보다 폭풍의 압도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됩니다. 예수님은 배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실 때마다 그 각각에게 물 위로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가라앉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습니다. 때로 가라앉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의 부름은 절대로 실패의 전주곡이 아닙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사 하라고 정탐꾼 12명을 보냈습니다. 10명은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우리는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2명 모두 똑같은 땅을 보았고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지만, 완전히 상반된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란 목동은 군 복무 하고 있는 형들에게 보급품을 가져왔습니다. 세계레슬링연맹에서 나오는 인물 같은 적의 대장 거인 골리앗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군인들은 이것을 보고 겁에 질려 나서지 못하고 낙심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물매를 가지고 그와 맞섰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 타고 있을 때 폭풍이 닥쳐왔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것처럼 무서워서 겁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은 평화롭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낙심했고, 어떤 사람은 용기를 냈습니다. 여러분 밑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만 합니다. 모든 힘과 소망이 머리이신 그분으로부터 옵니다.“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냐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썼습니다. 그 진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이제 그만 선교헌금을 보내라고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백지수표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호나우도보다 골을 많이 넣고 파바로티 보다 높은음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맞설 수 있고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나의 노력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낙관론과 소망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낙관론은 발전에 대한 믿음, 즉 나의 일들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소망은 낙관론의 모든 심리학적 장점을 다 포함하는 동시에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소망 한다는 것은 오늘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고 해서 최악을 예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을 가진 자들은 최악을 대비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생명의 소망’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지배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마음은 폭풍 한 가운데서조차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무심하게 취급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평소에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을 공급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를 가지고 자동차 경주 대회를 참가하려고 한다면, 값싸고 열량이 낮은 무연 휘발류를 차에 넣겠습니까? 또 만약 당신이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경기 때까지 초콜릿만 먹는 다이어트를 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먹는지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몸, 자녀, 심지어 애완 동물에게까지 무엇을 먹이느냐에 매우 주의합니다. 인간의 신체에 무엇을 집어넣느냐가 수백억 달러의 산업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연료가 궁극적인 성과와 안녕을 결정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자원인 마음을 무심하게 방치한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슨 생각들을 주입하느냐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삶과 장래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파괴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원망하는 생각, 비상식적인 생각, 낙심하는 생각, 좋지 않는 생각 등을 집어 넣으려고 온갖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의 마음에 공급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폭풍이 치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 계속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좋은 연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은 마르다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지 나흘이나 된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식의 법칙(law of cognition)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심리학자 아처볼드 하트는 “한 사람이 생각하는 세계가 그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확신이나 두려움 중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여부는 어떤 종류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점령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태도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정서의 틀을, 더 나아가 당신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또한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면역 체계와 질병에 대한 취약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상태와 외부 행동의 연관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좋은 생각(정확한 인식, 건강한 정서, 건전한 욕구, 고귀한 의도)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고, 나쁜 생각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환경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보고 들을 때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를 매우 세심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똑 같은 환경에 처해도,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능히 힘주시고 은혜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해 주신다는 믿음의 생각으로 우리 삶을 견고하게 붙들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의 인식은 우리 삶을 복된 삶으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잠28:11).

매일말씀나눔

다윗과 같이 적에게 쫒겨 혹은 세상에서 실패하여 들어간 굴 속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삼상24:3).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동굴 뒤쪽에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을 설득하였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굴 속에서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칼로 사울을 찌르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됩니다.”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있어. 더는 숨을 필요가 없어. 더는 실패도 없어 나는 왕이 될 수 있어.’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왕좌에 앉느니, 차라리 굴 속에서 살겠다는 결단이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다윗의 마지막 목표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의 동굴은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먼저 담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1)나는 올바른 꿈을 쫓고 있는가? (2)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과 일치하는가? (3)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성공과 명예가 주된 목표인가? (4)굴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께 진실한 것이라면 나는 머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7-8).

굴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그가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둘람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다윗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아는 것은 그 동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에게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굴 속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당신을 거기서 꺼내 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동굴이라도 완벽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입니다. 때로는 굴 밖으로 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도 굴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은 그 가라앉는 느낌을 다윗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도 지위, 신분, 친구, 안전한 삶을 상실하셨습니다. 물론 생명의 위험에 처했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시신을 굴에 넣었습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한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몸은 굴에서 사흘 간 머물렀지만, 그러나 굴은 영원히 그분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최고의 역사를 굴 속에서 행하신다는 사실말입니다. 굴은 하나님이 죽은 것들을 부활시키는 장소입니다. 혹 여러분은 지금 굴 속에 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당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믿고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9).

지금까지 우리는 비시 1020년 경 사울의 추격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엔게디로 도망을 간 다윗과 그 용사 600명의 이야기를 전제로 우리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엔게디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사울을 피하여 어느 동굴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굴이라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직장일 수 있으며, 실패한 결혼일 수 있고 사랑하는 자녀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또는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접어야만 했던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한 학습후기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여러분의 부모와 가족은 당신에게 어떤 실패 관리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까? 2. 실패에 대해 당신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1) 수치심 (2) 두려움 (3) 더 확고한 의지 (4) 부인 (5) 타인을 비난함 (6) 기타. 이 항목 중 해당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실패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 현재 실패의 두려움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이 질문에 대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중고책에는 “자녀교육” 이라고 파란 볼펜으로 적혀져 있습니다.) 5. 여러분은 “주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는” 일에 얼마나 숙달되었습니까? 또한 이런 믿음을 더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만 할까요? 오늘 하루 이상의 5가지 질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답을 적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2-3).

오토버그 목사님은 젊을 때 스위스에서 스키를 탄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에서 리프트는 수백 미터 상공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스키를 잘 탔지만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백 미터나 리프트가 오르자 두 부부는 둘 사이에 있는 금속 막대를 움켜잡고 뱀처럼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겁이 난 사모님은 목사님에게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이 막대기 보이죠? 이건 내 막대예요. 이 막대를 건드렸다가는, 오늘 당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스키 초보인 목사님은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아요!”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까지 올라가는 T자형 스키리프트로 갈아타 산꼭대기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 그만 두 분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멍하니 눈 위에 앉아 구조견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의 스키인들이 지나가면서 독일어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인 목사님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Dumkopf!”였으며 그 의미는 “바보”였습니다. 얼마 후 다른 한 부부도 같은 지점에 떨어졌으며, 남편 이름은 한스였습니다. 이분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어서 가장 가까운 슬로프까지 엉덩이 높이로 쌓인 눈을 헤쳐 나가며 목사님 부부를 안내하고는 유의사항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밑을 보지 마세요. 경사에 놀라고 거리에 압도될 것입니다. 신참들은 내려다보고는 겁에 질려 버리죠. 이렇게 가파른 슬로프에서 앞을 똑바로 보면 말이죠….” 사실 스키를 타고 내려갈 슬로프는 각도가 90도에 가까웠습니다. 목사님은 오싹해졌습니다. 한스는 이어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밑을 내려다보지 마세요!” 그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는 목사님 인생의 제 1 수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폭풍을 맞이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차 오싹할 것입니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밑을 내려다 보지 마십시요” 오직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시18:1-2).

젊은 시절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던 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오토버그 목사님은 스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지그재그 회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앞질러 지나간 후,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가서 또 한 번 앞지르면서 그를 몇 번이나 앞지를 수 있는지 내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아! 아마 나는 지금까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탔던 사람들 중 가장 흉한 포즈로 스키를 타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제대로 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절대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목사님은 산 아래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는 동안, 그는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폭풍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윽고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그를 물 위로 걷도록 지탱한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폭풍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갈릴리 호수에서 크게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이 소망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그를 지탱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다가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를 보고 두려움이 몰려오자 베드로는 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베드로가 구세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는가, 아니면 폭풍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삶을 살려면 소망, 신뢰, 확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도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혹은 다른 요소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잃으면 우리도 인생의 항해에서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3:19).

매일말씀나눔

1957년 인천에서 한국유리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고 최태섭 장로님(1910-1998)의 큰 사위되는 김종덕(전 제일은행 전무) 성도의 말입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유리가 이러저러한 일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최태섭 회장은 무척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화를 내도 모자랄 일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지만 그 힘든 때에도 최장로님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살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힘든 시절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들고 오는 것 중에는 못 들어줄 일도 있었으며, 예의 바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태섭 장로님은 아무리 언짢은 부탁에도 얼굴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일단 성의껏 의견을 들어주셨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이 교회를 짓는다거나 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대부분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장인어른의 모습들을 보면서 큰 사위는 그렇게까지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비결이 무얼까 하는 강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 안으로만 삭여서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조차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그런 자세는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위는 장인어른이 아침 저녁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그 비결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태섭 장로님의 기도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최태섭 장로님의 전기를 읽은 결론은 그분은 주님을 사랑하셨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없이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런 자세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선지자 엘리야는 어느 날 자신이 호렙 산에 있는 한 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어느모로 보나 매우 성공한 선지자였습니다. 850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아합 왕 앞에서 모두 이겨 죽였으며, 3년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오도록 기도하여 하나님께 그 응답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것도 여인의 협박에 그만 낙담하고 도망을 쳐서 호렙 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호렙 산에 있는 한 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하여 피신한 굴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장소 중 하나입니다. 실패의 무게에 눌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 돌보심의 손길을 깨달게 됩니다. 사실 실패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우리가 실패의 굴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굴 속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철저히 실패해도 하나님이 나를 똑같이 가치 있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달을 때, 성공이나 실패보다 강한 사랑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사랑의 객관적인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너 나아가 주관적으로도 우리는 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18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시글락 성에 아말렉 족속들이 침입하여 불태우고,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모든 재물과 가족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다윗과 그 부하 600명은 블레셋 전투집결지인 아벡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시글락에 도착하여 그 사정을 알게된 다윗은 부하들의 동요로 매우 급하였으나 에봇을 입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는 매우 분명한 다윗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공동체를 구조하는 동시에 리더십을 회복하였습니다. 행동은 매우 강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변화를 일으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이 행동하라고 부르시는데도 외부의 도움이나 사람만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아기 곰 푸우>의 친구인 당나귀 ‘이요르’는 언제나 우울합니다. 아예 희망을 갖지 않음으로써 실망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윗도 이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패는 오히려 엄청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고통을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나선다면 그것은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파커 팔머가 허리케인이라고 불리우는 섬에서 한 주를 보내는 동안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교관이 지면에서 33미터 높이의 절벽 끝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매우 가느다란 밧줄을 묶고는 절벽을 현수하강(이중 자일로 암벽을 내려가는 방법)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저하면서 그냥 내려갔을 때 1미터도 안 되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그때 교관은 몸을 절벽과 직각이 되도록 몸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뒤로 눕히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내려가다가 1미터 아래에서 또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관의 충고대로 몸을 젖혀 절벽과 직각을 이루고 내려가니 정말 놀랍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공중에서 뒤로 누워 기도하며 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발을 조금씩 움직여서 바위 표면을 하강하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절반쯤 내려가니 두 번째 교관이 밑에서 “파커 그만 멈추고 발 밑에 무엇이 있느지 봐요” 천천히 돌려보니 자신이 바위 표면에 깊이 함몰된 구멍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내려가면서 그 구멍을 피해기 위해서는 몸을 그내처럼 흔들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교관은 매우 길게 늦겨지는 시간 동안 그가 혼자 떨며 거기 매달려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외치기를 “거기서 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파커 팔머는 일생 동안 잊지를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실패의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디선가 획 날아와서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갈 헬리콥터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영역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물 위를 걷다가 실패한 베드로의 경우처럼 주님은 이미 거기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31-32). 

영화 《불의 전차》에서 영국의 육상 선수 헤럴드 에이브럼즈는 스코틀랜드의 챔피언 에릭 리들과 경주하여 난생 처음으로 패배하고 맙니다. 해럴드는 실패가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여자 친구 시빌은 말합니다 “해럴드, 말도 안돼요.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니라고요.” 해럴드는 신음합니다. “나는 졌어” “알아요. 나도 거기 있었어요. 정말 놀라운 경기였어요. 최고의 사람이 이겼어요….그가 앞섰고 당신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겼어요.” “그래 알아. 그러나 나는 지기 위해 달리지 않아. 나는 이기기 위해 달려! 이길 수 없다면 달리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시빌은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달리지 않는다면 이길 수도 없어요.” 최선의 경주를 하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전력투구한 후 얻은 승리는 영광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는 아예 경주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실패가 두려워 피해 온 상황에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미루어 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권의 책을 펼쳐야 합니다. 또한 꿈꾸는 직업을 얻기 위한 시작으로 한 통의 지원서를 쓰시고,  삶에 의미 있는 성장을 일으킬 새로운 기술 습득을 위해 강좌를 수강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각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엎드려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며, 많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일반적인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 (잠24:16).

믿음 생활의 원동력

성경구절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 본문의 원어는 “ἐν παντὶ εὐχαριστεῖτε 엔 판티 유가리스테이테” 여기서 판티는 모든 것에서, 혹은 모든 상황에서 라고 번역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개역개정역은 “범사(凡事)에”로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범凡’은 ‘평범할 범’이기도 하지만, ‘모두 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범사’는 ‘모든 것에서’ 라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감사(感謝)는 고맙게 여김 혹은 그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헬라어 ‘유카리스테이테’ 를 번역한 말로, 유카리스테이테는, 좋음을 표시하는 ‘유’와 은혜를 주다는 의미의 ‘카리스테오’ 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헬라어의 의미이기에, 감사라는 번역한 것은 원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뜻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고마움을 표현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반드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못 이루는 것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일찌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역사하여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사 당신의 우편에 앉히셨으며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 삶을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얻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