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20절 열 두 제자와 함께 평지에 내려오신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첫 번째 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모습, 죄된 형상을 보고 가난한 심령을 가지는 길입니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더욱 마음이 낮아지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부자이건 관계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자임을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가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어 용서받은 죄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용서받은 죄인들은 마지막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은 생애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깨달은 사람이 가난한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고 천국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죄사함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2
로버트 멍어는 서재에서 주님과 함께 나와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영적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고 큰 방으로 그는 꽤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꽤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오늘 저녁 메뉴가 뭐지?”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돈, 학위, 증권등이 주된 음식이고, 반찬으로는 명성과 행운에 관한 신문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의 음식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음식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진정으로 영혼을 먹이고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참된 음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식탁에 앉으신 주님은 좋아하시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로버트 멍어와 같이 우리의 “영적 주방”에 세상것으로 가득차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주님 앞에 차려놓아야만 하는 영적 식단들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할 영적인 식단은 균형잡힌 식단이어야 합니다. 이런 균형잡힌 식단을 차릴려면 우리의 욕구가 주님 뜻에 합당하도록 조절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식탁에 앉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네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여러분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음식을 원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이나 욕망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도록 힘쓸 때 바로 그 양식이 우리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음식도 결국에는 허기를 남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영적 주방”으로 갔을 때 우리의 욕구를 채워 줄 주방에는 어떤 메뉴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께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은 어떤 음식을 먹고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욕구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양식과 음료로 삼고 있습니까? 우리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함께 자신의 거실로 들어갔습니다.이 방은 좀더 친근하고 안락한 곳으로 그는 이 방을 좋아했습니다. 벽난로, 푹신푹신한 의자들, 책장, 소파가 있는 이 방은 매우 아늑했습니다. 주님 역시 만족하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는 정말 좋은 방이구나. 이 방에 자주 오도록하자. 은밀하고 조용하니 대화하며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겠구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는 감격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단둘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찌감치 여기에 올 테니 나와 함께 일과를 시작하자꾸나” 하셔서 그는 아침마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고 주님과 함께 성경을 읽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구원의 진리들을 펼쳐 보여 주셨으므로 그의 마음에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주님은 성경과 성령님을 통하여 그에 말씀하시고 그는 기도로 응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로버트 멍어와 같은 경건의 시간을 주님과 나누고 있습니까?
로버트 멍어는 주님과 인격적인 대화로 경건의 시간을 보내면서 깊은 우정을 그분과 쌓아 갔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시달리다 보니, 이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규칙적으로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고 단지 일이 그렇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시간이 줄어들다 못해, 때때로 거르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고, 또 어떤 때는 다른 급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경건의 시간이 빈번히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틀씩 연속적으로 빼먹거나 그 이상 거른 날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버트 멍어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중요한 약속 때문에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때를 이야기 합니다. 거실을 지나치다 방문이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고 주님이 홀로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당황스러워지며 “내가 저분을 내 마음에 모셔들이지 않았던가! 저분은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나의 구원자요 친구로 오셨는데, 내가 저분을 무시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계속 주님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무시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한 번 반추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 연구나 기도 시간을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이 주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막대한 값을 치루고서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속하셔 당신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의 사귐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분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든 그렇지 않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의 시간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혼자서 여러분의 마음의 거실에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날마다 둘만의 시간과 장소에서 말씀과 기도로써 그분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심
마태복음 10장 34-39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신광야를 지나 애굽에서 탈출한 뒤 약 3개월 즈음 되자 시내광야에 이르렀고 이윽고 시내 산에서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우레와 번개가 있었고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이백만명에게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었다” 모든 백성들이 떨 수 밖에 없었고 멀리 서서 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도록 모세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하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비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시기를 “이제 누구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 내 아들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내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 이것은 그를 위하여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을 공경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신앙 고백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우리의 고백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들에게 들어가면 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게 되기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아버지와 다툴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딸이나 며느리에게 들어가면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게 되기 때문에 터줏자리를 두고 토속신앙을 따르는 시어머니와 다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평화롭던 가정은 불화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때문에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25살 때 미국에서의 8년간 유학을 마치고 21살 된 트르디 사모님을 데리고 1959년 12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았으며 터줏대감 3개를 두고 토속신앙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돌아가셨기에 큰 형님이 아버지 역할을 할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았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로 25살난 김목사님을 데리고 갔으며 형수님이 산소 앞에 술과 과일을 차리자 큰 형님은 절하자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기독교와 추도예배를 설명하고 그냥 서서 기도하겠다고 하니 큰 형님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졌고 성묘는 서먹서먹하게 끝났습니다. 그 후 어느날 저녁인가 직장을 잃고 방황하던 셋째 형이 찾아와 “철없던 네가 큰형님께 너의 신앙에 대해 확신하며 진실하게 말할 때 나는 감동받았다. 나도 너를 따라 예수를 믿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셋째 형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다른 가족들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목사님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었습니다. 김목사님은 큰형님께 한 번만 추도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인상적인 일들을 애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들이 가장 먼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습니다. 음식준비 하는 고생이 없어지고 제사후 남자들이 술자리를 갖는 일이 사라져서 너무 좋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쉽게 마음을 연 것은 무엇보다도 트르디 사모님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트루디 사모님은 불편한 상황에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찍 일어나 불을 때고 쇠죽을 끓이고 어머니를 잘 모시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 모두가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형님은 집안의 터줏자리 3개를 모두 불살랐고 그렇게 온 가족이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이 가정을 평정하신 것입니다.
삽화: 신예현 – www.lifeisyea.com
생명나무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17 – 19절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신 주님은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만지려고 힘을 썼는데 이는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나와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인간이 범죄함으로 접근을 금지당하였던 생명나무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무리 생명나무의 역할을 하셔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들 그 고침받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받은 사람들은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는 죄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로 가셔야만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은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라는 자각을 가지고 공의와 자비를 행하면서 성령님과 겸손하게 동행하여야만 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의 역할을 하신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가 줄 수 없는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죄사함을 주신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 로버트 멍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1
오늘부터는 로버트 멍어가 쓴 소책자(출판사 IVP)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을 가지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어떻게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좌정하게 하실 수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3:16-17).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기독교 진리의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정착하고 사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인간의 마음을 거처(집)로 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12시간 전 제자들에게 주신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을 위해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곧 떠날 것이다(요14:2-3)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14:23, 공동번역)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53일 지나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은 물론이고 손으로 지은 어떤 성전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120 명의 신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인간 마음 안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후 믿는 자의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고전3:16-17), 인간의 마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버트 멍어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의 감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 내 영혼의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분은 내 어두운 마음에 들어오셔서 불을 켜셨습니다. 차가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냉기를 몰아내셨습니다. 그분은 정적이 흐르던 곳에 음악을 연주하셨고, 불화가 있던 곳에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사랑으로 공허를 채워 주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문을 연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문을 연 첫 경험을 한 번 회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문을 여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만드는 첫 단계입니다. 그분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실재를 알고, 우리 존재의 깊숙한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단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께 “제 마음에 들어요서서 저의 구원자요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시고, 이런 고백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의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당신께 이 집(내 마음의 집)을 안내해드리고 몇 가지 특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저와 더 풍성한 교제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우리의 각 방으로 안내하면 주님은 우리의 작은 마음을 집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의 죄된 자아를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방마다 벽이 매우 두텁고 남을 데려오기 매우 꺼려하는 장소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의 서재로 가야합니다. 로버트 멍어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그분은 나와 함께 책장 안의 책들, 잡지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분의 눈빛을 살피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안 좋은 안색으로 그것들을 쳐다보셔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책장 선반에는 그분의 정결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책들이 몇 권 있었고 잡지도 그러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즉 내 마음의 상상과 생각들) 몇 가지도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서재도 반드시 이럴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럽지만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주님, 이 방은 깨끗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를 도와 주셔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당신께 복종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시작으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치열한 전쟁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 방을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말씀과 약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
옥한흠 목사님이 아직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기 전 서울의 어느 장로교회에서 부사역자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장년은 800명이 나오는데 대학부는 오직 1명만이 나왔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옥목사님을 거기에 배치한 것은 대학부를 부흥시켜라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 CCC, Navigator와 같은 선교단체는 부흥하는데 자신의 교회 대학부는 부흥하지 않는지 고심을 한 끝에 선교단체의 여러가지 책들을 모두 다 구입하여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부의 한 학생(방선기)을 네비게이토에 가입하여 거기서 배운 것을 내게 알려달라고 하니 그 학생이 네비게이토에 가입하여 6개월 흐르자 목사님에게 와서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살펴보니 교회는 교리는 있는데 복음이 없고 회의는 많은데 훈련이 없었고, 행사는 많은데 비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단체를 모델삼아 그 교회에 맞는 제자화 훈련을 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가장 큰 대학부를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학부를 세워가는 중에 서울대 의대 2학년에 다니는 학생 하나가 찾아 와서 “목사님 저 학교 그만두고 신학교를 갈까 합니다” 그러길래 목사님은 그 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너 본과에 올라가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까봐 그렇지?” 라고 되물었습니다. 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나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고 경희대 병원을 심방하니 한 밤중에 피로에 젖어 회진을 도는 레지던트 의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가 청진기를 꺼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제가 왜 이렇게 고생하는 줄 아세요? 다 목사님 때문입니다” 그 분은 후에 자신의 분야에 권위있는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가끔 “너 아직도 내가 원망스럽냐?” “무슨 소리세요 저는 목회자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는 걸요” 하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자도가 교회에서 성경만 가르치는 일에 국한되면 그 제자도는 도서관에서 남아 책만 읽어 정보를 얻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제자도는 교회에서 시작되어 가정과 사회에 들어와야 그 충만한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배우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수아 14장에 나오는 갈렙과 같습니다. 갈렙은 일생을 가나안 땅을 얻는 데 소비하였습니다. 그것이 삶의 근거이자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토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도하러 중국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갈렙은 두려운 적을 상대로 믿음의 말을 선포하였고,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그는 45년 간을 간직하여 가나안 땅의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여호수아에게 가서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은 제비를 뽑았지만 갈렙의 경우만은 예외적으로 그가 원하는 지역을 주었던 것입니다. 헤브론에는 거대한 아낙 자손이 버팅기고 있어서 아직 이스라엘 자손이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갈렙은 전쟁에 능한 자였기에 가서 아낙 자손의 세 아들을 쫓아내고 그 곳을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에 제자도의 방법과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에게 주어진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역시 지혜가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상황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맞는 해석이어도 지금은 맞는 해석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같이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선교와 관련하여서는 마태복음20:28-29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담대하게 우리의 직장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11:22-24에 나타난 “누구든지”입니다. 여기에 우리를 포섭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적용하시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인내하면서 애를 쓰시기를 바랍니다.
삽화: 신예현 – www.lifeisyea.com
열두 제자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12 – 16절
오늘 주님은 산 위에 오르셔서 많은 사람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러 보내기도 하시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열두 명의 이름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인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주님의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 기도, 은사와 제자들이 필수적입니다. 이들은 부족하였습니다.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만 결국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온전해졌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모습이 되기위해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를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고 선대하셨습니다. 이런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선대하면서 친절하게 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온유하심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
참된지혜
참된 지혜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5.16 – 20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그 이유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마5:13-16). 이 두 가지 비유는, 소금이 고기에 배어들고 빛이 어둠을 비추듯,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스며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상징은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처럼, 또 어둠을 물리치고 환하게 밝혀 주는 빛처럼,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의 사명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해야합니다. 소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왕국의 가치와 표준을 굳게 지킴으로써 사회의 악화를 막는 일에 일익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대상에는 우리의 직접적인 이웃이 포함됩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 가정 하나가, 그 지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 교회 하나가, 복음을 전파하며 그 지역 생활에 건설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지역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지역 사회에 복음을 증거하는 책임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각각의 교회가 ‘전도회’를 조직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활동을 교회가 주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나름대로 주도권을 가지고 여가 활동이나 봉사 활동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 정부 활동에 참여하거나, 학교 후원회의 임원이 되거나, 자원 봉사를 필요로 하는 수 많은 곳에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활동입니다.
환경 운동이 날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이 대중화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것은 지구가 부서지기 쉬운 귀중한 물건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돌보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이런한 의식개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세계 인류의 단일성과 일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편협한 지역주의와 인종주의를 근절하고 세계 시민의식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적인 관심사’에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선교’의 부르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마28:19)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자신의 보좌 우편이라는 최고 영예의 자리에 앉히심으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빌2:9-11). 이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시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신들로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선교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해 주신 세계 선교에 어떤 방법으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가 없는 사명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특정 선교 단체나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연락을 취하며, 정기적인 중보 기도등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선교의 문제를 떠나 우리는 ‘세계적인 관심사’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관심사’란 평화, 정의, 환경 등의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문제들은 너무나 산적해 있고 가지각색입니다만 최근의 좋은 예는 북한의 핵 개발의 문제로 인한 평화의 위협이나, 자주 일어나는 일본의 지진의 문제등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개인적이고 특정한 관심사에 따라서 한두 가지를 선택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관심 분야 단체에 가입하여 연구하고 또 거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아와 무주택,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지질학, 인간 생명의 신성함, 인종간의 조화, 인권등의 분야가 있습니다. 비록 세계적인 관심사는 거창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계 시민의 일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등안히 여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2
신약에 이르면 12제자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의 출신은 모두 미천한 가문들입니다. 그 중에 6명은 모두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뒤 2틀이내에 만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간절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열 두 사도로 택하신 이유는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왕이나 장수 그리고 부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영생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가운데 예수 믿어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선택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 사함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기에 이들은 복음의 사신이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열심히 노력한 자들이 먼저 거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같습니다. 그것은 해가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복을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게 됩니다.
그러므로 빌게이츠와 달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인생관은 180도 전환됩니다. 먼저 세상에서 우리의 낮음에 대하여 우리의 재산 구조 삶의 구조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여 낮을 지라도 두려워 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누구도 세상의 것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자도 가져가는 것이 없고 적게 가진 자도 가져가는 것이 없기에 삶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이는 비교의식에서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가 우리에게 있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준비하고 계십시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준비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야든지 1만시간은 들어야 전문가가 된다고 합니다. 1만시간은 매일 3시간씩 전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10년이 걸려 달성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준비를 갖추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그 나라를 위해 쓰임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신예현 – 하나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