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베드로의 복음

사도행전 10:36-43

윌리암 베커라는 분의 책, “언제나 구세주”에는 1800년대 말엽에 미국 동부의 중소규모의 기독교 대학을 방문한 라이트라는 성을 가진 미국 연합 형제단 감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이 저녁식사후에 자기가 가진 확신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여 세우실 천년왕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제 인간이 발명할 수있는 모든 것을 다 발명하였는데 주님께서 더 기다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공손하지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젊은 총장이 말을 하였습니다. “아직 인간이 발명할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감독은 더 무엇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 총장은 “앞으로 50년내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때 비숍은 “말도 안되, 하늘을 나는 것은 오직 천사들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아들 둘이 있었는 데 이때 이분의 아들들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고 드디어 1903년 세계최초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습니다. 이 분들이 그 유명한Orville and Wilbur Wright형제라고 합니다. 이들의 아버지인 밀튼 라이트 감독(1828-1917)은 자기 아들 둘이 대학총장의 예언을 실행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당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소명을 다시 받고 오순절날 성령님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받은 그날 남자만 삼천명 얼마후에는 남자만 오천명을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권능을 가지고 역사를 하였는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베드로에게 접근하려고 하다가 못하면 다만 그 그림자라도 위에 지나갈 수 있어으면 하는 소원으로 병든 자를 데리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이런 일들을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그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돨 것이라는 말에 아마도 그는 소리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런 축복을 받았고 어떻게 이런 확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나온 고넬료의 집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는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그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1. 29 -2.2

골로새서 4장 15 16절 말씀은 지나치기 쉽습니다. 특히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값진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로서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라오디게아 지방에도 교회가 생겨나게 했으나, 라오디게아 지역의 성도는 불과 몇십 가정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볼 때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자연히 개인 집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눔바와 같이 “우리 가정에도 교회가 있어요”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 하시기 바랍니다. 그 귀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분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을 계기로 자신들의 가정에, 또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시면서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내에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할 만큼의 영적인 변화는 기도부터 시작된 순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마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7-18)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가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태어날수도 없었을 것이고 직장일을 끝마치면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며 죽을 때에도 가정에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든지 그 존재 자체가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정과 신앙생활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용어들을 살펴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의 분위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분위기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고 또 가정의 용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바로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각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가정에서 경험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를 않아서 대학을 다닐 때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친이 연세가 드시자 자신이 봉양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고백하기를 ‘아버지’라는 호칭이 자신에게는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를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서로 위로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짊어지고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교훈은 성경은 물론 동서고금에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정의 도리를 교회에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을 모르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가정을 바탕으로 할 때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 집에 교회가 있느냐?”라고 묻는 말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가정에 교회가 없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 자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문제점으로 남아 있는 면입니다. 즉, 빌딩 교회가 가정 교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맞으면 우리 성도들은 교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깊이 체험합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말씀 들으며 또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서로가 한 몸인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빌딩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지나면 이 빌딩 교회는 흩어집니다. 이 무리가 흩어져서 각자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전부 가정 교회로 분산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마디로 가정 교회의 부재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고통하고 있는 큰 원인은 가정 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눔바 그 여인의 집에 있는 교회’ 라는 말처럼 ‘— 성도, 그분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두가지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절대 권위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그 가정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분이요 제일먼저 경배를 받으실 분이요 권위 중의 권위가 되시는 것입니다. 실로 가족 모두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그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가정안에 절대 권위가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권위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현대 가정은 붕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빌딩 교회를 공격하는것보다 가정 교회를 더욱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딩 교회에 아무리 많은 성도들이 모여도 마귀는 겁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주일이면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확장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나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아무런 힘이 없는 군중으로 평가 절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겁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무엇을 겁내고 있을까요?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 특히 가정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요즈음 서구 사회에는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통계에 의하면 크리스천 부부의 경우에는 40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을 한다 합니다. 신자 부부와 불신자 부부를 비교하면 이혼하는 빈도 차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 가정 중에서도 가정에 교회가 있는 부부 즉, 집안에서 자주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리고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는 이혼율이 400쌍 가운데서 불과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붕괴하는 현대 가정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열 가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수립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르고 건전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가정의 머리가 되셔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서로 간에도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경외함으로 서로 간에 복종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매일말씀나눔

2018.1.22-26

진정한 부부애 진정한 가족애는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아내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이상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꽃 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부인을 통해서 남편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편에게 삶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야말로 남편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남편이 부인을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내 며느리 되시는 어느 권사님은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밤낮 생각하는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자”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두려워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주단지를 없애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화를 당해도 제가 당할 터이니 주십시오” 하고는 담대하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뒤 시어머니는 예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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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닥터 홀이1928년 10월 해주 요양병원을 세우고 진료를 하던 어느날 진찰실에서 환자를 치료하는데 뜻박의 방문객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처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요양원 설립을 반대했고 닥터 홀의 선교 사업을 해주의 적이라 생각했던 그가 지금 닥터 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홀 선생님, 우리 아들 때문에 왔습니다.” 시장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아들 때문에요?” 입술이 타는 듯한 그에게 홀 박사는 결려하듯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결핵에 걸리지 않았나 해서요. 진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제 생각대로 병에 걸렸다면 여기에 입원시켜 치료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척 어색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시장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습니다. “데리고 오십시오. 여기에는 이미 자리가 꽉 찼지만 아드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 소년은 과연 아버지가 염려한 대로 정말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초기 상태여서 치료의 효과는 상당히 빨랐고, 병세는 호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통원할 수 있도록 퇴원시켰습니다. 소년이 집으로 가서 정양하고 있는 동안 닥터 홀은 계속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완치될 때까지 치료해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옛 감정을 잊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닥터 홀이 마지막 진료를 위해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고마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후 시장과 시의원들은 요양원 의사들과 함께 인근 절에서 야유회를 열자고 초청장을 보냈으나 조선인 친구들은 우리를 그처럼 적대시하던 사람들이니 초청을 거절하라고 닥터 홀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닥터 홀은 이 초청장을 보낸 의도가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초청에 응하니 그들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은혜를 베풀어주게 된 요양원의 건립 때 자기가 방해했던 점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시장의 약속은 잘 이행되어 요양원은 길을 내는 허가 등을 받는데 많은 도움을 받아 해주 요양원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과 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 가운데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요 네가 남편을 구원 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남편된 자요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고전7:15-16). 15절의 앞 부분의 뜻은 안 믿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신앙 문제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만 보고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 중인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이혼하고 교회다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적용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15절 후반부와 16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나눠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행할 때 그 가정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예의 주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이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는 역사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아무리 고통과 갈등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가정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6).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대립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건전하고 더 아름다운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파괴 하는 독소가 될 수 없고 부부간의 애정을 깨뜨리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가족으로 인한 그 눈물 그 고통 그 한숨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고전 7:14)라고 쓰고 있는데, 예수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거룩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헬라어 구문을 보면 “거룩하게 되고”라는 말은 완료형 수동태이자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는 문장 앞에 둡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이어 “아내로 말미암아”는 말이 따라오는데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아내 안에서 in the wife”가 됩니다. 이 뜻은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에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뜻은 아내가 믿는다고 혹은 남편이 믿는다고 믿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 믿음에 무슨 마법적인 힘이 있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는 믿는 아내나 남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 전서 6:15-17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5-6).

예수 믿는 사람의 거룩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나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되심과 동시에 그 마음에 성령님이 와서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 믿는 부인 때문에 거룩해진다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거룩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전서 7:14의 말씀에서는 안 믿는 자가 믿는 자 안에서 거룩해 진다고 쓰고 있을까요? 이 거룩은 의식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존재였고 그 제사장의 손길이 닿는 것마다 거룩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고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은 깨끗하여 버릴 것이 없는데 특별히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도함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룩해지는 의식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가정의 중보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기도해 주는 남편과 자녀는 거룩해져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가 예수 믿고 남편은 안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내에게만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고 남편에게는 멀리하시지않습니다. 부부를 똑같이 은혜로 감싸 주시고 포근한 날개로 덮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내의 기도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으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찬송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집안에서 기도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기도 소리가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집안에서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성경 읽는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구 한말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 최초로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우신 사무엘 마펫 목사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의자 옆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짧은 성경 구절을 읽은 후에 기도하시곤 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셋째 아들 사무엘 휴 마펫은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기도는 단순하고 심오했다.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듯이 아버지는 기도했다. 그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던가!” 라면서 기도는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부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은 가족 전부를 하나님 앞에 구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식탁 옆에서 어린아이가 밥 먹기 전에 “아빠는 왜 식하실 때 기도 안 해요?”라고 물으면 아빠는 은근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 대답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기도하는 모습을 아빠가 볼 수 있는 집안 분위기, 그것이 벌써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구 중에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는 자기 식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우리는 흔히 믿는 부인과 안 믿는 남편이 같이 살 때 부인이 안 믿는 남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유혹의 물결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가 믿는 식구를 영적으로 이기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아내를 통해서 그 남편이 거룩해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가정에서는 믿는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남편을 또는 아내를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살아있는 한 여러분은 이깁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어야 올바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이 주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이렇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

전도 여왕 박인숙 권사의 간증입니다. 자신은 시댁의 막내 아들과 결혼하여 분가하고는 그럭저럭 살고 있던 중 어느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전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 전도를 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어머니만은 전도를 하여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 하면 시어머니는 “너나 잘 믿어라”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을 바꾸면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닥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구원받게 할까 생각하다가 연세가 88살 되신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실 때 제일 문제는 시어머니께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신주상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주까지 자신의 집에 가지고 올 수는 없어 태워버리기로 결심하고 시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제 집으로 가시지요? 그리고 저 신주상자는 제게 주십시요 화를 당해도 며느리인 제가 당합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염려하셨어도 큰 아들은 병으로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시어머니께서는 아들들이 아니라 며느리가 화를 당한다니 신주상자를 그냥 주었습니다. 사실 시집오면서 박권사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여 늘 궁금하였습니다. 받아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치마 저고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바로 시어미니가 시집오기 전에 살다가 죽었던 남편의 전처의 옷가지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처녀였지만 양가 어른들의 약조에 의하여 그만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처가 자신이 낳은 아들들을 해고지 할까봐 두려워 신주상자에 모시고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박인숙 권사는 담대한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불에 태워버렸더니 너무나 마음이 시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어미니는 “이제 내 신주를 네가 불태웠으니 예수를 믿는 도리 밖에 없구나” 하시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불행이나 죽음등을 두려워 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와 저주를 전부 떠 앉고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무력화시키시고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생에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놓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