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29:25

본문말씀: 누가복음 12:4-1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7월 초에 우리나라 주력 상품인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중 3가지 품목을 규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8월 2일에는 화이트 리스트 즉,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 편의를 보아주는 국가들 중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걱정과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 중입니다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국가의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똘똘 뭉쳐서 나가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을 주도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은 뒤쳐저 2류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두려워 하며 주저앉냐 아니면 긍정적인 자세로 맞서 나가냐 하는 것은 한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 댄 잰슨(Dan Jansen)은 두려움 때문에 스케이트 경기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캐나다 캘러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누나의 죽음이 있었고 그는 슬픔을 안고 경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 단거리 스피드 스케이트 챔피언이었던 잰슨은 당연히 500미터 혹은 10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간 그 두 경기에서 경기도중 넘어지는 통에 메달을 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기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경험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그 다음 동계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그가 나간 단 거리 경기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기에 관하여 댄 잰슨은 “경기 도중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컨디션은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나를 붙들어 전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에서 온 두려움 때문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그는 드디어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10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존 맥아더,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121-122)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 역시 마치 댄 존슨이 두려움과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좌절을 겪을 때 먼저 두려움이 솟아 오르고 그런 두려움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련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런 두려움이 마음에 팽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들어올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치를 따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12은 이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 하라: 가장 두려운 존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둘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하라 :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참새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 역시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때에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한 마리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당 머리카락은 통상 140,000개라고 추정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전부 세신다는 그 전지하심을 늘 고려하고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자는 제대로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삶 범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기꺼히 그의 멍에를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의 의지 위에 두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베드로가 위험을 무릎쓰고 배 밖으로 나와 걸으려고 하였을 때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약속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일 브루너 박사의 관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보장이 아닌 기회를 요청한 것입니다. 배 안에 머문 제자들은 선물로 받은 훌륭한 식기 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벽장 속에 넣어둔 오토버그의 할머니처럼 배 안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여 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성장보다 안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지나가기를” 즉 모험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셨기에 그들을 피해 빙 돌아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믿음의 모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치는 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배 밖으로 나간다는 것의 위험과 고통을 이들은 잘 알았지만, 배 안에 머물었을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성장과 번영에 만족하여 거기에만 머물고, 새로운 혁신을 등한히 하여 파산한 기업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코닥이라는 회사입니다. 코닥은 전 세계 필름 산업을 장악한 엄청나게 수익성 좋은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아날로그 시대에 맞는 필름 산업에 만족하고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디지털 카메라는 코닥에서 제일 먼저 발명하였으나, 코닥의 임직원들은 그것이 자신의 필름 산업을 대체할 것을 두려워 하여 사장시키고 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 하고, 혁신하기를 거절할 경우 결국은 개인이나 기업을 실패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험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우리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18:22).

배 붙박이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간단히 말한다면 ‘성장 불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도록 지음받았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며 성장의 기적을 기뻐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사람은 성장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점점 아기의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흐뭇해 하고, 처음 “엄마”라고 말할 때 감격하게 됩니다. 성장의 기적을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체보다 슬픈 것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시작한 결혼 생활이 권태기로 접어들면서 애정은 식고 친밀감은 희미해진 부부를 보십시오. 문제를 짚어 내고, 고통에 직면하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그저 지루한 삶에 안주하여 익숙한 남남으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정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 이렇게 살면서 “나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야”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국 지루함, 즉 일면 영혼의 냉담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배에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 명의 종을 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토버그 할머니처럼, 베드로처럼, 우리들처럼, 세 종은 후한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에 대한)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이 원칙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이 원칙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지난 달 연합뉴스를 보면 강도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던 A씨는 20대 중반이었던 2006년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습니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먼저 이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벌금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진 후에 나머지 돈을 1년도 안되어 도박과 유흥에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로또를 샀지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이 곤궁한 그는 절도범으로 전락했고 13년 동안 계속 감옥을 들락거리며 다니다가 올해 또 영세 업주를 갈취한 죄명으로 구속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로또 당첨은 결코 생의 전환점으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 중 첫번 째는 “그분은 은사의 주인이시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은 자기 소유 중 첫째 종에게는 5 달란트, 둘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셋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15년치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돈은 엄첨난 부를 의미했습니다. 이 주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갑부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재력가는 세 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종을 부렸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세 사람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종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생일대의 기회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세 종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오토버그 목사님은 기회에 관하여 좋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학원에 다닐 때 사모님 낸시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돈이 없었습니다. 신혼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 떠오른 아이디어는 TV퀴즈 쇼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은 커다란 빙고 판마다 무작위로 선택된 분야의 질문이 있고, 참가자가 답을 말하면 X나 O로 표시되었습니다. 물론 항목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첫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고 이어지는 서너 게임도 무승부였기 때문에 돈이 불어나서 수천 달러가 상금으로 걸렸습니다. 상대는 변호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그 퀴즈에서 아주 많은 승리를 거두어 보너스로 자동차까지 걸려 있는 행운의 사나이였으나, 오토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가난한 교회 목사인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 변호사가 한 가지 질문을 틀렸습니다.이제 목사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이긴다면 만져본 적도 없는 큰돈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에게 주어진 분야는 ‘혼합 주류’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칸을 선택하여 다음 질문에서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이기고 싶어서 그냥 그 칸을 택했습니다. 그러자 “두 잔의 스카치와 스위트 베르무스 반 잔 등으로 만든 술은 무엇입니까?” 술을 모르는 목사로서 알 수 있는 답이 아닙니다.오토버그 목사님은 진행자에게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오답도 정답도 말하기 곤란하군요.” 라고 대답을 하였고, 결과는 뻔했습니다. 결국 목사님 부부는 근처로 신혼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토버그 목사님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났지만 그만 놓쳐 버린 기억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 뿐만 아니라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하고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인이 종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종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들의 운명을 단 한 번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세 종을 불러 놓고 어마어마한 은사를 준 것입니다. 첫 번째 종은 그의 행운을 깨닫고 ‘즉시’ 기회를 움켜잡았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절대 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움켜잡는 사람이 이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그분의 소유를 당신과 내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인이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선택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 대신 우리의 인생을 넣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능력, 우리의 영적 은사들, 우리의 몸, 우리의 돈, 우리의 의지.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회는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종은 그렇게 한 데 반하여, 세 번째 종은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받지 못할 최고의 선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친 것일까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25:24-25).

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

매일말씀나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뒤 갈릴리 바다 위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여간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폭풍은 예수님이 새벽 3시경 격랑을 치는 물결을 밟고 오셔서 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서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기 전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으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폭풍을 사라지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며 맡기는 것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매우 설교와 강의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었고 기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던 35년 전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설교 도중 기절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후 1년이 지나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때 10분이 지나 또 다시 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에, 그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사야40:30-31을 기억하고 그 주일에 다시 설교를 하였고 끝까지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약간 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이따금 섬광처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그런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이런 태도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연습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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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방법)

누가복음 8:16

연합뉴스(2019.6.17)입니다. “경찰과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06년 20대 중반이었던 A(현39살) 씨는 강도상해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던 중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 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확천금도 A 씨 인생을 바꾸지 못했다. 로또 당첨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 강도상해 혐의를 벌금형으로 마무리한 뒤 본격적으로 당첨금을 쓰기 시작했다. A 씨는 처음에는 당첨금을 가족들에게 쓰며 새 인생을 사는 듯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랜드 등 도박장과 유흥시설을 드나들며 8개월 만에 돈을 모두 탕진했다. 로또 당첨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절도범으로 전락해 금은방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1년을 복역하고 2008년 4월 초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로또 복권을 계속 샀지만, 행운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A 씨는 2008년 4월 중순부터 9월까지 또 금은방을 털다 경찰에 붙잡혔다. 2010년 계속되는 절도 행각으로 또 지명수배된 A 씨는 2014년에는 휴대전화를 상습적으로 훔쳐 장물업자에게 팔아넘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A 씨는 135차례에 걸쳐 무려 1억 3천만원 상당 휴대전화기를 훔쳤다. 경찰에 붙잡힌 A 씨 지갑에는 로또 복권과 스포츠토토 등 복권 10여장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3년 형을 선고받고 2018년 복역한 A 씨는 또다시 조직폭력배 행세를 하며 영세 업주들 돈을 뜯어냈고 주점에서 절도까지 벌이다 올해 또다시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생활고에 시달려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며 “로또 당첨이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는데 순식간에 돈을 탕진하고 다시 좀도둑으로 돌아간 A 씨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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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오랫동안 위기 관리를 연구한 철학자 래리 로던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위기 정체 상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기 관리에 대한 그의 글을 열아홉 가지 원칙으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 원칙은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안전은 없습니다. 집에만 머무르면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안전할 것 같습니까? 미국에서만 해도 50만명이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년 전에 연세드신 제 이모께서 밤에 침대에서 떨어지신 적이 있습니다. 이모부께서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계셨기 때문에 간신히 외지에 살고 있던 아들와 연락이 닿아 응급실에 가보니 다리의 뼈가 세 동강이 나셨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랫 동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도 그 휴유증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다. 또 열심히 창문을 가리다가, 실수로 자기 집 창문의 블라인드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습니다(미국에서만 매년 10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타석에 선다면 삼진 아웃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타자도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타석에 서지 않는다면 홈런을 치는 영광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배 밖으로 나오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배 안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밖이 두렵다고 계속 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배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죽을만큼 지루함과 지겨움을 맛볼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냄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막상 목표로 하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시니 그만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 역시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칭찬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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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4:16-21

(클레멘트코스의 철학)
다 아는 바와 같이 ‘클레멘트코스’는 미국의 얼 쇼리스 박사의 제안과 노력으로 탄생하였으며,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난을 벗어나게 하여 주려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인문학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들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보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주체성 있는 사람으로서 서게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새로운 눈이 뜨게 되어 연구하고 생각함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며, 매사에 생각없이 단순 반응만을 반복합니다. 마치 외부자극에 조건반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클레멘트코스의 사례)
따라서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 갇힌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남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새롭게 배웁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미술작품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황이 열 가지 라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시작하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시를 읽는 것 위대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시작하는 일이며 새로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를 사업이나 학문을 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도록 가르칩니다. 지유로워지기, 우리가 맞닥드리는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 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되풀이하지 않기, 전통을 억압이 아닌 혁신의 동력으로 이해하기 같은 것들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삶을 페리클레스식으로, 즉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한없는 자유가 가능하게 하는 이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개혁하고 또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995년경 장소와 교수진과 교과과정까지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얼 쇼리스 박사는 본격적으로 학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를 찾았습니다. 이 센터는 뉴욕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인 사우스 브롱크스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코카인 중독증을 치료하던 여자 두 명을 설득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카르멘은 교도소에서 10년을 보냈으며, 버나데트라는 다른 한 명은 거리의 성매매 여성이자 약물중독자였습니다. 몇몇 곳에서는 학생을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인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직업을 구해 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 주겠다거나, 혹은 대학 학점을 주겠다는 등의 약속 대신 인문학을 가르쳐 주고 수업에 쓸 책 몇 권을 주겠다는 약속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도어’라는 곳에 갔을 때 (그곳은 끼니를 해결하려고 도시 전역에서 몰려든 열여섯 살에서 스물 한 살까지의 젊은이들에게 저녁식사를 무료로 제공한 곳임), 실무진의 도움으로 그중 몇 명을 모아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얼 쇼리스 박사는 “저는 여러분을 록펠러만큼 부자로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하자 록펠러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기에 다시 “빌 게이츠만큼이요”하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에 다들 웃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표정들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1)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논리학 같은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2)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대한 사상들을 접할 것이며 (3) 생각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4) 그 결과 여러분의 삶은 이런 것들로 풍성해져서 세상의 귀한 보배들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관과 다른 몇 군데 기관을 통해 31명의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전과자였고, 몇 명은 노숙인이었으며, 외국인 학생들도 네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코스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학생들의 단순한 반응(reaction)에서 반성적 사고(reflection)의 단계로, 무력(force)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에서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단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가 많은 경우 바뀌었습니다. 클레멘트코스에 와서 공부할 당시 노숙인을 위한 쉼터에서 살았던 한 친구는 강한 스페인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를 쓰는데다 읽기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드대학에 진학해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고 합니다. 첫해에 코스를 수료한 학생 두 명은 치과의사가 됐습니다. 또한 다른 한 명은 간호사가 됐습니다. 10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던 한 여성은 쇼리스 박사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상담실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서맨사는 쇼리스 박사 부인의 충고에 따라 ‘패선기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또 첫해 수료생 가운데 또 다른 한 명은 영문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2006년에 벌써 전세계에서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코스를 졸업하였습니다.(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거리의 인문학, 38-56)

그러나 인문학을 통한 자유와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힘과 자유를 얻어 정상적인 직업을 갖게 되고 시민으로 살아가다가 남보다 월등한 힘이 생기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복음을 통해 변화되는 사람들은 변화의 폭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줄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또한 인문학으로만 죄의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인간의 삶에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만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과 사망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인문학은 또한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