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11. 11 – 15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실패로 인해 그들은 더 굳건한 끈기, 더 활발한 헌신, 더 담대한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실패로 인해 철저히 패배합니다. 그들은 절망, 수치심, 다시는 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은밀하면서도 단호한 결의를 다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패로 인하여 배우고, 자신을 인식하고, 다시 시도하려는 의욕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실패 관리의 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예체능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좌절에 직면할 때 보이는 열정과 인내력 같은 특정한 정서적 자질들’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 자질들이 탁월하게 나타난 성경의 인물은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이었을 때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요, 용사였습니다. 시편의 절반은 다윗이 지은 시이며, 이스라엘 중 노래를 잘 하는 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이고 나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었고, 이어 왕 사울의 딸 미갈을 맞아들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미움을 받아 부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무려 10년 간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 도시 가드로 망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가드도 안전하지 않아 다시 유대의 한 동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은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실패도 이런 실패는 없습니다. 왕궁에서 바로 어두컴컴한 굴로 떨어졌고, 더구나 사울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왔으며, 전혀 장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견디어 갔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더 나아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들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한때 다윗은 부, 권력, 명성, 친구, 안전, 빛나는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이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며 아둘람 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굴은 우리를 도울 도움, 능력, 지지자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입니다. 굴은 우리가 꿈꾸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머물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혹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꿈꾸던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친구나 배우자, 의지하던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건강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굴 속에 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놓치신 건가?’라는 의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을까 나는 여기서 나갈 방도가 없는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굴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빚으실 수 있는 곳입니다. 때로 삶의 모든 버팀목을 빼앗기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그 약점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보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횐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굴 속으로 전전하며 10년을 보내었으며, 요셉은 노예살이를 거쳐 굴 보다 더한 감옥에서 절망과 싸우면서 최소 3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남보다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도를 행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데도 그들이 당신의 뜻을 행하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셔서 시험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사해에 인접한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로 가던 중 근처 굴에 들어가 뒤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 뒤에 다윗과 그 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창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전에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요, 다윗이 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역시 사울을 죽이자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그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부하들이 사울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사울이 안전하게 굴에서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역시 굴에서 나가 자신이 사울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옷자락만 베고 사울을 보낸 것과 같이 자신에게는 왕 사울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음을 외쳐서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이었고 또 다시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테스트를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사울을 맡기고 계속 사울을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이런 태도는 피흘림 없이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이처럼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염원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6: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길라 산 길 가에서 진치고 잠이 든 왕 사울을 다시 한 번 살려주고는 견디다 못하여 군사 600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시글락을 거주지로 배정받고 1년 6개월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던 중 블레셋과 사울 왕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블레셋 방백들의 거절로 다윗과 용사 6백명은 아벡에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글락은 불탔고 처자들과 모든 재물은 약탈당하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의 용사는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여 다윗이 몹시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삼상30:6). 여러분은 울 기력도 없이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10년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하들의 분노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처한 아주 위급한 상황에 이른 적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상30:6은 아주 큰 영적 인생의 큰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자원이 사라졌을 때, 모든 지지자와 도움이 사라졌을 때, 철저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약탈한 아말렉 족속을 쫓아가 쳐부수고 처자들과 함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남쪽에서 이런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왕 사울은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그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장래와 자녀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굳게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9).

시편에 보면 불안할 때, 횡행하는 악에 대해 분노할 때, 원통할 때 및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탄식하고 부르짖는 구절들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때 그런 마음을 내면 깊이 묻으려고 합니다. 마치 극기하는 것처럼, 자신을 억지로 추스르지만 내면의 진실한 고통은 경험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실패는 종종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이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셰익스피어 무덤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반적으로 파는 2미터가 아닌 5.5미터의 땅속에 묻혀져 아무도 파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가끔 자신의 실패 의식을 그처럼 파묻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일 때 자신은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었지만, 떨어질까 무서워서 출마하지 못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대학 때도 무슨 위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우승하고 싶었던 테니스 결승전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와 붙었지만 졌습니다. 더나아가 원하는 직장에 원서를 냈었지만 떨어진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실패의 아픔을 너무 예리하게 느꼈기 때문에 마음에 파묻었을 뿐,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못하고, 뒷걸음친 것을 후회스러워 하였습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원통하거나 어려움에 닥쳐 낙심될 때,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토하고 애통의 시로 기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 1-3).

매일말씀나눔

우리는 모두 신뢰와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신뢰와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으며, 결국 둘 중 하나가 이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면 우리를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가장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란 무엇이겠습나까? 두려움은 위험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에 대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경고입니다. 이것은 행동을 유발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부여할 정도로 충분한 불쾌감을 야기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도망가도록 혹은 싸우도록 준비시킵니다.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 파괴자의 역할을 합니다. 특히 두려움의 특별한 형태는 걱정으로 나타납니다. 걱정은 여장을 풀고 장기 숙박을 하는 두려움입니다. 걱정은 결코 스스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쫓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생리학 협회는 수많은 연구 결과를 모아 요약하다가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하였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질 만한 수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재능이 있고, 남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자존감의 문제와 씨름합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분명히 성공한 사람조차 종종 자기 회의와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의 태도에 따라 자존감이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정면 대응하는가, 아니면 피하고 겁내고 도망가 숨는가의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때 정면 대응하는 사람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했어. 도전을 감당했어.” 하며 밀려오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을 가 숨는 사람은 비록 결과는 좋을지라도 그 내면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겁먹고 꽁무니를 뺐어.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했어.” 회피는 내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진실한 칭찬을 받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나를 칭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내가 보여 준 모습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신하고 성장합니다. 만약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불한당(?)이 있다면 그 사람과 대면하십시오. 어렵거나 재미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미룬 업무에 손을 대시기 바랍니다. 평소 비위를 맞추거나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기에 급급했을 사람에게 당당히 여러분의 진정한 의견을 말하십시오. 당신이 미뤄 온 어려운 결정의 책임을 떠맡으십시오. 또 당신이 회피해 온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바랍니다. 당신이 숨기려 한 죄나 인격의 흠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내면은 더 강해 질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만약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잠재성을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장은 항상 위기를 수반하고 위기는 항상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에 관해 안타까운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 친구는 분명 재능이 있는 예술가요 탁월한 작가였지만 자신을 소모시키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과는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 또한 전혀 그 일에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출퇴근 기록부만 찍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계속 거기에 머무르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데 잘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만큼 돈을 충분히 벌 수 없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알고 보니 그 재능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변명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성공마저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될 것이라는 철통 같은 보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될 때까지, 그는 있던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마침내 정체될 것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 친구는 결국 그렇게 일하다가 은퇴하여, 여생 동안 최대한 편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일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가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비싼 값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한편 두려움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환희를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굴복하면 기쁨이 소멸됩니다. 늘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살면 그 두려움은 지금 나의 삶을 빼앗아 갈 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신뢰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이 열 살되었을 때를 적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패러세일링에 갔습니다. 보트를 운전하는 사람은 120, 180, 240 미터까지 올려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 위로 얼마나 높이 날고 싶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목사님은 120미터 높이로 조종해 달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아들이 두려움에서 자유롭기를 원해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몇 분 동안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 240미터까지 올라가겠어요. 처음에는 무섭겠지만 비행 시간은 몇 분밖에 안될 것이고 그 경험은 영원히 제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때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경험은 영원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것을 잘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0-22).

오토버그 목사님의 딸이 어릴 때 별명은 ‘메이메이’였습니다. 그녀가 매우 어릴 적에 툭하면 하는 말은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였다고 합니다. 걸음마를 떼려 하다가 넘어져서 부모가 다가와 도와주려 하면, 그 아이는 손을 흘들며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고, 조금 더 자라서 자기의 작은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쳐 넘어졌을 때, 부모가 도와주려 하면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는 걸으려다가 넘어져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같으니! 나는 너무 어리석고 서툴렀어. 난 걸을 수 없나 봐. 내가 넘어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그런 창피한 경험을 하느니 평생 기어다니겠어.” 아이는 걸을 때까지 불안정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참아 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서 걷기를 배우느니 차라리 움직이길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사셨다고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분은 122살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1875-1997) 할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은 100살이 될 때 펜싱을 비로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의 믿음만큼 불안하였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는 모험을 하기 위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하였다고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먼저 구해주고 온유하게 문제를 짚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런 구원과 가벼운 책망은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진리와 배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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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읽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얼굴에 드러냅니다. 친구, 가족, 이웃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지 주목하고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야만 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자기 몰두는 자기 파괴와 외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료 죄수들에 대한 배려를 질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도움을 줄 순간을 포착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데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이 포도 나무와 포도 송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할 것을 알려 줍니다. 이에 반해 떡 굽는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자 요셉은 사흘 안에 사형 집행 당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석방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석방이 됬지만 이내 요셉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실망을 씹으면서 2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도대체 요셉의 고난은 언제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까?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 하염없는 인내는 우리의 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보다 훨씬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간 뒤 기억함을 받지 못하고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종종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요셉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중요한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최고의 날들, 즉 이집트의 국무 총리, 리더로서의 영향력, 아버지와의 재회, 형들과의 화해는 고난의 폭풍 후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통상 신자들이 괴로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타인이 나의 인격을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형들도, 어리석은 아버지도,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도, 잘 잊어버리는 술 관원이나 거만한 파라오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누림을 가질 것이고, 현 생애에서는 어느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결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과 전혀 다름은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 손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 하나 풀어가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라”는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핵심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하신 명령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말라”나 “겸손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명령, 하나님이 가장 빈번히 반복하시는 지시는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를 신뢰하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말씀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적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항상 필요합니다. 로이드 오길비는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1년에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범브린트 목사님 역시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꼭 366번 성경에 나오는 것을 투옥 초기에 발견하고 그 힘으로 15년 간의 루마니아 감옥 생활을 견디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을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세 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애야, 펄쩍 뛰어. 겁내지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수영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밀려들어 옵니다. 그러나 아빠가 물속에 계십니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하였습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입니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만 합니다. 결정하려면 두려움이나 자신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작은 의지의 조각이 있고, 그것으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만일 아이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야기에서 두려움(무서움)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각 한 번씩 등장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역시 주어집니다. 각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두려움의 본질을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두려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오해한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데일 브루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기를 내거라! 내가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시는 것(It’s me)이 아니다. ‘스스로 계신(I AM)’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계시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너를 사랑하였은즉,” 또 다른 두려움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든 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인식하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상황의 주관자시라는 확신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염려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빨리 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2-34).

매일말씀나눔

2019. 10. 21 – 25

죄는 매우 끈질긴 추격자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요셉처럼 죄에서부터 도망가서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굳게 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고용주에게 충실했고 유혹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겨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보상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때때로 보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손에 들고 서 있으며, 그것은 요셉을 불리하게 만든 증거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고소를 듣고 분노했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쁜 소식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 가운데 익숙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서 감옥행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쪽을 선택하였지, 모든 것을 갖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거기에 없다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을 400년 뒤 모세가 본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성경을 보면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호렙 산 꼭대기에서 혼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나 사도 바울의 경우 같이 어쩌다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험한 폭풍과 사악한 세력의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양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두려워서 낮아졌을 때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 할 때 오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우면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폭풍치던 날 밤 갈릴리 호수에서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과 같이, 감옥이라는 두려움의 장소에 떨어진 요셉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었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되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이 요셉에게 맡긴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감옥에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간수장은 책임을 져야만 하나, 유독 요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아무런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사 우리 모든 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그러던 중 요셉이 관리하던 감옥에 떡 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이 죄수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시중들던 요셉이 어느 날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들에게 어떤 이유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이들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왕의 죄수를 다루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사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실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이 무감각하게 굳어지고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이렇게 어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목하고, 안부를 묻고,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박효진 장로가 쓴 ‘하나님이 고치질 못할 사람은 없다’에는 사형수들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개화된 오늘날도 교도관들이 교도소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천년 전 이집트의 감옥에서 간수장의 업무를 위임받은 죄수 요셉은 일이 막중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힌 일이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해서 속을 삭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타인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요셉의 신앙이 성숙해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넘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산꼭대기입니다. 혜택받고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 지고, 자신의 그 자리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경향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을 겪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죄수로 산 것은 우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은 다른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거나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공감능력 없이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들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결국 마리 앙트와네뜨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스코트 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며 문제의 고통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결코 형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역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채색 옷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엄청난 꿈들과 높은 위상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요셉에게 긍휼의 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범죄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의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사정을 배려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각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이 균형잡혀야 하며, 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경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은총 중의 하나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와 죄인의 처지에 놓이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수요묵상

누가복음 12: 22-34

공자는 전 중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 통치에 도움을 줄 나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초기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공자 일행이 광 땅을 지날 때였습니다. 당시 광 땅 사람들은 양호에게 피해를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양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공자를 보자 양호로 착각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포위하였습니다. 5일간 발이 묶인 일행은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하늘의 명이 주어졌음을 자부하고 의연하였습니다. 즉 요.순.우.탕에게 드러났던 도가 문왕에게 이어졌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였다면 어찌 후사자인 나를 두었겠는냐? 내게 하늘의 사명이 있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권경자 교수는 해설하기를 “이러한 확신과 자부심이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놓고 인류의 길을 만든 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권경자, 논어, 266-7).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은 지진의 영향으로 건물이 흔들리자 두려움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몹씨 부끄러워 하였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지 수십년 어찌 이런 지진에 동요할 수 있겠는가 라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받아들이기 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조성하시며,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명령하셨으며,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권능을 주셔서 이집트로 보내셨고, 거기서 9가지 이적을 행하하도록 하셨으며, 마침내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이 백만 명에게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신 바로 그분이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유대와 갈릴리 땅을 두루돌아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시다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자 머리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만물의 주님으로 등극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섬김과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주고 배려해 주며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유교와 모든 종교의 이상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 나라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근거이며, 이런 삶의 자세 위에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위안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많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양식과 집 그리고 돌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특권을 마음에 새기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주님의 권고를 삶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 은행에 돈만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형들의 질투를 사고 있던 요셉은 드디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꿈들은 놀라운 요셉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불러서 두 번이나 자신의 꿈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처음 꿈은 열 두명의 형제들이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고 다른 모든 곡식 단들은 요셉이 묶은 곡식 단 앞에 절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더욱 가관으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형들에게 잡혀 은 20량에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폭풍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돈 한 푼 없으며, 아무 힘도 없으며,  친구도 집도 없고,. 삶은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인격은 단련됩니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도 배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평온할 때는 많지 않습니다. 조만간 결혼, 일, 사역, 재정, 건강에 폭풍이 엄습합니다. 폭풍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폭풍을 잘 이겨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질들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5:7-9).”

폭풍을 이기는 사람의 주된 특징은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을 잘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이겨 낸 전쟁 포로나 인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행동은 엄청난 제한을 받은 대신,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통제력의 가능성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이제 요셉도 죄수입니다. 집을 멀리 떠나 아버지와 이별하고,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채색 옷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의 채색 옷과 그것이 상징하던 삶은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는 그 한가운데서,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주도력과 자율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동적인 자세를 거부한 포로와 인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먼저 식단을 통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또한 산헤드린 앞에 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대한 함구령을 석방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되물었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어떻하였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무력한 포로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4-26).

노예의 삶으로 떨어진 요셉의 상황은 결코 그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맡은 일에 부지런히 전념하였습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발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은, 단지 일꾼으로서 밭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집 안에서 일하도록 승진되었습니다. 실무를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의 보좌관으로 승진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리고 나서 보디발은 곧 그를 가정 총무로 명합니다. 요셉은 전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완전히 신임하여 장부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고작해야 “오늘 저녁은 된장찌게인가 아니면 김치찌게인가?” 하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요셉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일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삶의 자세 때문에 훗날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역할, 즉 가족과 세상을 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6-7).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두는 것은 인내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쉽습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 쿵쾅거리며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것이 쉽습니다.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그만두는 방법이 항상 달콤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어. 벗어나고 싶어. 이혼하기도 힘드니 그냥 이렇게 남남처럼 살지 뭐. 더는 노력하지 않을 거야.” 이때 나오는 대표적인 행동이 졸혼 혹은 별거입니다. “이 일은 내가 꿈꿔 왔던 것이 아니야. 더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하려 했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 떠나겠어.” 한 사람이 앤서니라는 사막의 교부에게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부는 대답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말라.” 어려움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통제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충성하겠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걸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요셉은 이방인이자 노예였지만, 인내하여 드디어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 종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또 다른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유혹이라는 무서운 힘이었습니다. 요셉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 보디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끈질겼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결국 기회를 엿보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죄악으로 이끌었을 때 요셉은 그 옷을 벗어버린 뒤 도망하여 그 집을 나갔습니다. 죄는 자신이 대상자를 이길 때까지 끈떡지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도망가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친구 중 한 분이 회사의 중역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출장을 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력했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실패를 자책하며 외롭게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보디발의 아내’가 접근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유혹이 갑자기 저항할 수 없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갔어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실패를 겪은 사람은 요셉이 당한 유혹, 삶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다가오는 유혹을 압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평상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습작전과 같은 죄의 창날은 평소에 기도와 경건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여지없이 가슴이 뚫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