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5/26-3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순천 선교부의 출발은 늦었으나 체계적인 선교로 순탄하게 발전합니다. 매곡동 산자락의 토지를 계속 사들여 2만6천 평의 넓은 땅을 확보하였고(1924), 교회, 유치원, 남·여학교, 병원과 기숙사, 남녀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순천 선교부가 종합 선교부로서 “교회·학교·병원”이란 삼각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은, 더럼제일교회 왓츠 장로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입니다. 왓츠는 매년 약속된 선교비 외에, 특별 헌금도 자주 하였습니다. 1920년에 내한해서 폐교된 학교 재건을 위해 상당 액을 기부하였고, 1930년 재 방문 시 병원과 학교 시설비로 무려 8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이는 한화로 80만 원에 해당하며, 서울 기와집 8백 채 값입니다. 전형필 선생은 존 개스비에게 40만 원을 지불하고 고려청자 20점(현재, 4점은 국보, 7점은 보물로 지정)을 구입(1937년) 한 것과 비교되는 금액입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대공황 중이었으나, 그는 조선 선교와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아낌 없이 기부하였습니다. 왓츠 장로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결과 남쪽에서는 최초로 군 단위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순천노회). “이런 의미에서 순천노회는 ‘왓츠기념노회’, 순천 선교부는 ‘왓츠기념선교부’라 할 만하다”고 이덕주 교수는 평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전도서3:9,10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예증한(3:1-8) 전도자는,  9-10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논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모르면,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유익(재산, 명예, 업적)을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10). ‘노고(勞苦)’에 해당하는 원어는 ‘종사하다’란 동사를 어근으로 파생한 명사로서 ‘직업’이나 ‘업무’ 등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서 사용된 8번은 모두 ‘수고, 노고, 일, 재난’ 등 부정적인 뜻을 내포합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을 이 단어 하나로 표현합니다. 즉 밭을 가꾸는 것,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 사람들의 삶의 과정 모두를 ‘노고’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섭리와 인생의 삶을 숙고한 것입니다. 이 노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인간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자 전도자는 신음을 토하고 있습니다(10절). 인간 특히 솔로몬과 같은 지혜자의 교만과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하나님의 망치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내가 보았노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자신의 성찰의 결과를 적어 놓고 있습니다. ‘천라지망’은 듬성듬성한 것처럼 보여도 어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물입니다. 이 수고스러운 인생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그분의 명령(예수에 대한 믿음, 부모공경, 형제와 이웃사랑 등)을 지키는 삶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전도서3:11절 (1)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9~10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인간 수고의 허무함이 강조되나, 1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논합니다. 본절이 1~8절 바로 뒤에 나온다면, 처음 여덟 구절은 매우 긍정적이었겠지만, 이제 또 다른 좌절감을 호소합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인간은 그분의 행하심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먼저, 11절 첫 부분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창세기 1,2장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하십니다. 창조 다음에 섭리가 옵니다. 섭리는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의 뜻을 따라 유지·완성하여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꽃씨를 심고 자라서 꽃이 활짝 펴는 모습과 같습니다. 원문은 ‘모든 것’을 서두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전도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은 원래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선한 섭리 때문이므로, 만약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아름다운 결과에 도달하여, 인간은 두려움과 허무가 아니라 흥분과 기대로 꽉 들어찬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이며, 모든 허무와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소망의 삶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2)
로마서 9: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본절은 말라기1:2,3절의 인용입니다(BC 430).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100년이 지난 때입니다. 에돔 지역은 나바테아 사람들이 정착하였고, 에돔 사람들은 갈렙이 정복하였으나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손들은 버린 땅 마레사로 이주합니다. 이 도시가 은퇴한 그리스 군인의 거주지로 되어 헬라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 것은 알렉산더의 정복이후입니다(BC332). 유적지로는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던 동굴과 지하구조가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장 그리고 비둘기 집 등 석회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의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되었고, 그 중 길이 30미터의 터널형 비둘기 집은 벽에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의 서식을 위한 1900개 벽감(벽에 오목하게 판 공간)을 갖추었습니다. 비둘기는 식용 목적이고 변은 연료였습니다. 지하 공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주거지로, 침략에도 대비하고, 농업 및 공예 산업에도 이용되었습니다. 땅을 포함한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노력에 따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임을 오늘 본문은 밝힙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과 같이 이삭의 자손이나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같습니다. 따라서, 신앙유산을 반드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영생이고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마가복음 4: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오늘 본문은 공관 복음서 모두가 증언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저녁,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명령하십니다. 저편은 이방인들과 거라사의 광인이 사는 곳입니다. 그때 큰 광풍이 일어나 침몰의 순간이 오자,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십니다. 이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따라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1:3,4)고 밝힌 분입니다. 먼저,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삶은 결코 육신적 평안과 안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취하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광풍, 바다, 이방인, 광인 등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 많은 인생을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의 배처럼, 우리의 인생의 배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고 선포하셨으니, 믿음을 갖고 염려와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때때로 인생의 풍랑이 몰아닥치곤 하나, 그런 풍랑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멍에를 지는 믿음 생활은 힘들지 않고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광풍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친히 경험한 사도 베드로는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매일묵상(2025/5/19-23)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왓츠기념 선교부
이사야 42:6,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1911년 8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톤은 선교 개척비와 선교사 모집의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36세의 프레스톤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만, 담당해야만 하죠! 그 무렵 미국 남장로회 교인들은 해외 선교비로 ‘교인 한 명이 매년 4달러씩’ 헌금하자는 평신도 선교운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순회 강연을 하던 프레스톤은 그린빌에서 실업가 그레이엄을 만납니다. 그는 1909년 전주 신흥학교 건립비로 1만 달러(약 20억원)를 기부한 바 있는데, 더럼의 실업가 왓츠를 소개하며 “큰 것을 요구하라.”고 귀띔했습니다. 마침, 왓츠가 장로로 봉직하던 더럼제일교회 담임 목사는 전주의 전킨 선교사 처남이었습니다. 왓츠는 “순천 선교부 전체를 맡아달라.”는 프레스톤의 요청을 받은 뒤, 순천 선교부 개척에 필요한 선교사 13명의 생활비로 매년 13,000 달러(약26억원)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1912. 8월 이 소식을 보고받은 남장로회 선교부는 순천 선교부 개척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은 과학적·체계적·이성적인 선교정책이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1910. 8월 한일합방을 당하여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짐으로 절망하는 순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순천 선교부의 복음과 선진문물(병원과 학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전도서3:8절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3:1절은 인생의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음을 선언하고, 2-8절은 반복 예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본절은 그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국가들의 애증관계인 전쟁과 평화의 때를 다룹니다. 전단의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의 표현은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예측불가입니다. 사랑할 때는 마치 사랑만 있고, 미워할 때는 증오만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감정들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의 문제는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항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신임하여 군대의 장을 삼으나,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영접나온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이라는 노래를 듣자 분노하여 평생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결국 다윗은 쫓겨나 도망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만, 이는 블레셋을 통해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막을 가장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 간의 전쟁과 평화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BC 609년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애굽 왕 느고의 전쟁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고집 부리다가 느고의 손에 죽지만(역하35:20-27),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16:7).  

전도서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3:1-8절은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동함을 예증하고,  9-10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수고의 헛됨을 밝힙니다. 본절은 ‘마 이트론’ 즉, ‘무슨 이익이 있느냐?’로 시작됩니다(참고 1:3절). 이 수사적 질문의 방식은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나 본서에서는 부정적 대답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수고 그 자체는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농사의 경험이 없는 일반인은 파종의 때를 모릅니다. 파종의 시기를 무시하고 파종한다면 헛수고입니다. 또 한국의 농사 경험을 가지고 팔레스틴에서 봄에 밀을 심고 가을에 거두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 겨울철 강우량이 많고 여름은 건조합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밀이 겨울 동안 충분히 자라도록 돕고, 봄철에 수확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10-11월)에 밀을 심고 봄(4-5월)에 거두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굽게 만드신 것들을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곧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공동 창업했지만, 1985년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잡스의 교만과 독단 때문입니다. 잡스는 픽사(Pixar)를 창업한 뒤 토이 스토리의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전문가들이 상대방을 존중하며 일할 때 큰 성과가 산출됨을 깨닫습니다. 그 즈음 애플은 위기에 처하고 잡스의 복귀를 요청하자 성공의 묘리를 깨달은 잡스는 아이폰 성공의 신화를 써 올립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두메아 사람들
오바댜 1: 21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멸망(BC586)에 동참한 에돔을 다스리나,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을 말합니다. 세속사에서 에돔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지만(BC553),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패망한(BC539) 이후.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이 에돔 땅을 차지하고, 에돔 사람들은 네게브 북쪽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헤브론을 수도로 삼고, 마레사와 벧술을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물론 유다인들에게 속하였던 곳이나, 유대 백성은 바벨론에서 귀환 후 예루살렘 중심으로 거주함으로 이 지역은 버려졌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헬라어로 이두메아로 불리웠고, 유대인들은 경멸하였습니다. 외경 집회서(BC180)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민족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혐오스럽다. 세겜에 사는 사마리아인들과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거만하게 살아가는 에돔 사람들이다.”(집회서 50: 25, 26).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으나 야곱 후손이 범죄하자 쫓겨났습니다. 에서의 후예인 에돔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난 이스라엘 민족 대신 약속의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헤롯 시대에는 유다인들도 다스리게 됩니다. 내생의 삶은 은혜에 의해 주어져 믿음으로 받지만, 금생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노력하고 순종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주고 삶의 기술을 습득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예레미야애가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일이란 창조물을 돌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보람을 느끼는 즐거움의 수단이었으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로움이라는 요소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배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지혜자들은 일의 즐거움을 토로합니다. 호학(好學)의 사람 공자는 배움과 즐거움의 관계를 “지지(知之), 호지(好之), 낙지(樂之)”로 설명하는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지지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호지자),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낙지자)고 평가합니다. 또, 노벨상을 수상자 리차드 파인만은 “발견하는 즐거움”이 물리학 공부의 원동력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숨겨두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신앙 생활은, 믿음의 즐거움, 고된 노동, 안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차이는 단연 ‘믿음의 즐거움’입니다. 노동이 즐거움을 주더라도,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고 그 결과는 헛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죽은 뒤에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는 망각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동도 ‘믿음의 이야기’ 내에 위치하면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저주를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견의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멍에를 메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멍에를 져 보면, 그 멍에는 자비롭고 그분의 짐은 가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매일묵상(2025/5/12-16)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아다무락’에 세워진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6:32절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오늘 본문은 빌립보 옥에 갇힌 바울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프레스턴, 벨, 윌슨 등 광주 선교사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광주 선교부 개척 경험을 가진 김윤수를 순천으로 보내 남봉산 자락, 매곡동 언덕 2천여 평 땅을 구입합니다. 신옥우 장로(순천중앙교회)의 말입니다. “본래 여그 일대가 아다무락이라 혀서 아그덜이 죽으면 뼈를 항아리에 넣어 갖다 버리거나 돌무더기로 시체를 덮어 놓던 곳이지라. 사람덜이 잘 오덜 안던 곳이제잉. 그런께 선교사덜이 적은 돈 들여 넓은 땅 살 수 있었던게라.” 광주, 목포처럼 순천 선교부도 버려진 땅에 자리잡았습니다. 즉, 어려서 죽은 아이 시체나 돈 없어 무덤을 제대로 쓸 수 없던 가난한 집에서 풍장 지내던 땅을 헐값에 구입한 것으로 선교사들의 지혜입니다. 문제는, 선교사들의 집과 병원, 학교를 지을 자금 그리고 가족의 생활비였습니다. 이 책무는 1911년 8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는 선교사 프레스턴에게 맡겨졌습니다. 프레스턴은 막막하였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더럼의 실업가 왓츠 장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2천년 전 사도 바울의 일행이 배를 타고 빌립보로 갈 때 유럽의 문명을 싣고 갔다고 평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구원을 얻는다”는 선포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복음의 삶에 적합한 교육(학교), 근대화된 치료 수단(병원)은 필수적이므로, 삼각전략은 단순히 교인확보 수단만은 아닙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전도서3: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본문의 전단과 후단은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아서 여러 해석이 등장하나, 일반적으로 재산이나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물건을 찾고 잃을 때와, 성을 지키고 버릴 때가 있는 것 같이 인생은 이 양 극단의 상황이 언제든지 교차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항해입니다. 고대에서 무역을 위해 항해할 때, 여기 저기 다니며 벌어들인 재산으로 기뻐하지만, 폭풍이 몰아쳐 배가 위태하면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거리 항해가 본격화 된 근대에는 배를 공동 소유하거나 손실을 분산하는 해상 보험이 발달합니다. 예측불허의 세상에서 얻은 삶의 지혜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재산을 얻고 지킬 때가 있고, 단념하거나 잃어버릴 상황이 나타납니다. 양단을 모두 겪으면, 부와 가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토로합니다. 신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밖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가 참된 지혜자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양극단에 놓여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되면 생명은 죽음으로, 울음은 웃음으로, 전쟁은 평화로 뒤바뀌듯이, 인생에는 역경과 순경,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부함과 가난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본문을 통해 인생의 한편에서 다른 극단을 보는 법을 배우면 삶의 균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땐, 성공 중에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겨진 ‘천국이란 보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롬12:12).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전도서3:7절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본절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연결된 하나의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으로 옷을 찢어 비통함을 표시하고, 슬픔이 누그러지면 다시 옷을 수선하여 입었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반영하며, 후단은 슬픔이 너무 클 경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슬픔이 사라진 후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는 모습을 함께 묘사하며, 슬픔과 비통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교훈한다. (2) 각각 다른 상황을 전제: 전단은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나 후단은 겸손히 자신을 숨기며 잠잠히 있을 때와 활발히 자신을 드러낼 때가 있음을 알려주는데,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전자의 해석도 가능하나 후자의 해석이 더 보편적입니다. 성경의 예 두 개를 들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 여호람 때, 아람 장군 나아만은 왕의 친서를 들고 나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왕 여호람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면서 옷을 찢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청하고, 나아만이 오자 하룻 길 되는 요단 강으로 보내어 고칩니다. 기적의 치유를 경험한 나아만은 이스라엘 하나님만 참 신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한편, 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일부는 비웃었으나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의 길르앗 침공 소식을 듣자, 백성을 이끌고 구원합니다. 감복한 백성들은 사울의 왕 됨을 비웃은 자들을 죽이자고 할 때, 사울은 덕을 베풀고 백성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리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언15:2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멸망
시편137: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고대에 종이 대신 도자기 조각이나 석회석 조각을 필기 매체로 사용된 것을 오스트라콘이라 부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과 신앙을 엿볼 수 있고, 이집트나 이스라엘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호르밧 우자(이스라엘)에서 주전 6-7세기경의 히브리어와 에돔어 오스트라콘들이 발견되었으며, 한 히브리어 조각은 아랏 요새에 보내는 에돔의 침략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오히려 유다를 위협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 시(BC586) 함께 유다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본 시편은 그 에돔의 심판을 호소합니다(사34:9;겔25-12-14). 시편의 기도와 선지자들의 저주는 응답되어, 에돔 왕국은 BC553년 바벨론에게 멸망됩니다. 이후 에돔 사람들은 유다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고, 우여곡절 끝에 바벨론에서 돌아와 재건된 유대 사회에 통합되어 사라집니다. 모세 율법을 통해서는 에돔 족속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께 갈 수 없지만, 예수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에돔이나 상관 없이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9:12)와 같이 아모스 선지자는 800년 전에 이 은혜를 예언하였고, 야고보의 주도로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세 율법 적용을 배제하였습니다(행15:13-29).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2:18,새번역)

마태복음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면 단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작자 미상).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담의 일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로 각종 아름답고 맛 있는 과일을 먹고, 주신 배우자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 지식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동산 관리를 위해서는 토질, 물과 동식물의 특성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 중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보고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을 일찍이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토로하였듯이, 아담은 일하면서 배우니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다만, 선악과에 대한 금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지키기 정말 쉬웠습니다. 날씨는 좋았고, 일은 즐거웠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금령을 어기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동물은 말을 듣지 않고,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심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저주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타락 전 아담의 지위 이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을 남겨 놓으시고 부활승천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같이 우리의 일을 즐겁게 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따라서, 일도 구속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매일묵상(2025/5/5-9)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선교부
사도행전 10:3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새번역)

순천은 연산군 시절(1500년) 유배된 김굉필(1454~1504)에 의해 성리학적 심신 수양을 중심으로 한 도학 사상이 뿌리내리며 ‘호남 사림’의 근원이 됩니다. 옥천서원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된 것은 그 영향입니다. 불교 세력 또한 강하여, 백제 시대(514년)에 창건된 송광사는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 사찰이며,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도 자리잡고 있어서, 순천의 기독교 선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외곽 지역에 먼저 전파되어 여러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인의 주류는 양반 선비가 아닌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앙 열정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1906년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나, 남장로교에 의한 본격적인 선교는 오웬, 프레스톤, 코잇 선교사에 의해 시작됩니다(1909). 이들은 부임 직후 순천 지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은 이미 96개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세례 지원자가 7,367명, 주일 예배 참석자는 6,374명에 달하였습니다. 이에 남장로회 선교회에 순천 선교부 개설을 강력히 요청하여, 선교부가 설립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이성과 상식은 중요합니다. 유교와 불교를 공격하여 신자를 얻는 것이 교회의 확장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은 삶 가운데 말씀의 실천으로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성령님의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전도서3: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4절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두 쌍의 대조되는 감정으로 묘사합니다: ‘울음과 슬픔’(부정적 측면), ‘웃음과 춤’(긍정적 측면)입니다. “울고 웃는다”는 개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슬퍼하고 춤춘다’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공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특히, ‘슬퍼할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포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친다’는 의미로서, 지인의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표출하는 생생한 슬픔의 감정을 형상화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감정적 반응을 갖습니다: 좋다, 싫다, 평범하다 등. 그 감정이 증폭되면 울거나 웃게 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애도(슬픔)와 춤으로 나타는데, 전도자는 그 감정을 유발하는 각각의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냥 울고 웃고 슬퍼하고 춤추면 안 됩니다. 그 배후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 인내 그리고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의 정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을 병에 들자, 예수께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간절하심을 보신 주님은 일어나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 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납니다. 심히 울고 애통하던 모든 자들의 감정은 경이감과 함께 웃고 춤추는 감정으로 변했으나, 야이로의 딸은 수 십년 후 또 죽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려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막1: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전도서3: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룬 4절에 이어, 본절은 ‘돌을 모으고 흩으며,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합니다. 전단은 돌을 던지거나 모으는 목적이, 후단은 안거나 안아주지 않는 대상이 제시되지 않아 해석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돌과 관련한 해석입니다: (1)돌을 건물의 재료로 보아 건축 재료를 모으거나 제거하는 행위라는 주장(왕상3:19,25). (2)돌을 밭의 방해물로 보아 돌을 모으거나 던짐으로 밭을 비옥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사5:2). (3) 돌을 보석으로 보아 부를 축적하거나 분배하는 행위라는 주장(출25:7). 위 세 가지는 모두 성경적 근거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므로, 함께 고려하면 될 것입니다. 후단의 경우, 이성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안을 때’는 사랑할 때, ‘안는 일을 멀리할 때’는 사랑이 식었을 때란 의미가 되어, 애정 관계와 같이 매우 개인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임의로 주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만 두려워 하여야만 합니다. 페르샤 왕궁의 술관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훼파 소식에 먼저 민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간구합니다. 넉달이 지나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술 잔을 올릴 때, 주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유다 총독의 직을 받게 하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그 생각의 방향을 도랑물처럼 마음대로 바꾸신다.”(잠언21:1,현대인의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의 신: 코스
역대하 25:14절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유다 왕 아마샤(796-767 BC)는 에돔을 쳐서 그 신들을 가져와 경배하나, 복은커녕 선지자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에돔 신은 ‘코스’로 추정됩니다. 앗수르의 에돔 조공 기록에 따르면, 디글랏빌레셀(745-727 BC)과 산헤립(705-681 BC)의 시대에는 에돔 왕의 이름이 ‘코스 신은 왕’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680-669 BC)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습니다. 에돔 지역의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지역은 자신의 신을 이름에 넣어 짓곤 하였기에 ‘코스’는 에돔 신들 중 하나이나 그 우상의 모습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신약 시대 에돔 지역 거주인 나바테안 사람들의 신 ‘두슈라’(= 산의 신)와 유사한 역할, 즉 ‘산신령’으로 보입니다.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에 따르면, 조선은 무당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양의학의 진출은 그들의 고객을 빼았아 갔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발생한다면 큰 공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의사의 치료(수술)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조선의 공포의 병은 폐병으로, 미신과 무당의 굿이 치유할 수 없었지만, 과학지식으로 무장한 서양의학은 정복했습니다. 복음이 의학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치료 자체는 주님의 능력이므로 병, 특히 중병의 경우 반드시 교회에 알려 함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복음과 역사
사도행전 17: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일전에 한국사 통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명한 한국사 태두이나 그의 결론은 “평생 역사를 연구하였으나 역사의 주체나 방향, 목적도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 학자 뿐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세속사가들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그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늘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이는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사건이 만들어지고 해결되지만, 그 인과관계나 일반법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만이 바른 답을 줍니다. 성경은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곳이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재판장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만, 주님의 죽으심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방향은 심판 날로 곧장 직행하고, 목적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불법, 사망, 병, 마귀, 악인 등)을 바로잡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매일묵상(2025/4/28-5/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남장로회 순천 선교부
요한1서 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고려 시대 승평(지금의 순천)에서는 사또가 이임할 때 8필의 말을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삿짐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괸리들이 말을 되돌려 주지 않자 아예 말을 선물로 주었던 것입니다. 충렬왕에 이르러 양심적인 관리 부사 최석은 말 여덟필이 딸려 오자, 그 사이에 태어난 망아지를 포함 아홉 마리의 말을 돌려 보냈습니다. 승평 사람들은 감동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고, 이것이 조선시대 ‘선정비’ (善政碑)의 효시입니다. 부사 최석 이후 이임 사또에게 말바치는 전통은 끊어졌지만, 말 대신 다른 것으로 바뀌어졌을 뿐입니다. 순천의 교회들도 같은 문화가 있었듯 싶습니다. 이덕주 교수의 말입니다: “팔마비 앞에 “50대 1의 경쟁을 뚫고” 부임한 후배 목사가 찾아와 털어놓은 푸념이 불현듯 생각난다. 백 명 조금 넘는 교인들이 원로 목사님 은퇴금에다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어져 고생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밀린 부담금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팔마비의 고을 순천은 나주와 쌍벽을 이루는 남도 “양반 고을”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터 잡고 있는 지역의 문화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순천 선교의 특징도 이 문화에서 유래합니다. 다만, 교회는 최석처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인데, 그들만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전도서 3:3절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2절에서는 인간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본절부터는 삶의 제반 사건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3절 전단은 ‘죽일 때와 치료할 때’를 병치합니다. ‘죽인다’는 표현은 전쟁 혹은 형 집행을 의미합니다. 전쟁의 발발이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선친께서도 6.25 당시 한 전투에서, 불룩한 양쪽 바지 주머니에 여러 개의 총알이 뚫고 지나갔으나 부상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과 관련된 하늘의 결정 과정을 기록합니다.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회의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길르앗 라못에서 범죄한 아합을 죽이시려고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회의 내용은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 아합과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 분노한 아합은 병사로 변장하여 참전하나 우연히 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역사의 주인되신 주님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치료시킨다’는 표현은 상처나 질병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살려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중한 병에 걸리면 치료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데, 고대에는 더 하였을 것입니다. 세균이란 존재도 모르고, 신체 내부의 장기 위치나, 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그 시대에,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도저히 살아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권면의 배경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전도서 3:3절(2)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3절의 후단 “헐 때와 세울 때”는 어구는, 성벽, 건물, 포도원 등을 세우거나 허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성벽, 왕궁, 정원 등 많은 건축물을 지었습니다(2:4). 시바 여왕은 솔로몬이 건축한 왕궁, 시종들의 관복,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할 정도였습니다(열상10:3-5). 솔로몬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계획과 건축이라 생각하였으나, 후일에 보니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세우고 헐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은 건축물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계획과 활동을 포함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나는 심히 괴로워하였고, 서원기도를 합니다. 그때서야 주님은 한나의 태를 열고 사무엘을 주십니다. 약 5년 뒤, 한나가 실로로 가서 서원을 이행하자, 제사장 엘리는 감동하여 자녀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 후 주님은 한나에게 다섯 자녀를 주셨습니다. 20년이 지나 사무엘은 선지자와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사표요, 왕정을 세우는 토대가 되나, 주님은 불순종한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같이 사무엘서는 역사의 배후에서 가정과 국가를 ‘세우고 허시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들과 정당에 투표하여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고자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통치를 자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라를 통치할 바른 대통령과 정부를 “세울 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에돔, 유다의 속국
역대하 8:17절
“그 때에 솔로몬이 에돔 땅의 성읍인 에시온게벨 항구와 엘롯 항구로 갔더니”(새번역)

성경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지역으로 수도는 보스라입니다(암1:12). 에돔(=붉다)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이라 농업과 목축업에는 부적합하여, 에돔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한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하였습니다. 에돔 땅 자체는 매력이 없었지만 구리광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왕의 대로), 그리고 에시온게벨과 엘롯이란 홍해 항구 때문에 내지국가 유다에게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항구들을 통해 오빌에서 금을 수입한 바 있습니다. 에돔의 홍해 항구 중 하나인 엘롯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지(‘텔 엘-켈레이페’)가 1936년 발굴되었습니다(넬슨 글루엑). 이 유적지는 주전 10세기경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솔로몬 시대의 요새가 있었음도 밝혀졌고, 유다 임금 요담(왕하15:32-38)의 것으로 보이는 인장 역시 발견된 바 있어, 에돔이 유다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에돔은 다윗 왕 때부터 여호사밧 왕의 시대까지 약 150년 동안 유다의 속국이었으나, 여호사밧이 죽자 왕을 세워 독립하였습니다(왕하8:20). 에돔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이삭의 육신의 후손이나, 성경은 에돔을 이방민족 중 하나로 여깁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누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인가?’라는 영적 기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냐 에돔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는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부활하사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부가 중요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히브리서12:1절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갑시다.”(현대인의성경)

“2019년 SBS 금토드라마 ‘열혈사제’의 주인공 김인경 수녀(백지원 배우)는 구담구의 비리 세력을 잡기 위해 잠시 수녀복을 벗고 ‘전설의 타짜 평택 십미호’로 변신하여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보였습니다. 그녀가 도박을 떠난 이유는 죽은 남동생에 대한 죄책감, 죽고 죽이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도박의 허무함과 죄악을 통감한 결과입니다. 김인경 수녀는 주님께 귀의한 이후 20년간 숨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살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평택 십미호로 돌아갑니다. 작가는 그녀의 행동을 ‘단 한 번이다’는 전제와 주임 수녀의 허락, 고해성사를 내세워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작가의 설정에 대하여 시청자들이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일방적인 의도만으로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독자를 감동과 열광으로 몰고가는 별점 만점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역사란 무대에서 상영되는 드라마입니다. 그 배우는 인간이고, 작가는 하나님이십니다. 통상의 드라마의 배우가 죽었다고 퇴장하나 실제는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죽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날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살아 있는 드라마입니다. 결론과 과정이 모두 열려 있으며, 배우와 작가는 서로 상호작용을 통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작가의 스토리와 반전에 놀라며, 배우들의 삶에 감탄하는 독자들은 천만천사들입니다. 그들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매일묵상(2025/4/21-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절간예배당
요한1서 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해방 후 소위 ‘재건파’ 교인들은 멀쩡한 예배당도 동방요배를 했다고 불태웠습니다. 하여, 이덕주 교수는 ‘절간’ 건물에서 예배 드리는 교인들의 심정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 적에 그거 생각할 겨를이 있었간디? 3백명 넘던 교인이 좁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 배가 넘넌 넓은 공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제. 그리고 건물이 무슨 죄가 잇간디? 그 안에서 뭘 하느냐가 문제지…오히려 종교적으로 우리가 이긴 것 안것어?”(박성수장로). 그러나 목포중앙교회는 위기를 맞습니다. “1985년에 ‘절간’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느냐, 그대로 두고 옆에 새 건물을 짓느냐, 아예 건물을 팔고 다른 곳에서 새 건물을 짓느냐 하는 문제로 의견들이 팽팽혔제. 결국 새 건물을 짓자넌 교인들이 유달제일교회를 개척하고 나갔는디 그때 재력 있고 열심 있는 교인들이 많이 나가 타격이 컸지라.” 20년 후 절간 예배당의 ‘남은 자’들도 ‘아예 건물을 팔고’ 새 건물을 건축해 이전했습니다(옥암동, 2007). 성전 건축이란 부차적인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배처소로 인한 분리라면 세상과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가운데 진리를 행하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엡4:15). 형제 사랑 보다 예수 사랑(진리)이 중요한 경우는 갈라서야 하겠지만, 예수 사랑(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한 쪽은 양보하여 형제 사랑을 성취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부차적인 사건으로 숱하게 분열하였으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전도서 3:2절(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자는 앞에서(1절) 모든 일에는 ‘기한과 때”가 있음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 주의를 환기하고, 2~8절은 7의 배수인 14쌍의 각각 반대되는 일들을 대조하여 그 섭리가 어떻게 인간의 모든 일 가운데서 작동하는지를 부각합니다. 7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나 속죄(레16:14)와도 관련되어, 완전성 내지 총체성을 보여주고, ‘둘’은 법정에서 증언을 확증하는 증인의 숫자로서 사실을 확정합니다(신17:6).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두 번 주심으로 풍년과 기근을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이 그 예입니다. 또한, 대조 구문은 히브리 시의 특징으로 7의 배수인 14쌍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사람을 강조하고, ‘바다와 땅’은 모든 피조 세계를 지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의 처음 두 쌍은 전체 생명 주기를 포괄합니다. 먼저, 인간의 생명 주기(태어남…죽음)를 기술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면 생명이 불가능하나, 생명이 떠나는 죽음의 주관자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종결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결정 못하며 그 결정권을 지니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은 불변의 진리입니다(삼상2:6). 따라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이 주어진 기간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것이 참된 선의 열매를 맺는 비법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전도서 3:2절(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말한 전단의 범위를 확대하여, 후단은 식물의 생사를 묘사합니다. 식물을 심고 뽑는 것은 인간의 일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한 과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때(계절 등)를 무시하고 심거나 뽑으면(감자 등)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행한다고 생각되는 사소한 일조차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줍니다. 상식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상황에 따른 삶의 지혜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고 뽑는다’는 말은 국가나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렘24:6;겔36:36). 이때 ‘심다’는 한 국가의 발흥을, ‘뽑다’는 멸망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찮은 식물, 개인, 국가의 존폐를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사44:6)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되심을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체가 없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그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사 하나님 아버지를 자세히 설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18).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고, 지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뽑을 때’란 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비밀 중의 비밀은 만유의 통치자, 재판장, 속죄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깨닫고 행하는 자마다 솔로몬 보다 나은 지혜자입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편119:10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하)
열왕기하 3:13절
“엘리사가….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배반한 모압을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치러 가던 중 물이 떨어지자, 선지자 엘리사에게 신탁을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아 엘리사는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면 물을 얻고 승리한다는 신탁을 줍니다. 연합군은 두루 개천을 팠고, 아침에 미쳐 에돔쪽에서 물이 흘러 와서 가득찼습니다. 기갈 해소는 물론 아침 햇빛으로 물이 붉게 보이자 분란이 생긴 것으로 오인한 모압은 공격하다 패퇴합니다. 절망에 빠진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치자 연합군은 통분하여 철수합니다. 그러나, 메사 석비는 그모스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또한, 석비의 17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땅에 ‘여호와의 화로’를 가지고 있었고 메사가 파괴하였다”는 어구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성경 외 자료로서,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여호와로 불렀음을 증거합니다. 31행은 다윗 가문을 언급한 “베이트 다비드”이란 문구가 있고, 최근에 발견된 텔 단 석비 역시 남왕국 유다 왕조를 “베이트 다비드”로 칭하였습니다. 성경 속 역사를 성경 외 자료가 뒷받침하는 중요한 발굴들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확실하고 하나님의 뜻과 활동을 명확히 증거하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들에 익숙하면, 믿음으로 사는 법과 온갖 선한 일에 능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7, 새번역)

(시험의 때)
신명기 8: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십계명)를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시행세칙인 모세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율법)을 아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이 돌에만 새겨진 문자냐, 아니면 내면에도 새겨졌는지 여부입니다. 그분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후 성서의 톤은 달라집니다. 전에는 불평과 반역적 행위를 꾸짖지 않고, 권면으로 끝났지만, 율법을 받은 후에는 책망과 벌을 내리십니다. 우상숭배자 3천명을 죽이시고(출32장), 불평하자 진 끝을 불사르고(디베라),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탐욕을 낸 자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민11장). 또한 모세를 질투한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셨습니다(민12장). 불순종을 계속 경고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불순종하여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많은 기적을 경험하나, 그 기적이 시험을 이길 믿음을 생산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간직하는지, 아니면, 돈, 출세, 자아실현, 기타의 욕망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무척 알고 싶어하십니다(눅14:25-35).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칭찬과 함께 믿음의 선물을 주시므로, 항상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시길 바랍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5/4/14-18)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5년 부활절은 4/20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의 유월절과의 관계 때문에 춘분(3/20-양력)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0일 후  첫 만월은 4/14일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4/20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4/13-19).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12),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4/13,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기적을 들은 군중들은 환호하였지만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4) 아침 성전에 가다가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하시고, 형제를 용서해야 응답 받음을 교훈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갖고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지혜의 말씀을 듣자 침묵합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 시에는 결혼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막12:13-27).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질문하지 못하자, 오히려 주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고 백성들은 즐거워 하였습니다(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가르침조차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십니다(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립니다(요17장). 찬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면서, 1시간 동안 피땀의 기도와 함께 통곡합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합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임을 밝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시는데(마26:67-68), 베드로는 3번 부인하였습니다(눅22:54-62). 이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은 700년 전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사53: 7-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왕이냐?” 주님은 당신이 왕이나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세상에 왔음을 밝힙니다(요18:36-37).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복음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으나, 주 예수께서 보냄을 받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를 믿는 자는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는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입니다(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둠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12은 주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인 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5/4/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마태복음 3: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목포중앙교회는 1923년에 시작되어, 성장을 거듭하다 1957년 일본 절 동본원사 건물과 대지를 5백만원에 구입, 50년 동안 예배드렸습니다. 목포 사람들은 “절간 예배당”으로 불렀는데, 구입일화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목포 남부교회와 정광사가 매매 합의에 거의 도달 하였을 때, 그 정보를 입수한 목포중앙교회는 웃돈을 주고 가로챘으며, 거절 당할 우려에 교회가 아니라 김요한 장로 2인 명의로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2007년 목포중앙교회는 ‘절간 예배당’을 매각하고 현 옥암동 새성전을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절간 예배당’의 유래를 찾다가 보현정사 주지 정각 스님을 만났는데, 정각 스님은 1980년대 목사, 신부들과 지역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기독교에도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절간 건물 뿐 아니라 ‘문화재급’ 탱화와 부처상까지 팔아 사업 자금을 마련한 승려(등암 스님)의 소행을 비판하고, 이어 기독교에 대하여도 한 마디 하였습니다. “자유당 시절, 불교계 안에 대처승과 비구니 사이에 약간의 분쟁이 있었는디 그걸 빌미로 정부에서 법으로 불교계를 탄압하고 많은 불교 재산을 국가 재산으로 접수하였지라. 그때 기독교인들이 정부 권력을 앞세워 불교 재산을 솔찮게 가로챘는디 우리 불교계 원로들 중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도 섭섭허게 생각허는 분이 많지라. 언젠가는 밝혀야 헐 부분이제.” 한국 교회 현대사에서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이웃의 계명은 원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불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5:14) 

전도서 2: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본절 중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는 부분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의 통치자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고,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시험에 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유형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불의의 재물과 권력을 잡고 으시대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끝은 패망이란 사실은 상식입니다. 다만,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신속히 집행되지 않는다면, 경건한 사람들은 그 박탈감을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욥, 아삽, 요셉의 인내는 좋은 모범입니다. 욥은 극한 고난 끝에 깨달음과 축복된 결말이 주어졌고, 아삽은 성소에서 예배드릴 때 고난 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시73편). 요셉은 고난 중에 지혜을 쌓고, 연마한 지혜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훌륭한 통치 업적을 남깁니다. 다음의 유형은 부지런하나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딤후2:6)는 삶의 원리를 따라 부지런히 일하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없습니다. 부를 축적하면 선한 행위 보다는 자신의 창고를 넓히는데만 관심 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는 그 밤에, 그가 부지런히 모은 재물은 타인의 소유가 될 것이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로서, 그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는 부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전도서 3: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1-2:23절은 인생의 절대 허무를, 2:24-3:22절은 허무극복 방법을 제시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 2:24-26절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라는 교훈을, (2)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때와 시간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앞의 교훈을 뒤받침합니다. 즉, 솔로몬은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밝히고(2:24), 본단락에서는 모든 일에 때와 기한이 있으며,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시고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장 좋다는 충고입니다. ‘범사에’는 ‘모든 것’(everything)을 뜻하는 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피조물로서 겸허함과 창조주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한’과 ‘때’가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데는 반드시 시간질서가 담겨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천하 만사)과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은 이어지는 2-8절, 총 7개 절에서 28개의 중요한 인생사를 예시하고, 성취의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심을 교훈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살면서 그분이 이루어 주심을 믿고 기뻐하는 신뢰의 삶은 인생이 가야할 길입니다. 노인이 된 다윗 왕은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시편37:3-6,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메사 석비(상)
열왕기하 3:4절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듯이 모압의 신 그모스에 대하여 모압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메사 석비는 요르단 디반에서 출토되었는데(1868년), 성경 외에 가나안 땅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로서 중요합니다. 재질은 현무암(높이 1m 너비 60-68cm)이고, 언어는 모압어로써,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압 임금 메사가 임금이 되었을 때 그는 그모스 신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고 그모스 신은 당시 모압 땅 메드바를 차지하고 있던 오므리와 그의 아들을 부수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메사는 그모스 신의 자비로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고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에돔을 땅에서 몰아냈다.” 열왕기하 3장은 그 전쟁의 배경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죽자(BC 852) 모압은 배반합니다(왕하3:1-5). 이스라엘(여호람), 유다(여호사밧), 에돔이 연합하여 모압을 칠 때 곤경에 처하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다급한 모압 왕 메사는 장자를 죽여 그모스에게 바쳤고, 연합군은 통탄하면서 회군합니다(3:27). 이때 석비는 메사가 이스라엘 칠천 군사를 죽였으며, 승리는 그모스의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마치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이긴 다윗 왕에 대한 성경의 진술과 비슷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정확합니다. 아합의 이름은 앗수르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에 나와 있고(BC853),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은 메사 석비가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압 입장에서 기록하였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책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완전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딤후3:17,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 8: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내가 늙어 싸워 이길 수는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는 말을 남기고 69세의 나이에 청군과 싸워 장렬히 전사합니다. 기록에 보면 온 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처럼 되었다 합니다 그의 가문은 단번에 명문가로 발돋음 하였고, 12대에 걸친 만석의 부를 이어갈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조상 최진립의 충군애국의 정신은 후손들의 마음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그 후손들은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의 열매를 못 맺겠습니까? 열매 맺는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뿌리를 둔 믿음이 자라서 아름다운 결실이 맺어지는 삶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갈렙의 예가 보여줍니다. 갈렙은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민14:9)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45년 간 섬길 기회를 찾다가 드디어 잡았습니다. 유대지파가 추첨하여 받은 땅 중앙에 모두가 두려워 하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갈렙은 85세였지만 최진립과 달리 이들을 내쫓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믿음의 열매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보물처럼 간직하여, 행동의 시기(희생의 시기)가 왔을 때 주저 없이 행동하고 말씀의 열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는 사랑이요, 믿음의 열매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4,35)

매일묵상(2025/3/31-4/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6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태평양 전쟁(1941년) 이후 일제는 ‘천황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선생 박연세는, 목사가 되어 시무한 교회에서 신사참배 동참을 참회하던 중, ‘천황숭배’에 직면하자 박해를 각오합니다.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일’을 지키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보고, 특별예배 때(1942.7.7) “성전(聖戰)이 아니라 약육강식일 뿐이다”고 선포하고, 주일예배 때(8/30)는 “육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는 설교를 하여, 천황을 ‘현인신’(顯人神)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교인 김동만, 전태균 등이 경찰당국에 알렸고 박연세 목사는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1942.11.10). 당시 18세였던 딸 박지영 권사는 “그날 저녁상을 받으시구 몇 숫갈 뜨지 않으셨는디, 형사 서너 명이 들어와 아버님과 함께 서재로 들어가시드만요. 그리곤 얼마 있다가 나오셔서 ‘한복 좀 가져오시오’ 하시드만 한복을 입으시구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직후 박연세 목사는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습니다(1944.2.15). 일제가 감방 마루 아래로 물을 흘려 보내 그 안에서 얼려죽였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없으나, 주님의 길을 따른 그분의 믿음과 애국심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전도서2: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1:12-2:23절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절대 허무와 절망감을 토로하나, 2:24-3:22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허무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구체적으로, 2:24-26절은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세를, 3:16-22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신실한 삶을 교훈합니다. 본절 전단은 축복 받은 삶의 모습을 ‘먹고 마시며 수고한다’로 표현합니다. ‘먹고 마시며’는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수고한다’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를 통한 축복을 말합니다. 안락한 삶과 노동의 즐거움이란 표현은 1:12-2:23절에서 묘사된 비탄에 대한 부정입니다. 즉 인생의 매일이 괴로움이며 노동의 결과는 헛되고 그 자체는 큰 악이라고 소리친 전도자가 24절에 들어서서갑자기 긍정의 톤으로 바꾼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24절 후단에서 그 깨달음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내재돼 있던 긍정적인 측면이 부상하면서, 삶에는 통일성이 부여되고,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솔로몬은 이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명한 곤충학자 최재천 박사는 인간을 단백질이 모여 만든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삶의 의미나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서,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간지는 3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간절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만, 주님께 돌아가면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2:25,26절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4절은 최선의 삶은 일상의 책임을 다하는 중에 기쁨을 누리는 것이나,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25,26절은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증언합니다. 먼저,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는 구절은 “그분 없이 누가 먹고 즐길 수 있느냐”로도 번역됩니다. 전자는 솔로몬 자신이 최상의 희락을 누렸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의 진술(26)에 권위를 부여하고, 후자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문맥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에 후자가 타당합니다. 26절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는지에 대한 솔로몬의 관찰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지혜, 지식, 희락’인데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짐을 깨달았다는 언급입니다. 잠언에서 ‘지혜, 지식, 희락’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 그리고 기쁨이 근본을 형성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힘든 일을 주시고, 그 재산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목적은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떠나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헛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고, 소망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그모스와 몰렉
열왕기하 3:27절
“그래서 모압 왕은,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장자를 죽여,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그 곳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새번역)


오늘 본문은 비씨 840년경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포위된 모압 왕 메사가 신 그모스에게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며, 암몬 신 몰렉(몰록)의 제사관습과 같습니다.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일까요? 학자들은 다투고 있습니다. 한 쪽은 구약성경은 그모스를 모압의 신으로, 몰렉을 암몬의 신으로 구별하여 부르므로 각각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쪽은,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모압 임금 메사의 아버지의 이름은 ‘케모쉬 멜렉’이며, 이는 ‘그모스는 임금이다’ 혹은 ‘그모스는 몰렉이다’로 읽힐 수 있어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같이 바른 성서 이해를 위해서도 고고학은 중요합니다. 그 석비는 메사가 전쟁 중에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아쉬타르-그모스’에게 헌정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쉬타르-그모스’는 여신이며 아세라(=아쉬타르)로 부르는 바알의 배우자이지만(가나안 지경), 모압 땅에서는 최고의 신 그모스의 배우자로 보는데, 우상이란 모두 인간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철저히 인간적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저주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사 하나님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므로, 인간적인 모든 상상을 접고 주님의 계시를 붙잡아야 합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신명기1:36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전심 전력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밟은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현대인의성경)
갈렙은 40년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 전쟁 5년 동안 이 말씀을 간직하다가, 유다지파의 땅이 제비뽑기로 확정되자, 가장 정복하기 힘든 요새 헤브론(920미터)을 요구하였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주님께 순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차지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85세의 갈렙은 왜 헤브론을 원했을까요? 2개가 떠오릅니다. (1)역사와 전통적 측면: 헤브론(‘연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미 700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온 아브라함의 삶의 터전이었고,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 등 조상들의 매장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조상들이 이방인이었지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00년을 살아간 유서깊은 지역이었습니다. (2) 유다지파 화근의 제거(수14:15): 아낙자손은 거인 중에도 가장 키가 큰 자들로서, 45년 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두려워 한 그 거인들이었습니다. 유다지파 존속에 관하여 큰 위협 요인이라, 만약 이들을 쫓아낸다면 유다지파의 땅을 보호하며, 자신의 후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수아 앞으로 나갔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정탐꾼일 때나 85세의 지금이나 장군으로서 섬길 자리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위하여 가장 힘든 일을 맡아 완수해 낼 책임으로 해석한 그 믿음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매일묵상(2025/3/24-2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목포 양동교회의 저항과 수난 전통은 일제말기 박세연 목사님의 투옥과 순교로 이어집니다. 박목사님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군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출소 후 박연세 교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졸업하였고,이리 등에서 목회하다가 1926년 양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10년 간 교회는 부흥하여, 죽동교회(1927년), 연동교회(1928년), 온금동교회(1929년), 중앙교회(1933년) 등이 분립 개척되었습니다. 일제말기가 다가오면서 후반 5년의 목회는 갈등과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 전남노회장으로 참석하여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여…”라고 ‘양심과 배치된’ 보고서를 제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동조하였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훼절한 민족주의자’와 ‘양심에 꺼림이 있는 목사’의 오명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에 이어 ‘천황숭배’를 강요하자, 조선독립을 바라는 민족주의자이며, 예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박연세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에 인정 받을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집니다. 우리도 시험에 실패하였다고 좌절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또 한 번의 테스트를 보내실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나가면 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2).    

전도서 2:22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전도자는 18-21절에서 죽음 때문에 자신의 모든 수고의 결과를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수고 하지 않은 자에게 무조건 넘겨주어야 하는 삶의 부조리를 탄식합니다. 22-23절은 혹시라도 노동의 과정이나 삶의 과정이 주는 기쁨과 열매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의미가 있다는 질문에 답합니다. “무슨 소득이 있으랴?”의 직역은 “그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 입니다.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란 그 수고가 단지 육체에 한정되지 않고, 마음의 고통도 수반함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자신의 분야에 어느 정도라도 성과를 내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에 대충 대충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업적은커녕 최선을 다해도 생존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곧 패가망신입니다(잠18:9). 전도자의 삶은 달랐습니다. 지혜자인 그는 최선을 다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죽음이 임박하자 업적에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온 자신의 잘못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권력자와 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지혜 그리고 업적을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절대 강자의 도구이며 의지의 표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때 삶의 의미와 영생 모두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전도서2:23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원문은 이유 접속사 ‘키’를 도입하여, 22절의 수사적 질문과 암묵적 답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일평생’이란 ‘그의 모든 날’의 의역이며,  ‘근심하며’는 속상하여 식음을 전폐한 한나와 같은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묘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사람의 매일이 고통스럽고 일은 괴롭다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통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와도 여러 가지 걱정 근심, 재물에 대한 집착 등으로 마음에 쉼이 없으니, ‘아, 이것도 헛됩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허무의 고백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그의 인생관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우리야 사건이외에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바른 믿음 위에 세웠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따라서, 동일하게 수고하며 일생을 살아가도 허무하다고 외치는 솔로몬과 주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간 다윗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과 성공 그 자체만 바라 보는 삶은, 그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림자를 붙잡는 것처럼 허무하지만(죽으면 모든 것이 타인의 소유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살아가면 점점 소망과 확신에 차게 됩니다. 실로 주님의 뜻을 행하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신 그모스
신명기5:9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모압은 다윗에게 정복 당한 후 조공을 바치다가(150년 간) 왕 메사 때 벗어나지만, 모압의 문화와 신 그모스는 이스라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솔로몬은 모압 여인을 취하였고, 예루살렘 동쪽 어느 산봉우리(멸망산)에 그모스 신전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신전은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3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모스에게 제사 드린 장소입니다(왕하23:13). 가나안의 신 그모스는 주전2500-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에블라 문서에 가미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주전1400)와 예레미야서(주전600)에도 계속 등장하는 모압의 주요 신입니다(민21:29; 렘48:7,13).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 부르지만(렘48:46), 그모스란 이름의 어원은 물론, 그 모습이나 종교적 역할도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다만, 모압 땅에서 출토된 메사 석비가 그모스 신이 전쟁에 관여함을 보여주는데, 열왕기 3장 사건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제2계명(우상숭배금지)을 어긴 자에 대한 형벌을 말합니다. 우리의 우상이 멸망산에 있는 그모스처럼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벌이 집행될 것입니다. 속히 쳐부수어야 하지만 ‘탐심은 우상숭배다’(골3:5)라고 할 정도로 삶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우상을 인간의 힘으로 깨뜨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직접 우리 우상-재산, 명예, 권력, 건강, 자녀, 지식 등-을 깨뜨리고 계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
   
레위기18: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백성’은 출애굽의 목적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모세 율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도 그들 안에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던 백성의 삶은 모세율법을 받고 크게 달라집니다. 먼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의 왕입니다. 1년의 삶은 농축수 산업과 함께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하나님께 대한 예배 중심입니다. 결혼은 4촌이 넘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고, 모세의 부모는 고모와 조카 사이 였으나 근친혼은 금지되고 친척구제를 위해 고엘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임명하셨으니, ‘모세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6:2). 그리스도의 법이란, 일부일처 제도, 원칙적인 이혼금지, 정당한 정부의 권위에 순종 등 일반적인 명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섬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함으로, 모세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각 신자와 교회를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27권)은 주님의 뜻이 상세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