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2/22-26)


다윗의 동네로
누가복음 2:4,5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본절은 예수 탄생 직전의 역사적 상황입니다. 주전 4-5년 경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에 인구조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통치에 순응하는 유대의 경건한 서민들이어서, 요셉은 성령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를 잉태한 아내와 함께 조상의 가문인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가족상황을 등록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구조사라는 평범한 사건과 당신을 경외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구약의 성취와 인류구원의 길을 열고 계신 것입니다. 주전 750년 즈음 선지자 미가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미5:2).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지만, 벌써 1000년 전의 일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시대에는 그냥 평범한 소촌이었습니다. 바로 이 작은 촌락에 메시야 예수께서 태어나셔서 예언은 성취되고,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이들의 사명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평범한 삶을 통해 예수님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땀을 흘리며 집을 짓고 수리하는 등 목수의 일에, 마리아는 밥짓고 빨래하며 자녀들을 낳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평범하나 말씀을 간직한 경건한 삶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요셉은 믿음 가운데 죽었으나, 마리아는 30여 년을 믿음을 간직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
누가복음 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께서 태어날 때 ‘강보’는 아기를 싸는 천(포대기)을 말합니다. 따라서, ‘강보로 싸다’란 포대기나 천으로 아기를 단단히 감싸는 행위이며, 아기에게 안정감을 주고 팔과 다리를 곧게 펴도록 한 그 당시의 관례입니다. ‘구유’는 짐승들의 먹이통을 말하는데, 태어난 아기를 빈 구유에 눕힌 것은 적절한 해산 장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관’은 대상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허름하나 유일한 베들레헴 공공 숙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평범하나 경건한 가정에 태어나셨음은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행복은 재산, 지위, 명예 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 모두와 같이 빈 손으로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죠! 가정을 부양하려면 땀을 흘려 열심히 노력하는 길만 남아 있습니다. 공생애 직전까지 예수께서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고(부모 공경 등), 심판자의 자격을 취득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당신의 삶을 잣대로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요5:27-30).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을 경건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운 모습’은  천사들이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할 때 준 표적으로 활용됩니다(2:12). 하나님은 빈 구유와 같은 소박한 것들조차 사용해 뜻을 이루시니, 우리도 주어진 은사들을 통해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메시야의 탄생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평범한 젊은 남녀(요셉은 약 20살, 마리아는 약 17세)가 낳아 구유에 눕혀진 첫아들을 보고 하늘에서는 소동이 났습니다. 가장 연약한 아기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요, 만유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한 천사가 밤 중에 목자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 아기는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복음서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그 천사는 그 아기의 정체성을 3가지로 표현합니다: 구주, 그리스도, 주님. 구주란 이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한 호칭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세상을 구출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출은 죄와 사망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속죄권과 영생을 확보하셨습니다. ②그리스도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약속하신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먼저 깨달았습니다(눅9:20) ③주님은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칭호로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사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대권을 갖고 계십니다. 한편, 천사의 말은 예언 둘을 성취합니다. 하나는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에 관한 것이고(미가5:2), 둘은, 태어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다윗의 왕좌에 군림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실 분(사9:6,7)이란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곳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 뜻 행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들 모두가 메시야 예수를 통해 죄 사함 받은 감사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재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룻과 오르바의 갈림길
룻기1:14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모압에서 10년을 지내면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 기룐을 모두 잃고 자식도 없는 노년의 가난한 과부가 되었습니다. 토머스 풀러의 말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다.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그것도 먼 타국에서 객이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그녀의 처지는 비참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영웅 제임스 본드는 돌아갈 조국과 가족이 있었지만, 나오미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베들레헴에 양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모압을 떠날 결심하나, 두 며느리는 소망 없는 자신을 뒤 따르고자 하였기에 이들을 모압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그 결과 오르바는 모압과 그 신 그모스로 돌아갔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하나님께 가기로 결단합니다. 중요한 대목은 ‘룻의 구원’입니다. 두 사람은 나오미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구원사를 들었고 믿음의 가정에 들어왔지만, 선택의 순간에 서로 다른 길을 걷습니다. 오르바는 삶의 풍요와 이방의 도덕, 그리고 자신의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부르심은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룻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난하고 늙은 시어머니를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결단은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습이며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 것을 보여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매일묵상(2025/12/15-1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나병촌의 성경학교
시편 119:97절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 따르면, 독서 등 인지활동은 23%, 걷기 등 신체활동은 17%, 종교활동을 포함한 사회활동은 7% 정도 치매 위험성을 감소시킨다고 합니다. 1999년 당시 아흔 여섯 살 노인 오기수 권사는 히브리서 11장을 정확한 발음으로 모두 외웠는데, 치매란 성경암송자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 암송’은 이미 일제시대 때부터 유명했습니다.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뉴랜드 선교사의 증언입니다. “애양원 식구들이 모여 사경회의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그 순서는 성경 암송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들에게 성경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외웠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다. 그는 과거 흉악한 거지대장이었으나 애양원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한 교인이 되었다. 그는 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 보라고 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손으로 짚어가며 확인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다.”(한국선교지, 1939, 113쪽). 하나님의 뜻은 고귀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심중에 간직한 뒤 인내로 열매가 맺어집니다(마13:23;눅8:15). 이때 성경암송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유용한 방법입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편119:92)._

전도서 5: 20절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

5:10–17절은 재물의 헛됨과 재물로 인한 근심을, 18–19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수고와 몫을 즐길 것을 각 강조합니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쁨으로 채우사 인생의 허무를 무시할 수 있게 만드신다고 하나, 이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자신의 ‘몫’에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됩니다. 지금 전도자는 약간 질투의 감을 표출하는데, 자신의 교훈을 받아 실천하는 자들과 달리, 본인은 그 부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롱맨). 즉, 전도자는 재물을 갖고도 고뇌하나, 그들은 기쁨이란 마취제를 통해 삶의 혹독한 현실을 잠시 잊고 있습니다. 따라서 폭스는 “즐거움은 고통을 완화하는 진통제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는 신약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의 고난 속에 하나님과의 교제, 영원한 소망, 그리고 고난의 유익을 생각하며 즐거워 하라고 권면합니다(롬5:3-11). 나찌 치하의 에티의 일기입니다. “캠프의 한 구석에서 당신의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볼 때,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밤에 침대에 누워 당신 안에 쉴 때도, 오 하나님,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것이 제 기도입니다.” (1943.8.18). 3달 후 에티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습니다. 고통 중에 기뻐하는 능력은 전도자의 고민의 해결책입니다. 전도자의 신앙 여정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고 그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전도서 6: 1절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5:10-17절은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문제점을, 18-20절은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현재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살라는 교훈을, 6:1-12절은 재물과 성공, 장수, 많은 자녀를 가졌어도 이를 향유하려면 누릴 능력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부를 축적했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주제로 되돌아가서 또 고민합니다. 전도자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풍족한 재물을 가졌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그 누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입니다. 이는 단순한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며, 인간 사회에 무겁게 드리워진 현실입니다(롱맨). 전도자는 이 상황을 “악”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불운이나 우연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무게를 가진 현실로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과 성공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지만, 소원을 이루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참된 행복이 가능합니다. 한 신경외과 교수는 성공해서 한창 명성이 뻗어갈 50대 후반(2010년) 파킨슨 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재물, 실력, 명성, 자녀 등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의사가 오히려 환자가 되어 겪은 15년은 본절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더구나 그는 그리스도인이자 장로입니다. 전도서는 우리의 시선을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누림에 맞추라고 교훈하나, 신약은 더 나아가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 우리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4)- 회당
요한복음 6:59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본문은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에 회당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주님은 여기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강화를 하셨습니다. 이 회당은 로마 백부장이 세운 것으로(눅7:5), 그의 믿음은 하인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회당장 이름은 야이로이며 그의 딸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눅8:40-56).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막1:21). 1866년 윌슨 장군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회당을 처음 발견하고 예수 시대의 건물이라 확신했으나, 발굴 결과 주후 381년 에게리아 여사에 의해 기록된 회당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회당 기둥 조각에 기록된 후원자의 아람어 이름은 “알패오 세배대의 아들’과 유사하여 논란이 있던 중, 더 깊은 발굴을 통해 석회석 기초 아래 현무암으로 된 이전 건물의 흔적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현무암으로 지어진 예수님 시대의 회당이며,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뒤 3세기경 석회석으로 재건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베드로의 집 기념교회와 함께 가버나움의 종교적 중심지였을 것이나 7세기 무슬림의 침입으로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은 유대교의 부침을, 베드로집 기념교회는 기독교의 성쇠를 보여주지만 진정한 성전은 외적 건물에 있지 않고 개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교회)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너질 수 있는 외형보다,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2:7,새번역)

룻의 이야기
룻기 1: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본절은 룻기의 시작입니다. 때는 사사시대요 (비시 1300년 전후), 장소는 유다지파의 베들레헴입니다.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하나님은 왕이시다)은 아내 나오미(기쁨)와 두 아들 말론(병약함-룻의 남편)과 기룐(연약함-오르바 남편)을 이끌고 사해를 건너 요단 동쪽의 고원지대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모압지방과 근접한 지파는 르으벤 지파인데, 엘리멜렉이 모압고원으로 이주해 간 것을 보면 이 지역도 기근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모압고원은 동쪽에서 오는 비구름이 걸려 비가 풍족한 지역입니다. 오히려 고원을 넘어온 바람이 푀엔 현상을 일으켜, 르우벤과 베들레헴 지역에 흉년이 들게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병과 기근 전쟁은 물론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레26장; 신28장). “내 율법을 지키면 병, 기근, 전쟁에서 이김을 주지만, 불순종하면, 병과 기근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가나안 땅에서 너희들을 쫓아내겠다.” 이런 언약에 기초하여 볼 때 베들레헴의 기근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압인들은 그들의 신 그모스를 섬기며 살아갔으나, 모압지역은 오히려 기근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때나 지금이나 믿음에 굳게 서지 않으면 유혹되기 쉽습니다. 구약과 달리 신약시대에는 물질의 풍요 대신, 돌보심과 영적풍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확실한 삶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5/12/8-1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성경 녹음기
시편119:97절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이게 다 손양원 목사님헌티 배운 신앙이요.” 성경 녹음기로 평가받았던 애양원 교회 양재평 장로의 말입니다. 이분은 성경을 순서대로 암송하였던 것은 물론, “아무 성경, 몇 장, 몇 절” 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외었다고 합니다. 신안 출신으로 열아홉 살 때(1942년) 애양원에 들어와 쉰다섯에 장로가 되었는데, 병을 앓아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앞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입니다: “처음 여그 들어올 때 시력은 괜찮았는디 나이 서른 되던 해 시력까지 잃었지라. 처음엔 하나님을 원망도 혔지만 기도하는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혀 보니 귀하고 입은 멀쩡하더란 말이요. 그래서 그 때부텀 성경을 외워버렸지.” 눈이 밝은 사람이 옆에서 읽어주면 그걸 듣고 외웠고 나중엔 녹음을 해서 들으며 외우자, 20년 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암송하였고, 그후 성경 암송반까지 지도하셨습니다. 양장로의 간증을 들었던 어떤 분은 그후 마음자세를 달리하여 성경에 착념하였습니다. 반복 독서와 암기는 새로운 신경망을 형성하는 등 뇌 구조를 변화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행동을 더 생산적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꾸준히 이어가면 기억력과 집중력은 물론, 공감 능력과 자기조절력까지 강화되어 삶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하루 2분 독서만으로도 뇌가 실제 나이보다 10년 젊게 유지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렇게 언어는 마음과 행동을 바꾸므로, 성경을 작은 소리로 늘 읇조리면 경건한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1:3).

전도서 5:18절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지금까지(5:10-17) 우리는 재물의 헛됨과 그것이 가져오는 근심거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만족을 주지 못하는 탐욕의 문제(10절), 재물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만족을 잃게 되는 역설(11절),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노동자와 달리 부요함 때문에 근심하는 부자(12절), 불안정한 재물의 성격(13-14절), 죽음 앞에서 무력한 재물(15-16절), 그리고 재물을 섬기는 삶이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17절)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음에 두고 전도자는 이미 앞서 강조했던 조언을 다시 제시합니다(2:24-26). 곧, 먹고 마시며 모든 수고 속에서 ‘낙’, 즉 만족을 누리라는 권면입니다. 우리가 얻는 것들은 분명히 수고의 대가요 ‘몫’이지만(2:10),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9절). 실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짧은 인생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몫뿐입니다. 전도자는 이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란, 하나님의 손에서 주어진 것들을 감사히 받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를 ‘선하고’ 또,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움’은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라는 문장에 비추어 ‘적합함’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의 실체, 우리의 현실, 그 우주와 현실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시편128:2,새번역).

전도서 5:19절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수고와 즐거움」
수고의 땀방울은
밥상 위 기쁨이 되고,
노동의 길 끝에서
감사의 열매가 열린다.

참된 즐거움은
헛된 쾌락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일상의 선물이다.
코파일럿의 작시이며 한 줄 정리입니다: “참된 즐거움은 수고 뒤에 누리는 감사의 열매다.” 그러나 모든 수고가 곧바로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18–19절은 이를 분명히 보여주며, 참된 삶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수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과 부요, 셋째는 그 누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깨달음조차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2:26).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없는 일은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 예수와 영원한 교제를 나누면서 부활의 날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소유와 기쁨이며, 전도자조차 누리지 못한 축복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3)- 회당
누가복음 4:31,32절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가버나움의 집들은 검은 현무암으로 지어졌으나, 회당은 흰 석회석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에 석회석이 없음을 고려하면, 이는 값비싼 재료를 먼 곳에서 들여온 특별한 건축임을 보여줍니다. 회당은 안팎이 다양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구조는 고라신 회당과 유사합니다. 전체는 네 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방은 24.4m×18.6m 규모로 두 줄의 기둥이 세워져 세 구역으로 나뉘며, 기둥머리는 포도넝쿨·무화과 잎·독수리 등 고린도식 장식으로 꾸며졌습니다. 서쪽과 동쪽 벽에는 돌벤치가 있어 회합 시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고, 특이하게 입구가 남쪽, 즉 예루살렘 방향으로 나 있어 회당장은 북쪽 벽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부 벽은 회칠 후 벽화가 있었던 흔적과, 다윗의 별과 유사한 문양, 포도와 종려나무, 언약궤를 옮기던 수레 모습 등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이는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이나 생명의 떡 강화(요한복음 6장)를 읽으면 자명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는 말씀의 형식이나, ‘나는 생명의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한 유대인 랍비는 산상수훈이야말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포하신 말씀이라고 분개하였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사 영원한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5:28,29). 따라서, 반드시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심판과 죄 사함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무슨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
마태복음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무엇이 인생을 지도할 것인가? 철학, 오직 철학뿐이다” 라고 하였으며, 야고보서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철학)을 보이겠다”하였습니다.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 대령(1924-2005)은 스토아 철학을 가진 평범한 군인이었으나, 하노이 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은 그를 인생의 선생 중 하나로 만들었고 지금도 인류에게 말합니다: “어려움은 반드시 극복될 것이란 확신을 갖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 그러나, 믿음의 이야기는 제임스 본드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동행이 그 내용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초인적 노력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순종과 그 순종을 받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제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듣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실 생활에서 경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을 깨닫습니다. 이때 믿음은 견고히 서고, 우리 마음은 믿음, 소망, 사랑에 근거한 감사로 가득찹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고난과 안식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당연히, 스톡데일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삶은 인간승리의 이야기이나, 우리는 은혜와 감사의 이야기를 통해 부활하사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새번역).

매일묵상(2025/12/1-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4)
마가복음 10:30절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손양원 목사가 감옥에 있는 중 애양원교회도 시련을 겪습니다. 원장 윌슨과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1940. 12), 애양원은 총독부에서 임명한 일본인들이 접수하였습니다. 김수남 권사의 증언입니다. “그래도 안또 원장 때는 지낼 만 혔어. 안또는 일본 사람이었지만 구세군인지 안식교인인지 교인이라서 애양원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는 강요 않고 동방요배만 허라고 혔지. 그런데 1년 후 고마쯔가 원장으로 오면서부터 달라졌어. 모든 걸 군대식으루 하고 애양원 언덕 꼭대기에 깃발을 꼽아 놓더니 거기에 끌구 가서 절을 허라는 거요. 그게 싫으면 나가라더만. 그래서 나갔지. 그때 나하구 김주신 집사, 신길수 장로, 그리구 청년 교인 몇 사람이 쫓겨났어. 갈 데가 있어야지? 경상도 하동 땅 옥정면 강가에 움막을 짓구 살았어. 거기서 3년쯤 살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손양원 목사님이 황신덕 전도부인허구 찾아와서 우리를 데리구 다시 애양원으로 들어온 거요.” 믿음을 지키려고 애양원을 버린 그들은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물은 부자 청년 관원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권유하시자, 그는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갔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 반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재물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본절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실상,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소중한 것을 포기한 경험은 귀한 영적 보화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8).

전도서 5:16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본절의 ‘이것도’란 13-15절의 내용을 지칭합니다. 즉 재물을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거나, 재난을 당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경우 모두 큰 불행이지만, 어떻게 살았든 벌거벗고 온 그대로 가기 마련입니다(15).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라는 말로 평균화시킵니다. 노력과 지혜 그리고 운이 맞아 떨어져 큰 재물을 벌었든, 소유한 재산을 모두 상실하였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전자의 경우 어깨에 힘주고, 그 재산으로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에 몰두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분노와 회한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갈 것이나 인간의 삶과 노력 그리고 성공이란 ‘바람을 잡는 수고’에 불과합니다. 이는 죽음이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무대를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물과 성취에 집착하는 삶은 허무로 귀결됩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현실을 마음에 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항행하고 있습니다. 이때 무전이 들어옵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15도 방향 변경바람” 항모에서는 “이배는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임.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15도 변경해야 함”이라고 하자, “여기는 등대입니다. 결정하세요”란 무전이 들렸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항공모함과 같은 거대한 부와 재산을 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현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즉시 북쪽으로 방향을 15도 틀어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온갖 부와 권력, 지혜와 명성을 누렸으나 결국 우상숭배에 빠진 솔로몬이 남긴 교훈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동물들과 같습니다.”(시편49:20,쉬운성경)

전도서 5: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란 전단은 ‘큰 불행’(16절)의 내용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살아가는 노동자는 즐겁게 먹고 마시며 단 잠을 잡니다. 그러나, 부자라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분투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조차 향유하지 못합니다. 그 모습은 ‘어두운데서 먹는다’고 표현되었는데, 혼돈, 고립, 근심, (정신적)질병, 분노,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함축되어 있고, ‘일평생’이란 낱말은 영원한 어두움까지 생각나게 합니다(유13). 재물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신입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탐욕과 염려가 신자들마저 물질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무신론자이자 일생 가난하였던 칼 막스가 말하는 돈의 위력입니다: “돈은 이스라엘의 질투하는 신이며 그 앞에 다른 신이 존재할 수 없다…돈은 인간의 노동과 삶의 소외된 본질이며, 인간이 돈을 숭배할 때 돈은 인간을 지배한다.”(NIVAC). 우상숭배의 본질은 창조주를 무시하고 독립적 존재가 되려는 타락한 성품이므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주인 삼은 제자들은 다릅니다. 또한, (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라(마6:11)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필요를 채워주신다(마6:32.33). (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7:7)와 같은 약속들도 갖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라면, 불확실한 삶을 염려하지 말고 도우심을 믿고 계획을 세워서 성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확고히 세워져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 사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2)
마태복음 4:13,14절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가버나움에는 약 1,500명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방어벽은 없었지만 해안까지 확장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주변에서 어업이 가장 번성하였고, 다메섹에서 가이사랴와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해변무역도로(Via Maris)가 지나가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유적지에서는 바닥을 돌로 포장한 로마식 도로와 마일스톤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일스톤은 로마가 정복한 도시들을 잇는 도로에 1마일마다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입니다. 또한 여행자와 순례객들에게 세금을 거두었는데,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바로 이곳 세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역상들은 가버나움에 들러 긴 여정에 필요한 말린 물고기라든가 곡식가루 등 음식을 구입했습니다. 최근 발굴된 반원형 건축물과 방수 처리된 벽, 중앙의 돌 구조물은 물고기 거래 장소였음을 시사하며, 수많은 맷돌과 올리브 틀은 농업과 어업 모두에서 큰 이윤을 창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시골 나사렛에서 발전된 도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시고 선교기지로 삼으셨습니다(요2:12).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시고, 복음의 소식이 국제도로망을 타고 신속하게 전 세계에 퍼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약 750년 전 이사야는 메시야의 빛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 비추리라 하였는데, 나사렛은 스불론 땅에, 가버나움은 납달리 땅에 위치합니다. 주님에 의해 성취된 이 예언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지만, 마태는 깨닫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은 결코 이성적인 삶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벧후1:20,새번역)

무슨 이야기를 들려드릴 것인가?
마태복음25:22절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저자 짐 콜린즈는 도약에 성공한 기업은 모두 한결같이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이러저러한 심각한 역경을 겪었으나 “냉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최종 승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짐으로” 지금의 위대한 기업을 이루었다 하며, 이런 이중성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스톡데일은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1923-2005) 대령을 말합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격추된 미 해군조종사로서, 1965~ 1973년까지 ‘하노이 힐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는 20여 차례의 고문과 생존여부조차 불확실한 상태를 견디어 냈습니다. 또한 수용소 내 통솔책임을 맡아 가능한 많은 포로들이 살아남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73년 석방되었고 3성 장군으로 퇴역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은 8년 간 자신들이 겪은 일을 한 장씩 번갈아 쓴 책 “사랑과 전쟁 속에서 In Love and War”를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인간승리의 비결은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라는 말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남긴 점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 갈렙의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마지막 날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지 염려해야 합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수14:14).

매일묵상(2025/11/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3)
데살로니가전서 1: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939년 7월부터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목회’가 시작됨과 함께 새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스크를 벗는 직원들이 늘어났고 애양원 환자들도 그런 직원을 신뢰하였습니다. 나병을 겁 내지 않는 청년 목사는 신사참배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형사에게 연행되어 그의 애양원 목회는 1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형의 만기가 되자 검사는 석방 조건으로 ‘사상 전향’을 요구하였습니다: “덴꼬(轉向)해야 나갈 수 있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당신에겐 덴꼬가 문제지만 내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다” 그의 출소는 8·15 해방 후로 미루어졌습니다. 성결교단에서 존경 받는 이명직 목사님은 성결의 체험(1920년)을 바탕으로 교단에 큰 부흥을 가져 왔으나 신사참배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큰 아들(손동인)이 면회를 왔을 때도 신사참배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손동인은 형사의 설득을 통해 이미 신사참배를 한 뒤였기에,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그의 죽음(순교)으로 이끈 원인이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움직여야 합니다(갈5:6).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붙잡아 주신 그 주님의 온전하심은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전도서 5:14절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새번역)

본절은 ‘부의 불안정성’을 다룹니다. 부자가 힘써 지켰던 재물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방면에서 타격을 입을 것이며, 그 영향은 자식에게까지 미칩니다. 재물을 잃는 원인 중 본절은 ‘재난’을 제시합니다. ‘재난’의 원어는 ‘고통스런 일’이란 의미입니다. 이를 재물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투자’, ‘잘못된 모험’, ‘악한 재난’ 등을 말합니다. 갑자기 강도떼나, 큰 폭풍과 같은 자연 재해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욥의 경우나, 공산주의가 중국과 북한을 점령하여 예기치 않게 모든 재산을 잃은 분들이 그 예입니다. ‘다 잃는다’라고 번역된 ‘아바드’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로써,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재산을 모두 상실했음을 강조합니다. 후단은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로 그 비극적 결과를 표현합니다. 수고는 하지만 상속인이 없는 상황도 문제이나(2:18),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잃어 물려줄 재산이 없는 처지 역시 참담합니다. 재물은 이렇게 불안정하므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한 일에 힘 쓰라는 것이 본절의 교훈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은 자녀들이 복을 받는 비결임을(시편37:26), 바울은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기반)’를 쌓는 길임을 밝힙니다(딤전6:19). 재물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따라서, 노력하되 주님 안에서 노력하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면 이런 교훈들을 간직해야 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전도서 5:15절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본절 서두의 ‘그’는 재산을 모두 상실한 14절의 그 부자를 지칭합니다. 그는 부를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재난을 당하자 그의 수고는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재산 상실보다 더 무서운 사망을 생각합니다. 사망은 전도서 전체에 걸쳐 솔로몬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지금 전도자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1:21a)는 욥기의 시적이며 처절한 고백을, 산문으로 담담하게 재진술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벌거벗은 아기로 이 세상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소유라고 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윽고 성장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같은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은 부자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며, 불공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강자의 결정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그 사람은 더 큰 허무를 절감하게 되니 인생의 큰 역설이 여기 존재합니다.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과 가정을 독립적으로 영위할 정도의 재산은 꼭 필요합니다. 다만, 재산을 모을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인간이 스스로 다스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다가오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뇌물처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늘 마음을 초상집에 두고(전 7:4), 덕을 베풀며 가난한 이웃이 없는지 살펴봅니다 “저가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롭게 들리리로다.”(시편11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1)
마태복음 11:23a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위치한 ‘크파르 나훔’이라는 유적지입니다. ‘크파르 나훔’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을 뜻합니다. 주전 2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나훔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름은 후대에도 이어져 아랍어로 ‘탈훔(=훔의 폐허 언덕)’이라 불려져 왔기 때문에, 1830년대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쉽게 가버나움을 찾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수도사들이 발굴에 착수하여 신약 및 비잔틴 시대의 유적을 발견하였으나, 본격적 발굴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회당,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교회터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가족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고, 가버나움은 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곧이어 베드로의 집에 머물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막1:21-29).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과 말씀을 경험한 도시이나,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제자들조차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요 6:66). 가버나움은 상업, 농업, 어업 모두 번창한 국제적 도시였으므로, 사람들은 부유하고 종류 또한 다양해서 영적 무감각과 교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회개와 순종이 없다면, 가버나움처럼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6:1).

그리스도인의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본절에서 ‘범사凡事’의 사전적인 뜻은 “모든 일 혹은 상황”이란 의미입니다. ‘범’은 모두 ‘범’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단의 ‘이것’이란 ‘항상 기뻐하라’(16), ‘쉬지말고 기도하라’(17), ‘범사에 감사하라’(18a)를 모두 지칭하는지, 아니면 ‘범사에 감사하라’만을 지칭하는지 다툼이 있지만, 후자라고 보는 것이 문법상· 문맥상 타당합니다. 그 만큼 감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때 세상적인 여러 감사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사, 즉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제일 중요하고, 또 영원합니다. 이 은혜가 감사의 영적 기원으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자, 당신과 예수 믿는 우리 사이에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더구나,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니 이 보다 더 감사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롬8:31-39). 그래서 성경은 걱정 근심이 되는 모든 것들- 가정, 직장, 자녀, 직업, 재산, 건강, 결혼, 질병 등 -을 주님께 던져 버리라 명령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만유를 아버지께 상속받은 주님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5:7).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주신 근거입니다. 모든 환경에서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매일묵상(2025/11/17-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
고린도후서 2:15절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새번역)

“(1936년)음력 6월인가 사경회를 하기로 하고 강사를 고르는디…평양신학교에 손양원이란 청년 전도사가 있는디 별명이 ‘손 불덩어리’라고 능력이 많다는 거요. 그래서 그분을 초청해서 사경회를 하게 되었는디 아닌게 아니라 첫날부터 대단했어.”(김수남) 그러나, 손양원 전도사의 행동은 더 큰 화제였습니다. 그 당시 외부 사람은 철저한 검사와 흰가운· 흰 모자· 장갑· 마스크를 하고 눈만 내놓고 애양원에 들어왔으며, 균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오해로 예배당 안조차 유리 칸막이로 환자석과 직원석이 구분되었습니다. 손양원은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나환자들을 구하려면 환자들 속으로 들어가야지 병이 무섭다고 마스크를 한다면 누가 마음 문을 열겠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나환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면, 유리창 안의 흰 옷 입은 사람들에겐 ‘침례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매사가 그렇습니다. 정책이나 메시지가 자신들과 맞으면 감동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잡는 기술자들이 정치가들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오히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5: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존 록펠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많은 재산을 갖고 계신데 어느 정도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절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무리 부해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나, 그 끝은 허무입니다. 재산은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있습니다. 잠언은 부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긍정적인 측면을, 전도서는 부 자체는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찰합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는 공허를 낳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부는 감사와 나눔의 통로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못하나,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라며 환경을 초월한 만족을 고백하는데, 그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재물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참된 만족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경건이며, 경건을 뒷받침하는 자세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교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전도서5:11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0절은 ‘돈에 대한 사랑’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함을, 11절에서는 부의 증가는 관리 비용을 증가시킬 뿐 소유주의 몫은 지켜보는 것뿐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그 결론은 역시 허무입니다. 부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는 아닙니다. 재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관리와 염려도 함께 커집니다. 주인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하려 하지만, 실제로 누리는 기쁨은 제한적입니다. 이는 지혜와 부를 동시에 가졌던 솔로몬이 체득한 고백이므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교훈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자는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둘러싸여 있고 부가 커지면 이해관계자들은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나 부자가 가장 신경써야할 이해관계자는 그 재산을 맡기신 하나님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재산이 아니라 더 중요한 생명을 빼앗깁니다. 누가복음(12:16-21)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을 크게 짓고 안심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을 때 재물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재산은 인격 만큼만 가지라”고 하는데, 저는 노력한 만큼 벌고 생활하는 자족의 삶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재물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신 것을 감사히 누릴 줄 알 때, 재물은 허무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재물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과 감사의 삶을 배우라는 교훈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1)
누가복음 10: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동북쪽으로 약 3.2㎞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가버나움·벳새다와 함께 ‘복음의 삼각지역’ 혹은 ‘저주의 삼각지대’로 불립니다. 1962~64년 발굴된 유적은 주후 3~4세기경 현무암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며, 도시 면적은 약 10만㎡에 달합니다. 재료는 갈릴리 지역에서 흔한 화산석 현무암입니다. 중심 회당을 기준으로 5구역으로 나뉘었고, 유대인의 정결례 장소인 미크베가 발견되어 유대인 거주지였음을 보여줍니다. 유적지 도처에서 발견되는 올리브기름 압착 돌은 고라신 사회에서 올리브 기름이 차지한 경제적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발굴된 회당은 갈릴리 전형 양식으로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구조입니다. 세 개의 입구 중 중앙이 가장 크고, 벽면에는 돌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회당은 주후 4세기에 파괴 후 6세기에 재건되었습니다. 고라신의 유적은 화려한 종교적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 “저주의 도시”로 기억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에 기록된 많은 이적을 베풀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으나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회개와 순종에 있습니다. 많은 은혜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책임이 무겁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경고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3)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도 한 분이시며, 그분에 의해 형성되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활이란 의의 소망을 향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정체성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인도하다’는 헬라어 ‘아고’의 번역입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맡은 베뢰아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아고) 아덴까지”(행17:15) 갔을 때의 묘사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신자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신자에게는 ‘선한 자(의인)가 받는 생명의 부활’(요5:29)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성령님이 중생시키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롬8:7,8).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고 죄사함 받은 표징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이란 자기중심성을 이겨나갑니다(롬8: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들”(롬8:14)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인도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가르침, 교제, 돌보심, 도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므로” 이미 율법을 성취하였습니다(롬13:8-10).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나, 사랑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물론 네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를 도와라”(엡4;28)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모세율법은 불필요 합니다(갈5:18).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후단,사역).

매일묵상(2025/11/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왕의 무덤
마가복음10:45절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새번역)

애양원은 자치였고, 원장이 2명, 환자들이 3명을 뽑은 ‘부장(部長)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치료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 애양원에 관한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많을 때는 수용 인원이 1,700명에 이르러 각종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부장회가 소집되어 일을 처리했으며, 자체 화폐까지 유통하였으니 ‘애양원 공화국’이라 하겠습니다. 선출된 부장들은 신앙이나 인품 면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어서 그 권위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수석 부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수석 부장을 역임한 인물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맹인 김태옥 장로입니다. 이분은 1909년 광주나병원이 개설됐을 때 들어온 최초 환자의 한 사람이었고, 애양원교회 장로요 ‘부장들의 우두머리’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선교사들도 ‘성경을 줄줄 외우는’그를 존경했습니다. 1939년 별세하자 윌슨 원장은 그를 ‘애양원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며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가 본 무덤은 무연고자의 무덤이었으며, 건너편 손양원 목사의 무덤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왕은 무슨 왕···, 종이었을 따름이지”(이덕주). 생각해 보면, 나병환자요 맹인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만, 김태옥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며,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전도서 5: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본절은 새 주제를 성찰합니다. 빈민을 억압하고 정의를 짓밟는 학대와 강탈은 삶의 허무를 키우며, 이는 불공정한 판결과 비도덕을 드러냅니다. 주 대상은 빈민으로 표현된 약자들입니다. ‘빈민’이란 ‘라쉬’의 번역으로 돈이 없고 재산이 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9절을 함께 고려하면 ‘가난한 농민’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4:1-3절에서 압제받는 자들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압제를 목격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근거는 세 단계의 심판자들의 존재입니다: 높은 자, 더 높은 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 이 말은 관료체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도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악을 행하는 관리, 그를 감찰하는 왕, 그 왕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장엄복수)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인간 제도의 한계를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라는 의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 역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자 “의인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답변을 받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1-8). 주님은 불의를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심을 단언하신 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결실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13:2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전도서5:9절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절은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존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곧, 땅의 소산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입니다. 전도자가 언급한 ‘빈민에 대한 학대’(8)는, 종종 토지의 불법 점유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23:10–11에서 경계석을 옮기는 자에 대한 경고는, 당시 사회에서 토지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기반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를 보장하고 경작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누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쟁기질한 밭을 위한 왕”이라는 속담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하 21장)은 권력 남용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전도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만으로는 타락한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제빵업자의 도덕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내일 아침의 빵을 보장한다’고 갈파하여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임을 밝혔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기심 때문에 병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때, 성경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방향을 교정하는 윤리적 나침반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20장)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담았는데, 이 교훈을 깨닫고 이기심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습니다(시편119:99).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마태복음 11:21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구약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00 경)에 기록된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의 주요 도시로 판단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13:13). 400년 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습니다(삼하3:3). 압살롬은 모친을 따라서 딸을 마아가로 짓고,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아사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세라 목상 때문에 아사에게 폐위당하는데, 그술 출신인 할머니로부터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한 것이 분명합니다(왕상15:6). 한편, 벳새다는 앗수르에게 함락되었는데(BC732), 화재로 불탄 흔적이 그대로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 중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특이합니다. 이 석상은 주상으로 한 쪽 면에는 두 뿔이 달린 황소가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을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 하다드로 봅니다. 벳새다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하다가 헤롯 빌립 당시에 번성하였으나 AD 70년 로마에게 멸망당합니다. 우상숭배는 뿌리뽑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계산으로 율법이 금지한 가나안 땅 내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 우상숭배의 단초를 만들자, “삼사 대까지 벌하겠다”(출20:5)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계명은 작동합니다. 그 결과 솔로몬 때(2대) 우상숭배는 확장되고 르호보암 때(3대) 나라는 분열되었으니,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에베소서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람들의 견해와 상관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은 늘 존재하였으나, 유럽인들은 15세기에나 알게 됩니다. 그 후 이들은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문명을 이루었지만, 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막상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시인 오인태의 ‘밥상머리 인문학”을 읽으면 그도 역시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면 그들의 모임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고통을 극한까지 참아내고,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연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이 그 전형입니다. 기도는 당연히 없고,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초인이나 초능력을 불러와서 신이 없이도- 만약 있다면 신을 마음대로 부려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전제가 인간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원죄입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청지기직을 벗어 던지고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태도이며,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이는 국립공원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문제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영원한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마귀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란 진리는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매일묵상(2025/10/27-3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가나안 복지되다!
마태복음25: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애양원은 남자부와 여자부 마을을 조성하여 각기 모여 살게 하였으나, 젊은 환자들 간에는 ‘풍속 관련’ 범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남녀 환자들의 ‘결혼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단종 수술을 받은 후, 남녀환자를 짝짓고 어린 아이 한 명을 붙여, 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후 가정촌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점점 확대되어 1976년 선교부는 선교부 땅 14만평을 위에 정착촌을 건설합니다. 은성동, 다윗촌, 도성촌과 인사동 마을이 그것으로 불모의 땅이 가나안 복지로 탈바꿈했다 하겠습니다. 70년 넘게 여자부 돌집에 살고 있는 김수남 권사의 증언입니다(1999년). “우월손 원장님은 공주서 농촌사업 허는 사람 데려다 우리헌티 농사 짓넌 벱과 퇴끼, 도야지 기를 벱을 가르쳐 주시고…전구 다마를 가져와서는 양말 기워 신으라 허시고… 한 번은 감나무 묘목을 싣고 와서 나눠 심었는디 이 근방 단감나무는 모다 그때 심은 게요. 그런께 황무지 같던 이곳이 가나안 복지가 되었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결혼 사업, 정착촌 조성, 농업 교육 등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흔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는 말씀을 오해하여 더 나은 삶과 소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단의 사정이 없다면 사회통상의 소득은 확보되어야 사랑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롬13:8).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기도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마6:10,쉬운성경).

전도서 5:6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본절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경히 여겨 실수라고 변명하며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수사의문문). ‘사자’란 천사, 제사장, 하나님, 혹은 서원을 듣고 기록하는 직책의 사람 등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제사장’이란 해석이 타당합니다(말2:7). ‘네 목소리’는 서원을 실수라고 변명하는 말을 뜻하며, ‘너의 핑계(변명)’로 의역됩니다.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즉, 재난, 실패, 질병 따위로 그 사람이 성취한 사업, 재물, 성공이나 어떤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원하여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합당한 징벌의 범위에서 그 사람의 것을 가져가신다는 의미도 가능합니다. 토마스로드 침례교회의 한 신자가 제리 파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 작정한 헌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두 소급하여 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모저모로 당신의 작정한 부분을 다 거두어 가셨으니, 다음부터 내시면 됩니다.” 법관이 사건을 맡았으면 공의롭게 판결을 내려 갈등을 해소하든지 범죄에 합당한 벌을 선언합니다. 하물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우시겠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하여 서원을 했으면 갚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면으로든 유익합니다. 사정이 있는 경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다짐과 함께 이행바랍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귀한 보배는 지각 있게 말하는 입이다.”(잠언20:15,새번역)

전도서 5:7절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허무 극복의 유일한 방법으로 전제하며, 단락 5:1-7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사(or 예배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서원과 그 이행입니다. 제사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야 하고, 서원은 신중하게 따져서 약속하되 반드시 이행하라는 경고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경건한 삶)의 한 부분이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란 서론적 명령으로 시작해서,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는 결론적 명령으로 끝맺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이 감사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태도가 삶의 근간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사명을 이루는데 골몰합니다. 세상을 짓누르는 인생의 허무, 절망, 회의 따위는 결코 우리 마음에 머무를 틈이 없습니다. 실로, 구속받은 신자의 삶 속에는 이사야 35: 10절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만약 삶의 문제가 닥치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빌4:6,7)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요한복음 1: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839년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어부의 집’이란 벳새다의 이름에 비추어,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서 보다 해변가에 위치한 현재 엘-아라즈(el-Araz)를 벳새다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최근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라미 아라브(Rami Arav)의 발굴을 통해 엣-텔 지역이 벳새다로 입증되었습니다. 엣-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와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셨으며(막 8:22),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지만(눅 9:10-17),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마 11:21). 표적(이적)이 반드시 믿음을 만들지는 못하나, 성경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표적(이적)은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모든 표적(이적)의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이며, 영생에 대한 우리 믿음의 실체적 근거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14:11,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1)
에베소서4:6절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인태의 시: 「달력을 걸며」 – “또, 깎아 곶감 한 줄 달다”

오 시인에게 영향을 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어머니는 밥상에 차려내는 음식으로, 아버지는 그 밥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한번도 밥상 앞에서 반찬투정을 하거나 어머니를 핀잔하지 않으셨고, 훈계조로 자식들을 나무라거나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식구 누구도 꼭 찍어 타박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인태의 인생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불필요하지요! 따라서, 시인 오인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한편, 오인태 시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할 때 그 시작은 부모입니다. 그 위는 조부모이지만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오직 부모의 전승을 듣고 사진을 보면서 믿을 뿐입니다. 5대조 이상은 족보의 기록만 믿고 있을 것이나, 족보는 틀려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증언과 천지만물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없는오인태 시인은 반성과 후회만이 있지 죄사함과 영생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표지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