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지금 AI 컴퓨터 내지 로봇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진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화물차 및 특수 차량운전원은 향후 10년 안에 85.73%가 로봇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에 어느 중년 여성은 우울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표를 받는 직원으로 일하다가 그것이 자동화되어 일자리를 잃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대형차 운전 면허를 따고 조선소의 물동량을 나르고 있지만 화물차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면 생계수단이 막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영국에도 같습니다. 영국의 택시인 블랙캡의 운전자들은 요사이 우울합니다. 그것은 우버택시가 등장해서 이전처럼 수익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버택시는 3년후 전면 자동화된 택시를 준비하고 있어 우버택시운전자 역시 위태롭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철저히 대비하고 계산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기준은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서 따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섬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섬김 중 하나가 제대로된 세계관을 가지도록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보는 관점은 철저히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배제하고 세상만사를 보는 관점이 이른바 세속주의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이 세상이 전부이지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신들이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보여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천지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자녀로서 영원한 운명의 관점에 모든 사물과 사건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는 이 관점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영원의 관점을 기반으로 철저히 계산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다루어나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9. 3 – 7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하신 뜻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여기서 ‘멍에’란 소의 목에 수평으로 메우는 나무틀입니다. 지금은 쉽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에 가면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이나 논을 갈아엎는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권위, 특히 압제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자연히 멍에를 활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은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었고(렘 27:1-15), 도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딤전6:1) 것은 곧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58:6). 그러나 멍에로 상징되는 권위가 언제나 폭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복종하여야 할 권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하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이 주님의 확언입니다. 왜 그렇까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농부에 우리를 그분을 섬기는 소에 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 자신의 멍에를 두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분의 멍에를 메도록 다시 말해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짐이 가벼우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덕법을 자력으로 지켜내려고 하거나 순종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배려하도록 규정한 도덕법을 지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죄책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뒤로는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의 완전한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인도하시고 힘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를 즐거워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즉 그분의 쉬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우리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의지입니다. 먼저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는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랍비들은 늘 ‘토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말하였으며, 그것은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가 압제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롬7:12),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5:3). 그러나 자력으로 지키려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라고 주신 것(시119:105)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소소한 규칙들과 계율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압제적인 “장로들의 전통”(쇠 멍에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이 가르치는 쉬운 멍에를 내놓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분부하심으로 주님은 은유를 바꾸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소를 거느린 농부가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으로 바뀐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학교를 세우신 셈입니다. 이 초청은 더 유명한 다른 초청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데, 다른 초청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고 죄책을 제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멍에를 쉽게 하고 짐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다른 역할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짐을 벗기는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짐을 지우는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그 둘의 차이는 우리의 짐은 무겁고 우리의 멍에는 불편한 반면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이 점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 혹은 종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당연히 유대교 랍비들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아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사고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성경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7-8).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와 가르침하에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즈음까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 교육을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4:25; 16:12-14).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영원, 죄와 구원, 창조와 구속, 믿음, 사랑, 의와 소망, 성경과 성령, 삶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 및 영광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과 함께 여러 교리와 관련하여 당대의 유대교나 세상적인 견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비전입니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수요일터예배

잠언 16: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평소 퇴계 이 황 선생은 집안 자제와 제자들에게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貧當益可樂’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은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사는 것’(貧而樂)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당시 자공이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떠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 라고 답했습니다. 퇴계는 공자의 이 표현을 한층 더 강조해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퇴계는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가난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찌 마음에 두겠느냐? 너의 아비는 평생을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을 받아왔다. 다만 굿굿이 참고 순리대로 대처하면서 스스로를 수양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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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7 – 31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remain in’ 우리가 그분께 그것을 허용해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책임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날마다 새롭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봄날 나무에 진액이 차오르듯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몇 가지 조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라일 주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 내게 꼭 달라 붙어 있으라. 나와 가깝고 친밀하게 연합된 삶을 살라. 내게 점점 더 가까이 오라. 모든 짐을 내게 내려놓으라. 네 모든 무게를 내게 실으라.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붙든 손을 놓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혹은 ‘거하라’는 명령은 지칠 줄 모르고 집요하게 그분을 좇는 추구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씨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소리친 야곱의 정신입니다. 특히 우리는 ‘은혜의 통로들’을 사용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의 훈련에 숙달되어 있을수록 나머지 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과 능력에 의존하여 살기가 더욱 쉬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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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서울의 오래된 것’이라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YMCA는)1903년 미국인 질레트의 지도로 발족하였는데 신앙운동뿐 아니라 계몽운동과 토론, 체육, 농촌운동 등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역사 속에 묵직한 페이지를 채워온 모임이다. 창설되던 때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란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YMCA 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황실의 협조와 미국인의 기부로 완공된 3층의 벽돌 건물은 종로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북한군에 의해 회관이 파괴되면서 지금의 건물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다. 그렇게 새로 선 회관은 조금씩 변해가는 종로의 한복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남아 오늘날에 이른다……….. 1908년 만들어진 이전 회관의 모습.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회관이 완공된 모습을 보자 “그 집의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과 함께 남가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다. 완공된 이후 YMCA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만남의 광장이었고, 동서 교류의 현장이었으며, 토론과 논단의 장소로 여러 운동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여기서 기부한 미국인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하루는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1838 – 1922)가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1889 – 1893)으로부터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직을 수행하는 일 때문에 주일성수와 교사 일을 못한다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헤리슨 대통령은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야 그는 체신부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워싱턴에서 고향 필라델피아로 내려가 주일성수를 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으로 있었던 4년 동안 베다니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기차로 여행한 거리만 해도 20만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기자들이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고 질문했을 때도 그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그가 말한 본업인 교사직을 위해 19살부터 생을 마감하는 85살까지 무려 67년이라는 세월을 쉬지 않고 충성스럽게 교사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생들만의 교사가 아니라 교사들의 영적 스승으로도 진정한 사표가 되었습니다.(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172-173).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말년에 한 연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교육이 저의 일생에 기본적인 교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세상적인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공부했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받았던 이 주일학교 교육이 너무나 귀했기에 이 사역을 위하여 제 인생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주님 안에서 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저의 힘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했을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32-33).

매일말씀나눔

2018.8.20 -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참고 갈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 치심’이란 가축이나 노예들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인두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 구별하시는 표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잎이 흔들림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성령님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Cor. 12:3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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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1:15-23

권순영박사는 전공이 식품영양학입니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네슬레에 입사하였습니다. 거기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던 중 2003년 이른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봉사하러 간 지인이 전화로 이렇게 알려왔어요.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달란트가 필요한 때입니다’라고요. 친한 이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두려웠습니다. 외국인들도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는 곳이니 말이지요.” 2003년 5월, 결국 휴가를 내고 아프간으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암담, 처참, 속수무책…. 실상을 읊기엔 어떤 형용어도 빈곤했습니다.” 진단을 해 보았더니 그 원인은 단백질 부족이었습니다. 더구나 아프카니스탄 백성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외국의 도움과 원조를 받는 것을 내심 반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립할 수 있다는 끈질긴 권박사의 설득에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순응하여 콩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콩이 재배될 수록, 아프카니스탄의 백성들에게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년에 5주정도 휴가를 내어 봉사하였으나, 도저히 수요를 당하지 못하여 2008년 사표를 낸 뒤 전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고, NEI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하여 여러군데서 기부를 받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콩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 콩만 보급하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였습니다. “왜 콩을 심어야 하는지, 콩의 영양학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일일이 교육시킵니다.”라고 권순영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순영박사의 성공비결은 아프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데 있습니다. 콩 프로젝트가 아프간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 이유에 대하여 이곳의 수석 경제 고문인 자킬리월 씨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많은 선진 국가들이 우리를 도우러 와서는 ‘아프리카에서 성공한 모델’이라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대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권 박사는 맨몸으로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기르지도, 먹어보지도 않은 콩을 경작하다니요. 그런데 그는 우리와 똑같은 심정으로 고심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창조했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때 권순영 박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우리도 한국전쟁을 경험해서 헐벗고 굶주리다가 죽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그 경험을 안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계심을 풀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봉사의 정신은 어떻해야 함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아프가니스탄 백성들의 건강을 증진하고 영양을 보급하였다고 그들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본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셨지만 도성인신하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신 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주가 끝날 때까지 다스리셔서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복종케 하는 중에 있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엄청난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