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3/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누가복음13:32절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분봉왕 헤롯)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은 통렬히 비판하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본절이 유일합니다. 국가와 신앙은 어떤 관계일까요? “ 목포 만세 운동(1919. 4. 8)은 이경필 목사, 곽우영 장로, 서상봉, 서화일……등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정명여학교의 천귀례, 곽희주, 김나열, 박음전 등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전합니다. 이들 모두는 옥고를 치렀고, 서상봉은 시위 중 일본군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어 이듬해 별세, 목포 시민들은 사회장을 치루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서광조)은 수년 전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고, 부인과 며느리도 만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학생 시위를 주도한 박상렬 삼형제는 모두 체포·고문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그가 양동교회 교인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태극기를 그리던 곳이지요!”- 기도실로 사용되는 양동교회 예배당 남서쪽 모퉁이의 지하실 방(10평)을 말합니다. 일제 말기 조선의 신자들은 페르샤 치하의 유대민족(에스더)을 조선에 비유하여(구약신학), 천황의 조선지배를 인정하나 천황 숭배는 거절하였습니다(신사참배 반대). 신약 성경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모두의 주님이며, 그분에게 순종할 때 인간의 행복이 보장되며, 국가란 그 행복 보장의 수단임을 가르치고, 민주주의는 국가를 국민 행복추구의 수단으로 국민이 창설한 단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한계는 명확하고 국가의 권력은 그 한계 내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은 세금도 잘 바쳐야 합니다. 당국자들은 이 일에 항상 힘쓰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롬13:6,현대인의성경)

전도서 2:19절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본절은 죽음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재산과 왕위를 계승할 자가 ‘지혜자냐 우매자냐’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사후 발호할 공신세력을 염려하여 거의 모든 공신들을 숙청해버렸으나, 손자 건문제는 어리숙하여 조부의 유지를 승계하지 못합니다. 결국 연왕 주체(영락제)의 정난의 변으로 장자승계의 법은 깨지나, 죽은 주원장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죠! 솔로몬 때 전성을 이룬 다윗의 통일왕국도 믿아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신으로 분단되고 르호보암은 남왕국 유다만 통치합니다. 다만. 성경은 이 분단은 주님의 뜻이며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벌임을 밝히면서, 르호보암의 모친(나아마)이 암몬 여인(열상14:31)임을 특별히 부기하여 알려줍니다. “다윗의 신앙유산이 르호보암에게 이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부자 삼대 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재산을 이어받을 후손의 자질에 관해서는 주님의 주권이나, 그들에게 물려줄 신앙유산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생각할 점은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신앙유산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의 신실한 삶과 함께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이란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특권을 내포하며, 믿음과 이에 따른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읍니다.”(빌1:29,공동번역)

전도서 2:20,21절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0,21절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삶의 부조리한 구조를 보고 깊이 탄식합니다. 20절의 직역입니다: “그래서 나는 돌이켜서 나의 마음속으로 절망하게 되었다.” 현실의 한계와 허무함, 죽음 앞에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던 솔로몬은 이제 절망감까지 토로합니다. 그의 말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내 몫은 없으니 도대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라는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21절은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하여 그 근거를 말합니다. 전단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라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을 등장시키고, 후단은 그렇게 이룩한 업적을 수고하지 않은 후계자에게 물려준다는 부조리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어떤 노력도 인생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도자 자신으로, 솔로몬은 인생은 무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큰 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삶에 너무 깊은 의미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데 힘을 쏟으라는 교훈입니다(전12:12-14).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는 예수께서 주님되심을 믿고, 둘은 그분이 명령한 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요일3:23).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에 비추어 구체화시킨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출애굽기15:15절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찬양하는 대목 중 모압 관련 부분입니다. 1930년 모압 땅 아르(민21:28)로 추정되는 유적지 ‘발루’의 발굴 과정에서 주전 3000년경 초기청동기 시대의 흔적과 이집트 왕의 모습을 조각한 석비가 출토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는 그 석비에 그려진 왕은 람세스 2세(주전1279-1213)로 주장합니다. 이는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있고, 거기에 새겨진 피정복 국가 중 모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에돔, 암몬, 아람 그리고 앗수르를 잇는 ‘왕의 대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이집트의 모압 정복 이유는 경제적 측면만 보아도 명백합니다. 모압은 이 도로를 통해 석회석과 사해의 소금 그리고 향유를 수출했습니다. 또한 모압은 고원(900m)이라 안전하였고, 비록 덥지만 요단 강 서편(이스라엘) 땅보다는 기온은 낮고 강우량은 높아 곡물 재배, 포도밭, 과수원과 같은 농업과 양 떼의 사육에 적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압 족속은 주어진 풍요와 평안을 신 그모스의 축복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의 계시(율법, 복음)가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 준수에 있음을 알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도록 모압 왕에게 계책을 줍니다. 이 죄들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사람들 만큼도 깨닫지 못하고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히브리서 4:2절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읍니까?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읍니다.”(공동번역)


본절의 배경은 민수기13,14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탐사건입니다. 정탐꾼 12 명 중 10명은 땅은 좋으나 장대한 거인들 때문에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결론을, 갈렙과 여호수아 2명은 그곳 거민들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약속이 있으니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믿음의 깨달음이 없던 백성들은 전자 편에 서서 통곡하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지만, 믿음을 가진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85세에 헤브론의 거인들을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믿음이 결부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뇌수술로 유명한 칼 암스트롱 박사는 동생의 약국에 들렀다가,  우연히 가난한 소녀 줄리엣의 남동생 앤드류의 딱한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는 1.11달러를 받고 앤드류의 뇌수술을 행하였다는 선행이 전해집니다. 이는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현실 극복이나 믿음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신 주님의 기적 이야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시면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요14:14)는 약속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에게 우리의 문제들은 쉬운 일입니다. 갈렙 같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고 담대히 여러 문제와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


매일묵상(2025/3/10-14)


고린도전도7:21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1900년대 초, 가난한 목포 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장로와 한국인 목사를 세우고, 1백여 평 예배당을 마련한 데는 뜨거운 신앙과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증거는 예배당 서쪽 출입문입니다. 서쪽 출입문은 남자 교인들을 위한 문으로, 문 위쪽 반원형 아치 조각돌에는 행서체 한문 글씨로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와 같이, ‘隆’자와 ‘熙’자 사이에 한말에 유행했던 좌우대칭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해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안내하시는 목사님은 “그게 저도 신기합니다. 아마 지금은 뽑아낸 큰 등나무에 글씨가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던 동쪽 출입문(여자교인들용)은 같은 형태이지만 “쥬강성일쳔구백십년”이란 아홉 글자만 새겨져 있지 태극 문양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타당해 보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한 때는 1910년으로, 그 해부터 한일합병으로 인한 일제의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돌에 새긴 ‘大韓’글씨와 태극 문양에 담긴 ‘독립 정신’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독립정신입니다. 전자는 죄와 마귀의 지배를 이기는 능력이고, 후자는 일제의 지배를 극복하게 한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만, 현실에서 합법적으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전도서2: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본절은 지혜자도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지성은 물론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나, 그런 노력 끝에 지혜자가 되었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따 먹고 지혜를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영생하려는 인간에게 내리신 철퇴입니다. 전단은 전도자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싫어한다는 내용입니다. 후단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오는 세대가 기억하지 못함을 직시하자, 모든 이생의 자랑이 괴로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지푸스 신화의 시지푸스가 받은 괴로움 같습니다. 시지푸스의 일은 돌을 밀어 산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올려 놓은 돌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만 하니, 시지푸스의 괴로움은 영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상징하나,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는 시지푸스와 다릅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에 오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전도서에는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하여 분명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는 구절을 통해 사후 심판의 진리를 인식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과는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부인하는 세상이나 금생의 무의미를 탄식하는 전도자와 달리, 심판날에 있을 우리 행위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염려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11:28,새번역)

전도서2:18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본절에서 전도자는 상속자에게 모두 넘어가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죽음을 생각해 보자자신의 모든 수고와 업적을 미워합니다. 잠언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지혜를 창조세계에 숨기셨으므로, 인생이란 각자의 삶에 감추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45년 동안 활동한 개그맨 이경규 씨는 집에 들어 오면 모든 OTT를 흩어 보며 그날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들을 흩어보며 흐름을 파악하고, 실패한 것들을 살펴 통찰력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란 책에 담아 펴냈습니다. 아마, 개그맨으로 사는 동안 느낀 것들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경규 씨는 예능의 관점에서 노력하여 돈도 벌었지만, 희극 보다 놀라운 삶의 희극을 많이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규씨는 그 깨달음과 함께 수고한 부를 그대로 남겨야만 합니다. 전도자 역시 왕의 권세와 지혜로 쌓은 부와 유산의 운명을 숙고한 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기고, 선을 행하라고 교훈합니다(전3:12,13). 지혜, 재물, 노력, 업적 등은 생전에는 유익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오는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저는 자, 맹인, 몸 불편한 자를 청하라”(눅14:13)는 주님의 가르침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신명기2: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압의 영토는 사해 해변을 끼고(서쪽), 아르논 골짜기를 경계로 암몬과 나누고(북쪽), 세렛 시냇가를 사이에 두고 에돔과 대치하였습니다(남쪽). 모압에 관한 자료는 거의 구약 성경에 의존합니만, 디몬의 메사 석비는 성경 본문 이해(왕하 3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모압 도시들의 이름은 이사야서에 여럿이 등장하나(사 15장, 16장), 디본과 헤스본이 대표적입니다. 디본은 모압 신 그모스의 신전이 있었고(사15:2), 헤스본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시혼으로부터 정복한 땅이지만 그 전에 모압의 소유였습니다.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하고, 모압과 이스라엘은 같은 혈통입니다.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가 모압 조상 롯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과 전쟁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모압 족속에게 아르 땅을 배정하셨기 때문입니다(신2:9).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 물, 명예, 권력 등을 배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직면하면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모압은 술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미디안 여자들을 이용하여 타락시키자 하나님은 염병으로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남녀를 죽여 벌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시고(민25장),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십니다(민25:13). 제자들의 삶이란 의로우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잠언16:7,새번역)

여호수아14:9절
“그래서 모세는 그 날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습니다.”(새번역)

38년 동안 노예의 정체성을 가졌던 갈렙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자 거듭납니다. 야곱과 그 자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지 4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 속에만 존재하셨으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과 유월절 예식, 홍해와 광야의 이적들을 베푸신 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갈렙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고 이후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유다지파나 하나님께 모두 충성스러웠으며, 그의 믿음은 가나안 정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탐 내용을 보고하면서 10명은 불신앙에 서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전쟁하자고 외쳐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민14:24). 갈렙은 믿음의 삶, 즉 하나님의 약속에 터잡아 사는 비결을 터득하였습니다. 45년 뒤 85세의 갈렙은 “나는 모세로부터 제비뽑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약속을 받았다.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 헤브론을 배정해 달라”고 담대히 요청합니다(수14:9). 갈렙과 같은 ‘믿음의 정체성’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 생겨 나며, ‘금생과 내생’에 보상이 따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의 주님 되심을 배워가며, 이것이 영생의 핵심입니다(요17:3). 주일예배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물론 자녀들의 예배참석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따라 살면 행운의 열쇠를 얻고 야훼를 믿고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잠언16:20,공동번역)

매일묵상(2025/3/3-7)


열왕기상6: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고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 2월에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전 규모는 길이가 27미터, 폭이 9미터, 높이가 13.5미터였으며”(현대인의성경)

남장로회 선교부는 복음의 열매를 보고 목포 선교부를 존치시켰습니다(1907). 오웬 선교사가 별세하자 담임 목사 프레스톤은 광주로 전출되었고, 대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이 내려 왔습니다(1909). 같은 해 한국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인들이 목사 생활비를 전담한다는 의미에서 ‘자립’의 실천이며 호남 최초입니다. 목포 교인들의 ‘자립’ 신앙 열기는 새 예배당 건축으로 연결됩니다. 1898년 최초의 예배당(한옥) 9평은, 1903년 18평으로 늘렸지만, 5백명의 교인을 수용하기에는 좁았습니다. 더구나 그 한옥 예배당은 남자 교인만 예배드렸고 여자 교인들은 영흥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므로, ‘한 지붕 아래서 남녀가 함께’ 예배 드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의 보고입니다. “많은 기도와 의논을 거쳐 교인들은 62×36피트짜리 석조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는데 이곳 가난한 교인들 형편으론 버거운 계획이었습니다….많은 여인들이 은가락지와 비녀를 빼서 바쳤고…” 1년 후 유달산 돌로 지어진 1백평의 예배당은 솔로몬의 성전(74평) 보다 더 크고, 제사장만 들어갔던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전도서2:15절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리석은 자가 당한 일을 나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얻은 유익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솔로몬은 본절에서 자신에게도 닥칠 죽음의 숙명 앞에서 자신의 지혜의 유익이 무엇인지 따져봅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의 길을 잘 헤쳐나갈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어리석은 자와 동일한 결과, 즉 죽음을 피할 지혜의 부족을 토로합니다. 죽음이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동일하게 어리석다고 선언하는 것은, 둘 다 죽음을 이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무슨 유익을 주었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한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여 권세, 명예, 재산 등을 얻게 하는데는 능력이 있으나, 영생을 주지 못하고 명성과 업적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세속적 지혜는 결코 이 세상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버리니, 세속적 지혜의 한계이며, ‘이것도 역시 헛되다’고 솔로몬은 탄식합니다. 세속의 지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죽음을 오직 신체적 소멸현상만으로 이해하나,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신체적 죽음은 결정된 것이고, 이 세상도 없어질 것이나,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히9:27). 그들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남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는 세상에서 주님께 칭찬 받을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고전3:18,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6절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현대인의성경)

15절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지혜마저도 의미 없다는 전도자의 깊은 탄식은, 본절에서 더 깊이 증폭되어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이 무의하여,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누구일까요?”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죠! 16절의 전단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어, 15절의 내용, 즉 ‘죽음 앞에 지혜도 의미 없다’는 진술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어 다음 세대에게 둘다 잊혀지므로, 지혜도 의미없다는 뜻입니다. 후단은 전단의 내용을 재 진술하여,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려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군사천재 케샤르,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책사 제갈공명, 정관의 치의 당태종, 서성 왕휘지, 연개소문, 태종 무열왕 등은 모두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는 굉장하였으나 지금은 영향력도 없고 기억받지도 못합니다. 아마, 수십 억년이 지나 태양계조차 사라지면, 지구와 거기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문명은 잊혀지고, 그 후의 세대는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부활의 나라가 도래할 때 누가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 뿐입니다(요일2:17).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카르타고의 도벳
예레미야 7:31절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몰렉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도벳 사당이라 부르는데 ,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개혁(BC620)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도벳의 예가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도벳의 대표적인 모습과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는 주전 9세기경부터 베니게의 식민지였기에 가나안의 문화가 침투된 곳이며, 바알 함몬과 그의 배우자 타닛이 주신입니다. 카르타고의 공동묘지는 큰 고고학적 성과로서, 50년 간(1920-70) 발굴되었습니다. 공동묘지는 주전 8세기부터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BC146넌) 사용되었고, 그리스의 문헌에 등장하는 카르타고의 종교적 관습을 확인시켰습니다. 무덤에는 영아 시신을 화장하여 담은 작고 붉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희생제물로 아이들을 바쳤는데,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따로 키웠다고 합니다. 전쟁과 같은 위급한 시기에 이렇게 키운 200명의 아이들이 바쳐지기도 하였으며 제사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실제로 북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방 카르타고는 별론으로 하고, 율법을 가진 유다백성들은 인신제사의 범죄를 왜 저질렀겠습니까? 두려움, 기근, 전쟁과 전염병 등의 절박한 사정을 아이들을 바쳐 신의 도움을 받으라는 귀신의 미혹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를 포함한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습니다(요8:31,3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히브리서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새번역)

정체성의 형성과정 중 ‘타인의 인정’이란 요소는 청소년기에 특히 중요합니다(인정철학).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가 어릴 때입니다. 복사로 신부를 도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실수로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화를 내고 빰을 때리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에, 티토(1892-1980)는 울며 성당을 나갔고,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카톨릭을 탄압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폴튼 쉰(1895-1979)은 동일한 실수를 하였지만, 신부는 부드럽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단다. 너는 언젠가 좋은 사제가 될 거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훌륭한 미국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칭찬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보물로 여기면 칭찬은 자연히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시주를 위해 한 집에 들어 가자, 그 집 어린 아들은 부모에게 매맞고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갑자기 그 아이 앞에서 절하고 일어난 뒤, 놀란 부모에게 “이 아이는 장차 정승이 될 것이니 소중히 잘 기르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부모는 아이를 귀히 여기고 양육하였고 후일 그는 정승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스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님의 말입니다: ‘세상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귀히 여기면 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알아맞추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남의 인정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중요한 믿음의 정체성 형성의 기회가 있는데, 신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받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2,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5/2/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디도서 3: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1906년 10월 담임 목사 프레스턴(남장로교)은 남감리회 선교사 저다인을 목포로 초빙, 한 주간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300여 명이 모인 목포 부흥회에 대한 프레스턴의 증언입니다. “그(저다인)를 통해 성령께서 의로움, 절제, 심판, 죄의 악함, 죄를 씻음과 지옥 형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마치 말씀이 수술용 칼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헤쳐 깊은 곳에 감추었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영혼 깊은 곳에 들어 있던 암덩어리 같은 죄악이 드러났습니다. 수십 명이 일어나 자기 영혼을 무겁게 내려 눌렸던 죄를 자백하였고 건장한 사내들이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구주의 자비로운 사랑은 그들을 감쌌고 중생과 회개와 믿음과 헌신과 봉사의 능력과 그리스도인 됨의 기쁨이 치료하는 광선처럼 그들 속에 임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거듭남과 새로운 광명을 얻은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진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가득 찼습니다.”(프레스톤, ‘놀라운 집회’, The Korea Mission Field, 1906. 10월, 228쪽).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보다 3개월 앞서 목포 교인들은 ‘회개→중생→성결’에 이르는 기독교 본질 신앙을 체험하였고, 영적 각성을 통해 윤리적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목포 사회가 갖고 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씻고, 중산층과 지식인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계기였습니다.그러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목포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해 두지만 너희 생활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의롭지 못하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3절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솔로몬은 12절에서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회상하며, 후대의 왕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기술하고, 본절은 그 지혜의 탁월함을 빛과 어둠의 비유로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을 통한 세속적 지혜이며, 죽음 앞에서는 양자가 동일합니다. 솔로몬 역시 세속 지혜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히 2장을 마무리 합니다. 본문은, “어리석음이 미치지 못하는 지혜의 탁월함이 분명히 있다”는 취지입니다. 해 아래에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범사에 많습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과 같이, 지혜는 머리 속에 있는 ‘눈’입니다(14). 이 세상에 놓여 있는 수 많은 위험을 보고 피하며, 대응하고, 치료법을 내놓습니다. 지혜란 눈이 없다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지혜’는 때와 시기를 분별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바른 처신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좋은 예로서, 그의 언행록이 논어입니다. 공자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의 교훈은 ‘인(仁)’ 즉,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克己復禮)’ 사상이 핵심이나, 죄와 사망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반면,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십자가와 부활’에서 가르침의 정점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비할 바 없는 윤리적 지혜(십자가)와 주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부활)을 경험하므로, ‘논어’ 보다 탁월합니다. 생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자 기톨릭에 귀의하고 세상을 떠난 이유입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편119:99).

전도서2:14절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13절은 지혜의 탁월을 밝히고, 본절은 탁월에 대한 강조와 한계를 설정합니다. 전단에서, 지혜자는 미련한 사람과 달리 눈이 세 개나 있습니다. 두 개는 얼굴에 달려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나머지 하나는 머리 속에 있어 사물과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미련한 자는 세 번째 눈, 즉 머리 속에 눈이 없는 ‘지혜의 맹인’으로, 어둠 속에서 헤매입니다. 후단은, 현격한 차이를 갖는 지혜자나 미련한 자나 모두 죽을 운명임을 한탄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은 지혜를 언급하나,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세 가지 유익을 줍니다: (1) 도덕적 차원 :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게 하나, 미련한 자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는데”(잠2:13), 어둠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입니다. (2) 현실의 차원: 지혜는 인생의 길을 볼 수 있게 하는 빛과 같으나, 미련한 자는 어두운 방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성공적인 삶의 방법’(=지혜)을 모릅니다. (3) 영적 차원: 지혜는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여 축복을 받게 하나,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성경적 의미의 지혜자 판정 기준입니다: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②이웃과 화목한가? ③자신의 일에 능숙한가?(잠22:29). 신약에 이르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가 진정한 지혜자인데, 그는 죄사함과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암몬 신 몰렉
예레미야32:35절
“힌놈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세워 몰렉 신에게 그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다. 그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행하여 유다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며 내가 생각한 일도 아니다.”(현대인의성경)

암몬의 신은 밀곰(왕상11:5) 혹은 몰록(왕상11:7), 때로는 몰렉이고도 불렸는데(레18:21), 여기서는 몰렉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몰렉의 어원은 임금이란 의미의 ‘멜렉’과 같은 어원입니다. 몰렉은 바알과 유사한 신으로 암몬뿐 아니라, 베니게, 베니게의 식민지 북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성경은 몰렉 숭배를 넘어, 그 종교적 관습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몰렉의 제사에는 아이들이 희생제물로 바쳐졌습니다(레18:21). 성경은 그런 인신공양의 대가는 죽음임을 선언합니다(레20:2-5). 이렇게 극명한 죄악임에도, 솔로몬은 몰렉을 위한 신전을 예루살렘 성전 바로 옆에 서 있는 감람산에 지어 암몬 여인과 함께 경배했고, 그 몰렉 신전은 300년을 존속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동쪽과 남쪽에 골짜기가 있어 마치 언덕의 형태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그중 동남쪽의 골짜기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지명이 붙었고, 골짜기 가운데 몰렉에게 제사지내는 곳을 ‘도벳’으로 불렀습니다. ‘도벳’은 ‘북’의 뜻을 가진 ‘토프’의 파생어로서, 아이들이 희생제사로 바칠 때 나오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북을 쳤던 것 같습니다. ‘도벳’은 유다 임금 요시야에 의해 파괴되었고, 어떤 사람도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왕하23:10). 정당한 국가권력은 악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여호수아14: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개’란 의미)은 민수기13:6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유대 지파의 대표로서(40세), 40일 동안 적지를 탐지한 용감한 스파이였습니다. 갈렙의 혈통에 관해서는 쟁론이 있습니다. (1)에돔 족장 그나스(창36:11) 후손이라는 설. (2)가나안의 그니스 족속(창15:19)설, (3) 유대지파에 속한 사람의 이름이 그니스였다는 설 등이 있지만, 유대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것으로 보아 정통 유대인으로 판단됩니다. 아마, 그니스 족속의 여자가 조상 중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상 야곱의 12아들의 아내는 요셉만 제외하고 모두 가나안 여인입니다. 갈렙 앞에는 늘 ‘여분네의 아들’이란 수식어가 붙는데, 동명이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갈렙의 명성은 혈통(가문)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처럼, 가나안 정복 시 보여준 충성과 용기 때문입니다. 다만, 갈렙의 영웅적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야훼께서는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킨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갈렙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갈렙의 순종은 믿음의 정체성에서 나왔고,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른 경험(이적)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옳은 일을 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받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히11:33,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5/2/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 4: 31절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새번역)

1903년 광주가 새로운 도청 소재지가 되자 남장로회 선교부는 목포에 있던 벨, 오웬, 변창인과 김윤수를 광주로 보냅니다(1904. 12). 노련한 복음전도자들이 떠나고, 내한한 지 두 달밖에 안된 프레스턴이 목포 선교를 맡게 되자 고민이 컸습니다. 프레스턴의 1905년 선교 보고입니다. “…벨과 오웬 가족이 광주로 떠난 후 목포와 남쪽 지방 사업은 제 몫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다음 주일 저는 처음으로 한국말로 설교했습니다….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설교하였으나, 교인들은 능숙한 선교사의 설교를 듣다가 제 설교를 들으며 ‘이젠 글렀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교인들은 마음의 불안을 씻고자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사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모여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영적으로 각성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고, 지금까지 그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인이 지난 해 보다 배가 늘어(현재 2, 3백 명) 예배당을 확장해야 할  형편입니다”(1905. 9월, 프레스턴). 위기가 기회가 되었으며, 그런 열기는 계속되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보다 3개월 앞서 영적 각성을 통한 윤리적 갱신을 이루면서 호남지역 최초로 교회 자립을 달성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한국 선교는 ‘교회-병원-학교’ 라는 삼각 선교와 네비우스 박사(1890년)의 자치, 자전(自傳), 자립을 중심한 토착화 전략의 열매라 하겠습니다.“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24:6)

전도서2: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전술한 4-10절에서, 사업적 성공과 번창, 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누렸다고 진술하나, 본절에서 그런 삶을 돌아보면서 곰씹고 성찰합니다. 성찰의 결과는 가장 흔한 세 가지 문구 – ‘무의미함, 유익이 없음, 해 아래’-로 표현되며, 매우 부정적입니다. 솔로몬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발견했지만, 그의 탐구 목적인 ‘의미’와 ‘유익’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즉 그는 열심히 일하여 얻은 성과가 영원한 결과를 낳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이 온갖 지혜를 쏟아 만든 성전, 낙성식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하늘의 인정을 받은 그 성전조차 지금 누가 기억합니까? 이와 같은 성찰은 솔로몬을 지혜자로 만들고,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구별시키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자신에게 형과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신 뒤, 탐심의 헛됨을 한 부자의 비유로 알려줍니다. 그 부자는 풍년이 들어 곡식 등으로 재산이 더욱 불어나자 부족한 창고를 탄식합니다. 그는 창고를 넓히려는 생각에 골몰하며, 자신의 부요를 즐거워 하나, 하나님은 부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의 어리석음을 탄식하십니다. 부자는 마땅히 그 재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등 하나님을 부요하도록 만들었어야 합니다. 다만, 솔로몬의 성찰의 지혜는 행함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역시 헛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2: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2:12-23절의 단락은 죽음 앞에서, 지혜(12-17)와 수고(18-23)도 무의미함을 말합니다. “내가 돌이켜”란 어구를 사용하여, 솔로몬은 즐거움과 쾌락으로부터 이미 다룬 지혜와 어리석음의 주제로 돌아갑니다(1:12-18절). 전단에서 지혜, 망령됨, 어리석음 세 낱말이 등장합니다. 통상 성경에서 지혜(호크마)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혜’(시111:10)를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 지혜, 즉 하나님을 배제한 이성의 통찰을 뜻합니다. ‘망령됨’의 뜻은 ‘도에 지나친 상태’  혹은 ‘미친 짓’입니다. ‘어리석음’은 지혜와 대척 관계에 있는 낱말로서, 성경은 영적·도덕적으로 미련하고 악한 행동을 지칭하나, 여기서는 인간의 이성조차 따르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후단은 ‘그 왕의 후계자가 행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엇이 있는가?’(NIV)를 묻고,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보아 솔로몬의 지혜, 권세, 부를 능가하는 왕은 없습니다.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와 권세, 업적을 갖추었으나, 미련한 자의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합니다(15).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 그 자체입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분이 오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켜야 하는데,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믿음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앗수르와 암몬

열왕기상 11:7절
“(솔로몬이)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아브라함의 시대에 바벨론 유역의 4개의 왕국은, 사해 부근의 왕국들(소돔, 고모라 등)이 조공을 중단하자, 1,800km를 원정하였다는 기사처럼(창14장).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간의 항쟁의 역사는 깊습니다. 암몬 왕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습니다.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쟁이 발발합니다. 성경에 언급은 없지만, 아람, 이스라엘, 암몬을 포함한 12개의 가나안 지역 왕국이 연합하여 제국 앗수르(살만에셀 왕 3세)와 싸워 패배한 전쟁으로, 쿠르크 석비(1861년 출토)에 전모가 적혀 있습니다. 그 석비는 북왕국 아합이 2,000대의 병거를, 암몬 임금 루후비의 아들 바아사도 병사를 보냈다고 밝히는데, 그 암몬 임금의 이름은 암몬 연대기 작성의 기초입니다. 120년이 지나서, 앗수르는 아람과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남왕국 유다와 암몬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주전722 경). 디글랏 빌레셀 3세의 기록은, 당시 암몬 임금은 사니푸, 그의 아들은 푸두-일루였고, 암몬의 조공액은 유다의 5분의 1임을 보여줍니다. 암몬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멸망당합니다(주전259년). 최약체인 암몬 왕국은 가증한 우상 몰렉(밀곰)을 믿었으나, 북왕국 이스라엘(주전722년 멸망)이나 남왕국 유다(주전586년) 보다 오래 생존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북왕국은 벌써 주님을 떠났고, 남왕국은 모세율법,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성전을 가졌으나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a).


여호수아14:9절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도박’은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대는 것’이고, ‘투자’는 ‘이익을 얻으려고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으로 정의됩니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도박은 오로지 돈만 벌려고 하는 행태로 도파민 쾌감을 갖게 하지만, 투자는 몰입의 ‘여정’을 즐기게 함으로 게임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둘다 현재에 시간, 돈, 노력을 희생하고 장래의 보답을 받으려는 외형을 갖고 있으나, 차이는 ‘자기 철학’의 존재 여부입니다. 만약 투자에 대한 자기 철학이 없다면 끝까지 도박에 불과합니다. ‘자기 철학’의 핵심은 스토리텔링입니다. 사람은 여정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인천에서 부산을 갈 때, 중간 중간의 휴게소, 경치좋은 곳 등을 감상하고, 함께 탄 가족, 친구들과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산까지 가는 여정을 즐기는 중에 사람은 성장하며, 돈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모든 것-공부,직장,결혼,교육,자녀출산 등-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기복신앙은 과정은 신경 안쓰고 오직 복이라는 보상만 바라기 때문에, 도박에 가깝고.,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신경을 쓰지, 보상은 주님께서 주심을 믿기 때문에 투자에 가깝습니다. 신자의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재생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휼륭한 예가 믿음의 사람 갈렙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1,2 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5/2/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로마서16: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는 로마의 자생적 가정 교회 중 하나인데, 오순절,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의 전도를 듣고 믿은 자들이 로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한 결과로 보여집니다. 목포 지역도 한국인의 자주적 선교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 전, 몇몇 목포 사람은 서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아들였고, 한국인 전도자 변창연은 선교기반을 닦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남장로회 선교부는 1896년 양동에 2,500평 땅의 구입을 시작으로 부지를 계속 넓혀 갔고, 1920년대에 이르면 양동 일대 1만4천여 평을 보유합니다. 양동 땅은 애들이 죽으면 몰래 와서 파묻는 ‘죽은 자의 땅’이라, 선교부는 헐값에 구입하여 언덕 꼭대기에 ‘양관(洋館)’을, 언덕 서쪽에 정명여학교를, 길 건너 서쪽으로 영흥학교(남자)를, 그 아래로 양동교회와 목사 사택을 지었습니다. 동쪽 길 건너 호남동 언덕엔 ‘프렌치병원’과 목포 고등성경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양동 언덕 일대의 ‘선교사촌’은 목포의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버려진 땅’이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물결을 타고 서구 근대화 문명이 목포 시내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쓸모 없어 버려진 목포 양동 땅을 생명과 근대 문명의 발원지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인간 존재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1)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신분상의 변화와, (1)신자 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일어나는 인격 상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전도서2:9절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9절은 솔로몬이 사업과 쾌락의 추구 결과를 요약합니다. 앞의 “창성하여”의 원어는 ‘위대하게 되다’를, 뒤의 ‘창성하니’의 원어는 ‘풍성케 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솔로몬은 사업에서 크게 성공함으로, 부귀와 권세는 풍성하게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라는 표현은 세 번째  나오는데(1:16; 2:7), 솔로몬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강조합니다. 흔히, 성공을 맛보거나 쾌락에 탐익하면 삶의 중심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은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은 그런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말합니다. 솔로몬의 탐구는 창세기에 천지만물을 차근차근 만들어 내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여러 즐거움, 웃음, 술 등으로 쾌락을 시험해 보았고, 집과 포도원을 세우고. 동산, 과원, 삼림을 만들고, 각종 과수와 나무를 심고 못을 파고, 가축을 많게 하고, 남녀 노비를 증가시키고, 노래하는 남녀와 수 많은 처첩 등을 두는 등 사업과 쾌락을 하나 하나 탐구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댜. 결론은, 크게 실망하여,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 고백입니다. 그 반면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자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자아실현을 위한 실험정신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그의 결론은 소중히 간직되야 합니다. “내가 알기에, 살아 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전3:12,쉬운성경)

전도서2: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쾌락주의’(헤도니즘)는 개인의 즐거움과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철학입니다. 쾌락은 인간 본능에 속하여 인간이 무시하기는 어렵지만, 일시적 감정일 뿐입니다. 감정은 사라지면, 더 강렬한 자극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계속적인 쾌락의 삶은, 개인의 발전은 없고 육체적,정신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므로, 쾌락 중심의 삶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지혜자 솔로몬은 결코 쾌락주의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아성취까지 도모합니다. 쾌락과 즐거움은 오직 그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물질적 업적과 쾌락 추구 과정을 요약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도서는 끊임없이 전도자(솔로몬) 자신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일인칭 대명사 ‘나’가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전도자의 자아 의식인 ‘나’라는 자아 존중 사상이, 전도자의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에게 ‘주님을 경외하라’는 지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고(엡2:1-3),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쫓게 되자, 하나님의 뜻은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시하자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자가 되기 전에도 자신의 지혜를 우상화한 자였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2)

역대하12:13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

다윗과 암몬 왕 나하스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을 모욕함으로 다윗과 전쟁하다가 패배하여 속국이 됩니다(삼상10:19).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전쟁과정에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러 주님 앞에 큰 죄를 범합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한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 받지만, 벌을 면제 받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벌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르고, 다윗은 길르앗(암몬과 경계지역)으로 피신합니다. 이때 암몬 왕 나하스의 아들 소비의 도움을 받습니다. 암몬 족속과 다윗 가문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모친에 대하여는 침묵하지만, 다윗의 조카 요압을 스루야의 아들로 소개하면서 단서를 제공합니다. 스루야와 다윗의 아버지는 나하스와 이새로서 서로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복의 관계입니다(삼하17:25; 역상2:16). 스루야의 부친 나하스가 죽자, 나하스의 아내가 이새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다윗으로 추정됩니다. ‘나하스’는 ‘뱀’이란 의미이고, 이미 암몬 왕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기에 다윗의 모친이 암몬 여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다윗의 증조모가 모압 여인 룻이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입니다(룻4:22; 왕상11:1). 성경은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교훈을 버릴 염려 때문에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나, 때때로 순종하는 이방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섭리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디모데전서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김상복 목사님은 「하나님이 꿈꾸신 가정」이란 책에서 “인간관계는 단 한 가지만 훈련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라고 합니다. 그 한 가지란 무엇일까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입니다. 성경은 도처에 모범 사례가 증언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을 반역하여 멀리 떠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세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체포되어 심문과 구타를 당하는 당신을 저주하면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뒤 제일 먼저 찾아가셨고, 사도의 사명까지 재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은혜를 가슴에 담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 사울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하늘에서 당신을 보여주사 사울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각인시켰습니다.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주님의 그 은혜를 갚으려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의 실행은 오직 은혜를 담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당신의 아들을 따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명령은,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 그리고 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매일묵상(2025/2/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 16: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전라도를 선교지로 할당 받은 남장로회는 목포 양동 언덕의 땅 2,500평(51달러)을 구입하였지만(1896.2), 개항장 선정은 지연으로 선교부는 나주에 먼저 설치되었습니다(1897.5). 나주 사람들은 기독교에 배타적이어서 선교부는 3개월 만에  폐지됩니다. 이와 별개로 선교부는 조사 변창연을 보내어, 양동 땅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1897.3). 복음에 대한 반응은 나주보다 좋았습니다. 양동교회는 1년 만에 50명의 신자를 얻고, 1년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7. 10월 마침내 목포가 ‘개항장’으로 공시되자, 선교사 벨과 오웬, 여선교사 스트레퍼가 내려왔고 선교사역은 본격화 되었습니다(1898. 11). 벨이 변창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시작한 것이 목포 양동교회의 태동입니다. 의사 오웬이 진료소를 세우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프렌치병원’의 출발입니다. 스트레퍼가 길거리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의 모태입니다. 교회-병원-학교로 이루어진 삼각 선교 전략의 효과는 컸습니다. 1978년 남장로회 선교부가 땅과 건물을 한국 교회에 이양하고 철수하기까지 목포 양동 선교부는 80년 동안 목포와 남부 섬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선교의 모범적 사례입니다. 복음 속의 진주는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양동 선교부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한국 교회에 제대로 심어 주었다 하겠습니다.“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행20:35,현대인의성경)  

전도서2:7절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솔로몬은 여러 형태로 노비를 소유하였습니다. 통상 노예는 전쟁, 매매, 채무, 혹은 집에서 낳게 하여 획득했습니다. 모세 율법 중 종이 된 동족 이스라엘 사람 대한 규정은 독특합니다. 이들은 6년만 일하고 7년 째는 아내와 함께 해방되지만 자녀들은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출21:4). 집에 낳은 종들은 다른 종들보다 훨씬 주인에게 대접을 받았고 충성심도 컸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낳고 기른 종들(318명)만 인솔하여 조카 롯을 구한 것이 그 예입니다. 후단은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다”고 언급하는데,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소 22,000마리, 양 120,000마리를 제물로 드렸고(왕상8:63), 매일 소 20마리, 양 100마리를 식탁에 올렸다(왕상4:23)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말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왕은 군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규정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신17:16). 요세푸스는 솔로몬 왕이 수천 대의 병거와 이만 마리의 말을 소유했으며, 기병대들과 함께 예담에 있는 자신의 ‘낙원’으로 가서 즐기곤 했다고 하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 율법은 왕은 아내와 군마를 많이 두지 말고, 군마를 사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지도 말라고 규정하였으나(신17:16,17), 그는 무시하였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같이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에 속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시고, 통일왕국을 남북으로 분열시켰습니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언21:30)

전도서2:8절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8절은 ‘은 금..보배’와, 쾌락의 대명사인 명창, 처첩을 논합니다. “나를 위하여 쌓고”의 뜻은 주의해야 합니다. 솔로몬에게 재물과 쾌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무역과 조공을 통해 ‘은,금’을 획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은이 돌같이 흔하였을 정도로(대하1:15), 솔로몬의 금은보화는 막대하였습니다. ‘보배’의 히브리어는 ‘특별히 값나가는 재물’을 의미하는데, ‘보배’ 앞에 ‘왕들이 소유한’과 12지파를 의미하는 ‘여러 지방’이란 문구로 수식되어 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막강한 권세를 표현하지만, 솔로몬의 권력의 핵심에는 그의 탁월한 지혜에 대한 존경심이 놓여 있습니다. ‘솔로몬의 소프트 파워’입니다. 후단의 ‘노래하는 남녀’들은 흥을 위해 궁정 음악을 전담하는 자들의 양성을 말합니다. 예전 인사동에서 명인이 나와 북을 치고 기타 여러 가지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식사한 기억이 납니다. 솔로몬이 많은 신하들과 매일 식사할 때 공연시킨 음악과 무희들의 춤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이요, 첩이 삼백이라’(왕상11:3) 도합 일천 명의 처첩을 두었습니다.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신17:17)는 모세율법은, 이방풍습을 따라 왕권안정을 도모한 솔로몬을 세상적 성공만을 이룬 평범한 왕으로 규정합니다. 솔로몬의 지혜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요소가 사라지자, 그의 지혜는 세상 지혜의 전형은 전락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롯의 자손 암몬
신명기2:19절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암몬(수도 ‘랍바’)은, 제라쉬 같은 고대 유적지나 성경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만 알려졌습니다.  암몬 족속은 롯의 후손이며 얍복 강에서 사해 동편의 아르논 강 지역까지 퍼져 농사짓고 살았으며, 북서 셈어와 문화를 공유하였습니다. 사해와 요단 강 동쪽을 지나는 ‘왕의 대로’가 통과하는 땅이라, 그 지역 경제와 문화적 교류는 활발하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암몬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 두 민족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의 영토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땅 서쪽의 아모리 족속 땅만 정복합니다(신2:19-20). 이것이 내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암몬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모리 족속의 땅은 자신들이 빼앗긴 영토입니다(삿11:13). 영토분쟁은 필연적입니다. 두 민족은 사사시대 초기부터 충돌하였고, 모압 임금 에글론이 암몬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최초의 기룩입니다(삿3:13). 수백년 후 다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길르앗의 큰 용사 입다’가 암몬과 싸워 길르앗 땅을 지킵니다(삿10-11장). 세상의 권리는 항상 분쟁의 여지가 상존합니다. 누가 정당한 권리자일까요? 입다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쫓아내시고 우리에게 주신 땅은 우리 것이다!”(삿11:24). 암몬과 이스라엘은 모두 데라의 후손입니다. 차이는 육신이 아니라 영적이며, 그 기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우영숙 남은영이 한국인 2천명에 대한 설문조사 내용입니다.
「질문 ‘누가 높은 지위와 경제적 부를 가져야 하는가?’  
1. 실적이 많은 사람 2. 많이 노력한 사람 3. 타고난 능력이 많은 사람 4. 자신의 필요에 따라 5.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조사 결과: 58.5%(2번), 24.6%(1번), 5.9%(3번), 4.9%(4번),3.6%(5번)
위 조사는, 한국인들은 노력과 실적을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꼽고, 실적 보다 노력을 더 중시함을 보여 줍니다. 노력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실적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재능과 환경 등 여러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노력과 훈련’은 성공에 얼마나 기여할까?” 잭 램브리 교수는 ‘노력과 훈련’이 성공에 미치는 기여도를 밝혀냈습니다: 게임분야- 26%, 음악- 21%, 스포츠- 18%, 학업-4%, 전문직–1%미만(엔지니어, 축구심판, 영업직 등). 이를 보면, 노력과 공부를 잘 하는 사이에는 거의 관계가 없고, 전문직은 더 심해 성공에 미치는 노력의 영향은 1%라는 아주 미미한 값을 보여줍니다. 타고난 재능과 환경의 중요성에 주목할 때입니다. 김영훈 교수는 「노력의 배신」(2023)에서, 나 자신의 책임에 돌릴 수 없는 ‘운’에 속한 영역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침을 밝히고, 노력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한국 사회를 ‘노력 신봉 공과국’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재능을 발견하여 성장시키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도덕성(정직성) 함양이 중요합니다. 꽃 피운 재능은 정직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선을 낳기 때문입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매일묵상(2025/1/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사도행전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목포는 이별과 한과 눈물과 설움이 스며든 땅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 예로부터 고기 잡고 장사하는 뱃사람들의 터전이었기에, 억양이 높고 발음이 강하다. 목포 사람들은 대개 남쪽섬에서 올라와 정착했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조선 시대에는 목포와 그 남쪽 진도, 무안, 신안, 해남, 강진 땅은 유배지로서, 양반 귀족들의 후손들이 많다. ‘양반 의식’과 ‘정치적 한’이 묘하게 어울려 자존심과 저항을 담은 민중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이덕주, 15,16 요약). ‘나그네 땅’ 목포의 특질을 보여줍니다. 목포는 나주 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은 선교사 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 에리놀즈와 드루가 선교 지역 탐색 차 전라도의 여러 지역을 거쳐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 후, 선창가에서 전도할 때 “서울 남대문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되었다”는 목포 사람을 만난 기록이 그것입니다. 뱃길을 따라 들어온 것이죠!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목포에 정착하는 과정은 복잡했습니다. 개항장 선정 결정의 지연도 그 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지역적 특색과 떨어져 수용되거나 전파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실례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지역을 주로 전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섞여 살고 오랜 역사를 거쳐 자주 침략을 당한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 보다 복음의 수용도가 높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지역에 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2:5절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새번역)

본절은 4절에 이어 솔로몬의 구체적 사업의 면모를 기술합니다. ‘정원’의 원어 ‘깐노트’는 담이나 울타리를 둘러 외부로부터 보호, 격리된 뜰을 의미합니다. ‘과수원’의 원어 ‘파르떼스’는 열매 맺는 과수와 귀한 식물들이 있는 큰 공원 단지를 지칭합니다. ‘정원과 과수원’ 단지를 만든 목적은 솔로몬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습니다. 솔로몬은 그것들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어’ 경제적 유익을 거두면서도, 각종 꽃나무와 향나무를 갖추어 매우 아릅답고, 솔로몬의 창의성이 돋보였을 것입니다. 유홍준 박사는 정원의 돌을 놓는 법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질서의 일본인들은 10 개의 돌 중 9개는 반듯하고, 1개만 자연스럽게 놓고, 개성의 한국인들은 1개만 반듯하고 9개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민족성이 드러나 있다.” 왕 솔로몬과 함께 그곳을 거닐었을 사람들(처첩들, 신하들)의 기쁨과 탄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후단의 ‘온갖 과일나무’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창2:9), 인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였음을 뜻힙니다. 예로부터 왕들과 부자들은 좋은 정원을 조성코자 하였기에, 이 같은 정원을 만든 사람은 솔로몬뿐 아닙니다. 고 구본무 회장도 화담숲을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자연생태계도 보존하고 시민들은 휴식을 누리게 되어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행한 것이라 보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다면 이런 것조차 허망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11).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전도서2:6절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삼림’이란 ‘야아르’의 번역이며, ‘기름지고 무성한 삼림’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을 뜻하는 수목은 각종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여러 귀한 수목들을 포함합니다(5). 제가 20년 전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의 집들은 통상 과일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마트에 맛 있는 과일이 많았으며, 과일은 익어도 수확이 곤란하며, 새와 벌레들이 모이고 잔디에 뗠어지면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풍부한 미국인의 삶을 드러내는 일면이나, 팔레스틴 지역 특히 고대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종 과목은 전쟁 시에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고(신20:19,20), 모세 또한 가나안 땅을 탐지시킬 때 토지의 비옥과 메마른 나무의 유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금의 산업 사외와 달리 농경 사회에는 토지의 후박, 수목의 유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민13:20). 비옥한 토지, 울창한 삼림, 풍성한 열매 등은 물을 요구하는데, 공급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팔레스틴에서 철 따라 내리는 비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 준수와 비의 축복을 결부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레26:4). 비가 순종에 의존하자, 솔로몬은 못들을 파서 자신의 삼림들에 항시 물을 공급해 무성하게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지혜이나, 인간의 성공이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그렇게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제자들은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합니다(시119:99).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두라 유로포스 유적지」
사도행전 9: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주후 1세기 경 다메섹에는 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았고 회당과 교회는 공존하였습니다. 비록다메섹과의 거리는 멀지만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발굴된 ‘두라 유로포스’가 그 증거입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AD257년 사산 왕국에 의해 폐허가 되어 약 1700년 간 잊혀졌으나(AD257), 1920년 참호를 파던 영국군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으나, 주후 2세기 경 건축된 회당과 교회의 유적이 중요합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한 것입니다. 벽면들은 성경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으며, 거리도 가깝고 건축 구조도 유사합니다. 차이 점이라면, 벽화의 내용입니다. 회당 벽화는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예루살렘 성전, 에스더서 등을 표현하였지만, 교회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이 교회는 발굴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라 유라포스’는 박해자 바울의 회심과 그로 인한 복음이 시리아에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난 뒤, 길리기아 다소 성으로 되돌아 갑니다(갈1:15-21;행9:23-30). 바울은 바리새인이요 랍비로서, 이미 구약에 정통한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고 이방 선교를 개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2-24)

에베소서 4: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선과 화평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입니다. 목적은 화평한 의요, 방법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약3:17). 노동자(일꾼, 품꾼)는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과 보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증거’를 지킴이 그 핵심입니다(계14:12). 도성인신 하신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일의 방식은 세상과 뚜렷히 구분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잘못을 숨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행을 숨기고, 잘못은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관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부인하니 인생을 명예, 재산, 권력 등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만물의 주관자를 믿고 알기 때문에, 던져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보상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요5:24), 보상은 하나, 주님의 칭찬입니다(마25:23).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 가족, 친구, 사업 등에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곤 하지만 낙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과 도우심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입니다(마6:11).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란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5:5)

매일묵상(2025/1/13-17)


마태복음 5: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에 가해지는 심한 통증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수 킬로 떨어진 작업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작업량은 많았으며 배급 식량은 적었습니다. 프랭클은 “오늘 밤 무엇을 먹게 될까?” “아껴둔 담배 한 개비로 스푸와 바꿀까?” “다른 작업반에 끼게 되었다가 짐승 같은 감독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억지로 돌려 자신이 불이 환히 켜지고 아늑한 강의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먼 관점에서 보고 말하게 되었고, 그 자신과 그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흥미로운 정신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수용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세상을 볼 때의 과정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때까지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5). 애굽 시위대장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물음을 이끌고, 그 물음은 소망과 신실한 삶을 낳습니다. 빅터 프랭클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요15:9).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전도서2:4절(1)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전도자는 지혜와 쾌락 추구의 조화를 시도하다 무의미를 발견하고(3), 본절부터 “성공을 쫓는 삶”을 묘사하며 그 얻은 결과(허무함)를 토로합니다(4-11). 인생이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도외시 하면 율법의 목적인 ‘이웃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고, 이것은 더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쫒는 삶’ 즉, ‘자아 실현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고상하게 여깁니다. 전도자 역시 쾌락 다음에 시도한 삶이었으나, 큰 성공도 헛됨을 체험합니다(2:11). 솔로몬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는 고백으로 4절을 시작합니다. ‘크게 하였노라’는 대목은 왕 솔로몬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크게 일으켰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표적인 사업은 집들, 포도원, 여러 동산과 과원, 각종 과목을 심고, 못들을 파고, 남녀종들을 얻고, 은금을 축적하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을 많이 둠으로써, 자신의 부, 존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방법 또한 정당해서 자기를 중시 하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성공을 추진하고 성취하였으나, 자신조차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전도서2:4절(2)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솔로몬은 왕궁, 바로의 딸을 위한 건물, 그 밖의 많은 건축물을 지었는데(왕상7:1-8), 스바 여왕의넋을 뺏았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4,5). 솔로몬은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 등도 건축하는 등, 계획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다 건축하였지만(대하8:3-6),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한 노역이 있었음을 볼 때, 솔로몬의 건축 사업은 지나쳤습니다. 결국 ‘중한 노역’은 솔로몬 사후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을 일구며’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 농업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은 먼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며, 잡목이나 돌로 울타리를 만들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짓고, 포도주틀을 만드는 작업 등이 포함됩니다. 대략 10년이 걸리니 쉬운 일은 아니나, 중요한 산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포도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왔습니다(왕상21:3). 왕 아합 시대의 나봇도 애써 좋은 포도원을 가꾸었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탐욕 때문에 죽게 됩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재물과 번영은 좋은 것이나, 나봇과 그 가족의 목숨을 가져갔으니 헛되다 하겠습니다. 솔로몬도 포도원 사업을 성공시켰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많은 포도원들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필요를 넘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죠! 모든 사람은 삶의 기반을 닦아야 하나 그 당위성이 탐욕으로 이끄는 것을 보면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은 달성되어도 삶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의 경제적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하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18:23절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람의 신들 중 ‘하다드’는 구약 시대에 근동지역에 바알처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임금 하닷에셀(하다드는 도움)이나 아합을 괴롭힌 아람 임금 벤하닷(하다드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삿10:6). 고대 근동 지역은 농업사회이므로 비의 신은 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다드는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일반적으로 한 손에는 번개, 다른 손에는 철퇴를 갖고 있으나, 황소의 형상도 자주 발견됩니다. 당시 신화를 보면,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바다의 신 얌(yam)을 이겼으나, 죽음의 신 못(mot)에게 죽자 온 세상은 메마르게 되고, 결국 그를 되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은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 믿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는 바알을 비의 신으로 숭배하였기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하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수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가를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내기를 하였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왕상18장).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전쟁, 영적인 전쟁터로 부르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과 다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느헤미야 13: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979. 12.12 사태는 신군부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며,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엄중합니다. 비시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샤 황제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신군부와는 절차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페르샤 왕의 술관원으로 봉직하다가 유대 땅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는 중 응답받아, 적법하게 유대 총독으로 부임합니다(적법절차). 총독으로 부임 후 많은 반대에 직면하나, 짧은 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은 물론,  모세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확립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고, 토지도 사지 않고(no 축재), 총독의 녹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는 매일 150명이 넘는 많은 동족을 초빙하여 위로하고 민정에 신경을 썼습니다. 경천애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을 욕망하였습니다(13:22절과, 13:31).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소원이 자발적 희생으로 이끈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그 맡은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의 선행을 드러내시고 칭찬하시며 영생으로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을 보상이며, 생명의 부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매일묵상(2025/1/6-10)


고린도전서15: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엘리자베스 로스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로스 의사는 몇 해 전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당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복도에서 청소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유를 몰랐으나, 3주 정도 지나 깨닫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몇 해 전 여섯 아이 중 하나를 잃었습니다. 응급실로 가서 의사가 오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몹씨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 그들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면서 로스는 사랑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보아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로스는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호스피스 환자들과 같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인간이 그 이상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이 있음과 그 영생이 우리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자라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 특히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전도서 2: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1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2절은 그 ‘쾌락’를 ‘웃음’과 ‘희락(=쾌락)’으로 나눈 뒤, 전자는 ‘미친 것’으로 후자는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웃음’과 ‘희락(=쾌락)’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교차해 사용되나, ‘웃음’은 피상적인 기쁨을, ‘희락’은 좀 더 진지한 기쁨을 표시합니다. 이같은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나 즐거움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취지를 말합니다. 잠언은 ‘웃음’과 ‘희락’의 추구가 종종 ‘슬픔’과 ‘근심’을 숨기기 위함임을 지적합니다(잠언14:13). 게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사는 현실도피의 삶이죠! 따라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그 삶에 있는지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의 충고를 따르려면 웃음과 쾌락 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직업을 갖고 우리 손으로 수고한 만큼 벌고 그 한도에서 살려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삶의 기초가 여기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도 당연히 즐거움과 웃음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3:4)고 선언합니다. 다만, 바보와 현자의 경우, 웃고 즐거워 하는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악을 행함으로(부정축채, 더러운 농담 등), 현자는 지혜(선행과 덕을 세움 등)를 행함으로 웃고 즐거워 합니다(잠10:23).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웃음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전도서2:3절(새번역)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자는 삶의 의미 혹은 유익의 원천으로써 쾌락(즐거움)을 구체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작은 가장 감각적인 것, 즉 술입니다. 전도자는 짧은 인생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지 방탕에 몰입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으나, 술과 관련한 실험에서 전도자는 품위를 유지하였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래서, 루폴드는 “전도자는 술을 방탕한 자가 아니라 감정가로서 탐구했다”고 강조하는데, 근거는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개정개혁)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개정개역)라는 표현을 보아 전도자가 술중독은 아니지만, 술에 자신을 맡겨 본 경험은 가져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잠언은 ‘어리석음’을 지혜의 반대로, 전도서에서는 ‘악함’(7:25)의 동의어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이 정의하는 쾌락을 탐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지 보려고 술잔의 바닥까지 비어 본 것입니다. 물론, 그 실험은 무의미로 귀결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삶에 대한 세상의 답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의 상징인 ‘술’에 대한 탐익은 ‘절제’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5:18,새번역).

사도행전13: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층은 출신과 지역이 서로 다른 5명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 레위인이고, 시므온은 흑인인데, 그의 별명이 ‘니게르’(라틴어 ‘검다’)이기 때문입니다. 루기오는 북아프리카(현 리비아 지역) 출신의 로마인으로 보이고,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과 함께 자란 인물로 높은 지위의 귀족입니다. 사울은 튀르키에 남서쪽 다소라는 큰 도시 출신의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들 중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 본격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이 모델을 따라 준비된 일꾼들을 각 나라와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1800년이 지나자 조선에도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겪었던 출신과 신분 사이의 갈등을 함께 겪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해결해 왔습니다. 제1차, 2차 대전을 겪고 비로소 깨달은 앙리 베르그송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법률 보다 상위의 가르침, 즉,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웃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만민을 포용하고 화목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말론적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갈등을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해결한 역사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법의 가장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연동교회의 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갖바치(가죽신 제조) 천민 고찬익(1857)은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중, 선교사 게일에게 전도 받고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일화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그날, 고씨는 꿈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움에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자, 다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에,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에 망나니올시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대답합니다. 그때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고씨의 몸을 치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고씨는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또 읽고 게일을 찾아 갔고,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씨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찬익 贊翼’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1896년 무어 선교사는 천민 거주지인 종로 5가 부근에서 연동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를 맡습니다. 고찬익은 조사로서 갖바치, 백정 등에게 전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습니다. 교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천민 고찬익을 첫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천 이백석 되는 예배당까지 신축하였습니다(1908). 세상을 떠났을 때(1908), “고찬익 장로는 한국에서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게일 선교사)으로 평할 정도로 그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