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손마른 사람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6 – 11절           

주님은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다가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그런 병은 안식일에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터무니 없는 성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안식일에도 천지를 유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의 주인” 이시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에 얽매실 수 없는 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인간의 경험과 상식의 측면에서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의 손을 기적으로 고쳐 보내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예배에 관한 의식적인 면이 실질적인 하나님의 의와 충돌할 경우 우리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립된 경험과 상식 안에서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 5. 9- 13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나무를 나게 하시고 창조하신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들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2:8, 15). 하나님은 환경을 보호하고 그 속에 있는 자원을 개발할 책임을 인간 관리인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청지기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지주이시고 우리는 관리인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동역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우리는 경작합니다. 또한 그분은 심으시고 우리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신 것은 자연이라고 불리우고, 우리가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문화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문화는 자연없이는 생길 수 없으며, 자연도 문화가 없이는 그 가치가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천연 자원을 주시고 그것들을 유용한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노동이든, 정신적 노동이든, 혹은 둘 다이든 간에, 또 임금을 받는 일이든 아니면 자원 봉사든 간에 그리고 아무리 낮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노동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관리를 위임하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분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공업과 무역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또 공공 서비스와 전문 직종, 전임 가사 노동과 어머니의 육아 활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특권을 부인당하고 있는 현실은 실업의 커다란 해악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느냐 즉,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질과 재능, 교육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일(직업)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좌절되지 않고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개는 교회 사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일, 특히 성직자의 사역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역은 성직자와 교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 교회도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정식 교인은 자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활동 주로 교회 청소, 꽃꽃이, 좌석 안내, 주일 학교 봉사, 성가대 찬양, 청년 모임 인도와 교회의 각종 위원회 섬김등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가지 일들은 모든 교회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이지만 평신도의 교회 사역 비전이 흔히 여기서 멈춘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올바르겠습니까?

 

흔히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너무나 엄격하게 구별하고, 나아가 이차적으로 목회 사역(성직자의 분야)과 실제 사역(평신도가 할 수 있는 분야)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목회자의 주된 역할을 회중 설교를 포함한 가르치는 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사역들 역시 은사를 지니고 있으며 훈련을 받고 임명받은 평신도들과 공유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들이 장로 권사와 집사를 선출하여 성직자와 밀접하게 협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들은 때로 설교도 하고 각종 봉사 활동을 지도하며, 특히 중보 사역과 성만찬을 돕는 일 그리고 심방, 상담을 하며 침례와 교회등록을 원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결혼을 앞둔 커플들을 준비시키며 교회 생활의 다양한 분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식하고 합당하게 구성된 지도자 팀을 개발하여서 그들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발휘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 외에도 두 개의 특별한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역 교회와 지역의 이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어졌습니다(요17:18).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보내신 세상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표현 특히 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속 사회라고 부르는 곳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일부 지역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교회 건물이라는 보호막이나 서로 마음이 통하는 교제권 속에 안주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직장이 비기독교적인 환경이라면 우리는 이미 날마다 세상 속으로 이미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왜 세상 속으로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브아에 살고 있는 벤야민 지파 사울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선정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먼저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이었기에 (삼상9:21), 다른 지파의 질투심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비록 베야민 지파가 국가적인 일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여도 그 규모에 비추어 볼때 그렇게 큰 위험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의 고향 기브아(삼상11:4)는 이미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패륜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탄을 받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삿19-21). 

두번째로, 지정학적 측면에서 벤야민 지파의 위치는 이스라엘 지파의 중심에 있었으며 다른 지파들이 이 새로선정된 왕에게 접근하기가 용이하였다.더구나 사무엘은 40년동안 사사로서 벧엘, 길갈, 미스바, 그리고 라마를 중심으로 에브라임, 벤야민, 그리고 유다 지파를 순례하였으며, 언약궤와 성막 역시 근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세번째로, 더나아가 기브아(높은 언덕의 뜻으로 감람산 보다 조금 더 높음)는 모든 유대의 산세와 베냐민의 지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이며 북으로 세겜을 남으로 헤브론과 연결하는 능선도로의 중심에 있었다. 즉, 기브아는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북쪽과 남쪽으로 여행할 때나 동쪽이나 서쪽으로 여행하여 요단 강이나 지중해 해변 평야로 나아가고자 할 때 거쳐야할 도로들의 교차점에 있었다. 만약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통괄하고자 한다면 이 기브아야 말로 그렇게 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왕 즉, 사울이 이스라엘 내지로부터 블레셋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고향인 기브아는 그 좋은 출발지였던 것이다. 이 후 사울이 왕이 된 후 이 지역 근처인 게바, 믹마스, 벧아웬에서 곧장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삼상13-14). 사울은 전투의 중심지 기브아에서 살았던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2-83 참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하여 사용하시는 사람은 그 상황과 목적에 적합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같은 것이다. 다만 신자는 그렇게 탣하시고 사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고 불신자인 경우는 우연과 자신의 노력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최근의 좋은 예가 빌게이츠이다. 1980년초 Personal Computer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컴퓨터와 프로그밍에 1만시간을 쏟아 부어 전문가가 된 상태였다. 준비된 이 사람은 불어닥친 PC 시대에 MS-DOS를 공급하여 소프트웨어의 황제 자리에 올라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빌게이츠는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사용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분야에 1만시간 이상을 쏟아부어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대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대를 타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1 – 5절           

오늘 본문에서 밀밭 사이를 걷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들의 행위가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자칫하면 제자들은 벌을 받을 수 있는 사정이고 주님의 사역은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허기가 졌을 때 제사장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진설한 떡을 받아 먹은 사건을 들어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셨습니다. 이는 의식법의 엄격한 준수는 필요하지만 예외적으로 깨드리는 것이 허용될 때가 있는데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자비가 필요할 때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하여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최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당신이 원하면 안식일에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람은 지식이 사랑에 의해 온전해 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알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5/2~5/4)

가정에서의 사역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의 최우선순위는 사람들의 영원한 영적인 행복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알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때 자신들의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자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항상 그분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웃의 물질적인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 사이의 상대적인 장점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전혀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증거와 섬김, 이 모두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결혼은 인간의 제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에 관하여 질문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엑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일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에는 하나님이 고독한 자를 가족과 함께 살게하신다(68:6)라고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며 풍성하고 서로 협력하는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자선은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는 경고의 말씀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상은 우리가 가정에서 삶을 시작하여 부모와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에 따라) 결혼하여 우리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우리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년이 된 자녀들이 사회에서 자기 관심사를 찾고 개발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지만 자기 집을 여관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부모도 자기 직업이나 교회, 지역 사회의 일원이나 여가 활동에 치우친 나머지, 자녀들이 자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자녀된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도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언을 통하여 균형잡힌 가정과 사회 생활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사역

직장이란 우리가 섬김, 즉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발휘해야 할 두 번째 영역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직장을 오직 복음 전도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장을 동료나 직원들에게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의 장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직장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들의 복음 증거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노동의 질에 의해서 보여진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은 복음 전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한 형태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기독교적인 노동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발점이 되는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사색적이고, 창조적이며, 부지런하고, 신중한 일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고 일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감독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 그들 역시 창조적인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일하는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노동에 영광과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생활비를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에는 좀더 고상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의 직분을 주시고 이 직분이 노동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오용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항을 성경은 명하시고 다른 모든 사항들은 상식 가운데 위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 위해 삶을 해석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경을 읽되 성경이 말씀하시는 뜻과 취지를 넘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다가 그리스도의 뜻을 잘못 알게 되면 상식만 가지고 사는 일반사람들보다도 못한 삶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재물의 획득과 관련된 사고입니다. 성경에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적당한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의 약속을 그리스도 중심이나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창출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소용되는 약속으로 이용할 경우 성경을 오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특히 성경에서 레에마를 듣겠다는 사람에게 많이 발생합니다.

 

김미진 씨가 지은 왕의 재정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내게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 성경 말씀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흐르거나 가슴이 뭉쿨해지거나 뭔가 깨달음이 오는 것은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둘째, 목사님의 설교 또는 강의를 듣다가 감동, 깨달음, 눈물, 도전, 소망이 충만해짐, 기쁨이 넘침,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레마로 내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누구나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낼 수가 있다.(77)라고 하면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례를 많이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큰 문제가 상식적인 인간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자는 빚지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빚을 지지않고 사는 삶을 실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아들의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옆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병원에 가야하는 응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급한 응급상황인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자는 이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너는 더 이상 빚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부러진 손가락 마디를 고정한 뒤 통증 때문에 우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 밤새도록 고통가운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틑날 믿음으로 아들의 손에 흰 양말을 씌워 학교로 보내자 학교에 가는 도중에 선흘교회 사모님을 만나 병원에 가게 되었고 아들이 손가락이 다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여호와 이레인양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왕의 재정 282-284). 여러분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상식은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빚지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식적인 행동을 이상한 음성을 들으므로 하지 못하고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 아들의 심각한 외상을 치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믿음의 상태입니다. 

 

정당한 노력과 그에 따른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없이 기도하여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거나, 성경을 읽고 무슨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든지, 그런 일반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재물을 벌고자 하는 것은 마법적인 신앙과 욕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능력의 범위를 넘거나 노력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공식을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듯이 살면 자신의 노력없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고 복이 떨어진다는 믿음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요행으로 돈은 벌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뜻인지를 분별해 낼 수가 없어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관련하여 성경은 상식적인 원리이외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재물 버는 법을 가르쳐 준 구절이 없습니다. 더구나 21세기의 지식기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을 버는지는 경영학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을 도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도처에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잃는 법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재물을 버는 것에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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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James O’Brien

가정과 그리스도

에베소서 5장 33절 – 6장 4절           

모든 사람에게서 가정은 “출생, 교육, 결혼, 죽음, 성공, 실패”등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며 영원의 삶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에서 성공하여도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들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때 비로서 질서가 잡히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 승천하사 모든 능력을 가지신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가정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가 서로 사랑과 존경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등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명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사명의 실현을 위해서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은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기도할 때 비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때 우리 가정에 사랑,희락, 화평, 오래참음과 같은 성령님의 열매가 맺혀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정의 리더가 되시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가정이 주님의 뜻이 실천되는 사명의 대상임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SBC 매일 큐티

2016. 4. 25- 29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불신자와 폭넓은 교제를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한 좋은 취미생활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곰과 같은 야생맹수들을 수렵하는 클럽에 가담하여 취미생활을 즐겨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취미생활을 통해 여러명의 불신자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200 여명을 전도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불신자와의 폭 넓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런 전도의 열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 불신자들과의 교제의 폭을 넓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인과만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사회적, 지적으로만 결합하고 영적으로는 결합하지 않는 관계를 맺기에는 결혼은 너무나 친밀하고 성스러운 결합이기 때문입니다(고후6:14).

 오늘부터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른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는 본문은 이사야 42-53장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분 자신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슴하셨습니다(막10:45). 그분은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치유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지 못할 만큼 비천한 일도, 부담스러운 일도 없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급기야 주님은 여기서 한 번 더 낮추사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이 실행했던 섬김의 이상들을 본받고 나아가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라고 하시면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처럼 예수님은 섬김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섬김을 통해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생명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분들은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이들은 모두 서신서 서두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주저없이 불렀습니다. 이 의미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피 값을 주고 사셔서 당신의 소유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주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명백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중적인 예속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4:5). 마르틴 루터는 이런 사상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을1520년에 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논지를 가지고 외견상 상반되나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에 자유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섬김)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 모든 것에 자유를 받았으나 도리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면 그런 사랑의 봉사 즉, 섬김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섬김(service)과 사역(ministry) 이 두 단어는 모두 동일한 헬라어 단어인 디아코니아(diakonia) 를 한글로 번역한 말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섬김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은 모두 몸과 영혼을 가지고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웃의 전체적인 행복, 즉 신체적, 영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3가지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과 은사에 따라 섬김의 중점이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이 3가지를 함께 또 균형있게 고려하지 못하고 한 곳으로 치우치는데서 우리의 섬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로마서 4장 16-17을 강해하는 중 존스토트 목사님은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않고 (롬4:19) 도리어 강하여졌습니다 (롬4:20).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용함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거나,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 몸을 배배꼬면서 몸부림치거나, 우리의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슬을 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는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를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몸은 죽은 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또 사라의 사정 역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 역시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 이를 좀 더 낫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와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17). 그리고는 이런 약속들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였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움추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4:21).

제자도는 바로 이 갈림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좁은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며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로보암 1세입니다 (열상 11-12장 특히 열상12:26). 그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10지파를 주겠으며 당신의 법도를 지키고 다윗과 같이 신실하면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약점이 공격받았을 때 그는 그만 그 약점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속하여 있지를 않아 자신의 백성들이 절기때면 남왕국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결국 백성들이 배반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또한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을 뽑지도 않고 절기도 자기마음대로 정한 8월 15일로 하여 유대의 절기와 비슷하게 함으로써 북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 되었고 20년 뒤 그 가문은 멸망당하였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미국에 시드니라는 앰프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 있었습니다. 회사가 200대의 앰프를 주문 받자 그는 이를 전부 생산하였으나 앰프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직원들이 설계도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분은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예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에  2개의 특정전선을 서로 교차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앰프가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200대 모두 잘 납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엔지니어인 나보다 앰프를 더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갈림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Chagall_56Bible_Abraham_SarMarc Chagall – Abraham and Sara (1956)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라

마태복음 5:43-48

 

복음의 열매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사 인간이 되시고 그 죄를 속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으며 그 죄인들을 의롭다하시려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 행동이 사랑의 실천이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삶이 잘 나타난 것이 세리 마태와의 조우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길을 가시다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다가가사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당시 세리는 많은 사회적인 차별과 비난은 매우 컸습니다. 이들은 유대법에 의해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어떤 경우에도 증인의 위치에 서지 못하였고, 부정한 짐승들이나 부정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 강도들과 살인자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가사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시고 타부시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나 그들의 잘못을 한 번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고 하시면서 유대인 사이에서 존재하였던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에 비난 받는 세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례를 본받아 실천하신 분으로 일본의 나가노 목사님과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나가노 라는 일본의 젊은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곳으로 가서 개척할 것인가를 기도하다가 동서남북 100킬로 이내에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아 일본의 북부 가나사와 지방으로 갔고 여기서 천막을 치고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5년간 한 명의 교인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 첫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고 설교 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밥을 먹다 말고 식탁 위에 검붉은 피를 쏟아내었습니다. 폐결액 환자였던 것입니다. 20세기 초엽인 이 당시의 폐결핵은 매우 무서운 전염병으로 이 청년은 다니던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쫓겨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진정하고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쓸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청년에게 음식을 다시 가져다주며 함께 먹었습니다. 청년은 배웠습니다. 신앙은 사랑이라는 것을. 천막 교회에서 나가노 목사와 얼마동안을 지내는 동안 기적처럼 청년의 폐병은 나았고 이 청년은 신학교로 되돌아가 졸업하고는 일본 고베와 도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의 빈민 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분이 유명한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이었습니다. 종전 후 한국에 와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을 사죄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빈민구제 활동을 할 때는 심지어 변비가 걸린 환자의 항문을 혀로 녹여내어 변을 보게하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빈민구호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 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사랑의 시작은 부족한 것이 보일 때입니다. 흠이 보일 때인 것입니다. 가가와 목사님은 사랑이란 남의 실수나 실패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부터 시작하십시요!

FullSizeRender삽화: 신예현 (www.lifeisy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