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전주의 문화를 흔히 ‘온’ 문화라고 부릅니다. 전주의 본래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完)이나 ‘전주’의 ‘전’(全)은 모두 ‘온전’ 혹은 ‘모든’의 뜻입니다. 전라도 땅은 북쪽에서 내려온 북방족과 남방에서 올라온 남방족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으며,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 곳입니다. 그만큼 개방적이고 넉넉해서,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지혜를 터득했습니다. 남북전쟁 때 갈라진 미국 교회들은 비록 남북으로 나뉘어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였지만 피선교지인 한국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북장로회 개척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1891년 가을 미국에 휴가차 들어갔다가 매코믹신학교와 내슈빌에서 개최된 신학대학 연합선교대회에서 연설할 때 마침 밴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최초 남감리교인인 윤치호도 참석해서 한국 선교에 대해 강연하였습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남장로회 소속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에 자원하였고, 언더우드 가족이 내놓은 선교비를 바탕으로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를 결정하였습니다. 1892년 10-11월 7인의 선발대가 서울에 도착 남장로회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주님은 직접 실천하셨고, 죄인들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직접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사 구속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들이 하나이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진리가 복음의 내용이요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전도서 6:4,5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본문의 ‘그보다’는 부유하나 안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의 비극은 ‘낙태된 자’와 비교됩니다. 낙태된 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기억조차 남지 않아서 심판과 고통의 상징입니다(시편58:8; 욥3:16). 그러나 본문은 이들이 오히려 부유하나 만족과 쉼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선언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삶의 만족과 이에 따른 쉼’의 존재 여부입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부와 많은 자녀’라는 소위 인생의 자기성취는 ‘쉼’이란 중요한 축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부유하나 열심히 일하였고, 쾌락과 자아성취까지 누렸지만, 삶은 만족도 쉼도 없었고 허무만이 가득했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수고해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하나님이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시고 축복하셨으나(창2:3), 아담의 타락 후 땅은 저주를 받았고 인간은 일과 수고로부터 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라멕은 쉼을 기대하고 아들의 이름을 노아(=안식)라고 지었습니다(창5:28,29). 그러나 노아는 쉼은커녕 홍수의 심판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경건과 자족이라는 축복의 선물을 갖게 되니, 우리 모두 예수께 가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 6:6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인생이 원하는 장수의 축복의 언급은 본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인류 초기 조상들은 천 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제일 오래 산 분은 므두셀라(969세)입니다. 그는 에녹의 아들이며 라멕의 아버지이고 노아의 할아버지로서, 홍수가 일어나던 해 죽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다고 탄식하며 수고로운 삶을 자기 아들이 ‘안식’시켰으면 한다는 뜻으로 ‘노아’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595년 동안 자녀들을 낳고 살다가 홍수 5년 전 77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홍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솔로몬은 수고롭게 살아간 이들의 삶도 허무하며, 이들보다 갑절을 더 살더라도 ‘행복’ 즉, 즐거움과 만족이 없다면 의미없다고 단언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죠! 장수하나 행복을 누리지 못한 자나, 낙태되어 햇빛조차 보지 못한 자나, 많은 후손을 남겼으나 만족이 없었던 자나, 죽었으나 매장되지 못한 불행한 자들 모두 하나로 귀결됩니다: ‘사망.’ 그러나 창세기에는 한 명의 예외가 있습니다. 에녹입니다. 에녹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시게 하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으며(창5:24; 히11:5), 우리 주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에녹이 증거하며, 회리바람 중 승천한 엘리야가 또 증거합니다. 수고롭더라도 그 마음에 낙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으로 전도자는 부러워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그 정답입니다(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타브가(헵타페곤)
마가복음 1: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밤새 수고하였으나 수확이 없어 뱃일을 정리하던 중 예수께서 오사 배에 오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순종하자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았고 놀란 그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내렸던 장소는 현재 타브가로 불리워지는 마을로 추정됩니다. 주후 1세기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타브가는 가버나움에서 멀지 않은 갈릴리 해안가에 위치하였고, ‘가버나움의 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인 쉐바(7개의 샘), 헬라어로는 헵타페콘(7개의 장소)으로 불렸습니다. 타브가는 아랍어로 헬라어 헵타페콘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해안가에 7개의 따뜻한 물이 솟는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물이 있는 곳에는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따라서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물을 던지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수천 년 동안 갈릴리 호수에서 가장 많은 물고기를 수확할 수 있었던 이 장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역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간 이 어부들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또 헛되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서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손수 아침을 준비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 다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타브가는 갈릴리에서 가장 물고기가 잘 잡히는 장소이고, 복음을 잘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일터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하나님의 말씀과 룻의 거듭남
룻기 1:16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본절은 룻의 신앙고백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야기를 가슴속에 담았습니다. 그녀는 시모 나오미로부터 전해받은 이스라엘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애굽을 재앙으로 치고 홍해를 갈라 2백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올 수 있을까? 어느 신이 넘쳐 흐르는 요단 강을 가르며 그 견고한 성 여리고조차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이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생겨나며, 이것이 거듭남입니다(벧전1:23). 거듭나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감사가 넘칩니다. 성령님의 역사이죠! 이 당시는 여리고 성이 무너진지 60년 정도 지났을 때로,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산 증인인 부모님에게 이 사건을 직접 들어 간직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넜고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아스는 정탐꾼 살몬과 여리고 기생 라합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룻은 마음에 담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이 본절의 고백입니다. 그녀에게는 자식을 얻을 기대도, 물질의 풍요도, 친척들의 만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가난이 기다리는 곳, 낯선 유대 민족,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경멸하는 그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과 시어머니를 섬기고자 한 자기 부인의 결단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