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그리스도

주일 예배(11.6)

성경구절 누가복음 8장 8절, 15절

 

오늘 본문은 “좋은 땅”에 비유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좋은 땅”에서 맺어지는 결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진정인지는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삶으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삶을 말합니다. 복음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진리가 얼마나 귀중한 가를 인식하여 보배처럼 마음에 담고 인내하여 시련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를 삶에서 맺어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지만 그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 인류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   “좋은 땅” 에서 맺어지는 결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의미합니다.

2.    “좋은 땅”에 비유된 사람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이루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삶에서 결실할 때까지 순종하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3.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로서는 누가 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SBC 매일큐티

16/10/31

어느 심리학자가 한 마을에 가서 집집마다 10달러씩을 문 앞에 두고는 관찰을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 놓여 있는 10달러 지폐를 발견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또 지폐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똑 같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더니 며칠 지나서는 당연하게 자기 돈을 집듯 집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학자는 지폐를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지폐를 집으려 하다가 돈이 없는 걸 발견하고는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돈 어디 갔어?” 우리가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감사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16/11/1

어느 나라의 왕이 백성을 사랑하여 지혜로운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세상의 지혜를 정리하도록 하시오.”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지혜를 모아 백성을 가르칠 수 있도록 12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왕에게 가지고 나아오니 왕이 하는 말이 “12권의 책은 너무나 많으니 그것을 더 줄여서 오시오.” 신하들은 지혜를 모아 한 권으로 줄였습니다. 왕은 또 말하기를 “아직도 많으니 더 요약해 오시오.” 세상의 지혜를 줄이고 정리한 신하들은 마침내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There’s No Free Lunch!)” 그렇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라는 가장 큰 대가를 치루고 확보하신 것입니다(벧전 1: 18-19). 그러므로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우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16/11/2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사경에 헤매이는 십대 초반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나온 대학생이 이 소년의 기록을 보고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영어 문법의 동사 변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정을 받은 이 소년의 상태가 점점 더 나아지기 시작하더니 두 주가 지나면서 완전히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원인을 물으니 소년이 하는 말이 놀라웠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한 대학생 형이 들어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그 형은‘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게 되면 이것들을 알아 두어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 라고 하여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줄 리가 없지.’ 그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소망은 이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 그것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소망을 붙잡고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6/11/3

미국의 어떤 부인이 병으로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실명한 아내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 이제 나도 내 일을 좀 해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당신 스스로 회사를 다니도록 합시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말을 듣자 부인은 이를 악물었습니다.”긴 병에 효자 업다더니 이제 나에 대한 사랑도 식었구나. 좋다. 내 힘으로 해볼 테다.” 부인은 다음날부터 혼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넘어지고 부딪치고 다치고 길을 헤매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2년 동안 그렇게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늘 타고 다니는 버스 기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부인만큼 남편의 사랑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께서는 매일 부인의 뒤를 조용히 따라 와서 꼭 뒷자리에 앉고는 부인이 회사의 문 안에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고는 돌아가시더군요” 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홀로 설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혼자서 맞이하는 것 같지만 늘상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설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계십니다.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운 여로보암

유다 지파를 제외한 10지파의 지지를 받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세겜에 도읍을 세우고 국가체제를 정비한 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공포하고 자기 마음대로 날과 절기들 그리고 보통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정하였다(열상12:25-33).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시어 만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여 다윗 같이 그의 율례와 명령을 지킨다면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었다(열상11:38). 그러나 여로보암이 열지파의 지지를 받아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워 이스라엘 하나님과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여로보암의 국가는 인종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국가여서 종교적인 구심점이 필요하였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각각 섬겼으므로 여로보암은 혼합종교를 창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알같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우고 이를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고는 유다의 장막절과 비슷하게 팔월 십오일로 절기가 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은 가나안 백성들이 동물을 자기들 신의 임재의 상징으로 한 것을 본받아 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여로보암은 자신의 영토 북쪽 끝 도시인 단과 남쪽으로 유다와 가까운 지역인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국가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고 국가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이들 도시들은 혼합적 우상숭배의 대명사로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본보기로서 일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열하10:29; 예레48:13; 호10:15).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북이스라엘 국가를 참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북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106-107참조).

 

여로보암은 무엇 때문에 살았을까요? 그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자신이 왕이 된 목적을 망각하고 자신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그것은 이세상만 바라보았을 때이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행동이고, 아히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항상 갈래길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가 무슨 근거로 어떤 길을 선택하시는지 하나님은 주의깊게 지켜보십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바로 그 의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목적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공중의 새가 하늘이 없으면 날 수없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존재 의의가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8장 7절, 14절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씨가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니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로서,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속한 자들로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금 한 덩이를 취한 아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왕 사울, 아람사람 나아만으로부터 옷과 은을 속여 취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가룟 유다, 데마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들었을 때 받아들여 뿌리를 내렸으나 재물의 유혹과 이생의 염려 그리고 이 세상의 향락에 믿음이 좌초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태도는 머리로는 이해를 하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 세상의 온갖 걱정근심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안고 가다가 가시에 찔려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삶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구원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순종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인내 한다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1.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들은 바 복음이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2.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은 무슨 태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들은 바 복음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3.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도 변화될 수 있을까요? 들은 바 복음을 깨닫고 순종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인내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SBC매일 큐티

2016. 10.24 – 28

하나님께서 세우신 조직이 3개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입니다. 가정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이 가정은 사회의

기본이며 가정의  기본은 가족입니다. 또한 가족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다이아나 루먼스의 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음악가 브람스는 효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트럼펫주자였는데 한번은 굳이 아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트럼펫주자를 하겠다고 우겼습니다. 브람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연습을 시작하였지만 워낙 아버지가 틀리니까 참다못해 연습을 중단하고 한마디 하려고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하는 말 “애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잘 아니까 제발 조용히 해다오”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배려하는 브람스는 한번은 아버지에게 악보를 주면서 “아버지 어려우시면 이 악보를 보도록 하세요”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준 악보를 그냥 보관하다가 어려움이 닥쳐 아들의 말을 기억하고 악보를 열어보니 그 속에 상당한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지방의 작은 마을에 조그마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온 70대 노부부의 금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었지만 거실 탁자 위에 깨진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세월이 참 빠릅니다. 남편과 결혼한지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남편과 제가 이때까지 아무 탈 없이 결혼 생활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탁자 위의 깨진 꽃병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실망을 느낄 때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져 괴로울 때 저 꽃병이 나를 지켜주었지요. 51년 전 늠름한 청년이었던 남편이 제 방에서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요. 감격한 나머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만 탁자 위의 꽃병을 깨고 말았답니다. 저 깨진 꽃병은 그날의 내가 느낀 감격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을 늘 되새기기 위해 꽃병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고 있답니다.” 결혼은 가정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 결혼을 거룩하게 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매우 슬퍼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던 4살박이 꼬마가 다가가서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을 드렸냐고 물었습니다.꼬마는 대답하였습니다. “아무 말도 안했어요. 실컷 우시게 도와드렸어요.”옥한음 목사님이 목회를 하실 때 사랑의 교회 여집사의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을 하러 장례식장에 가셨습니다. 도착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하여야 할 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래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함께 있다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그 미망인에게 편지가 오기를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함께 계시다가 가신 옥목사님이 가장 고마웠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참된 사랑과 위로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친족이나 이웃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1845년 영국에서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뱃길을 탐험하기 위해 프랭클린 원정대가 출항하였습니다. 선원들은 두 척의 배에 항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많은 물건들을 실었습니다. 1,200권의 책들, 고급 도자기, 순은제 식기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조 연료로 사용되는 석탄은 겨우 12일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는 얼음 바다 위에서 좌초되었고 몇 달 후 프랭클린 경우 사망했습니다. 선원들은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얼음 위를 걸어서 안전 지역을 찾아나섰으나 결국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 한 그룹은 두 명의 장교로 구성되었는데 큰 썰매를 끌면서 얼음판 위를 65마일이나 이동하였습니다. 후에 수색대는 그들의 시체와 그 썰매 위에 가득 실려 있는 은식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끌고 다니다가 자신들의 목숨과 바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쫓으면서 주님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8장 6&13절

 

흙이 얇게 덮힌 바위와 같은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즉시 이를 받으나 복음 때문에 시련이 몰려오면 믿음을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홍해를 가르고 인도하여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육체적인 만족만을 추구하였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돌짝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마음을 변화시켜 복음의 가치를 붙들고, 믿음의 목적, 시험의 의미를 이해하여 소망 가운데 인내하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바위가 쪼개지고 믿음은 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복음을 깊이 이해하고, 시련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 한 낮의 태양도 아무 문제 없이 견디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SBC매일큐티

마태복음 25장 31-46 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매우 엄숙한 이야기를 직접 묘사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배웠는데 다시 오신 주님은 지극히 작은 형제를 돌보아 주지 않은 행위를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댜고 믿는 것은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약 기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고, 살아 있으며, 구원받은 믿음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동으로 표출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미 언급된 마태복음 25:31-45에 나오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태도는 그의 형제들(이는 먼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고 외쳤으며, 바울은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증거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믿음의 표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칭의)은 믿음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심판은 행위, 즉 선행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네가 진정으로 나를 믿었느냐 그렇다면 나를 쫓아 살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서 진정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신칭의(이 말은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이며,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뜻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은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며 오직 의인이라야 바른 관계를 하나님과 가질 수 있습니다.)의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강조한 로마서에서, 또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영생을 주실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롬2:7)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크 가이피어스(Mark Guypearce)가 한 어떤 사람의 믿음이 그를 이기심에서 섬김으로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분명 그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출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라는 말은 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의 본을 따르라고, 선을 행함으로써, 즉,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의 선행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 즉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예수님을 딸고 그의 발자취를 좇으려 한다면, 선행을 할 만한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선행은 우리 사랑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이며 그 사랑은 우리 믿음이 진실됨을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마 16: 5-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오병이어 기적과 이방인들을 위한 칠병이어의 기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이전에 오병이어를 통하여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남자만 사천명을 먹이신 뒤 무리를 흩어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땅에 속한 기적이라고 평가절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떡을 가져 가기를 잊은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자 잘못 이해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당신에 믿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떡에 관해서는 이미 무리 수만명을 두 번이나 몇 개 되지 않는 떡과 생선으로 먹일 수 있었다면 하물며 12명의 제자들을 먹일 수가 없겠는가? 라는 논리를 가지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입니다사람이 이 부분에 들어가서 이성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작을 수 밖에 없고 매일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며 세상에 휘들려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하늘에서 들으면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신장이 거대함과 견고한 성벽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실족하여 60만명이 광야에서 죽은 이유는 듣는 자들이 생각하며 이치를 따지는 신뢰의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두려울 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반석 위에 염소새끼를 잡은 고기와 무교병을 놓으니 사자가 지팡이로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비로서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을 듣고 비로서 안심하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마노아와 그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삼손을 낳을 것을 지시받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염소새끼와 소제물을 바위 위에 놓으매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습니다. 이를 보고 마노아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 그 아내는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고, 이 모든 일과 이 모든 말씀을 이르셨으니 죽이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며 이치를 따져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면, 하물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내가 봉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선물을 주시기 위한 전조인 것입니다.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어려움을 지나갈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105991139972846삽화:(http://cfile229.uf.daum.net/image/27340D3955B6AF0B0B2A03)

 

길 가에 떨어진 씨 비유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8: 4-5, 12

 

오늘 본문에서  길가에 속한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원래 율법을 어겨 우리 마음대로 살아간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전부 담당하사 죽게 하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게 하사 당신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제 죄인과 의인을 심판하러 다시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에 던져넣는다는 내용이 복음의 요지입니다. 이같이 인간이 가장 원하는 죄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바로 복음이므로 마귀는 이를 믿어 구원 받지 못하도록 의심과 거짓논리를 집어넣고 거짓기적을 보임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씨가 싹을 트는 것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소망중에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1. 뿌려야 할 씨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길 가라고 언급된 사람은 복음의 씨가 싹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3. 마귀는 복음의 씨를 삼킬 거짓 논리를 밤낮 궁리하고 있습니다.

 

4. 그러나 “길 가”라고 언급된 사람도 구원의 길은 있습니다.

SBC 매일큐티

2016. 10. 10 – 1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가르침에 우리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때때로 다른 신앙(정령주의자,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등)을 가지거나 다른 인종 혹은 국적의 사람들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베푸는 도움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수단이 아닐 경우에는 그들을 섬기길 꺼리지는 않는가 역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가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게 하는 것이 주님이 명령한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 즉,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섬김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야만적으로 폭행을 당해 벌거벗겨지고 피를 흘리며, 기진맥진해 거의 죽게 된 그가 긴급히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고, 필요한 부대 비용을 주막 주인에게 더 주었습니다. 이때 그는 유대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지만 그의 주머니에 전도지를 넣지는 않았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내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의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는데, 사실 이 논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간의 우선순위의 결정은 우리의 이웃이 처한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가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두가지는 모두 이웃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사랑할 이웃은 육체 없는 영혼이 아니고, 영혼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된 한 개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적, 영적,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입니다. 우리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나 사회성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읏울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죄사함의 복음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만 합니다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우리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이 복음전도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을 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직 구세주일 뿐이며 인간의 창조주는 아닌 것처럼, 예수님이 단지 설교만 하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거나 병든 자를 치료하신 적은 결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예수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두 가지를 병행하셨습니다(눅 8:1). 그리고 주님은 어느 한 가지를 한다는 것이 다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나 구실이 되지않았습니다. 이 둘은 인간들을 향한 그의 깊은 동정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표현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그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자신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며,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장 31절 이하). 이 구절은 종종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유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을 양과 염소에 비유한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최후 심판의 매우 엄숙한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