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마 16: 5-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오병이어 기적과 이방인들을 위한 칠병이어의 기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이전에 오병이어를 통하여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남자만 사천명을 먹이신 뒤 무리를 흩어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땅에 속한 기적이라고 평가절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떡을 가져 가기를 잊은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자 잘못 이해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당신에 믿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떡에 관해서는 이미 무리 수만명을 두 번이나 몇 개 되지 않는 떡과 생선으로 먹일 수 있었다면 하물며 12명의 제자들을 먹일 수가 없겠는가? 라는 논리를 가지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입니다사람이 이 부분에 들어가서 이성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작을 수 밖에 없고 매일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며 세상에 휘들려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하늘에서 들으면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신장이 거대함과 견고한 성벽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실족하여 60만명이 광야에서 죽은 이유는 듣는 자들이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의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두려울 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반석 위에 염소새끼를 잡은 고기와 무교병을 놓으니 사자가 지팡이로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비로서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을 듣고 비로서 안심하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마노아와 그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삼손을 낳을 것을 지시받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염소새끼와 소제물을 바위 위에 놓으매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습니다. 이를 보고 마노아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 그 아내는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고, 이 모든 일과 이 모든 말씀을 이르셨으니 죽이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져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면, 하물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내가 봉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선물을 주시기 위한 전조인 것입니다.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어려움을 지나갈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105991139972846삽화:(http://cfile229.uf.daum.net/image/27340D3955B6AF0B0B2A03)

 

길 가에 떨어진 씨 비유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8: 4-5, 12

 

오늘 본문에서  길가에 속한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원래 율법을 어겨 우리 마음대로 살아간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전부 담당하사 죽게 하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게 하사 당신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제 죄인과 의인을 심판하러 다시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에 던져넣는다는 내용이 복음의 요지입니다. 이같이 인간이 가장 원하는 죄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바로 복음이므로 마귀는 이를 믿어 구원 받지 못하도록 의심과 거짓논리를 집어넣고 거짓기적을 보임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씨가 싹을 트는 것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소망중에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1. 뿌려야 할 씨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길 가라고 언급된 사람은 복음의 씨가 싹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3. 마귀는 복음의 씨를 삼킬 거짓 논리를 밤낮 궁리하고 있습니다.

 

4. 그러나 “길 가”라고 언급된 사람도 구원의 길은 있습니다.

SBC 매일큐티

2016. 10. 10 – 1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가르침에 우리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때때로 다른 신앙(정령주의자,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등)을 가지거나 다른 인종 혹은 국적의 사람들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베푸는 도움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수단이 아닐 경우에는 그들을 섬기길 꺼리지는 않는가 역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가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게 하는 것이 주님이 명령한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 즉,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섬김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야만적으로 폭행을 당해 벌거벗겨지고 피를 흘리며, 기진맥진해 거의 죽게 된 그가 긴급히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고, 필요한 부대 비용을 주막 주인에게 더 주었습니다. 이때 그는 유대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지만 그의 주머니에 전도지를 넣지는 않았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내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의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는데, 사실 이 논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간의 우선순위의 결정은 우리의 이웃이 처한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가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두가지는 모두 이웃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사랑할 이웃은 육체 없는 영혼이 아니고, 영혼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된 한 개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적, 영적,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입니다. 우리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나 사회성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읏울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죄사함의 복음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만 합니다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우리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이 복음전도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을 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직 구세주일 뿐이며 인간의 창조주는 아닌 것처럼, 예수님이 단지 설교만 하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거나 병든 자를 치료하신 적은 결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예수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두 가지를 병행하셨습니다(눅 8:1). 그리고 주님은 어느 한 가지를 한다는 것이 다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나 구실이 되지않았습니다. 이 둘은 인간들을 향한 그의 깊은 동정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표현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그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자신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며,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장 31절 이하). 이 구절은 종종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유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을 양과 염소에 비유한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최후 심판의 매우 엄숙한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

로마서 8장 28절 -34절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34절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선언하시고는 다음 절에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도는 담대함이 생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고는 그 근거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하고 확신에 차서 되묻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고 묻고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는 죄의 문제는 전혀 없다는 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근거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이 나오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고 도리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완벽한 승리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도들을 돌보시는 좋은 예가 열왕기 하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여인이 일어나 엘리사의 말을 따라 가족과 함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내려가서 칠 년을 우거하였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별 생각이 다 지나갔을 것입니다. 칠 년이면 얼마나 오랜 동안이겠습니까? 그 여인의 집과 전토는 남에게 귀속되었을 것이고, 어떻게 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칠 년이 다하매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설명하라고 하자,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 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매,여인이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왕이 그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고는“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7장 36 – 50

오늘 본문에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은 주님께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향유를 든 옥합을 가지고 주님의 뒤로 갔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붓고는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찾은 것을 감사하여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이 전파하시는 복음의 사역은 세리와 죄인들 가운데서 이렇게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회개의 열매는 용서받았다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여인은 자신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사죄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누가 죄를 사할 수 있겠습니까?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지 않고는 죄를 용서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대상도 아닌 제 3자를 사랑하였다고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죄 값을 담당하실 분이었기에 그런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후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1.   사람들 중에 주님의 복음은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2.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감사에서 우러난 사랑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사람을 용서하실 권세를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매일성경

2016. 9. 26 30

예수님은 먼저 보았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늘 주위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눈은 결코 도움이 필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실로 보셨습니다. 그는 추한 실재 가운데 있는 인간의 궁핍함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반드시 그를 움직여 마음에 동정심을 일으켰고 그는 동정 어린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은 말로만 그친 적은 결코 없었고,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보셨으며, 느끼셨으며, 행동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는다면 이웃 사랑의 핵심적인 부분을 실천하게 되고 이 경우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그렇게도 많이 주장하는 인(仁) 사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동정심에 비롯한 섬김은 요한 일서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저술한 요한 일서를 보면 사도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배워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직접 듣고 보아 온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오늘은 그가 배운 놀라운 구절을 먼저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 18).

 

어제 본 요한 일서 3:16-18은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희생 때문이었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결코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같은 것은 필요없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한 비난 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좋고 고상한 것이지만,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다른 속셈으로 얼룩져 있으며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행동만이 더없이 순수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는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모든 것 즉,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행동입니다.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골고다에서 비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미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만 그분의 섬김의 절정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바로 골고다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의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은 결코 영웅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이런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은 당연히 평범한 섬김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우리가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결코 사랑이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시기를 주님과 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것 보다도 못한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핌합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논조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재물을 가졌으며 그리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필요를 보는 한편,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보는 한편, 약과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를 보는 한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주림을 보는 한편, 식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을 보는 한편,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연결할 것인지, 아니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병든 자를 보시자 고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온 군중들이 주린 것을 알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먹이셨습니다.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이다.

성경말씀: 롬 4:17-22

어떤 기자가 유람선을 타고 남양군도를 지나다가 배가 파선을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가운데도 나무조각을 붙잡고 여기저기 떠다니다가  천만다행으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햇빛과 비를 피하고 안락하게 자기 위해서는 먼저 집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나뭇가지와 풀등을 가지고 며칠을 수고하여 원시적이나마 집을 지었습니다. 이후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갔는데 날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돌을 집어다가 서로 부딪혀서 불을 일으켰더니 그만 자리에 깔아놓은 나뭇잎에 옮겨 붙어 온 집을 불태웠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이 사람은하나님 너무나도 무심합니다. 얼마나 수고하여 만든 집인데요 하면서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멀리서 뚜-우하는 기선의 소리가 들여 왔습니다.구조를 받고 알고보니 이 지역은 무인도라 연기가 날리 없는데 연기가 나서 혹시나 하고 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이민우, 그냥 사랑하거라). 만약 집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평생 무인도에서 살았어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 99세가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이라는 말씀을 듣었습니다. 그는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롬4:17-22)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치를 따졌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나와 사라는 죽은 것 같아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히 이 죽은 몸들로부터도 아이를 생산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대로 내년에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는 믿음으로 늙은 사라와 함께 아이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실을 직시하여 그 상황을 먼저 파악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롬4:22).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3

누가복음 7장 29-35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침례 요한이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주님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침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사귀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님에게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 경건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옳은지는 그 자녀(행위)들에 의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고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아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만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오늘부터는 존 스타트 목사님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으며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가 역사상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종교적 사기꾼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등 형편없는 말을 하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좌절한 슈퍼스타나 서커스의 어릿광대 등으로 묘사하는 풍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거침없이 네 주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심판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위로의 그리스도이지만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부인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화에 대한 명령에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사역을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조화가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섬김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등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봉사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이런 물질적인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에만 집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복음 전파에 큰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하신 선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동기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합니다.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딸로 하여금 어머니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데는 눈을 감기우고 오직 어머니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라는 계책을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주는 대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이 처한 육체적, 환경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치신 개인과 무리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자 그 문둥병자는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인 성 근처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인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깊이 위로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3-14) 하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실 때도 그 동기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신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수요예배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공부를 더 하려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민되는 것은 유학을 갔다가 오면 한국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거나 연구원에 종사할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미리 자리를 준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을 붙들어 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자매가 유학을 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유학을 갔다 와서 과연 주님께서 자리를 준비하셨는지는 더더구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고, 심지어는 점집에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확실성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고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의 손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공자도 하늘과 천명을 믿고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송나라 대부인 환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시점에도 태연하셨는데 제자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물으니 “하늘이 내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어찌하겠는가?” 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전부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로 살되 지혜를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