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읽기

2018. 9. 27-28

진정한 자유와 만족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그분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내 신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통제가 가해지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믿을 바를 일러주신다면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행동방식을 지시하신다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자신의 자유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란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진리의 권위입니다. 생각이 거짓을 믿는다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망상과 오류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사고란 진리를 믿을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문제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이든 성경 진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깨닫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서 우주 여행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둘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생각이 진리의 권위 하에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것처럼 비슷하게 의지(뜻)도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의의 권위입니다. 의지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아집과 정욕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기준에 순종할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누군가 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의 순리라고 답할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와 선이시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진리를 탐색하고 믿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 우리를 도덕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덕법은 이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꼭 맞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과 성경에 ‘기록하신’ 도덕법은 그분 자신의 속성인 영원한 의와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는 그분의 진리를 믿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하여 자유를 얻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꼭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는 데 있지 않고 달게 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 우리는 가장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1-32 사역)

수요일터예배

히브리서 11:1-6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선교사 캠벨 부인에 대한 기념비에는 “배화여학교, 종교교회, 자교교회의 설립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캠벨 부인은 44세인 1897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후 1898년 고간동으로 선교부를 이전하자 여기서 여학생 6명으로 기숙학교를 시작했으며 점점 성장하여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아 윤치호를 통해 “배화”란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이 배화여학교이다. 이와 동시에 1900년 4월 15일 부활 주일을 기해 잣골교회를 시작했고 이어 1901년 가을 벽돌로 ‘루이스워커예배당’이 건축되었으며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그러다가 1908년 4월 종침교 건너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나가면서 종교교회라고 불렀으나, 고간동에 그대로 남아 있던 교인도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종침교 다리 아래로 나온 교인들은 ‘종교교회’를 만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고간동에서 ‘잣골교회’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일부 교인들이 옮겨가지 않고 ‘잣골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계층간 문제’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교회로 나간 교인들 중에는 양반과 지식인이 많았고, 잣골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대부분 하류층 사람들이었다. 선교부에서도 1908년 연회부터 이 두 교회를 별개 교회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던 잣골교회는 1910년 어간에 통인과 내시들이 주로 살던 일종의 소외 계층 지역이었던 창성동의 작은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2년 커다런 ‘내시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자교교회’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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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읽기

2018. 9. 17 -21

순종과 관련하여 현대인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또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인데 순종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므로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순종에서 나옴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예, 갈5:18)는 바울의 표어를 가져다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세계는 폐기되었으며,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제외한 모든 절대 기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비약합니다.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의를 이루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법을 기록하려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 역시 말한 바 있습니다(롬8:3-4; 고후3:3, 6). 구약성경의 선지서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즉 자신의 백성 안에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과 그들 안에 법을 두신다는 약속(참고, 겔36:27; 렘31:33) 사이에 사실상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수용되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거룩함을 이루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참고, 롬6:14; 갈5:18).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면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고전9:21)라는 것을 고백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도덕적 순종이라는 요건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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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조선 성종 때(1469 – 1494) 서울 사직동에 허종과 허침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우의정, 동생은 좌의정까지 지냈고 형제가 모두 청백리로 녹선될 만큼 청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 형제에겐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던 나이 많은 누이가 있었는데 지혜롭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말년에 성종은 왕비 문제로 골치를 썩었습니다. 왕세자 연산군의 생모이지만 성질이 포악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킨 윤비를 폐출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습니다. 신하들은 폐비 문제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졌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고위직에 있던 허씨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정 중신들이 폐비 문제로 결정을 내리던 날, 마침 할머니가 별세하여 동생을 장례집에 보내 회의에 나가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형마저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걱정하고 있는 허종에게 누이가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왕비는 세자의 생모이며 지금 왕은 연로하니 오래지 않아 세자가 보위에 오를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새 왕은 생모의 억울함을 가리려 할 것이다. 너는 이 일에 가담하지 말라” 사직동 집에서 나와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허종은 누이가 가르쳐준 대로 말을 타고 가다가 짐짓 굴러 떨어져 팔을 다쳤습니다. 부상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날 회의는 예정대로 폐비를 결정했습니다. 과연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어머니의 ‘폐비사사’에 관련된 신하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지만 그때 ‘폐비 모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허씨 형제의 집 앞에 있던 그 다리를 ‘종침교’라 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종침교’를 줄여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지 ‘종’ 자도 ‘옥구슬’ 종(琮) 자에서 ‘마루’ 종(宗)으로 바뀌어 종교교회가 설립될 즈음엔 이미 ‘마루 다리’란 뜻의 ‘宗矯’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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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9.10 – 14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실천적인 목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군대의 병사들처럼 종종 반항적이고 때로 불온한 우리 마음의 무수한 생각을 사로잡아 그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께 순종하여 참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시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에 복종시킨다는 이 개념은 오늘날 교회에서 다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마리아는 시간을 내어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들었건만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은 너무 바쁩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도 활동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낯설어하며, 침묵보다 소음, 고요한 묵상보다 분주한 활동이 더 성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몸부림이 잦아들기까지/ 주의 고요한 정적의 이슬을 내리소서/ 우리의 영의 염려와 근심을 제하시고/ 안온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J.G. 위티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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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지금 AI 컴퓨터 내지 로봇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진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화물차 및 특수 차량운전원은 향후 10년 안에 85.73%가 로봇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에 어느 중년 여성은 우울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표를 받는 직원으로 일하다가 그것이 자동화되어 일자리를 잃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대형차 운전 면허를 따고 조선소의 물동량을 나르고 있지만 화물차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면 생계수단이 막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영국에도 같습니다. 영국의 택시인 블랙캡의 운전자들은 요사이 우울합니다. 그것은 우버택시가 등장해서 이전처럼 수익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버택시는 3년후 전면 자동화된 택시를 준비하고 있어 우버택시운전자 역시 위태롭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철저히 대비하고 계산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기준은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서 따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섬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섬김 중 하나가 제대로된 세계관을 가지도록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보는 관점은 철저히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배제하고 세상만사를 보는 관점이 이른바 세속주의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이 세상이 전부이지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신들이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보여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천지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자녀로서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 모든 사물과 사건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는 이 관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영원의 관점을 기반으로 철저히 계산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다루어나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9. 3 – 7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하신 뜻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여기서 ‘멍에’란 소의 목에 수평으로 메우는 나무틀입니다. 지금은 쉽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에 가면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이나 논을 갈아엎는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권위, 특히 압제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자연히 멍에를 활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은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었고(렘 27:1-15), 도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딤전6:1) 것은 곧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58:6). 그러나 멍에로 상징되는 권위가 언제나 폭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복종하여야 할 권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하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이 주님의 확언입니다. 왜 그렇까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농부에 우리를 그분을 섬기는 소에 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 자신의 멍에를 두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분의 멍에를 메도록 다시 말해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짐이 가벼우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덕법을 자력으로 지켜내려고 하거나 순종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배려하도록 규정한 도덕법을 지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죄책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뒤로는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의 완전한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인도하시고 힘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를 즐거워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즉 그분의 쉬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우리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의지입니다. 먼저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는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랍비들은 늘 ‘토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말하였으며, 그것은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가 압제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롬7:12),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5:3). 그러나 자력으로 지키려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라고 주신 것(시119:105)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소소한 규칙들과 계율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압제적인 “장로들의 전통”(쇠 멍에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이 가르치는 쉬운 멍에를 내놓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분부하심으로 주님은 은유를 바꾸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소를 거느린 농부가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으로 바뀐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학교를 세우신 셈입니다. 이 초청은 더 유명한 다른 초청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데, 다른 초청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고 죄책을 제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멍에를 쉽게 하고 짐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다른 역할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짐을 벗기는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짐을 지우는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그 둘의 차이는 우리의 짐은 무겁고 우리의 멍에는 불편한 반면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이 점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 혹은 종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당연히 유대교 랍비들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아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사고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성경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7-8).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와 가르침하에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즈음까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 교육을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4:25; 16:12-14).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영원, 죄와 구원, 창조와 구속, 믿음, 사랑, 의와 소망, 성경과 성령, 삶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 및 영광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과 함께 여러 교리와 관련하여 당대의 유대교나 세상적인 견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비전입니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