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오늘부터는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이 지은 ‘물 위를 걸으려면 배 밖으로 나와라”(If you want to walk on water, you’ve got to get out of the boat)’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2001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영성도서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두란노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습니다(2003년).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이 책을 읽을 때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제게 말하면서 추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마태복음14:22-33의 기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호수로 보내시고 자신은 기도하시러 산 위로 가셨습니다. 새벽 3시쯤 되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베드로는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수락하니 베드로는 풍랑이 거세게 일어나는 갈릴리 호수 위로 한 밤에 뛰어내렸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하자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를 토대로 소명을 따라 용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려면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안전과 안락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배를 떠나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간 가장 위대한 믿음의 선조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안전한 고향 하란을 떠나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11:8-11).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생일기념으로 열기구를 탄 적이 있습니다. 청명하고 상쾌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바위 협곡에서부터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열기구에 탄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달린 바구니의 높이는 겨우 무릎에 와 닿아 한 번만 심하게 흔들려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열기구를 조종하는 청년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음주운전으로 크게 사고를 내는 바람에 트럭운전사에서 열기구로 직업을 바꾸었는데, 그 날이 첫 번째 열기구 운전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내려갈 때 좀 흔들리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이 기구로는 비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강할지 잘 모르거든요.” 이때 과연 “조종사를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광활한 우주를 돌고 있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구 속에서, 당신과 나는 매일 여행의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의 여행은 단 한 번뿐이다. ……. 그러나 때때로 이 여행은 매우 불안정하다. 바구니의 높이가 좀 더 높으면 좋을 텐데. 이 짧은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기구가 땅에 잘 착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위험을 감수하며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믿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의 인격과 능력은 신뢰할 만한가?”이다. 우리 인생은 항상 두려움과 믿음 사이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침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참수를 당하자 제자들이 장례를 지내고 예수님께 이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를 들으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벳세대 인근의 광야로 소위 리트릿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많은 백성들이 도보로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겨 주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날이 저물자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태워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게 하신 뒤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밤 4경 즉 새벽 3시 즈음 되자 산에서 내려와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푹풍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너무나 거센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무언가가 물 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누구겠는가! 그러나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때로는 우리 옆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폭풍이 몰아칠 때, 실망과 의심의 물결 속에서 고난당할 때, 우리는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의 임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러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선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예수님은 왜 새벽 3시에 물 위를 걸어다니셨을까요? 데이비드 갤런드는 이 이야기의 마가복음 판에서 단서를 발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 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갤런드에 따르면 “지나가다”의 헬라 원어 “파레르코마이”는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서 신현(神顯)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즉 “신현”이란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시려고 지상에 일시적으로 나타나시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셔서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가 볼 수 있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지나가실’ 것이니 산에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함께 검토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바람과 불, 물 위로 걷기를 통해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위해 각 사람을 부르셨고 그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름에 “예”라고 답하자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제자들 곁을 지나가려 하신 것은 하나님이신 자신의 거룩한 임재와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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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4:22 – 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생일 기념으로 열기구를 타기로 하였습니다. 두 분은 기구가 떠오르는 들판으로 가서 다른 부부 한 쌍과 작은 바구니에 올라탔습니다. 서로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고 나니 조종사가 기구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명하고 상쾌하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그들은 바위 협곡에서부터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열기구에 달린 바구니의 높이는 겨우 무릎에 와 닿았기 때문에 한 번만 심하게 흔들려도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긴장했고 꽉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님뿐이 아니었습니다. 탄 모든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사모님은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긴장하여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열기구가 둥둥 떠가는 동안 사모님 바로 뒤편에 말 목장이 보였기에 말을 매우 좋아하는 사모님을 위해 그곳을 가리켰지만 사모님은 몸은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능한 최대로 눈동자를 뒤로 굴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고는 “아 멋지네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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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읽기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모든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모압의 신인 그모스나 암몬의 신인 밀곰과 같은 히브리인들의 신 정도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모든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민족의 주이시며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른 창세기12장의 기사 역시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한 가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택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구약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우주적 전망을 망각하고, 선택의 교리를 편애의 교리로 강등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정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할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민족을 밝힐 빛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사야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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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5:1-11

기진맥진하고 실망한 베드로의 물고기를 잡은 이적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비범한 권위가 진실한 제자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의인- 스스로 의로운 자 – 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예수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는, 산상수훈에서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급진적 가치들을 정의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원수까지 포용하는 사랑입니다. 이 가르침을 남기시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는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가치들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고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충분하고 시간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고 건강과 평화를 구가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버립니다(남양유업 외조카 황하나의 경우). 그들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우리로 하여금 다시 지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교훈적 유익을 줍니다.”(칼빈 – 김용규, 신, 641)

스티븐 라박기(Steven Lavaggi)는 자기 침실마루에 앉아서 열심히 성경을 찾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막 자신을 떠나 “The Rolling Stone Magazine” 잡지의 작가와 결혼하러 갔습니다. 열흘 뒤 스티브는 자신의 아들이 소아 당뇨에 걸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그는 실직하였습니다. 그는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실직하였습니다. 버림받고 아들의 병에 대한 걱정 그리고 실직이라는 버거운 현실을 맞이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스티븐은 검은색 글씨는 건너 뛰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읽기를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런 가운데 스티븐을 만나주셨고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동굴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비로서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새 신자가 된 그는 시편 91:11절을 붙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할 것이다” 그의 상실된 마음으로부터 창조하고 싶은 정열과 소망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스티븐의 열정은 순수미술(fine art)을 통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헐리우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단지 순수미술을 하였고 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시편기자의 말에 영감을 받은 그는 4X5 피트의 천사를 그렸습니다. 친구가 그 이미지를 3차원으로 만들자고 권했을 때 그는 조각가와 함께 일해 결국 그 천사를 주조해 내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 소웨토에서 3,500명의 원주민들에게 말할 때 그는 20피트짜리 검은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고 그 군중들은 열광하여 일어났으며 그는 다시 20피트짜리 흰 천사의 조각물을 만들었습니다. 이 두 천사를 “화해의 천사들” 이라고 명명한 뒤 이들은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알칸소의 레이크 빌리지라는 도시에 두었습니다. 스티븐의 메시지는 그의 정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낮에는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의 정열은 밤에 잉태되었습니다. 이혼 당하고, 실직하고, 그의 아들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동안 마루바닥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이런 투쟁을 통해 그는 정열을 얻었고 오늘날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라고 부르는 동굴에서 하나님은 이런 정열을 우리 마음에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모든 사람이 종교적인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은 야심적입니다. 야심적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일에 성공하고 싶어 하거나 생을 걸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무리 작은 소년이라 할지라도 야심이 있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카우보이가 되거나 비행기 조종사 또는 더 나아가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소년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 또한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나 유명인, 또는 권력가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의 야망이란 우리 앞에 최고의 선으로 두고서 거기에 우리 삶을 다 바쳐 헌신하는 무엇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 교육론’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4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위에 있는 하나님, 둘째 우리 자신, 셋째 우리 옆에 있는 이웃, 넷째 아래에 있는 물질입니다. 예수님이 첫째 ‘하나님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둘째와 넷째인 우리 자신과 물질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도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 있고 우리 자신과 물질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안정하고 공허한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우리 자신과 물질에 대한 사랑만 갖고 산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맹목적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 네 가지 사랑은 잘 조화를 이루어야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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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이사야 40:31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새가 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날개를 퍼덕이는 방법입니다. 벌새는 일초에 무려 70번 이상을 퍼덕여서 몸을 공중에 고정시키고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새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공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계속 날개짓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기류를 타고 활강하는 방법입니다. 활강하는 법은 아는 새는 기류를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가면서 별 힘 안들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즐깁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멀리 가지를 못합니다. 세 번째 방법은 기류를 타고 공중에 솟구치는 방법입니다. 독수리와 같이 오직 몇몇 새들만 이런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매우 강해서 따뜻한 기류가 땅에서 솟구치어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속에 들어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혀 날개짓을 하지 않고 솟구치어 매우 높이 올라가는데 그때의 순간 속도는 약 13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와 같이 공중에 솟구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독수리인 것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어떤 농부가 어린 독수리 새끼를 잡아 집에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뒷마당에 있는 닭장 안에 가두어 두고 날마다 먹이를 주면서 돌보고 있었는데 그 독수리 새끼는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행동거지가 꼭 닭을 닮아 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땅만 쳐다보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무엇인가를 쪼아 먹는 시늉을 하면서 노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독수리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지방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그 집을 방문하여 닭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이 독수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수리를 하도 많이 보고 산 사람이라 진짜 독수리라면 저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의논하여 한번 시험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독수리를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큰 바위에다 내려놓았습니다. 푸른 하늘과 확트인 광활한 들판을 얼마 동안 쳐다보던 독수리는 거침없이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새는 독수리이지 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옥한흠,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5).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계기가 닥칩니다. 그것이 회사의 바쁜 사정일 수도 있고, 아이들의 진학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많은 돈을 버는 시점이나, 직장에서 승진하는 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붙잡아야만 합니다. 이런 갈림길에 왔을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다는 것을 아뢰고 주님의 뜻이라고 판단되는 길을 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길을 갈 경우, 때로는 솟구칠 때도 있지만, 뛰어갈 때도 있습니다. 이 정도도 좋습니다. 그러나 계속 걷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계속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닥칠 때 우리는 달려가거나 아니면 공중으로 순식간에 솟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마음에 간직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