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서(이덕주)- 전라북도편
요나3:4절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온’ 문화의 산실인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 정치와 문화의 중심였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선교 주체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는(1892. 10월), 매코믹 출신인 테이트(최의덕), 그의 여동생 데이트(최구덕), 유니온신학교출신 레이놀즈(이병서) 부부, 전킨(전형겸) 부부와 데이비입니다. 1893년 1월 선교 협력기구인 선교회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서 남장로회는 충청남도와 전라도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외국인들이 지방 여행을 맘 놓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의 ‘외세 배척’ 움직임도 점차 고양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먼저 믿을 수 있는 한국인 전도자를 전주에 보내 집을 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적임자가 레이놀즈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서울 출신 교인 정해원이었습니다. 정해원은 1893년 6월 전주 은송리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당시 은송리 사람들은 나무를 해다 팔거나 전주천에서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성 밖, 개울 건너’ 마을에 집을 구한 정해원은 가족을 데리고 내려와서 이웃의 의심을 불식시켰고 기대 이상으로 선교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주의 선교 문을 연 사람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아니라, 정해원이라는 한국인 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원의 작은 순종이 전주 선교의 문을 열었듯,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시작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전도서 6:7절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본절부터 9절까지는 행복의 또 하나의 요소인 자족을 다룹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수고’는 필연입니다. ‘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말’이며, ‘진저리나는 노력’, ‘고역’을 뜻합니다. ‘다(=모든)’란 낱말과 함께 볼 때, ‘수고’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모든 일상의 노동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수고할까요? 솔로몬은 ‘자기 입’을 위함이라 밝힙니다. ‘입을 위함’이란 배를 채우고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생존과 쾌락 때문입니다. 한편, 후단은 식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나, 그의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식욕’이란 ‘살아 있는 존재’ ‘생명’ ‘영혼’ ‘욕구, 갈망’ 등을 모두 포괄하는 ‘네페쉬’의 번역입니다. 전도자는 지·정·의 등과 같은 총체적 인간 중 특히 욕구적인 측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욕은 ‘네페쉬’로서의 인간이 가진 많은 욕망 중 대표적인 것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나, 식욕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다시는 식욕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만족시키면 또 다시 만족 시켜야 합니다. 식욕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생기므로 살아 있는 동안 식욕의 만족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식욕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욕망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자족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이 보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비로소 주어집니다. 자족은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새번역).
전도서 6:8절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7-9절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수고해도 그 욕망을 채우거나 마음이 만족을 얻지 못함을 밝힙니다. 8절은 이 중간에서 ‘지혜와 부의 관계’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지혜는 부를 창출한다고 생각하나 전도자는 이 통념을 뒤흔듭니다. 만약 부가 진정한 유익이 아니라면, 지혜 자체의 효용도 의심받게 됩니다. 전단은 지혜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점을 묻습니다. 지혜를 가졌더라도 반드시 재물을 얻는 것은 아니나(전9:11), 재물이 많더라도 더 갖고자 하는 욕망은 물론, 기타 다른 욕망들도 충족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우매를 비교한 2:12-17절의 결론도 이와 같습니다. 후단의 ‘행할 줄 아는’이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아는’의 뜻으로 처세에 대한 은유입니다. 처세술을 통해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얻은 부 역시 자신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세상 지혜의 한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만족을 얻으려 하는가?” “지혜도, 부도, 성공도 마음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면, 참된 만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교제의 삶이 그 본질이며 영원합니다(요17:3). 어렵고 수고로워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생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절).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타브가(2)
요한복음 2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3번 째 나타나신 대목이며, 그 장소는 타브가로 추정됩니다. 타브가는 물고기가 많고 가버나움 바로 밑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여부를 세 번이나 묻고 베드로로부터 세 번 같은 대답을 받자 ‘나를 따르라’고 이르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고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세우라는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순교하였고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타브가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마지막 대화를 기념하는 베드로수위권교회가 있습니다. 1933년 건축된 교회 내부에는 주후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석도 남아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해수면이 내려가면, 교회 밖 호수 바닥에서 12제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하트 모양의 기둥 받침이 드러납니다. 또한 교회 내부에는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했다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와 해안가에 접해 있는 기초석이 연결되어 있으며, 계단을 비롯한 고대 항구의 모습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이야기가 생산한 역사의 흔적들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역사의 이야기는 일시적이나, 복음의 이야기는 영원한데 주 예수께서 부활하사 살아 있는 소망을 교회에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한 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었고, 죽기까지 부르심에 충성한 한 제자를 통해 교회는 세워져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복음은 한반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후 우주(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룻과 섭리적 돌보심
룻기 2: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지되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여 살아가라”는 월남전 영웅 스톡테일대령의 조언입니다. 그의 말은 신념에 찼으나 우리 영혼의 닻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룻기가 주는 메시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모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양식이 없어 보리 이삭이라도 주워야 하였습니다. 룻에게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고된 노동이 예상되었으나, 시모와 자신을 위해 결단하고 이삭을 주우러 갑니다. 하나님은 그 룻에게 보리, 보아스를 보내시는데, 방법은 우연입니다. 룻은 이삭을 따라 가다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고 그때 우연히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 도착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고 환대합니다. 그 결과 룻은 한 에바(20L)나 되는 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오미에게 보아스의 이름을 들려줍니다. 나오미는 모세율법이 규정한 ‘친족구속자’ 제도를 떠올리면서 룻과 보아스와의 결혼을 성사시킵니다. 오벳이 태어났고, 엘리멜렉의 가계는 되살아 납니다.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도 같아서,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속의 이야기를 만들고 계십니다. 실패와 성공, 눈물과 두려움, 탄식과 가난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 등이 있겠지만, 주님은 이들을 낱줄과 씨줄로 사용하셔서 선이란 아름다운 옷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 과정은 인간에게는 우연이나, 주님에게는 완전한 계획일 뿐입니다.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