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7/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1)
사도행전 16: 37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본문은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가 무시받지 않도록 로마사람이란 신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순천 매산학교는 교인 자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1912), 크레인(남학교 담당)과 더피(여학교 담당) 선교사가 부임히여 학교체계를 갖추었습니다(1913). 1915년 총독부가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는 자진 폐쇄하였다가, 3.1운동 후 종교교육을 허용하자 학교를 재개하였습니다. 1920년 순천 선교부 재정 후원자였던 미국인 왓츠 장로가 내한, 총독부를 찾아가 학교 재건을 촉구한 것이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강대국 미국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겪고 1921년 4월 15일 ‘매산 남학교’, ‘매산 여학교’란 명칭으로 학교를 재개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오히려 ‘왓츠남학교’와 ‘왓츠여학교’라 불렀습니다. 바락은 사사 드보라의 명을 받고 다볼 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백승을 갖고 기손강에서 대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명 1만명을 이끌고 전차부대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바락은 순종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기손강 상류에 내린 폭우로 철병거는 떠내려가거나 진창에 빠져 보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환경과 국제정세 모두를 사용하시므로 복음을 전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믿음과 지혜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 기회를 최대한 잘 사용하십시오.”(골4:5,쉬운성경).

전도서 3: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3:1-15절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논한 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신 복을 누리라고 권고합니다. 이어 16-22절은 죽음과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는, 결론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본절은 정의가 행해여야 할 재판과 통치의 영역에도 악이 존재함을 탄식합니다. ‘재판하는 곳’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장소요, 악을 벌하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곳’은 ‘재판하는 곳’과 같은 의미로도, 혹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리들의 영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타당하나, ‘거기에도’란 표현이 반복됨을 볼 때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악은 사법이 시행되는 곳에서부터 행정적인 직무를 시행하는 곳까지 편만하게 번져 있음을 보자, 솔로몬은 ‘거기에도’란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정의가 서지 못하였음을 크게 개탄합니다. 그 당시도 권력과 뇌물 등으로 불공정한 판결과 행정이 이루어졌는데, 어디 그 시대 뿐입니까?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구조 자체가 악한데 의인이 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의인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이 교훈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억울한 일은 주님이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그것도 ‘속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전도서 3:17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본절에서 솔로몬은 부조리한 인간 법정을 보면서(16),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는 무고한 자가 벌을 받고 죄인은 방면되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때가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정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또한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해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여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가지되,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신다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제국의 횡포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그렇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언제까지 들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쳤는데도 어찌하여 구해 주지 않으십니까?… 율법이 효력을 잃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재판이 잘못 진행되고 있습니다.”(하1:2-4). 이때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판에 관한)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2:3)고 답변하셨습니다. 2,500년 전 하박국 선지자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살았듯이, 신자는 갈등의 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브라함의 성문
창세기 14:14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단’의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 경입니다. 놀라운발견은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입니다(BC1800년경).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등에서도 발견된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으로,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남아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km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려 성을 보호하였습니다. 3년 동안 1,000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문의 사용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와 유사해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문에 ‘단’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단’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따라서, “단”은 아브람 시대에는 “라이스”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 후대에 그 당시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참조삿18장). 지명 변화는 독자가 본문을 어느 시점에서 읽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은 초기에는 “여부스”로 불렸지만, 다윗이 정복한 후 “예루살렘”이 되었고, 이후에는 종말론적 평화의 도시로 해석되곤 합니다. 이같이 지명 변화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역사·문화·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문서처럼,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10년 전 라오스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낡은 소련군용트럭 도이싼크앙(라오스어로 산골트럭의 의미)을 몰고 생계를 유지하던 운전기사의 이름은 핫( 42살)입니다. 그는 시속 20km 속도로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만물을 배달합니다. 그의 걱정은 새로운 포장도로가 계속 들어서는 것입니다. 도로가 포장되면 좋은 차들이 다니기 때문에 자신의 일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트럭 배달일을 하면서, 핫은 장사의 의미를 터득한 것 같습니다. TV에서 보여주는 핫은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상즉인(商卽人) –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란 상도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명언입니다. 또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정직을 추구하는 그의 명언입니다. 사업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돈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낳는 것입니다. 돈이란 상대방을 섬기면 자연히 들어옵니다. 그것이 좋은 돈이며, 좋은 돈을 버는 것이 사업의 본질입니다. 그 반면, 돈은 마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신뢰하지 않으면, 경제적 편익에 초점을 두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고려하지 않는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생각 없는 경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의 삶에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참된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잠언 본문이 그 정답을 알려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매일묵상(2025/6/30-7/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요한복음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결핵 선교사” 휴 린턴은 1984. 4. 10일 농촌 교회 건축자재를 싣고 귀가하다 순천시내에서 음주운전 버스와 충돌하여 의식을 잃었고 택시로 광주기독병원으로 이송 중 숨졌습니다(58). 당시 응급차 제도는 없었습니다.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만 있었더라면…..”  린턴 집안사람들은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를 미국에서 특별 제작하여 들여왔습니다. 마침 린턴의 막내아들 존 린턴(인요한, 1959-)이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3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119구급차’ 제도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실로 휴 린턴의 죽음은 생명을 살리는 제도적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린턴 가문은 외증조 할아버지 유진 벨의 내한 100주년되는 1995년, ‘유진벨100주년기념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 재단 이사장은 휴 린턴의 둘째 아들 스테판(인세반, 1950-)입니다. 그는 1979년부터 북한을 도왔는데, 재단 설립 후에는 북한의 결핵퇴치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1950-60년 대 남한에서 맹위를 떨치던 결핵균이 지금 헐벗고 가난한 북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천초등학교,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Ph.D)한 바 있습니다. 린턴 가문은 신앙, 의학, 인도주의, 교육, 남북 화해라는 키워드로 ‘대를 잇는 선교 헌신’의 모범을 한국민들에게 130년 동안 비추었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전도서 3:15절 (1)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본절은 14절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성’을 진술하지만, 강조하는 바는 다릅니다. 14절의 초점은 피조 세계의 무상과 허무이고, 본절의 초점은 하나님의 통치 본질과 신적 질서의 불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전에 있었던 것 그것이 무엇이냐? 이미 그것은 있으며 장래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가 됩니다. 전도자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섭리의 영원성, 불변성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며, 특히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이 잘 드러냅니다. 본절에 나오는 ‘옛적’, ‘이제’, ‘장래’라는 표현은 인간의 시간적 한계를 뜻하지, 하나님을 구속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모두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다같이 현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주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와 미래에도 반복하여 일어남을 전달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미리 정해진 순환과 반복 속에 있어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했던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마치 켜진 등불이 빛을 내어 집안 모든 사람을 비추듯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악인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악인에게 벌이 신속히 임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때 의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6).  

전도서 3:15절 (2)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다시 찾으시느니라’에 해당하는 ‘예박케쉬’는 ‘찾다’ ‘수색하다’의 동사 ‘빠카쉬’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하여 집요하게 찾는다’는 의미인데, ‘지난 것’ 혹은 ‘박해당하는 자’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 ‘라다프’와 결합하여 두 가지 해석을 낳습니다. (1) ‘지나간 것’이란 입장: 하나님은 지난 일들을 반복하심을 뜻한다. (2) ‘박해당하는 자’란 입장: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즉, 하나님께서 박해받는 자를 돌보시고 악인을 벌하심을 의미한다. 이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하나, 문맥은 하나님의 공의보다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전자가 타당합니다(개정개역).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과거, 현재, 미래란 모두 현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고대 3대 통치자로 알려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바벨론 성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교만한 말을 내뱉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심판하는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는 정신이상이 되어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됩니다. 7년 후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이 돌아왔고,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경배하노니”(단 4:34–37)라는 고백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권력에 취했던 느브갓네살은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라이스
사사기 18: 29절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레셈 혹은 라이스 지역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조카 롯을 구하려고 헤브론에서 이 도시까지 쫓아와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무찌른 바 있습니다(창14:1-14). 라이스는 풍부하였기에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삿18:7). 그 이유는 먼저, 단 샘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땅이 비옥하였고,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해변의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의 일부는 가나안 원주민의 텃세에 밀려 살 곳을 찾던 중 이 성을 뻬앗아 거주하고, ‘단’이라 불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재기에 성공한 것입니다(수19:47;삿18:29). 전쟁 과정은 사사기 18장에 자세히 나오는데,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단 자손은 미리 보낸 정탐꾼이 보아 두었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함께 데리고 라이스로 가서 그 신상을 세워 거주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으로(삿18:25),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후손 일부는 몰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실로에 있던 시대에, 단 지파는 미가가 만든 새긴 우상을 섬기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5백년 후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여호와)이라 선포하고 단과 벧엘에 두었으니, 북이스라엘 백성도 계명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주의해야 할 우상은 탐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갈라디아서 6:8절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쉬운성경)

2025/6/26일 언론은 일제히 “제프 베이조스가 약혼녀 로렌 산체스와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흘간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전 세계 유명 인사 약 20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하였고, 결혼비용은 약 5600만달러로 추산됩니다. 베이조스(1964년생)의 재산은 약 2천억달러(273조원)라 합니다. 배우자가 될 여자는 전 폭스 TV 앵커인 로런 산체스(1969)로 에미상을 수상하였으며, 베이조스가 설립한 블루오리진에서 항공촬영 업무 수행하며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결혼 경력이 있습니다. 베이조스는 전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1명의 양녀(중국소녀)를 두었고, 산체스는 두 전 남편들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두 사람은 가정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인생은 성공하였다고 자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즉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열매입니다. 성경적 기준에서 두 사람은 파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재물을 믿고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였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입니다. 포도나무가 아름다운 포도를 맺듯이,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려고 힘쓰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요, 영원한 생명을 넉넉히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매일묵상(2025/6/23-2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마태복음 10:12절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본문은 열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 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부여하신 뒤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대목입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병원-학교-교회’ 삼각 전략을 통해 한국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대표적인 열매는 한국 최초의 미국 문학사 하란사(1875-1919)입니다. 그는 기혼녀로서 이화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는 중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한편, 휴 린턴이 세운 순천기독진료소는 6.25 전쟁 후 급속히 늘어나는 결핵 퇴치에 큰 공헌을 합니다. 순천기독진료소의 건물은 2층으로 왓츠 장로의 헌금(7천불)과 스와인하트 건축선교사의 작품입니다. 휴 린턴은 윌리엄 린턴의 3남이자 의사 인요한의 부친입니다.1926년 군산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강제 추방되었으나, 1953년 한국 선교사로 다시 와서 순천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휴 린턴은 시골을 돌면서 교인을 돌보다 치료받지 못해 숨져가는 결핵 환자들을 보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우선 약을 먹여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여러 병원과 함께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고, 자신이 직접 의료진을 데리고 환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환자들에게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료소로 데리고 와서 부인을 통해 치료하였으니, ‘결핵 선교사’라는 그의 별명은 정당합니다. 휴 린턴은 교통사고로 소천합니다(1984).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휴 린턴은 결핵환자를 보고 그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3:12)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영원성을 언급한 전도자는,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사람이 더 할 수도,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는 완전성, 완결성, 충분성을 강조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그 행하시는 일 역시 완전하여 가감이 필요 없는 것은 물론 결코 가감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의 창조자이며 보존과 섭리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울면서 마속을 참하다”(읍참마속(泣斬馬謖)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아끼는 부하 마속을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처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삼국지의 일화에서 나왔습니다. 책임자 마속은 부장 왕평의 반대에도 성이 아니라 산에 진을 폈으나, 뒤늦게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습니다. 마속은 ‘병법의 금기—높은 곳을 점해도 보급과 배후가 불안하면 취약하다’는 교훈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양쪽 군대의 지혜자 제갈량이나 사마의의 기준에서 보면 마속은 그야말로 우장입니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가장 어리석은 자는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모두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편19:7)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법칙과 그분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탄생, 노화, 병, 죽음, 성공, 실패, 사랑, 미움 그 어느 것 하나 인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전도자 역시 그 진리를 고백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주어진 복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아가야 하나(전9:7-10),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경외’의 원어는 ‘야레’로서, ‘두려워하다, 위엄있다’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갖지만, 기본적으로 존경과 사랑에 토대를 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사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분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쏟다가 광야에서 멸망 당하였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은 돌보아 주심을 믿고 소망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차이인데,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롬5:5).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
창세기 49:16절
“단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처럼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현대인의성경)


1830년 대 미국의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이스라엘을 직접 답사하면서 수많은 성경 속의 도시들을 밝혀냈습니다. 그중 헬몬 산 폭포 옆의 ‘텔 엘-카디(= 심판의 언덕)’로 불리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19:4) 혹은 라이스 땅(삿18:1)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인 텔 엘-카디가 성경의 ‘단’ 지역이고, 요단 강 이름의 어원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즉, ‘단’은 심판의 뜻이라(창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과 유사하며, 옆의 폭포는 요단 강 수원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단 강은 히브리어로 ‘야르덴’ 강입니다. ‘내려오다’라는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의미입니다. 수원은 ‘단, 헬몬, 스닐’의 샘 3개인데 그중 단 샘이 가장 큽니다. 본문은 야곱의 임종 시 아들 단에 대한 예언입니다. 단은 라헬의 시녀 빌하의 후손이나 야곱은 정식 지파로 인정하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시 단 지파는 소라, 에스다올, 에글론, 욥바(현대의 야파) 등의 블레셋 지역을 배정 받았습니다(수19장). 단 지파는 용감하였지만(삼손), 블레셋의 강력한 저항철 병거로 인하여 그 일부가 ‘텔 엘-카디’(라이스)로 이주하여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삼고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삿18:30,31).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

전도서 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는 성공한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과 재능을 넘어선 환경적 요인(문화와 사회적)의 중요성을 주목합니다. 그의 여러 사례 중 ‘랭건과 오펜하이머’의 비교는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과학적 재능은 비슷하였지만, 랭건은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말목장 주인으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끈 관리자로서의 명성까지 얻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10,000시간을 쏟으면 얻어지나, 그 전문성을 발휘할 사회와 문화의 테두리를 얻지 못하면 평범하거나 실패한 삶을 살아간다는 결론입니다. 중용되려고 13년을 돌아다닌 공자 역시 실패해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가정적 환경과 개인의 노력이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각 어느 정도일까요? ‘운칠기삼(運七技三)’이 적절합니다.「요재지이」(포송령 작)는 그 유래를 말합니다. 한 선비가 계속 과거에 떨어지자 옥황상제에게 따집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니 전자는 3잔, 후자는 7잔을 마셨습니다. 옥황상제는 선비를 불러 세상만사는 7할은 운명에, 3할은 운수에 지배되는 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나, 운수로 표현되는 기회와 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열심히 그릇이 되고, 하나님은 그 그릇 중에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릇도 중요하나, 주인의 선택은 더 중요합니다. 문제는 희생과 섬김이 필요한 곳을 위한 그릇은 하나님이 언제나 선택하시나, 주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 이외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2:27)  

매일묵상(2025/6/16-2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원탁회
야고보서 1: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940년 말, ‘신사참배’에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한 뒤, 일제는 밀정을 풀어 순천 노회 소속 목사들의 행적을 주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알렉산더병원 서무과장으로 있던 황두연 장로가 순천중앙교회 청년들을 모아 ‘원탁회’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경찰은 수상하게 여겨 회원 강창원의 집을 수색,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일기를 압수하고 지도자 황 장로를 체포합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선전한 혐의로 당회장 박용희 목사 역시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회의 목사들 18명 중 14명을 ‘재림 신앙’을 설교했다 하여 구속합니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고, 특히 양용근 목사는 ‘옥중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순천 노회 소속은 아니나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와 은퇴 후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이기풍 목사도 신사참배 문제로 구속 중이었으니 당시 순천노회에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순천중앙교회 앞마당에 있는 ‘추리 나무’ 두 그루는 암울했던 시절 교회와 노회가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도대체 신앙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는 왜 있어야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의 일환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낸 교회와 신자는 후대를 위하여 ‘금보다 귀한 믿음’(벧전1:7)의 유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벧전1:6,7), 바울(롬5:3-5), 야고보(약1:2,3) 세 사도 모두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전도서 3: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최선의 삶이란,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12)과,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림”이 들어 있는 삶이나,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로서(13),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누리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전도자는 신은 죽었으니,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성실하고 용기있게 살아가자는 니이체의 초인사상과 결별합니다. 제자의 삶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과 2:24절은 유사합니다. 한편, ‘낙’은 히브리어 ‘토브(=좋음)’의 번역으로, 여기서는 ‘만족’을 뜻합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함을 따르는 만족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교제의 삶의 필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제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다’라는 표현은 가족, 친척, 동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며 즐거워 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전도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각시킵니다. (2) 섭리와 즐거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무시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거나, 욕망을 채우려는 ‘수고’는 헛되나(3:9),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행하는 ‘수고’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 옵니다. 또한, ‘수고’ 없는 게으른 삶,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삶은 성취감과 만족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제자의 삶은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영적 제사장의 삶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전도서 3:14절(1)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최선의 삶의 자세’를 논한(3:12,13) 전도자는,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그 근거를 찾은 뒤, 그분에 대한 ‘경외’를 강조합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히 존재하고, 유한한 인간은 거기에 가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3:1-8), 그 안에서 행하시는데 이러한 방식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본절은 동사 ‘행하시는’을 미완료시제로 써서 계속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원까지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음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여 염려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그분의 계명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루시고, 고난의 밤 중에 우리가 행한 선들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십니다(시37:5,6). 이때 하나님은 즐거워 하십니다. 인내를 믿음의 핵심요소로 꼽는 이유입니다(히12:1-3). 불순종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흘 후에 나오자 곧장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자, 니느웨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그 성은 구원받습니다. 요나는 매우 실망하나, 이는 단순히 니느웨 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사건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예수의 부활, 회개와 구원을 증거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갈릴리
누가복음 5: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 21km 너비 13km 전체 둘레는 53km이며 깊이는 43m입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만을 나눈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계곡에 위치해 있어 해수면이 해저 210m에 이릅니다. 덕분에 산으로 둘러싸인 온화한 기후를 갖고 강우량(평균 900∼1200mm)과 꽃, 나무도 많아 아름답습니다. 북쪽의 헬몬 산이 수원이며 남쪽으로 흘러 호수를 이루었고, 호수 남쪽에 접한 요단 강(100km)을 통해 사해까지 미칩니다. 구약은 이 호수를 ‘키노르’(=하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긴네렛(민34:11)으로 불렀습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삼각형 모양이며 고대 근동의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신약 시대는 게네사렛(눅5:1)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기노사르’가 어원으로 아마 계곡이란 지형적 모습을 따른 것 같습니다. 또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요6:1)로 불리기도 하는데,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여 만든 해변 도시 디베랴에서 유래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가나안 우상숭배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사야의 증언처럼(사9:1,2) 갈릴리 지역은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그 고통 받은 지역에 주님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먼저 복음의 주무대로 삼습니다. 복음을 간직한 제자들이 배워야 할 지혜와 능력이며 또 사명입니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됐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요한복음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 미모의 외사촌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라반에게 7년 간 노동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라반은 좋게 여겨 승락하니, 야곱은 그 고된 머슴살이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창29:20). 사랑하는 라헬과 함께 세워갈 가정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왜  주저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겠습니까?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고 경영하실 기반들을 가진 성, 즉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신앙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과 소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소망과, 자신의 후손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갖고 100년을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중에 쟁점으로 떠오른 아브라함을 다룹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선언하시며, 자신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가, 돌에 맞을 뻔하셨죠!(요8:57-59). 그러나 주님은 부활로써 확증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쁨으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매일묵상(2025/6/9-1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사도행전 8: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본문에서 누가는 30년 전 스데반의 순교 후 몰아닥친 박해를 회고합니다. 이 박해로 사마리아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결국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로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905년 여천(장천교회), 벌교(무만동교회), 광양(신황리교회)에서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이들의 전도로 순천읍에서도 최사집, 최정의,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이 믿기 시작하여 1906년 순천중앙교회가 설립됩니다. 처음엔 서문안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이 늘자 북문 밖 양사재(養士齋)로 옮겨 예배를 드렸습니다. 양사재는 숙종 때(1718년) 순천 부사 황익재가 석현 개울 건너 향림사 입구에 세운 유생교육기관이었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빌린 것입니다. 1910년 매곡동 144번지 현 위치에 ‘T자형’으로 목조 예배당(20평)을 지은 뒤 증축과 신축을 거쳐 1983년 지금의 현대식 벽돌 건물(789평)이 들어섰습니다. “일제말기 선교사님덜이 쫓겨 들어가시구, 박용희 목사님과 황두연 장로님이 원탁회 사건으로 잡혀가시구…..교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지라. 새 세상이 올 것을 믿었응께.” “새 세상에 대한 믿음”은 광복이 아니라 재림신앙을 의미합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가결 후 순천노회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박해는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통해 후대의 믿음을 확립하셨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전도서3:12절(1)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2-15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성을 부여받은 사람의 바른 자세와 삶의 허무의 극복 방법을 구체화 합니다. 먼저, 12절은 전도자가 경험한 최선의 삶입니다. 원문 서두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야다’의 완료형을 사용하여, 전도자가 가만히 앉아 생각함으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로 살아보고 나서 터득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지혜로 이것 저것을 얻고 쾌락을 누리며, 자아 실현을 해 보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결국은 허무로 귀결됨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악인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본절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기뻐하는 것이고, 둘째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며’의 원어는 능동 혹은 수동 모두 가능한데, 수동의 뜻이 좀 더 강합니다. ‘행복(幸福)’이란 단어가 ‘운’의 뜻을 내포하듯이, 행복은 노력으로만 얻어지기 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총을 누릴 때 옵니다. 하나님 만큼 선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행복을 위해 당신의 아들도 아낌 없이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주신 삶을 기뻐하십시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거기서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로부터 배우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마11:28-30). 만유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에는 자족을 통한 평강이 있습니다. 내일은 ‘선을 행하는 것’을 묵상하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전도서3:12절(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또 하나의 행복 요소로 제시되는데, 본문에서 ‘선’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의 여정 중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로도,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단어 자체만 보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경우, ‘선을 행하는 것’이란 개인과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유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활용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의 ‘선’은 13절에서 ‘낙’으로 번역된 ‘토브(=good)’이므로, 문맥상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기회를 주셨을 때, 즐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이지만, 최선의 삶을 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총과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기뻐하며), 이웃에게 선행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하나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종교법전 미쉬나는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라’고 규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자, 주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된 생각임”을 밝히고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7:18,19). 신앙의 핵심은 외적 규례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대할 때 감사와 기쁨으로 받음은 물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헤롯 가문
누가복음 3:1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헤롯 대왕의 부친은 이두메 사람 안티파테르이며, 로마의 유대 지역 행정관에 임명(BC47) 받으나 암살당합니다. 둘째 아들 헤롯이 유대 왕위를 계승(BC37-4)하였고 그의 통치 말년 예수께서 태어나십니다. 헤롯은 이두메(에돔) 사람인 탓에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헤롯 사후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BC 3~AD 39), 이두래와 드라고닛(→골란고원과 시리아 남부)은 빌립에게 각 분배되나(분봉왕). 아켈라오는 곧 파면되어 총독이 유대지역을 통치하며(AD 6), 디베리우스 황제 재임(AD14~37년) 중 침례 요한이 등장합니다(AD28,9년).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는 교회의 원수이지만(행12장), 유능한 왕으로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이두메 전 지역을 통치합니다. 그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AD44~70)는 헤롯의 마지막 왕(행 25, 26장)입니다. 이두메 사람인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되어 갔고, AD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도왔습니다. 유대인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응하였다 하겠습니다(오바댜 등). 그러나 유대 땅을 마지막으로 다스린 민족이 이들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벧후1:20,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6: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실히, 열심히 살려는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삶이 놓여있습니다: 초인의 삶과 제자의 삶. 니이체를 따르면, 신은 죽었으므로 율법과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던지고, 닥쳐오는 인간의 문제들은 초인의 길을 걸으면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위버맨쉬’를 번역한 ‘초인’은 자신만이 가치척도가 되어 문제극복의 ‘힘’을 추구하고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따라서, ‘초인 철학’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중심의 사상이며, 그 열매는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입니다. 신이 없는 사르트르는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한편, 제자의 삶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부의 뜻을 받들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로 임명하셨으나,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당할 경우 그분의 뜻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기뻐합니다(약1:2). 그리고 초인의 길이 아니라, 제자의 길 즉, 겸손히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인내합니다. 교부 이그나티우스(AD35∼107?)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면서, “나는 비로소 제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초인의 길은 자신의 문제해결과 행복추구가 목표이고 늘 긴장하고 살아가나,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계명을 지켜 행하며 주님의 보상을 고대합니다. 그 보상은 금생 혹은 내생에 반드시 주어지기 때문에, 손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평강과 여유가 있습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매일묵상(2025/6/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사도행전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조지 왓츠 장로의 선교 헌금 약속을 기반으로 순천 선교부가 개척 된 때는 1912년 8월 이후입니다. 먼저, ‘건축 선교사’ 스와인하트(한국명 서로덕, 1911년 내한)를 순천에 보내어 선교사 사택을 짓는 한편, 교회와 전도 사업을 담당할 프레스턴과 코잇, 남학교를 세울 크레인(구례인)과 여학교를 세울 더피(두애란), 병원을 운영할 의사 티몬스(김로라)와 간호사 그리어(기안나), 여성 선교를 책임질 비거(백미다), 주일학교를 담임할 그랫(안채륜) 등으로 개척 선교단이 조직됩니다. 개척 선교단 중 1913년 4월 프레스턴과 코잇 가족이 선발로 떠납니다. 그러나, 코잇 가족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사택 서재에서 지내다가 두 아이(네 살, 두 살)가 이질 걸려 죽고, 매곡동 뒷산 ‘아다무락’ 골짜기에 묻히게 됩니다. 그때 부인도 병에 걸려 회복이 어려웠지만, 선교사들과 교인들의 “뜨거운 기도”로 겨우 회복되었습니다. 코잇 부인을 위한 ‘중보기도’는 개척 선교사들의 각오를 굳히고,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깊은 연대감을 형성합니다. 이 사건은 ‘불세례’(baptism of fire)로 불리워졌는데, 남편과 딸을 병으로 잃고도 43년 동안 조선 의료선교를 담당한 로제타 홀을 생각나게 합니다. 순천 선교부는 순탄하게 발전합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으나, 인류에게 이성을 통해 의학을 발전시키고 질병을 과학적·체계적으로 치료토록 하였습니다. 순천 선교부는 주님의 이 뜻을 깨닫고 과학적·체계적인 선교를 시행함으로, 많은 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28:8)

전도서3:11절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현대인의성경)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운영되는 세상의 관리자로 창조된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영원한 것을 깨닫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본성을 받았습니다. ‘영원’은 히브리어 ‘올람’의 번역으로, ‘올람’은 ‘영원(eternity)’혹은 ‘무지(ignorance)’의 뜻을 갖습니다. 만약 ‘무지’로 본다면, “사람의 마음속에 무지를 넣어주셔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이해할 수 없다”(NET)가 되나, 문맥과 용례상 ‘영원’이란 의미가 압도적입니다. 문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은 좌절한다는 점입니다. 존 야릭의 글입니다. “인간은 마음속에 “영원”을 품고 있다 – 그의 창조주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은 자신의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 전체 구조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싶어 하지만, 창조주는 피조물이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위한 주된 장치는 ‘시간이란 베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이상의 것의 존재를 알지만, 현재를 넘어 ‘영원’의 차원에서 역사와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기 원하신 하나님의 뜻 때문이나(전3:14), 남 다른 지식과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교만과 범죄를 역사는 증언합니다. 은사를 가질수록 더욱 주님을 경외해야 하나 지혜자 솔로몬도 못하였습니다. 기도 이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8)

전도서3:11절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대인의성경)           

본절의 세 번째 부분,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관리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당연히 맡은 부분을 아는 것이지 창조주처럼 전부를 통째로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불법적인 방법이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전부를 알 수 있다고 속인 뱀의 간계에 넘어간 것입니다. 관리자에서 주인의 위치로 올라가려는 마음 그것이 타락의 핵심이고 모든 불행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 모든 동물보다 낫지만, 반면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과 바른 교제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 유한함은 죽음과 시간이란 두 개의 베일을 통해 분명히 자각되는 것은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과정과 결과를 영원까지 완전히 아시나, 인간에게 영원의 영역은 오직 추측과 상상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 영원을 아는 마음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 허락하시면 내가 이것 저것을 해 보리라”는 겸손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유한성 자각의 표시요 실패를 덜 합니다. 실로 사람이 유한성을 깨달으면 삶에 대한 바른 통찰을 갖게 됩니다. 이어지는 12절-15절에서 솔로몬은 바로 그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3)
마태복음 2:16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두메아 사람들의 도시 마레사의 유적들 중 하나는 지하 구조물 안의 올리브 압축실입니다. 방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의 압축을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고 다른 쪽에는 연자 맷돌 같은 맷돌들이 놓여 있는데, 여기서 올리브를 으깬 후 바구니에 담아 압축기로 기름을 짜냈을 것입니다. 또한, 바위를 깍아 만든 무덤들(BC 3-1세기), 특히 내부 벽화를 가진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 유명합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들, 거대한 항아리,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가 있습니다. 벽화는 악령을 물리치기 위한 까마귀들, 하데스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거대한 맹견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도시 마레사는 알렉산더 대왕을 거쳐 시리아의 셀루시드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곧 유대인들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조(BC164-63)의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구약시대의 영토를 다시 차지하고 이두메니아 사람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켜 큰 원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군에게 정복당한 후 이두메아 계통의 친 로마 정치인 헤롯이 유대지역을 통치합니다. 헤롯(BC37-4)은 잔혹한 통치를 펼쳤으나,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 성전과 가이샤르 항구를 세운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헤롯 통치의 말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칼과 권력으로 확장하나 천국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세워갑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사도행전10: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가장 위대한 결단”(1982년)는 책에서 구봉서 등 총 24명이 간증합니다. 패턴은 불신자로 혹은 형식적 믿음으로 살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축복 받은 내용입니다. 가난과 병은 이 세대가 믿음을 갖게 된 계기입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김수웅 장로도 같습니다. 그는 불신자였던 젊은 시절 소금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합니다. 전 재산을 잃고 엄청난 빚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담당 의사는 “종이 한 장은 쉽게 뚫리지만 종이 뒤에 벽이 있으면 뚫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벽과 같은 것이니 절대자인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는 신앙의 권유를 합니다. 그는 자진하여 부흥회에 참석하고 주체할 수 없는 회개의 눈물과 함께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후 우연히 은사를 만나 30만원을 지원 받고 사업을 재개하여 성공하는데, 이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주님의 돌보심을 간증합니다. 김 장로는 믿기 전에도 효자였으며, 믿고 나서는 더 효자가 되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경건하고 많은 자선을 행하자, 그를 눈여겨 보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듣도록 지시하십니다(행 10장). 오늘 본문에 나온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이지만, 불신자 중에도 겸손히 부모공경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부르심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물며, 성령께서 그 마음에 오신 신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벧후1:10, 새번역)

매일묵상(2025/5/26-3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순천 선교부의 출발은 늦었으나 체계적인 선교로 순탄하게 발전합니다. 매곡동 산자락의 토지를 계속 사들여 2만6천 평의 넓은 땅을 확보하였고(1924), 교회, 유치원, 남·여학교, 병원과 기숙사, 남녀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순천 선교부가 종합 선교부로서 “교회·학교·병원”이란 삼각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은, 더럼제일교회 왓츠 장로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입니다. 왓츠는 매년 약속된 선교비 외에, 특별 헌금도 자주 하였습니다. 1920년에 내한해서 폐교된 학교 재건을 위해 상당 액을 기부하였고, 1930년 재 방문 시 병원과 학교 시설비로 무려 8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이는 한화로 80만 원에 해당하며, 서울 기와집 8백 채 값입니다. 전형필 선생은 존 개스비에게 40만 원을 지불하고 고려청자 20점(현재, 4점은 국보, 7점은 보물로 지정)을 구입(1937년) 한 것과 비교되는 금액입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대공황 중이었으나, 그는 조선 선교와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아낌 없이 기부하였습니다. 왓츠 장로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결과 남쪽에서는 최초로 군 단위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순천노회). “이런 의미에서 순천노회는 ‘왓츠기념노회’, 순천 선교부는 ‘왓츠기념선교부’라 할 만하다”고 이덕주 교수는 평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전도서3:9,10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예증한(3:1-8) 전도자는,  9-10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논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모르면,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유익(재산, 명예, 업적)을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10). ‘노고(勞苦)’에 해당하는 원어는 ‘종사하다’란 동사를 어근으로 파생한 명사로서 ‘직업’이나 ‘업무’ 등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서 사용된 8번은 모두 ‘수고, 노고, 일, 재난’ 등 부정적인 뜻을 내포합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을 이 단어 하나로 표현합니다. 즉 밭을 가꾸는 것,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 사람들의 삶의 과정 모두를 ‘노고’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섭리와 인생의 삶을 숙고한 것입니다. 이 노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인간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자 전도자는 신음을 토하고 있습니다(10절). 인간 특히 솔로몬과 같은 지혜자의 교만과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하나님의 망치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내가 보았노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자신의 성찰의 결과를 적어 놓고 있습니다. ‘천라지망’은 듬성듬성한 것처럼 보여도 어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물입니다. 이 수고스러운 인생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그분의 명령(예수에 대한 믿음, 부모공경, 형제와 이웃사랑 등)을 지키는 삶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전도서3:11절 (1)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9~10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인간 수고의 허무함이 강조되나, 1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논합니다. 본절이 1~8절 바로 뒤에 나온다면, 처음 여덟 구절은 매우 긍정적이었겠지만, 이제 또 다른 좌절감을 호소합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인간은 그분의 행하심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먼저, 11절 첫 부분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창세기 1,2장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하십니다. 창조 다음에 섭리가 옵니다. 섭리는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의 뜻을 따라 유지·완성하여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꽃씨를 심고 자라서 꽃이 활짝 펴는 모습과 같습니다. 원문은 ‘모든 것’을 서두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전도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은 원래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선한 섭리 때문이므로, 만약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아름다운 결과에 도달하여, 인간은 두려움과 허무가 아니라 흥분과 기대로 꽉 들어찬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이며, 모든 허무와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소망의 삶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2)
로마서 9: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본절은 말라기1:2,3절의 인용입니다(BC 430).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100년이 지난 때입니다. 에돔 지역은 나바테아 사람들이 정착하였고, 에돔 사람들은 갈렙이 정복하였으나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손들은 버린 땅 마레사로 이주합니다. 이 도시가 은퇴한 그리스 군인의 거주지로 되어 헬라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 것은 알렉산더의 정복이후입니다(BC332). 유적지로는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던 동굴과 지하구조가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장 그리고 비둘기 집 등 석회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의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되었고, 그 중 길이 30미터의 터널형 비둘기 집은 벽에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의 서식을 위한 1900개 벽감(벽에 오목하게 판 공간)을 갖추었습니다. 비둘기는 식용 목적이고 변은 연료였습니다. 지하 공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주거지로, 침략에도 대비하고, 농업 및 공예 산업에도 이용되었습니다. 땅을 포함한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노력에 따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임을 오늘 본문은 밝힙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과 같이 이삭의 자손이나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같습니다. 따라서, 신앙유산을 반드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영생이고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마가복음 4: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오늘 본문은 공관 복음서 모두가 증언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저녁,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명령하십니다. 저편은 이방인들과 거라사의 광인이 사는 곳입니다. 그때 큰 광풍이 일어나 침몰의 순간이 오자,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십니다. 이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따라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3,4)고 밝힌 분입니다. 먼저,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삶은 결코 육신적 평안과 안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취하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광풍, 바다, 이방인, 광인 등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 많은 인생을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의 배처럼, 우리의 인생의 배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고 선포하셨으니, 믿음을 갖고 염려와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때때로 인생의 풍랑이 몰아닥치곤 하나, 그런 풍랑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멍에를 지는 믿음 생활은 힘들지 않고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광풍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친히 경험한 사도 베드로는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매일묵상(2025/5/19-2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이사야 42: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911년 8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톤은 선교 개척비와 선교사 모집의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36세의 프레스톤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만, 담당해야만 하죠! 그 무렵 미국 남장로회 교인들은 해외 선교비로 ‘교인 한 명이 매년 4달러씩’ 헌금하자는 평신도 선교운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순회 강연을 하던 프레스톤은 그린빌에서 실업가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그는 1909년 전주 신흥학교 건립비로 1만 달러(약 20억원)를 기부한 바 있는데, 더럼의 실업가 왓츠를 소개하며 “큰 것을 요구하라.”고 귀띔했습니다. 마침, 왓츠가 장로로 봉직하던 더럼제일교회 담임 목사는 전주의 전킨 선교사 처남이었습니다. 왓츠는 “순천 선교부 전체를 맡아달라.”는 프레스톤의 요청을 받은 뒤, 순천 선교부 개척에 필요한 선교사 13명의 생활비로 매년 13,000 달러(약26억원)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1912. 8월 이 소식을 보고받은 남장로회 선교부는 순천 선교부 개척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은 과학적·체계적·이성적인 선교정책이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1910. 8월 한일합방을 당하여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짐으로 절망하는 순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순천 선교부의 복음과 선진문물(병원과 학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3:8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3:1절은 인생의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음을 선언하고, 2-8절은 반복 예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본절은 그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국가들의 애증관계인 전쟁과 평화의 때를 다룹니다. 전단의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의 표현은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예측불가입니다. 사랑할 때는 마치 사랑만 있고, 미워할 때는 증오만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감정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의 문제는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항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신임하여 군대의 장을 삼으나,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영접나온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이라는 노래를 듣자 분노하여 평생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결국 다윗은 쫓겨나 도망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만, 이는 블레셋을 통해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막을 가장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 간의 전쟁과 평화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BC 609년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애굽 왕 느고의 전쟁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고집 부리다가 느고의 손에 죽지만(역하35:20-27),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16:7).  

전도서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3:1-8절은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동함을 예증하고,  9-10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밝힙니다. 본절은 ‘마 이트론’ 즉, ‘무슨 이익이 있느냐?’로 시작됩니다(참고 1:3절). 이 수사적 질문의 방식은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나 본서에서는 부정적 대답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농사의 경험이 없는 일반인은 파종의 때를 모릅니다. 파종의 시기를 무시하고 파종한다면 헛수고입니다. 또 한국의 농사 경험을 가지고 팔레스틴에서 봄에 밀을 심고 가을에 거두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 겨울철 강우량이 많고 여름은 건조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밀이 겨울 동안 충분히 자라도록 돕고, 봄철에 수확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10-11월)에 밀을 심고 봄(4-5월)에 거두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굽게 만드신 것들을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공동 창업했지만, 1985년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잡스의 교만과 독단 때문입니다. 잡스는 픽사(Pixar)를 창업한 뒤 토이 스토리의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전문가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며 일할 때 큰 성과가 산출됨을 깨닫습니다. 그 즈음 애플은 위기에 처하고 잡스의 복귀를 요청하자 성공의 묘리를 깨달은 잡스는 아이폰 성공의 신화를 써 올립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
오바댜 1: 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멸망(BC586)에 동참한 에돔을 다스리나,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을 말합니다. 세속사에서 에돔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지만(BC553),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패망한(BC539) 이후.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이 에돔 땅을 차지하고, 에돔 사람들은 네게브 북쪽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을 수도로 삼고, 마레사와 벧술을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물론 유다인들에게 속하였던 곳이나, 유대 백성은 바벨론에서 귀환 후 예루살렘 중심으로 거주함으로 이 지역은 버려졌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헬라어로 이두메아로 불리웠고, 유대인들은 경멸하였습니다. 외경 집회서(BC180)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민족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혐오스럽다. 세겜에 사는 사마리아인들과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거만하게 살아가는 에돔 사람들이다.”(집회서 50: 25, 26).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으나 야곱 후손이 범죄하자 쫓겨났습니다. 에서의 후예인 에돔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약속의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헤롯 시대에는 유다인들도 다스리게 됩니다. 내생의 삶은 은혜에 의해 주어져 믿음으로 받지만, 금생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노력하고 순종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주고 삶의 기술을 습득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예레미야애가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일이란 창조물을 돌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보람을 느끼는 즐거움의 수단이었으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배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지혜자들은 일의 즐거움을 토로합니다. 호학(好學)의 사람 공자는 배움과 즐거움의 관계를 “지지(知之), 호지(好之), 낙지(樂之)”로 설명하는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지지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호지자),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낙지자)고 평가합니다. 또, 노벨상을 수상자 리차드 파인만은 “발견하는 즐거움”이 물리학 공부의 원동력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숨겨두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신앙 생활은, 믿음의 즐거움, 고된 노동, 안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차이는 단연 ‘믿음의 즐거움’입니다. 노동이 즐거움을 주더라도,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고 그 결과는 헛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죽은 뒤에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는 망각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동도 ‘믿음의 이야기’ 내에 위치하면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저주를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견의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멍에를 메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멍에를 져 보면, 그 멍에는 자비롭고 그분의 짐은 가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매일묵상(2025/5/12-1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아다무락’에 세워진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6: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오늘 본문은 빌립보 옥에 갇힌 바울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프레스턴, 벨, 윌슨 등 광주 선교사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광주 선교부 개척 경험을 가진 김윤수를 순천으로 보내 남봉산 자락, 매곡동 언덕 2천여 평 땅을 구입합니다. 신옥우 장로(순천중앙교회)의 말입니다. “본래 여그 일대가 아다무락이라 혀서 아그덜이 죽으면 뼈를 항아리에 넣어 갖다 버리거나 돌무더기로 시체를 덮어 놓던 곳이지라. 사람덜이 잘 오덜 안던 곳이제잉. 그런께 선교사덜이 적은 돈 들여 넓은 땅 살 수 있었던게라.” 광주, 목포처럼 순천 선교부도 버려진 땅에 자리잡았습니다. 즉, 어려서 죽은 아이 시체나 돈 없어 무덤을 제대로 쓸 수 없던 가난한 집에서 풍장 지내던 땅을 헐값에 구입한 것으로 선교사들의 지혜입니다. 문제는, 선교사들의 집과 병원, 학교를 지을 자금 그리고 가족의 생활비였습니다. 이 책무는 1911년 8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턴에게 맡겨졌습니다. 프레스턴은 막막하였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더럼의 실업가 왓츠 장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2천년 전 사도 바울의 일행이 배를 타고 빌립보로 갈 때 유럽의 문명을 싣고 갔다고 평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구원을 얻는다”는 선포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복음의 삶에 적합한 교육(학교), 근대화된 치료 수단(병원)은 필수적이므로, 삼각전략은 단순히 교인확보 수단만은 아닙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전도서3: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본문의 전단과 후단은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아서 여러 해석이 등장하나, 일반적으로 재산이나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찾고 잃을 때와, 성을 지키고 버릴 때가 있는 것 같이 인생은 이 양 극단의 상황이 언제든지 교차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항해입니다. 고대에서 무역을 위해 항해할 때, 여기 저기 다니며 벌어들인 재산으로 기뻐하지만, 폭풍이 몰아쳐 배가 위태하면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거리 항해가 본격화 된 근대에는 배를 공동 소유하거나 손실을 분산하는 해상 보험이 발달합니다. 예측불허의 세상에서 얻은 삶의 지혜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재산을 얻고 지킬 때가 있고, 단념하거나 잃어버릴 상황이 나타납니다. 양단을 모두 겪으면, 부와 가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토로합니다. 신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밖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가 참된 지혜자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양극단에 놓여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되면 생명은 죽음으로, 울음은 웃음으로, 전쟁은 평화로 뒤바뀌듯이, 인생에는 역경과 순경,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부함과 가난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본문을 통해 인생의 한편에서 다른 극단을 보는 법을 배우면 삶의 균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땐, 성공 중에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겨진 ‘천국이란 보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롬12:12).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3:7절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본절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연결된 하나의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으로 옷을 찢어 비통함을 표시하고, 슬픔이 누그러지면 다시 옷을 수선하여 입었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반영하며, 후단은 슬픔이 너무 클 경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슬픔이 사라진 후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는 모습을 함께 묘사하며, 슬픔과 비통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교훈한다. (2) 각각 다른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나 후단은 겸손히 자신을 숨기며 잠잠히 있을 때와 활발히 자신을 드러낼 때가 있음을 알려주는데,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전자의 해석도 가능하나 후자의 해석이 더 보편적입니다. 성경의 예 두 개를 들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 여호람 때, 아람 장군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들고 나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왕 여호람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면서 옷을 찢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청하고, 나아만이 오자 하룻 길 되는 요단 강으로 보내어 고칩니다. 기적의 치유를 경험한 나아만은 이스라엘 하나님만 참 신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한편, 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일부는 비웃었으나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의 길르앗 침공 소식을 듣자, 백성을 이끌고 구원합니다. 감복한 백성들은 사울의 왕 됨을 비웃은 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사울은 덕을 베풀고 백성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리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언15: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멸망
시편137: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고대에 종이 대신 도자기 조각이나 석회석 조각을 필기 매체로 사용된 것을 오스트라콘이라 부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과 신앙을 엿볼 수 있고, 이집트나 이스라엘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호르밧 우자(이스라엘)에서 주전 6-7세기경의 히브리어와 에돔어 오스트라콘들이 발견되었으며, 한 히브리어 조각은 아랏 요새에 보내는 에돔의 침략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오히려 유다를 위협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 시(BC586) 함께 유다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본 시편은 그 에돔의 심판을 호소합니다(사34:9;겔25-12-14). 시편의 기도와 선지자들의 저주는 응답되어, 에돔 왕국은 BC553년 바벨론에게 멸망됩니다. 이후 에돔 사람들은 유다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고, 우여곡절 끝에 바벨론에서 돌아와 재건된 유대 사회에 통합되어 사라집니다. 모세 율법을 통해서는 에돔 족속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께 갈 수 없지만, 예수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에돔이나 상관 없이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9:12)와 같이 아모스 선지자는 800년 전에 이 은혜를 예언하였고, 야고보의 주도로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세 율법 적용을 배제하였습니다(행15:13-29).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2:18,새번역)

마태복음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면 단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작자 미상).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담의 일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로 각종 아름답고 맛 있는 과일을 먹고, 주신 배우자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 지식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동산 관리를 위해서는 토질, 물과 동식물의 특성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 중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보고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을 일찍이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토로하였듯이, 아담은 일하면서 배우니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다만, 선악과에 대한 금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지키기 정말 쉬웠습니다. 날씨는 좋았고, 일은 즐거웠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금령을 어기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동물은 말을 듣지 않고,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심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저주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타락 전 아담의 지위 이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을 남겨 놓으시고 부활승천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같이 우리의 일을 즐겁게 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따라서, 일도 구속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매일묵상(2025/5/5-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0:3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새번역)

순천은 연산군 시절(1500년) 유배된 김굉필(1454~1504)에 의해 성리학적 심신 수양을 중심으로 한 도학 사상이 뿌리내리며 ‘호남 사림’의 근원이 됩니다. 옥천서원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된 것은 그 영향입니다. 불교 세력 또한 강하여, 백제 시대(514년)에 창건된 송광사는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 사찰이며,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도 자리잡고 있어서, 순천의 기독교 선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외곽 지역에 먼저 전파되어 여러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인의 주류는 양반 선비가 아닌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앙 열정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1906년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나, 남장로교에 의한 본격적인 선교는 오웬, 프레스톤, 코잇 선교사에 의해 시작됩니다(1909). 이들은 부임 직후 순천 지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은 이미 96개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세례 지원자가 7,367명, 주일 예배 참석자는 6,374명에 달하였습니다. 이에 남장로회 선교회에 순천 선교부 개설을 강력히 요청하여, 선교부가 설립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이성과 상식은 중요합니다. 유교와 불교를 공격하여 신자를 얻는 것이 교회의 확장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은 삶 가운데 말씀의 실천으로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성령님의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전도서3: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4절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두 쌍의 대조되는 감정으로 묘사합니다: ‘울음과 슬픔’(부정적 측면), ‘웃음과 춤’(긍정적 측면)입니다. “울고 웃는다”는 개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슬퍼하고 춤춘다’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공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특히, ‘슬퍼할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포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친다’는 의미로서, 지인의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표출하는 생생한 슬픔의 감정을 형상화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감정적 반응을 갖습니다: 좋다, 싫다, 평범하다 등. 그 감정이 증폭되면 울거나 웃게 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애도(슬픔)와 춤으로 나타는데, 전도자는 그 감정을 유발하는 각각의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냥 울고 웃고 슬퍼하고 춤추면 안 됩니다. 그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 인내 그리고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의 정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을 병에 들자, 예수께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간절하심을 보신 주님은 일어나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 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납니다. 심히 울고 애통하던 모든 자들의 감정은 경이감과 함께 웃고 춤추는 감정으로 변했으나, 야이로의 딸은 수 십년 후 또 죽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막1: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전도서3: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룬 4절에 이어, 본절은 ‘돌을 모으고 흩으며,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전단은 돌을 던지거나 모으는 목적이, 후단은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대상이 제시되지 않아 해석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돌과 관련한 해석입니다: (1)돌을 건물의 재료로 보아 건축 재료를 모으거나 제거하는 행위라는 주장(왕상3:19,25). (2)돌을 밭의 방해물로 보아 돌을 모으거나 던짐으로 밭을 비옥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사5:2). (3) 돌을 보석으로 보아 부를 축적하거나 분배하는 행위라는 주장(출25:7). 위 세 가지는 모두 성경적 근거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므로, 함께 고려하면 될 것입니다. 후단의 경우, 이성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안을 때’는 사랑할 때, ‘안는 일을 멀리할 때’는 사랑이 식었을 때란 의미가 되어, 애정 관계와 같이 매우 개인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임의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만 두려워 하여야만 합니다. 페르샤 왕궁의 술관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훼파 소식에 먼저 민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간구합니다. 넉달이 지나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술 잔을 올릴 때, 주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유다 총독의 직을 받게 하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그 생각의 방향을 도랑물처럼 마음대로 바꾸신다.”(잠언21:1,현대인의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신: 코스
역대하 25:14절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유다 왕 아마샤(796-767 BC)는 에돔을 쳐서 그 신들을 가져와 경배하나, 복은커녕 선지자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에돔 신은 ‘코스’로 추정됩니다. 앗수르의 에돔 조공 기록에 따르면, 디글랏빌레셀(745-727 BC)과 산헤립(705-681 BC)의 시대에는 에돔 왕의 이름이 ‘코스 신은 왕’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680-669 BC)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습니다. 에돔 지역의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지역은 자신의 신을 이름에 넣어 짓곤 하였기에 ‘코스’는 에돔 신들 중 하나이나 그 우상의 모습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신약 시대 에돔 지역 거주인 나바테안 사람들의 신 ‘두슈라’(= 산의 신)와 유사한 역할, 즉 ‘산신령’으로 보입니다.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에 따르면, 조선은 무당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양의학의 진출은 그들의 고객을 빼았아 갔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발생한다면 큰 공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의사의 치료(수술)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조선의 공포의 병은 폐병으로, 미신과 무당의 굿이 치유할 수 없었지만,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서양의학은 정복했습니다. 복음이 의학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치료 자체는 주님의 능력이므로 병, 특히 중병의 경우 반드시 교회에 알려 함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복음과 역사
사도행전 17: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일전에 한국사 통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명한 한국사 태두이나 그의 결론은 “평생 역사를 연구하였으나 역사의 주체나 방향, 목적도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 학자 뿐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세속사가들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그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늘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이는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사건이 만들어지고 해결되지만, 그 인과관계나 일반법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만이 바른 답을 줍니다. 성경은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곳이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재판장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만, 주님의 죽으심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방향은 심판 날로 곧장 직행하고, 목적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불법, 사망, 병, 마귀, 악인 등)을 바로잡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