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1/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3)
데살로니가전서 1: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939년 7월부터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목회’가 시작됨과 함께 새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스크를 벗는 직원들이 늘어났고 애양원 환자들도 그런 직원을 신뢰하였습니다. 나병을 겁 내지 않는 청년 목사는 신사참배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형사에게 연행되어 그의 애양원 목회는 1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형의 만기가 되자 검사는 석방 조건으로 ‘사상 전향’을 요구하였습니다: “덴꼬(轉向)해야 나갈 수 있다.” 그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당신에겐 덴꼬가 문제지만 내게는 ‘신꼬’(信仰)가 문제다” 그의 출소는 8·15 해방 후로 미루어졌습니다. 성결교단에서 존경 받는 이명직 목사님은 성결의 체험(1920년)을 바탕으로 교단에 큰 부흥을 가져 왔으나 신사참배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큰 아들(손동인)이 면회를 왔을 때도 신사참배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손동인은 형사의 설득을 통해 이미 신사참배를 한 뒤였기에,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그의 죽음(순교)으로 이끈 원인이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움직여야 합니다(갈5:6).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붙잡아 주신 그 주님의 온전하심은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전도서 5:14절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새번역)

본절은 ‘부의 불안정성’을 다룹니다. 부자가 힘써 지켰던 재물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방면에서 타격을 입을 것이며, 그 영향은 자식에게까지 미칩니다. 재물을 잃는 원인 중 본절은 ‘재난’을 제시합니다. ‘재난’의 원어는 ‘고통스런 일’이란 의미입니다. 이를 재물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투자’, ‘잘못된 모험’, ‘악한 재난’ 등을 말합니다. 갑자기 강도떼나, 큰 폭풍과 같은 자연 재해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욥의 경우나, 공산주의가 중국과 북한을 점령하여 예기치 않게 모든 재산을 잃은 분들이 그 예입니다. ‘다 잃는다’라고 번역된 ‘아바드’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로써,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재산을 모두 상실했음을 강조합니다. 후단은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로 그 비극적 결과를 표현합니다. 수고는 하지만 상속인이 없는 상황도 문제이나(2:18),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잃어 물려줄 재산이 없는 처지 역시 참담합니다. 재물은 이렇게 불안정하므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한 일에 힘 쓰라는 것이 본절의 교훈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은 자녀들이 복을 받는 비결임을(시편37:26), 바울은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기반)’를 쌓는 길임을 밝힙니다(딤전6:19). 재물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따라서, 노력하되 주님 안에서 노력하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면 이런 교훈들을 간직해야 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전도서 5:15절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본절 서두의 ‘그’는 재산을 모두 상실한 14절의 그 부자를 지칭합니다. 그는 부를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재난을 당하자 그의 수고는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재산 상실보다 더 무서운 사망을 생각합니다. 사망은 전도서 전체에 걸쳐 솔로몬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지금 전도자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1:21a)는 욥기의 시적이며 처절한 고백을, 산문으로 담담하게 재진술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벌거벗은 아기로 이 세상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소유라고 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윽고 성장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같은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은 부자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며, 불공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강자의 결정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그 사람은 더 큰 허무를 절감하게 되니 인생의 큰 역설이 여기 존재합니다.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과 가정을 독립적으로 영위할 정도의 재산은 꼭 필요합니다. 다만, 재산을 모을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인간이 스스로 다스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다가오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뇌물처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늘 마음을 초상집에 두고(전 7:4), 덕을 베풀며 가난한 이웃이 없는지 살펴봅니다 “저가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롭게 들리리로다.”(시편11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가버나움(1)
마태복음 11:23a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 위치한 ‘크파르 나훔’이라는 유적지입니다. ‘크파르 나훔’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을 뜻합니다. 주전 2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나훔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름은 후대에도 이어져 아랍어로 ‘탈훔(=훔의 폐허 언덕)’이라 불려져 왔기 때문에, 1830년대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쉽게 가버나움을 찾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수도사들이 발굴에 착수하여 신약 및 비잔틴 시대의 유적을 발견하였으나, 본격적 발굴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회당, 집터, 그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교회터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가족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고, 가버나움은 선교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곧이어 베드로의 집에 머물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막1:21-29).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과 말씀을 경험한 도시이나,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제자들조차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요 6:66). 가버나움은 상업, 농업, 어업 모두 번창한 국제적 도시였으므로, 사람들은 부유하고 종류 또한 다양해서 영적 무감각과 교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회개와 순종이 없다면, 가버나움처럼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6:1).

그리스도인의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본절에서 ‘범사凡事’의 사전적인 뜻은 “모든 일 혹은 상황”이란 의미입니다. ‘범’은 모두 ‘범’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단의 ‘이것’이란 ‘항상 기뻐하라’(16), ‘쉬지말고 기도하라’(17), ‘범사에 감사하라’(18a)를 모두 지칭하는지, 아니면 ‘범사에 감사하라’만을 지칭하는지 다툼이 있지만, 후자라고 보는 것이 문법상· 문맥상 타당합니다. 그 만큼 감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때 세상적인 여러 감사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사, 즉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제일 중요하고, 또 영원합니다. 이 은혜가 감사의 영적 기원으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자, 당신과 예수 믿는 우리 사이에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더구나,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니 이 보다 더 감사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롬8:31-39). 그래서 성경은 걱정 근심이 되는 모든 것들- 가정, 직장, 자녀, 직업, 재산, 건강, 결혼, 질병 등 -을 주님께 던져 버리라 명령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만유를 아버지께 상속받은 주님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5:7).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주신 근거입니다. 모든 환경에서 주님을 신뢰하면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매일묵상(2025/11/17-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7-2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2)
마태복음 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936년 손양원 전도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당시,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던 분은 김응규 목사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애양원 규칙을 지켰고 행여나 애양원 환자나 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까 감시하여서, 환자들은 그를 ‘김 목사’가 아니라 ‘김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후 바뀐 교회 분위기 때문에 김 목사의 애양원 목회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애양원을 운영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병원을 폐쇄해도 신사참배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노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기에 양자 사이에서 곤란을 느끼던 중 제주도에 교회가 나서 임지를 옮겼던 것입니다. 한편, 손양원 전도사는 교회를, 애양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분을 구하였기에, 더구나 사경회 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청빙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전도사의 나환자 목회는 애양원이 처음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던 상애원이란 나환자 요양원에서 한 달간 봉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겁이 나서 ‘냄새가 안 나게 코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부터 겁없이 환자들을 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국 땅의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학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값없이 받는 은혜의 결과요 후자는 주님을 본받아 섬기려고 하는 우리 노력의 산물입니다. “(천국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전도서5: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자는 세 구절에 걸쳐 부의 문제점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람은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5:10). 둘째, 부유한 사람은 그 부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5:11). 셋째, 부요함은 오히려 불면의 원인이 된다(5:12). 불면의 이유가 걱정이든 소화불량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전도자는 부자가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나 상실의 두려움에 잠 못이룬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는 부유하지 않아도 깊은 잠을 잡니다. 이는 부의 역설로서, “우유를 배달받아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신자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재물이 오히려 평안을 방해할 수 있음을 갈파는 본절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물론 가난도 고통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가난하나 경건한 자’를 말합니다.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가난해도 경건한 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실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붙드시고 항상 돌보아주십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으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축복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잠 못이루지만, 그리스도인은 재산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을 달게 잡니다.” 신앙생활의 은밀한 축복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전도서5: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될 경우 빠지는 함정을 경고합니다: ① 부는 중독적이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10) ②부는 인간 기생충(?)들을 끌어당기나, 그들은 평안을 주지 못한다(11a) ③부는 쓰임이 없을 때, 단지 눈요기일 뿐이다(11b) ④ 부 때문에 부자는 잠 못 이룬다(12) ⑤ 부를 사랑하여 모은 재산은 해를 끼친다(13). 14절과 15절에서는 부의 해악 두 가지- 부의 불안정성과 사망에 따른 무익- 를 더 언급하나, 오늘은 13절의 ‘폐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사랑하여 모아둔 돈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로버트 고디스는 이 문제를 잘 지적합니다: “부를 지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수반한다.” 재물은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자의 돈은 쓰이지 않고 쌓일 뿐이어서, 단지 소유했다는 만족감만 남습니다. 결국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큰 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부자는  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부의 가치 저락, 혹은 강도나 도둑에 대한 근심, 혹은 돈으로 인한 가족 간의 재산다툼, 혹은 빌게이츠처럼 이름을 남기는 데 관심이 커서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형과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도다”(눅12:15)라고 교훈하신 것도 이때문입니다. 아굴의 기도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30: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2)
마태복음 23:2,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회당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세워진 종교 및 공동체 중심지이며,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도와 구약 연구의 장소로 기능하였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회당은 기둥과 벤치 구조를 갖추었고, 회당장이 의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회당은 기도, 예식, 재판, 정치 모임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율법서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가르치셨으며, 사도들도 이 전통을 따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토라는 회당의 높은 단상에서 읽혔고, 강론과 토론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고라신 회당에서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 새겨진 의자가 발견되어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 회당에는 유대 전통과 달리 동물 형상과 메두사 조각 등이 있어 예수님의 고라신에 대한 책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건은 온 유대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더구나 고라신 주민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목격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기적이나 체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4)
에베소서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복음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몸이 하나고, 성령님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으로, 만유의 아버지시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고백이 현실의 삶을 돕고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각 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주나 지식들은 남을 돕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방언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축구 선수가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은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목사의 가르침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사랑으로 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청지기’란 우리의 다섯 번째 정체성입니다(벧전2:10-11). 선한 청지기’는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자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한 일에 능숙해 지고 또 지혜롭게 됩니다(시37:30).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새번역).

매일묵상(2025/11/10-1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교자 손양원 목사
고린도후서 2:15절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새번역)

“(1936년)음력 6월인가 사경회를 하기로 하고 강사를 고르는디…평양신학교에 손양원이란 청년 전도사가 있는디 별명이 ‘손 불덩어리’라고 능력이 많다는 거요. 그래서 그분을 초청해서 사경회를 하게 되었는디 아닌게 아니라 첫날부터 대단했어.”(김수남) 그러나, 손양원 전도사의 행동은 더 큰 화제였습니다. 그 당시 외부 사람은 철저한 검사와 흰가운· 흰 모자· 장갑· 마스크를 하고 눈만 내놓고 애양원에 들어왔으며, 균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오해로 예배당 안조차 유리 칸막이로 환자석과 직원석이 구분되었습니다. 손양원은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나환자들을 구하려면 환자들 속으로 들어가야지 병이 무섭다고 마스크를 한다면 누가 마음 문을 열겠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나환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면, 유리창 안의 흰 옷 입은 사람들에겐 ‘침례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매사가 그렇습니다. 정책이나 메시지가 자신들과 맞으면 감동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잡는 기술자들이 정치가들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오히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전도서 5: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존 록펠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많은 재산을 갖고 계신데 어느 정도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절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무리 부해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나, 그 끝은 허무입니다. 재산은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있습니다. 잠언은 부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긍정적인 측면을, 전도서는 부 자체는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찰합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는 공허를 낳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부는 감사와 나눔의 통로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못하나,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라며 환경을 초월한 만족을 고백하는데, 그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재물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만족을 누릴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참된 만족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경건이며, 경건을 뒷받침하는 자세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교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전도서5:11절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0절은 ‘돈에 대한 사랑’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함을, 11절에서는 부의 증가는 관리 비용을 증가시킬 뿐 소유주의 몫은 지켜보는 것뿐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그 결론은 역시 허무입니다. 부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는 아닙니다. 재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관리와 염려도 함께 커집니다. 주인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하려 하지만, 실제로 누리는 기쁨은 제한적입니다. 이는 지혜와 부를 동시에 가졌던 솔로몬이 체득한 고백이므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교훈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자는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둘러싸여 있고 부가 커지면 이해관계자들은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나 부자가 가장 신경써야할 이해관계자는 그 재산을 맡기신 하나님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재산이 아니라 더 중요한 생명을 빼앗깁니다. 누가복음(12:16-21)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을 크게 짓고 안심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을 때 재물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재산은 인격 만큼만 가지라”고 하는데, 저는 노력한 만큼 벌고 생활하는 자족의 삶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재물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신 것을 감사히 누릴 줄 알 때, 재물은 허무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재물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과 감사의 삶을 배우라는 교훈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고라신(1)
누가복음 10: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동북쪽으로 약 3.2㎞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가버나움·벳새다와 함께 ‘복음의 삼각지역’ 혹은 ‘저주의 삼각지대’로 불립니다. 1962~64년 발굴된 유적은 주후 3~4세기경 현무암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며, 도시 면적은 약 10만㎡에 달합니다. 재료는 갈릴리 지역에서 흔한 화산석 현무암입니다. 중심 회당을 기준으로 5구역으로 나뉘었고, 유대인의 정결례 장소인 미크베가 발견되어 유대인 거주지였음을 보여줍니다. 유적지 도처에서 발견되는 올리브기름 압착 돌은 고라신 사회에서 올리브 기름이 차지한 경제적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발굴된 회당은 갈릴리 전형 양식으로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구조입니다. 세 개의 입구 중 중앙이 가장 크고, 벽면에는 돌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회당은 주후 4세기에 파괴 후 6세기에 재건되었습니다. 고라신의 유적은 화려한 종교적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 “저주의 도시”로 기억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에 기록된 많은 이적을 베풀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으나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회개와 순종에 있습니다. 많은 은혜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책임이 무겁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경고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3)
에베소서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도 한 분이시며, 그분에 의해 형성되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부활이란 의의 소망을 향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정체성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인도하다’는 헬라어 ‘아고’의 번역입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맡은 베뢰아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아고) 아덴까지”(행17:15) 갔을 때의 묘사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신자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신자에게는 ‘선한 자(의인)가 받는 생명의 부활’(요5:29)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성령님이 중생시키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롬8:7,8).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고 죄사함 받은 표징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이란 자기중심성을 이겨나갑니다(롬8: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들”(롬8:14)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인도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가르침, 교제, 돌보심, 도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므로” 이미 율법을 성취하였습니다(롬13:8-10).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나, 사랑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물론 네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를 도와라”(엡4;28)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모세율법은 불필요 합니다(갈5:18).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후단,사역).

매일묵상(2025/11/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왕의 무덤
마가복음10:45절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새번역)

애양원은 자치였고, 원장이 2명, 환자들이 3명을 뽑은 ‘부장(部長)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치료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 애양원에 관한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많을 때는 수용 인원이 1,700명에 이르러 각종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부장회가 소집되어 일을 처리했으며, 자체 화폐까지 유통하였으니 ‘애양원 공화국’이라 하겠습니다. 선출된 부장들은 신앙이나 인품 면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어서 그 권위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수석 부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수석 부장을 역임한 인물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맹인 김태옥 장로입니다. 이분은 1909년 광주나병원이 개설됐을 때 들어온 최초 환자의 한 사람이었고, 애양원교회 장로요 ‘부장들의 우두머리’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선교사들도 ‘성경을 줄줄 외우는’그를 존경했습니다. 1939년 별세하자 윌슨 원장은 그를 ‘애양원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며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가 본 무덤은 무연고자의 무덤이었으며, 건너편 손양원 목사의 무덤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왕은 무슨 왕···, 종이었을 따름이지”(이덕주). 생각해 보면, 나병환자요 맹인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만, 김태옥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며,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전도서 5: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본절은 새 주제를 성찰합니다. 빈민을 억압하고 정의를 짓밟는 학대와 강탈은 삶의 허무를 키우며, 이는 불공정한 판결과 비도덕을 드러냅니다. 주 대상은 빈민으로 표현된 약자들입니다. ‘빈민’이란 ‘라쉬’의 번역으로 돈이 없고 재산이 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9절을 함께 고려하면 ‘가난한 농민’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4:1-3절에서 압제받는 자들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압제를 목격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근거는 세 단계의 심판자들의 존재입니다: 높은 자, 더 높은 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 이 말은 관료체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도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악을 행하는 관리, 그를 감찰하는 왕, 그 왕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장엄복수)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인간 제도의 한계를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라는 의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 역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자 “의인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답변을 받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1-8). 주님은 불의를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심을 단언하신 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결실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13:2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전도서5:9절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절은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존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곧, 땅의 소산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입니다. 전도자가 언급한 ‘빈민에 대한 학대’(8)는, 종종 토지의 불법 점유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23:10–11에서 경계석을 옮기는 자에 대한 경고는, 당시 사회에서 토지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기반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를 보장하고 경작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누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쟁기질한 밭을 위한 왕”이라는 속담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하 21장)은 권력 남용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전도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만으로는 타락한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제빵업자의 도덕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내일 아침의 빵을 보장한다’고 갈파하여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임을 밝혔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기심 때문에 병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때, 성경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방향을 교정하는 윤리적 나침반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20장)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담았는데, 이 교훈을 깨닫고 이기심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습니다(시편119:99).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마태복음 11:21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구약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00 경)에 기록된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의 주요 도시로 판단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13:13). 400년 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습니다(삼하3:3). 압살롬은 모친을 따라서 딸을 마아가로 짓고,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아사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세라 목상 때문에 아사에게 폐위당하는데, 그술 출신인 할머니로부터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한 것이 분명합니다(왕상15:6). 한편, 벳새다는 앗수르에게 함락되었는데(BC732), 화재로 불탄 흔적이 그대로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 중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특이합니다. 이 석상은 주상으로 한 쪽 면에는 두 뿔이 달린 황소가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을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 하다드로 봅니다. 벳새다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하다가 헤롯 빌립 당시에 번성하였으나 AD 70년 로마에게 멸망당합니다. 우상숭배는 뿌리뽑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계산으로 율법이 금지한 가나안 땅 내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 우상숭배의 단초를 만들자, “삼사 대까지 벌하겠다”(출20:5)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계명은 작동합니다. 그 결과 솔로몬 때(2대) 우상숭배는 확장되고 르호보암 때(3대) 나라는 분열되었으니,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에베소서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람들의 견해와 상관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은 늘 존재하였으나, 유럽인들은 15세기에나 알게 됩니다. 그 후 이들은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문명을 이루었지만, 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막상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시인 오인태의 ‘밥상머리 인문학”을 읽으면 그도 역시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면 그들의 모임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고통을 극한까지 참아내고,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연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이 그 전형입니다. 기도는 당연히 없고,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초인이나 초능력을 불러와서 신이 없이도- 만약 있다면 신을 마음대로 부려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전제가 인간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원죄입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청지기직을 벗어 던지고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태도이며,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이는 국립공원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문제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영원한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마귀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란 진리는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매일묵상(2025/10/27-3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가나안 복지되다!
마태복음25: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애양원은 남자부와 여자부 마을을 조성하여 각기 모여 살게 하였으나, 젊은 환자들 간에는 ‘풍속 관련’ 범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남녀 환자들의 ‘결혼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단종 수술을 받은 후, 남녀환자를 짝짓고 어린 아이 한 명을 붙여, 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후 가정촌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점점 확대되어 1976년 선교부는 선교부 땅 14만평을 위에 정착촌을 건설합니다. 은성동, 다윗촌, 도성촌과 인사동 마을이 그것으로 불모의 땅이 가나안 복지로 탈바꿈했다 하겠습니다. 70년 넘게 여자부 돌집에 살고 있는 김수남 권사의 증언입니다(1999년). “우월손 원장님은 공주서 농촌사업 허는 사람 데려다 우리헌티 농사 짓넌 벱과 퇴끼, 도야지 기를 벱을 가르쳐 주시고…전구 다마를 가져와서는 양말 기워 신으라 허시고… 한 번은 감나무 묘목을 싣고 와서 나눠 심었는디 이 근방 단감나무는 모다 그때 심은 게요. 그런께 황무지 같던 이곳이 가나안 복지가 되었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결혼 사업, 정착촌 조성, 농업 교육 등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흔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는 말씀을 오해하여 더 나은 삶과 소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단의 사정이 없다면 사회통상의 소득은 확보되어야 사랑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롬13:8).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기도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마6:10,쉬운성경).

전도서 5:6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본절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경히 여겨 실수라고 변명하며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수사의문문). ‘사자’란 천사, 제사장, 하나님, 혹은 서원을 듣고 기록하는 직책의 사람 등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제사장’이란 해석이 타당합니다(말2:7). ‘네 목소리’는 서원을 실수라고 변명하는 말을 뜻하며, ‘너의 핑계(변명)’로 의역됩니다.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즉, 재난, 실패, 질병 따위로 그 사람이 성취한 사업, 재물, 성공이나 어떤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원하여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합당한 징벌의 범위에서 그 사람의 것을 가져가신다는 의미도 가능합니다. 토마스로드 침례교회의 한 신자가 제리 파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 작정한 헌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두 소급하여 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모저모로 당신의 작정한 부분을 다 거두어 가셨으니, 다음부터 내시면 됩니다.” 법관이 사건을 맡았으면 공의롭게 판결을 내려 갈등을 해소하든지 범죄에 합당한 벌을 선언합니다. 하물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우시겠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하여 서원을 했으면 갚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면으로든 유익합니다. 사정이 있는 경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다짐과 함께 이행바랍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귀한 보배는 지각 있게 말하는 입이다.”(잠언20:15,새번역)

전도서 5:7절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허무 극복의 유일한 방법으로 전제하며, 단락 5:1-7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사(or 예배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서원과 그 이행입니다. 제사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야 하고, 서원은 신중하게 따져서 약속하되 반드시 이행하라는 경고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경건한 삶)의 한 부분이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란 서론적 명령으로 시작해서,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는 결론적 명령으로 끝맺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이 감사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태도가 삶의 근간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사명을 이루는데 골몰합니다. 세상을 짓누르는 인생의 허무, 절망, 회의 따위는 결코 우리 마음에 머무를 틈이 없습니다. 실로, 구속받은 신자의 삶 속에는 이사야 35: 10절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만약 삶의 문제가 닥치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빌4:6,7)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요한복음 1: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839년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어부의 집’이란 벳새다의 이름에 비추어,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서 보다 해변가에 위치한 현재 엘-아라즈(el-Araz)를 벳새다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최근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라미 아라브(Rami Arav)의 발굴을 통해 엣-텔 지역이 벳새다로 입증되었습니다. 엣-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와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셨으며(막 8:22),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지만(눅 9:10-17),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마 11:21). 표적(이적)이 반드시 믿음을 만들지는 못하나, 성경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표적(이적)은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모든 표적(이적)의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이며, 영생에 대한 우리 믿음의 실체적 근거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14:11,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1)
에베소서4:6절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인태의 시: 「달력을 걸며」 – “또, 깎아 곶감 한 줄 달다”

오 시인에게 영향을 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어머니는 밥상에 차려내는 음식으로, 아버지는 그 밥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한번도 밥상 앞에서 반찬투정을 하거나 어머니를 핀잔하지 않으셨고, 훈계조로 자식들을 나무라거나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식구 누구도 꼭 찍어 타박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인태의 인생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불필요하지요! 따라서, 시인 오인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한편, 오인태 시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할 때 그 시작은 부모입니다. 그 위는 조부모이지만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오직 부모의 전승을 듣고 사진을 보면서 믿을 뿐입니다. 5대조 이상은 족보의 기록만 믿고 있을 것이나, 족보는 틀려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증언과 천지만물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없는오인태 시인은 반성과 후회만이 있지 죄사함과 영생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표지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매일묵상(2025/10/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소록도와 애양원의 차이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조선 총독부가 운영하던 소록도 나병원(1916년 창립)처럼, 애양원도 철조망과 감시 초소를 세우는 등 삼엄한 경비와 통제가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배병심 장로의 증언입니다. “소록도에서는 환자들이 죽어도 나가야겠다며 탈출하다가 죽은 사람이 허다했는디 애양원에서는 반대로 죽어도 안나겠다고 버쳤다는 것 아니요? 소록도에서는 당국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환자들이 항의하여 폭력 시위를 종종 벌였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애양원에서 제일 큰 벌은 퇴소명령이라. 환자들은 이곳에서 쫓겨날까 봐 겁을 냈다잖여?” 이처럼 애양원이 ‘나환자천국’이 된 데는 이곳 의사와 직원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선교사들이 취한 자립과 자활 정책도 중요했는데, 선교부는 치료를 넘어 자립 생활인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애양원은 치료가 끝난 환자 중에서 의사와 간호사 직원을 뽑아 진료와 행정 사무를 맡겼습니다. 이런 조치는 나환자들의 자존감과 사회적 회복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수십 만평의 땅을 준비하여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은 직접 농사에 참여, 일한 만큼 소득을 얻게 하였고 소득도 높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많은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셨으나, 자립은 각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승천 후 교회는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고, 2천년의 유산을 이어받은 광주선교부는 애양원을 세워 나환자들의 치료는 물론, 자립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영적인 삶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5:4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인생의 허무는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으로 첫째 예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와 기도입니다(1-3). 둘째 예는 서원이며 전도자는 교훈 3개를 말합니다(4-6). ‘서원’이란 히브리어 ‘나다르’의 번역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한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서원(삼상1:11)이 좋은 예입니다. ‘맹세’는 ‘샤바’의 번역이며 ‘하나님 혹은 사람 앞에서 진실을 담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창21:31)이 그렇습니다. 본절은 ‘서원하였으면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서원을 한 뒤 속히 이행하지 않으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전도자는 그를 ‘우매한 자’로 정의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자와 같이 취급합니다(5:1). 모범 사례는 한나입니다. 브닌나의 멸시를 받은 한나는 자녀를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눈물어린 서원을 하였고, 사무엘을 주시자 그 약속을 지켜 성막봉사를 위해 드렸습니다. 성막봉사는 레위인만 가능합니다만, 사무엘은 그핫 자손으로 레위인입니다. 따라서, 한나의 서원은 신중했고, 그 이행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경우처럼 살다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서원이 필요하고, 그 자체가 경건한 삶의 하나입니다. 시편 116: 1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공동체 앞에서 서원을 지키는 신실함을 선포하는데 좋은 본보기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시편116:18).

전도서 5:5절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민수기는 하나님께 서원하면 반드시 갚으라고 규정합니다(민30:2). 이에 따라 전도자는 서원은, “갚기를 더디말라”(4절)고 한 뒤, “서원하고 갚지 않는다면, 아예 서원하지 말라”(5절)고 교훈합니다. 기도할 때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본 뒤, 혹은 감정에 북받쳐 즉흥적으로 서원을 하고는 이행이 없다면 죄를 얻게 됩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열린 민족대복음화대성회 시, 은혜에 감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서원을 하였지만, 그 서원을 이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신실한 일본인 신자가 있습니다. 임상병리학자 기무라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 방치된 네팔 한센환자의 참담한 사진을 보자, 그 자리에서 의사가 되어 이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 30년이 흐르면서 그는 임상병리학의 석학이 되었으나 어린 시절 약속은 분주함 속에 묻혀졌습니다. 어느 날 ‘해부병리학자를 구한다’는 간곡한 호소의 편지가 네팔에서 전 세계로 발송되었고 일본에도 도착하여, 부인이 받았습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그 소식지를 전하면서 “이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부인 수니타 여사는 말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이미 대학으로부터 종신교수 청빙을 받아 놓았으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집 한 칸 없었지만, 사재를 털어 병리학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7년 동안 네팔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많은 임상병리학 공헌을 한 뒤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종신교수직’이고 얻은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2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2)
전도서 1:11절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새번역)

나사렛 인근의 유적지 찌포리는 로마에 협력하여(AD66) 번성하였으나, 완전히 로마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동전으로 사람이나 신이 아닌 식물 문양이 새겨져 유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바르 코크바 반란(AD 135)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갈릴리 유대인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고, 랍비 유다 하나시도 이주하여 미쉬나를 편집하였습니다. 지진으로 일시적으로 파괴된 적도 있으나, 유대인·로마인·기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찌포리의 부유함은 ‘갈릴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모자이크가 있는 로마 빌라에서 확인됩니다. 주후 200년경 건축된 이 빌라는 연회 공간과 디오니소스, 판, 헬라클레스가 등장하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비너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유대인의 흔적도 풍부하게 발견됩니다. 자갈길 위 낙서, 정결례탕 ‘미크베’, 성전 촛대 그림 등이 있으며, 5세기경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는 제사 장면과 함께 헬리오스와 황동 12궁도가 묘사되어 유대교에 미친 로마 문화의 영향을 알게 합니다. 한편,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면서 유대교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 찌포리는 고고학적 유적지일 뿐, 현대 도시로서의 찌포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뿐으로 지금 세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 양 예수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는 용사들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전도서 7:13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새번역)

시인 오인태(1962~)의 시‘인생’입니다.
  “
밥술 뜨다 뜨리라”

그의 인생입니다: “나는 진학도 진로도 내 원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교대에 들어간 건 그때로서는 등록금이 가장 싼 교대 외엔 대학 갈 형편이 못 되었던 까닭이 컸다. 교대를 나와 저절로 교사가 되었고,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학위도 받고 모교에서 시간 강사도 했다. 그러나 교육 전문직 공채에 응시해서 장학사도 하고, 교육 연구사를 겨쳐 교육 연구관을 지낸 끝에 지금은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교직에 들어와서 해 볼 건 다 해 본 셈이다. 그러나 어떤 성취나 직위를 위해 목을 맨 적은 없었다. 살다 보니 어떻게든 된 것일 뿐. 여러 단체에 참가하면서 소신껏 발언하며 살아왔다. …..사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자산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자부심이다.…..살아오면서 어떤 갈림길에 썼을 때 늘 선택의 기준은 이 길을 가면 시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분의 정체성은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보다는 난독증·난서증 등의 문제를 갖고 괴로워 하는 학생을 조기발견하여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세워주는 교직이 더 낫다고 보입니다. 그 만큼 교직은 하나님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들 -난독증, 난서증 등 -을 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영혼이 자기중심으로 구부려진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하는 복음의 제사장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5:14,새번역).  

매일묵상(2025/10/13-1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병원
열왕기하5: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911년 광주나병원으로 시작된 여수애양병원은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추고 정형외과, 내과, 피부과 등 다양한 진료과를 통해 많은 외래 환자 또한 받고 있습니다. 또한 병원은 한센병 환자와 일반 장애인을 대상으로 치료와 재활을 통해 복음을 전도하고 영혼구원이 그 설립목적이기에, 전인적 치유사역은 그 핵심입니다. 1970년대 이후 나환자 수는 급격히 줄었고, 그에 따라 병원의 관심은 한센병 기형 환자와 소아마비 환자를 거쳐 인공관절 수술 환자로 확대되었습니다. 토플 원장이 무릎 인공관절 수술에 성공한 이후(1973년), 병원은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였고 비용도 상당히 저렴합니다. 과거에는 공기로 전염된다는 오해까지 받아 환자들이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나병의 진단과 격리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문둥병, 나병, 한센병으로 명칭이 변화해왔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디디에스와 푸르토밍 같은 신약이 개발되면서 완치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병은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할 수 있는 병으로 여겨졌던 시절, 그 치유는 선지자나 메시야의 권위를 입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나아만을 고친 엘리사와 많은 나환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예수께서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우리에게서 고난은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면 구원을 경험하고 믿음은 큰 담력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전도서 5: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1절이 경청과 순종을 강조했다면, 2절은 경솔한 말과 기도를 경계합니다.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반영이며,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는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뜻을 헤아린 뒤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생활입니다. 왜 사람들은 부주의한 말을 쏟아낼까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은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박함이 경솔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의 원어는 ‘성급하다’는 뜻이고, “급한 마음으로”는 ‘빠르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는 이 두 동사를 겹쳐 사용하여, 쫓기듯 서두르는 기도의 자세가 문제의 원인임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 그분의 뜻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면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서원과 요청이 없어도 이미 우리 부엌은 필수품으로 가득 채워짐을 경험합니다(눅12:29,30). 이런 신뢰와 경험은 우리로 말을 절제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서원할 때도 깊이 생각한 뒤 지킬 수 있는 말만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위해 어리석은 서원을 했고,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것, 그것이 입다 비극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전도서 5:3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2절은 주님을 경외하는 한 사례로서 바른 기도 생활을 제시하고, 3절은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던 경구를 덧붙여 마무리 합니다. 3절은 독립된 평행 대구 구조로서, 다음은 직역입니다: (a) ‘그러므로 그 꿈이 생긴다’ (b) ‘일이 많으면’, (a’) ‘그리고 우매자의 소리’ (b’) ‘말들이 많으면.’ 먼저 전단을 보면,  ‘일이 많으면’은 지나치게 욕심을 추구하는 상황을, ‘꿈이 생긴다’는 비현실적인 망상 혹은 모든 일의 덧없음을 표현합니다. 후단의 경우, ‘말들이 많으면’을 통해 ‘일’과 대비되는 ‘말들’을 강조하고, 그 결과 ‘꿈이 생기듯’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남을 교훈합니다. ‘우매자의 소리’는 ‘꿈’과 같이 ‘헛된 말들’을 뜻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만유의 통치자 되신 하나님 면전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그분이 선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지만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동의적 표현을 대구법으로 거듭 강조한 이 경구를 통해, 생각 없이 욕심과 말만 많으면 어리석은 자의 허황된 소리로 귀결됨을 경고합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경구이며, 멋진 글솜씨입니다. 욥은 닥친 고난이 중하자,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과 항변을 하고, 친구들과도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자 자신의 무지를 회개합니다(욥42:3-6). 의로운 욥도 그러한데,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스려 말을 적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1)
요한복음 1: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찌포리 남동쪽 약 6km에 위치한 작은 유대인 마을이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 찌포리를 잘 아셨고, 부친 요셉과 함께 목수(건축가)로서 찌포리의 건축에도 참여하셨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주후 1세기 찌포리는 매우 번성한 도시로서,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의 고향이란 전승도 있으나 신구약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전 37년 헤롯 대왕은 눈보라를 뚫고 도시를 점령하여 로마에 바쳤습니다. 주전 4년 헤롯이 죽자 찌포리의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전멸 당하고, 로마군은 찌포리에서 사마리아까지 약 50km의 로마식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찌포리를 한 때 수도로 삼고 ‘갈릴리의 보석’이라 불렀습니다. 주후 66년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찌포리 주민들은 오히려 성문을 열고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을 환영하여, 그 도시는 보존되었고, 유대인들의 흔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유대교의 위상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찌포리는 세속적으로는 그토록 번성하였지만 성경에 그 지명조차 등장하지 않고, 천시받은 나사렛은 ‘나사렛 예수’처럼 세세토록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주민 중에는 오직 예수님의 가족들만 기억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메시야 예수를 배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즉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 수단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무엇이 당신의 박스에 담겨 있습니까?
누가복음 4: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2018년 작고한 밥 버포드(Bob Buford)는 미디어 사업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둘 때, 삶은 의미로 채워지고 성공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었음을 고백합니다. 40대 중반,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뛰어난 컨설턴트인 마이크 가미를 만나 진로를 상담하는 중, “당신의 박스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라는 가미의 질문에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그는 큰 수익이 예상되는 사업기회를 접하게 되었고,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그 사업과 관련된 사무소장이자 자신의 이전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밥이 자신의 기업가적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고 그 사업에 관해 말하자, 상대는 “당신은 지금 유혹의 산꼭대기에 서 있습니다”라며 경고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밥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을 받는 장면을 읽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그 사업은 밥이 전혀 모르는 분야로, 수익의 핵심은 절세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비즈니스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면의 음성은 “네가 아는 것에 붙어 있으라”고 말했고, 그는 결국 그 사업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밥은 그 선택을 단순한 손실이나 승리로 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를 되새기게 한 초월적 경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공을 위해 균형을 잃지 말라”는 그의 교훈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 “신앙과 삶의 중심”을 지키라는 자족의 교훈과 닿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눅4:12).

매일묵상(2025/9/29-10/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잠언 22:2절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옛날 조선시대 유서 깊은 고을 어귀엔 어김없이 그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선정비와 공덕비가 줄지어 있듯, 애양원 입구에도 화강암 비석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애양원 설립의 계기를 만들어 준 포사이드 선교사, 초대 원장 윌슨과 그를 이은 보이어와 토플 원장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 포사이드와 윌슨 것은 모양이나 크기가 같습니다. 광주에 있던 나환자들이 동냥을 해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석을 세운 날짜가 똑같이 1926년 11월 13일로 광주나병원이 철수 명령을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나환자들은 이 비석을 세운 직후 여수 신풍리 애양원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작하였고 그때 비석도 함께 왔습니다. 보이어의 것은 1965년 9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들어갈 때, 토플 것은 1981년 한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난 이듬해 세웠습니다. 애양원 입구의 네 비석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며, 포사이드, 윌슨, 보이어, 토플 네 분에 대한 나환자들의 깊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인류애로 아프리카를 섬겼듯,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나환자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차이를 작게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섬김의 동기가 하늘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영원한 비석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전도서 5:1절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5장의 주제는 두 개이며, ‘언어와 예배’(1-7)와 ‘해 아래 세상’(8-20)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주지이므로 무심히 접근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 말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러면 가나안 땅에 계속 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렘7:1-4). 신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을 바치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가야합니다. ‘희생제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을 침묵시키려는 의도’가 문제입니다. 전도자는 그런 피상적인 예배의 위험성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40:6절 후단,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셨나이다” 라는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 어려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피터슨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경청해야 하나 경청하는 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하나님은 곡갱이와 삽을 들고 두개골의 화강암을 파내어 안에 깊숙이 있는 생각과 마음에 접근할 통로를 여신다….그 결과는 성경의 회복이며, “눈은 귀로 변한다.” 이런 경청은 통상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은혜의 방편’ 중 하나로서, 예배 중 하나님이 지혜를 가르치시며 바로 그때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새번역).

전도서 5:1절 (2)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바보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로서,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머피). 어리석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이 필요하여 잠언에는 ‘책망’이란 단어가 12번 등장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솔로몬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구약의 지혜는 구약의 율법과 상통합니다.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율법을 읽고 가르침으로써 받을 교훈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핑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듣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본절은 성전의 이중적 기능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율법과 그 율법을 통해 제사장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브리젠은, “야훼께서 어떤 장소에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이는 사실 항상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행해진다. … 그분의 임재로 영원히 거룩해진 성전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거듭거듭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요4:24)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예배공동체’(고전3:16)와 ‘신자의 몸’(6:19)이라는 영적 성전에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공동체가 성전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며, 그 지침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베이트 쉐아림의 공동묘지
마태복음 27:52,53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의 ‘베이트 쉐아림’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반란으로 황폐하였습니다. 가장 큰 유적지는 유대인 공동묘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2002).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서 미쉬나를 편집하다가 묻혔는데, 실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유대교 전통에서는 메시야가 재림할 장소로서 그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은 경건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는 사회적 인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쉐아림’을 공동묘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30여 개의 무덤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과 함께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이 발견됐습니다. 이들의 믿음대로 메시야가 과연 왔고 죽은 많은 성도들이 부활한 바 있음을 본절은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만 고집하였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이들은 모세오경의 저자인 부활한 모세와 다투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창세기 32: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본문은 에서를 두려워 하여 야곱이 드린 기도 중 감사의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강성갑 목사님은 기독교 농촌교육을 실현하고자 한얼 중학교를 세웠습니다(1948).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갔던 30살의 김형석 선생은 그 학교를 방문한 뒤 힘껏 도우리라 다짐하고 잠들었습니다(1950.8.1). 그날 밤 꿈에 평양에 있던 여동생이 나타나서 “오빠,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곧 떠나셔야 합니다.”라고 또렸이 말했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김선생은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후 떠났습니다. 그때는 다시 걸음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소위 “김해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군이 명령한 불순분자 색출에 따라 강성갑 목사님 등 양민 200여명이 총살되었습니다. 김교수님은 회상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은 참 가슴아프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신 것에 대하여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건을 겪다 보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내 마음대로, 내 뜻으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움직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자랑할 것이 없고, 또 상실하였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매일묵상(2025/9/22 – 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시편 84: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920년 대 나환자의 수는 6백여 명에 이르자, 광주나병원의 소재지 봉선리는 비좁았습니다. 더구나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선교부는 나병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수반도에 위치한 율촌면 신풍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진집사의 설명입니다. “일제시대 간척 사업을 혀서 지금은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더만요….애장살이라 혀서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이었응께 헐값에 땅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1927년 20만 평이 넘는 신풍리 땅을 확보한 후 2년에 걸쳐 은밀히 병원과 환자를 옮겼는데, 여수나 순천 사람들이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순천(or 여수)나병원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5년 명칭 공모 결과 ‘애양원(愛養院)’이라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요양원’으로 해방 후에는 ‘윌슨요양원’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가난과 질병을 축복이라고 하겠습니까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눅6:20)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질병·고통 등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살다보면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런 삶 자체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하물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 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전도서 4:15절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된 그를 따랐다.”(쉬운성경)

13절, 14절, 15절은 각각 다른 왕을 언급합니다. 13절은 늙고 어리석은 왕, 14절은 가난하나 지혜로워 그 왕을 대체한 젊은 왕, 15절은 그 젊은 왕을 대신한 세 번째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본절의 요점은 14절의 젊은이가 어리석은 늙은 왕을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나 단명하였고, 두 번째 젊은이가 그를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왕에게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장기집권과 혈육에 의한 계승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조선 문종은 젊고 지혜로워 세종 말기 8년을 섭정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어린 단종(11살)을 신하들에게 부탁하나,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세조입니다. 그의 13년 간의 통치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조선의 법치 기반을 마련했지만, 즉위 과정에서의 정변과 조카 단종의 죽음 등은 역사적 논란을 남겼습니다. 또한, 북왕국 최초의 왕 여로보암의 22년 간의 통치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는 열왕기 기자의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후 아들 나답이 계승하나 통치 2년만에 신하 바아사에 죽임을 당합니다(BC 900). 북왕국의 역사 200년은 그야말로 정변의 역사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던져 주사 철저히 파멸케 하신다”고까지 묘사하였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편62:11).

전도서 4:16절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무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후의 세대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쉬운성경)

13~16절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5절에 등장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를 따랐는데, 그는 13~14절의 지혜로운 젊은이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 지혜로운 젊은이는 낮은 신분에서 왕위에 오른 자로, 13절의 늙고 어리석은 왕을 대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언급된 이 인기 있는 왕조차도 결국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솔로몬이 허무를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왕이 되는 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 권력은 사람의 인기가 바탕인데, 그 인기는 바람과 같습니다. 한 번 불면 대단하나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집니다. 권력을 쫓는 것은 그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노년, 지혜, 인기와 함께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도 똑 같아서,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던 자를 곧 싫증내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처럼, ‘오늘은 호산나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왕들이 자신이 기쁘게 하려 애썼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도, 변함없는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늘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유대인의 도시 베이트 쉐아림
로마서 10:2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탈무드는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으로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이 집대성된 문서 ‘미쉬나’(AD200년)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오경과 미쉬나에 주석과 해석을 덧붙인 ‘게마라’(AD500년)입니다. AD 70년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하여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력이 구전 율법의 편집이었고, AD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갈릴리 주변 베이트 쉐아림과 찌포리를 중심으로 완성한 미쉬나입니다. ‘베이트 쉐아림’(= 두 개의 문을 가진 집의 뜻)은 나사렛의 남서쪽 25km에 있고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유명합니다. 랍비 하나시가 묻힌 후에 유대인들의 주요 매장지가 되었고,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율법 중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로 증거하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힘써 자신들의 해석(=미쉬나)을 따라서 율법의 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베이트 쉐아림’은 버림받은 율법주의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반대하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베이트 쉐아림’의 존재입니다. 영생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요17: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경건과 자족, 참된 유익의 길
디모데전서 4: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건강을 낳지만 그것은 ‘약간의 유익’입니다. 그 반면 경건은 삶의 모든 영역- 가정·직장·인간관계·고난·성공 등 – 에 큰 유익을 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가 유지되도록 늘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경건’이 열매 맺으려면 ‘자족(自足)’이 수반되야 합니다. 여기서 “자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자족은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만족했고, 바울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자족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고, 자족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자족은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더 많은 소유인가, 더 깊은 관계인가. 경건과 자족은 우리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금생과 내생에 모두 유익한 삶, 참된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