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5:15-16

인터넷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열차에서 사과를 파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차 통로를 지나며 “사과 팝니다. 사과 하나 사실래요?”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열차의 끝부분까지 갔지만 사과는 여전히 한 개도 팔지 못하였습니다. 곤경에 처해있는 소년을 본 한 신사가 소년을 옆으로 불러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기차 앞쪽으로 가더니 그 사과를 냅킨으로 광이 나게 닦은 후, 통로를 지나가며 사과를 먹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맛있고 신선한지를 애기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소년에게 한 번 더 팔아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사과가 모두 팔렸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사과가 잠재 고객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에는 지혜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바로 지혜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외인들에 대하여는 지혜롭게 처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지혜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복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삶이 바뀌어지려면 우리가 산상수훈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진수를 실천하면 자연히 바뀌어집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원수된 우리들을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복음의 진수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지혜와 모든 총명이 없이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지혜를 구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역시 제한된 시간만을 가지고 있고, 복음 전도 이외에도 가정, 학교, 직장 등 우리에게 맡겨진 많은 일들이 있어, 이를 위해 삶이 잘 계획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라 혹은 모든 기회를 선용하라 혹은 시간을 구속하라(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시간을 재평가하라)는 말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좋은 팁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몰간 박사가 학창 시절부터 실행하였던 방법입니다.

“주님 오늘 당신의 의제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을 한다.

1. 여러분의 계획을 조심스럽게 작성한다. – 종이 위에 7개의 수직선을 긋고 이어 수평선을 하나 하나 그으면서 그 날 할 일들을 조심스럽게 적어내려간다.
2. 현명하게 교란요소를 대처해 나간다 – 계획한 일을 실천해 나가다 보면 그 계획을 교란하는 요소가 등장히는데 그것이 그 날 주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3. 실망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4. 열린 문들을 찾아 본다
5. 계획한 일들을 기쁘게 실천해 나간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6. 미해결 과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라

매일말씀나눔

2018. 12. 10 – 14

우리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있고,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명하시는 분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어부 시절의 시몬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뿌옇게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호수에서 어부로동업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밤새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호반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빌려 띄우고 그것을 강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시몬은 밤새 노력했지만 잡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였는데 이는 어부로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고된 경험으로 다져온 전문 지식으로 그분의 제안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신 분은 다른 동료가 아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야 했고, 결국 두 배 모두 고기의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눅5:1-11).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다른 모든 순종과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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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빌립보서 4: 6-10

알 수 없는 불안 – 어떤 분이 월요일 전화를 해 왔습니다. 예전에 어떤 동영상에서 사람의 머리에서 애벌레를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새벽 자신의 강아지의 겨드랑이에서 애벌레를 꺼내는 꿈을 꾸고는 아침까지 불안이 들어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유투뷰에서 누가복음을 대본으로한 성서 영화를 보고는 힘을 얻고 불안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꿈 속에서 꺼낸 애벌레가 바로 두려움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약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불안이 바로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고도 합니다. 우주에는 사람을 위한 아무런 계획이 없고 오직 불안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불안에서 탈출하는 것이 여러분의 관심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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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12. 3 – 7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말을 옮긴 것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말 그대로 그분을 위해 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일한 열망은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이든 ‘그리스도를 위해’ 하면 그 행동의 색조가 선명해지고 밝아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의도입니다. 사실 행동의 선하고 악함, 친절하고 잔인함, 아름답고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배후의 의도 즉 동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 이면에 숨은 생각과 동기를 보신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고,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더 읽기

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12:29 – 40

과천에 있는 서울 현대미술관에 가면 작고한 박이소라는 작가가 만든 콘크리트 배라는 조형미술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작품에 달려있는 해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은 박이소(당시 박모)가 1995년 미국에서 귀국 후 개최한 첫 개인전에 출품된 배 형상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져 물에 뜰 수 없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과 그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현실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개인전 당시 이 작품 바로 옆에는 박이소가 직접 번역하고 부른 (정직성-Honesty)이 흘러나오는 종이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작품의 배치를 감안하였을 때 이 배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문화 전달자’를 표상하고 동시에 온전한 문화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런 점에서 ‘무제’는 타문화권에서 작가가 느낀 문화적 교류의 갈증과, 문화가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아 겪은 좌절이 동시에 투영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래 박이소라는 작가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 이 작품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있을 곳이 없어 누이집에 머물렀는데 미국에서 공부를 한 동생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콘크리트 배만 가지고 돌아오자 화가 나서 망치로 그 작품을 깨어 부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18년에 박이소의 후학들이 그 작품의 진가를 알고 보존된 설계도를 참조하여 원형을 복귀하여 현대 미술관에 설치해 놓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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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11. 26 – 3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섬긴 삶이라면 고 테레사 수녀보다 더 확실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191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열두 살 때 수녀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열일곱 살에 인도로 떠났습니다.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교장이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는 지저분한 모티질 빈민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마음 깊이 걸려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빈자 중의 빈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인도인으로 귀화한 그녀는 1950년에 ‘자비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원을 따로 세웠습니다. “흰 사리를 걸친 가냘픈 단신의 여인”, “상시 가동 중인 이 뜨거운 발전기”는 그때부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가지를, 병든 자에게 약을, 나환자들과 난민들에게 정성 어린 간호를,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과 교육을 죽어가는 이들에게 품위와 위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25년도 채 못 되어 1,000명 가까운 수녀들과 185명의 수사들이 그녀의 수도회에 들어가 베트남, 예멘, 예루살렘, 호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기부금의 사용이 지혜롭지 못한 점, 독재자와 금융사기자를 옹호한 적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 구원자로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테레사 수녀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테레사 수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캘커타 모원 (母院)의 거실에 걸린 액자에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수녀는 가난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혐오감을 줄수록 수녀는 그렇게 흉하게 위장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즐거운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데스몬드 도이그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첫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죽어가는 빈자들을 섬기는 집인 카리가트의 니르말 호리데이는 칼리 사원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고, 그녀는 방금 데려온 한 죽어가는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더기를 벗기자 그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섬뜩한 산송장이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벵골 말로 그에게 다정히 말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조용히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토 다스라는 젊은 인도인이 그녀를 거들다가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다 씻긴 후에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씻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씻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것을 테레사 수녀에게 배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내 손이 닿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이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집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빵 한 조각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분을 대접한다.” 테레사 수녀와 달리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셨으나 세상에 계셨을 때 집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오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놀라운 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족 안에서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우리도 그들이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고용주이든 피고용인이든 양심적으로 처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의 상전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드리고 싶은 똑 같은 관심을 그들에게 베풀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최대 관건은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Lord of all )이십니다(행10:3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두거나 벽장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일요일이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요16:14) 것이 성령님의 본연의 사역인 까닭입니다. 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들을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셋째 아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여야만 하고 이웃은 우리 자신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1:7-15

이번에 한국에 상영된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는 이미 미국에서는 4월경에 상영된 영화입니다. 내용은 사도 바울께서 네로 황제 말기인 AD 67년경 마지막으로 로마의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벌어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원 누가는 열심히 바울을 간호하기 위해 감옥을 드나들고 있었고, 바울의 동료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의 구석진 곳에서 도피중인 그리스도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네로가 불지른 로마시 화재의 책임을 지고 잡혀 화형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자 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의견대립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무력투쟁을 하자는 편이고, 다른 편은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이주를 하자는 편이었습니다. 무력투쟁을 하자는 청년들은 무리를 지어 경비병을 죽이고 로마 감옥으로 쳐들어가 사도 바울을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의 길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 예수의 가르침과 틀리다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감옥에서 나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살벌한 순간에 로마 감옥을 관리하고 있던 로마 장군은 딸이 죽을 병에 들어 유명한 의원은 전부 초빙하여 진료를 받았지만 끝내는 치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망연자실하여 집에 모시고 있던 우상에게 제물을 바쳐 딸을 회복시키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장군이 사도 바울을 면담하는 중에 바울은 그 장군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누가를 위대한 의원이라고 추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던 로마 장군은 딸의 병을 도저히 고칠 수 없자 누가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누가는 가자마다 장군의 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진단을 할 수 있었고 칼로 몸에 차오르는 피를 뽑아내 살려냈습니다. 그 와중에 로마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및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서 집단 생활하는 곳을 장군에게 알려주고 필요한 약재를 직접 받아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원수의 딸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이 은거한 장소를 노출시킨 누가 및 그런 장군을 받아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에 이 장군은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에 의해 화재의 주모자로 이미 사형판결을 받은 바울을 구하여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은 계속해서 매를 맞는 등 고난을 당하였고,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자기가 그 옛날 박해하여 죽이던 그리스도인들 형제 자매의 얼굴이 환상 가운데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로마 병사들의 손에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나고 있습니다. 크게 볼 거리는 없지만 사도 바울의 일관된 믿음의 삶과 그를 도우는 의원 누가의 충실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