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읽기

2018. 7.16-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이사야가 믿음을 촉구한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언급한 이사야의 다른 구절들과 연결하여 믿음의 도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래서 이사야 28장과 8장의 말씀을 함께 놓고 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기촛돌이거나 아니면 걸림돌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반석이시며, 우리는 그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거나 아니면 그분한테 부딪쳐 정강이가 깨지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는 구원 사이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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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고린도전서 13:13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 사랑을 실천할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1990년은 반도환경㈜의 이승율 회장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이해에 교회를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초에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기간에는 존경할만한 크리스천 지도자를 한 분 만났다. 이 당시 그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골프장 사업을 하기 위해 오가던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고 해봐야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뿐이었다. 칭다오시와의 협상이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수소문 끝에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돼 있었기에, 이 회장은 먼저 면담하시라고 양보하고는 옆자리에서 경청했다. 이때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 회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교육을 통해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으니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생활한 시민권자였다. 대학교수를 지내고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초빙교수로 베이징에 와 있는 동안 조선족들이 사는 옌지·지린·창춘·하얼빈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언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농업학교를 설립·운영했던 선친의 유업을 쫓아 이 지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계획을 갖게 됐다.

이미 그는 1989년 5월 지린성과 옌지시 정부의 협력하에 중외 합작 형태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 (1년 후 옌볜과학기술대로 승격) 설립을 허가받고 학교 부지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는 한·중 수교전이라 중국에 외국인이 대학을 세우기 어려운 여건에도 기차로 30여시간 되는 거리인 북경과 연길을 수십차례 오가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김총장의 열정이 이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회장에게 비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지만 이 회장에겐 그와 같은 멋진 꿈이 없었다. 그 점이 이 회장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비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때 이회장의 나이 대략 45세정도였다. 서울에 돌아온 뒤 이 회장은 잠시 자신의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그러다 2주 후 서울에 출장 온 김진경 총장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 총장은 서울에서 옌볜과기대 건립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으며, 이때 이 회장은 김 총장의 요청으로 남서울교회 당회장실에서 열린 후원기도회에 참석했다. 홍정길 목사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 곽선희 목사가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열심히 추진한 결과 1993년 9월 드디어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1995년 7월 전문과 2년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국민일보, 이승율의 간증- 연변과기대김진경총장과의 만남).

지금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부하게 하여 줄려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만 합니다.

부자 관리와 그리스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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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7. 9  13

존 스토트 목사님은 신약 성경에서 위에 upon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왜냐하면 그 단어가 쓰일 때마다 그분은 터와 기둥과 기초로 그려지고우리는 그 위에 서고 그 위에 기대고 그 위에 짓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주님은 우리 믿음의 삶의 견고한 기초가 되심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도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으며위에 라는 단어는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셨고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 위에서 안식을 누리며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고우리는 그 독특한 계시 위에 우리의 삶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7-8세기경 불린 라틴어 찬송을 하나 보겠습니다그리스도는 견고한 기초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로운 머리이자 또한 모퉁잇돌온 교회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시온의 영원한 도움오직 하나뿐인 의지할 분.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5).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온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한 풍족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제물을 드리신 뒤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속죄의 사역은 완수되었고 그분은 이미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일을 다 이루시고 쉬신다면 우리도 그 완성된 일 안에서 혹은 그 위에서 쉬어야 합니다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히브리서는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안식할 것을 또한 강조합니다(3-4). 여기서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는데 하나는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이며다른 하나는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5:11)는 엄중한 경고입니다이 둘을 근거로 저자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 백성에게 약속하시는 안식이 있으며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정확히 추론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4:3 사역). 여기서의 안식은 구원받음을 의미하며구원받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오래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그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2:10 사역)

 히브리서 저자는 안실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라고 말한 뒤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4:10)고 덧붙입니다이것은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일과 쉼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입니다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우리는 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 안에서 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려고 애쓰던 일들을 그치고 쉬고 있는 것입니다구원의 믿음은 곧 안식의 믿음이며 전적으로 구주를 의지하는 신뢰입니다선교사 존 페이턴(John Paton 1824-1907)은 남태평양의 아니와 섬에서 그들의 언어로 요한복음 1장 12절을 번역하다가 이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그 섬 주민들은 식인종이었고 사람을 믿지 않았으며그들의 언어에는믿는다는 말이 없었습니다마침 원주민 일꾼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에 발을 바닥에서 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일꾼은 몸의 무게를 몽땅 기대라라는 동사를 써서 대답했습니다그래서 페이턴은 요한복음 전체에 나오는 믿는다는 말을 바로 그 단어를 써서 번역했습니다아주 적합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믿는 것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가 믿는다에 관한 원어를 가지고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은 신봉하다 believe into라는 의미의pisteuo eis를 사용한 반면사도행전은 의지하다 believe on 라는 의미의 pisteuo epi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는 빌립보 간수의 불안한 질문에 바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의지하라), 그리하면.구원을 받으리라(16:31; 참고9:42; 11:17)). 현대 교회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영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이 품는 그런 확신을 무리한 억측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참된 확신은 억측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입니다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고요하고 겸손한 확신입니다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믿음의 능력의 참 비밀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마르틴 루터는 그의 탁월한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믿음은……고귀한 보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위협으로 유다가 흔들릴 때 유다는 누군가를 의뢰해야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이들은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뢰하면 안되었습니다그러면 누구를 의지하여야 할까요여기 이사야의 답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하나님의 백성은 이 기촛돌을 의지해야 합니다이사야가 말한 기초돌은 다윗 왕조를 가리키는데그 왕조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는 선한 왕 히스기야로 대변되지만 미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도록 되어 있습니다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믿음의 씨앗을 심자!

(요 12:23 – 33)

한국의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20년 남짓 되었던 1903년 5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4백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부인 글짓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공개적 여성 글짓기대회라 사회적인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때까지 글을 읽거나 시를 짓는 것은 양반 남성선비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공개적인 자리 그것도 남성들을 방청객으로 놓고 글을 짓고 발표한 것이다. 이날 시제는 ‘화덕’이었고 운은 ‘게 네 세’였다. 그날 지은 많은 시 중에 네 작품이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회중 앞에서 낭송되었다(신학월보 1903.11). 그 중 전씨 삼덕의 시이다

찬화덕에 불씨두게
석탄불노 덥게하네
우리마암 차고차나
성신불노 덥게하세

김씨 또라의 시 역시 다음과 같다

맘이찬자 이리오게
천국화덕 여기잇네
예수천하 화덕되니
온화하고 더움일세

교회 여성들은 조선시대 민중가사의 전형인 4.4조로 시를 지었으며 시제로 주어진 화덕은 단지 방안의 공기를 데우는 기구로 끝나지 않고 마음과 영혼을 덮혀주는 ‘성신 불’을 담은 ‘천국화덕’ ‘예수 화덕’이 되었다. 교회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며 얻은 은총을 노래하였다. 이런 은총을 노래하는 것은 초기 교회 여성들의 신앙고백이 되어 전도의 가장 큰 동기가 되었었다. 상기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여 ‘찬 화덕에 불씨’를 노래함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 봉건사회의 여성 한계를 깨친 데 성공한 인물이 ‘전삼덕(1843-1932)’이다. 그는 평안도에서 여자로서는 제일 처음 예수를 믿은 분이다. 평양에 들어온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남편의 외도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때 ‘한 번 믿어 볼까’ 하며 팔십리 길을 교자를 타고 교회(제임스 홀이 개척한 남산현교회)에 간 것이 신앙여정의 첫 걸음이었다. 그 뒤 매 주일 마다 빠지지 않고 그 먼거리를 교자를 타고 혹은 때로는 걸어서 교회를 나갔다. 드디어 스크랜턴 선교사의 권유로 한국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휘장 세례로 선교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남자에게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방 안에 휘장을 치고 구멍을 뚫어 머리만 내밀고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남편이 승지 벼슬까지 하였던 부유한 양반집 부인 출신으로 예수를 영접한 후, 남편을 비롯한 전 가족을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하였고 환갑의 나이에도 교회의 부름을 받아 전도부인으로 함종에 파견, 심한 핍박 중에도 많은 열매를 맺었다. 세월이 지나 몸이 더 늙자 본 집에 돌아왔으나 역시 본동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힘쓴 결과 이백여명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다. 일생 그를 통하여 믿은 전도의 열매가 6백여명이나 되었다. 전삼덕의 회고록 “내 생활의 약력”은 노블 부인이 편집한 “승리의 생활”(1927년)에 실려 있다.(이덕주, 한국영성새로보기)

매일말씀나눔

2018. 6. 4 – 6. 8

1662년 성공회 기도서 개정판의 중심 원리를 설명하는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공예배서가 최초로 편집된 이래로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극단과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영국 성공회의 지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지헤를 주시며 이를 교회의 사역뿐 아니라 사회, 윤리, 정치 영역에도 적용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들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들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가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우리는 과거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만큼 현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됨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건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뗐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행2:46).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복음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집회로 성전의 형식적인 예배를 보완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와 가정에서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교제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이 둘의 결합은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좋아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교인들은 가정 예배의 자유스러움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활기차고 자발적인 참여를 좋아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을 중시하는 예배의 장엄함과 경외감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 후에 기독교의 순회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한번은 힌두교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는 어느 불가지론자 교수가 그에게 시크교에서 얻지 못한 것 중 기독교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다 싱이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는 “그거야 나도 압니다. 이전에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찾았느냐 말입니다.” 라고 답답하듯이 말했습니다. 이에 선다 싱은 “내가 찾은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초점이 예수 당신께 맞추어져야만 비로서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은 어떤 것이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가꾸어갈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틀에 놀라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께 바쳐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보편화된 기도 공식은 우리를 ‘중보’라는 개념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활동들을 직접 취하시지 않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하시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활동하셔야만 하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온 한 가지 근본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 구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나님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는 다리들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무한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차이보다는 유사성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을 통해 그분의 합리성을,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모습도 없으시고 처음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분의 상상력의 발현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그분을 담기는 고사하고 그분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

매일말씀나눔

2018. 7. 2 –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구속의 일을 하나님은 ‘단번에hapax’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해 히브리서 저자가 즐겨 쓴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유다서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를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도 단번에 된 일이고,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단번에 된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도나 그분과의 관계 수준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해나 관계를 가능케 하고자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와 구속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하신 것 이외에 더 계시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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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의로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잠3:5-10)

‘일터 행전’을 쓴 방선오 형제의 간증입니다. “내가 교육팀장을 맡고 있을 때 모시던 부사장님은 회사 내에서 실세로 통하던 분이었다. 그 분에게 잘 보인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모두들 실세 부사장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같이 점심식사 하는 자리에 부름 받아 가는 것조차 뿌듯하게 생각했다. 나 역시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여서 그분에게 잘 보이긴 해야겠는데, 별로 친하지 않아 걱정이었다. 원래 손을 비비거나 아부하는 데 달란트가 없어 겉으로는 안달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뭘 해서라도 잘 보여 연말 인사 발령에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그 부사장님께 의지하려는 이런 방선오 형제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큐티 시간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데 부사장님께 복음을 전하라는 생각이 난데없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부사장님께 뜬 구름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사장님은 청년시절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지금은 교회와 담을 쌓고 살면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이기에 신앙 이야기를 잘못 꺼내면 그나마 갖고 있던 그 분과의 얄팍한 관계마저 흔들릴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이러 저러한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했습니다. 자신이 쓴 책을 포함해 몇 권의 기독교 서적을 사 들고 부사장님 방에 들어갔습니다. 업무 보고를 할 일도 별로 없었기에 그냥 책 선물 좀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다시 교회 다니시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다행히 부사장님은 좋다 싫다 내색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방선오 형제는 복음은 전해 후련하였으나 괜한(?) 짓으로 연말 승진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찜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말, 방선오 형제는 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 얼마 후 실세였던 부사장님은 어떤 문제로 갑작스레 회사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든 인사 발령의 권한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몇 년 후 그 부사장님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더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으면 하는 자책감과 동시에, 유한한 사람의 빽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빽을 믿고 살아야 함을 다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일터 행전, 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