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선 III

수직선 III – 에발산과 그리심산  (신명기 11:29)

여리고의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산지로 들어갈 관문을 얻게 하여주었다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서 아이성에 대한 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가나안 정복의 길을 택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명령한 대로 모세의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고 백성들 앞에서 크게 낭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수8:30-35;신11:29).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복 후 백성들을 이끌고 산능선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약 36킬로미터 떨어진 세겜이라는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이 도시는 오른쪽으로 에발산(약1,000미터) 왼쪽으로 그리심산 (약 850미터) 을 두고 그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세는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에발산에 세우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신27:1-28). 이 모든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간 것이었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수8:30-35).

여기서 우리는 세겜을 선택하여 이런 행사를 치루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먼저, 세겜은 이런 행사를 치루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좌편에 그리심산 우편에 에발산을 가지고 그 계곡 사이에 있어 이런 지형들은 자연적인 원형극장을 형성하였고 세겜 지역은 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관람객이자 배우로서 수용하여 이 하나님의 계명을 외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다 이 행사에 참여를 하여 보고, 듣고,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지: http://m.blog.daum.net/avmania/848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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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그러나 이 지역은 이런 지형적인 중요성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왜냐하면 이 세겜지역은 약700년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여행하여 가나안을 들어올 때 여호와께서 최초로 나타나셔서 이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줄 것을 확정하신 바로 그 장소였던 것입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여기에 제단을 쌓았고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였던 것입니다(창12:6-7). 이후 약180년 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세겜에서 땅을 구입하였고, 우물을 파고 거기에 다른 기념제단을 쌓았으며(창33:18-20). 또한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등을 파묻은 장소였습니다(창35:1-4). 

셋째, 하나님과 그 약속의 신실하심과 그 뜻을 상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세겜이라는 유서깊은 도시에서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성취를 상기시킴으로 가나안 정복을 막 시작한 지금 앞으로 있을 전 가나안 민족들과의 험난한 전쟁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그 약속대로 애굽에서 400년만에 올라오게 하시고 드디어 가나안 땅을 주어 그 기업으로 삼게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 때문에 이루어진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한 번 되새겼던 장소입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0-61 참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씨는 단수명사이며 그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만민 중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 같이 행하여 세월을 복음의 관점에서 다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요. 교회 생활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가지고 서로 화답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여야만 합니다.

Shechem1 오늘날의 세겜: http://stephencfchan.blogspot.com/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그리스도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누가복음  1장 57 – 66절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벳은 아들 요한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출산과정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을 거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때때로 기적을 행사하십니다. 이를 위해 사가랴는 10달 동안 듣지도 말도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기적을 행사하신 것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당신께서 세상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알고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기적의 방법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심을 알아야 합니다.

SBC 카톡 말씀 나눔

2015/11/2 그리스도인의 교제
교회의 4가지 표징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을 좀더 살펴보면, 성령님께서 교회를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하도록 하셨고, 나아가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이며 동시에 거룩합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교회가 때때로 마땅히 고백해야 할 신앙과 추구해야 할 사명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교회는 모든 신자와 모든 진리를 포용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긍정하고 사명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사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라는 확신을 교회의 분열과 불순함, 분파주의와 무기력함을 묵인하는 구실로 삼아 그 가운데 안주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상적인 교회의 비전을 통해 영감을 받아 현실을 좀더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추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성도들 사이에 서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2015/11/3 그리스도인의 섬김
성령님께서는 연합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 혹은 부흥에도 관계 하십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의 개개인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바울은 교회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하나이지만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수많은 지체(팔다리와 많은 내부 장기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들은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성령님 자신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과 성령의 선물들(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사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동일한 선물인 성령님은 모두에게 주어지며, 교회의 연합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각기 다른 은사는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며, 교회에 다양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015/11/4 그리스도인의 섬김
성령님의 은사 (카리스마타 charismata) 를 둘러싸고 보통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첫째, 은사란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에 보면 은사를 언급하는 목록은 모두 네가지입니다 : 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4-11, 27-31; 에베소서 4:7-13; 베드로전서4:10-11. 그 목록을 모두 합해 보면 약 21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목록은 모두 제각각이라서, 은사를 낱낱이 열거하였다기 보다는 선별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은사가 있을 것입니다. 일부 은사는 초자연적인(ex:기적들 고전12:10, 28) 반면, 그 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거나 지극히 평범한 것들도 있습니다(ex: 다스리는 은사나 구제하는 은사, 긍휼울 베푸는 은사). 많은 은사가 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키는데, 이런 능력들은 오늘날 더욱 강화되고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2015/11/5  그리스도인의 섬김
둘째 은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은사는 섬김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네가지 목록(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4-11, 27-31; 에베소서 4:7-13; 베드로전서 4:10-11)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실은, 은사는 공익(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으며, 은사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의 유익과는 동떨어진 개개인의 사적인 목적이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11/6  그리스도인의 섬김
은사 중에서 좀더 중요한 은사는 어느 것일까요? 은사가 교회를 위해 주어진 만큼 그 목적에 맞게 은사의 등급을 정해만 합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으로 볼 때, 존 스타트 목사님은 가르치는 은사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장시키는 요소 중에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에서 미국에서 성장하는 교회를 분석해 보니 가르침이 있는 교회가 가장 잘 성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사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은사를 평가 절하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멸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도 안됩니다(고전12:14-26). 우리가 다른 어떤 은사보다 가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고전13장)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다른 은사보다 화려한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수직선 II

산상수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이는 비결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들은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사해 밑을 거쳐 에돔 족속의 땅을 지나 왕의 대로를 타고 요단강 동쪽으로 진격할려고 계획하였으나 에돔의 반대에 부딪쳐 아라바 길로 하여 세일산지를 우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 300킬로미터를 우회하여 에돔의 우편 경계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에돔땅을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않을 것이니 돈을 내서 양식과 물을 사서 먹고 마시고 에돔을 두렵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돔땅을 이미 에서자손에게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 의하면 에서 자손은  이전에 세일에 거주하던 원주민 호리 족속을 멸하고 대신 차지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계속 북진을 하여 모압경계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명령하시기를 모압을 괴롭히지 말고 그와 싸우지도 말아라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모압 역시 이전에 거주하던 원주민 에밈 사람을 멸하고 거기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다고 합니다. 이어 계속 북진을 하니 모압 변경부터 시작되는 암몬 족속의 땅의 경계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의 땅 역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니 다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암몬 족속의 땅의 원주민은 르바임의 땅이라고 하였고 르바임 족속이 거주하였고(암몬 족속은 이들을 삼숨밈라 일컬었음) 이들은 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그들을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신2장).

이스라엘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수어야만 하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서에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신자이거나 비신자이거나 동일하게 일생에서는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장애물들이 있으며 때로는 인생을 걸고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경우도 당한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를 당할 때 나만 당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미 길을 내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가 불신자와 달리 가지는 특권입니다. 이를 위한 좋은 모범은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은 자신에게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낙 자손 중 가장 큰 사람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고 세새, 아히만, 달매라는 아낙의 3 아들을 죽였습니다(수14:6-15; 삿1:10, 20).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이 모두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주할 땅들을 기업으로 받았으나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의 뜻이 담긴 율법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굳은 맹약을 맺고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키는 것은 모세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침례 요한의 때까지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세 율법을 완성하시자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작동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을 통한 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를 않는 구속사적인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니 아직도 모세 율법에 매달려 있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힘써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헛된 것이며 마술적 신앙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복음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가장 높은 차원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산상 수훈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Exodus – Mel Brigg

 

마리아의 찬양과 그리스도

2015.11.01 | 마리아의 찬양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1장 46-56절)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도록 선택하신 은혜를 감사하여 찬양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은혜를 감사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우리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을 집행하실 분이셨습니다. 그는 권세있는 가르침과 수 많은 표적을 통하여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부자와 권세있는 자들을 낮추셨지만 결국 불의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은지 3흘만에 부활하시고 이어 승천하사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 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의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의 순종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SBC 카톡 말씀 나눔

10/25/15 그리스도인의 이해
성령님께서 성경의 원 저자시라면, 그분은 또한 성경의 원 해석자이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자기 백성이 점진적으로 성경의 의미를 깨닫고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왜곡된 해석과 문화적인 제약을 벗어나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던 ‘사적 판단의 권리’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령께 말씀을 조명해 달라고 겸손히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 이해는 의미 없는 일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존스타트 목사님은 이러한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매일 성경을 읽도록 교육 받으며 자라 왔는데 그 일은 목사님에게는 따분하고 지루한 의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마음 문을 열어 드린 후 성경은 단번에 새로운 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에게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존 스타트 목사님 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Continue reading “SBC 카톡 말씀 나눔”

수직선 I

수직선: 무너진 여리고 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히브리서 11:30)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에 위치한 최초의 군사 목표물로서 쳐서 넘어가야만 하는 지정학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여리고는 사해에서 북서쪽으로 약 12킬로미터, 해저 250미터에 위치해 있고 (사해는 해저 418미터)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한 겨울에도 이곳으로 오면 따뜻하였습니다. 더우기 풍부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어 건조한 광야와 사해 지역에 매우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이스라엘의 군사 목표물로 삼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리적 군사적으로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는 중요한 나들목이고 가나안 중앙 산지 국가들에게 올라가는 입구입니다. 이 지정학적 위치는 여리고를 지배하는 자에게 부와 군사적 힘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문에 이 도시는 세워졌고 높게 성벽이 둘러졌고 또 세워진 바로 그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면 가나안 중앙 산지 국가들을 정복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우회하여 정복하러 간다고 하더라도 배후의 근심거리를 남겨두는 것이고 요단 동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락 및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점령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세워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여호수아는 다시 세우지 말것을 저주로 명령하였습니다(수6:26). 그것은 여호수아의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기적적인 탈출을 경험하고,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며, 시내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의 40년간을 먹이신 그 하나님, 가까이는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고 그 높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군사력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너진 여리고 성을 중수하여 성벽을 신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배후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전략이 그때 더 중요함을 알았던 것입니다.사실 성벽을 세우냐 세우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립적인 문제로서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마음 상태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8-59 참조).

그러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잘못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푸는데 적용한 사례가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어떤 분이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데 하두 팔리지를 않아 고민 중 여리고 성에 대한 기사를 성경에서 읽고 자신도 그렇게 해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파트가 팔리는 것을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과 동일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자신의 아파트 단지를 돌고 제 칠일 째는 7번 돌고는 이스라엘이 하던 대로 자신의 아파트에 대하여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니 자신의 아파트를 사려고 사람이 와서 2년간 팔리지 않던 아파트를 매각했다는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성경의 사건을 해석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마법적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시는 메시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며 마술적인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리고가 무너진 것과 아파트가 팔리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니 아파트가 무너지도록 하였다면 무너졌다는 단어에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파트를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겠지요!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가니까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여리고 성에 대한 사건 뿐만 아니라 다른 성서의 사건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중심으로 성경 말씀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태도는 종종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jericho Jericho, from Calvary Southampton

 

엘리사벳의 믿음과 그리스도

Albertinelli_Visitation엘리사벳의 믿음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1장 39-45절)

오늘 본문에서 침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은 자신을 방문한 마리아의 소리를 듣자 잉태한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어놀고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았으며 곧 마리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 복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축복하고 마리아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과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축복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의 성취에 그 근본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중에 우리는 엘리사벳과 마리아 처럼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성취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함을 영광스러워 하여야 합니다.

Mariotto Albertinelli – Elizabeth and Mary (1503)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계7:9-12

찬송가 가사에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곡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글인데 왜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이런 가사를 썼을까요? 이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시내산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려고 바란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12명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40일동안 탐지한 후 와서 10명이 가나안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다느니 우리는 도저히 들어가서 얻을 수 없다니 하는 악평을 하는 통에 이스라엘은 울부짖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그 후의 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을 우회하여 사해 동쪽을 지나 이제 요단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진격하려니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요단강이었습니다. 이 요단강을 넘으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간다는 의미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부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이 요단강은 봄철 추수때에는 항상 강뚝을 넘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한 강이었고 물살이 급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요단강에 막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 따르면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셔서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서면 창일하던 요단의 물이 멈춰서리라 그러면 그때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고 백성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수3:15-17).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첫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멀리 우회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였을까요?

최소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비록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감으로 약속의 땅 밖에서 체류하게 되었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내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습니다 (창46:3-4).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출애굽한 불순종의 세대가 전부 죽자 비로서 그 때가 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 앞에 다시 요단강이라는 물의 장벽이 나타났습니다. 또 한번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흐르던 강물은 저 멀리에서 무더기로 쌓이고 진흙투성이던 물 밑바닥은 금새 말라붙어서 홍해를 건너듯이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두 개의 건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점을 늘 상 기억하도록 가견적 체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수4:23). 이 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홍해로부터 시작되어 40년을 보냈던 것처럼,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양자 모두 유월절을 전후한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유월절 후 얼마 안되어 발생된 사건이고,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보냈던 것입니다(출12:3; 수5:10). 또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과 연결되어 일어났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당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출발을 하게 하심으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려는 의도이신 것입니다(수4:24). 셋째,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모두에게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단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물 속을 걷는 방법이고 물이 범람할 시기에는 이 지역의 물 깊이는 3미터 60센티미터에 달하고 빠르고 격렬한 격류가 동반되므로 이는 어린아이들 까지 생각하면 이루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발들이 다시 땅을 밟자 끊어졌던 요단의 격류는 다시 흘러서 여전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수4:18).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런 난관을 돌파한 사실 그 자체는 엄청난 메시지를 피아에게 모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수4:23-24). 한편, 홍해를 건넌 사실은 주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좋은 증거였지만 이는 가나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세대 역시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요단강 바닥에 있는 돌 12개를 날라 길갈에 유적지를 건축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항상 기억나게 하는 역사적 체험학습장을 만든 것입니다(수4:20-24).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6-57 참조)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불평스럽고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있어도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여러분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 사건 역시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식 발음이고 이를 그리스어로 읽으면 예수가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끌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는 신약의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천국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갈 수 없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죄의 담이며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산출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의롭고 선하지만 율법의 수명자인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욕망 중심으로 살려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의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과 사망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서 33년간 사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셔서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요단강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율법의 문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망의 문제도 그의 부활로 이기셨고 때가 오면 우리 모두를 부활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은 그 피로 세우는 새언약을 하나님과 체결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우리 성도들을 이끌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사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셨던 것입니다.

구원하심은 항상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Salvation_Mountain 사진: Salvation Mountain, Niland CA  (http://proof.nationalgeographic.com)

마리아와 그리스도

마리아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1장 26 – 38절)

오늘 본문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수태할 것을 고지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셔서 자신을 비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이 되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자 십자가로 가서 죽으사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다윗의 왕위에 앉게 하시고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순종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의 순종을 배워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