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면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위해 예수님의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예수님의 주권하에 있었기에, 베드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배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충동적인 행동 그 이상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재정, 언행에서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서는, 그것을 영적인 언어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랭크 파알리는 30년 간 T타입, 즉 ‘스릴 추구 성격(Thrill-seeking personality)’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위험도가 높은 상황과 행동에 매력을 느끼며,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새로움, 다양성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쉽게 지루해 하며 끊임없는 자극을 열망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소위 ‘위험 감수 유전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유전자는 D4DR이라고 불리웁니다. 흥분을 잘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내성적이고 느긋한 사람들보다 이 유전자가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극한 스포츠인 암벽 등반, 페러글라이딩, 행글라이더 등을 즐깁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큰일을 할 수도 있지만, 물질 남용, 잘못된 성적 행동, 도박 등의 파괴적 행동을 할 잠재성 역시 큽니다. 이 경우 우리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무모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타입에 속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가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숙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와 “어리석지 말지니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렵습니다. 언제 배 밖으로 나가서 모험을 해야 하는지 알려면 용기뿐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지혜, 주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분별력, 명령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충동에 휘둘리는 T타입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W 타입 즉 물(Water) 위를 걷는 성격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과의 모험을 갈망하는 ‘하나님 유전자’가 필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제기됩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과 나 자신의 무모한 충동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W 타입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명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서 분별되었고 실현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나님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실까? 성경은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리랜드 라이켄은 이런 면에서 기독교가 매우 독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신은 일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는 일 외에, 제우스와 그 일동은 언제나 놀고 쉬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에게서 나누시고, 하늘과 천체를 만드시고, 물을 모으시고, 흙에서 인간을 만드시는 등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여섯 날 후, 하나님은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주가 기계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하나님이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편104편).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활발히 동역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일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목수로 일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하고, 인도하고, 공부하고, 조직하고, 고치고, 개발하고, 가르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아서 밀러는 이것이 주7일 신앙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받은 재능을 사용하여 세상을 탁월하게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소명은 거룩한 과업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소명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으나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일어나 두 번이나 엘리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렉 르보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종종 이름을 두 번씩 부르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야곱아 야곱아, 모세야 모세야”처럼 말입니다. 한 번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언급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조립이 필요함”이라고 쓰여진 물건을 사 주는 것을 두려워 했다. 나는 조립에 소질이 없다. 수많은 부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에 널려 있기 일쑤다. 그 부품들은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확실한 목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특정한 은사, 갈망, 재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선물들을 잘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개발하고, 기쁨으로 겸손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표현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도 있고,우리 후에 올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지금 나타나려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자리를 맡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일파인 하싯즘의 옛 이야기를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 코트를 입어야 하였습니다. 한 호주머니에는 “너는 우주의 수억, 수백만 모래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쓰여 있고, 다른 호주머니에는 “내가 이 우주를 너를 위해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경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나의 구원과 가치는 나의 직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일은 우리가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을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보리 떡 일곱 개의 기적

마태복음 15장 29-39

절은풍은이라는 홍콩영화를 보면 이런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형사 두명이 주가 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하려는 범죄 조직의 활동을 도청하던 중 기가막힌 주가 정보를 입수합니다. 지금 형사 한 명은 얼마전에 병원에서 진찰을 한 결과 간암 판정을 받아 죽기전에 가족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결론을 가졌으며 또 한 명은 형사월급이 뻔하니 한 탕하여 많은 돈을 벌고 인생을 편하게 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투자하였습니다. 그 정보는 진짜여서 이들은 많은 돈을 벌고 이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을 감찰관실에서 알게 되고 해당 범죄조직도 알게 되어 이 두명은 먼저 경찰이 손을 대기전에 범죄조직에 의하여 타살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 때문에 여기에 말려든 형사반장은 자기 동료 두명을 해치운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 뒤 자신은 경찰에 자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인생에 돈이면 충분할까요? 이 영화에서조차 돈만 가지고는 안되는 병과 죽음의 문제가 나와있고, 빵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하여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충분히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매일말씀나눔

두려움과 아울러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요소는 편안함입니다. 버클리 대학의 연구진은 아메바를 완벽한 환경 속에 집어넣고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상적인 온도, 최적의 습도, 지속적인 식량 공급, 어떤 것에도 굳이 적응할 필요가 없는 최상의 환경이었고, 질병을 초래할 요소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아메바는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심지어 아메바까지도 도전을 필요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음식과 공기만큼, 변화와 적응과 도전도 필요합니다. 편안하기만 하고 아무런 도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의의도 찾을 수 없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편안함은 우리가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편안함은 자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학생을 성장시키려는 선생님은 답이 아닌 문제를 제시해 줍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만,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강화되고 인내심이 강해지며 자신감이 견고해집니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 주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노력하고 도전해야만 강해지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개봉하지 않은 선물의 비극을 무마할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3-25).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세 번째 원칙은 “그분은 상 주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선물을 주고 회계를 결산하기도 하지만 상도 주십니다. 그분의 보물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칭찬을 하나님께 받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주인은 종들을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주인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하여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긴 것을 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주인의 의도는 “이제 네가 진짜 일을 맡을 때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으면서도“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불과하다니!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록펠러나 빌 게이츠의 재산이나 진시황의 권력이나 마이클 조던의 명성 등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님 보시기에 ‘작은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실버 타운 같은 곳은 절대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인 모험, 창조성, 풍성한 열매를 드디어 온전하게 경험하며 우리의 잠재성이 실현되는 궁극적인 곳입니다. 그곳에 개봉되지 않은 선물이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여러분은 풍성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정, 인간관계, 능력으로 은사의 주님께 막대한 것을 되돌려 드릴 수도 있는데,혹시 그것들을 그냥 깔고 있지는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나의 가장 깊은 꿈은 무엇인가? (2) 나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열정을 느끼는가? (3)나의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4)요즘 나는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5)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한 모험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6)어떤 일을 하도록 내가 태어났다면, 그 ‘일’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7)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은사의 주님께 받아 그분의 왕국에 투자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시간이나 재능 분야에서 아직 여러분의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은퇴하고 죽는 삶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순간을 소중하게 취하여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연마하고 개발하고 인내하고 부단히 힘써서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게임에 뛰어들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은사와 관련하여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별한 재주도 없고, 뛰어난 지혜나 기술, 그리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러분은 훌륭한 은사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오병이어를 취하여 많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말더듬이 도망자인 모세를 사용하셔서 세계 권력을 쥔 독재자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전부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피 묻은 십자가에서 빈 무덤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엉성하고 실수가 많은 열한 명의 제자로, 쇠할 줄 모르는 꿈을 가진 공동체를 창조하셔서 전 세계로 퍼뜨리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지략이 풍부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 주인 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이 바치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을 취하여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잠재력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투자하면 은사의 주님이 돌아오실 때 그 진가가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물 위를 걸으려면 모험을 감수할 용기뿐 아니라 소명을 분별할 지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어리석음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문지기 베드로는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가 생각납니다. 폭주족들이 아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지요. 저는 즉시 아가씨를 놓아주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을 많이 새긴 놈에게 가서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오토바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그의 코걸이를 낚아채어 땅바닥에 던지고는 ‘지금 당장 이 아가씨를 놔 주지 않으려면 나랑 붙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언제 그랬습니까?” “바로 몇 분 전이죠.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이 사람은 즉시 맞자 죽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배밖으로 즉시 뛰어나가지 않고 먼저 주님의 허락을 구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어리석은 충동이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은 충동을 요구한 장본인은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나타나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다”라는 되지도 않는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충동하였습니다. 믿음과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 부흥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급류를 만난 세 처녀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 기도한 뒤 믿음으로 급류 위에 발을 내딛다가 모두 물에 휩싸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32:9).

수요일터예배

요한일서 3장 1-3

“매듭짓기”라는 책을 보면 이재철 목사님의 젊은 시절 홍성사를 운영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배우 고은아의 동생으로1949년 생입니다. 그분이 쓴 책 매듭짓기에는 자신의 젊은 날의 소신을 적고 있습니다. 외대 불어과를 졸업한 1971년 봄 수 개월 째 신입사원으로 어느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상사가 불러 첫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세무 공무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는 이중 장부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매출을 누락하였다가 세무조사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네 준 봉투에는 10만원권 수표가 15장으로 총 15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변두리 국민주택이 60-70만원 할 때니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서 술 자리를 마련하고 봉투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세무 공무원은 자신을 불러 봉투를 주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어제 주었던 수표 중 3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달자에게 통상 30%를 주는데 이재철 사원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20%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공범을 만들어 입을 막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자,그러면 받은 돈을 전부 돌려주고 엄청난 세금을 물리겠다고 협박하여 할 수 없이 받고 회사에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회사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면 결코 탈세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사를 1974년 설립하고는 외국항공회사 총 대리점을 하면서 정직하게 세무신고를 하였으며, 여기서 그분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20대에 벤츠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977년 출판업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출판업은 그 당시 복마전이었습니다. 모든 서점이나 출판사가 세금문제 때문에 자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재철 사장은 철저하게 자료를 발생시키자, 많은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한 거래업체 사장이 오더니 거래 자료를 그렇게 100% 발행하면 홍성사의 책을 사갈 서점들이 줄 터인데 그러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공급한다는 출판사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관행에 맞추어 홍성사도 처신하였으면 한다는 권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재철 사장은 생각하기를 헌법에 기재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더 높은 의무가 아닌가 하고 판단하고 그 거래처 사장의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 일어나서 “네가 이 바닥에서 일년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소리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이후 홍성사는 무역업에서 번 돈으로 최고의 필진을 동원하여 “홍성신서”를 출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젊은 층에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일년쯤 지났을 때 그 도매상 사장님이 다시와서 거래 자료를 백 프로 받을 터이니 자신에게도 홍성신서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홍성사는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세무당국의 인정과세로 위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 결국 두 번이나 부도를 맞았으며, 이재철 사장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홍성사의 이런 노력은 출판업계를 자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부정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정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실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으며,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의 증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겉사람이 후패하며, 썪어질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여러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옛날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간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무려 7년을 노력하였지만 그것을 수일이 지난 것처럼 생각한 것은 외삼촌 라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하며 즐거이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도록 만드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29:25

본문말씀: 누가복음 12:4-1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7월 초에 우리나라 주력 상품인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중 3가지 품목을 규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8월 2일에는 화이트 리스트 즉,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 편의를 보아주는 국가들 중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걱정과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 중입니다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국가의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똘똘 뭉쳐서 나가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을 주도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은 뒤쳐저 2류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두려워 하며 주저앉냐 아니면 긍정적인 자세로 맞서 나가냐 하는 것은 한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 댄 잰슨(Dan Jansen)은 두려움 때문에 스케이트 경기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캐나다 캘러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누나의 죽음이 있었고 그는 슬픔을 안고 경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 단거리 스피드 스케이트 챔피언이었던 잰슨은 당연히 500미터 혹은 10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간 그 두 경기에서 경기도중 넘어지는 통에 메달을 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기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경험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그 다음 동계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그가 나간 단 거리 경기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기에 관하여 댄 잰슨은 “경기 도중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컨디션은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나를 붙들어 전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에서 온 두려움 때문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그는 드디어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10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존 맥아더,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121-122)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 역시 마치 댄 존슨이 두려움과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좌절을 겪을 때 먼저 두려움이 솟아 오르고 그런 두려움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련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런 두려움이 마음에 팽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들어올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치를 따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12은 이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 하라: 가장 두려운 존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둘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하라 :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참새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 역시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때에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한 마리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당 머리카락은 통상 140,000개라고 추정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전부 세신다는 그 전지하심을 늘 고려하고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자는 제대로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삶 범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기꺼히 그의 멍에를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의 의지 위에 두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베드로가 위험을 무릎쓰고 배 밖으로 나와 걸으려고 하였을 때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약속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일 브루너 박사의 관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보장이 아닌 기회를 요청한 것입니다. 배 안에 머문 제자들은 선물로 받은 훌륭한 식기 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벽장 속에 넣어둔 오토버그의 할머니처럼 배 안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여 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성장보다 안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지나가기를” 즉 모험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셨기에 그들을 피해 빙 돌아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믿음의 모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치는 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배 밖으로 나간다는 것의 위험과 고통을 이들은 잘 알았지만, 배 안에 머물었을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성장과 번영에 만족하여 거기에만 머물고, 새로운 혁신을 등한히 하여 파산한 기업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코닥이라는 회사입니다. 코닥은 전 세계 필름 산업을 장악한 엄청나게 수익성 좋은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아날로그 시대에 맞는 필름 산업에 만족하고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디지털 카메라는 코닥에서 제일 먼저 발명하였으나, 코닥의 임직원들은 그것이 자신의 필름 산업을 대체할 것을 두려워 하여 사장시키고 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 하고, 혁신하기를 거절할 경우 결국은 개인이나 기업을 실패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험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우리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18:22).

배 붙박이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간단히 말한다면 ‘성장 불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도록 지음받았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며 성장의 기적을 기뻐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사람은 성장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점점 아기의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흐뭇해 하고, 처음 “엄마”라고 말할 때 감격하게 됩니다. 성장의 기적을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체보다 슬픈 것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시작한 결혼 생활이 권태기로 접어들면서 애정은 식고 친밀감은 희미해진 부부를 보십시오. 문제를 짚어 내고, 고통에 직면하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그저 지루한 삶에 안주하여 익숙한 남남으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정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 이렇게 살면서 “나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야”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국 지루함, 즉 일면 영혼의 냉담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배에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 명의 종을 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토버그 할머니처럼, 베드로처럼, 우리들처럼, 세 종은 후한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에 대한)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이 원칙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이 원칙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지난 달 연합뉴스를 보면 강도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던 A씨는 20대 중반이었던 2006년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습니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먼저 이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벌금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진 후에 나머지 돈을 1년도 안되어 도박과 유흥에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로또를 샀지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이 곤궁한 그는 절도범으로 전락했고 13년 동안 계속 감옥을 들락거리며 다니다가 올해 또 영세 업주를 갈취한 죄명으로 구속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로또 당첨은 결코 생의 전환점으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 중 첫번 째는 “그분은 은사의 주인이시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은 자기 소유 중 첫째 종에게는 5 달란트, 둘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셋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15년치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돈은 엄첨난 부를 의미했습니다. 이 주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갑부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재력가는 세 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종을 부렸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세 사람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종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생일대의 기회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세 종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오토버그 목사님은 기회에 관하여 좋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학원에 다닐 때 사모님 낸시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돈이 없었습니다. 신혼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 떠오른 아이디어는 TV퀴즈 쇼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은 커다란 빙고 판마다 무작위로 선택된 분야의 질문이 있고, 참가자가 답을 말하면 X나 O로 표시되었습니다. 물론 항목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첫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고 이어지는 서너 게임도 무승부였기 때문에 돈이 불어나서 수천 달러가 상금으로 걸렸습니다. 상대는 변호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그 퀴즈에서 아주 많은 승리를 거두어 보너스로 자동차까지 걸려 있는 행운의 사나이였으나, 오토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가난한 교회 목사인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 변호사가 한 가지 질문을 틀렸습니다.이제 목사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이긴다면 만져본 적도 없는 큰돈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에게 주어진 분야는 ‘혼합 주류’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칸을 선택하여 다음 질문에서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이기고 싶어서 그냥 그 칸을 택했습니다. 그러자 “두 잔의 스카치와 스위트 베르무스 반 잔 등으로 만든 술은 무엇입니까?” 술을 모르는 목사로서 알 수 있는 답이 아닙니다.오토버그 목사님은 진행자에게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오답도 정답도 말하기 곤란하군요.” 라고 대답을 하였고, 결과는 뻔했습니다. 결국 목사님 부부는 근처로 신혼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토버그 목사님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났지만 그만 놓쳐 버린 기억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 뿐만 아니라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하고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인이 종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종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들의 운명을 단 한 번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세 종을 불러 놓고 어마어마한 은사를 준 것입니다. 첫 번째 종은 그의 행운을 깨닫고 ‘즉시’ 기회를 움켜잡았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절대 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움켜잡는 사람이 이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그분의 소유를 당신과 내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인이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선택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 대신 우리의 인생을 넣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능력, 우리의 영적 은사들, 우리의 몸, 우리의 돈, 우리의 의지.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회는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종은 그렇게 한 데 반하여, 세 번째 종은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받지 못할 최고의 선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친 것일까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25:24-25).

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