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9/29-10/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잠언 22:2절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옛날 조선시대 유서 깊은 고을 어귀엔 어김없이 그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선정비와 공덕비가 줄지어 있듯, 애양원 입구에도 화강암 비석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애양원 설립의 계기를 만들어 준 포사이드 선교사, 초대 원장 윌슨과 그를 이은 보이어와 토플 원장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 포사이드와 윌슨 것은 모양이나 크기가 같습니다. 광주에 있던 나환자들이 동냥을 해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석을 세운 날짜가 똑같이 1926년 11월 13일로 광주나병원이 철수 명령을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나환자들은 이 비석을 세운 직후 여수 신풍리 애양원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작하였고 그때 비석도 함께 왔습니다. 보이어의 것은 1965년 9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들어갈 때, 토플 것은 1981년 한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난 이듬해 세웠습니다. 애양원 입구의 네 비석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며, 포사이드, 윌슨, 보이어, 토플 네 분에 대한 나환자들의 깊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인류애로 아프리카를 섬겼듯,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나환자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차이를 작게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섬김의 동기가 하늘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영원한 비석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전도서 5:1절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5장의 주제는 두 개이며, ‘언어와 예배’(1-7)와 ‘해 아래 세상’(8-20)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주지이므로 무심히 접근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 말기,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러면 가나안 땅에 계속 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렘7:1-4). 신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을 바치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가야합니다. ‘희생제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을 침묵시키려는 의도’가 문제입니다. 전도자는 그런 피상적인 예배의 위험성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40:6절 후단,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셨나이다” 라는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 어려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피터슨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경청해야 하나 경청하는 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하나님은 곡갱이와 삽을 들고 두개골의 화강암을 파내어 안에 깊숙이 있는 생각과 마음에 접근할 통로를 여신다….그 결과는 성경의 회복이며, “눈은 귀로 변한다.” 이런 경청은 통상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은혜의 방편’ 중 하나로서, 예배 중 하나님이 지혜를 가르치시며 바로 그때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새번역).

전도서 5:1절 (2)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바보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로서,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머피). 어리석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이 필요하여 잠언에는 ‘책망’이란 단어가 12번 등장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솔로몬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구약의 지혜는 구약의 율법과 상통합니다.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율법을 읽고 가르침으로써 받을 교훈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핑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듣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본절은 성전의 이중적 기능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율법과 그 율법을 통해 제사장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브리젠은, “야훼께서 어떤 장소에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이는 사실 항상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행해진다. … 그분의 임재로 영원히 거룩해진 성전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거듭거듭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요4:24)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예배공동체’(고전3:16)와 ‘신자의 몸’(6:19)이라는 영적 성전에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공동체가 성전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며, 그 지침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베이트 쉐아림의 공동묘지
마태복음 27:52,53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의 ‘베이트 쉐아림’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반란으로 황폐하였습니다. 가장 큰 유적지는 유대인 공동묘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2002).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서 미쉬나를 편집하다가 묻혔는데, 실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유대교 전통에서는 메시야가 재림할 장소로서 그때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성전 근처에 묻힌다는 것은 경건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는 사회적 인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쉐아림’을 공동묘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30여 개의 무덤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과 함께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이 발견됐습니다. 이들의 믿음대로 메시야가 과연 왔고 죽은 많은 성도들이 부활한 바 있음을 본절은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율법해석만 고집하였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이들은 모세오경의 저자인 부활한 모세와 다투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창세기 32: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본문은 에서를 두려워 하여 야곱이 드린 기도 중 감사의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야곱을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강성갑 목사님은 기독교 농촌교육을 실현하고자 한얼 중학교를 세웠습니다(1948).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갔던 30살의 김형석 선생은 그 학교를 방문한 뒤 힘껏 도우리라 다짐하고 잠들었습니다(1950.8.1). 그날 밤 꿈에 평양에 있던 여동생이 나타나서 “오빠,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곧 떠나셔야 합니다.”라고 또렸이 말했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김선생은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후 떠났습니다. 그때는 다시 걸음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소위 “김해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군이 명령한 불순분자 색출에 따라 강성갑 목사님 등 양민 200여명이 총살되었습니다. 김교수님은 회상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은 참 가슴아프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내신 것에 대하여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건을 겪다 보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내 마음대로, 내 뜻으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움직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자랑할 것이 없고, 또 상실하였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매일묵상(2025/9/22 – 2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4)
시편 84: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920년 대 나환자의 수는 6백여 명에 이르자, 광주나병원의 소재지 봉선리는 비좁았습니다. 더구나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선교부는 나병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수반도에 위치한 율촌면 신풍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진집사의 설명입니다. “일제시대 간척 사업을 혀서 지금은 육지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더만요….애장살이라 혀서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이었응께 헐값에 땅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1927년 20만 평이 넘는 신풍리 땅을 확보한 후 2년에 걸쳐 은밀히 병원과 환자를 옮겼는데, 여수나 순천 사람들이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순천(or 여수)나병원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5년 명칭 공모 결과 ‘애양원(愛養院)’이라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요양원’으로 해방 후에는 ‘윌슨요양원’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가난과 질병을 축복이라고 하겠습니까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눅6:20)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질병·고통 등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살다보면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그런 삶 자체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하물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 의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습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전도서 4:15절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된 그를 따랐다.”(쉬운성경)

13절, 14절, 15절은 각각 다른 왕을 언급합니다. 13절은 늙고 어리석은 왕, 14절은 가난하나 지혜로워 그 왕을 대체한 젊은 왕, 15절은 그 젊은 왕을 대신한 세 번째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본절의 요점은 14절의 젊은이가 어리석은 늙은 왕을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나 단명하였고, 두 번째 젊은이가 그를 대신하여 권좌에 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왕에게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소원인 장기집권과 혈육에 의한 계승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조선 문종은 젊고 지혜로워 세종 말기 8년을 섭정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 어린 단종(11살)을 신하들에게 부탁하나, 동생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세조입니다. 그의 13년 간의 통치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조선의 법치 기반을 마련했지만, 즉위 과정에서의 정변과 조카 단종의 죽음 등은 역사적 논란을 남겼습니다. 또한, 북왕국 최초의 왕 여로보암의 22년 간의 통치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는 열왕기 기자의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후 아들 나답이 계승하나 통치 2년만에 신하 바아사에 죽임을 당합니다(BC 900). 북왕국의 역사 200년은 그야말로 정변의 역사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던져 주사 철저히 파멸케 하신다”고까지 묘사하였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편62:11).

전도서 4:16절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무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후의 세대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쉬운성경)

13~16절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5절에 등장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를 따랐는데, 그는 13~14절의 지혜로운 젊은이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 지혜로운 젊은이는 낮은 신분에서 왕위에 오른 자로, 13절의 늙고 어리석은 왕을 대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언급된 이 인기 있는 왕조차도 결국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솔로몬이 허무를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왕이 되는 것 역시 “허무한 일이요, 바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 권력은 사람의 인기가 바탕인데, 그 인기는 바람과 같습니다. 한 번 불면 대단하나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집니다. 권력을 쫓는 것은 그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노년, 지혜, 인기와 함께한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도 똑 같아서,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던 자를 곧 싫증내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처럼, ‘오늘은 호산나 내일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왕들이 자신이 기쁘게 하려 애썼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도, 변함없는 충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늘 신실하셔서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유대인의 도시 베이트 쉐아림
로마서 10:2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탈무드는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으로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구전 율법이 집대성된 문서 ‘미쉬나’(AD200년)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오경과 미쉬나에 주석과 해석을 덧붙인 ‘게마라’(AD500년)입니다. AD 70년 멸망당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하여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력이 구전 율법의 편집이었고, AD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갈릴리 주변 베이트 쉐아림과 찌포리를 중심으로 완성한 미쉬나입니다. ‘베이트 쉐아림’(= 두 개의 문을 가진 집의 뜻)은 나사렛의 남서쪽 25km에 있고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유명합니다. 랍비 하나시가 묻힌 후에 유대인들의 주요 매장지가 되었고,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율법 중심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로 증거하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힘써 자신들의 해석(=미쉬나)을 따라서 율법의 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베이트 쉐아림’은 버림받은 율법주의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반대하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베이트 쉐아림’의 존재입니다. 영생은 성경해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요17:3).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경건과 자족, 참된 유익의 길
디모데전서 4:8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건강을 낳지만 그것은 ‘약간의 유익’입니다. 그 반면 경건은 삶의 모든 영역- 가정·직장·인간관계·고난·성공 등 – 에 큰 유익을 줍니다. 경건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이는 그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바른관계”가 유지되도록 늘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경건’이 열매 맺으려면 ‘자족(自足)’이 수반되야 합니다. 여기서 “자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자족은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만족했고, 바울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자족을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경건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고, 자족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면, 자족은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더 많은 소유인가, 더 깊은 관계인가. 경건과 자족은 우리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금생과 내생에 모두 유익한 삶, 참된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매일묵상(2024/9/15-1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3)
요한복음 16: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6년 전 이덕주 교수는 진칠용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애양원을 답사하였습니다. 진집사는 1958년 서울서 대학 재학 중 발병하여 애양원에 들어왔습니다. 치료 후 ‘환자 직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하고 매점을 운영하면서 애양원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교수가 애양원 역사의 산 증인들을 만나게 하는 등 구석구석을 안내하였는데, 애양원은 이야기와 역사로 가득 찬 곳입니다. 90년 전에도 같았는데, 당시 원장 윌슨(1880-1963)의 선교 편지 중 한 대목입니다. “순천에서 남동쪽으로 14마일 정도 가면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여수항이 나오고 그곳에 730명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비더울프 나환자촌이 있습니다….요양원 부지 안으로 들어서면 수위 조씨를 만나게 됩니다. 조씨는 비록 손은 일그러졌지만 정신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 수용된 남녀노소 모든 환자들의 이름과 주소는 물론 그들의 가정 내력까지 들려줄 것입니다.” ‘“비더울프요양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상당한 운영 자금을 기부한 후원자의 이름을 따른 애양원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작은 나환자 요양원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안내자가 필요하듯, 우주의 전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면 하나님의 영의 가르침과 인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적용하는 삶이 중심이며,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4).

전도서 4: 13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3-16절의 단락은 이미 살펴 본 주제 – “해 아래에서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뛰어나지만, 그 장점들도 결국에는 사라진다.”(2:12-17) – 를 다른 각도에서 예증합니다. 본절은 두 인물을 소개하며3측면에서 대조합니다. ① 사회적 지위: 가난 vs. 왕. ② 나이: 젊음 vs. 노년. ③ 지혜의 유무: 지혜 vs. 어리석음.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조가 핵심으로 그 당시 통념을 깨고 지혜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외적 조건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왕은 지혜롭고 존경받는 존재이며, 젊은이는 미숙하고 배워야 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젊음, 가난, 심지어 감옥에 있는 처지조차도 지혜로 극복될 수 있지만, 늙은 왕이라도 지혜로운 충고를 받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임을 선포합니다. 충고를 무시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의 명백한 특징이며, 특히 지도자인 왕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그는 바벨론 마지막 왕 벨드사살과 같이 왕국을 빼앗길 것은, 충고를 거부하는 지도자는 지도자 자격을 이미 상실하였다고 하나님은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듣는 태도’와 깊이 연결짓고 있으며(잠언 12:15), 나이, 지위, 배경을 초월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지혜 중의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로서, 그 어리석음은 일시적 실패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를 ‘그 믿음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시험이 닥칠 때 그의 믿음은 쉽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심각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전도서 4: 14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3,14절의 주제는 “지혜가 이끄는 인생의 반전”입니다. 서두에 나오는 ‘그’는 13절의 ‘가난하나 지혜로운 젊은이’ or ‘늙고 어리석은 왕’ 중 누구이겠습니까? 만약 전자라면, 그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감옥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했지만 지혜로 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다루지 않고, “지혜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비슷합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도 아니고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감옥에서 나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만약 후자의 해석이 맞다면, 지금은 늙고 완고해진 왕 역시 한때는 지혜로운 젊은이로서 가난과 감옥의 시절을 겪었지만, 그 지혜로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는 점차 완고해졌고, 결국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상실한 자의 비극입니다. 지혜란 단순히 한때의 능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실천되어야 할 태도라는 교훈을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울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겸손하게 수용하면서 사무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권세가 강해지자 교만하여 사무엘의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통치하였습니다. 결국 왕의 자리는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지혜는 낮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높이지만, 교만은 높은 자리에서도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듣고는 잊어버리는 자입니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므깃도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므깃도는 지중해변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연결되는 와디 아라(Wadi Ara)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중동지역으로 가는 ‘바다 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지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계승했을 때 그는 분명 이 중요한 도시를 요새화해야만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할 때 하솔, 게셀과 더불어 므깃도에 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왕상 9:15), 고고학자들은 솔로몬의 병거성을 므깃도에서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시대에 므깃도는 요새화되었고 아합의 건축물 중 상당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건축물과 겹쳐져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모습 재현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들어서면 거대한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성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성문은 솔로몬 시대와 달리 전체가 ‘4방 성문’이었고, 병거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습니다. 물론 이중문을 설치하고 앗수르에서 발견된 문들처럼 청동을 입혔을 것입니다. 아합은 22년 동안(BC871-853)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였지만, 성경은 아합을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17:25)로 평가합니다(열상16-22장). 아합은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부국강병을 추구한 실용주의적 통치자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왕일 뿐입니다. 세속적 성공이 영적 실패를 덮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4).

히브리서 3: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흔히 가나안을 천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나, 가나안은 단순한 미래의 장소가 아닌, 오늘날 신자가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영적 유산의 한 형태입니다(워랜 와이즈비).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는 순종을 시험하는 장소로, 가나안은 시험을 통과 시 받는 축복의 상징으로 봅니다. 물론 가나안의 축복은 궁극적인 구원인 부활의 축복을 내포합니다만,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유산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 영적 유산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는 광야에서 죽었는데,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적과 싸워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무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전쟁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그후에는 유업으로 받은 땅에 계속 거주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 여정을 회고하면서 그 율법을 해석·선포합니다(신1:1-8). 슬프게도, 이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님을 떠나 우상으로 돌아섰고 모두 쫓겨납니다(BC586).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이 중요합니다. 부활이라는 완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매일묵상(2025/09/8-1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2)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909년 포사이드가 데리고 온 그 한센 여인을 맡아 돌본 의사는 광주 제중원 원장 로버트 윌슨(29살)이었습니다. 그들은 한센병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는지 아니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포사이드는 ‘조선의 버림받은 나환자를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 채 목포로 돌아간 후 그 나환자는 죽었으나, 윌슨은 그 나환자 사역에 40년을 바칩니다. 포사이드는 조선판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윌슨은 강도 만난 자를 맡은 조선판 주막집 주인이라 하겠습니다. 그후 윌슨은 한센인을 위한 숙소와 병원을 세우는데(1913년),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 광주 나병원입니다(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개칭). 윌슨은 1948년 은퇴할 때까지 4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나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윌슨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윌슨이 나환자 사역에 힘을 쏟은 주 목적은 선교 즉, 한센인들의 영혼구원입니다. 둘째, 선배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여인을 데리고 오자, 광주 의료원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냉담했지만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이 그의 롤모델이 됩니다. 셋째, 고통받는 나환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지혜도 생겨납니다. 나환자는 장기간 격리되어 살아야 하기에 농장 등을 가꾸면서 자활 자립이 중요합니다. 애양원은 이런 사업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3가지가 필요합니다: ①주님에 대한 사랑, ②이웃에 대한 사랑(지혜), ③그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계기 혹은 롤모델이 그것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전도서 4:11절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1절은 10절과 함께 9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은 낮에는 기온이 높지만, 밤에는 급격히 떨어져 춥기 때문에, 야영 시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자면 체온 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추위와 따뜻함이란 물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 관계의 유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단순한 생존의 지혜를 넘어, 공동체적 삶의 필요성과 동행의 가치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추위도, 함께할 때 따뜻함으로 바뀔 수 있기에, 고독한 현대인들은 깊은 울림 갖게 됩니다. 고립된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함께함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며,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모습(막 6:7)은 좋은 예입니다. 홀로가 아닌 함께 걸을 때,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사명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 실라, 누가와 함께 복음의 길을 걸으며 동역의 힘을 증언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떡을 떼며 교제했던 모습(행 2:42–47)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함의 따뜻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신앙은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함께 견디며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바로 그 공동체적 믿음의 온기를 우리에게 다시금 불어넣습니다. “서로를 살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전도서 4: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여행이란 소재를 통해 우정의 유익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또 다시 강조합니다. 옛날에는 도시나 마을을 벗어나면 위험하였습니다. 혼자일 경우 강도들의 표적이 되기 쉽지만, 두 사람이면 맞서고, 세 명 이상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으로 공동체의 힘을 상징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이나 공동체 생활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사람이 늙거나 병들었을 때 건강한 배우자의 돌봄은 필수적이며, 두 사람 모두 불편할 경우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인생 동반자 관계가 제공하는 동행, 온기, 안전이라는 막대한 가치를 지닌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함’의 문제를 공동체가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기에, 하나님 없는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합니다. 한편, 이 구절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유익을 넘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는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교제와 위로, 가르침을 통해 서로를 돌보고 많은 유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관련하여 교회는 특별한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약 5:14–15).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처형될 위기를 맞았을 때, 교회는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므깃도
여호수아 12:21절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본절은 도시 ‘므깃도’가 성서에 처음 등장한 구절로,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항하였던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에게 멸망당합니다. 주전 7000년께부터 시작된 므깃도 언덕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리적 입지가 좋은 장소로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저는 2009년 이스라엘 성지순례 시 방문하였습니다. 므깃도는 이스르엘 골짜기(큰 평야임)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을 기반으로 요새가 세워졌고, 올라가면 사방으로 이스르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 보아도 요충지입니다. 솔로몬이 이를 모를리 없어, 므깃도를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고, 고대 무역로인 해변의 길이 통과하여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또한, 고대 중동의 문서들에서도 므깃도는 자주 전쟁터로 등장합니다.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를 막다 전사한 곳도 여기입니다. 따라서,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국가 간 끊임없는 쟁탈 대상되었는데, 자그마치 26번의 도시 층들이 발견될 정도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므깃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찍 발굴에 착수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중 아합 시대 유적들 -성문, 마구간, 요새 구조 등 – 의 발굴은 성경과 고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므깃도의 왕은 여호수아가 죽이나, 이 땅을 배정받은 므낫세 지파는 성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후 므깃도의 실질적 개발과 통치는 용맹한 다윗 왕도 해내지 못하고, 지혜의 왕 솔로몬까지 4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순종과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필수적 요소임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잠언 20: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새번역)


지금은 작고하신 100대 부자 중 한 분이 김경일 박사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김교수, 나는 진짜 이 궁금증은 풀고 가고 싶어, 누가 잘될까?”  “어느 집 자식이 잘될까?” 김교수는 연구팀 두개를 선발하여, 첫 번째 팀에게는 전국을 뒤져 ‘그 집 애들은 참 잘돼’라는 말이 회자되는 아이들의 명단을 작성해 오도록 하고, 다음 팀에게는 앞의 팀이 제출한 명단을 주고 이 명단의 공통점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부모의 학력, 소득, 직업 모든 것이 달랐지만 그 아이들 간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수님, 이 명단의 아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아이들의 부모가 다른 집 아이들에게도 따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김교수는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에게도 밥을 주는 부모! 남의 부하에게도 따뜻한 상사,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선생”은 한국의 관계주의 문화를 감안하면 자녀들이 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심리학적 근거). 한편, 본절은 의인의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부모의 삶을 통해 겸손과 주님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잠언(22:4)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드러내어, 그들의 축복의 원천을 밝힙니다(성경적 근거).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는 속담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자녀들에게 좋은 롤 모델입니다. 신자의 롤 모델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형통과 축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훌륭한 롤 모델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매일묵상(2025/9/1 – 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여수 애양원(1)
누가복음 10: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조선 선교사들이 행한 아름다운 일 중 하나가 한국 나환자 치료의 요람인 애양원의 설립과 헌신입니다. 애양원은 선교사 포사이드(1873-1918)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9년 포사이드는 선교사 오웬(1967-1909)의 치료를 위해 두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로 가던 중 길에 쓰러진 나환자(여자)를 발견합니다. 나환자는 나병이란 강도를 만난 분들입니다. 어느날 자신이 나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슬픔으로 초토화되고, 얼마 후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구걸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죽습니다. 그 여성 나환자도 같았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에서 내려 나환자를 팔로 안아 말 위에 태우는 과정에서 그녀는 지팡이를 떨어뜨렸습니다. 포사이드는 안내하는 한 청년에게 괜찮다면서 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광주로 데려간 그 환자는 얼마 후 죽고 말았지만, 소문을 듣고 나환자들은 광주로 몰려들었습니다. 닥터 포사이드의 선한 행동은 닥터 윌슨 및 여타 선교사들과 최흥종 모두에게 충격을 줍니다. 선교사들은 1911년 환자들을 위한 초가집을 마련했고, 1912년 영국 에딘버러구라협회에서 보내 준 헌금으로 별도 건물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광주나병원의 출발입니다. 닥터 윌슨은 애양원 원장으로 일생 봉직하였고, 지팡이를 잡지 못한 그  청년은 그 일을 계기로 중생하고, 한국 나병환자의 대부가 됩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전도서 4: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7–8절에서는 가족도 없이 재산만을 쫓는 한 부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보여줍니다. 그 허무의 극복은 9–12절에서 제시되는데, ‘협력하는 삶’이며, 9절은 협력의 장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숫자 ‘둘’을 넘어, 공동체와 협력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상’은 히브리어 ‘사카르’에서 유래된 말로, 상급·보상·품삯을 뜻하나, 여기서는 ‘협력을 통한 성공과 열매’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큰 성취감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전도자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무관심한 구두쇠 부자에게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결혼 제도를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뒤, 자녀라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는  부부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라는 뜻이죠! 따라서, 결혼이란 단순한 제도나 육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와 결혼 제도의 본질은 모두 ‘관계’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경험하며, 세상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뜻을 행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한다면, 주님은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22).

전도서 4:10절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본절은 원인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되어, 앞절에서 말한 ‘함께하는 삶의 유익’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절의 소재는 여정이며, 주제는 단순합니다: “여행 중 넘어지더라도 동반자가 있다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여기서 ‘넘어짐’은 단순히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넘어, 절벽이나 구덩이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을 암시하며, 인생의 고난 전반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넘어질 수 있고, 그 순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본절은 이를 ‘화’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화’는 실패나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세상은 자아 실현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복이라 말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게 죽었기에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막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상적 성공을 누렸던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죽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가난하여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을 때, 부자는 그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합의 하솔
예레미야 49:33절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의 철병거성들 중 하솔은 아합의 시대(BC8세기 중엽)에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하솔 서쪽의 요새는 넓이는 25×21m, 벽의 두께는 2m에 달했고,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를 갖추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나 물이 부족하여, 물의 확보는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 지하 물저장고는 하솔의 남서쪽에 있으며, 46m 깊이로 암반까지 닿아 있습니다. 갱의 입구는 한 변이 15m의 사각형이며, 총 123개의 석회반죽으로 된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19m) 비스듬한 경사를 만납니다. 그 경사면 계단을 따라 다시 25m를 내려가면 지하수와 빗물을 모아놓은 저장고가 있습니다. 고대 하솔의 여인들은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이고 매일 이 저장고를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성밖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수자원이었으며 하솔 주민의 생명의 보고였지만,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하솔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고,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 즉 마귀와 그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생각을 우리의 머리에 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무기 및 보호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거룩의 무장 및 믿음의 방패입니다. 주님의 지원을 위해 성령님 안에서 쉬지말고 기도해야죠! 성패는 갈등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지성), 의와 화평을 만들어 내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사랑의 의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

마태복음 5: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의 화평은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힘없이, 그러나 복수를 외치지 않고 의연히 죽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인내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지,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움직여 ‘화평’이라는 자아실현의 목표를 이루려는 자들에게는 아닙니다. ‘화평’이 고귀해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단지 자아실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의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난 세상을 다시 당신과 화목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값비싼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갈등 속에서 화평을 만들어 내려면 한 쪽의 희생과 다른 쪽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적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참된 화평은,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을 베풀며, 마음이 청결한 요소를 다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는 희생을 감내하고 의를 위한 박해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매일묵상(2025/8/25-2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리 사건
창세기4: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1950. 7.26-29일 사이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 마을 인근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250-300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학살 배후가 미군으로 밝혀지자, 클린턴 대통령도 사과한 바 있습니다. 1948. 10. 23일 순천 매곡동에서 민간인(26명)이 학살되었으나범인이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 형님과 형수님, 조카 등 5명을 잃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황종권 목사(88세)는 진압군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면서, 학살자는 진압군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중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상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처벌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의 살인을 다룹니다. 아벨의 죽음은 오직 가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대화까지 나누었으나, 그의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아벨이 땅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방하시면서, 이마에 표를 하여 죽지 않게 보호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가정을 거쳐 살인죄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범죄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드리셨으니, “아벨의 피보다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입니다. 용서는 물론 그분의 억울한 죽음이 부활이란 하나님의 공의와 인류 구원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복수의 문제에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전도서 4: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본절의 요지는 “평화가 있는 소박함(or 의)”을 추구하라 입니다. 먼저, 이 잠언은 늘 일에 몰두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삶 보다, 일과 휴식이 균형잡힌 삶을 칭찬합니다. 전도자가 이미 수고가 질투를 불러오거나 혹은 질투를 동기로 이루진다면 헛된 것임을 밝혔기에 놀랍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의 파괴적 결과를 묘사한 5절과 긴장관계가 느껴지지만 상충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면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교훈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예는 잠언 26:4절과 5절입니다. 26:4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 하나, 26:5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정반대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잠언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죠! 다음으로, 이 짧은 단락(4-6절)의 흐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4:4절은 수고와 성공이 이웃의 질투을 야기하거나 질투에서 비롯된다면 “헛되다”는 평가이나, 4:5절은 게으름은 굶주림으로 가는 길임을 경고합니다. 4:6절은 그 결론으로 화평을 겸한 수고를 칭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다툼이 따르는 풍성한 식사보다 평화를 겸한 작은 조각”을 택하는 삶이 낫다고 암묵적으로 권면합니다. 즉, 수고 후에 질투를 받거나 혹은 수고의 동기가 질투라면 헛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은 파멸로 귀결되기 때문에, 수고는 하되 화평한 삶이 수반되는 삶(직업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8)

전도서 4:7,8절
“내가 살펴보니, 해 아래 허무한 것이 또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는 외톨이지만, 끝없이 수고하며, 자기 재산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하지?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 걸까?”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다.”(쉬운성경)

솔로몬은 헛된 또 하나가 의미없는 탐욕임을 밝힙니다. 등장 인물은 홀로 사는 구두쇠 부자입니다. 그는 가족도 없지만 가진 소유에 만족 못하고 계속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재산을 불릴 때는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분쟁도 많아서 이웃과 친구 역시 없을 것입니다. 고독한 그 구두쇠의 인생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과 타인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헛되고 괴로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합니다. 물질적 성공을 맨 앞에 세워놓고 살면 관계의 단절과 내면의 공허를 초래합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쌓은 부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소유와 존재, 노동과 휴식, 나눔의 가치 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늘 갈등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가?” 혹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생이 반드시 마주쳐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성찰을 거친 뒤, 하나님 없는 자는 인생의 허무에 빠지거나, 탐욕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의 뜻과 섭리를 믿으므로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화평과 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않는 은밀한 선, 그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데, 주님의 보상(칭찬)을 믿기 때문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솔로몬의 철병거성
열왕기상 9:15절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해변의 길에 위치한 하솔은 가나안 정복 이전부터 북부 갈릴리 중심도시였으므로, 솔로몬은 하솔을 철병거성의 하나로 건축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는 같은 형태의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문은 보통 ‘솔로몬의 성문’으로 불리며, 양쪽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6개의 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6방 성문(six chambered gate)’이라고도 합니다. 양쪽의 입구에는 각각 탑 하나씩이 더해져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놓여 있습니다. 하솔의 ‘6방 성문’은 벽을 이중으로 쌓고 벽과 벽 사이를 칸으로 막아 위에서 보면 방들을 연결해 성벽을 쌓은 것 같은 ‘포곽벽(casemate wall)’의 모습입니다. 고고학자 이갈 야딘은 이 성벽을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독특한 성벽으로 발표했습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솔로몬의 의도와 달리 므깃도와 하솔 두 철병거성은 북 왕국(여로보암)에 속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아는 순간  두 성의 요새화 작업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국가안전을 위하여 철병거성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군사력보다 신뢰와 순종입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세상의 힘과 노력도 있어야 하나, 그보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가능하므로 겸손해야 합니다(마19:2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신명기 8:17절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새번역)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 강을 넘기 직전 행한 모세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획득할 막대한 전리품으로 백성들은 부유해질 것이나, 오해하여 자신들에게 공을 돌릴까 모세는 염려합니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신앙 생활은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아,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을 잃으면 베이거나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인간은 형통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경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광야 훈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경험과 교훈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신8:1-18),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입니다(신8:19,20). 당부와 경고도 소용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아 결국 순종을 못 배우고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모세는 이 운명을 알고 또 한 번 경고한 바 있으니 개탄스럽습니다(신31:27-29). ‘수고한 대로 먹는다’(시128:2)는 말은 축복의 법칙입니다. 노력 없이 획득한 재물과 성공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영적인 삶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님을 깨닫고 늘 감사를 겸한 자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하면 쉽게 이해되나, 그렇지 못하면 신앙 생활도 자기만족·자아중심의 한 종류가 될 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매일묵상(2025/8/18-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2)
사도행전 1: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어린 시절 양관 언덕은 별천지였지요. 울창한 숲에 사철 따라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다웠고, 철조망 안쪽의 파란 잔디밭에서 조랑말을 타고 노는 선교사 자녀들의 모습은 깡통 차기를 하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지요. 겨울에 선교사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면 우리도 따라가 토끼와 노루 몰이꾼이 되곤 했지요. 그래도 우월슨 선교사나 인휴 선교사 같은 분은 한국 아이들을 좋아해서 성탄절 같은 날 자기네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어 주고 과자를 나누어 주었어요. 양관에 들어갔다 온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김동철 집사의 증언입니다. 양관 동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순천의 ‘별유천지’(別有天地), 즉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권위적이고 열등하게 여긴 분들도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윤치호(1865-1945) 선생이 원산에서 거주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와서 상당기간 머물렀으나 안부를 전하지 않고 떠난 것을 두고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울분 그리고 억압의 환경은 교만한 조선민족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당장 한민족을 일제로부터 구원 하신 것은 아니나(기복신앙),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미국을 통해 해방시키셨습니다(섭리신앙). 그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고난을 겪었음을 생각하면 기복신앙과 섭리신앙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서 4: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앞선 1-3절은 학대를 받으나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을 탄식하며, 죽은 자 심지어 출생하지 않아 그런 비극을 목격하지 않은 자를 복되다고 하나, 4-6절은 그 이외의 여러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 힘든 인생의 허무를 토로합니다. 본절은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여 좋은 성과를 내거나, 능숙한 재주를 사용하여 일을 맡아 성공 하여도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으로 귀결됨으로, 사회적인 성공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면 열심히 사는 삶 자체 역시 의미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부조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는데, 우리 민족은 이런 상활을 하도 많이 겪어 “재인박명”이란 단어까지 나왔습니다. 아무리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하였다면 당연히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타인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면 학대받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열심히 일하고 재주를 습득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자체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상에 직면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술이 처신술입니다. 중국 한 나라의 개국공신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항우를 이기자, 집에 칩거하다가 신선이 되겠다고 도주하였습니다. 만약 재상의 자리를 가졌다면 유방과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장수하다가 죽는 것은 축복 중 으뜸으로 솔로몬도 갖지 못하였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창15:15).

전도서 4:5절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새번역)

4절은 수고하며 일해도 그 결과는 무익할 수 있음을 밝혔지만, 이를 오해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절은 그러한 극단을 경계합니다. 열심히 일해 성공하여도 행복 대신 시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게으르게 살면 반드시 파멸합니다. ‘팔장을 끼고’란 말은 ‘일하기 싫어서 팔장을 낀 채 빈둥거리는 모습’입니다. 특히, 원문은 현재형을 사용하여 잠시 동안의 휴식이 아닌 계속적인 게으른 상태를 표현합니다. 잠언은 게으름의 결국은 ‘가난과 궁핍’임을 거듭 밝히나(잠19:15), 본문의 표현은 더욱 매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플 뿐 아니라 그들은 결국 “제 몸만 축냅니다.” 게으른 자가 당할 자포자기 결과와 그 파멸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제 몸만 축낸다’는 표현은, 재물을 증식하지 못하고 다 써버리거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 사는 모습 등에 대한 묘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우둔하고 완고한 자를 지칭하며 상황에 따른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인생의 노력과 성취가 궁극적인 행복이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앉아 노는 것은 더욱 어리석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마25:24-30). 그는 실패와 이에 따른 질책을 두려워 하여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 두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결국은 엄한 심판입니다. 신앙과 일의 윤리가 합치된 교훈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4:12, 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사사기 4:2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전체는 다 발굴되지 않았지만 궁전의 동쪽 입구 길이는 39m, 현존 벽의 높이는 2.4m가 넘는 것으로 보아 궁전의 크기가 그려집니다. 왕좌가 있었던 중앙 홀의 바닥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깔려 있었고 진흙으로 쌓은 벽들은 현무암을 널빤지처럼 깎은 판석들로 입혀졌습니다. 궁전 안에서는 상아 유물, 청동 칼들, 보석을 비롯해 왕 혹은 신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상도 출토되었습니다. 발견된 문서 중에는 ‘눈에는 눈’이란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도 있습니다. 또한, ‘입니 아디(Ibni Addi)’라 기록된 왕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입니는 야빈과 어원이 같습니다. 학자들은 ‘입니’를 여호수아와 전쟁을 치른 하솔 왕 야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사기 4∼5장에서도 바락과 싸운 장군 시스라가 섬겼던 하솔 왕의 이름도 야빈압니다.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중 동시대에 일어난 일을 각각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전쟁으로 추측하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사사 시대 전(주전 14세기경)이었고, 드보라는 사사 중 한 명이므로 옳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하솔왕 야빈을 세상 세력의 모형이라 본다면, 한 번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통치하는 신약시대는 연이은 영적 전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목적은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엡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늘 살피십시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엡5:15,쉬운성경)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솔로몬의 일대기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의 획득, 백과사전적 지식 등을 증언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언4:7)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려는 열정과 교육”입니다. ‘농업의 힘’이라는 책을 저술한 박현출 작가(1956)는 농림수산부 국장과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전직 공무원입니다. 이분이 이디오피아를 갔을 때,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은 이디오피아 보다 가난하였는데,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이디오피아 국민소득은 일인당 900불이 안됨) 발전하였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박현출 씨는 “우리도 과거에는 너희들과 같이 80%가 농민이었지만, 우리 부모세대가 논밭 팔아서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그 교육의 힘이 오늘 너희와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백년 동안 일본의 발전에 가장 효율적 투자는 교육 분야임이 밝혀진 것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면 패망이 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춘 솔로몬이나 제국주의에 치달은 일본의 결국이 그렇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지혜의 첫 걸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와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얻지만, 생명에 이르는 지혜와 지식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 인간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매일묵상(2025/8/11-1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
에베소서 5:15절
“때가 악하니 가능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쉬운성경)

선교부가 철수 후(1981) 여수 애양원은 부지 1천 여평을 인수하여 나병 환자 재활병원을 세우지만, 잔존한 양관(洋館) 3채를 보존합니다. 하나는 순천 최초의 양관으로(1913) 지하실(100평), 테라스 등을 갖춘 미국 남부 장원 주택입니다. 순천 개척 선교사 프레스턴 가족의 사택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여수 애양원 원장 윌슨(우월순) 가족이, 지금은 재활병원 직원들이 사용합니다. 그 위쪽에 2층 석조 양관(1975년 이전 신축)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지하실(100평)을 갖춘 짙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벽체를 쌓고, 우진각 지붕 형태에 조선식 기와를 올렸으며, 다락 지붕의 내림 마루와 합각 양식이 조선식입니다. 전통의 멋이 담겼으며 애양원 원장 사택입니다. 그 왼쪽 아래에는 단층 양관으로 비어 있습니다. 본래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와 교회였습니다. 순천에 살았던 40명 넘는 선교사 가족들은 자녀의 모국(미국) 학교 진학을 위한 기초 교육과, 모국어(영어)를 사용하여 예배드릴 ‘자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논어는 공자를 ‘시중(時中)의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시중은 “때와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으로, ‘때를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때’를 알아야 노력이 열매 맺게 됩니다(전3:9). 이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이지만, 유교는 하나님을 모르고 신자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에는 늘 경외와 감사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전도서 4:2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전도자는 약자가 억압당하는 부조리를 개탄합니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더 좋은’(better-than) 형식을 사용합니다.왜 그럴까요? 산 자는 계속된 억압을 피할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억압’ 자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전도자는 죽음이 아닌 쾌락을 칭찬(전8:15)합니다. ‘모순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죽음과 쾌락 모두를 삶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복되다”(šbḥ)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됩니다(시편 63:4).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성경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기도한 두 분이 있습니다: 엘리야(왕상19:4)와 요나(욘4:3)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뒤 3년 만에 비를 다시 오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이세벨의 협박을 받자 브엘세바로 도망쳐 죽기를 구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다시 니느웨 성으로 가서 ‘40일 후 성이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허나, 40일 후에도 성이 건재하자 화가 나서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두 선지자 모두 책망하셨습니다. 한편, 바울은 몸 안에 있으면 복음의 열매를 맺고,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되므로, 선택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전도서 4:3절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본절은 억압과 고통을 목격하느니 차라리 출생하지 않는 자를 복되다고 하는데, 염세주의로 치부할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만연한 악을 깊이 성찰한 결과이며, 또 삶의 의미를 묻고 있기도 합니다. ‘출생하지 아니하여’의 원문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자’란 의미로써, 유산이란 함의를 넘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인간은 악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비존재의 평온함’이라 하겠으나,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느껴집니다. 고난 중의욥의 독백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1-26). 성경은 절대로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절의 ‘악한 일’은 권력자의 학대에 방점이 있습니다. 악한 일의 전형으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사건을 논하게 됩니다. 3중의 악함이 보입니다. (1)우리야는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미모의 아내 때문에 죄 없이 살해당합니다. (2) 자신이 충성하는 왕과 군대장관의 손에 의해 죽습니다. (3)우리야는 헷 족속이나, 다윗과 요압은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분하고 삶도 무의미해지며, 당연히 하나님께 심판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땐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여호수아11:10절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2005년 유네스코는 므깃도, 브엘세바, 하솔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그중 하솔은 가장 큰 유적지로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하며, 상부도시(0.1㎢)와 하부도시(0.8㎢)로 구분됩니다. 하솔의 이름은 이미 메소포타미아 유적지 마리(BC18세기)의 문서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세기)에 등장합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는 하솔이 이끄는 많은 가나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증언하는데 가나안 정복 전 하솔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솔 왕을 죽이고, 하솔 성을 불살랐습니다. 발굴된 주전 2000∼1200년경의 부유하고 요새화된 하부도시와 가나안 신전들의 모습은 놀랍다고 합니다. 신전 앞마당(18×33m)에는 사자상 두 마리(1.8m)가 성소를 지켰고, 성전 내부에는 바알이 조각된 석상과 함께 헌물용 석탁들도 있습니다. 또, 돌을 깎아 만든 가나안의 신상 마쩨봇 석상(石像), 제의용 점토 가면, 그리고 은 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우상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욕망이나,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거나, 소원 성취 등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줄 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영원히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편리한 하나님 대체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극복하려면 참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볼 수도 알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분으로, 오직 우리 주님만이 그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열왕기상 3:9,10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오늘 본문은 나라를 안정시킨 솔로몬이 백성의 송사 분별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닫고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현몽하신 주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2006년 작고한 세명대학교 설립자이신 권영우 명예 총장의 일화입니다. 1970년대 초 용인 지역에 자연농원(에버랜드)을 만들려는 사전 토지 구입작업이 삼성가에서 진행되고 있었습지만, 요지에 토지를 소유한 권영우 청년(30대)은 선뜻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보고자 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회장실에 들어갔더니 잿떨이와 함께 이회장의 호통이 날라왔습니다. “사업을 해서 알만 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느냐?” 권청년은 “아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회장님이 매입하고자 한 것을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즉시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토지 구입 가격에 그 동안의 이자만 붙여주시면 매각해 드리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이병철 회장의 적극지원하에 운수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과 건설부 장관을 역임 한 뒤, 교육사업이 이름을 알릴 가장 훌륭한 방법임을 깨닫고 세명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권영우 이사장과 달리 솔로몬은 오직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사를, 은밀한 가운데, 선행과 구제, 그리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매일묵상(2025/8/4-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5)
전도서 1:4절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새번역)

1983년 매산고등학교에서 분리된 매산여고는 선교사들이 살던 매곡동 166번지 일대에 아파트형 교사를 지으면서 양관 두 채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 둘은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학교 양쪽에 위치하며, 지하실을 갖춘 2층 석조 건물(60평)입니다. 창문이나 현관을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처리하여 견고하면서도 실용적입니다. 건축연대는 지붕 모양이나 건축 재질로 보아 1920년대로 추정됩니다. 전형적인 선교사 주택 건물인데 운동장 오른쪽 건물은 해방 후 보이어, 토플 가족이 살았고, 지금은 도서실과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운동장 왼쪽 건물은 ‘결핵 선교사’ 린턴 가족이 살았지만, 음악실, 미술실, 체육실, 인쇄실 등의 용도로 변천되었습니다. 선교사 사택으로 지어진 두 개의 양관의 용도가 바뀐 것은 환경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60년이 지나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지어진 매산학교는 더 이상 선교사의 도움이 불필요 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거나 은퇴하였습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사택은 헐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를 찾아야 하였는데, 도서관, 음악실 등은 좋은 대체 사용처입니다. 그러나, 그 도서관과 음악실 등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마음에는 선교사들의 교육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그 유산의 뿌리는 그리스도로서, 천 마디의 설교 보다 훌륭한 복음의 증거자입니다. 다음 세대를 말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세대는 오고 가지만, 세상은 여전히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선교, 장학, 구제와 같은 선한 사업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한 자를 명하여)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후6:18)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의 본론부(1:12-12:7)는 인생의 절대 허무의 복합적인 양상을 논하면서, 그 극복 가능성 및 최선의 삶을 탐구합니다. 그 중 4장은 학대와 수고(1-12), 권력과 영화의 허무함(13-16)을 다룹니다. 본절은 모든 악 중 ‘학대’에 초점을 맞춘 뒤, 위로자 없음을 깊이 탄식합니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란 표현에는 수동 분사형이 사용되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학대를 받고(수동태), 그 학대가 쉼없이 가해지고 있음(분사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학대’란 권력 남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단순한 폭력이나 괴롭힘을 넘어서, 권력 있는 자들이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억압입니다. ‘권력’이란 그 백성을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면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 타락의 전형입니다. 부조리하며, 인간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 부조리를 목격하고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학대의 문제에 부닺치면 분노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단락에서 교훈하신 대로, 주님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좀 더 높이 들어 학대의 영적 구조와 배경까지 간파해야 합니다. 내일 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이제 곧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에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각 진군해 일본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절대적 환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조선인들은 이것이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의 서곡임을 몰랐습니다. 압제 받는 자의 소원은 구원자이나, 사람을 의지하면 예외 없이 허무와 구토로 귀결됩니다. 본절에서 솔로몬은 해 아래 인생들이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학대를 살피고는, 그들을 구원할 자 내지 그런 소망을 갖고 견디게 할 위로자가 없음을 발견하고 큰 불행임을 토로합니다. 한편, 구원자와 위로자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구조의 영적인 성격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죄의 본성입니다. 권력추구라는 죄의 본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천국이 와도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속죄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롬8:3,4). 둘째, 죽음입니다. 세상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내재되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과 함께 불의와 허무로 가득찬 세상 속에 우리를 제사장으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권한·책임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셋째, 마귀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의 영적 전쟁, 즉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충성)’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자 예수님과 위로자 성령님이 계심으로, 여호수아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의 신전
아모스 8:14절
“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남쪽)과 단(북쪽)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우상을 섬기지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모세율법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 실제로 텔 단에서는 여로보암 시대에 세워졌다가 아합의 시대에 증축되어 제사가 행해진 성소구역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전은 사라졌지만 신전이 서 있었던 단상(19ⅹ19m)과 거대한 돌제단(높이3m, 크기 5ⅹ6m)이 있었습니다. 건물 전체는 베니게 곧 두로와 시돈의 건축 양식이었고, 정교하게 다듬은 돌들로 지진에도 견디도록 벽돌쌓기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발견된 제단은 3m 높이에, 잘 다듬은 돌로 된 계단이 설치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제단을 만들 때 ‘다듬은 돌’이나 ‘층계’를 만들지 말라고 금지합니다(출20:25,26). 따라서, 단의 종교적 부패를 엿보게 됩니다. 비옥하나 저주받은 땅 단은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주전 4세기까지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은, 모세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고 그에 따라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괴되고 받은 땅에서 뽑혀졌습니다. 율법 없는 백성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으며,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재판(再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간직하고 성령님을 따라 걷는 자들입니다(롬8:4).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전도서 3:22절a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배우 김혜자(모태신앙, 권사)는 63년 동안의 친근하고 뛰어난 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또한, 실제의 삶도 굴곡이 없었고, 신앙과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여 후배들의 본이 됩니다. 집안은 유복하였으며, 명문 경기여중·고를 졸업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였지만, 천직을 즐긴 진정한 ‘연기의 프로’입니다. 그녀는 연기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장남(임현식)의 말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연예인이란 타고나야 한다는 걸 옆에서 여실히 느꼈으며,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받은 재능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어느 아나운서는 휴식 중 김혜자 씨가 나무 밑에서 ‘나무아미타불”의 연습을 백 번이나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배우 윤여정은, ’사랑이 뭐길래’를 찍을 때 탈진하였으나, 김혜자 선배는 ‘너 병원가면 모두 기다려야 해 초콜렛 먹고 다시 찍어라’며 자신의 입에 초콜렛을 물려준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김혜자 선생님은 말합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과연 연기에서는 인정사정 없는 ‘늑대’였고 그렇게 그녀는 성공하였습니다. 공자는 논어 옹야 편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설파합니다. 최선의 삶을 살려면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하는데, 배우 김혜자의 삶이 입증합니다. 솔로몬은 수고 중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은 주님의 선물이며(전3:13), 그의 몫임을 강조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매일묵상(2025/7/25-8/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4)
누가복음 8:8절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순천매산학교는 남녀공학인 중학교와 매산고등학교, 매산여자고등학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중학교 운동장 위쪽으로 ‘구레인’관(1921년 교장&선교사 Crane 박사의 한국이름)으로 명명되어 2013년 보수한 본관 건물(3층)이 있고, 그 우편에 일제시대부터 교사로 사용된 ‘매산관’이 있습니다. 매산관은 2층 석조 건물(1916년)로 ‘호랑이돌’이라 불리는 순천 특산 화강암으로 벽을 쌓고 양철 다락 지붕을 올렸습니다. 1999년 6월 경 이덕주 교수의 방문 시, 박종하 교장은 “겉만 그럴듯하지 내부는 병든 암환자 같아요. 학생들은 많고 교실은 적고 혀서 계속 사용하고는 있는디 오래된 건물이라 붕괴 위험에 불안허요. 교사들은 아예 헐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자고 허는디 매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건물이라 헐기도 뭣하고 혀서 어쩔거나 생각 중입니다”는 고충을 토로하였고, 이 교수는 “그래도 순천 근대 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백년 된 건물 하나쯤은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매산관은 2017년 전남교육문화유산 제1호에 지정되었고, 노후교실과 문화재는 보수되었습니다(2020). 십년수목 백년수인 (十年樹木 百年樹人) 이란 말이 있듯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은 백년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이같이 1916년에 건축된 매산관은 100년의 영욕의 세월을 후손들에게 증언하며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100년도 찰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신앙유산과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눅4:4).

전도서 3:21절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19–21절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죽음 앞에서의 평등성, 그리고 지식의 한계를 묵상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인 21절은 사람의 혼은 위로, 짐승의 혼은 아래로 간다는 사후 존재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며,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강조됩니다. 본절의 초점은,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의 혼의 방향과 상관 없이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허무함에 있습니다. ‘혼’은 ‘루아’의 번역이며, ‘ 숨 혹은 숨결’을 뜻합니다. 인간의 ‘루아’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 간다는 표현은 12장 7절에 반복되며, 욥기와 시편(욥 34:14-15; 시 104:29-30)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루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관찰에 근거하여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전도자 역시 ‘누가 알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이에 반해 주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선포하십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평등성만 알고, 죽은 후의 무지를 고백하나, 주님은 죽은 후에 부활이 있으며, 도덕적 책임과 영원한 결과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철학)과 계시인 성경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질문은 구약에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새번역).  

전도서 3:22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1-15절은 받은 분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16-22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의와 죽음의 문제를 성찰한 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라고 교훈합니다(22). 비록 불의나 죽음을 깊이 성찰하면 인생의 덧없음과 무력함을 뼈저리도록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현재를 모조리 부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현재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도 보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람직 함을 논합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아울러 갖고 있기 때문에,  양 요소의 조화를 이루어야 바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그 열쇠는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분은 불의를 완전히 심판하실 분이라 약자는 공의의 심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음 역시 그분의 창조물이라 모든 인간은 사망을 영원히 폐하실 그 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소망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다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구약의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어, 그의 논의는 죽음과 삶의 모순적 긴장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죽음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니, 불신자에게는 심판을 뜻하고, 신자에게는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신전
열왕기상 12 : 28절
“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어서, 요시아 왕은 유다 성문들에 있는 산당을 헐어버렸습니다(열하23:8). 단의 성문에도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돌들 앞에는 제물을 위한 긴 탁자 형태의 돌이 놓여 있어서, 이 돌들은 우상으로 판단됩니다. 왜 우상일까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920년 경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하였고,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유다임금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일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고심하다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열상11:38)을 버리고, 자신의 꾀를 따릅니다. 그것은 단(북쪽)과 벧엘(남쪽)에 각기 신전을 세우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물론, 단과 벧엘은 나름대로의 종교적, 역사적 자취들이 남아 있는 곳이나,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400년 만에 예배처소로 확립된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신탁을 받고, 그 신탁의 성취로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두 번이나 맞닥드립니다. 이때 다윗은 계명을 따르고 망명이라는 고난을 선택하여 결국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스스로 두려워 하면서 자신의 꾀를 따라 우상의 길을 선택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가 올 때, 여로보암이 아니라 다윗이 선택한 계명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핵심으로 정의되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영적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사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독생자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자아성취도, 자기실현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가까워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예31:33). 이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이웃 사랑은 세상의 이웃 사랑과 다릅니다. 그들의 이웃에는 ‘원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하신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선포되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깨닫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모든 진리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사람이 아니다”(롬8:9)라는 사도의 선포는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