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넸습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태는 왜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했으며, 베드로는 왜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 후에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배에서 곧장 뛰어내려 약 90미터를 헤엄쳐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순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정한 소명과 자신의 어리석은 충동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혜와 분별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자체에 찬사를 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번지 점프를 하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재미로 물 위를 걷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극한적 스포츠가 아닌, 극한적 제자 훈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이 그것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시는지 확인했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분명한 응답을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우리는 바른 믿음과 맹목적인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른 믿음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분별한 뒤, 비록 두려움과 위험이 놓여져 있지만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 가운데 순종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전형적인 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대로 고향 하란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고 순종하여 떠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노련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폭풍이 얼마나 거셌으면 경험많은 이들이 배의 전복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을까요? 집채만한 파도, 거센 바람, 칠흑 같은 어둠…. 물결이 잔잔하고 태양이 밝게 빛나며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도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파도와 바람이 휘몰아치는 새벽 3시라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잠시 베드로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일생일대의 모험으로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물입니까 배입니까? 배는 안전하고 여러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안락합니다. 반면 물은 무섭습니다. 배 밖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으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거셉니다. 만일 배 밖으로 나간다면 물에 빠져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100여년 전에 아펜젤라 선교사 역시 수영선수 출신이었지만 파도치는 목포 앞바다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한국 여학생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학생만 구하고 자신은 물에 빠져 순직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제자 이승만은 감옥에서 땅을 치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믿음의 삶이며, 믿음의 삶은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면 반드시 배 밖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전과 안락을 약속하는 모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배는 우리가 유혹받을 때, 인생에 폭풍이 일 때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입니다. 타고 있으면 너무 편해서, 물 위에 계신 예수님께 가지 못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배는 극한적인 제자 훈련의 모험으로 가려는 우리를 붙잡는 모든 것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가장 버리기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철수에게 그것은 직업입니다. 35년 동안 건축 일을 했던 그는 지금 50대 후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사역자로 부르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헌금과 봉사로 내면의 부름을 잠재우려 했지만 소명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린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영희에게 배는 관계입니다. 그녀가 몇 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는 별로 좋은 연인이 아닙니다. 그는 절대로 먼저 애정 표현을 하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하기 꺼려하며 가능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두렵습니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녀의 배는 매우 불안정하지만 그녀는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현철의 배는 은밀한 사생활입니다. 그는 포르노 중독자이지만 그다지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출장 가서 성인 영화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인터넷을 즐깁니다. 아직은 누구도 자신이 그러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인정하기 두렵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를 죽이고 있는 은밀한 사생활이 바로 그의 배입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여러분의 배는 성공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젊은 부자 관원이 그랬습니다. 부자 관원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만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먼저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부자 관원은 그런 정도는 어릴 때부터 항상 지켜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이라는 배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배는 너무나 좋고 사치스러운 요트였습니다. 그는 그 배를 잘 조종할 수 있었고 좋아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삶에서 무엇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들고, 온전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까? 두려움은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 배를 떠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여러 가지 즐거운 유희가 기다리기도 하고, 수익성 있는 돈벌이가 생기기도 하며,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학원의 강의가 개설될 수도 있으며, 좋은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기도 하며, 여행을 가는데 걸리적 거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주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청년은 올해 노무사 2차 시험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학원 강의가 주일에 개설되었지만 교회에서 청년부의 리더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도록 선택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올해 주님의 도움을 받아 합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험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전에 미리 테스트를 하시는 경우가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뱃전으로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뱃전을 꼭 붙잡고 한 발을 조심스럽게 물 위로 내밀었습니다. 그 다음 다른 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심을 발휘하여 뱃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그러자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한동안 오직 베드로와 예수님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환희의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현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폭풍은 아까부터 불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달라진 것은 주님에게서 바람으로 옮겨간 베드로의 눈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해 보려고 할 때, 처음에는 믿음으로 충만하나, 곧 현실이 닥쳐옵니다. 실패, 역경,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사나운 폭풍이 부는 곳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건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무서워 배 안에 있다고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진실과 믿음의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
순종과 섭리
창세기 22: 9- 14
어거스틴의 저서 “고백록”에는 어거스틴이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수사학을 가르치려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 어머니 모니카에게 심한 근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모니카는 주야로 아들의 회심을 위해 주님께 간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미 20대 초반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열린 시가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카르타고 총독으로부터 직접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카르타고에서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가르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기 결심한 것은 더 좋은 보수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에 솔깃하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대한 고려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가게 된 주된, 아니 유일한 동기는 로마에서는 학생들이 좀 더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 좀 더 엄격한 규율 가운데서 질서가 잘 잡혀 있어서 가르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교실을 들락날락하거나, 남의 교실에 함부로 불쑥 난입하기도 하고, 선생의 허락 없이도 자기가 등록하지 않은 수업에 들어가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카르타고는 관습에 의하여 그런 행동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기에 어거스틴은 매우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은 학생 때에도 그렇게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였기 때문에, 로마에 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이는 어거스틴을 회심시키기 위해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로마에 가서 수사학 교사를 하다가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로 공채된 후 거기서 암브로우스 주교를 만나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는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록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과부가 된 어머니 모니카는 작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몹시 슬퍼하셔서 항구까지 따라 나오셨스며, 어거스틴을 꽉 붙으시고서는,다시 집에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애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어렵사리 설득해서, 타고 갈 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키르리아누스 기념 성당에서 그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성당에서 울며 기도하시는 사이에, 어거스틴은 그곳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모니카가 밤새 기도하였던 내용은 아들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지 못하게 해 주시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가장 깊이 보시고 헤아리시는 분이셔서, 모니카가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지금까지 늘 눈물로 간구해 오셨던 바로 그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그 밤에 기도하신 것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순풍이 불어서 어거스틴은 배를 타고 해안을 떠나가는데 그날 아침 모니카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 가운데 바로 그 해안에 서서, 하소연과 탄식으로 주님의 귀를 가득 채웠지만, 주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한편으로는 어거스틴의 욕망을 끝장내시기 위해, 욕망에 이끌려 로마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육정으로 매달리신 부분에 대해서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으로 어머니를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어거스틴이 모니카를 떠나게 하심으로, 장차 모니카를 위해 더 큰 즐거움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니카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신을 속이고 모질게 대한 것에 대하여 어거스틴을 나무라신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셔서, 다시 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주님께 계속해서 드리셨으며 그것은 드디어 수 년 후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어거스틴 고백록, 박문재역148-52).
오늘 본문에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종들과 함께 사흘 길을 걸어가 드디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할 나무를 이삭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행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하는 행동을 저지하였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보니 한 숫양 뒤에 있는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여호와 이레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섭리 가운데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를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부활의 증거와 그리스도
성경구절 누가복음 24:36-43
대한 민국 사람 가운데 400년 전에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를 가지고 수백척의 일본 함대를 쳐부순 명량대첩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이 실제로 발생하였는지의 여부는 사실상 우리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역사 책에서의 논쟁만이 뜨거울 뿐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문제는 엄청난 차이를 우리 삶에 가져오게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며, 죄사함도 없어서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성경책은 헛된 책으로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모든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목숨 걸고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헛되며 기독교가 파괴되고, 그리스도인은 전혀 소망도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망하였을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이를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사 그 날 저녁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닫혔으나 그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씀과 함께 손과 발을 보이신 후,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심으로 당신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증거하셨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몸은 영생불사의 몸입니다. 이것은 도래할 불멸의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첫 소식입니다. 부할하신 주님은 승천하사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구해내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오늘부터는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이 지은 ‘물 위를 걸으려면 배 밖으로 나와라”(If you want to walk on water, you’ve got to get out of the boat)’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2001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영성도서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두란노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습니다(2003년).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이 책을 읽을 때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제게 말하면서 추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마태복음14:22-33의 기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호수로 보내시고 자신은 기도하시러 산 위로 가셨습니다. 새벽 3시쯤 되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베드로는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수락하니 베드로는 풍랑이 거세게 일어나는 갈릴리 호수 위로 한 밤에 뛰어내렸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하자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를 토대로 소명을 따라 용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려면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안전과 안락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배를 떠나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간 가장 위대한 믿음의 선조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안전한 고향 하란을 떠나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11:8-11).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생일기념으로 열기구를 탄 적이 있습니다. 청명하고 상쾌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바위 협곡에서부터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열기구에 탄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달린 바구니의 높이는 겨우 무릎에 와 닿아 한 번만 심하게 흔들려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열기구를 조종하는 청년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음주운전으로 크게 사고를 내는 바람에 트럭운전사에서 열기구로 직업을 바꾸었는데, 그 날이 첫 번째 열기구 운전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내려갈 때 좀 흔들리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이 기구로는 비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강할지 잘 모르거든요.” 이때 과연 “조종사를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광활한 우주를 돌고 있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구 속에서, 당신과 나는 매일 여행의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의 여행은 단 한 번뿐이다. ……. 그러나 때때로 이 여행은 매우 불안정하다. 바구니의 높이가 좀 더 높으면 좋을 텐데. 이 짧은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기구가 땅에 잘 착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위험을 감수하며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믿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의 인격과 능력은 신뢰할 만한가?”이다. 우리 인생은 항상 두려움과 믿음 사이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침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참수를 당하자 제자들이 장례를 지내고 예수님께 이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를 들으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벳세대 인근의 광야로 소위 리트릿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많은 백성들이 도보로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겨 주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날이 저물자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태워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게 하신 뒤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밤 4경 즉 새벽 3시 즈음 되자 산에서 내려와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푹풍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너무나 거센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무언가가 물 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누구겠는가! 그러나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때로는 우리 옆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폭풍이 몰아칠 때, 실망과 의심의 물결 속에서 고난당할 때, 우리는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의 임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러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선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예수님은 왜 새벽 3시에 물 위를 걸어다니셨을까요? 데이비드 갤런드는 이 이야기의 마가복음 판에서 단서를 발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 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갤런드에 따르면 “지나가다”의 헬라 원어 “파레르코마이”는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서 신현(神顯)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즉 “신현”이란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시려고 지상에 일시적으로 나타나시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셔서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가 볼 수 있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지나가실’ 것이니 산에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함께 검토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바람과 불, 물 위로 걷기를 통해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위해 각 사람을 부르셨고 그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름에 “예”라고 답하자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제자들 곁을 지나가려 하신 것은 하나님이신 자신의 거룩한 임재와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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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 – 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생일 기념으로 열기구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두 분은 기구가 떠오르는 들판으로 가서 다른 부부 한 쌍과 작은 바구니에 올라탔습니다. 서로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고 나니 조종사가 기구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명하고 상쾌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그들은 바위 협곡에서부터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열기구에 달린 바구니의 높이는 겨우 무릎에 와 닿았기 때문에 한 번만 심하게 흔들려도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긴장했고 꽉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님뿐이 아니었습니다. 탄 모든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사모님은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긴장하여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열기구가 둥둥 떠가는 동안 사모님 바로 뒤편에 말 목장이 보였기에 말을 매우 좋아하는 사모님을 위해 그곳을 가리켰지만 사모님은 몸은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능한 최대로 눈동자를 뒤로 굴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고는 “아 멋지네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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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읽기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모든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모압의 신인 그모스나 암몬의 신인 밀곰과 같은 히브리인들의 신 정도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모든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민족의 주이시며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른 창세기12장의 기사 역시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한 가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택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구약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우주적 전망을 망각하고, 선택의 교리를 편애의 교리로 강등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정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할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민족을 밝힐 빛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사야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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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기진맥진하고 실망한 베드로의 물고기를 잡은 이적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비범한 권위가 진실한 제자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의인- 스스로 의로운 자 – 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예수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는, 산상수훈에서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급진적 가치들을 정의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원수까지 포용하는 사랑입니다. 이 가르침을 남기시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는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가치들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고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충분하고 시간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고 건강과 평화를 구가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버립니다(남양유업 외조카 황하나의 경우). 그들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지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교훈적 유익을 줍니다.”(칼빈 – 김용규, 신, 641)
스티븐 라박기(Steven Lavaggi)는 자기 침실마루에 앉아서 열심히 성경을 찾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막 자신을 떠나 “The Rolling Stone Magazine” 잡지의 작가와 결혼하러 갔습니다. 열흘 뒤 스티브는 자신의 아들이 소아 당뇨에 걸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그는 실직하였습니다. 그는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실직하였습니다. 버림받고 아들의 병에 대한 걱정 그리고 실직이라는 버거운 현실을 맞이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스티븐은 검은색 글씨는 건너 뛰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읽기를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런 가운데 스티븐을 만나주셨고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동굴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비로서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새 신자가 된 그는 시편 91:11절을 붙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할 것이다” 그의 상실된 마음으로부터 창조하고 싶은 정열과 소망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스티븐의 열정은 순수미술(fine art)을 통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헐리우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단지 순수미술을 하였고 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시편기자의 말에 영감을 받은 그는 4X5 피트의 천사를 그렸습니다. 친구가 그 이미지를 3차원으로 만들자고 권했을 때 그는 조각가와 함께 일해 결국 그 천사를 주조해 내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 소웨토에서 3,500명의 원주민들에게 말할 때 그는 20피트짜리 검은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고 그 군중들은 열광하여 일어났으며 그는 다시 20피트짜리 흰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습니다. 이 두 천사를 “화해의 천사들” 이라고 명명한 뒤 이들은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알칸소의 레이크 빌리지라는 도시에 두었습니다. 스티븐의 메시지는 그의 정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낮에는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의 정열은 밤에 잉태되었습니다. 이혼 당하고, 실직하고, 그의 아들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동안 마루바닥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이런 투쟁을 통해 그는 정열을 얻었고 오늘날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라고 부르는 동굴에서 하나님은 이런 정열을 우리 마음에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