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12 – 16절           

오늘 주님은 산 위에 오르셔서 많은 사람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러 보내기도 하시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열두 명의 이름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인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주님의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 기도, 은사와 제자들이 필수적입니다. 이들은 부족하였습니다.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만 결국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온전해졌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모습이 되기위해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를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고 선대하셨습니다. 이런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선대하면서 친절하게 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을   있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온유하심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참된지혜

참된 지혜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5.16 – 20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그 이유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마5:13-16). 이 두 가지 비유는, 소금이 고기에 배어들고 빛이 어둠을 비추듯,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스며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상징은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처럼, 또 어둠을 물리치고 환하게 밝혀 주는 빛처럼,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의 사명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해야합니다. 소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왕국의 가치와 표준을 굳게 지킴으로써 사회의 악화를 막는 일에 일익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대상에는 우리의 직접적인 이웃이 포함됩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 가정 하나가, 그 지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 교회 하나가, 복음을 전파하며 그 지역 생활에 건설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지역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지역 사회에 복음을 증거하는 책임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각각의 교회가 ‘전도회’를 조직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활동을 교회가 주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나름대로 주도권을 가지고 여가 활동이나 봉사 활동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 정부 활동에 참여하거나, 학교 후원회의 임원이 되거나, 자원 봉사를 필요로 하는 수 많은 곳에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활동입니다.

 

환경 운동이 날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이 대중화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것은 지구가 부서지기 쉬운 귀중한 물건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돌보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이런한 의식개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세계 인류의 단일성과 일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편협한 지역주의와 인종주의를 근절하고 세계 시민의식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적인 관심사’에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선교’의 부르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마28:19)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자신의 보좌 우편이라는 최고 영예의 자리에 앉히심으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빌2:9-11). 이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시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신들로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선교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해 주신 세계 선교에 어떤 방법으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가 없는 사명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특정 선교 단체나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연락을 취하며, 정기적인 중보 기도등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선교의 문제를 떠나 우리는 ‘세계적인 관심사’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관심사’란 평화, 정의, 환경 등의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문제들은 너무나 산적해 있고 가지각색입니다만 최근의 좋은 예는 북한의 핵 개발의 문제로 인한 평화의 위협이나, 자주 일어나는 일본의 지진의 문제등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개인적이고 특정한 관심사에 따라서 한두 가지를 선택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관심 분야 단체에 가입하여 연구하고 또 거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아와 무주택,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지질학, 인간 생명의 신성함, 인종간의 조화, 인권등의 분야가 있습니다. 비록 세계적인 관심사는 거창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계 시민의 일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등안히 여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2

 

신약에 이르면 12제자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의 출신은 모두 미천한 가문들입니다. 그 중에 6명은 모두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뒤  2틀이내에 만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간절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열 두 사도로 택하신 이유는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왕이나 장수 그리고 부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영생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가운데 예수 믿어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선택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 사함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기에 이들은 복음의 사신이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열심히 노력한 자들이 먼저 거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같습니다. 그것은 해가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복을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게 됩니다.

 

그러므로 빌게이츠와 달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인생관은 180도 전환됩니다. 먼저 세상에서 우리의 낮음에 대하여 우리의 재산 구조 삶의 구조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여 낮을 지라도 두려워 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누구도 세상의 것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자도 가져가는 것이 없고 적게 가진 자도 가져가는 것이 없기에 삶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이는 비교의식에서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가 우리에게 있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준비하고 계십시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준비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야든지 1만시간은 들어야 전문가가 된다고 합니다. 1만시간은 매일 3시간씩 전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10년이 걸려 달성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준비를 갖추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그 나라를 위해 쓰임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SBCwebfeature신예현 – 하나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2013)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6 – 11절           

주님은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다가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그런 병은 안식일에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터무니 없는 성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안식일에도 천지를 유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의 주인” 이시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에 얽매실 수 없는 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인간의 경험과 상식의 측면에서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의 손을 기적으로 고쳐 보내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예배에 관한 의식적인 면이 실질적인 하나님의 의와 충돌할 경우 우리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립된 경험과 상식 안에서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를 세워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 5. 9- 13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나무를 나게 하시고 창조하신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들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2:8, 15). 하나님은 환경을 보호하고 그 속에 있는 자원을 개발할 책임을 인간 관리인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청지기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지주이시고 우리는 관리인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동역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우리는 경작합니다. 또한 그분은 심으시고 우리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신 것은 자연이라고 불리우고, 우리가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문화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문화는 자연없이는 생길 수 없으며, 자연도 문화가 없이는 그 가치가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천연 자원을 주시고 그것들을 유용한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노동이든, 정신적 노동이든, 혹은 둘 다이든 간에, 또 임금을 받는 일이든 아니면 자원 봉사든 간에 그리고 아무리 낮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노동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관리를 위임하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분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공업과 무역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또 공공 서비스와 전문 직종, 전임 가사 노동과 어머니의 육아 활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특권을 부인당하고 있는 현실은 실업의 커다란 해악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느냐 즉,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질과 재능, 교육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일(직업)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좌절되지 않고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개는 교회 사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일, 특히 성직자의 사역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역은 성직자와 교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 교회도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정식 교인은 자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활동 주로 교회 청소, 꽃꽃이, 좌석 안내, 주일 학교 봉사, 성가대 찬양, 청년 모임 인도와 교회의 각종 위원회 섬김등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가지 일들은 모든 교회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이지만 평신도의 교회 사역 비전이 흔히 여기서 멈춘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올바르겠습니까?

 

흔히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너무나 엄격하게 구별하고, 나아가 이차적으로 목회 사역(성직자의 분야)과 실제 사역(평신도가 할 수 있는 분야)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목회자의 주된 역할을 회중 설교를 포함한 가르치는 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사역들 역시 은사를 지니고 있으며 훈련을 받고 임명받은 평신도들과 공유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들이 장로 권사와 집사를 선출하여 성직자와 밀접하게 협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들은 때로 설교도 하고 각종 봉사 활동을 지도하며, 특히 중보 사역과 성만찬을 돕는 일 그리고 심방, 상담을 하며 침례와 교회등록을 원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결혼을 앞둔 커플들을 준비시키며 교회 생활의 다양한 분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식하고 합당하게 구성된 지도자 팀을 개발하여서 그들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발휘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 외에도 두 개의 특별한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역 교회와 지역의 이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어졌습니다(요17:18).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보내신 세상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표현 특히 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속 사회라고 부르는 곳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일부 지역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교회 건물이라는 보호막이나 서로 마음이 통하는 교제권 속에 안주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직장이 비기독교적인 환경이라면 우리는 이미 날마다 세상 속으로 이미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왜 세상 속으로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브아에 살고 있는 벤야민 지파 사울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선정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먼저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이었기에 (삼상9:21), 다른 지파의 질투심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비록 베야민 지파가 국가적인 일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여도 그 규모에 비추어 볼때 그렇게 큰 위험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의 고향 기브아(삼상11:4)는 이미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패륜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탄을 받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삿19-21). 

두번째로, 지정학적 측면에서 벤야민 지파의 위치는 이스라엘 지파의 중심에 있었으며 다른 지파들이 이 새로선정된 왕에게 접근하기가 용이하였다.더구나 사무엘은 40년동안 사사로서 벧엘, 길갈, 미스바, 그리고 라마를 중심으로 에브라임, 벤야민, 그리고 유다 지파를 순례하였으며, 언약궤와 성막 역시 근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세번째로, 더나아가 기브아(높은 언덕의 뜻으로 감람산 보다 조금 더 높음)는 모든 유대의 산세와 베냐민의 지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이며 북으로 세겜을 남으로 헤브론과 연결하는 능선도로의 중심에 있었다. 즉, 기브아는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북쪽과 남쪽으로 여행할 때나 동쪽이나 서쪽으로 여행하여 요단 강이나 지중해 해변 평야로 나아가고자 할 때 거쳐야할 도로들의 교차점에 있었다. 만약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통괄하고자 한다면 이 기브아야 말로 그렇게 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왕 즉, 사울이 이스라엘 내지로부터 블레셋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고향인 기브아는 그 좋은 출발지였던 것이다. 이 후 사울이 왕이 된 후 이 지역 근처인 게바, 믹마스, 벧아웬에서 곧장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삼상13-14). 사울은 전투의 중심지 기브아에서 살았던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2-83 참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하여 사용하시는 사람은 그 상황과 목적에 적합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같은 것이다. 다만 신자는 그렇게 탣하시고 사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고 불신자인 경우는 우연과 자신의 노력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최근의 좋은 예가 빌게이츠이다. 1980년초 Personal Computer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컴퓨터와 프로그밍에 1만시간을 쏟아 부어 전문가가 된 상태였다. 준비된 이 사람은 불어닥친 PC 시대에 MS-DOS를 공급하여 소프트웨어의 황제 자리에 올라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빌게이츠는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사용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분야에 1만시간 이상을 쏟아부어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대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대를 타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6장 1 – 5절           

오늘 본문에서 밀밭 사이를 걷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들의 행위가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자칫하면 제자들은 벌을 받을 수 있는 사정이고 주님의 사역은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허기가 졌을 때 제사장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진설한 떡을 받아 먹은 사건을 들어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셨습니다. 이는 의식법의 엄격한 준수는 필요하지만 예외적으로 깨드리는 것이 허용될 때가 있는데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자비가 필요할 때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하여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최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당신이 원하면 안식일에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람은 지식이 사랑에 의해 온전해 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알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5/2~5/4)

가정에서의 사역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의 최우선순위는 사람들의 영원한 영적인 행복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알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때 자신들의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자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항상 그분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웃의 물질적인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 사이의 상대적인 장점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전혀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증거와 섬김, 이 모두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결혼은 인간의 제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에 관하여 질문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엑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일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에는 하나님이 고독한 자를 가족과 함께 살게하신다(68:6)라고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며 풍성하고 서로 협력하는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자선은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는 경고의 말씀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상은 우리가 가정에서 삶을 시작하여 부모와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에 따라) 결혼하여 우리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우리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년이 된 자녀들이 사회에서 자기 관심사를 찾고 개발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지만 자기 집을 여관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부모도 자기 직업이나 교회, 지역 사회의 일원이나 여가 활동에 치우친 나머지, 자녀들이 자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자녀된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도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언을 통하여 균형잡힌 가정과 사회 생활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사역

직장이란 우리가 섬김, 즉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발휘해야 할 두 번째 영역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직장을 오직 복음 전도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장을 동료나 직원들에게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의 장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직장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들의 복음 증거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노동의 질에 의해서 보여진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은 복음 전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한 형태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기독교적인 노동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발점이 되는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사색적이고, 창조적이며, 부지런하고, 신중한 일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고 일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감독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 그들 역시 창조적인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일하는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노동에 영광과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생활비를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에는 좀더 고상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의 직분을 주시고 이 직분이 노동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오용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항을 성경은 명하시고 다른 모든 사항들은 상식 가운데 위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 위해 삶을 해석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경을 읽되 성경이 말씀하시는 뜻과 취지를 넘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다가 그리스도의 뜻을 잘못 알게 되면 상식만 가지고 사는 일반사람들보다도 못한 삶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재물의 획득과 관련된 사고입니다. 성경에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적당한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의 약속을 그리스도 중심이나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창출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소용되는 약속으로 이용할 경우 성경을 오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특히 성경에서 레에마를 듣겠다는 사람에게 많이 발생합니다.

 

김미진 씨가 지은 왕의 재정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내게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 성경 말씀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흐르거나 가슴이 뭉쿨해지거나 뭔가 깨달음이 오는 것은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둘째, 목사님의 설교 또는 강의를 듣다가 감동, 깨달음, 눈물, 도전, 소망이 충만해짐, 기쁨이 넘침,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레마로 내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누구나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낼 수가 있다.(77)라고 하면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례를 많이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큰 문제가 상식적인 인간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자는 빚지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빚을 지지않고 사는 삶을 실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아들의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옆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병원에 가야하는 응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급한 응급상황인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자는 이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너는 더 이상 빚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부러진 손가락 마디를 고정한 뒤 통증 때문에 우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 밤새도록 고통가운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틑날 믿음으로 아들의 손에 흰 양말을 씌워 학교로 보내자 학교에 가는 도중에 선흘교회 사모님을 만나 병원에 가게 되었고 아들이 손가락이 다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여호와 이레인양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왕의 재정 282-284). 여러분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상식은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빚지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식적인 행동을 이상한 음성을 들으므로 하지 못하고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 아들의 심각한 외상을 치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믿음의 상태입니다. 

 

정당한 노력과 그에 따른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없이 기도하여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거나, 성경을 읽고 무슨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든지, 그런 일반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재물을 벌고자 하는 것은 마법적인 신앙과 욕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능력의 범위를 넘거나 노력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공식을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듯이 살면 자신의 노력없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고 복이 떨어진다는 믿음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요행으로 돈은 벌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뜻인지를 분별해 낼 수가 없어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관련하여 성경은 상식적인 원리이외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재물 버는 법을 가르쳐 준 구절이 없습니다. 더구나 21세기의 지식기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을 버는지는 경영학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을 도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도처에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잃는 법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재물을 버는 것에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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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James O’Br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