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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큰 의로 부르십니다. 이 의(義)는 비기독교적 세상의 의보다, 심지어는 타종교의 의보다 더 큽니다. 마태복음5:2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248개의 명령들과 365개의 금지 사항, 즉 모두 합해 613개의 하나님의 법령이 있다는 것을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명령 가운데 많은 것을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우리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크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해지기는커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마음의 의, 사고와 동기에서 나오는 내적인 의이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의가 그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해석에서 바리새인들은 살인행위 자체를 하지 않으면 그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어도 의의 기준에 적합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벌써 살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의가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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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7 – 평화

14: 27절 평화를 남겨두신다. 평화(eirēnē)는 히브리어 살롬을 반영한다. 살롬은 관례적으로 유대인들이 인사와 작별의 말이다. 여기서는 작별의 의미가 우선적으로 있다(참고 16:33). 그가 제자들에게 남겨두신 평화라는 작별의 단어는 부활 후에 인사의 말이 되어 버렸다((20:19, 21, 26). 여기서 평화라는 단어에 깔려있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이다. 평화는 구약에서 예기된 메시야 왕국의 근본적인 성격들 중 하나이다 (Nu. 6:26; Ps. 29:11; Is. 9:6–7; 52:7; 54:13; 57:19; Ezk. 37:26; Hg. 2:9) 그리고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행10:36; 롬1:7;5:1;14:17).  새로운질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인 것이다개인적인 차원에서  평화는 환난 중에 침착을 확보하게 해주고 그리고 두려움을 해소해 준다. 그런면은 이 구절의 마지막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근심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말아라). 이것은 우리 마음과 생각들을 근심으로 침공할 때 파수해주는 바로 그 평화이며(빌4:7),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들 가운데서 다스리고 중재하여 그들 중에 조화를 유지하도록 한다.

예수님은 이 평화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평화를 주는데 무력하다. 평화를 향한 모든 노력은 재빨리 미움, 이기심, 쓴뿌리, 악의 걱정과 두려움에 의해 함몰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월적인 평화를 보여준다.이는 그 자신의 평화인 것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의 전 시간을 통해 존재한 평화인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악의와 세상의 죄를 그 스스로 안에 흡수하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방법으로 약속된 메시아적인 평화를 도입하였다. . 로마의 평화는 잔인한 검으로 달성되었다. 그러므로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적 평화는 더 강력한 검으로 확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것은 로마, 유대인 그리고 우리 모두의 손에서 고난당하고 죽은 죄없는 사람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의 죽으심으로 그는 당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발진시켰다. 그러므로 모든 지각(이해)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그 평화인 것이다(빌4:7)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그 평화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만큼이나 동터오는 왕국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의 두려움들을 대처해 주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1,27). 참고) 갈라디아서5장 22절 – 사랑과 희락과 화평

여기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으로 나온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의사 나가이는 불교에서 카톨릭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그의 아내는 결혼 전 몇 년 동안 그의 개종을 위하여 기도했다. 미국인 처크 스위니가 목표지점인 코쿠라에 도착했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폭탄 투하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의사 나가이는 방사선 연구소에 있었고, 그의 아내 미도리는 집에 있다가 순식간에 타 버려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두 아이와 할머니는 피폭 방지를 위해 언덕으로 옮겨 졌고 살아남았다. 그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 속에서 그의 직업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로, 그리고 우라카미 성당을 중심으로 한 교회 공동체에 바치는 선물로 변화되었다. 나가이는 그 자신도 방사능 피폭 때문에 야위어 가면서, 방사능 낙진과 죽음의 공포로 고통받던 환자들을 치료했다. 다음의 말은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의사들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한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함께한다. 환자가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다면 의사도 그렇다. … 환자 한 명 한 명이 당신의 형제,당신의 누이, 당신의 어머니가 된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 나는 의료가 소명, 즉 하나님에게서 온 개인적인 부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은 환자를 검진하고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주사를 놓는 일이 모두 하나님 왕국의 일부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어느새 그동안 치료했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의사 나가이는 자신의 생명보다 환자들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건강을 위험에 내던지면서도 봉사와 연민, 고통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의사 나가이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르쳐 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에게 놓인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정성을 쏟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대단히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런 삶을 살아가던 의사 나가이는 원자 폭탄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기 몇 달 전, 자신이 방사선으로 인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3년밖에 수명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그는 부인 미도리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 날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식탁에서 일어나 가족 제단 위에 있는 등을 켰다. 그리고 단아하게 정좌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250년이라는 핍박의 세월 동안 지켜왔던 십자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도 그녀를 따라가 그녀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요동치는 감정이 가라않을 때까지 거기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서 미도리가 의사 나가이에게 말했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우리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삶도 죽음도 아름다울 것라건 이야기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일에 쏟아부었어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에요. 나는 당신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믿어요.” 의사 나가이는 이 말을 듣고 애써 눈물을 참았는데 그것은 연민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었고 그는 자신이 거룩함에 휩싸여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의사 나가이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께 그들의 삶을 바쳤으며,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나가사키를 위한 한 그리스도인의 노래였다. 나가이 역시 몇 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스캇맥나이트, 산상수훈,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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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주변에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고 자신을 선전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군중이라는 익명성을 더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적당히 묻혀 살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의 동질성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동질성 가운데 안전함을 느끼며,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이질적인 사람이 있으면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사함은 인간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별된 사람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또는 적어도 창세기 12장부터 끝까지 줄곧 흐르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집을 떠남으로써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하시고는, 그가 유업으로 받게 될 땅으로 가서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와 네 후손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하나님은 그들이 모든 사람과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구약은 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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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24 -27

1966년 10월 21일, 웨일즈의 작은 마을 애버팬에 다시 눈부신 아침이 밝았다. 웨일즈 남부의 반짝이는 에메랄드 계곡에 먼동이 트자 탄광촌 산자락에 점점이 모여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가옥들 안에서 부락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수 부락을 탄생시킨 탄갱 속으로 잿빛 코트 차림의 사람들이 속속 줄지어 들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 살 난 소녀 딜리스 파월은 자갈길을 걸어 메리가에 있는 팬트글라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급우들과 모였다. 위풍당당한 붉은 벽돌 건물은 평소 인근 250여 아이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갱도에서 평생의 흉터를 얻은 노련한 남녀들에게 이 마을은 그런데로 좋았다. 다만 동구 밖에 불길한 듯 서 있는 높다란 검은 산만이 예외였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모양이 특이한 덩치 큰 바위, 지표면을 뚫고서 전 지역의 기반 노릇을 하는 단일한 암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버팬 사람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애버팬을 고향 삼아 살아온 노동의 세월을 의미하는 기념비였다.

1870년부터 계곡 바닥에 탄 부스러기가 점차 높은 더미로 쌓여갔다. 공중 케이블로 대형 통들을 운반하여 근 1세기가 다 되도록 계속 석탄 찌꺼기를 쏟아내온 것이다. 긴 세월 동안 부락민들이 으레 그러려니 하며 안심하고 있는 사이 석탄 더미는 점차 자연스런 풍광의 일부가 되었고 이제 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했다. 시월 들어 계곡에 이상 폭우가 쏟아져 석탄 더미와 주변의 흙은 거대한 스펀지로 변했다. 10월21일 아침, 인근 탄갱의 정비 노동자 데이빗 존 에반스는 거대한 덩이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확인하려 쓰레기 더미 근처의 언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상 최악의 탄광 사고 가운데 하나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오전 9시 반, 딜리스 파월은 친구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출석 부르기를 기다리며 우리끼리 웃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나더니 교실이 붕 뜬 것 같았다. 책상들이 넘어졌고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펄 크로우 여사는 길 건너에서 묵직한 굉음을 듣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만 쓰레기 더미가 움직이며 조금씩 학교 쪽으로 쏟아지더니 학교가 일부 붕괴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고 하였다. 귀네스 데이비스 여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산이 학교를 덮쳐버렸다”

불과 몇 초만에 애버팬의 얼굴이 영원히 바뀌었다. 2백만 톤의 석탄과 돌과 진흙이 폭우에 녹아 산비탈과 계곡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학교는 모여 있던 가옥들과 함께 무너졌다. 사망자만 2백 명이 넘었으며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애버팬의 한 세대 전체가 사실상 사라진 셈이었다. 모두가 산같지 않은 산 때문이었다. 애버팬 사람들은 오랜 수고로 마을을 세웠다. 거대한 석탄 산은 긴 세월 부지런히 일하여 웨일즈의 풍광에 새겨낸 그 고장의 명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세대를 타고 이어지던 살아 있는 유산이었다. 그러나 단 하루만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 하루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13-15)

우리의 믿음도 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성서 해석으로 인한 잘못된 가르침이나, 잘못된 생각은 우리 주위에 건강에도 좋지 않고, 위험한 석탄 더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계속될수록 위험은 점점 더 커지고 급기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와 부딪치면 그 믿음의 집은 무너져 무너짐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반석 위에 세워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반석은 삶의 목표를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히 세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면 지혜와 지식을 얻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될 뿐더러, 우리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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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의 사회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자기 의에서 나온 혐오감을 갖고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 세상 가운데서 폭력, 거짓, 탐욕, 풍요, 그리고 음란물을 목격하고 그것들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자기 의에 차서  “세상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고기가 썩어 갈 경우,고기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번식하도록 내버려 두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소금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한편 집이 어두울 경우 밤을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가 지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사회가 부패해 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더 나은 교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고, 세상이란 교회가 봉사하고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 민국이 과거 독재정권의 압제로 어두웠고 그로 인해 국민들이 신음을 할 때 많은 교회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러는 중에도 천주교회는 상당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명동성당은 경찰들이 진입하지 못하는 성지와 비슷하게 인식이 되어 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분들의 피난처로, 그리고 목소리를 내는 장소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김재준, 박형규, 문익환 등 적지 않은 개신교 목사들과 서울의 새문안 교회와 같은 여러 교회들이 박해받을 것을 잘 알고도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국민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을 겪으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충성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산상 수훈의 8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시작한 뒤 그 끝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맺음하고 있음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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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6-10

지구 상공 610km에서 지구 주위를 돌면서 천체의 측광관측과 분광관측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허블우주망원경은 궤도에 오른 지 29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도 우주 탐사에 앞장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우주왕복선을 타고 지구궤도 위로 올라간 허블 천체망원경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마땅히 그 일은 천문학 역사상 최대의 위업이 되어야 했다. 비용이 근 40억 달러나 들었고, 6천 명 이상의 사람이 거의10년 간 매달린 일이었다. 명칭도 천문학의 가장 유명한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에드윈 허블 박사의 이름을 땄다. 그는 인류의 우주관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우주가 정상상태로 존재한다는 과학이론이 주된 학설이었을 때 허블 박사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정상상태의 우주에서 팽창하는 우주로 우주관을 바꾼 사람이다. 개념은 고성능 망원경을 궤도에 올려놓아 지구 대기권의 일그러짐 효과가 없는 먼 상공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자는 것이었다.과학자들은 138억 광년 이상의 거리에서 빛을 받아 해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전국의 전문가들이 도급을 맡아 수천의 중요한 부품 개발을 감독했다. 섬세하게 작동할 1.2톤 망원경의 동력원으로 대양 전지판이 설계되었다. 무한대 거리의 우주에서 대물(對物)에 정

확한 조준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정교한 회전의(回轉儀) 시스템을 개발했다. 예술의 극치는 망원경의 본 렌즈였다. 지금 3미터의 오목 렌즈를 정확한 사양대로 갈아 걸작으로 만드는 데 6년이 걸렸다. 그 긴 과정에는 렌즈 전체의 경도를 똑같이 유지하면서 매번 극미하게 정도를 높여가며 렌즈면을 닦는 일도 포함되었다. 드디어 1990년 4월24일, 로켓 엔진의 굉음이 나사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의 발사를 알리며 플로리다 주 중부를 뒤흔들었다. 왕복선 우주 비행사들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지구 500킬로미터 상공의 궤도에 올려놓아야 했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우주 망원경 과학 연구소에서는 사람들이 컴퓨 화면 앞에 우르르 모여 세계 최초의 궤도 관측소에서 보내올 첫 영상을 기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기대의 분위기는 점차 당황으로, 당시 불신으로 그리고 마침내 극도의 경악으로 바뀌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 터졌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행성들도 흐릿한 덩어리로 보였다. 잘 알려진 별들은 지상에서 볼 때만큼이나 가물가물했다. 조사해 보니 본 렌즈의 초점이 사람 머리털 지름의 50분의 1만큼 비켜나 있었던 것이다. 망원경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오차를 교정하려면 4년의 세월과 수억 달러의 돈이 필요했다. 대담한 우주 유영을 통해 우주 비행사들은 망원경 안에 정교한 교정 렌즈 시스템을 장착했다. 우주 프로그램의 최대 과오 중 하나는 이렇게 폐기물 신세를 면했다. 모두가 작은 실수 하나 때문이었다. 가장 민감한 기계 장치로만 탐지될 수 있을 만큼 작은 실수였다”.(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

자연법칙에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사경들에 비취어서 모인 빛을 한 초점에 모아 이를 사진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약간의 실수로 수십억 달라가 든 허블 망원경은 고철덩어리가 될 뻔하였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세상적인 삶에 투자를 하여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져도,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그의 삶은 흐릿하여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좋은 방법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먼저 공고히 하여야 합니다.이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는 삶, 즉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간절히 기도하게 되어 있고 이에 따라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 삶 역시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잠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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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말과 행위를 결합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남미 지역에 레오니다스 프로아네오 라는 로마 가톨릭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에서 남방으로 16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리오 밤바 교구의 주교였습니다. 성경에 바탕을 둔 생각을 갖고 있던 주교는 사회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인디언들의 문화가 보존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와 교회 제도 양 체제에 비판적이었고, 봉건 제도와 부유한 지주들의 세력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목사님 자신을 암살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슬프게 자책하면서, 때때로 우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우리가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는 좋은 잣대가 아닌지 생각해 본다고 하였습니다. 즉 참된 기독교는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예수를 없애려 했고 또 사도들을 없애기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없애고자 하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자주 진정성을 잃기 때문에 사회로 하여금 우리를 없애야겠다고 결심하게 할 만큼 사회를 귀찮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면을 한 번 되새겨 보면서 너무나도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하여 소금과 빛으로서의 성도의 삶이 퇴색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잘 보이기 마련이다.”(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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