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5 7 -11

오늘부터는 “균형잡힌 기독교 Balanced Christianity”(존 스토트)를 가지고 묵상해 보는 기회들을 갖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권위 있는 가르침과 대속적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믿으며, 성경이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과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로 거듭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세상을 섬기도록 보냄 받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리와 다른 위대한 성경적 교리들 위에 견고히 굳게 그리고 함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목회 사역, 침례의 자격,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은사의 수용 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경건하면서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문제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디아포라, 즉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성경에서 얻은 확신을 관철시키고 싶겠지만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각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리처드 박스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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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2:5-8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2004년 11월 뉴욕은 가을이었다. 얼어 붙은 비, 지친 운전자들, 그리고 폭주를 만끽하는 불량배들이 탄 한 자동차. 그들의 흥분은 지역의 영화관에서 시작된다. 그 십대들은 액션 영화에 싫증이 나자 어떤 자동차에 침입 해 신용 카드를 가지고 비디오 가게로 간다. 거기서 그들은 400 달러 상당의 DVD 및 비디오 게임을 그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그리고 식료품 가게로 가서 식료품 점을 몇 점을 집어들었다. 감시 테이프가 20 파운드짜리 칠면조를 선택하는 아이들을 찍었다. 칠면조를 기억하여야 한다. 은색 니산 자동차의 금속 페달을 밟아 가면서, 아이들은 불규칙하게 도로 위를 달리다가 빅토리아 루볼로를 태운 현대 자동차와 충돌하고 만다. 그때는 새벽 0시 30분이었다. 44살의 빅토리아 루볼로는 롱 아일랜드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14살된 질녀의 노래 테이프를 들으면서 집과 따뜻한 난로를 고대하면서 가고 있었다. 차가 충돌하였을 때 20파운드의 칠면조는 빅토리아의 현대차 앞유리를 뚫고 들어와 운전대를 안으로 우그러 뜨리고 그녀의 얼굴을 강타하여 얼굴뼈를 모조리 부수어뜨렸다. 빅토리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8시간의 수술과 뒤 이은 3주간의 회복시간이 지난 후 친구들과 가족은 빅토리아의 모습을 보고 멍할 수 밖에 없었다. 빅토리아는 스토니부룩 대학 병원에 수동적으로 누워서,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그러나 얼굴에 마스크가 씌여져 있어 그녀의 감정을 분별하기는 어려웠다. 도자기 같이 산산히 부수어진후 지금 티타늄 플레이트들로 고정시켰고 한 쪽 눈은 인조필름으로 부착시켰고, 턱은 줄로 매여져 있었고, 기관은 절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과 언론 매체는 연일 뜨거웠다. 추수감사절에 걸쳐 뉴욕시민들은 자신들이 빅토리아와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는 자신들의 건강과 행운을 조금 더 소망하였다. 신년에 들어오자 시민들은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들은 특히 칠면조를 들고 있던 18세난 소년 리안 커싱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의 얼굴은 산산히 부수어 져야만 하고, 그의 인생은 파멸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법원의 손에 있었다. 2005년 8월 15일, 리안과 빅토리아는 법정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사실 얼굴과 티타늄볼트로 얼기설기 짜맞춘 얼굴의 만남이었다. 교통사고후 고통스러운 9개월이 지나갔다. 빅토리아는 도움없이 법정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리안 커싱은 떨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법원은 6개월의 금고와 5년의 보호관찰 그리고 약간의 상담조치와 사회봉사를 선고했다. 사람들은 분개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벌이란 말이야? 리안은 자신의 최후 진술을 하고는 빅토리아를 돌아 보았다. 그는 절망해서 울고 있었다. 변호사는 그를 데리고 희생자인 빅토리아에게로 이끌었다. 빅토리아는 그를 꽉 겨안고 글 위로했다. 그리고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네가 최고의 인생을 살기 원한다” 그녀의 짜맞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렸고 변호사들과 법관들 역시 눈물을 흘리도록 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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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4.30 -5.4

어떤 잘 알려진 목사님은 젊었을 때 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자주 야단치고 때로는 때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화가 나서 큰 아이의 따귀를 때렸는데 얼굴에 손자국이 난 상태로 아파트를 나가다가 여러 교회분들을 만나게 되어 그분들이 “네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난 것이냐? 누가 때렸니?” 하면 “아버지가 때렸어요!” 하고 다님으로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변했다고 한 말이 30년 전인데 그 후 그 큰 아들은 장성함에 따라 큰 사고를 치고 가정과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가정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 잘 키워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 부부가 자녀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지만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등한히 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 상태에서 야단치며 매질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징계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훈계가 따라야 합니다. 훈계가 있을 때 징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할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는데, 당연히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먼저 서 있어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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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6:1-3

김상복 목사님의 책 하나님이 꿈꾸신 가정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한 아들이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가 믿지 않는 아버지에게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아버지가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신학교에 가지 못하고 계속 직장생활을 하다가 저에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무척 성질이 급하고 완고한 분이 었습니다.

‘한달 정도 깊이 기도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십시오. 그 편지의 절반 이상을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쓰십시오.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깊이 표현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신학교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쓰십시오. 저는 이렇게 권면하고 함께 기도한 후 청년을 보냈습니다. 그 청년은 한달 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쓸 때도 그는 기도 하면서 성령님의 지혜를 구해 한마디 한마디 정성스럽게 썼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워낙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늘 아버지가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4장이나 썼는데, 그것도 2장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감동적인 고백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그 편지를 받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난 네 편지를 받고 감동 받아서 눈물까지 흘렸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 아주 좋은 목사가 되도록 해라.’ 그 후 그 청년은 미국의 한 신학교에 들어갔고 나중에 목사가 되고 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믿는 사람쪽에서 먼저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 ‘예수님 믿는것도 괜찮구나 나는 잘 믿어지지 않지만 네가 믿는 것은 괜찮다’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김상복, 하나님이 꿈꾸신 가정,278-79).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4. 22 – 26

오늘부터 부부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 오륜이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붕우유신, 장유유서이며 그 중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친애는 본능적이고 천성적인 사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일반계시에 터잡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녀에 대하여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 하셨고, 부모에 대하여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기준인 임금이나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유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준이 됨으로 보다 분명하고 차원높은 실천 강령을 주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실현되려면 먼저 부모는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하는 어머니이며,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셔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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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성경말씀: 눅 4:1-4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 때문에 굶어 본 적이 있는가?’ 제목하에 샘물교회를 개척하신 박은조 목사님의 개척 당시의 고백입니다. 서울영동교회에서 17년을 사역하면서 이제 분립개척을 하기 위해 준비하던 9월 어느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서재에 올라와서 누가복음 4장1-4을 읽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이 읽은 본문이었으며, 다음 주일에 설교할 본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것과 비교하면서, 개척이라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자신과 서울영동교회가 어떻게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묵상하고 있는 데 갑자기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배가 고프신 상태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목사님에게 들었습니다. 사단은 그런 예수님에게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으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드셔서 배고픔을 면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먹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 예수도 이렇게 굶으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너는 나 때문에 굶어 본 적이 있느냐?” 이런 질문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목사님은 의자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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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4.16-20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아내를 두가지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잠근 동산’이고 또 하나는 ‘봉한 샘’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남편에게 아내의 즐거움들을 열어 채워주라는 호소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여인을 우물 또는 샘으로 표현한 고전이 더러 있습니다. 우물은 샘과 함께 근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기쁨의 근원이요, 행복의 근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뿌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내를 샘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샘이 없다면 갈증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갈증이 극도에 달하면 죽게 됩니다.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마땅히 시원한 생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내가 제대로 구실을 못하면 그 가정은 삭막한 사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가 서로에게 있어서 항상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부부의 행복을 지키는 열쇠, 곧 부부의 황금률은 무엇이겠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그것을 3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1) 마음을 지키라 (2) 서로 헌신하라 (3) 서로 만족하라. 이런 말씀을 실천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어느 가정에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은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우리는 배우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인간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기를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난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옥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부의 황금률 3가지 중 첫 번째는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서 항상 마음을 곧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결혼식의 서약 시간에 주례자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 부부는 서로가 완전히 내맡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향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배우자에게만 쏟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의식입니다. 그런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운명공동체가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관계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관계 또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부 관계는 감정에 근거를 둔 사랑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이 일생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특히 남자들의 마음이 해이하여지기 쉽습니다. 자녀들을 다 키운 부부의 경우 늘상 똑 같은 상황에 결혼 생활을 권태롭게 여길 수 있습니다. 50이 넘은 부부의 경우 심지어 자녀들을 키우는 공동의 책임이 끝났다고 느껴 남편의 그늘에서 혹은 아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여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것이 요사이 현실입니다. 이때 “나는 내 아내(혹은 남편)에게만 마음을 주기로 서약했다. 그런데 혹시나 마음이 흐트러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을 포함하여 우리 각 자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옥목사님의 황금률 두 번째는 서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결혼 생활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과 결혼을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는 희생이 따르니까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려면 서로를 위해 도와주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인격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을 볼 때 인격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때 남편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인격을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 한 그 아내의 인격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들을 생각할 때 다른 남편들에 비해 어딘가 뒤떨어지고 마음에 존경이 가지 않는 약점이 눈에 보일지 모릅니다. 바로 이때가 아내들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희생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됩니다. 부부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모난 성격이 아내의 덕을 통하여 깎여야 하며, 아내의 비뚤어진 성격이 남편의 건전한 성격을 통하여 점차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부가 서로의 인격성숙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해 주지 못한다면 그 부부는 노년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존 포웰이라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런 것이 부부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옥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부부의 황금률은 서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완전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숙하고 훈련될 때 비로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 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그만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요, 훈련받는 것이요,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 투성이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부부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가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주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검토 받을 때 주님이 부부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에 모시고 사는 한 그 가정의 행복은 유지될 수 있지만, 가정의 주인이 주님이 되지 아나히는 부부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에 언제든지 서로를 비난하고, 보이는 흠을 기회로 삼아 불만족하려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된 부부나 가정은 항상 가정의 주인되신 주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서로 받아 주는 삶을 영위함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우리 가운데 아직도 이기주의적 신앙, 이기주의적 결혼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그것을 발견하여 도와주십시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아내가 밑거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부부는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가 있으며 서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위해 도와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가운데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