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매일큐티 | 2016.8.29 – 9.2

‘소명’은 일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속에서 만족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만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들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클레시스(klesis)’가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백성이며, 소명을 가진 백성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로서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가진 단체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의미에서 여러 거지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석공, 건축사, 심리학자, 자동차 세일즈맨, 관리인, 가정주부등에 종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사용하라”(고전7:21). 이 말은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주차장에서 밤 근무하는 일을 하다가 부름받았느냐? 지금 너의 일이 싫으냐? 염려하지 말라! 만약 네게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꾸도록 하라. 그러나 직업을 바꾸는 데 몰두한 나머지 네게 있는 소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수행할 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나 이사회의 이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모두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고전7:22).

 

소명은 하나이지만 직업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들은 소명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적 위치나 환경들이 소명 때문에 손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도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소명에 비해 아주 미약합니다. 사실, 각각의 직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직업을 이끄는 주된 원리이지만 우리가 현재 담당하는 직업은 그런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달성하려는 목적은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출석하던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받기를 “체신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비결이라니요? 주일학교야 말로 저의 비즈니스인걸요!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지요.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그는 진정으로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불확실성과 우리의 믿음의 삶

사무엘상 16:1, 8

사무엘 상 16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을 치고 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와 양과 나귀를 진멸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계속 슬퍼하니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르셔서,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다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군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는 양 라마에서 베들레헴으로 약 15킬로미터를 가서 베들레헴의 장로들을 만나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청하였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인상이 깊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어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이렇게 초대한 7명을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초대받지 아니한 말째 아들인 어린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취하시는데 어떻게 언제를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능력과 선하심을 굳게 붙잡도록 하십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사무엘이 어렸을 때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다윗입니다. 우리는 이 어린 다윗이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될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계속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큰 일이 당장 일어난 것은 아니고 다윗은 계속 양을 쳤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25킬로 떨어진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어떤 누구도 당하지 못하였던 골리앗 장수를 물매돌로 이긴 다윗은 사울의 총애를 받아 부마도 되고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으면 이제 곧 다윗이 왕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를 뒤엎고 다윗은  사울의 적이 되어 먼저 죽인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도망을 가고, 이어 다시 유대로 들어와 부모님은 모압 왕에게 부탁을 하고 자신은 유대 광야에서 약 10년을 도망다니면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사울이 계속 다윗을 수색하고 군대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두 번 시험합니다. 만약 사울만 없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부하들의 기대를 뒤로 한 채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두 번을 만나 사울을 살려주고 회개하는 사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시 도망을 다니다가 최후로 불레셋의 진영으로 도망을 갑니다. 거기서 약 1년 3개월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위험을 무릎쓰고 유다를 위하여 전쟁을 합니다. 만약 블레셋 군주가 알았다면 다윗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하여 길보아 산에 죽으니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이어 수년이 지나자 나머지 지파도 복속되어 드디어 다윗은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이야기사 사무엘 상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이루시는 방법과 때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시기와 상황을 분별하는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가져다 주며, 삶을 신중하게 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며, 우리의 믿음의 순도를 재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성공하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야 자아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우리와 깊은 신뢰와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고자 하시며,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불확실성을 만날 때 그때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주실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아시고 그 중심을 굳게 하나님에게 두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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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http://god.garrettcampagna.com/

 

백부장의 믿음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7장 1-10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이방인이며 로마 군대의 장교도 아닌 선임하사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직무에 정통하여 군대내에서 명령이 무엇이고 복종이 어떤 것인지 전투를 하면서 직접 체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군대의 생명은 명령과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매우 가치있게 여기는 종이 중풍병에 걸려 심히 괴로워 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중에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갔고 오직 주님이 원하시면 사랑하는 종의 중풍병은 금방 고치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믿음은 결국 주님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 근거는 군대에서의 상식을 영적인 세계에 적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메시야이면 중풍병에도 주인이시므로 당연히 말씀만 하면 종 처럼 병이 말을 듣고 물러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의 일터에서 터득한 인생의 상식을 영적인 세계에 적용하십시요. 기도 제목을 정할 때도 상식을 발휘하십시요.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야 될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인내하면서 선하신 주님을 기다리십시요. 그는 신실한 주님이십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이 될 것입니다.

1.    백부장은 예수께서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     백부장은 생각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3.    백부장에게는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큐티

2016. 8.22 – 2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일이 죄와 죽음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실까요? 그분은 제일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타락한 일을 구속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죄로 인한 결과를 가리켜 즐겨 사용하였던 말은 “멀어지다 alienated”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서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골1:21-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일을 타락시킨 원인, 곧 죄악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결과로 우리가 일과 씨름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실 것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원래의 하나님의 의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쉴까에 대해, 즉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 고 하신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삶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는 말씀은 “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먹이고 입힐 책임을 질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책임을 지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오직 한 가지 책임만을 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벤 패터슨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우리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염려해 본 적이 없으며, 집세나 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은 더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직 어린아이다운 것,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치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할을 부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일이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일이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채워 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길보아 산에서 왕 사울이 죽다

(삼상31:8-10)

다윗이 블레셋 다섯 방백 중 하나인 가드로 망명하자 더 이상 왕 사울이 쫒기를 그쳤으나 이제는 블레셋과의 마지막이자 아주 중요한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블레셋은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아벡으로 군사력을 집결하여 수넴(길보아산 북서쪽 15킬로미터)에 진쳤고 사울은 길보아산(갈리리바다 남서쪽45킬로에 위치)에 진 쳤다(삼상28:4). 결국 이들은 이스르엘 평원에서 접전을 하여 사울은 패배하고 길보아산으로 퇴각하다가 이 산에서 아들 셋이 죽고 본인은 자살하고 만다(삼상31:1-6). 사울이 패배한 이스르엘 계곡은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는 가나안인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진을 쳤다가 훈련받지도 못하였고 무장도 불충분한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한 곳이었다(삿4). 또한, 기드온은 길보아산 기슭에 있는 하롯샘에,  상대방  미디안은 북편의 모레산 앞 이스르엘 계곡(길보아산에서 약10킬로) 에 진을 쳤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불과 300명의 군사로 수 많은 미디안 군대를 이겼던 곳이다. 이스르엘 계곡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물론 국가 안보의 면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비옥하고 충분한 습기로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평야였고, 넓은 평원내에 높낮이가 심하지를 않아 여행하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하였기에 고대 상인들이 동서 남북에서 와 집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제간선도로가 이지역을 통과하였고  이 계곡을 지배하는 자가 이 주변의 국가들의 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과 무역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방의 문제였다. 만약 이 지역을 상실한다면 사울 왕국의 북쪽 삼분의 일은 차단될 것이고 블레셋은 계속하여 이 계곡을 타고 남진하여 사울 왕의 다른 지역도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사울왕은 엔돌의 무당에게 묻는 등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한 불신앙과 반역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결국 그는 죽고 그 시체는 길보아 산에서 동쪽으로 약 10킬로 떨어진 벧산이라는 이스라엘 경내 블레셋 점령지 성벽에 못박혔던 것이다(삼상31:8-10). 이런 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끌 능력있는 왕을 원했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원하였다. 사울은 이 두 요구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8-89 참조).

tumblr_lrk8v8GykH1qcg3zwo1_r1_1280Pieter Bruegel the Elder, The Suicide of Saul, 1562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6

성경본문: 누가복음 6장 43-45

좋은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을 통해 주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고자 가르치는 우리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여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된 다음에야 그런 행동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을 비유하고, 열매는 행위 특히 우리의 언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무슨 종류냐의 여부는 그 맺는 열매로 알 수가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됨됨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나무나 찔레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을 비판하면 덕을 세워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여 일관되게 선한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여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좋은 모범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도 사랑하여 찔레와 가시나무 같은 비판을 삼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맺고 있는 삶의 열매를 주의하여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SBC매일큐티 8/8-12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 대가로 보수나 수익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보수나 수익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잘못되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와 수익은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며 일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

미국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어느 회계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고용하는 미국인 직원들은 근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전화 한 번 받거나 걸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업무만을 한 뒤 대신 오후 5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종이 울리면 글자를 쓰다가도 볼펜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일과 여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는 일을 여가를 위해 서둘러서 끝내 버려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이와 휴식은 지친 삶을 재충전해 주는 생활의 속도나 리듬의 변화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이러한 자세, 즉 여가의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태도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오랫동안 일해 온 대가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롭게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또 그것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퇴를 그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잠시 여유를 주는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은퇴는 총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벤 패터슨의 장인과 장모님은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의 양과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돈이 여유가 있어 일찍 일에서 은퇴하여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내와 함께 전 미국을 침대차를 끌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면 80대의 두 할머니는 간호사와 의사로서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로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값진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이 문제는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일의 본질이 원래 의도에서 타락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살도록 하셨지, 살기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은 살기 위해 즉, 생계를 잇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고용주 혹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되어 말합니다. 이를테면 낮은 봉급, 열악한 작업환경, 한심한 상관들 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대답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일의 본질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한계 내에서 만족

(빌립보서 4:11-14)

여러분 무엇을 위해 일하십니까? 돈을 위해 일하면 돈이 왔을 때 그만 삶의 목적도 잃어버리고 돈을 우선시하게 되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기도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다가 40억원 로또에 당첨된 경남 양산의 B씨(60)는 세금을 제외하고 27억 3천만원을 수령하였습니다.  B씨는 이미 이혼을 한 상태이고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로또를 수령한 지 며칠 지나 여동생등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여 어머니 A씨(79)를 비씨가 모시라고 성화였지만 이미 혼자된 몸으로 남자 혼자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우니 양로원으로 모시자고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간에 표면적으로는 노모 봉양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변에서는 B씨가 이혼한 뒤 A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돌봐주었는데도 아들이 당첨금을 제대로 나눠주지 않은 게 갈등의 원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봉양과 로또 등이 얽혀 심한 갈등을 빚자 B씨는 형제들ㅇ게 행방을 알리지 않은채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아파크 두 채를 사서 이사를 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A할머니는 딸 사위 5명과 함께 수소문 끝에 지난 5일 오전 10시 40분쯤 B씨의 아파트를 찾아내 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 당하였습니다. 화가 난 할머니와 사위는 열쇠수리공을 불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B씨 측이 112로 신고를 하여 경찰이 출동하였습니다.아들의 집안에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 A 할머니는 결국 5일 양산시청을 찾아가 공개적으로 아들을 패륜아라고 비난하는 피켓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할머니와 두 딸, 사위등은 지난 7일(2016년 8월 7일) 오후 2시쯤에도 아들 아파트를 다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들 측은 이번에도 소란을 피운다며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출동하여 할머니 등을 설득하여 겨우 해산시켰습니다. 이웃들은 이에 대해서 “결국은 당첨금 배분 문제 때문에 생긴 갈등 아니겠느냐” 추정했습니다. 또 다른 이웃은 “큰 돈이 생기지 않았으면 이런 극한적 갈등은 없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대조적으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 대학교 총장이었고 1990년대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1977년 총장으로 부임하여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중 벤치에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집에 가서 커피도 끓여 마시고 잔디로 깎아 주는 등 친구로 2년 동안 지냈습니다. 어느날 출근 길에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노인의 집을 방문하니 노인이 전 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하자 유족은 유서 한통을 주었으며 그 유서를 받고 레이니 총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노인은 코카콜라 회사의 회장인 우드러프씨였는데 자기에게 1.5억 달라를 유산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다가 갔다는 사실, 전혀 회장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은 사실, 자그마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거액을 희사한 사실에 또한 놀랐습니다. 그는 이 돈을 전부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1990년 총장을 마치자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하여 한국과 미국의 관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낮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높은 지위나 형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것을 주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숙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생축과 같이 십자가에서 버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우리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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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4

본문 : 누가복음 6: 39-4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에 관하여, 우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맹인으로서 오직 맹인들의 인도만을 받을 뿐이었고 그 결과는 구덩이에 빠졌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과 진화론적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는 자들을 주님은 제자라고 부르시는데 제자는 결코 선생보다 높지 못하지만 충분히 훈련을 받으면 선생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선생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가지 장치를 우리 삶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한편,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얼마만큼 도달하였는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섬김의 자세인지 아니면 우리를 높이려는 비판과 정죄의 자세인지 우리 스스로 살펴서 삼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를 닮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형제의 허물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