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8/18-22)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2)
사도행전 1: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어린 시절 양관 언덕은 별천지였지요. 울창한 숲에 사철 따라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다웠고, 철조망 안쪽의 파란 잔디밭에서 조랑말을 타고 노는 선교사 자녀들의 모습은 깡통 차기를 하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지요. 겨울에 선교사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면 우리도 따라가 토끼와 노루 몰이꾼이 되곤 했지요. 그래도 우월슨 선교사나 인휴 선교사 같은 분은 한국 아이들을 좋아해서 성탄절 같은 날 자기네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어 주고 과자를 나누어 주었어요. 양관에 들어갔다 온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김동철 집사의 증언입니다. 양관 동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순천의 ‘별유천지’(別有天地), 즉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권위적이고 열등하게 여긴 분들도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윤치호(1865-1945) 선생이 원산에서 거주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와서 상당기간 머물렀으나 안부를 전하지 않고 떠난 것을 두고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과 울분 그리고 억압의 환경은 교만한 조선민족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당장 한민족을 일제로부터 구원 하신 것은 아니나(기복신앙),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미국을 통해 해방시키셨습니다(섭리신앙). 그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고난을 겪었음을 생각하면 기복신앙과 섭리신앙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서 4: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앞선 1-3절은 학대를 받으나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을 탄식하며, 죽은 자 심지어 출생하지 않아 그런 비극을 목격하지 않은 자를 복되다고 하나, 4-6절은 그 이외의 여러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 힘든 인생의 허무를 토로합니다. 본절은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여 좋은 성과를 내거나, 능숙한 재주를 사용하여 일을 맡아 성공 하여도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으로 귀결됨으로, 사회적인 성공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면 열심히 사는 삶 자체 역시 의미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부조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는데, 우리 민족은 이런 상활을 하도 많이 겪어 “재인박명”이란 단어까지 나왔습니다. 아무리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성공하였다면 당연히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타인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면 학대받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열심히 일하고 재주를 습득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자체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상에 직면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술이 처신술입니다. 중국 한 나라의 개국공신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항우를 이기자, 집에 칩거하다가 신선이 되겠다고 도주하였습니다. 만약 재상의 자리를 가졌다면 유방과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장수하다가 죽는 것은 축복 중 으뜸으로 솔로몬도 갖지 못하였고,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창15:15).

전도서 4:5절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새번역)

4절은 수고하며 일해도 그 결과는 무익할 수 있음을 밝혔지만, 이를 오해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절은 그러한 극단을 경계합니다. 열심히 일해 성공하여도 행복 대신 시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게으르게 살면 반드시 파멸합니다. ‘팔장을 끼고’란 말은 ‘일하기 싫어서 팔장을 낀 채 빈둥거리는 모습’입니다. 특히, 원문은 현재형을 사용하여 잠시 동안의 휴식이 아닌 계속적인 게으른 상태를 표현합니다. 잠언은 게으름의 결국은 ‘가난과 궁핍’임을 거듭 밝히나(잠19:15), 본문의 표현은 더욱 매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플 뿐 아니라 그들은 결국 “제 몸만 축냅니다.” 게으른 자가 당할 자포자기 결과와 그 파멸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제 몸만 축낸다’는 표현은, 재물을 증식하지 못하고 다 써버리거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 사는 모습 등에 대한 묘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우둔하고 완고한 자를 지칭하며 상황에 따른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인생의 노력과 성취가 궁극적인 행복이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앉아 노는 것은 더욱 어리석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마25:24-30). 그는 실패와 이에 따른 질책을 두려워 하여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 두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결국은 엄한 심판입니다. 신앙과 일의 윤리가 합치된 교훈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4:12, 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사사기 4:2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하솔 임금 야빈의 궁전 전체는 다 발굴되지 않았지만 궁전의 동쪽 입구 길이는 39m, 현존 벽의 높이는 2.4m가 넘는 것으로 보아 궁전의 크기가 그려집니다. 왕좌가 있었던 중앙 홀의 바닥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깔려 있었고 진흙으로 쌓은 벽들은 현무암을 널빤지처럼 깎은 판석들로 입혀졌습니다. 궁전 안에서는 상아 유물, 청동 칼들, 보석을 비롯해 왕 혹은 신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상도 출토되었습니다. 발견된 문서 중에는 ‘눈에는 눈’이란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도 있습니다. 또한, ‘입니 아디(Ibni Addi)’라 기록된 왕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입니는 야빈과 어원이 같습니다. 학자들은 ‘입니’를 여호수아와 전쟁을 치른 하솔 왕 야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사기 4∼5장에서도 바락과 싸운 장군 시스라가 섬겼던 하솔 왕의 이름도 야빈압니다.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중 동시대에 일어난 일을 각각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전쟁으로 추측하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사사 시대 전(주전 14세기경)이었고, 드보라는 사사 중 한 명이므로 옳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하솔왕 야빈을 세상 세력의 모형이라 본다면, 한 번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통치하는 신약시대는 연이은 영적 전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목적은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엡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늘 살피십시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엡5:15,쉬운성경)

잠언 3: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솔로몬의 일대기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의 획득, 백과사전적 지식 등을 증언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언4:7)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려는 열정과 교육”입니다. ‘농업의 힘’이라는 책을 저술한 박현출 작가(1956)는 농림수산부 국장과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전직 공무원입니다. 이분이 이디오피아를 갔을 때,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은 이디오피아 보다 가난하였는데,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이디오피아 국민소득은 일인당 900불이 안됨) 발전하였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박현출 씨는 “우리도 과거에는 너희들과 같이 80%가 농민이었지만, 우리 부모세대가 논밭 팔아서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그 교육의 힘이 오늘 너희와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백년 동안 일본의 발전에 가장 효율적 투자는 교육 분야임이 밝혀진 것도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면 패망이 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춘 솔로몬이나 제국주의에 치달은 일본의 결국이 그렇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지혜의 첫 걸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와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얻지만, 생명에 이르는 지혜와 지식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 인간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매일묵상(2025/8/11-1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매곡동 양관들
에베소서 5:15절
“때가 악하니 가능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쉬운성경)

선교부가 철수 후(1981) 여수 애양원은 부지 1천 여평을 인수하여 나병 환자 재활병원을 세우지만, 잔존한 양관(洋館) 3채를 보존합니다. 하나는 순천 최초의 양관으로(1913) 지하실(100평), 테라스 등을 갖춘 미국 남부 장원 주택입니다. 순천 개척 선교사 프레스턴 가족의 사택이었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여수 애양원 원장 윌슨(우월순) 가족이, 지금은 재활병원 직원들이 사용합니다. 그 위쪽에 2층 석조 양관(1975년 이전 신축)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지하실(100평)을 갖춘 짙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벽체를 쌓고, 우진각 지붕 형태에 조선식 기와를 올렸으며, 다락 지붕의 내림 마루와 합각 양식이 조선식입니다. 전통의 멋이 담겼으며 애양원 원장 사택입니다. 그 왼쪽 아래에는 단층 양관으로 비어 있습니다. 본래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와 교회였습니다. 순천에 살았던 40명 넘는 선교사 가족들은 자녀의 모국(미국) 학교 진학을 위한 기초 교육과, 모국어(영어)를 사용하여 예배드릴 ‘자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논어는 공자를 ‘시중(時中)의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시중은 “때와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으로, ‘때를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때’를 알아야 노력이 열매 맺게 됩니다(전3:9). 이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이지만, 유교는 하나님을 모르고 신자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에는 늘 경외와 감사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전도서 4:2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전도자는 약자가 억압당하는 부조리를 개탄합니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더 좋은’(better-than) 형식을 사용합니다.왜 그럴까요? 산 자는 계속된 억압을 피할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억압’ 자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전도자는 죽음이 아닌 쾌락을 칭찬(전8:15)합니다. ‘모순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죽음과 쾌락 모두를 삶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복되다”(šbḥ)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됩니다(시편 63:4).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성경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기도한 두 분이 있습니다: 엘리야(왕상19:4)와 요나(욘4:3)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뒤 3년 만에 비를 다시 오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이세벨의 협박을 받자 브엘세바로 도망쳐 죽기를 구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다시 니느웨 성으로 가서 ‘40일 후 성이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허나, 40일 후에도 성이 건재하자 화가 나서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두 선지자 모두 책망하셨습니다. 한편, 바울은 몸 안에 있으면 복음의 열매를 맺고,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되므로, 선택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전도서 4:3절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본절은 억압과 고통을 목격하느니 차라리 출생하지 않는 자를 복되다고 하는데, 염세주의로 치부할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만연한 악을 깊이 성찰한 결과이며, 또 삶의 의미를 묻고 있기도 합니다. ‘출생하지 아니하여’의 원문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자’란 의미로써, 유산이란 함의를 넘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인간은 악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비존재의 평온함’이라 하겠으나,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느껴집니다. 고난 중의욥의 독백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1-26). 성경은 절대로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절의 ‘악한 일’은 권력자의 학대에 방점이 있습니다. 악한 일의 전형으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사건을 논하게 됩니다. 3중의 악함이 보입니다. (1)우리야는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미모의 아내 때문에 죄 없이 살해당합니다. (2) 자신이 충성하는 왕과 군대장관의 손에 의해 죽습니다. (3)우리야는 헷 족속이나, 다윗과 요압은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분하고 삶도 무의미해지며, 당연히 하나님께 심판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땐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하솔
여호수아11:10절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2005년 유네스코는 므깃도, 브엘세바, 하솔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그중 하솔은 가장 큰 유적지로서,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하며, 상부도시(0.1㎢)와 하부도시(0.8㎢)로 구분됩니다. 하솔의 이름은 이미 메소포타미아 유적지 마리(BC18세기)의 문서나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BC14세기)에 등장합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는 하솔이 이끄는 많은 가나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증언하는데 가나안 정복 전 하솔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솔 왕을 죽이고, 하솔 성을 불살랐습니다. 발굴된 주전 2000∼1200년경의 부유하고 요새화된 하부도시와 가나안 신전들의 모습은 놀랍다고 합니다. 신전 앞마당(18×33m)에는 사자상 두 마리(1.8m)가 성소를 지켰고, 성전 내부에는 바알이 조각된 석상과 함께 헌물용 석탁들도 있습니다. 또, 돌을 깎아 만든 가나안의 신상 마쩨봇 석상(石像), 제의용 점토 가면, 그리고 은 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우상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욕망이나,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거나, 소원 성취 등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줄 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영원히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편리한 하나님 대체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극복하려면 참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볼 수도 알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분으로, 오직 우리 주님만이 그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열왕기상 3:9,10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오늘 본문은 나라를 안정시킨 솔로몬이 백성의 송사 분별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닫고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현몽하신 주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2006년 작고한 세명대학교 설립자이신 권영우 명예 총장의 일화입니다. 1970년대 초 용인 지역에 자연농원(에버랜드)을 만들려는 사전 토지 구입작업이 삼성가에서 진행되고 있었습지만, 요지에 토지를 소유한 권영우 청년(30대)은 선뜻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보고자 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회장실에 들어갔더니 잿떨이와 함께 이회장의 호통이 날라왔습니다. “사업을 해서 알만 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느냐?” 권청년은 “아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회장님이 매입하고자 한 것을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즉시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토지 구입 가격에 그 동안의 이자만 붙여주시면 매각해 드리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이병철 회장의 적극지원하에 운수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과 건설부 장관을 역임 한 뒤, 교육사업이 이름을 알릴 가장 훌륭한 방법임을 깨닫고 세명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권영우 이사장과 달리 솔로몬은 오직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사를, 은밀한 가운데, 선행과 구제, 그리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매일묵상(2025/8/4-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5)
전도서 1:4절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새번역)

1983년 매산고등학교에서 분리된 매산여고는 선교사들이 살던 매곡동 166번지 일대에 아파트형 교사를 지으면서 양관 두 채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 둘은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학교 양쪽에 위치하며, 지하실을 갖춘 2층 석조 건물(60평)입니다. 창문이나 현관을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처리하여 견고하면서도 실용적입니다. 건축연대는 지붕 모양이나 건축 재질로 보아 1920년대로 추정됩니다. 전형적인 선교사 주택 건물인데 운동장 오른쪽 건물은 해방 후 보이어, 토플 가족이 살았고, 지금은 도서실과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운동장 왼쪽 건물은 ‘결핵 선교사’ 린턴 가족이 살았지만, 음악실, 미술실, 체육실, 인쇄실 등의 용도로 변천되었습니다. 선교사 사택으로 지어진 두 개의 양관의 용도가 바뀐 것은 환경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60년이 지나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지어진 매산학교는 더 이상 선교사의 도움이 불필요 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거나 은퇴하였습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사택은 헐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를 찾아야 하였는데, 도서관, 음악실 등은 좋은 대체 사용처입니다. 그러나, 그 도서관과 음악실 등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마음에는 선교사들의 교육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그 유산의 뿌리는 그리스도로서, 천 마디의 설교 보다 훌륭한 복음의 증거자입니다. 다음 세대를 말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세대는 오고 가지만, 세상은 여전히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선교, 장학, 구제와 같은 선한 사업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한 자를 명하여)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후6:18)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의 본론부(1:12-12:7)는 인생의 절대 허무의 복합적인 양상을 논하면서, 그 극복 가능성 및 최선의 삶을 탐구합니다. 그 중 4장은 학대와 수고(1-12), 권력과 영화의 허무함(13-16)을 다룹니다. 본절은 모든 악 중 ‘학대’에 초점을 맞춘 뒤, 위로자 없음을 깊이 탄식합니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란 표현에는 수동 분사형이 사용되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학대를 받고(수동태), 그 학대가 쉼없이 가해지고 있음(분사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학대’란 권력 남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단순한 폭력이나 괴롭힘을 넘어서, 권력 있는 자들이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억압입니다. ‘권력’이란 그 백성을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면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 타락의 전형입니다. 부조리하며, 인간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 부조리를 목격하고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이들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학대의 문제에 부닺치면 분노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단락에서 교훈하신 대로, 주님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좀 더 높이 들어 학대의 영적 구조와 배경까지 간파해야 합니다. 내일 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전도서 4:1절- 학대와 위로자(2)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이제 곧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에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각 진군해 일본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절대적 환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조선인들은 이것이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의 서곡임을 몰랐습니다. 압제 받는 자의 소원은 구원자이나, 사람을 의지하면 예외 없이 허무와 구토로 귀결됩니다. 본절에서 솔로몬은 해 아래 인생들이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학대를 살피고는, 그들을 구원할 자 내지 그런 소망을 갖고 견디게 할 위로자가 없음을 발견하고 큰 불행임을 토로합니다. 한편, 구원자와 위로자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구조의 영적인 성격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죄의 본성입니다. 권력추구라는 죄의 본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천국이 와도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속죄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롬8:3,4). 둘째, 죽음입니다. 세상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내재되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의 약속과 함께 불의와 허무로 가득찬 세상 속에 우리를 제사장으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권한·책임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셋째, 마귀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의 영적 전쟁, 즉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충성)’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자 예수님과 위로자 성령님이 계심으로, 여호수아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의 신전
아모스 8:14절
“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남쪽)과 단(북쪽)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우상을 섬기지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모세율법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 실제로 텔 단에서는 여로보암 시대에 세워졌다가 아합의 시대에 증축되어 제사가 행해진 성소구역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전은 사라졌지만 신전이 서 있었던 단상(19ⅹ19m)과 거대한 돌제단(높이3m, 크기 5ⅹ6m)이 있었습니다. 건물 전체는 베니게 곧 두로와 시돈의 건축 양식이었고, 정교하게 다듬은 돌들로 지진에도 견디도록 벽돌쌓기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발견된 제단은 3m 높이에, 잘 다듬은 돌로 된 계단이 설치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제단을 만들 때 ‘다듬은 돌’이나 ‘층계’를 만들지 말라고 금지합니다(출20:25,26). 따라서, 단의 종교적 부패를 엿보게 됩니다. 비옥하나 저주받은 땅 단은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주전 4세기까지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은, 모세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고 그에 따라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괴되고 받은 땅에서 뽑혀졌습니다. 율법 없는 백성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으며,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재판(再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간직하고 성령님을 따라 걷는 자들입니다(롬8:4).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전도서 3:22절a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배우 김혜자(모태신앙, 권사)는 63년 동안의 친근하고 뛰어난 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또한, 실제의 삶도 굴곡이 없었고, 신앙과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여 후배들의 본이 됩니다. 집안은 유복하였으며, 명문 경기여중·고를 졸업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였지만, 천직을 즐긴 진정한 ‘연기의 프로’입니다. 그녀는 연기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장남(임현식)의 말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연예인이란 타고나야 한다는 걸 옆에서 여실히 느꼈으며,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받은 재능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어느 아나운서는 휴식 중 김혜자 씨가 나무 밑에서 ‘나무아미타불”의 연습을 백 번이나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배우 윤여정은, ’사랑이 뭐길래’를 찍을 때 탈진하였으나, 김혜자 선배는 ‘너 병원가면 모두 기다려야 해 초콜렛 먹고 다시 찍어라’며 자신의 입에 초콜렛을 물려준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김혜자 선생님은 말합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과연 연기에서는 인정사정 없는 ‘늑대’였고 그렇게 그녀는 성공하였습니다. 공자는 논어 옹야 편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설파합니다. 최선의 삶을 살려면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하는데, 배우 김혜자의 삶이 입증합니다. 솔로몬은 수고 중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은 주님의 선물이며(전3:13), 그의 몫임을 강조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매일묵상(2025/7/25-8/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4)
누가복음 8:8절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순천매산학교는 남녀공학인 중학교와 매산고등학교, 매산여자고등학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중학교 운동장 위쪽으로 ‘구레인’관(1921년 교장&선교사 Crane 박사의 한국이름)으로 명명되어 2013년 보수한 본관 건물(3층)이 있고, 그 우편에 일제시대부터 교사로 사용된 ‘매산관’이 있습니다. 매산관은 2층 석조 건물(1916년)로 ‘호랑이돌’이라 불리는 순천 특산 화강암으로 벽을 쌓고 양철 다락 지붕을 올렸습니다. 1999년 6월 경 이덕주 교수의 방문 시, 박종하 교장은 “겉만 그럴듯하지 내부는 병든 암환자 같아요. 학생들은 많고 교실은 적고 혀서 계속 사용하고는 있는디 오래된 건물이라 붕괴 위험에 불안허요. 교사들은 아예 헐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자고 허는디 매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건물이라 헐기도 뭣하고 혀서 어쩔거나 생각 중입니다”는 고충을 토로하였고, 이 교수는 “그래도 순천 근대 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백년 된 건물 하나쯤은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매산관은 2017년 전남교육문화유산 제1호에 지정되었고, 노후교실과 문화재는 보수되었습니다(2020). 십년수목 백년수인 (十年樹木 百年樹人) 이란 말이 있듯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은 백년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이같이 1916년에 건축된 매산관은 100년의 영욕의 세월을 후손들에게 증언하며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는 100년도 찰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신앙유산과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눅4:4).

전도서 3:21절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장 19–21절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죽음 앞에서의 평등성, 그리고 지식의 한계를 묵상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인 21절은 사람의 혼은 위로, 짐승의 혼은 아래로 간다는 사후 존재의 주장에 의문을 던지며,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강조됩니다. 본절의 초점은,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의 혼의 방향과 상관 없이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허무함에 있습니다. ‘혼’은 ‘루아’의 번역이며, ‘ 숨 혹은 숨결’을 뜻합니다. 인간의 ‘루아’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 간다는 표현은 12장 7절에 반복되며, 욥기와 시편(욥 34:14-15; 시 104:29-30)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루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관찰에 근거하여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전도자 역시 ‘누가 알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이에 반해 주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선포하십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평등성만 알고, 죽은 후의 무지를 고백하나, 주님은 죽은 후에 부활이 있으며, 도덕적 책임과 영원한 결과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철학)과 계시인 성경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질문은 구약에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새번역).  

전도서 3:22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1-15절은 받은 분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16-22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의와 죽음의 문제를 성찰한 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라고 교훈합니다(22). 비록 불의나 죽음을 깊이 성찰하면 인생의 덧없음과 무력함을 뼈저리도록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현재를 모조리 부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현재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도 보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람직 함을 논합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아울러 갖고 있기 때문에,  양 요소의 조화를 이루어야 바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그 열쇠는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분은 불의를 완전히 심판하실 분이라 약자는 공의의 심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음 역시 그분의 창조물이라 모든 인간은 사망을 영원히 폐하실 그 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란 소망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다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구약의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어, 그의 논의는 죽음과 삶의 모순적 긴장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죽음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니, 불신자에게는 심판을 뜻하고, 신자에게는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5,26)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신전
열왕기상 12 : 28절
“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어서, 요시아 왕은 유다 성문들에 있는 산당을 헐어버렸습니다(열하23:8). 단의 성문에도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돌들 앞에는 제물을 위한 긴 탁자 형태의 돌이 놓여 있어서, 이 돌들은 우상으로 판단됩니다. 왜 우상일까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920년 경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하였고,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유다임금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일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고심하다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열상11:38)을 버리고, 자신의 꾀를 따릅니다. 그것은 단(북쪽)과 벧엘(남쪽)에 각기 신전을 세우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물론, 단과 벧엘은 나름대로의 종교적, 역사적 자취들이 남아 있는 곳이나,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400년 만에 예배처소로 확립된 예루살렘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신탁을 받고, 그 신탁의 성취로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두 번이나 맞닥드립니다. 이때 다윗은 계명을 따르고 망명이라는 고난을 선택하여 결국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스스로 두려워 하면서 자신의 꾀를 따라 우상의 길을 선택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가 올 때, 여로보암이 아니라 다윗이 선택한 계명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핵심으로 정의되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영적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사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독생자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자아성취도, 자기실현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가까워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예31:33). 이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이웃 사랑은 세상의 이웃 사랑과 다릅니다. 그들의 이웃에는 ‘원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하신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선포되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깨닫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모든 진리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사람이 아니다”(롬8:9)라는 사도의 선포는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매일묵상(2025/7/21 – 25)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3)
요한복음 12: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916년 기독계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를 폐쇄하고 5년 뒤 재개하였던(1921년) 순천 선교부는 일제 말기에 다시 수난을 받습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왔을 때 타협을 통한 생존보다는 폐쇄를 통한 거부를 택했습니다. 광주나 목포, 전주, 군산 등 다른 남장로회 선교지역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매산학교도 1937년 9월 학교 폐쇄를 단행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날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이 ‘폐교예배’를 드리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렇게 매산학교는 죽었습니다만, 8년 뒤 해방이 찾아 왔습니다(1945). 돌아 온 선교사들은 최정완, 김형모, 나덕환, 고려위, 김원식 등 순천노회 지도자들은 함께 노력하여 1946년 9월 학교를 재건(매산중학교)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두 번의 학교폐쇄로 매산학교는 얻거나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학교 교육의 목표는 지덕체의 조화로운 완성입니다. 지식은 학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고 전제하면, 덕을 함양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덕의 기본은 정직과 사랑입니다. 신사참배의 강요 상황에서 선교부는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정직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실패였으나(선교사 추방, 학교폐쇄), 영적 도적적 민족적 관점에서는 성공으로, 순천매산학교는 죽음으로 신앙 유산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복음의 기본속성에는 원수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복음의 핵심이며 덕의 최고봉입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전도서 3:19절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은 인간의 돌봄이 없으면 오염된 먹이나 물을 먹고 병들어 죽는 등  불이익을 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돌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이자 직분입니다(사랑). 그러나 동물은 인간과 다르므로 연구와 경험을 요합니다. 사자의 표호를 한 번 들으면 누가 사자 옆에 가고 싶겠습니까만, 맹수 사육사는 그 위험한 사자가 좋아 사육사 직업을 택하며(애착), 수의사는 싫어도 사자의 병을 치료해야만 합니다(책임). 인간은 동물을 돌보면서 창조주의 지식을 터득하지만, 또한 그분의 메시지를 함께 받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동물도 인간과 같이 죽을 운명이나, 인간은 자신의 죽음도 짐승의 죽음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통해 솔로몬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을 짐승도 당한다”는 현실을 겪고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 없음을 탄식합니다. 즉, 죽음은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일반이지만(2:12-17), 인간과 동물에게도 일반입니다. 절대 강자인 죽음은 지혜자와 우매자, 인간과 짐승을 동일한 평면에서 처리합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배운다면 겸손하여,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나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으뜸이라 생각하며- 특히 권세, 지혜, 재물을 가진 자들 –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 허무한 종말을 맞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허무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전도서 3:20절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본문은 인간과 동물의 운명이 같음을 그들 모두의 출처와 종착지가 동일함을 통해 밝힙니다. “…으므로…으로”에 해당하는 ‘민…엘’은 ‘∼로부터 ∼를 향해’(from ∼ to)라는 의미로 인간과 동물의 생명의 ‘기원과 끝자락’을 알려줍니다. 이들의 기원과 끝이 모두 흙이라는 인식은 인간의 연약함을 분명하게 각인시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만하며 탐욕을 부려 싸우지만,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 육신의 정욕, 세상적 야망과 명예욕, 재물에 대한 탐욕 등의 허망함을 깊이 인식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절망이나, 다른 면에서는 우리를 위의 것, 즉 하나님과 그분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시편기자는 토로합니다. 시편기자가 주님의 법을 배우고 길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시편119:71). 살다보면, 자신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붙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만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주님 사랑하는 자들은 회개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후회와 고집으로 귀결됩니다. 전자는 생명을 갖고 후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선포하는 복음은 오늘의 교훈을 넘어서는 신약의 계시로서, 심판자는 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2:13-16).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9)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단
룻기 4 : 1절
“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아합 왕 시대(BC 8세기 중엽)로 추정되는 ‘단’의 성문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문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졌고 바닥은 돌로 포장되었습니다. 거대한 성문은 뜰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다른 사각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7개의 탑과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구조물에 도착합니다. 이 구조물을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뜰이 나오고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본 성문을 만납니다. 성문을 지나면 넓은 도로를 지나 시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목할 구조물은 뜰의 북서쪽에 있는 단상이며 돌을 직각으로 잘 다듬어 쌓았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경에서 성문에 올라가 회합을 주도한 이들-왕 혹은 재판장 등 -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자리로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는 단상을 둘러싼 각 코너에 시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둥근 기둥 받침입니다. 아마도 단상의 네 귀퉁이의 받침 위에는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는 자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지붕을 받치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자들이란 성문 위가 아니라 성문과 접해 있는 이런 구조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본문도 보아스가 거기에 앉아 있다가 더 가까운 친족 ‘아무개’를 만난 후, 적법하게 룻의 고엘(=친족구속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 믿음만 강조하지 말고 지혜를 다하여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골4:5,새번역)

잠언 3: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 풍부한 자원, 넓은 영토, 인구도 4천만 명으로 괜찮지만, 세계 최빈국입니다. 러시아와의 분쟁, 친러 성향의 주민과의 내전, 유럽 제 1위의 부패 등을 이유로 꼽으나, “자원의 저주” 라고 생각됩니다. 일찍 왕이 된 솔로몬은 왕권의 불안요인을 지혜롭게 제거합니다(왕상2:46). 3년의 통치 후 재판할 지혜의 부족을 절감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예루살렘에서 북서쪽 12킬)으로 갑니다. 재판할 지혜에 대한 소원을 품고 일천번제를 드리자, 주님은 현몽하사 ‘내가 무엇을 줄까?” 물으십니다. 마치 유명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선택하도록 하여 수준을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처럼, 솔로몬은 즉각 그러나 겸손히 ‘듣는 마음’을 요청합니다. 맡겨진 백성들을 공의로 판단할 지혜를 요구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였습니다. 재판할 지혜만 주시면 되시는데 주님은 선한 하나님이시라, 장수를 제외하고 이것저것을 다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명성은 천하에 퍼지고 많은 재물과 권력을 얻지만, 그는 받은 지혜를 모세 율법의 한계 내에 두지 못합니다(신17:14-20). 끝내 권력, 재물, 여자는 솔로몬의 경건한 지혜를 이기고 타락시킵니다. 신자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 하며 거기에 적당한 명예, 재물, 권력 등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면 고난도 감수할 지혜와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이란 단어는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고 간절한 기도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

매일묵상(2025/7/14-18)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2)
데살로니가후서 3: 1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십시오.”(쉬운성경)

본문은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 중에 재림신앙을 오해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려는 메시지입니다. 신자는 수고없이 얻은 게으른 양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1921년 재건된 순천 매산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뉘어 보통과는 순천지역 교회들이 고등과는 선교부가 각각 책임졌습니다. 남학교(교장 크레인)는 6개월 사이에 학생이 183명으로 늘었고 여학교(교장 비거)도 발전하여 학교 안에 여자성경학원과 유치원도 설립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실업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노동을 천시하는 “양반의식”을 교정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스스로 벌게 하는 2중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1916년 학교가 폐쇄되기 전에 이미 여학교는 ‘단추공장’을 만들어 동양식 수예 꽃단추를 미국에까지 수출하였으며, 재건 후에는 남학교에 철공장을 만들어 그릇과 생활 용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1929년 9월에는 엉거 교장이 미국에서 ‘친칠라 토끼’를 가져와 학교 안에 ‘양토장’을 만들었고, 이어 뉴질랜드 화이트종, 앙골라종도 들여와 매곡동 언덕엔 대규모 토끼 사육장이 조성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사육한 토끼털과 가죽은 미국으로, 고기는 학생들의 영양식이 되었습니다. 선조들은 공부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3:12)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였으나, 이것을 막스주의자는 자본가에게,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각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복음의 맥락을 떠나면 잘못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행태입니다.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언31:27).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6,17절에서 전도자는 재판과 행정통치의 영역에서조차 불의가 존재함을 탄식하지만, 언젠가는 내려질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지만, 이어 죽음이란 보편적 사실을 다루고 삶의 허무를 피력합니다(18-20). 이런 주제의 전환은 “왜 지금 당장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사색 과정의 산물입니다. 그 대답으로 18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 임을 밝히고, 만약 공의가 상실된다면 약육강식의 동물과 같은 사회로 전락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먼저 전단의 “그들을 시험하시리니”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험하다’란 원어는 ‘빠라르’이며, ‘시험하다, 택하다, 깨끗이 하다, 밝히다’는 다양한 뜻을 가집니다. 만약 ‘밝히다’라는 의미로 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면을 드러내어 밝힌다고 해석 되고, ‘택하다’의 경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험하다’로 보아,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시험의 목적은, 후단에 기술된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짐승과 유사한 측면이 많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확장되고 이 세상에서 이웃에게 뱉은 한 마디의 욕도 지옥불의 심판이 선포됩니다(마5:22).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에 기반을 둔 행실로 옷입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전도서 3:18절 하나님의 시험 (2)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본문 후단은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직접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의 원어는 ‘웰리르오트’로서, 단순히 ‘깨닫다’가 아니라 ‘깨닫게 하도록 만든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사람이 짐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문장 끝에는 ‘헴마 라헴’이란 히브리어 표현이 있는데, 개정개역에서는 ‘그들이 자기가’로 앞에 두어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스스로’라는 재귀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이 이성과 도덕을 가져 짐승과 구별된다고 생각하나, 호흡이 끊어지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 죽기에 인간 역시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절망’해야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을 시절에는 자신의 실력과 힘에서 절망을 느끼고, 늙어서는 인생 무상을 느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자신이 세운 우상들,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 바로 앞 감람산 중턱에 세운 우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상들은 여호사밧도 히스기야도 처리하지 못했고, 300년 뒤 요시야 왕 때 부수어집니다. 그 만큼 우상 숭배 -영적으로는 탐심, 자녀, 재물, 번영, 쾌락, 권력 등-는 뽑아내기 무척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데,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다투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사사기 20: 1절
“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본문은 범죄한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고자 모인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기록으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란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 이후 이스라엘 경계는 최북단은 ‘단’이란 도시였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은 ‘브엘세바’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삼하24:2), 솔로몬,(왕상4:25), 히스기야 시대에도 전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대하30:5). 구약 시대에 단은 북쪽에 위치한 아람을 대비하는 요새였으며, 현대사에서도 단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접전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단의 정치적 성격은 고고학 유적지에 잘 드러납니다. 이 ‘단’에서 아브라함의 성문 외에, 다른 성문이 발견되었습니다(BC9-8세기 추정). 이 성문은 진흙벽돌의 아브라함 성문과는 달리 돌로 건축되었는데, 아합의 건축으로 보입니다. 본문 사건 750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경계를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15:18)로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불순종 때문에 도달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면, “애굽 강 시내부터 유브라데까지” 지금도 다스렸을 것이나, 오히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도 몇 백년 소유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입니다(엡2:10). 따라서 선(하나님의 뜻)을 심고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잠언 18:12절- 그리스도인의 겸손
“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어느 궁중요리 연구가는 자신이 전수받았던 궁중요리 조리법을 책으로 남기고 제자를 키우게 된 이유는 그것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어느 날 자기가 기억한 대로 조리한 음식 맛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아이굿뉴스, 유선명). 자신의 노력 실력 등은 물론 기억조차 믿을 수없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타인의 의지와 선택, 예측불허의 환경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시작과 끝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는 말씀은 적절합니다. 그러나, 겸손을 통해 얻는 것을 세상의 부와 존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도덕경이나 논어의 가르침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책망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존귀를 얻더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살았으나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전9:11),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열심에 부요합니다. 이것이 자족을 따르는 신자의 겸손입니다. 반면 솔로몬처럼 세상에서 지혜와 부요를 가져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세상에서의 겸손과 달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5:12).

매일묵상(2025/7/7-11)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순천 매산학교(1)
사도행전 16: 37절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본문은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가 무시받지 않도록 로마사람이란 신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순천 매산학교는 교인 자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1912), 크레인(남학교 담당)과 더피(여학교 담당) 선교사가 부임히여 학교체계를 갖추었습니다(1913). 1915년 총독부가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시키자 학교는 자진 폐쇄하였다가, 3.1운동 후 종교교육을 허용하자 학교를 재개하였습니다. 1920년 순천 선교부 재정 후원자였던 미국인 왓츠 장로가 내한, 총독부를 찾아가 학교 재건을 촉구한 것이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강대국 미국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겪고 1921년 4월 15일 ‘매산 남학교’, ‘매산 여학교’란 명칭으로 학교를 재개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오히려 ‘왓츠남학교’와 ‘왓츠여학교’라 불렀습니다. 바락은 사사 드보라의 명을 받고 다볼 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백승을 갖고 기손강에서 대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명 1만명을 이끌고 전차부대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바락은 순종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는 기손강 상류에 내린 폭우로 철병거는 떠내려가거나 진창에 빠져 보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환경과 국제정세 모두를 사용하시므로 복음을 전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믿음과 지혜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 기회를 최대한 잘 사용하십시오.”(골4:5,쉬운성경).

전도서 3: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3:1-15절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논한 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신 복을 누리라고 권고합니다. 이어 16-22절은 죽음과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는, 결론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본절은 정의가 행해여야 할 재판과 통치의 영역에도 악이 존재함을 탄식합니다. ‘재판하는 곳’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장소요, 악을 벌하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곳’은 ‘재판하는 곳’과 같은 의미로도, 혹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리들의 영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타당하나, ‘거기에도’란 표현이 반복됨을 볼 때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악은 사법이 시행되는 곳에서부터 행정적인 직무를 시행하는 곳까지 편만하게 번져 있음을 보자, 솔로몬은 ‘거기에도’란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정의가 서지 못하였음을 크게 개탄합니다. 그 당시도 권력과 뇌물 등으로 불공정한 판결과 행정이 이루어졌는데, 어디 그 시대 뿐입니까?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구조 자체가 악한데 의인이 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의인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이 교훈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억울한 일은 주님이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그것도 ‘속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전도서 3:17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본절에서 솔로몬은 부조리한 인간 법정을 보면서(16),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는 무고한 자가 벌을 받고 죄인은 방면되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때가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정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또한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해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여 믿음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가지되,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신다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제국의 횡포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그렇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언제까지 들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쳤는데도 어찌하여 구해 주지 않으십니까?… 율법이 효력을 잃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재판이 잘못 진행되고 있습니다.”(하1:2-4). 이때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판에 관한)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2:3)고 답변하셨습니다. 2,500년 전 하박국 선지자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살았듯이, 신자는 갈등의 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브라함의 성문
창세기 14:14절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단’의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 경입니다. 놀라운발견은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입니다(BC1800년경).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등에서도 발견된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으로,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남아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km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려 성을 보호하였습니다. 3년 동안 1,000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문의 사용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와 유사해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문에 ‘단’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단’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따라서, “단”은 아브람 시대에는 “라이스”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 후대에 그 당시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참조삿18장). 지명 변화는 독자가 본문을 어느 시점에서 읽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예루살렘”은 초기에는 “여부스”로 불렸지만, 다윗이 정복한 후 “예루살렘”이 되었고, 이후에는 종말론적 평화의 도시로 해석되곤 합니다. 이같이 지명 변화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역사·문화·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문서처럼,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10년 전 라오스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낡은 소련군용트럭 도이싼크앙(라오스어로 산골트럭의 의미)을 몰고 생계를 유지하던 운전기사의 이름은 핫( 42살)입니다. 그는 시속 20km 속도로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만물을 배달합니다. 그의 걱정은 새로운 포장도로가 계속 들어서는 것입니다. 도로가 포장되면 좋은 차들이 다니기 때문에 자신의 일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트럭 배달일을 하면서, 핫은 장사의 의미를 터득한 것 같습니다. TV에서 보여주는 핫은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상즉인(商卽人) –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란 상도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명언입니다. 또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정직을 추구하는 그의 명언입니다. 사업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돈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낳는 것입니다. 돈이란 상대방을 섬기면 자연히 들어옵니다. 그것이 좋은 돈이며, 좋은 돈을 버는 것이 사업의 본질입니다. 그 반면, 돈은 마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신뢰하지 않으면, 경제적 편익에 초점을 두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고려하지 않는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생각 없는 경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의 삶에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참된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잠언 본문이 그 정답을 알려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매일묵상(2025/6/30-7/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요한복음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결핵 선교사” 휴 린턴은 1984. 4. 10일 농촌 교회 건축자재를 싣고 귀가하다 순천시내에서 음주운전 버스와 충돌하여 의식을 잃었고 택시로 광주기독병원으로 이송 중 숨졌습니다(58). 당시 응급차 제도는 없었습니다.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만 있었더라면…..”  린턴 집안사람들은 응급 시설을 갖춘 구급차를 미국에서 특별 제작하여 들여왔습니다. 마침 린턴의 막내아들 존 린턴(인요한, 1959-)이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3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119구급차’ 제도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실로 휴 린턴의 죽음은 생명을 살리는 제도적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린턴 가문은 외증조 할아버지 유진 벨의 내한 100주년되는 1995년, ‘유진벨100주년기념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 재단 이사장은 휴 린턴의 둘째 아들 스테판(인세반, 1950-)입니다. 그는 1979년부터 북한을 도왔는데, 재단 설립 후에는 북한의 결핵퇴치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1950-60년 대 남한에서 맹위를 떨치던 결핵균이 지금 헐벗고 가난한 북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천초등학교,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Ph.D)한 바 있습니다. 린턴 가문은 신앙, 의학, 인도주의, 교육, 남북 화해라는 키워드로 ‘대를 잇는 선교 헌신’의 모범을 한국민들에게 130년 동안 비추었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전도서 3:15절 (1)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본절은 14절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성’을 진술하지만, 강조하는 바는 다릅니다. 14절의 초점은 피조 세계의 무상과 허무이고, 본절의 초점은 하나님의 통치 본질과 신적 질서의 불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전에 있었던 것 그것이 무엇이냐? 이미 그것은 있으며 장래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가 됩니다. 전도자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섭리의 영원성, 불변성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며, 특히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이 잘 드러냅니다. 본절에 나오는 ‘옛적’, ‘이제’, ‘장래’라는 표현은 인간의 시간적 한계를 뜻하지, 하나님을 구속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모두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다같이 현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주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와 미래에도 반복하여 일어남을 전달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미리 정해진 순환과 반복 속에 있어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했던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마치 켜진 등불이 빛을 내어 집안 모든 사람을 비추듯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악인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악인에게 벌이 신속히 임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때 의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6).  

전도서 3:15절 (2)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다시 찾으시느니라’에 해당하는 ‘예박케쉬’는 ‘찾다’ ‘수색하다’의 동사 ‘빠카쉬’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하여 집요하게 찾는다’는 의미인데, ‘지난 것’ 혹은 ‘박해당하는 자’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 ‘라다프’와 결합하여 두 가지 해석을 낳습니다. (1) ‘지나간 것’이란 입장: 하나님은 지난 일들을 반복하심을 뜻한다. (2) ‘박해당하는 자’란 입장: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즉, 하나님께서 박해받는 자를 돌보시고 악인을 벌하심을 의미한다. 이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하나, 문맥은 하나님의 공의보다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전자가 타당합니다(개정개역).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과거, 현재, 미래란 모두 현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고대 3대 통치자로 알려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바벨론 성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교만한 말을 내뱉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심판하는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는 정신이상이 되어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됩니다. 7년 후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이 돌아왔고,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경배하노니”(단 4:34–37)라는 고백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권력에 취했던 느브갓네살은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 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전12:13,쉬운성경)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라이스
사사기 18: 29절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레셈 혹은 라이스 지역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조카 롯을 구하려고 헤브론에서 이 도시까지 쫓아와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무찌른 바 있습니다(창14:1-14). 라이스는 풍부하였기에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삿18:7). 그 이유는 먼저, 단 샘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땅이 비옥하였고,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해변의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의 일부는 가나안 원주민의 텃세에 밀려 살 곳을 찾던 중 이 성을 뻬앗아 거주하고, ‘단’이라 불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재기에 성공한 것입니다(수19:47;삿18:29). 전쟁 과정은 사사기 18장에 자세히 나오는데,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단 자손은 미리 보낸 정탐꾼이 보아 두었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함께 데리고 라이스로 가서 그 신상을 세워 거주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으로(삿18:25),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후손 일부는 몰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실로에 있던 시대에, 단 지파는 미가가 만든 새긴 우상을 섬기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5백년 후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여호와)이라 선포하고 단과 벧엘에 두었으니, 북이스라엘 백성도 계명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주의해야 할 우상은 탐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갈라디아서 6:8절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쉬운성경)

2025/6/26일 언론은 일제히 “제프 베이조스가 약혼녀 로렌 산체스와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흘간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전 세계 유명 인사 약 20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하였고, 결혼비용은 약 5600만달러로 추산됩니다. 베이조스(1964년생)의 재산은 약 2천억달러(273조원)라 합니다. 배우자가 될 여자는 전 폭스 TV 앵커인 로런 산체스(1969)로 에미상을 수상하였으며, 베이조스가 설립한 블루오리진에서 항공촬영 업무 수행하며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결혼 경력이 있습니다. 베이조스는 전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1명의 양녀(중국소녀)를 두었고, 산체스는 두 전 남편들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두 사람은 가정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인생은 성공하였다고 자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즉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열매입니다. 성경적 기준에서 두 사람은 파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재물을 믿고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였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입니다. 포도나무가 아름다운 포도를 맺듯이,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려고 힘쓰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요, 영원한 생명을 넉넉히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매일묵상(2025/6/23-27)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린턴 가문의 ‘결핵 선교’
마태복음 10:12절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본문은 열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 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부여하신 뒤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대목입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병원-학교-교회’ 삼각 전략을 통해 한국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대표적인 열매는 한국 최초의 미국 문학사 하란사(1875-1919)입니다. 그는 기혼녀로서 이화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는 중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한편, 휴 린턴이 세운 순천기독진료소는 6.25 전쟁 후 급속히 늘어나는 결핵 퇴치에 큰 공헌을 합니다. 순천기독진료소의 건물은 2층으로 왓츠 장로의 헌금(7천불)과 스와인하트 건축선교사의 작품입니다. 휴 린턴은 윌리엄 린턴의 3남이자 의사 인요한의 부친입니다.1926년 군산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강제 추방되었으나, 1953년 한국 선교사로 다시 와서 순천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휴 린턴은 시골을 돌면서 교인을 돌보다 치료받지 못해 숨져가는 결핵 환자들을 보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우선 약을 먹여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여러 병원과 함께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고, 자신이 직접 의료진을 데리고 환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환자들에게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료소로 데리고 와서 부인을 통해 치료하였으니, ‘결핵 선교사’라는 그의 별명은 정당합니다. 휴 린턴은 교통사고로 소천합니다(1984).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휴 린턴은 결핵환자를 보고 그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3:12)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영원성을 언급한 전도자는,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사람이 더 할 수도,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다는 완전성, 완결성, 충분성을 강조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그 행하시는 일 역시 완전하여 가감이 필요 없는 것은 물론 결코 가감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의 창조자이며 보존과 섭리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울면서 마속을 참하다”(읍참마속(泣斬馬謖)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아끼는 부하 마속을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처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삼국지의 일화에서 나왔습니다. 책임자 마속은 부장 왕평의 반대에도 성이 아니라 산에 진을 폈으나, 뒤늦게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습니다. 마속은 ‘병법의 금기—높은 곳을 점해도 보급과 배후가 불안하면 취약하다’는 교훈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양쪽 군대의 지혜자 제갈량이나 사마의의 기준에서 보면 마속은 그야말로 우장입니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가장 어리석은 자는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모두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편19:7)

전도서 3:14절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법칙과 그분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탄생, 노화, 병, 죽음, 성공, 실패, 사랑, 미움 그 어느 것 하나 인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전도자 역시 그 진리를 고백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주어진 복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아가야 하나(전9:7-10),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경외’의 원어는 ‘야레’로서, ‘두려워하다, 위엄있다’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갖지만, 기본적으로 존경과 사랑에 토대를 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보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사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분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쏟다가 광야에서 멸망 당하였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은 돌보아 주심을 믿고 소망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차이인데,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롬5:5).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단
창세기 49:16절
“단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처럼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현대인의성경)


1830년 대 미국의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이스라엘을 직접 답사하면서 수많은 성경 속의 도시들을 밝혀냈습니다. 그중 헬몬 산 폭포 옆의 ‘텔 엘-카디(= 심판의 언덕)’로 불리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19:4) 혹은 라이스 땅(삿18:1)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인 텔 엘-카디가 성경의 ‘단’ 지역이고, 요단 강 이름의 어원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즉, ‘단’은 심판의 뜻이라(창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과 유사하며, 옆의 폭포는 요단 강 수원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단 강은 히브리어로 ‘야르덴’ 강입니다. ‘내려오다’라는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의미입니다. 수원은 ‘단, 헬몬, 스닐’의 샘 3개인데 그중 단 샘이 가장 큽니다. 본문은 야곱의 임종 시 아들 단에 대한 예언입니다. 단은 라헬의 시녀 빌하의 후손이나 야곱은 정식 지파로 인정하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시 단 지파는 소라, 에스다올, 에글론, 욥바(현대의 야파) 등의 블레셋 지역을 배정 받았습니다(수19장). 단 지파는 용감하였지만(삼손), 블레셋의 강력한 저항철 병거로 인하여 그 일부가 ‘텔 엘-카디’(라이스)로 이주하여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삼고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삿18:30,31).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

전도서 3:9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는 성공한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과 재능을 넘어선 환경적 요인(문화와 사회적)의 중요성을 주목합니다. 그의 여러 사례 중 ‘랭건과 오펜하이머’의 비교는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과학적 재능은 비슷하였지만, 랭건은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말목장 주인으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맨하튼 프로젝트를 이끈 관리자로서의 명성까지 얻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10,000시간을 쏟으면 얻어지나, 그 전문성을 발휘할 사회와 문화의 테두리를 얻지 못하면 평범하거나 실패한 삶을 살아간다는 결론입니다. 중용되려고 13년을 돌아다닌 공자 역시 실패해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가정적 환경과 개인의 노력이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각 어느 정도일까요? ‘운칠기삼(運七技三)’이 적절합니다.「요재지이」(포송령 작)는 그 유래를 말합니다. 한 선비가 계속 과거에 떨어지자 옥황상제에게 따집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니 전자는 3잔, 후자는 7잔을 마셨습니다. 옥황상제는 선비를 불러 세상만사는 7할은 운명에, 3할은 운수에 지배되는 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나, 운수로 표현되는 기회와 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열심히 그릇이 되고, 하나님은 그 그릇 중에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릇도 중요하나, 주인의 선택은 더 중요합니다. 문제는 희생과 섬김이 필요한 곳을 위한 그릇은 하나님이 언제나 선택하시나, 주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 이외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2:27)  

매일묵상(2025/6/16-20)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원탁회
야고보서 1: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940년 말, ‘신사참배’에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한 뒤, 일제는 밀정을 풀어 순천 노회 소속 목사들의 행적을 주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알렉산더병원 서무과장으로 있던 황두연 장로가 순천중앙교회 청년들을 모아 ‘원탁회’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경찰은 수상하게 여겨 회원 강창원의 집을 수색,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라는 일기를 압수하고 지도자 황 장로를 체포합니다. 또한, 천년왕국을 선전한 혐의로 당회장 박용희 목사 역시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회의 목사들 18명 중 14명을 ‘재림 신앙’을 설교했다 하여 구속합니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각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고, 특히 양용근 목사는 ‘옥중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순천 노회 소속은 아니나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와 은퇴 후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이기풍 목사도 신사참배 문제로 구속 중이었으니 당시 순천노회에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순천중앙교회 앞마당에 있는 ‘추리 나무’ 두 그루는 암울했던 시절 교회와 노회가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도대체 신앙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는 왜 있어야만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주님의 영적통치전략의 일환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낸 교회와 신자는 후대를 위하여 ‘금보다 귀한 믿음’(벧전1:7)의 유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벧전1:6,7), 바울(롬5:3-5), 야고보(약1:2,3) 세 사도 모두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전도서 3: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최선의 삶이란,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12)과,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림”이 들어 있는 삶이나,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로서(13),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누리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전도자는 신은 죽었으니,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성실하고 용기있게 살아가자는 니이체의 초인사상과 결별합니다. 제자의 삶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과 2:24절은 유사합니다. 한편, ‘낙’은 히브리어 ‘토브(=좋음)’의 번역으로, 여기서는 ‘만족’을 뜻합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함을 따르는 만족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교제의 삶의 필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제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다’라는 표현은 가족, 친척, 동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며 즐거워 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전도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각시킵니다. (2) 섭리와 즐거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무시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거나, 욕망을 채우려는 ‘수고’는 헛되나(3:9),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행하는 ‘수고’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 옵니다. 또한, ‘수고’ 없는 게으른 삶,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삶은 성취감과 만족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제자의 삶은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영적 제사장의 삶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전도서 3:14절(1) 하나님의 섭리의 영원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최선의 삶의 자세’를 논한(3:12,13) 전도자는,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그 근거를 찾은 뒤, 그분에 대한 ‘경외’를 강조합니다. 전단은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히 존재하고, 유한한 인간은 거기에 가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3:1-8), 그 안에서 행하시는데 이러한 방식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본절은 동사 ‘행하시는’을 미완료시제로 써서 계속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원까지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음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여 염려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그분의 계명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루시고, 고난의 밤 중에 우리가 행한 선들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십니다(시37:5,6). 이때 하나님은 즐거워 하십니다. 인내를 믿음의 핵심요소로 꼽는 이유입니다(히12:1-3). 불순종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흘 후에 나오자 곧장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자, 니느웨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그 성은 구원받습니다. 요나는 매우 실망하나, 이는 단순히 니느웨 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사건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예수의 부활, 회개와 구원을 증거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갈릴리
누가복음 5: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 21km 너비 13km 전체 둘레는 53km이며 깊이는 43m입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만을 나눈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계곡에 위치해 있어 해수면이 해저 210m에 이릅니다. 덕분에 산으로 둘러싸인 온화한 기후를 갖고 강우량(평균 900∼1200mm)과 꽃, 나무도 많아 아름답습니다. 북쪽의 헬몬 산이 수원이며 남쪽으로 흘러 호수를 이루었고, 호수 남쪽에 접한 요단 강(100km)을 통해 사해까지 미칩니다. 구약은 이 호수를 ‘키노르’(=하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긴네렛(민34:11)으로 불렀습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삼각형 모양이며 고대 근동의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신약 시대는 게네사렛(눅5:1)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기노사르’가 어원으로 아마 계곡이란 지형적 모습을 따른 것 같습니다. 또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요6:1)로 불리기도 하는데,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여 만든 해변 도시 디베랴에서 유래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가나안 우상숭배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사야의 증언처럼(사9:1,2) 갈릴리 지역은 많은 고통을 받았으나, 그 고통 받은 지역에 주님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먼저 복음의 주무대로 삼습니다. 복음을 간직한 제자들이 배워야 할 지혜와 능력이며 또 사명입니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됐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요한복음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을 때, 미모의 외사촌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라반에게 7년 간 노동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라반은 좋게 여겨 승락하니, 야곱은 그 고된 머슴살이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창29:20). 사랑하는 라헬과 함께 세워갈 가정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왜  주저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겠습니까?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고 경영하실 기반들을 가진 성, 즉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신앙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과 소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소망과, 자신의 후손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갖고 100년을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중에 쟁점으로 떠오른 아브라함을 다룹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선언하시며, 자신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다가, 돌에 맞을 뻔하셨죠!(요8:57-59). 그러나 주님은 부활로써 확증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쁨으로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