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1/3-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왕의 무덤
마가복음10:45절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새번역)

애양원은 자치였고, 원장이 2명, 환자들이 3명을 뽑은 ‘부장(部長)회의’가 사실상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치료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 애양원에 관한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많을 때는 수용 인원이 1,700명에 이르러 각종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부장회가 소집되어 일을 처리했으며, 자체 화폐까지 유통하였으니 ‘애양원 공화국’이라 하겠습니다. 선출된 부장들은 신앙이나 인품 면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어서 그 권위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수석 부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수석 부장을 역임한 인물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맹인 김태옥 장로입니다. 이분은 1909년 광주나병원이 개설됐을 때 들어온 최초 환자의 한 사람이었고, 애양원교회 장로요 ‘부장들의 우두머리’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선교사들도 ‘성경을 줄줄 외우는’그를 존경했습니다. 1939년 별세하자 윌슨 원장은 그를 ‘애양원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며 추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주 교수가 본 무덤은 무연고자의 무덤이었으며, 건너편 손양원 목사의 무덤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왕은 무슨 왕···, 종이었을 따름이지”(이덕주). 생각해 보면, 나병환자요 맹인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만, 김태옥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어진 환경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며,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전도서 5:8절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본절은 새 주제를 성찰합니다. 빈민을 억압하고 정의를 짓밟는 학대와 강탈은 삶의 허무를 키우며, 이는 불공정한 판결과 비도덕을 드러냅니다. 주 대상은 빈민으로 표현된 약자들입니다. ‘빈민’이란 ‘라쉬’의 번역으로 돈이 없고 재산이 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9절을 함께 고려하면 ‘가난한 농민’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4:1-3절에서 압제받는 자들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압제를 목격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근거는 세 단계의 심판자들의 존재입니다: 높은 자, 더 높은 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 이 말은 관료체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도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악을 행하는 관리, 그를 감찰하는 왕, 그 왕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장엄복수)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인간 제도의 한계를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라는 의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 역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자 “의인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답변을 받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1-8). 주님은 불의를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신자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심을 단언하신 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결실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13:2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전도서5:9절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절은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존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곧, 땅의 소산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입니다. 전도자가 언급한 ‘빈민에 대한 학대’(8)는, 종종 토지의 불법 점유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23:10–11에서 경계석을 옮기는 자에 대한 경고는, 당시 사회에서 토지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기반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를 보장하고 경작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누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쟁기질한 밭을 위한 왕”이라는 속담은 바로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하 21장)은 권력 남용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전도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만으로는 타락한 인류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제빵업자의 도덕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내일 아침의 빵을 보장한다’고 갈파하여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임을 밝혔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이기심 때문에 병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때, 성경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방향을 교정하는 윤리적 나침반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20장)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담았는데, 이 교훈을 깨닫고 이기심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습니다(시편119:99).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마태복음 11:21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구약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00 경)에 기록된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의 주요 도시로 판단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13:13). 400년 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습니다(삼하3:3). 압살롬은 모친을 따라서 딸을 마아가로 짓고,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아사를 낳습니다. 그러나 아세라 목상 때문에 아사에게 폐위당하는데, 그술 출신인 할머니로부터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한 것이 분명합니다(왕상15:6). 한편, 벳새다는 앗수르에게 함락되었는데(BC732), 화재로 불탄 흔적이 그대로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 중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특이합니다. 이 석상은 주상으로 한 쪽 면에는 두 뿔이 달린 황소가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을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 하다드로 봅니다. 벳새다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하다가 헤롯 빌립 당시에 번성하였으나 AD 70년 로마에게 멸망당합니다. 우상숭배는 뿌리뽑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계산으로 율법이 금지한 가나안 땅 내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아 우상숭배의 단초를 만들자, “삼사 대까지 벌하겠다”(출20:5)는 우상숭배를 금지한 제2계명은 작동합니다. 그 결과 솔로몬 때(2대) 우상숭배는 확장되고 르호보암 때(3대) 나라는 분열되었으니,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에베소서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람들의 견해와 상관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은 늘 존재하였으나, 유럽인들은 15세기에나 알게 됩니다. 그 후 이들은 멀리 떨어진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문명을 이루었지만, 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는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막상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시인 오인태의 ‘밥상머리 인문학”을 읽으면 그도 역시 같습니다. 신을 인정하면 그들의 모임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고통을 극한까지 참아내고,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연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이 그 전형입니다. 기도는 당연히 없고,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초인이나 초능력을 불러와서 신이 없이도- 만약 있다면 신을 마음대로 부려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전제가 인간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원죄입니다. 원죄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청지기직을 벗어 던지고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태도이며,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이는 국립공원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문제해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벌은 영원한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두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마귀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란 진리는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매일묵상(2025/10/27-3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애양원 가나안 복지되다!
마태복음25: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애양원은 남자부와 여자부 마을을 조성하여 각기 모여 살게 하였으나, 젊은 환자들 간에는 ‘풍속 관련’ 범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남녀 환자들의 ‘결혼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단종 수술을 받은 후, 남녀환자를 짝짓고 어린 아이 한 명을 붙여, 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후 가정촌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점점 확대되어 1976년 선교부는 선교부 땅 14만평을 위에 정착촌을 건설합니다. 은성동, 다윗촌, 도성촌과 인사동 마을이 그것으로 불모의 땅이 가나안 복지로 탈바꿈했다 하겠습니다. 70년 넘게 여자부 돌집에 살고 있는 김수남 권사의 증언입니다(1999년). “우월손 원장님은 공주서 농촌사업 허는 사람 데려다 우리헌티 농사 짓넌 벱과 퇴끼, 도야지 기를 벱을 가르쳐 주시고…전구 다마를 가져와서는 양말 기워 신으라 허시고… 한 번은 감나무 묘목을 싣고 와서 나눠 심었는디 이 근방 단감나무는 모다 그때 심은 게요. 그런께 황무지 같던 이곳이 가나안 복지가 되었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결혼 사업, 정착촌 조성, 농업 교육 등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흔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는 말씀을 오해하여 더 나은 삶과 소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단의 사정이 없다면 사회통상의 소득은 확보되어야 사랑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롬13:8).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기도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마6:10,쉬운성경).

전도서 5:6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본절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경히 여겨 실수라고 변명하며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수사의문문). ‘사자’란 천사, 제사장, 하나님, 혹은 서원을 듣고 기록하는 직책의 사람 등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제사장’이란 해석이 타당합니다(말2:7). ‘네 목소리’는 서원을 실수라고 변명하는 말을 뜻하며, ‘너의 핑계(변명)’로 의역됩니다.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즉, 재난, 실패, 질병 따위로 그 사람이 성취한 사업, 재물, 성공이나 어떤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원하여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합당한 징벌의 범위에서 그 사람의 것을 가져가신다는 의미도 가능합니다. 토마스로드 침례교회의 한 신자가 제리 파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 작정한 헌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두 소급하여 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모저모로 당신의 작정한 부분을 다 거두어 가셨으니, 다음부터 내시면 됩니다.” 법관이 사건을 맡았으면 공의롭게 판결을 내려 갈등을 해소하든지 범죄에 합당한 벌을 선언합니다. 하물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우시겠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하여 서원을 했으면 갚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면으로든 유익합니다. 사정이 있는 경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다짐과 함께 이행바랍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귀한 보배는 지각 있게 말하는 입이다.”(잠언20:15,새번역)

전도서 5:7절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허무 극복의 유일한 방법으로 전제하며, 단락 5:1-7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사(or 예배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서원과 그 이행입니다. 제사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야 하고, 서원은 신중하게 따져서 약속하되 반드시 이행하라는 경고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경건한 삶)의 한 부분이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란 서론적 명령으로 시작해서,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는 결론적 명령으로 끝맺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이 감사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태도가 삶의 근간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사명을 이루는데 골몰합니다. 세상을 짓누르는 인생의 허무, 절망, 회의 따위는 결코 우리 마음에 머무를 틈이 없습니다. 실로, 구속받은 신자의 삶 속에는 이사야 35: 10절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만약 삶의 문제가 닥치면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빌4:6,7)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벳새다
요한복음 1: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839년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어부의 집’이란 벳새다의 이름에 비추어,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서 보다 해변가에 위치한 현재 엘-아라즈(el-Araz)를 벳새다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최근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라미 아라브(Rami Arav)의 발굴을 통해 엣-텔 지역이 벳새다로 입증되었습니다. 엣-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와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셨으며(막 8:22),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지만(눅 9:10-17),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마 11:21). 표적(이적)이 반드시 믿음을 만들지는 못하나, 성경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표적(이적)은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모든 표적(이적)의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이며, 영생에 대한 우리 믿음의 실체적 근거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14:11,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1)
에베소서4:6절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인태의 시: 「달력을 걸며」 – “또, 깎아 곶감 한 줄 달다”

오 시인에게 영향을 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어머니는 밥상에 차려내는 음식으로, 아버지는 그 밥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한번도 밥상 앞에서 반찬투정을 하거나 어머니를 핀잔하지 않으셨고, 훈계조로 자식들을 나무라거나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식구 누구도 꼭 찍어 타박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인태의 인생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불필요하지요! 따라서, 시인 오인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한편, 오인태 시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할 때 그 시작은 부모입니다. 그 위는 조부모이지만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오직 부모의 전승을 듣고 사진을 보면서 믿을 뿐입니다. 5대조 이상은 족보의 기록만 믿고 있을 것이나, 족보는 틀려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증언과 천지만물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없는오인태 시인은 반성과 후회만이 있지 죄사함과 영생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표지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매일묵상(2025/10/20-2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소록도와 애양원의 차이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조선 총독부가 운영하던 소록도 나병원(1916년 창립)처럼, 애양원도 철조망과 감시 초소를 세우는 등 삼엄한 경비와 통제가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배병심 장로의 증언입니다. “소록도에서는 환자들이 죽어도 나가야겠다며 탈출하다가 죽은 사람이 허다했는디 애양원에서는 반대로 죽어도 안나겠다고 버쳤다는 것 아니요? 소록도에서는 당국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환자들이 항의하여 폭력 시위를 종종 벌였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애양원에서 제일 큰 벌은 퇴소명령이라. 환자들은 이곳에서 쫓겨날까 봐 겁을 냈다잖여?” 이처럼 애양원이 ‘나환자천국’이 된 데는 이곳 의사와 직원들이 보여준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선교사들이 취한 자립과 자활 정책도 중요했는데, 선교부는 치료를 넘어 자립 생활인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애양원은 치료가 끝난 환자 중에서 의사와 간호사 직원을 뽑아 진료와 행정 사무를 맡겼습니다. 이런 조치는 나환자들의 자존감과 사회적 회복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수십 만평의 땅을 준비하여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은 직접 농사에 참여, 일한 만큼 소득을 얻게 하였고 소득도 높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많은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셨으나, 자립은 각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승천 후 교회는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고, 2천년의 유산을 이어받은 광주선교부는 애양원을 세워 나환자들의 치료는 물론, 자립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영적인 삶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5:4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인생의 허무는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으로 첫째 예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와 기도입니다(1-3). 둘째 예는 서원이며 전도자는 교훈 3개를 말합니다(4-6). ‘서원’이란 히브리어 ‘나다르’의 번역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한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서원(삼상1:11)이 좋은 예입니다. ‘맹세’는 ‘샤바’의 번역이며 ‘하나님 혹은 사람 앞에서 진실을 담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창21:31)이 그렇습니다. 본절은 ‘서원하였으면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서원을 한 뒤 속히 이행하지 않으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전도자는 그를 ‘우매한 자’로 정의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자와 같이 취급합니다(5:1). 모범 사례는 한나입니다. 브닌나의 멸시를 받은 한나는 자녀를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눈물어린 서원을 하였고, 사무엘을 주시자 그 약속을 지켜 성막봉사를 위해 드렸습니다. 성막봉사는 레위인만 가능합니다만, 사무엘은 그핫 자손으로 레위인입니다. 따라서, 한나의 서원은 신중했고, 그 이행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경우처럼 살다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서원이 필요하고, 그 자체가 경건한 삶의 하나입니다. 시편 116: 1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공동체 앞에서 서원을 지키는 신실함을 선포하는데 좋은 본보기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시편116:18).

전도서 5:5절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민수기는 하나님께 서원하면 반드시 갚으라고 규정합니다(민30:2). 이에 따라 전도자는 서원은, “갚기를 더디말라”(4절)고 한 뒤, “서원하고 갚지 않는다면, 아예 서원하지 말라”(5절)고 교훈합니다. 기도할 때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본 뒤, 혹은 감정에 북받쳐 즉흥적으로 서원을 하고는 이행이 없다면 죄를 얻게 됩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열린 민족대복음화대성회 시, 은혜에 감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서원을 하였지만, 그 서원을 이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신실한 일본인 신자가 있습니다. 임상병리학자 기무라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 방치된 네팔 한센환자의 참담한 사진을 보자, 그 자리에서 의사가 되어 이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 30년이 흐르면서 그는 임상병리학의 석학이 되었으나 어린 시절 약속은 분주함 속에 묻혀졌습니다. 어느 날 ‘해부병리학자를 구한다’는 간곡한 호소의 편지가 네팔에서 전 세계로 발송되었고 일본에도 도착하여, 부인이 받았습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그 소식지를 전하면서 “이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부인 수니타 여사는 말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이미 대학으로부터 종신교수 청빙을 받아 놓았으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집 한 칸 없었지만, 사재를 털어 병리학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였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7년 동안 네팔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많은 임상병리학 공헌을 한 뒤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종신교수직’이고 얻은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언2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2)
전도서 1:11절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새번역)

나사렛 인근의 유적지 찌포리는 로마에 협력하여(AD66) 번성하였으나, 완전히 로마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동전으로 사람이나 신이 아닌 식물 문양이 새겨져 유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바르 코크바 반란(AD 135)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갈릴리 유대인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고, 랍비 유다 하나시도 이주하여 미쉬나를 편집하였습니다. 지진으로 일시적으로 파괴된 적도 있으나, 유대인·로마인·기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찌포리의 부유함은 ‘갈릴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모자이크가 있는 로마 빌라에서 확인됩니다. 주후 200년경 건축된 이 빌라는 연회 공간과 디오니소스, 판, 헬라클레스가 등장하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비너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유대인의 흔적도 풍부하게 발견됩니다. 자갈길 위 낙서, 정결례탕 ‘미크베’, 성전 촛대 그림 등이 있으며, 5세기경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에는 제사 장면과 함께 헬리오스와 황동 12궁도가 묘사되어 유대교에 미친 로마 문화의 영향을 알게 합니다. 한편,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면서 유대교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 찌포리는 고고학적 유적지일 뿐, 현대 도시로서의 찌포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뿐으로 지금 세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 양 예수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는 용사들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전도서 7:13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새번역)

시인 오인태(1962~)의 시‘인생’입니다.
  “
밥술 뜨다 뜨리라”

그의 인생입니다: “나는 진학도 진로도 내 원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교대에 들어간 건 그때로서는 등록금이 가장 싼 교대 외엔 대학 갈 형편이 못 되었던 까닭이 컸다. 교대를 나와 저절로 교사가 되었고,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학위도 받고 모교에서 시간 강사도 했다. 그러나 교육 전문직 공채에 응시해서 장학사도 하고, 교육 연구사를 겨쳐 교육 연구관을 지낸 끝에 지금은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교직에 들어와서 해 볼 건 다 해 본 셈이다. 그러나 어떤 성취나 직위를 위해 목을 맨 적은 없었다. 살다 보니 어떻게든 된 것일 뿐. 여러 단체에 참가하면서 소신껏 발언하며 살아왔다. …..사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자산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자부심이다.…..살아오면서 어떤 갈림길에 썼을 때 늘 선택의 기준은 이 길을 가면 시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분의 정체성은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보다는 난독증·난서증 등의 문제를 갖고 괴로워 하는 학생을 조기발견하여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세워주는 교직이 더 낫다고 보입니다. 그 만큼 교직은 하나님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들 -난독증, 난서증 등 -을 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영혼이 자기중심으로 구부려진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하는 복음의 제사장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5:14,새번역).  

매일묵상(2025/10/13-1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병원
열왕기하5: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911년 광주나병원으로 시작된 여수애양병원은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추고 정형외과, 내과, 피부과 등 다양한 진료과를 통해 많은 외래 환자 또한 받고 있습니다. 또한 병원은 한센병 환자와 일반 장애인을 대상으로 치료와 재활을 통해 복음을 전도하고 영혼구원이 그 설립목적이기에, 전인적 치유사역은 그 핵심입니다. 1970년대 이후 나환자 수는 급격히 줄었고, 그에 따라 병원의 관심은 한센병 기형 환자와 소아마비 환자를 거쳐 인공관절 수술 환자로 확대되었습니다. 토플 원장이 무릎 인공관절 수술에 성공한 이후(1973년), 병원은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였고 비용도 상당히 저렴합니다. 과거에는 공기로 전염된다는 오해까지 받아 환자들이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나병의 진단과 격리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문둥병, 나병, 한센병으로 명칭이 변화해왔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디디에스와 푸르토밍 같은 신약이 개발되면서 완치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병은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할 수 있는 병으로 여겨졌던 시절, 그 치유는 선지자나 메시야의 권위를 입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나아만을 고친 엘리사와 많은 나환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예수께서 그 대표적 예입니다. 우리에게서 고난은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면 구원을 경험하고 믿음은 큰 담력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전도서 5: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1절이 경청과 순종을 강조했다면, 2절은 경솔한 말과 기도를 경계합니다.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반영이며,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는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뜻을 헤아린 뒤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생활입니다. 왜 사람들은 부주의한 말을 쏟아낼까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은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박함이 경솔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의 원어는 ‘성급하다’는 뜻이고, “급한 마음으로”는 ‘빠르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는 이 두 동사를 겹쳐 사용하여, 쫓기듯 서두르는 기도의 자세가 문제의 원인임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 그분의 뜻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면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서원과 요청이 없어도 이미 우리 부엌은 필수품으로 가득 채워짐을 경험합니다(눅12:29,30). 이런 신뢰와 경험은 우리로 말을 절제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서원할 때도 깊이 생각한 뒤 지킬 수 있는 말만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위해 어리석은 서원을 했고,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것, 그것이 입다 비극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전도서 5:3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2절은 주님을 경외하는 한 사례로서 바른 기도 생활을 제시하고, 3절은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던 경구를 덧붙여 마무리 합니다. 3절은 독립된 평행 대구 구조로서, 다음은 직역입니다: (a) ‘그러므로 그 꿈이 생긴다’ (b) ‘일이 많으면’, (a’) ‘그리고 우매자의 소리’ (b’) ‘말들이 많으면.’ 먼저 전단을 보면,  ‘일이 많으면’은 지나치게 욕심을 추구하는 상황을, ‘꿈이 생긴다’는 비현실적인 망상 혹은 모든 일의 덧없음을 표현합니다. 후단의 경우, ‘말들이 많으면’을 통해 ‘일’과 대비되는 ‘말들’을 강조하고, 그 결과 ‘꿈이 생기듯’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남을 교훈합니다. ‘우매자의 소리’는 ‘꿈’과 같이 ‘헛된 말들’을 뜻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만유의 통치자 되신 하나님 면전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그분이 선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지만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동의적 표현을 대구법으로 거듭 강조한 이 경구를 통해, 생각 없이 욕심과 말만 많으면 어리석은 자의 허황된 소리로 귀결됨을 경고합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경구이며, 멋진 글솜씨입니다. 욥은 닥친 고난이 중하자,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과 항변을 하고, 친구들과도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자 자신의 무지를 회개합니다(욥42:3-6). 의로운 욥도 그러한데,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스려 말을 적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찌포리(1)
요한복음 1: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찌포리 남동쪽 약 6km에 위치한 작은 유대인 마을이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 행정 중심지 찌포리를 잘 아셨고, 부친 요셉과 함께 목수(건축가)로서 찌포리의 건축에도 참여하셨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주후 1세기 찌포리는 매우 번성한 도시로서,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의 고향이란 전승도 있으나 신구약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전 37년 헤롯 대왕은 눈보라를 뚫고 도시를 점령하여 로마에 바쳤습니다. 주전 4년 헤롯이 죽자 찌포리의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전멸 당하고, 로마군은 찌포리에서 사마리아까지 약 50km의 로마식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찌포리를 한 때 수도로 삼고 ‘갈릴리의 보석’이라 불렀습니다. 주후 66년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찌포리 주민들은 오히려 성문을 열고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을 환영하여, 그 도시는 보존되었고, 유대인들의 흔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유대교의 위상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찌포리는 세속적으로는 그토록 번성하였지만 성경에 그 지명조차 등장하지 않고, 천시받은 나사렛은 ‘나사렛 예수’처럼 세세토록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주민 중에는 오직 예수님의 가족들만 기억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메시야 예수를 배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즉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 수단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무엇이 당신의 박스에 담겨 있습니까?
누가복음 4: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2018년 작고한 밥 버포드(Bob Buford)는 미디어 사업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둘 때, 삶은 의미로 채워지고 성공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었음을 고백합니다. 40대 중반,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뛰어난 컨설턴트인 마이크 가미를 만나 진로를 상담하는 중, “당신의 박스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라는 가미의 질문에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그는 큰 수익이 예상되는 사업기회를 접하게 되었고,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그 사업과 관련된 사무소장이자 자신의 이전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밥이 자신의 기업가적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고 그 사업에 관해 말하자, 상대는 “당신은 지금 유혹의 산꼭대기에 서 있습니다”라며 경고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밥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을 받는 장면을 읽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그 사업은 밥이 전혀 모르는 분야로, 수익의 핵심은 절세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비즈니스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면의 음성은 “네가 아는 것에 붙어 있으라”고 말했고, 그는 결국 그 사업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밥은 그 선택을 단순한 손실이나 승리로 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를 되새기게 한 초월적 경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공을 위해 균형을 잃지 말라”는 그의 교훈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 “신앙과 삶의 중심”을 지키라는 자족의 교훈과 닿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눅4:12).

매일묵상(2025/9/29-10/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잠언 22:2절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옛날 조선시대 유서 깊은 고을 어귀엔 어김없이 그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선정비와 공덕비가 줄지어 있듯, 애양원 입구에도 화강암 비석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애양원 설립의 계기를 만들어 준 포사이드 선교사, 초대 원장 윌슨과 그를 이은 보이어와 토플 원장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 포사이드와 윌슨 것은 모양이나 크기가 같습니다. 광주에 있던 나환자들이 동냥을 해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석을 세운 날짜가 똑같이 1926년 11월 13일로 광주나병원이 철수 명령을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나환자들은 이 비석을 세운 직후 여수 신풍리 애양원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작하였고 그때 비석도 함께 왔습니다. 보이어의 것은 1965년 9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들어갈 때, 토플 것은 1981년 한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난 이듬해 세웠습니다. 애양원 입구의 네 비석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며, 포사이드, 윌슨, 보이어, 토플 네 분에 대한 나환자들의 깊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인류애로 아프리카를 섬겼듯,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나환자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차이를 작게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섬김의 동기가 하늘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영원한 비석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전도서 5:1절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5장의 주제는 두 개이며, ‘언어와 예배’(1-7)와 ‘해 아래 세상’(8-20)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주지이므로 무심히 접근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 말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러면 가나안 땅에 계속 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렘7:1-4). 신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을 바치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가야합니다. ‘희생제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을 침묵시키려는 의도’가 문제입니다. 전도자는 그런 피상적인 예배의 위험성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40:6절 후단,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셨나이다” 라는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 어려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피터슨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경청해야 하나 경청하는 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하나님은 곡갱이와 삽을 들고 두개골의 화강암을 파내어 안에 깊숙이 있는 생각과 마음에 접근할 통로를 여신다….그 결과는 성경의 회복이며, “눈은 귀로 변한다.” 이런 경청은 통상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은혜의 방편’ 중 하나로서, 예배 중 하나님이 지혜를 가르치시며 바로 그때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새번역).

전도서 5:1절 (2)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바보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로서,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머피). 어리석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이 필요하여 잠언에는 ‘책망’이란 단어가 12번 등장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솔로몬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구약의 지혜는 구약의 율법과 상통합니다.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율법을 읽고 가르침으로써 받을 교훈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핑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듣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본절은 성전의 이중적 기능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율법과 그 율법을 통해 제사장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브리젠은, “야훼께서 어떤 장소에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이는 사실 항상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행해진다. … 그분의 임재로 영원히 거룩해진 성전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거듭거듭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요4:24)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예배공동체’(고전3:16)와 ‘신자의 몸’(6:19)이라는 영적 성전에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공동체가 성전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며, 그 지침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베이트 쉐아림의 공동묘지
마태복음 27:52,53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의 ‘베이트 쉐아림’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반란으로 황폐하였습니다. 가장 큰 유적지는 유대인 공동묘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2002).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서 미쉬나를 편집하다가 묻혔는데, 실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유대교 전통에서는 메시야가 재림할 장소로서 그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은 경건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는 사회적 인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쉐아림’을 공동묘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30여 개의 무덤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과 함께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이 발견됐습니다. 이들의 믿음대로 메시야가 과연 왔고 죽은 많은 성도들이 부활한 바 있음을 본절은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만 고집하였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이들은 모세오경의 저자인 부활한 모세와 다투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창세기 32: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본문은 에서를 두려워 하여 야곱이 드린 기도 중 감사의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강성갑 목사님은 기독교 농촌교육을 실현하고자 한얼 중학교를 세웠습니다(1948).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갔던 30살의 김형석 선생은 그 학교를 방문한 뒤 힘껏 도우리라 다짐하고 잠들었습니다(1950.8.1). 그날 밤 꿈에 평양에 있던 여동생이 나타나서 “오빠,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곧 떠나셔야 합니다.”라고 또렸이 말했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김선생은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후 떠났습니다. 그때는 다시 걸음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소위 “김해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군이 명령한 불순분자 색출에 따라 강성갑 목사님 등 양민 200여명이 총살되었습니다. 김교수님은 회상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은 참 가슴아프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신 것에 대하여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건을 겪다 보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내 마음대로, 내 뜻으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움직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자랑할 것이 없고, 또 상실하였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매일묵상(2025/9/22 – 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시편 84: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920년 대 나환자의 수는 6백여 명에 이르자, 광주나병원의 소재지 봉선리는 비좁았습니다. 더구나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선교부는 나병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수반도에 위치한 율촌면 신풍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진집사의 설명입니다. “일제시대 간척 사업을 혀서 지금은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더만요….애장살이라 혀서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이었응께 헐값에 땅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1927년 20만 평이 넘는 신풍리 땅을 확보한 후 2년에 걸쳐 은밀히 병원과 환자를 옮겼는데, 여수나 순천 사람들이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순천(or 여수)나병원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5년 명칭 공모 결과 ‘애양원(愛養院)’이라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요양원’으로 해방 후에는 ‘윌슨요양원’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가난과 질병을 축복이라고 하겠습니까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눅6:20)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질병·고통 등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살다보면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런 삶 자체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하물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 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전도서 4:15절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된 그를 따랐다.”(쉬운성경)

13절, 14절, 15절은 각각 다른 왕을 언급합니다. 13절은 늙고 어리석은 왕, 14절은 가난하나 지혜로워 그 왕을 대체한 젊은 왕, 15절은 그 젊은 왕을 대신한 세 번째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본절의 요점은 14절의 젊은이가 어리석은 늙은 왕을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나 단명하였고, 두 번째 젊은이가 그를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왕에게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장기집권과 혈육에 의한 계승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조선 문종은 젊고 지혜로워 세종 말기 8년을 섭정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어린 단종(11살)을 신하들에게 부탁하나,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세조입니다. 그의 13년 간의 통치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조선의 법치 기반을 마련했지만, 즉위 과정에서의 정변과 조카 단종의 죽음 등은 역사적 논란을 남겼습니다. 또한, 북왕국 최초의 왕 여로보암의 22년 간의 통치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는 열왕기 기자의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후 아들 나답이 계승하나 통치 2년만에 신하 바아사에 죽임을 당합니다(BC 900). 북왕국의 역사 200년은 그야말로 정변의 역사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던져 주사 철저히 파멸케 하신다”고까지 묘사하였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편62:11).

전도서 4:16절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무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후의 세대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쉬운성경)

13~16절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5절에 등장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를 따랐는데, 그는 13~14절의 지혜로운 젊은이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 지혜로운 젊은이는 낮은 신분에서 왕위에 오른 자로, 13절의 늙고 어리석은 왕을 대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언급된 이 인기 있는 왕조차도 결국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솔로몬이 허무를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왕이 되는 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 권력은 사람의 인기가 바탕인데, 그 인기는 바람과 같습니다. 한 번 불면 대단하나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집니다. 권력을 쫓는 것은 그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노년, 지혜, 인기와 함께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도 똑 같아서,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던 자를 곧 싫증내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처럼, ‘오늘은 호산나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왕들이 자신이 기쁘게 하려 애썼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도, 변함없는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늘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유대인의 도시 베이트 쉐아림
로마서 10:2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탈무드는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으로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이 집대성된 문서 ‘미쉬나’(AD200년)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오경과 미쉬나에 주석과 해석을 덧붙인 ‘게마라’(AD500년)입니다. AD 70년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하여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력이 구전 율법의 편집이었고, AD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갈릴리 주변 베이트 쉐아림과 찌포리를 중심으로 완성한 미쉬나입니다. ‘베이트 쉐아림’(= 두 개의 문을 가진 집의 뜻)은 나사렛의 남서쪽 25km에 있고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유명합니다. 랍비 하나시가 묻힌 후에 유대인들의 주요 매장지가 되었고,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율법 중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로 증거하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힘써 자신들의 해석(=미쉬나)을 따라서 율법의 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베이트 쉐아림’은 버림받은 율법주의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반대하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베이트 쉐아림’의 존재입니다. 영생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요17: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경건과 자족, 참된 유익의 길
디모데전서 4: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건강을 낳지만 그것은 ‘약간의 유익’입니다. 그 반면 경건은 삶의 모든 영역- 가정·직장·인간관계·고난·성공 등 – 에 큰 유익을 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가 유지되도록 늘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경건’이 열매 맺으려면 ‘자족(自足)’이 수반되야 합니다. 여기서 “자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자족은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만족했고, 바울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자족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고, 자족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자족은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더 많은 소유인가, 더 깊은 관계인가. 경건과 자족은 우리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금생과 내생에 모두 유익한 삶, 참된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매일묵상(2024/9/15-1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3)
요한복음 16: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6년 전 이덕주 교수는 진칠용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애양원을 답사하였습니다. 진집사는 1958년 서울서 대학 재학 중 발병하여 애양원에 들어왔습니다. 치료 후 ‘환자 직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하고 매점을 운영하면서 애양원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교수가 애양원 역사의 산 증인들을 만나게 하는 등 구석구석을 안내하였는데, 애양원은 이야기와 역사로 가득 찬 곳입니다. 90년 전에도 같았는데, 당시 원장 윌슨(1880-1963)의 선교 편지 중 한 대목입니다. “순천에서 남동쪽으로 14마일 정도 가면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여수항이 나오고 그곳에 730명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비더울프 나환자촌이 있습니다….요양원 부지 안으로 들어서면 수위 조씨를 만나게 됩니다. 조씨는 비록 손은 일그러졌지만 정신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 수용된 남녀노소 모든 환자들의 이름과 주소는 물론 그들의 가정 내력까지 들려줄 것입니다.” ‘“비더울프요양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상당한 운영 자금을 기부한 후원자의 이름을 따른 애양원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작은 나환자 요양원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안내자가 필요하듯, 우주의 전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면 하나님의 영의 가르침과 인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적용하는 삶이 중심이며,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4).

전도서 4: 13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3-16절의 단락은 이미 살펴 본 주제 – “해 아래에서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뛰어나지만, 그 장점들도 결국에는 사라진다.”(2:12-17) – 를 다른 각도에서 예증합니다. 본절은 두 인물을 소개하며3측면에서 대조합니다. ① 사회적 지위: 가난 vs. 왕. ② 나이: 젊음 vs. 노년. ③ 지혜의 유무: 지혜 vs. 어리석음.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조가 핵심으로 그 당시 통념을 깨고 지혜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외적 조건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왕은 지혜롭고 존경받는 존재이며, 젊은이는 미숙하고 배워야 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젊음, 가난, 심지어 감옥에 있는 처지조차도 지혜로 극복될 수 있지만, 늙은 왕이라도 지혜로운 충고를 받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임을 선포합니다. 충고를 무시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의 명백한 특징이며, 특히 지도자인 왕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그는 바벨론 마지막 왕 벨드사살과 같이 왕국을 빼앗길 것은, 충고를 거부하는 지도자는 지도자 자격을 이미 상실하였다고 하나님은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듣는 태도’와 깊이 연결짓고 있으며(잠언 12:15), 나이, 지위, 배경을 초월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지혜 중의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로서, 그 어리석음은 일시적 실패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를 ‘그 믿음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시험이 닥칠 때 그의 믿음은 쉽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심각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전도서 4: 14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3,14절의 주제는 “지혜가 이끄는 인생의 반전”입니다. 서두에 나오는 ‘그’는 13절의 ‘가난하나 지혜로운 젊은이’ or ‘늙고 어리석은 왕’ 중 누구이겠습니까? 만약 전자라면, 그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감옥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했지만 지혜로 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다루지 않고, “지혜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비슷합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도 아니고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감옥에서 나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만약 후자의 해석이 맞다면, 지금은 늙고 완고해진 왕 역시 한때는 지혜로운 젊은이로서 가난과 감옥의 시절을 겪었지만, 그 지혜로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는 점차 완고해졌고, 결국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상실한 자의 비극입니다. 지혜란 단순히 한때의 능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실천되어야 할 태도라는 교훈을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울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겸손하게 수용하면서 사무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권세가 강해지자 교만하여 사무엘의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통치하였습니다. 결국 왕의 자리는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지혜는 낮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높이지만, 교만은 높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듣고는 잊어버리는 자입니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므깃도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연결되는 와디 아라(Wadi Ara)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중동지역으로 가는 ‘바다 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지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계승했을 때 그는 분명 이 중요한 도시를 요새화해야만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할 때 하솔, 게셀과 더불어 므깃도에 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왕상 9:15), 고고학자들은 솔로몬의 병거성을 므깃도에서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시대에 므깃도는 요새화되었고 아합의 건축물 중 상당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건축물과 겹쳐져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모습 재현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들어서면 거대한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성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성문은 솔로몬 시대와 달리 전체가 ‘4방 성문’이었고, 병거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습니다. 물론 이중문을 설치하고 앗수르에서 발견된 문들처럼 청동을 입혔을 것입니다. 아합은 22년 동안(BC871-853)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였지만, 성경은 아합을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17:25)로 평가합니다(열상16-22장). 아합은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부국강병을 추구한 실용주의적 통치자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왕일 뿐입니다. 세속적 성공이 영적 실패를 덮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4).

히브리서 3: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흔히 가나안을 천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나, 가나안은 단순한 미래의 장소가 아닌, 오늘날 신자가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영적 유산의 한 형태입니다(워랜 와이즈비).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는 순종을 시험하는 장소로, 가나안은 시험을 통과 시 받는 축복의 상징으로 봅니다. 물론 가나안의 축복은 궁극적인 구원인 부활의 축복을 내포합니다만,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유산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 영적 유산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는 광야에서 죽었는데,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적과 싸워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무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전쟁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그후에는 유업으로 받은 땅에 계속 거주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 여정을 회고하면서 그 율법을 해석·선포합니다(신1:1-8). 슬프게도, 이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님을 떠나 우상으로 돌아섰고 모두 쫓겨납니다(BC586).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이 중요합니다. 부활이라는 완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매일묵상(2025/09/8-1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2)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909년 포사이드가 데리고 온 그 한센 여인을 맡아 돌본 의사는 광주 제중원 원장 로버트 윌슨(29살)이었습니다. 그들은 한센병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는지 아니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포사이드는 ‘조선의 버림받은 나환자를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 채 목포로 돌아간 후 그 나환자는 죽었으나, 윌슨은 그 나환자 사역에 40년을 바칩니다. 포사이드는 조선판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윌슨은 강도 만난 자를 맡은 조선판 주막집 주인이라 하겠습니다. 그후 윌슨은 한센인을 위한 숙소와 병원을 세우는데(1913년),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 광주 나병원입니다(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개칭). 윌슨은 1948년 은퇴할 때까지 4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나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윌슨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윌슨이 나환자 사역에 힘을 쏟은 주 목적은 선교 즉, 한센인들의 영혼구원입니다. 둘째, 선배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여인을 데리고 오자, 광주 의료원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냉담했지만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이 그의 롤모델이 됩니다. 셋째, 고통받는 나환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지혜도 생겨납니다. 나환자는 장기간 격리되어 살아야 하기에 농장 등을 가꾸면서 자활 자립이 중요합니다. 애양원은 이런 사업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3가지가 필요합니다: ①주님에 대한 사랑, ②이웃에 대한 사랑(지혜), ③그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계기 혹은 롤모델이 그것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4:11절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1절은 10절과 함께 9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은 낮에는 기온이 높지만, 밤에는 급격히 떨어져 춥기 때문에, 야영 시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자면 체온 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추위와 따뜻함이란 물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 관계의 유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단순한 생존의 지혜를 넘어, 공동체적 삶의 필요성과 동행의 가치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추위도, 함께할 때 따뜻함으로 바뀔 수 있기에, 고독한 현대인들은 깊은 울림 갖게 됩니다. 고립된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함께함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며,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모습(막 6:7)은 좋은 예입니다. 홀로가 아닌 함께 걸을 때,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사명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 실라, 누가와 함께 복음의 길을 걸으며 동역의 힘을 증언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떡을 떼며 교제했던 모습(행 2:42–47)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함의 따뜻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신앙은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함께 견디며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바로 그 공동체적 믿음의 온기를 우리에게 다시금 불어넣습니다. “서로를 살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전도서 4: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여행이란 소재를 통해 우정의 유익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또 다시 강조합니다. 옛날에는 도시나 마을을 벗어나면 위험하였습니다. 혼자일 경우 강도들의 표적이 되기 쉽지만, 두 사람이면 맞서고, 세 명 이상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으로 공동체의 힘을 상징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이나 공동체 생활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사람이 늙거나 병들었을 때 건강한 배우자의 돌봄은 필수적이며, 두 사람 모두 불편할 경우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인생 동반자 관계가 제공하는 동행, 온기, 안전이라는 막대한 가치를 지닌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함’의 문제를 공동체가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기에, 하나님 없는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합니다. 한편, 이 구절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유익을 넘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는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교제와 위로, 가르침을 통해 서로를 돌보고 많은 유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관련하여 교회는 특별한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약 5:14–15).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처형될 위기를 맞았을 때, 교회는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므깃도
여호수아 12:21절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본절은 도시 ‘므깃도’가 성서에 처음 등장한 구절로,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항하였던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에게 멸망당합니다. 주전 7000년께부터 시작된 므깃도 언덕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리적 입지가 좋은 장소로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저는 2009년 이스라엘 성지순례 시 방문하였습니다. 므깃도는 이스르엘 골짜기(큰 평야임)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을 기반으로 요새가 세워졌고, 올라가면 사방으로 이스르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 보아도 요충지입니다. 솔로몬이 이를 모를리 없어, 므깃도를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고, 고대 무역로인 해변의 길이 통과하여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또한, 고대 중동의 문서들에서도 므깃도는 자주 전쟁터로 등장합니다.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를 막다 전사한 곳도 여기입니다. 따라서,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국가 간 끊임없는 쟁탈 대상되었는데, 자그마치 26번의 도시 층들이 발견될 정도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므깃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찍 발굴에 착수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중 아합 시대 유적들 -성문, 마구간, 요새 구조 등 – 의 발굴은 성경과 고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가 죽이나, 이 땅을 배정받은 므낫세 지파는 성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후 므깃도의 실질적 개발과 통치는 용맹한 다윗 왕도 해내지 못하고, 지혜의 왕 솔로몬까지 4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순종과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필수적 요소임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잠언 20: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새번역)


지금은 작고하신 100대 부자 중 한 분이 김경일 박사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김교수, 나는 진짜 이 궁금증은 풀고 가고 싶어, 누가 잘될까?”  “어느 집 자식이 잘될까?” 김교수는 연구팀 두개를 선발하여, 첫 번째 팀에게는 전국을 뒤져 ‘그 집 애들은 참 잘돼’라는 말이 회자되는 아이들의 명단을 작성해 오도록 하고, 다음 팀에게는 앞의 팀이 제출한 명단을 주고 이 명단의 공통점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부모의 학력, 소득, 직업 모든 것이 달랐지만 그 아이들 간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수님, 이 명단의 아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아이들의 부모가 다른 집 아이들에게도 따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김교수는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에게도 밥을 주는 부모! 남의 부하에게도 따뜻한 상사,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선생”은 한국의 관계주의 문화를 감안하면 자녀들이 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심리학적 근거). 한편, 본절은 의인의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부모의 삶을 통해 겸손과 주님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잠언(22:4)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드러내어, 그들의 축복의 원천을 밝힙니다(성경적 근거).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는 속담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자녀들에게 좋은 롤 모델입니다. 신자의 롤 모델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형통과 축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훌륭한 롤 모델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매일묵상(2025/9/1 – 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1)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조선 선교사들이 행한 아름다운 일 중 하나가 한국 나환자 치료의 요람인 애양원의 설립과 헌신입니다. 애양원은 선교사 포사이드(1873-1918)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9년 포사이드는 선교사 오웬(1967-1909)의 치료를 위해 두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로 가던 중 길에 쓰러진 나환자(여자)를 발견합니다. 나환자는 나병이란 강도를 만난 분들입니다. 어느날 자신이 나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슬픔으로 초토화되고, 얼마 후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구걸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죽습니다. 그 여성 나환자도 같았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에서 내려 나환자를 팔로 안아 말 위에 태우는 과정에서 그녀는 지팡이를 떨어뜨렸습니다. 포사이드는 안내하는 한 청년에게 괜찮다면서 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광주로 데려간 그 환자는 얼마 후 죽고 말았지만, 소문을 듣고 나환자들은 광주로 몰려들었습니다. 닥터 포사이드의 선한 행동은 닥터 윌슨 및 여타 선교사들과 최흥종 모두에게 충격을 줍니다. 선교사들은 1911년 환자들을 위한 초가집을 마련했고, 1912년 영국 에딘버러구라협회에서 보내 준 헌금으로 별도 건물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광주나병원의 출발입니다. 닥터 윌슨은 애양원 원장으로 일생 봉직하였고, 지팡이를 잡지 못한 그  청년은 그 일을 계기로 중생하고, 한국 나병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전도서 4: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7–8절에서는 가족도 없이 재산만을 쫓는 한 부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보여줍니다. 그 허무의 극복은 9–12절에서 제시되는데, ‘협력하는 삶’이며, 9절은 협력의 장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숫자 ‘둘’을 넘어, 공동체와 협력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상’은 히브리어 ‘사카르’에서 유래된 말로, 상급·보상·품삯을 뜻하나, 여기서는 ‘협력을 통한 성공과 열매’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큰 성취감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전도자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무관심한 구두쇠 부자에게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뒤, 자녀라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는  부부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라는 뜻이죠! 따라서, 결혼이란 단순한 제도나 육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와 결혼 제도의 본질은 모두 ‘관계’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경험하며, 세상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뜻을 행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다면, 주님은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22).

전도서 4:10절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본절은 원인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되어, 앞절에서 말한 ‘함께하는 삶의 유익’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절의 소재는 여정이며, 주제는 단순합니다: “여행 중 넘어지더라도 동반자가 있다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여기서 ‘넘어짐’은 단순히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넘어, 절벽이나 구덩이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을 암시하며, 인생의 고난 전반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넘어질 수 있고, 그 순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본절은 이를 ‘화’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화’는 실패나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세상은 자아 실현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복이라 말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게 죽었기에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막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상적 성공을 누렸던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죽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가난하여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을 때, 부자는 그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하솔
예레미야 49:33절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의 철병거성들 중 하솔은 아합의 시대(BC8세기 중엽)에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하솔 서쪽의 요새는 넓이는 25×21m, 벽의 두께는 2m에 달했고,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를 갖추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나 물이 부족하여, 물의 확보는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 지하 물저장고는 하솔의 남서쪽에 있으며, 46m 깊이로 암반까지 닿아 있습니다. 갱의 입구는 한 변이 15m의 사각형이며, 총 123개의 석회반죽으로 된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19m) 비스듬한 경사를 만납니다. 그 경사면 계단을 따라 다시 25m를 내려가면 지하수와 빗물을 모아놓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고대 하솔의 여인들은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이고 매일 이 저장고를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성밖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수자원이었으며 하솔 주민의 생명의 보고였지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하솔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고,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 즉 마귀와 그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생각을 우리의 머리에 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무기 및 보호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거룩의 무장 및 믿음의 방패입니다. 주님의 지원을 위해 성령님 안에서 쉬지말고 기도해야죠! 성패는 갈등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지성), 의와 화평을 만들어 내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사랑의 의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

마태복음 5: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의 화평은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힘없이, 그러나 복수를 외치지 않고 의연히 죽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인내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지,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움직여 ‘화평’이라는 자아실현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들에게는 아닙니다. ‘화평’이 고귀해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단지 자아실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의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난 세상을 다시 당신과 화목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값비싼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갈등 속에서 화평을 만들어 내려면 한 쪽의 희생과 다른 쪽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적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참된 화평은,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을 베풀며, 마음이 청결한 요소를 다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는 희생을 감내하고 의를 위한 박해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매일묵상(2025/8/25-2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리 사건
창세기4: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1950. 7.26-29일 사이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 마을 인근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250-300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학살 배후가 미군으로 밝혀지자, 클린턴 대통령도 사과한 바 있습니다. 1948. 10. 23일 순천 매곡동에서 민간인(26명)이 학살되었으나범인이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 형님과 형수님, 조카 등 5명을 잃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황종권 목사(88세)는 진압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면서, 학살자는 진압군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중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상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처벌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의 살인을 다룹니다. 아벨의 죽음은 오직 가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대화까지 나누었으나, 그의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아벨이 땅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방하시면서, 이마에 표를 하여 죽지 않게 보호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가정을 거쳐 살인죄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범죄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드리셨으니,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입니다. 용서는 물론 그분의 억울한 죽음이 부활이란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 구원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복수의 문제에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전도서 4: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본절의 요지는 “평화가 있는 소박함(or 의)”을 추구하라 입니다. 먼저, 이 잠언은 늘 일에 몰두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삶 보다, 일과 휴식이 균형잡힌 삶을 칭찬합니다. 전도자가 이미 수고가 질투를 불러오거나 혹은 질투를 동기로 이루진다면 헛된 것임을 밝혔기에 놀랍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의 파괴적 결과를 묘사한 5절과 긴장관계가 느껴지지만 상충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면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교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예는 잠언 26:4절과 5절입니다. 26:4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 하나, 26:5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정반대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잠언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죠! 다음으로, 이 짧은 단락(4-6절)의 흐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4:4절은 수고와 성공이 이웃의 질투을 야기하거나 질투에서 비롯된다면 “헛되다”는 평가이나, 4:5절은 게으름은 굶주림으로 가는 길임을 경고합니다. 4:6절은 그 결론으로 화평을 겸한 수고를 칭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다툼이 따르는 풍성한 식사보다 평화를 겸한 작은 조각”을 택하는 삶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권면합니다. 즉, 수고 후에 질투를 받거나 혹은 수고의 동기가 질투라면 헛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은 파멸로 귀결되기 때문에, 수고는 하되 화평한 삶이 수반되는 삶(직업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전도서 4:7,8절
“내가 살펴보니, 해 아래 허무한 것이 또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는 외톨이지만, 끝없이 수고하며, 자기 재산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하지?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 걸까?”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다.”(쉬운성경)

솔로몬은 헛된 또 하나가 의미없는 탐욕임을 밝힙니다. 등장 인물은 홀로 사는 구두쇠 부자입니다. 그는 가족도 없지만 가진 소유에 만족 못하고 계속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재산을 불릴 때는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분쟁도 많아서 이웃과 친구 역시 없을 것입니다. 고독한 그 구두쇠의 인생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과 타인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고 괴로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합니다. 물질적 성공을 맨 앞에 세워놓고 살면 관계의 단절과 내면의 공허를 초래합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쌓은 부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소유와 존재, 노동과 휴식, 나눔의 가치 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늘 갈등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생이 반드시 마주쳐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성찰을 거친 뒤, 하나님 없는 자는 인생의 허무에 빠지거나, 탐욕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의 뜻과 섭리를 믿으므로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화평과 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않는 은밀한 선, 그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데, 주님의 보상(칭찬)을 믿기 때문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솔로몬의 철병거성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해변의 길에 위치한 하솔은 가나안 정복 이전부터 북부 갈릴리 중심도시였으므로, 솔로몬은 하솔을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는 같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문은 보통 ‘솔로몬의 성문’으로 불리며, 양쪽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6개의 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6방 성문(six chambered gate)’이라고도 합니다. 양쪽의 입구에는 각각 탑 하나씩이 더해져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놓여 있습니다. 하솔의 ‘6방 성문’은 벽을 이중으로 쌓고 벽과 벽 사이를 칸으로 막아 위에서 보면 방들을 연결해 성벽을 쌓은 것 같은 ‘포곽벽(casemate wall)’의 모습입니다. 고고학자 이갈 야딘은 이 성벽을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독특한 성벽으로 발표했습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솔로몬의 의도와 달리 므깃도와 하솔 두 철병거성은 북 왕국(여로보암)에 속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아는 순간  두 성의 요새화 작업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국가안전을 위하여 철병거성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군사력보다 신뢰와 순종입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세상의 힘과 노력도 있어야 하나, 그보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가능하므로 겸손해야 합니다(마19:2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신명기 8:17절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새번역)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 강을 넘기 직전 행한 모세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획득할 막대한 전리품으로 백성들은 부유해질 것이나, 오해하여 자신들에게 공을 돌릴까 모세는 염려합니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신앙 생활은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아,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을 잃으면 베이거나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인간은 형통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경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광야 훈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경험과 교훈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신8:1-18),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입니다(신8:19,20). 당부와 경고도 소용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아 결국 순종을 못 배우고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모세는 이 운명을 알고 또 한 번 경고한 바 있으니 개탄스럽습니다(신31:27-29). ‘수고한 대로 먹는다’(시128:2)는 말은 축복의 법칙입니다. 노력 없이 획득한 재물과 성공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영적인 삶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님을 깨닫고 늘 감사를 겸한 자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하면 쉽게 이해되나, 그렇지 못하면 신앙 생활도 자기만족·자아중심의 한 종류가 될 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